中华十大名胜古迹

“中国十大名胜古迹”是指1985年由中国旅游报社发起并组织全国人民于当年9月9日评选出的万里长城、桂林山水、杭州西湖、北京故宫、苏州园林、安徽黄山、长江三峡、台湾日月潭、避暑山庄、秦陵兵马俑等十个风景名胜区。


一、万里长城(만리장성)

万里长城是中国古代民族关系发展的产物,但对于长城南北民族关系内在发展规律的研究尚不充分。总结已有的研究成果,拓宽研究领域,揭示长城与中国民族关系发展的内在联系,登上城楼,可以体会到大漠孤城的苍凉,可以尽览崇山峻岭的壮丽景色,看到碧波万顷的大海和蜿蜒的长城,景色雄伟。


二、桂林山水(계림산수)

 桂林是一座文化古城,是世界著名的风景游览城市和历史文化名城。两千多年的历史,使它具有丰厚的文化底蕴。这块古老而美丽的土地孕育了富饶的文化,深深地吸引着中外游客以及国家元首纷至沓来,流连忘返。和风吹拂中的漓江,流云漫漫,风中摇曳的茸茸灌木和小花,远远看去,若美女身上的衣衫,千峦百蟑,尽人眼帘;明月之夜,群峰如洗,江波如练,若置身空灵境界,清远无限。


三、杭州西湖(항주서호)

杭州西湖杭州西湖位于浙江省杭州市西部, 杭州市市中心,旧称武林水、钱塘湖、西子湖,宋代始称西湖。西湖是一个历史悠久、世界著名的风景游览胜地,西湖的美在于晴天水潋滟,雨天山空蒙。无论雨雪晴阴,无论早霞晚辉,都能变幻成景;在春花,秋月,夏荷,冬雪中各具美态。西湖不仅独擅 西湖之景山水秀丽之美,林壑幽深之胜,且更有丰富的文物古迹、优美动人的神话传说,把自然、人文、历史、艺术巧妙地融为一体。



四、北京故宫(북경고궁)

北京故宫,又名紫禁城,位于北京市中心,今天人们称它为故宫,意为过去的皇宫。无与伦比的古代建筑杰作,世界现存最大、最完整的古建筑群。被誉为世界五大宫之首。故宫以显示皇帝的威严,震慑天下。后部内廷庭院深邃,建筑紧凑,东西六宫自成一体,各有宫门宫墙,相对排列,秩序井然,再配以宫灯联对,绣榻几床,都是体现适应豪华生活需要的布置。后苑里有岁寒不雕的苍松翠柏,有秀石迭砌的玲珑假山,楼、阁、亭、榭掩映其间,幽美而恬静。 故宫是中国古代建筑艺术的精华。它标志着中国悠久的文化传统,显示着五百多年前匠师们在建筑上的卓越成就。



五、苏州园林(소주원림)

苏州园林是指中国苏州城内的园林建筑,以私家园林为主,起始于春秋时期的吴国建都姑苏时(公元前514年),形成于五代,成熟于宋代,兴旺于明代,鼎盛于清代。1997年被列入《世界遗产名录》。有“人间天堂,园林之城”的美誉。这里素来以山水秀丽,园林典雅而闻名天下,有“江南园林甲天下,苏州园林甲江南”的美称。 闻名遐迩的苏州园林采用缩景的手法,给人以小中见大的艺术效果,为苏州赢得“园林之城”的美誉。



六、安徽黄山(안휘황산)

黄山位于安徽省南部黄山市境内(景区由市直辖)。为三山五岳中三山的之一,有“天下第一奇山”之美称。1990年12月被联合国教科文组织列入《世界文化与自然遗产名录》,黄山群峰林立,有七十二峰素有“三十六大峰,三十六小峰”之称,主峰莲花峰海拔高达1864米,与平旷的光明顶、险峻的最高峰天都峰一起,雄居在景区中心,周围还有77座千米以上的山峰,群峰叠翠,有机地组合成一幅有节奏旋律的、波澜壮阔、气势磅横、令人叹为观止的的立体画面。


七、长江三峡(장강삼협)

三峡是万里长江一段山水壮丽的大峡谷,它西起重庆奉节县的白帝城,东至湖北宜昌市的南津关,由瞿塘峡、巫峡、西陵峡组成,全长191公里。它是长江风光的精华,神州山水的瑰宝,古往今来,闪烁着迷人的光彩。长江三段峡谷中的大宁河,香溪,神农溪的神奇与古朴,使这驰名世界的山水画廊气象万千。三峡的一山一水,一景一物,无不如诗如画,并伴随着许多美丽动人的传说。



八、台湾日月潭(대만일월담)

日月潭位于南投县鱼池乡水社村,是台湾唯一的天然湖,由玉山和阿里山之间的断裂盆地积水而成。湖面海拔760米,面积约9平方千米,平均水深30米,湖周长约35千米。日月潭四周群山环抱,重峦迭嶂,潭水碧波晶莹,湖面辽阔,群峰倒映湖中,优美如画。每当夕阳西下,新月东升之际,日光月影相映成趣,更是优雅宁静,富有诗情画意。



九、避暑山庄(피서산장)

承德避暑山庄,中国古代帝王宫苑,清代皇帝避暑和处理政务的场所。位于河北省承德市北部。始建于一七零三年,历经清康熙、雍正、乾隆三朝,耗时八十九年建成。与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颐和园、拙政园、留园并称为中国四大名园。一九九四年十二月,避暑山庄及周围寺庙(热河行宫)被列入世界文化遗产名录。二零零七年五月八日,承德避暑山庄及周围寺庙景区经国家旅游局正式批准为国家5A级旅游景区。山庄以朴素淡雅的山村野趣为格调,取自然山水之本色,吸收江南塞北之风光,成为中国现存占地最大的古代帝王宫苑。


十、秦陵兵马俑(진릉병마용)

1974年在陕西省临潼县西杨村发现一处地下建筑及陶俑,其位于秦始皇陵园东侧1千米处。这件事震动了世界,这就是被称为“世界第八大奇迹”的秦陵兵马俑。这些都显示了秦始皇威震四海、统一六国的雄伟军容,表现了极高的造型艺术,是世界上独一无二的文化艺术宝库。1987年,秦始皇陵及兵马俑坑被联合国教科文组织批准列入《世界遗产名录》。


  中国历史上,有很多不同类型的美女,她们各自有不同的美态,但每个时代的审美眼光都不相同。汉代以前,人们对女性只注重面部形象,到了魏晋,才开始着重于装饰。魏文帝喜欢打扮华丽并将头发挽成蝉翼形的妃子。唐朝是开放社会,容许袒胸露臂,崇尚的女性体态美是额宽、脸圆、体胖。 唐朝以后没有定论。宋朝以后,大致是以观音菩萨的本貌作为女性美的高标准,各个时代所雕塑绘画的观音菩萨,就是当时审美标准的具体说明,以下是古代十种不同的美女标准。


  一.乌发蝉鬓(오발선빈:검은머리,매미날개귀밑머리)



  乌发就是头发乌黑油亮,蝉鬓是指面颊两旁近耳头的头发,要薄如蝉翼。乌发一词早在《左传》中便已出现,至于蝉鬓一词,则出现在三国时代的魏国,其中一名叫莫琼树的宫女所梳的发型。


  二.云髻雾鬟 (운길무환:구름머리, 안개쪽진머리)



  这里所指的鬟,都是环形发髻的意思,髻则指束在头顶的发结,所谓云髻雾鬟,便是美女所梳的发髻状如云雾。据传发髻最早的由来,是创自女娲身旁的一名仙女,古代四大美人之一的赵飞燕,便经常束起发髻。


   三.娥眉青黛(아미청대:누에눈썹,검은눈썹화장):


  娥眉是女性的眉毛,青黛娥眉便是把眉毛剃掉,再用青黑色的颜料来绘画眉毛,这种眉毛化妆,早在西周时已十分流行,在《诗经》和《楚辞》中,便已出现这个形容词。


   四.明眸流盼(명모유반:밝은눈,흐르는눈길)


  眼睛是灵魂之窗,明眸便是又大又明亮的眼睛,流盼便是怒目而视之意,一对漂亮而又布满恨意的眼睛,自古以来都视为美女的标准。


   五.朱唇皓齿(주순호치:붉은입술,하얀이)


  顾名思义,朱唇便是红唇,皓齿便是雪白的牙齿,红唇能够显得牙齿雪白,雪白的牙齿又能衬托朱唇,两者缺一不可。


   六.玉指素臂 (옥지소벽:옥같은손가락,희디흰팔)


  古人对女性的纤纤玉指非常重视,美女的手指必须纤细而柔软;素臂便是指白皙的手臂,手臂不但要白,还要圆润及布满弹性,这便是玉指素臂。


   七.细腰雪肤(세요설부:가는허리,눈같이흰피부)


  虽然古代四大美人之一的杨贵妃,是身材丰满的美女,但国人还是偏好纤瘦型美女,细腰便是腰肢幼纤细;雪肤则是肌肤雪白,相传赵飞燕便是细腰雪肤的佼佼者。


   八.莲步小袜(연보소말:연꽃걸음,작은버선)


  莲步是指美女的脚步,更指缠过的小脚。小袜则指缠足女性所穿的袜子;小脚步伐如莲,再穿上小袜,便成为美女的一种美态。


   九.红妆粉饰(홍장분식:붉은화장,분바른꾸밈새)


  红妆指女子盛妆,就如今天在腮上涂上胭脂。胭脂据说由匈奴人发明,其后才传入中土;另外粉饰便是在脸上涂末白粉,这种化妆品在商末周初,已开始为宫中美女使用。


   十.肢体透香(지체투향:몸으로깃든향기)


  女性肌肤中带有芬芳的香气,亦被视为美女,这种香气并非来自某种香水,而是天然的体香;除了清代闻名的香妃外,据说西施亦是浑身散发香气的美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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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말말'...조선족 명사들의 고언>
"하나로 뭉쳐 한민족 시대 열어야"


<연변대 리철호 - '단장'>



<연변대 리철호 - '혼백-살풀이'>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한국에 들어와 사는 조선족은 물론 중국 내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조선족은 두가지 화두에 직면해 있다.

한국에 거주 중인 조선족의 경우 같은 언어를 쓰고 한핏줄을 나눈 모국의 형제들로부터 편견과 냉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 융화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또 중국에 남아있는 조선족 역시 한국과 중국 내 대도시로의 대규모 이주에 따른 조선족 공동체의 해체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해야할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고 있다.

모국 국민과 조선족의 화합을 위해, 그리고 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위해 조선족 명사들이 던지는 고언(苦言)을 들어봤다.

▲김삼 조글로 연변조선족네트워크교류 대표 = 그 산에 가면 그 산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한국에 갔으면 한국법을 잘 지키고 한국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자면 매사에 한국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고, 모든 일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자신을 한국인에게 이해시키려는 노력도 동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다. 한국인들도 조선족을 차별하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대로 한국인에게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가 되자면 상호 도움으로 공동발전이라는 목표 아래 이해와 존중, 그리고 매사를 점진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말고 항상 우리민속, 우리문화 특히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박웅걸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사무총장 =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민족은 못 바꾼다. 우리 선조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벌판으로 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를 세워 교육을 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며 잘 살아왔다. 생활력이 강한 유전자를 가진 조선족은 앞으로도 중국땅이든 세계 어디에서든 굳건하게 살아갈 것이다. 한국과 일본 등에 나가 있는 조선족은 50만~60만명 정도다. 나머지 150만명은 중국에서 발을 붙이고 살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동포들이 3D 업종에 종사한다고 해 업신여기지만, 이젠 조선족을 제대로 보고 평가하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김순옥 연변자치주사회조직연합회 부회장 = 우리는 중국에 살고 있지만 자랑스러운 한민족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목숨을 바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들이 하나로 뭉쳐 한민족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최근 조선족 인구가 줄어든다고 걱정을 많이 하는데, 그건 다 기우다. 발전과 진보로 나아가는 역사의 과정에서 어느 민족이건 다 겪어야 하는 일이다.

▲윤종주 연변대 교수 = 민족의 경제진흥과 문화·과학기술의 번영을 위해서 중국 각지의 우수한 조선족 과학기술 인재들의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교육 면에서 조선족은 우수한 전통을 갖고 있지만, 첨단 기술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선배학자로서 우리 젊은이들이 황금시절을 아끼고 아껴서 학문에 정진하고, 하루 속히 혁신형 인재로 성장해 민족을 위해 더 큰 기여를 하고 영예를 떨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몽당치마'의 림원춘 작가 =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조선족 집거구가 해체되고, 인구는 계속 감소하는 등 조선족 사회가 위기에 직면하면서 문단도 독자층의 감소와 출판, 교육의 부진 등으로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우리 문단은 그 모진 진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한해에 한자릿수에 불과하던 출판물이 지금은 거의 100개에 육박하는 숫자로 증가했다. 이런 성장에도 국가상을 받을 만한 작품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이는 번역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부심이 없는 민족은 사멸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지금 민족 동화라는 엄혹한 현실을 앞에 두고 있다. 이는 언어의 동화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족 문단은 교육과 더불어 우리 민족을 지키는 보루이기에 굳건히 지켜야 한다.

▲중앙민족대학 황유복 교수 = 1949년 9월 조선족 대표가 공화국 설립을 위한 회의에 참가했고, 3년 후인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됐다. 이를 정착기라고 한다면 문화대혁명은 순환기로 볼 수 있다. 당시는 민족문화가 고난을 겪는 시기였다. 개혁개방과 한중 수교 이후 국가간 이동의 자유가 생기면서 우리는 민족이동이라는 진통을 겪고 있다. 이는 조선족 젊은이들이 주류사회 진입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원인 중 하나이다. 성공적으로 구축됐던 민족교육 체계도 무너졌다. 앞으로 민족 문화와 정신을 계속 유지, 발전시키려면 인재들을 양성해야 하기에 민족교육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족의 미래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바람직한 미래는 우리 민족 모두의 엄청난 노력과 지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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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1% 시대>④ "나는 조선족이다"
조남기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전국위원회 부주석(자료사진)
中 근.현대사에 족적..한민족 우수성 과시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우리 사회에 비쳐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극히 부정적이다. 한 핏줄을 나눈 동포인 동시에 중국 국적을 지닌 외국인이기도 한 조선족은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다.

잘사는 모국에서 돈을 벌 목적으로 입국해 3D업종을 비롯해 내국인이 기피하는 직종에 대거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일종의 문화 충돌이 빚어진 결과다.

국내에서 `돈벌이에 눈이 먼 이방인'으로 치부되는 조선족은 그러나 중국 사회에서 한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며 그 존재감을 각인시켜 왔다.

중국 내 소수민족 관련 저서 34권과 논문 170편을 발표한 중앙민족대학 황유복(68) 교수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20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은 일제시대 때 만주벌판으로 건너가 한민족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살아남아 중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정.관계
'조선족의 우상'으로 불리는 조남기(84)씨는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충북 청원군 출신인 그는 부총리급인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지내고 2003년 은퇴했다.

그는 1982년부터 1997년까지 3차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8년에는 중국군 최고 계급인 상장(上將.대장급)이 됐다.

이덕수(68)씨는 장관급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지냈고, 현직으로는 전철수(59) 중화전국공상연합회 서기 겸 제1부주석(차관급)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진길(52)씨는 옌지(延吉)시 당서기를 거쳐 2002년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 주장에 이어 2007년 지린(吉林)성 부성장을 지내고 지금은 정법위원회 서기로 재직하고 있다.

옌지시 법원장으로 재직중인 류성일(50)씨는 2008년 중국 관영 언론들이 선정한 `전국 10대 법제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학계
중국이 2003년 10월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와 2007년 10월 첫 달 탐사위성 '창어(嫦娥)'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기까지는 조선족 과학자들의 숨은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상영(70)씨는 '선저우' 5호의 부총설계사로 참여한 것을 비롯, 총 13개의 위성 발사를 진두지휘했다. 또 창어 1호의 부총설계사를 지낸 강경산(75)씨는 달 표면을 촬영해 두께를 알아내는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장치를 개발했다.

이들은 창춘(長春) 정밀기계.물리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지낸 우병희(72)씨와 함께 신화통신으로부터 "중국 우주과학의 핵심"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인민해방군총병원 이비인후과 주임 한동일(58) 박사는 중국 의학계에서 명의(名醫)로 불린다. 그는 20여년간 담당 간호사로서 마오쩌둥(毛澤東)을 보필해온 여성의 고질적인 청각질환을 단 한차례의 수술로 완치,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일본 히로사키대 의학부의 첫 중국 국적 유학생인 윤종주(76) 연변대 교수는 `과학기술진보상'을 수상하는 등 종양효소학 분야의 권위자다.

◇문화·예술, 체육계
조선족이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분야는 문화.예술계다. 대형무극 '춘향전'과 '백두산 환상곡'의 총감독이자 안무가인 최옥주(75)씨는 인민일보로부터 '조선족이 낳은 문화재', '조선족 무용예술의 황후'라는 극찬을 받고 있다. 국가 1급 안무가이자 중국무용가협회 주석단 위원이기도 한 그는 베이징에 조선족무용학교를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리승숙(68)씨는 30여년간 70편의 무용작품을 창작한 공로로 국가 최고안무상인 문화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국가1급 배우이자 연변가무단 부단장, 연변무용가협회 주석으로 활동하고 있는 함순녀(47)씨는 무용계 인사로는 유일하게 올해 전인대 제11기 4차 회의에 참석했다.

'중국 록의 황제' 최건(50)씨와 중국 최고 음악상인 금종상을 받은 안국민(80)씨는 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옌지시에서 태어나 연변대를 졸업한 작가 림원춘(74)씨는 단편소설 '몽당치마'로 중국 최고문학상인 국가문학상을 수상했다. '몽당치마'는 중국어, 영어, 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불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의 또다른 작품 '꽃노을'은 중국의 초·중·고교와 대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는 중국 정부가 선정한 '20세기 중국 문단을 이끌어온 100인의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토템시의 창시자인 시인 남영전(63)씨, 민족문학 주필인 시인 김철(79)씨,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를 쓴 여류소설가 허련순(56)씨, 역사소설가 류연산(54)씨 등도 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다. 특히 남씨의 작품 '중화민족정'은 중국작가협회와 인민일보가 공동 주최한 문학작품 공모전에서 시가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우수상을 받았다.

프랑스 칸 영화제와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 바르셀로나 아시아영화제 등에서 대상을 받으며 명성을 떨친 장률(49) 감독은 영화계의 대표주자다. 그는 2005년 조선족 여인 최순희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겪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 '망종'을 제작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또 라치환(71)씨는 1963년 일본에서 열린 제56회 세계스피드스케이팅에서 2분9초02의 기록으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제계
랴오닝(遼寧)성 선양시의 표성룡(59)씨는 재벌급 기업가다. 철강판매회사, 부동산 개발회사, 무역회사 등 11개 기업을 거느리고 연간 250억위안(한화 약 4조1천6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농산물 온라인시장을 휩쓸고 있는 30대 청년 조동철(34)씨, 베이징한나산그룹 장문덕(38) 이사장 등도 조선족 사회의 `떠오르는 별'이다. 특히 조씨는 2008년 '전국 100명 농촌우수인재'로 뽑히기도 했다.

양탄자를 생산하는 광주모드모아그룹 회장 이성일(55)씨는 '중국의 매트왕'으로 불리며 재계에서 입지를 굳혀나가고 있다.

홍상표(65) 헤이룽장(黑龍江)성 유기벼협회장과 벼재배기술전문가 허철학(76) 농업연구원도 중국의 벼 생산 증진에 기여하며 조선족의 우수성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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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1% 시대>③ '바늘구멍' 한국 비자
귀향 조선족 50만 넘어..대부분 방문자 신세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2005년 6월 27일. 조선족 이철구(73)씨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하고 한국 국적을 되찾은 날이기 때문이다. 단속에 대한 두려움에 늘 마음 졸이며 살아야 했던 그는 "너무 기뻐서 술을 실컷 마시고 오랜만에 푹 잠을 잤다"고 회상했다.



1938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여섯살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나 중국 헤이룽장(黑龍江省)성 옌서우(延壽)현으로 이주했다.


당시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선만천주식회사를 만들어 조선의 영세농민들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씨 가족이 만주로 간 시기는 강제이주의 막바지인 1943년이었다.

2년 후 나라는 해방됐지만, 소작농 생활로 연명하던 이씨 가족은 여비를 마련치 못해 끝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55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50년 가까이 살았다.

그가 고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은 1991년 10월. 그의 사연이 한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탔고, 이주 당시 부산 큰집에 맡겨진 채 홀로 남았던 누나와 연락이 닿게 됐다.

하지만 코흘리개로 떠나 반백으로 돌아온 그를 조국은 받아주지 않았다. 출입국사무소는 그가 체류기한을 넘긴 불법체류자라며국적회복 신청을 불허했다.

1995년 서울로 상경한 그는 악착스럽게 살았다. 중국에서 30년간 소학교(초등학교) 교편을 잡았던 그에게 일용잡부의 일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손에 잡힌 물집을 터트려가며 삽질을 했고, 잠수복을 입고 정화조에 들어가 똥물을 푸기도 했다.

그는 중국동포를 재외동포의 범주에서 제외한 재외동포법 개정을 요구하는 국적 회복 운동에 나섰다. 당시 다른 조선족들과 함께 과천 정부청사를 세 번이나 쳐들어갔고, 보름간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2004년 이들의 소원대로 재외동포법이 개정됐고, 그는 이듬해 6월 국적을 회복했다.

그를 따라 부인과 손자가 들어왔고, 뒤이어 한국에 들어온 두 누이동생도 2006년과 2009년에 각각 국적을 회복하고 한국으로 귀화해 자녀, 손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라를 잃고 중국으로 이주했던 이씨 일가는 이렇게 하나, 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합류했다.

"우리가 원해서 중국에 간 게 아니고, 중국 국민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그는 자신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과 '귀한동포연합총회'를 결성해 조선족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씨와 같은 조선족 1세대 혹은 2세대는 한국에 대한 귀속의식이 강해 한국에 들어온 뒤 국적을 회복하거나 귀화하는 게 보통이다.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는 이철구(73)씨가 1943년 중국 만주로 강제이주됐다가 1991년 한국으로 돌아와 국적을 되찾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방문취업제 후 코리안드림 만개
1992년 한중수교로 한국에 본격 유입되기 시작한 조선족은 20년이 채 못돼 50만명을 넘어섰다.

법무부 출입국ㆍ외국인정책본부의 최신 통계를 보면, 4월 기준 국내에 체류 중인 조선족은 총 44만7천600명. 여기에 이씨처럼 한국으로 귀화하거나 국적을 회복해 한국 국민이 된 조선족 7만5천여명을 더하면 국내 조선족은 52만명쯤 된다.

중국 내 조선족이 1990년대 200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족 4명 중 1명은 중국을 떠나 한국에 살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단 국내에 들어온 조선족은 대부분 비자 만료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을 찾으며, 한 명이 들어오면 줄줄이 가족과 친척들이 따라들어오면서 숫자를 불렸다.

조선족의 한국행에 기폭제가 된 것은 2007년 도입된 방문취업제. 5년 간 한국을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일할 수 있는 방문취업제로 많은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으로 향했다.

랴오닝(遙寧)성 무순(撫順)시에서 태어난 중국 조선족 2세대 김철수(48. 가명)씨도 그중 한 명이다. 김씨 부모는 다른 조선족들처럼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고향을 떠나 중국에 정착했다.

중국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김씨도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들어가 돈을 벌겠다는 코리안 드림을 꿈꿨다.

방문취업제에 따라 조선족은 한국에 있는 친척의 초청으로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을 수 있으나 친척이 없는 '무연고' 조선족은 한국어 시험을 쳐야 했다.

2008년 9월 그는 한국어 시험을 쳐서 합격했지만, 신규 입국 쿼터에 맞춰 입국자를 선정하는 추첨에서 연거푸 떨어졌다.

◇ 침체 여파 작년엔 '쿼터 제로'
방문취업제 시행 첫 해인 2007년엔 한국어 시험 합격자 2만5천명 전원이 H-2 비자를 받았으나, 2008년엔 합격자 7만6천명 중 절반 가량인 3만9천명이 비자를 받지 못했고, 2009년엔 비자를 못받은 사람들이 79%까지 치솟았다.

게다가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고 조선족이 내국인 일자리를 뺐는다는 부정적 여론이 일면서 정부는 신규 입국 쿼터를 확 줄였다. 한해 6만명이던 입국 쿼터는 2009년 1만7천명으로 급감한 뒤 지난해엔 아예 신규 쿼터가 없었다.

그는 결국 '기술연수제'라는 '뒷문'을 통해 들어오게 됐다. 기술연수제는 김씨 같은 사람들에게 우선 단기종합(C-3) 비자로 한국에 들어오게 한 뒤 학원에서 기술연수를 받고 해당 분야에서 일하면 단계적으로 비자를 업그레이드 해주는 제도다.

지난해 입국한 김씨는 요즘 서울 영등포의 한 전기통신학원에 다니고 있다. 9개월간 기술연수가 끝나는 이달 중 그도 그렇게 애태우던 H-2 비자를 손에 쥐게 된다.

그간 몸고생,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살 돈이 필요했고, 학원비도 다달이 25만원씩 내야 했다. 그래서 인쇄소, 물류회사, 모텔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건설현장 3층에서 일하다 건설자재 더미 위로 떨어져 허리를 다친 적도 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서러운 것은 조선족을 동포라기보다 못난 외국인 취급하는 차별적인 시선이었다. 공사장에 가면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고 먼저 물었고, 일감도 '원래 한국인', '귀화 한국인', '조선족' 순으로 줬다.

"착실하게 일하는데도 한국인들이 차별해 서운한 생각이 든다"는 김씨는 H-2 비자를 받으면 중국과 한국 기업간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한다. 이미 한ㆍ중 합작회사를 설립하는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김씨처럼 방문취업 자격으로 국내에서 일하는 조선족은 29만명이 넘는다. 국내 체류 조선족 3명 중 2명이 H-2 소지자인 셈이다. H-2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막혀 기술연수제로 들어와 학원에 다니는 조선족은 2만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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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1% 시대>② 50만 상생의 파트너
조선족 밀집지역 `대림동' 밤거리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서울의 대표적인 조선족 밀집지역인 대림동의 `중앙통'으로 불리는 중앙시장 밤거리. 중국음식점과 식료품점, 여행사 등이 즐비해 있다. 2011.7.5
noanoa@yna.co.kr

2018년 조선족 노동력 고갈..인식전환 필요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장면#1. 서울 목동에 거주하는 30대 중반의 맞벌이 주부 A씨는 직장을 그만둘 지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한 살 딸을 돌봐주던 조선족 아주머니가 비자 만료로 중국으로 돌아간 뒤 새로운 조선족 도우미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탓이다. 그렇다고 내국인 도우미를 쓰자니 비용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편은 "이 참에 사표내고 살림이나 하라"고 채근하지만 10년 직장 경력을 포기하자니 아쉽기만 하다.

장면#2. 경기도 반월공단에 입주해 있는 한 염색공장. 매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던 이 공장은 갑자기 매출이 뚝 떨어졌다. 전체 종업원 10명 중 8명을 차지하는 조선족이 한꺼번에 그만두면서 새로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로 급히 충원을 했지만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아 작업 속도가 더디고 불량률도 확 높아졌다. 사장 B씨는 언제쯤 공장이 제대로 굴러갈 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나친 과장일 수도 있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 조선족의 국내 취업과 관련한 정부 정책에 변화가 없는 한 향후 7∼8년 내에는 조선족 노동력의 유입이 끊길 소지가 다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내 노동시장에서 조선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특수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내국인이 기피하는 3D업종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조선족은 국내 산업 현장의 노동력 공백을 메우는 `대체재'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반면 내국인의 일자리를 잠식, 실업을 심화시키는 존재로 조선족을 규정짓는 인식도 없지 않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사회 질서를 해치는 일부 조선족의 일탈 행위를 확대 해석해 전체 조선족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곤 한다.

그러나 조선족을 동포로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혈연적 관계 정립의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경제적 효능 측면에서 조선족 노동력이 갖는 순기능을 부인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3D 업종을 비롯한 일선 산업현장의 인력 공백을 외국인 노동자로 채우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노동력의 수요처와 공급원으로서 서로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한국 경제와 조선족이 상생을 모색하는 게 온당하다는 주장이다.

◇조선족 `합법' 취업자 2018년엔 고갈
지난 2007년 3월 최초로 5년짜리 방문취업사증(H2)을 발급받아 국내에 들어온 조선족 취업자는 내년부터 H2 비자 만료에 따라 순차적으로 출국하게 된다. 현행 제도로는 이들은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또다시 H2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다.

정부는 또 조선족에 대한 H2 비자 발급 총량을 30만3천명으로 한정한 채 H2 비자 만료로 돌아가는 조선족 취업자 수 범위 내에서 신규 발급을 허용한다는 방침인데, 지난 2007년 실시된 한국어 능력시험을 통과하고 H2 비자 취득 자격을 갖추고 있는 중국내 조선족 숫자는 6만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6만명의 조선족이 향후 2∼3년 내에 모두 국내에 들어온다고 가정하면 5년의 취업 기간이 경과하는 2018년 또는 2019년에는 전원 출국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정부가 기존 조선족 취업자에 대해 H2 비자를 재발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긴 하지만 불가 결정을 내릴 경우 합법적인 조선족 취업자는 사실상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한국행 러시 정점..어디서 일하나
법무부 통계로는 지난 4월말 현재 국내에 체류중인 조선족은 44만7천여명이다. 이미 한국 국적을 회복하거나 귀화한 이들도 7만5천여명에 이른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 총 192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만큼 단기 비자로 들어와 눌러앉은 불법 체류자까지 포함하면 노약자를 제외한 경제활동 가능 인구의 대부분이 국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조선족이 사라지면 경제가 마비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구인난에 시달리는 3D업종은 조선족이야말로 필요불가결의 존재다.

방문취업제로 입국한 뒤 법무부에 자진 취업신고를 한 조선족 16만여명의 직장을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 6만1천여명(38%), 음식점 4만6천여명(28%), 건설업 3만4천여명(21%), 가구내 고용활동 7천여명(4%) 등이다. 대부분이 공장이나 식당, 공사판 등 내국인이 취업을 기피하는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음이 쉽게 파악된다.

서울 대림동의 C직업소개소 소장은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3천명의 가사 도우미 가운데 40%를 조선족이 차지한다"면서 "대개 40대 후반∼50대 후반 여성으로, 입주 도우미나 보모로 일한다"고 설명했다.

경기도 안산의 W간병인협회 관계자는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환자를 1 대 1로 돌보는 간병인의 70%는 조선족"이라면서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간병인 일은 전적으로 조선족 여성들의 몫이 됐다"고 말했다.

◇"상생의 파트너로 봐야"
조선족의 국내 취업이 제한될 경우 그 빈자리가 동남아시아 등지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로 채워질 것이라는데는 큰 이견이 없다. 중소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상대적 저임금인 외국인 인력 수요가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 인력의 일자리 잠식 효과가 미미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지난해 3월 공개된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제조업 생산.기능직의 경우 조선족 근로자가 1% 증가할 때 내국인의 실업전환확률(취업자가 일자리를 잃을 확률)이 0.003% 증가하는데 그쳤다.

또 조선족을 종업원으로 채용한 73개 음식점을 대상으로 설문을 벌인 결과 82%가 내국인 종업원을 구할 수 없어 조선족을 고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직업학교인 에듀쿡의 이영복 원장은 "조선족들은 내국인이 외면하는 직종에 주로 취업하고 있다"면서 "상생의 파트너로서 조선족을 활용해 인력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조선족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홍 수석연구원은 "조선족 근로자들이 다른 외국인 근로자보다 국내 고용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은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족이 점유하던 일자리를 내국인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면서 "조선족에 대해 단순히 노동시장 잠식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선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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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1% 시대>① 팽창하는 조선족 타운
2호선 따라 대림에서 건대 앞까지

<※ 편집자주= 국내 체류 외국인 130여만명 중 조선족(재중동포)은 50여만명(귀화자 포함)으로 우리 인구의 1퍼센트를 넘어섰다. 1992년 한중수교 후 조선족이 국내에 본격 유입된 지 20년이 채 못됐지만, 이제 '조선족이 없으면 우리 경제가 굴러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됐다. 조선족은 개인의 이주를 넘어 점점 가족 단위로 정착하고 있고, 가사도우미, 건설현장 노동자, 식당 종업원 등 '3D업종'에 그치지 않고, 기업가, 교수 등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직 부정과 긍정으로 엇갈리고, 동포로 볼지, 외국인으로 볼지 기본적인 질문에조차 사회적 합의점이 없는 상태다. '국가'와 '민족'이 교묘하게 맞물려 진행되는 세계화 물결 속에, 다문화 한국사회 내 '1퍼센트 조선족'과의 상생 파트너십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족의 역할과 위상 등을 짚어보는 기획기사를 4일부터 5회에 걸쳐 송고한다.>

(서울=연합뉴스) 양태삼 기자 = 서울 지하철 2호선 건대입구역 인근 '동일로 18길'. 길 양쪽으로 붉은 바탕에 붓글씨체 한문 상호를 내건 식당 간판들이 한 집 건너 달려 있다. 마치 중국 거리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매화반점(梅花飯店), 양꼬치(洋肉串), 샤브샤브(火鍋), 중국 식재료 상점임을 짐작케 하는 '중국식품(中國食品)', 간혹 보신탕을 뜻하는 구육(狗肉)도 눈에 띈다.

주말과 휴일에는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듯한 인상의 40∼50대 남성들과 유행에 뒤진 듯한 옷차림에 손매가 투박한 여성들이 어울려 가끔 중국어를 섞어가며 북한식 말투로 왁자지껄 얘기를 나눈다. 조선족들이 대부분 생업으로 바쁜 평일에는 양꼬치 거리에 대한 소문을 들은 한국인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양꼬치 음식점은 한국인과 조선족 간 접점을 넓히는 매개체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중국 서북지역에서 기원한 양꼬치는 한국에 와서 고춧가루와 깨소금이 섞인 한국식 양념에다 중국 양념인 쯔란을 찍어먹는 방식으로 진화해 대표적인 한중 퓨전요리로 자리잡았다.

동일로 18길에는 10여년 전만 해도 인근 공단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한 식당과 자동차 정비부품 업체들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4∼5년 전부터 조선족들이 하나, 둘 이 동네로 이주하고, 이들이 즐겨 먹는 양꼬치집이 생기기 시작해 이제 80여개에 이르렀다. 이제는 '동일로 18길'보다 '양꼬치 거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조선족 타운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공장이 밀집한 서울의 구로동과 가리봉동, 대림동 일대에 국한됐지만, 조선족 동포가 꾸준히 늘어나고 지역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서울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조선족 타운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서울을 동쪽으로 돌아 신림.봉천.서울대입구역을 거쳤고 4∼5년 전부터는 건대입구역과 신설동역 등지로 팽창했다.

이 지역 음식점은 한글과 한문이 섞인 간판을 달고 한자로 된 메뉴판을 내놓고, 중국식 붉은색 등으로 장식해 영락없이 중국 거리를 연상시킨다. 이곳 종업원은 틀림없이 '연변 이모'이고, 대다수 손님들은 중국어를 간간이 섞어가며 북한 억양의 연변 말투를 구사한다.

◇ 서울에 약 20만명..영등포구에 가장 많아
행정안전부가 집계하는 '외국인 주민현황'에 따르면 올해 1월1일 현재 서울에 사는 조선족은 한국으로 귀화한 이들 2만6천650명을 포함하면 모두 20만9천명. 전국의 조선족이 약 50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5명 중 2명은 서울에 사는 셈이다.

이들을 비자 형태로 보면 방문취업(H2) 자격인 조선족은 12만5천명, 귀화하지 않은 결혼이주자는 1만4천명, 투자 자격은 1만3천명, 연수비자(D-3) 2만9천명, 유학생은 1천500명 등으로 나뉜다.

이들은 영등포구에 3만7천명을 비롯해 구로구(2만8천명), 금천구(1만8천명), 관악구(1만5천745명) 등지에 산다.

5천명 이상 거주 지역으로는 광진구(9천703명), 동작구(8천715명), 동대문구(6천50명), 송파구(5천903명) 성동구(5천84명) 등이다.



<가리봉동 입구의 조선족 음식점 거리>
◇ 원조는 대림역 '연변거리'
지하철 2호선 대림역과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과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의 남부순환로와 우마길이 만나는 '연변거리'는 조선족 타운의 원조격이다.

정부가 2002년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사면 조치를 취하며 조선족에게 출국 준비기간으로 1년을 부여하자 이를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으로 이해한 불법체류 조선족들이 거리로 나오며 조선족 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옛 공단 지역이라 이른바 쪽방 타운이 있고, 반지하와 옥탑방이 많아 주거비가 싼 게 이들이 밀집한 이유다.

그러나 이 지역 인근에 가산디지털 3단지와 구로디지털 1단지가 들어서고, 재개발이 이뤄질 예정이라 조선족들은 인근 대림, 신대방, 신림 등지로 옮겨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하철 2호선 노선을 따라 조선족 타운이 확산되는 모양새가 됐다. 건대입구역 일대는 가장 최근에 생긴 조선족 타운이다.


<대림역 연변거리 모습>
◇ 양꼬치거리 vs. 중국음식거리
지하철 2호선 건대입구역에서 남쪽으로 200m 내려가면 동쪽의 능동로와 서쪽의 동일로를 잇는 약 700m 구간의 행정명칭은 '동일로 18길'이다.

하지만 이 길 입구에 광진구청은 행정명칭과 별도로 '양꼬치거리', '중국음식거리'라고 쓴 이정표 두 개를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일반인들에게는 양꼬치거리, 연변거리, 중국음식거리로 더 잘 통하기 때문이다.


<양꼬치거리와 중국음식거리를 병기한 이정표>
길 양편에는 양꼬치구이와 각종 중국음식 요리를 파는 식당이 80여개가 성업중이다. 작년에만 약 40여개가 개업했다고 한다. 꼬치집이 몰리면서 서비스 경쟁도 불붙어 요리 하나를 시키면 물만두같은 요리를 덤으로 주는 '원 플러스 원'까지 등장했다.

이곳의 46개 업소 주인들의 모임인 '동포상인회' 한태희 총무(아리랑꼬치성)는 "한국인 입맛에 맞게 양념을 많이 하지 않고 서비스 요리도 넉넉히 제공하며 손님을 끌고 있다"며 "이곳 거리를 홍보하는 게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은 옛 공단 지역인 성수동과 가까워 반지하 또는 옥탑방 등 주거비가 싼 주택이 많고 지하철 7호선이 강남으로 이어줘 식당이나 숙박업소에서 일하는 조선족에게는 교통도 편리하다.

광진구는 조선족 주민 수가 2007년 4천900명에서 2008년 7천904명으로 크게 늘었고, 2009년 9천18명, 지난해 8천813명, 올해 9천703명으로 서울 25개 구청 중 다섯 번째로 많다.

지하철 2호선인 신설동역에서 동대문역까지인 왕산로에도 20여개 양꼬치집이 몰려 있다.

동대문 재래시장에 납품하는 의류를 만드는 소규모 공장이 밀집한 창신동 일대가 임대료가 싸 조선족이 많이 살기 때문이다.

신설동의 한 부동산업소 직원은 "임대료가 가장 싼 집은 조선족이 산다고 보면 틀림없다"며 "거리가 중국풍으로 변한다고 불평도 있지만 이들 덕에 쇠락하는 지역 경제가 그나마 굴러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광진구 자양동에 사무실이 있는 한국다문화가족지원연대의 정동주 사무처장은 "양꼬치집을 운영하는 조선족은 10년 전 이곳에 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양꼬치 집을 개업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장사가 잘 돼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업주도 꽤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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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빈(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 1611~1646)을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한 방송사의 역사 다큐로 재현됐고, 몇 작가들의 소설로 세상과 만난 강빈은 아직 많은 이들에게 낯설다. 그래도 무릇 중국과 인연이 있는 이들이라면 강빈의 슬픔과 한을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강빈의 성공과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길 바란다.

사실 세계 양대 강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패권놀이'를 하기 시작한 지금은 어찌보면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려 포효를 시작하던 그때와 닮아 있다. 그리고 강빈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그 중국을 상대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말해준다.

강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년) 가례(嘉禮)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강빈이 궁에 들어온 때는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나던 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째인 1636년(인조 14) 청은 형제지국에서 군신지국으로 위치를 바꾸는 것을 포함해 여러 명분으로 조선을 침입한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14일에 개성을 넘고, 그날 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불과 닷새만에 일국의 수도가 비게 된다. 임진왜란 때도 보름여만에 수도가 비었으니 당시 조선군은 막상막하의 막장 군대였다. 그러면서 조정안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피터지는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피는 청군의 칼날에 무참히 유린되는 백성들의 목에서 터졌다.

전쟁은 한달반 여가 지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 등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례를 한 뒤에 끝났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가 심양에서 머물렀다.

이 때 함께 끌려간 소현세자빈, 강빈은 비극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심양에 머무는 9년 동안 경영수완을 발휘해 국제무역과 농사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유목 중심이었던 청의 한계를 극복해 농사를 짓고, 장사 수완을 벌여 돈을 벌였다. 그 돈을 바탕으로 불행한 처지의 포로들을 구하고, 청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강빈의 수고가 화를 부를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나약한 정신력의 인조는 아들 부부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다양한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다.

그 히스테리의 결말은 1645년 귀국한 소현세자의 의문의 독살로 귀결된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강빈도 유폐되어 사약이 내려지고, 세 아들마저 제주도로 유배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얼마전 인기를 끈 ‘추노’라는 드라마도 이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강빈의 슬픔은 바로 밖의 적과의 싸움보다 정작 내부에서의 싸움이 훨씬 힘들었다는 데 있다. 문치를 바탕으로 한 조선은 군사적으로 약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을 극복한 민중의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라는 불과 임란이 끝난지 38년만에 처들어온 적에게 불과 닷새만에 한양을 내어주는 참변을 당한다. 그 것 뿐일까.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국으로 성장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 땅의 위정자들은 소현세자와 강빈을 죽이듯이 내부의 싸움에만 치중해 결국 병자수호조약(1876년), 을사조약(1905년)을 거쳐 경술국치(1910년)에 이른다.

이 와중에 보여준 우리의 정치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을사조약이 있기 전인 1905년 7월 29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에게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해 11월 17일 을사조약을 체결한다. 내외부의 적으로 이 나라가 순식간에 넘어가는 꼴이다.

그리고 다시 이 땅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가장 첨예한 곳이 되어 버렸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배경이 되던 구한말과 많이 닮아있다. 하지만 이 위기를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임진왜란을 앞두고 김성일과 황윤길이 벌이던 유치한 일본의 침략 논쟁이 그리울 정도다.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넘어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바라보는 중국은 한반도가 불안할수록 이쪽에 힘을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현상은 천안함, 서해안 군사훈련을 넘어서 후톈마 기지 이전까지 이어지면 더 급물살을 탈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올 상반기 우리나라의 대외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5.12%를 기록했다. 미국(10.6%)과 일본(5.8%)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거기에 화교권을 합치면 40%에 육박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국은 필요충분조건인 반면에, 중국에게 우리는 그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을’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할 때 가장 많이 내세운 논리는 한반도가 없을 경우 일본이 침략을 받으면 4개의 주요한 섬으로 된 일본이 적에게 공격받기 쉽다는 명분이었다. 고로 한반도를 일본이 점해야 한다는 논리다. 지금 중국이 내세우는 가장 큰 논리는 중국의 코 앞에 경쟁국인 미국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그 바다의 인근에서 미군의 군사작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1962년 10월부터 11일간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도 미국의 목전에 소련의 미사일이 장치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런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친중적인 사고라고만 단정할 것인가.

외교에서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1905년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듯 지금 중국과 한반도를 둔 새로운 밀약을 맺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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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탄생에서 열창하는 백청강>

요즘 두 백씨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모두 중국 동포다. 어떤 언론은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이건 맞지 않다. 55개 소수민족을 가진 중국의 입장에서, 각기 소수민족을 호칭한 표현 중에 하나인 조선족이라는 표현을 같은 민족인 우리가 쓰는 것은 맞지 않다. ‘중국 교포’나 ‘중국 동포’ 등의 표현을 써야 하는데 보통은 중국 동포가 일상화되어서 필자 역시 그렇게 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20대 초반이다. 20대 초반의 중국 동포들을 보면 필자는 만감이 교차한다. 우선 이들은 말 그대로 당대가 주는 가장 복잡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친척이 있는 몇몇 가정이나 간신히 한국을 드나들었지만 이 때부터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대도시로 진출한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한 중국 동포들의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어느 지역이나 한국인이 사는 만큼 이주해서 새로운 벌이를 찾아나섰다.

지금 중국에 사는 한국인이 100만명을 상회하는데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동포 역시 100만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옌지(연길)를 중심으로한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살았던 200만 중국 동포들의 이주가 시작됐다. 노동인구가 떠나자 고향에 남는 사람은 조부모와 어린 손자손녀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모가 부쳐주는 넉넉한 용돈이 있지만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흔히 조손가정으로 불리는 이런 형태의 가정은 급속히 늘어났다. 더불어 각지에 있던 동포 초중고는 사라지고 그 자리는 한족들이 차지했다. 과거 현(우리의 군) 단위에도 흔했던 동포 학교는 옌지나 선양, 돈화 등 대도시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조손 가정의 문제는 단순히 부모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흔해진 이혼과 별거 등으로 인해 혼돈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들은 자라났다.

이런 상황이 20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 중국 동포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사회 전반에서 본토인과 동포간의 거리는 이제 어느 정도 정돈이 된 느낌이다. 동포들 역시 한국이라는 상수를 충분히 이해하고 거리를 둔다. 또 그간에 한국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 이득으로 나름대로 안정적인 기반을 잡은 동포들이 상당수다.

그리고 우리 곁에 당당하게 자리한 두 젊은이가 감동을 주고 있다. 우선 먼저 ‘위대한 탄생’을 통해 부각된 백청강은 중국에서도 바뀌지 않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과 함께 일본을 겪은 중국 동포들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 북한, 중국이라는 복잡한 변수를 바탕으로 살아야 했다. 한국은 먼 나라였고, 북한은 초반기에 가까웠지만 점차 멀어지는 나라였고, 중국은 대약진,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격변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해방 후 주덕해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터전인 자치주를 형성했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주덕해 자치주 주장은 연변가무단을 통해 우리 문화를 고양하고, 초등부터 대학까지 우리 민족 학교를 만들어 동포의 존재감을 만들었다.

200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조선족은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도 중국에서 탁월한 힘을 보였다. 특히 연변가무단이 주축이 된 문화예술 공연은 중국인들에게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다. 때문에 신년연회에도 항상 초대되어 공연을 펼치곤 한다. 이런 기질은 한-중 수교 이후에도 계속된다. 때문에 노래방 문화나 한류가 가장 먼저 정착한 곳도 옌변조선족 자치주다. 이런 기반이 있었기에 백청강 같은 젊은 음악인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 방송을 보면서 필자 역시 다양한 감회가 있지만 그들이 지내왔을 엄청난 시간의 변화를 생각하면 더욱 더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프로축구인 지아(甲) A리그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체육대회에서 중국 동포들은 절대강자에 가까웠다. 불과 200만명의 조선족 자치주지만 1965년에 열린 중국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이었다. 그러던중 프로리그가 생기자 1955년 클럽 이름을 옌볜 FC로 변경해 중국 프로 축구 리그에 참여하게 된다. 돈이 좌우할 수 밖에 없는 축구세계에서도 최은택 감독이 지휘봉을 잡던 1997년에는 클럽 역사상 최고 성적인 지아 A리그 4위를 기록했다. 이후 다양한 변곡점이 있지만 중국에서 우리 동포들은 축구에 관해서는 결코 뒤지지 않은 성적을 갖고 있다.

동포들에게는 감춰질 수 없는 축구이 기질이 있었고, 이번에 백자건선수가 중국 올림픽 선수로 발탁된 것이다. 물론 한족 부친과 동포인 어머니라지만 그에게는 우리 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난 20년은 중국 동포사회에서 급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북에 집중되어 있던 동포들이 대부분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 대도시로 이주했다. 이에 따라 자치주는 이제 존폐의 위기를 맞을 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한의 절반에 맞먹는 광활한 면적의 땅에서 우리 동포 인구가 절반 가량을 차지해 자치주가 됐지만 지금은 동포 인구가 39%에 미치지 않는다. 이 역시 호구상의 인구이지 실제 거주자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과거의 위상을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중국 동포들의 삶은 현대판 디아스포라라 할 만큼 역동적이었다. 특히 지난 20년간은 그 변화가 너무 컸다. 200만명의 중국 동포가 살기에 중국은 너무 크다. 때문에 지금은 모두 섬처럼 살면서 한족 문화에 편입되어 가고 있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그들을 묶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분들을 봤다. 중앙민족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을 들이던 황유복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동포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물론 국내서도 재외동포재단의 다양한 지원과 언론재단의 한민족 저널지원 등 다양한 활동이 있지만 그 성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전에 ‘신라방, 고려영, 박씨촌, 조선족 그리고 신선족’이라는 글을 쓴적이 있다. 이제 지명에 우리 역사에만 남은 산동성 웨이하이의 신라방, 지명에라도 우리와 연결된 베이징 인근 등지에 고려영, 언어 등을 잃었지만 중국에 없는 박씨라는 성 때문에 우리 민족임을 인정받은 박씨들의 마을 박씨촌과 중국동포들, 또 현재 중국서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인 신선족 등의 과정을 말했다.

사실 중국 동포들이 영원히 우리와 한 민족임을 유지하게 하는 방법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실천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이는 중국 정부의 눈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백청강과 백자건이라는 두 청년을 통해 중국 동포들에 대한 시선을 다시 한 번 고쳐보는 게 어떨까 싶다.<조창완>

[출처]중국, 현재와 미래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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