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 56个民族的 '全家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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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四大 自然奇观 吉林雾凇

(중국 길림의 송화강 눈꽃)















吉林雾凇与桂林山水云南石林长江三峡同为中国四大自然奇观,却是这四处自然景观中最为特别的一个。雾凇俗称树挂,是在有雾的寒冷天气里,雾滴冻结附着在草木和其他物体迎风面的疏松冻结层。是大自然中较为常见的现象,在中国和世界的许多地方都能看到它的身影,为什么偏偏吉林市的雾凇一枝独秀呢?

  吉林雾凇仪态万方、独具丰韵的奇观,让络绎不绝的中外游客赞不绝口。然而很少有人知道雾凇对自然环境、人类健康所做的贡献。吉林雾凇正迎合了时下非常流行的一句话:“我美丽、我健康!”

  每当雾凇来临,吉林市松花江岸十里长堤 “忽如一夜春风来,千树万树梨花开”,柳树结银花,松树绽银菊,把人们带进如诗如画的仙境。江泽民总书记 1991年月在吉林市视察期间恰逢雾凇奇景,欣然秉笔,写下“寒江雪柳,玉树琼花,吉林树挂,名不虚传”之句。1998年他又赋诗曰:“寒江雪柳日新晴,玉树琼花满目春。历尽天华成此景,人间万事出艰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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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대의 전통명절인 설이 다가온다. 중국에서는 설날을 춘지에(春節)로 부른다. 중국에서 춘지에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춘지에가 시작되기 한달전에는 농민공 등 고향을 떠나 살던 이들이 귀성을 한다. 앞으로 바뀌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귀성 본능은 우리보다 휠씬 강한 것 같다.

멀게는 일주일 이상 걸리는 고향에 가서 꼭 춘지에를 보내겠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드는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이 춘지에의 시작을 알리고, 또 설날 몇일전부터 시작되는 폭죽놀이는 춘지에 날 절정으로 치닫는다. 어지간한 전쟁폭음은 소리 축에도 못끼는데 이 소리를 듣고 잠을 잘 수 있는 외국인들은 거의 없다. 폭죽놀이는 설날 이후 5일 단위로 계속되다가 보름인 15일에 끝을 맺는다.

이 밖에도 춘지에를 전후해서는 복복(福)자를 써서 거꾸로 붙이는 다오푸(倒福)를 비롯해 다양한 풍습이 있다. 그런데 이 풍습을 보고 있노라면 중국인들은 도대체 무슨 종교를 갖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중국에 건너올 때까지만 해도 중국 사람들은 상당수가 불교나 유교를 신봉하리라고 생각했다. 또 우리처럼 종교간에 갈등이 없겠냐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지에서 보는 중국인들의 종교관을 보면 상당히 놀라게 된다. 종교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믿음이 극히 드물고, 타 종교에 대해 포용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 동포만은 극히 예외적이라고 한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종교에 대해 절대적인 탄압을 하지 않는다. 물론 티벳의 분리운동을 주장하는 일부 장족불교나 파룬궁에 대해서는 정부가 강압적으로 포교나 집회를 금지하지만 다른 종교의 경우 그렇게까지 강하게 탄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공자(孔子) 등 유가(儒家)의 위인들을 숭배하는 유교(儒敎)를 숭상할 것 같지만 중국에서 유가는 그저 제자백가의 한 분파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한(漢) 시대에 공자가 왕의 권위를 능가하는 종교적인 인물로 추대된 적이 있지만 이후에는 그런 공자도 수없이 해체되면서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에 너무 평범해졌다. 또 일반에서 유교에 대한 숭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 가도 그가 거대한 위인으로 비춰지지만 종교적 높이로까지 숭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유가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공자나 맹자 등 유가의 명인 들이 많이 태어난 산둥(山東)성 지역은 가부장적 권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세다. 그 때문에 산둥성 남자들은 장가가는데 적잖이 애를 먹는다. 이미 가정내에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거나 오히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다른 지역 처녀들이 산둥 남자를 유난히 꺼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의 사상에 깊숙이 박혀있는 도교(道敎)도 종교로 숭배되기에는 적잖은 한계가 있다. 어느 지역에 가나 칭양궁(靑陽宮)과 같은 도교사원을 찾을 수 있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상당히 감쇄된 느낌이다. 대부분의 도교사원에는 도사(道師)들이 있는데, 필자의 눈에는 어떤 권위보다는 그들이 점을 처주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중국인들에게 종교라고 말하면 당연히 불교를 먼저 떠올린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경로는 서북인도에서부터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지방으로 전래된 북방 불교가 있고 더불어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를 우회하여 남부해로를 통하여 베트남을 경유하여 중국남부에 전해진 남방불교도 있다. 인도의 승려가 직접 중국에 와서 사찰을 세우고 불법을 전한 경우도 있지만 법현, 현장, 의정 등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교 문화를 배워왔다.


하지만 유입 경로가 다르고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이 차례로 전해지면서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불교가 전파됐다. 이에따라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 나름대로 경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일반화되면서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이나 학문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거쳤다. 이후 끊임없이 한족과 변방민족의 정권 교체 속에서 불교는 어느쪽에서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이런 중국에도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들어왔지만 중국인들의 마음에 크게 자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절대적인 신앙에 의탁하기 보다는 당장에 그들의 삶은 좌우하는 변수들이 중요했기 때문에 종교에 눈이 돌릴 시간이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거나 강요받는 것 자체를 꺼리면서 서구 종교가 들어갈 틈새를 주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 서구는 마약이나 강요하고, 자원이나 문화재를 강탈하는 존재였으니, 그들의 종교가 쉽게 수용되기도 힘들었다. 결국 중국에서는 어떤 특정한 종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다. 대신에 각 사상의 중층적으로 결합하면서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이런 특성은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어디서나 쉽게 느낄 수 있다. 산시성(山西省) 핑야오(平遙) 고성(古城)도 한 곳이다. 서주(西周宣王 기원전 827년? 782년)에 처음 쌓여진 이 성은 직경 4킬로 내외의 작은 성으로 완벽히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문화평론가 위치우위(余秋雨)도 유달리 좋아해서 자주 들렀던 이곳에서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교다. 핑야오에는 중국 종교의 모든 것이 있다. 도교사원인 칭허궁(淸虛宮)과 청황먀오(城隍廟)가 있고, 유가의 산물인 원먀오(文廟)가 있고, 성의 한켠에는 백년 가량 된 천주교 교당도 잘 보존되어 있다. 또 성의 양쪽에는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절인 전궈스(鎭國寺)와 수앙린스(雙林寺)가 있어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있다. 이 작은 고성 안에 수천년 동안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이고 근대에 들어온 천주교 성당까지 들어와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중국 종교문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런 특성은 어디서 나왔을까. 사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몽고, 여진, 만주족 등 강한 군사력을 가진 소수민족의 정권이 결국에 동화된 이유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한다. 보통은 한족 문화가 뛰어나서라고 하지만 그 보다는 모든 것을 흡수시켜서 자기화시키는 ‘블랙홀’같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중원에 자리한 한족들은 신체적으로 그리 강인한 민족이 아니다. 이는 중국역사를 보면 휜히 나온다. 한족이 중심인 주(周), 한, 수, 당, 송, 명 등의 국가는 지배기 극히 협소한 국가에 지나지 않은 과도기 국가에 가까웠던 반면에 원, 청 등은 소수민족이 지배세력으로 강성한 힘을 바탕으로 현대 중국의 위상을 상당 부분 만들었다. 한족을 중원이 지배하던 시대에도 한족들은 오랑캐라 불리던 변방 민족에 화번공주(화친을 위해 오랑캐의 왕에게 시집보내는 공주)를 보내고, 비단 한필에 지나지 않는 말을 비단 10여필을 주고 사는 등 항상 쫓기는 삶을 살아왔다. 당연히 공격성도 떨어지는데, 수나라나 당나라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처들어 오다가 참패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반면에 이들은 서구는 물론이고 자체적으로 가진 문화를 흡수시켜 핵심을 뽑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당연히 그 분화는 ‘짬뽕 문화’에 가깝다. 한 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유기(西遊記)를 보면 유교와 불교, 도교 등 모든 문화가 합쳐져 있다. 황제의 명으로 가는 것은 유교적인 반면에 천도복숭아, 옥황상제 등이 등장하는 것은 도교 문화고, 삼장법사 등 일반 배경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런 인상은 중국 대부분의 산에서도 쉽게 느낀다. 어느 산이나 불교사원, 공자를 모신 사당등은 물론이고 도교사원 등이 이웃해서 공존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강한 종교는 바로 ‘부’(富)다. 중국 여느 음식점에 가면 출입구나 계산대 뒤에 있는 차이선예(財神爺)를 만날 수 있다. 모두 돈을 많이 벌게 해주길 바라는 기원이 담겨져 있다. 또 오래된 도시에 가면 도교, 불교, 유교 사원에 못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변형시킨 차이선먀오(財神廟)다. 오류의 역사로 평가받는 문화대혁명은 실질적으로 종교나 정치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중국인 들 내부에 상존하는 부자되고픈 욕망에 대한 폭압이었다. 이후 덩 샤오핑은 그 욕망이 있어야 굶어죽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조창완:新차이나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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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망간 노예를 쫓는 드라마가 방송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요즘 새롭게 발간된 ‘엉클 톰스 캐빈’(작가정신 간)를 읽고 있는 중이라 노예라는 말이 많이 마음에 와 닿는다. 자신의 운명이 못된 주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슬퍼한 조지의 “내 가슴은 참담한 심정으로 가득 차 있어. 난 하나님을 믿지 않아.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요?”라는 탄식이나 노예 장사꾼 헤일리의 “제 새끼들한테 신경 안 쓰는 계집 노예를 만들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아는 한 현대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일 게요”라는 말에 시대를 넘어서 비 인간성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나에게 ‘추노’를 말하면 한 인물이 떠오른다. 조선 성종 때 활동했던 최부(崔溥:1454~1504)다. 최부를 알려면 우선 ‘표해록’(漂海錄)을 알아야 한다. 바다를 표류했다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어떤 책일까.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하멜 표류기’를 아는 이들은 상당수일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을 다 아는 이들에게 ‘표해록’을 아느냐 물어보면 대답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앞 두책이 벽안의 서양인이 쓴 책인 반면에 ‘표해록’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중국 여행기인데 ‘세계 3대 중국여행기’로 꼽힌다.


그 저자가 바로 최부인데, 이 책은 제주도에서 육지로 오던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저지앙성 닝하이(寧海)에 도착하여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조선에 돌아오는 기록을 담은 여행기다.


그런데 그 최부의 관직이 재밌다. 바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인데 이 직업은 도망간 범죄인을 잡는 일인데, 이 중에는 노비도 포함되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최부는 1477년(성종 8) 진사에 급제하고,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아원(亞元:장원 다음)으로 급제하고, 1487년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주(濟州)에 갔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수시로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된 특명관인데 3~5품에서 임명됐다. 1487년에 최부의 나이가 33살이었으니 상당한 수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부는 제주도에 부임한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연히 급한 마음으로 포구에 가지만 날씨가 흐려서 배를 뜰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하관전에 부친을 봐야한다는 마음에 출항을 독려한다. 이렇게 배는 떠났는데, 얼마되지 않아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난다. 결국 모든 원망은 최부에게 돌아오고, 이들은 거친 풍랑속에서 헤매다가 한 바닷가에 닿는다. 바로 중국 저지앙성의 닝하이에 닿는다. 제주와 닝하이는 직선거리로도 700킬로미터이니 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표류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육지에 도착해서도 곤혹이었다. 표류한 이들을 중국인들은 해적으로 알아보고 물건을 빼앗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고초를 주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닝보(寧波)에서는 그가 필담(筆談)을 할 있어 누명을 벗는 한편 대우를 받으면서 항저우, 베이징을 거쳐서 조선에 돌아온다. 그리고 최부는 왕의 명으로 그 표류의 기록을 적는데 그 책이 바로 ‘표해록’이다.


이 책을 읽으면 최부가 얼마나 꼼꼼한 기록자인지 알수 있다. 이 책에는 당시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 기후, 산천, 도로, 관부(官府), 풍속, 민요 등이 잘 소개되었으며, 특히 수차(水車:踏車)의 제작과 이용법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최부는 충청도 지방의 가뭄 때 수차를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부의 인생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1494년~1506년)이 즉위한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 정숙의(鄭叔儀)가 합심해서 폐출시키고, 사약을 받게 했다. 연산군이 오른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사림파들이 중앙으로 진출한다. 이런 여파로 최부는 연산군 2년(1496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제수된다. 사간은 왕에게 충고를 담당하는 언론의 역할이다. 때문에 다음해 최부는 왕에게 오락을 멀리하는 것 등의 5가지를 상소하는 등 비판 기능에도 힘쓴다. 그런데 연산군이 어머니의 관한 비밀을 알고 피의 향연이 벌어진다. 사건의 발단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분란의 불씨였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최부도 무사할리 없었다. 결국 1504년 갑자사화의 와중에 희생된다.


사실 중국에서도 위대한 여행가들이 많다. 필자에게 꼽으라면 서하객(徐霞客, 1586 ~ 1641)과 왕양명(王陽明 1472 ~ 1529)을 들고 싶다. 서하객은 중국에서 여행가의 대명사인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여행기가 자신은 존재도 알지도 못한 타성받이 친아들에 의해 정리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4대 사화에 버금가는 정치적 사건인 동림당 사건(명말 동림당東林黨을 중심으로 개혁파 정치가들이 중앙에서 활동하려다가 환관 위충현의 세력에게 좌절되는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는 서하객은 어머니의 지원하에 세상을 주유하고 기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의 여행지는 동서남북으로 현 중국 대륙의 상당수를 포함하고 있다. 교통이 좋지 않았고, 언어도 차이가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곤란을 겪었다. 그런데 그의 여행기는 자칫 동림당 사건의 후화로 모두 잃어버릴 처지였다. 그런데 그가 잠시 만났다가 헤어진 첩이 낳은 아들 이기(李寄)가 필사적으로 그의 기록을 모아서 10분의 1정도가 남겨졌는데 그것 만으로도 중국 최고의 여행가로 꼽힌다. 반면에 왕양명은 여행가가 아닌 군인으로 중국을 주유했다. 철학자이자,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왕양명은 중국 남부 대부분을 다녔다고 할 만큼 넓은 영역을 가졌다. 그의 칼에는 수만 백성의 피가 묻었기에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경험을 바탕으로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 뒤를 잇는 여행자를 꼽으라면 강희제를 들고 싶다. 강옹건 시대의 초석을 닦은 강희제(康熙帝, 1654.5.4 ~ 1722.12.20)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활동 범위가 넓은 황제로 중국 곳곳에 그의 흔적이 쌓여있다. 황제의 방문은 단순한 감시의 영역을 넘어서 각 지역과의 소통의 의미까지 담고 있기 때문에 그의 행보는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반청복명의 기운이 팽배한 시대에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닦은 기반이어서 더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최부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 남긴 여행기도 만만치 않다. 우선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중국을 넘어선 위대한 여행기로 인정받고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중국에서 출간되어 연구에 활용될 만큼 좋은 여행기다.


최부가 그러했듯 박지원 역시 필담으로 중국인들과 교류했다. 그런데 열하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그 깊이나 이해에 놀라게 된다. 특히 길거리 저자에 쓰인 글을 읽고와서 쓴 ‘호질’ 등은 그 양이나 깊이에서 어느 창작 작품보다 뛰어나다. 사실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를 불문하고 통하는 역사나 사고의 깊이는 큰 차이가 없다.


눈도 오고, 날도 추운 요즘, 드라마만 빠지지 말고, ‘표해록’이나 ‘열하일기’의 깊이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 중국도 한걸음 더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조창완:新차이나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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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本山

赵丽蓉



최근에는 큰 발전을 이룩했지만 중국의 근현대는 그다지 녹녹치 않았다. 1949년 중국이 탄생했지만 소련의 원조 거부 등으로 중국은 큰 곤란을 겪었다. 58년 마오쩌둥이 주도해 진행된 대약진 운동은 산업 구조를 와해시켜 2천만명 이상의 아사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66년부터 10년간은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탄압을 받았고, 사상의 자유 등은 억압받았다.


사실 지금 환갑을 바라보는 60세의 어른들은 신중국이 탄생한 직후인 1950년에 태어났다. 그들은 8살을 전후해 대약진을 겪었고, 16살부터 26살까지 홍위병이나 피해자로 시대를 겪어내야 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는 남는 것은 상처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국인들을 지킨 가장 큰 힘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나는 유머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중국어에서 유머는 라틴어에서 따온 ‘요우머’幽默라는 단어로 쓰인다. 그런 중국인들의 웃음을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춘지에 무렵이다. 우리의 설날인 중국의 춘지에(春節)는 중국에서 가장 큰 전통 명절이다. 이때가 되면 중앙텔레비전(CCTV) 등이 주관해 춘지에완후이(春節晩會)를 벌이는데, 이때 가장 중심 프로그램이 샤오핀(小品)이다. 샤오핀은 진(晉)나라 때부터 전해온 ‘만담’이다. 우리에게는 장소팔 고춘자로 유명하던 과거의 만담을 떠올리면 다르지 않고, 구봉서나 배삼룡이 주도하던 80년대 코미디와도 닮아있다. 이 샤오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자오번산(趙本山) 등 희극인들이다. 자오번산은 중국 연예인들 가운데 가장 부자로 알려졌는데, 그의 수익도 천문학적인 출연비를 받는 방송 출연료 등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중국에서 샤오핀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 수 있다.


일반 중국인들은 한해가 바뀌는 시간에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보내는 궈니엔후이지아(過年回家)를 중요한 전통으로 생각하는데, 고향 집에서 이 샤오핀을 보는 것으로 한해를 넘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텔레비전이 보급된 후에 이런 경향이 더 강해질텐데, 방송을 보면서 웃는 모습은 중국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다. 때문에 2000년 7월17일 자오번산과 짝을 이루던 연기자 자오리롱(趙麗蓉) 여사가 죽었을 때 어느 정객이 죽은 것보다 더 애도 분위기가 강했다.


한국전쟁이 지난 후에 아주 큰 곡절은 많지 않았던 우리에 비해 더 큰 고난을 겪었던 중국인들에게 유머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였는지 모른다. 아니 중국 역사도 그랬다. 힘이 약했던 한족들이 강한 유목민족과 정권을 주고 받으면서 흘린 피는 엄청났다. 그런 시간을 넘길 수 있는 것도 유머였다.


그런 유머를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문학작품이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독자가 있는 위화(余華)의 소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골계미다. 위화의 초반 작품인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世事如烟)’에서는 좀 비장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장악한다. 하지만 장이모를 통해 영화(인생)로도 제작된 ‘살아간다는 것’이나 ‘허삼관 매혈기’ 등에서는 웃음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된 재료가 된다. 전쟁이나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주변 사람들과 가족이 세상을 떠날 때 조차 주인공 푸구이(富貴)는 웃음으로 그 시대를 대변한다. ‘자라 대가리’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남의 씨로 난 아들인지 알면서 기꺼이 피를 팔아서 역경을 거쳐가는 허삼관 역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당대 중국의 졸부들이 탄생한 모습을 배경으로 한 ‘형제’ 역시 기괴하리 만큼 특이한 이야기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 모습이 느껴진다.


이런 웃음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선 깊이가 있다. 어찌보면 초탈의 의미까지 갖고 있는 중국의 웃음을 느껴지게 하는 작가로 차오웬쉬엔(曹文軒)을 빼 놓을 수 없다. 그의 소설들은 이미 우리나라에 십여권 이상이 번역되어 나왔다. 그런 가운데 그의 좋은 중편소설 4개를 추려서 출간한 ‘안녕 싱싱’(사계절 간)은 쉽게 차오웬쉬엔의 문학을 물론이고, 중국인들의 내면에 깊숙이 녹아있는 유머와 순진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한 좋은 작품집이다.


1954년 지앙수성 옌청(鹽城)의 한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문혁의 후반기인 1974년 베이징대학 중문과에 입학한다. 1983년 2월 ‘뿔 없는 소’(没有角的牛)라는 중편소설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그는 모교인 베이징대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아동문학 등을 통해 강력한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만들어간다.


이번에 출간된 ‘안녕 싱싱’에는 그의 소설 가운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야풍차’, ‘열한번째 붉은 천’, ‘안녕, 싱싱’, ‘흰 사슴을 찾아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야풍차’는 바람으로 물을 대야만 농사를 지울 수 있는 얼바옌즈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아들에게 수송선을 쌀을 훔치게 하다가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시작되고, 논의 곡식들은 말라간다. 곡식이 타는 만큼 심장도 타 들어간다. 그러던 중 태풍이 불고, 풍차조차 미친듯이 돌아가서 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돛을 올려야만 풍차가 물을 논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미친듯 돌아가는 풍차를 아버지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얼바옌즈는 풍차에 올라가고 어렵사리 돛을 올린다. 바람에 날린 얼바옌즈는 호수에 빠져 목숨을 건지고, 아버지는 얼바옌즈의 등을 두드려준다. 마을 사람들에게 소외받으면서 홀로 살아가는 곰보 할아버지와 물에 빠져 숨이 넘어가는 이를 업고 달리는 소의 이야기를 다룬 ‘열한번째 붉은 천’이나 도시에서 하방되어 시골에 온 야 누나와 소년의 마음을 담은 ‘안녕, 싱싱’, 아버지 간에 사이가 나쁜 아이들이 눈사태로 묻힌 후 필사적으로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그린 ‘흰 사슴을 찾아서’는 모두 따스한 마음을 그리고 있다.


물론 위화나 자오원쉬엔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모두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가 시간을 두고 만난 중국인들에게 느낀 가장 인상적인 부분도 그런 정과 유머다. 물론 이런 이들은 도심의 화려한 장소보다는 베이징의 후통(胡同)이나 상하이의 스쿠먼(石庫門) 같은 낡은 도시 혹은 중국인들이 여유를 찾는 공원에서 더 쉽게 만날 수 있다. <조창완:新차이나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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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촉도( 劍門蜀道)를 가본 이들이라면 정말 새 한 마리도 빠져나가기 힘든 관문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검문촉도는 중국 샨시(陝西)에서 쓰촨을 잇는 길이다. 축소해서 보면 한중(漢中)에서 청두까지의 400여 킬로미터를 말한다. 이 만만치 않은 길은 끝없는 구릉의 연속이기 때문에 길을 내는 것은 애시당초에 불가능했다. 수천년 동안 만들어진 길이라지만 곳곳에는 벼랑에 나무를 박아서 만든 판자 길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이 길을 가장 빨리 달리는이들이 있다. 바로 여지(荔枝, litchi)를 운반하던 이들이다.


여지는 열대 과일로 중국 푸젠에서 시작해 광둥, 쓰촨 등 남부지역에서 나온다. 여름 과일의 왕으로 불리지만 아쉽게도 여지의 보존기간은 아주 짧다. 때문에 백거이는 ‘하루면 색이 변하고, 이틀이면 향이 변하고, 3일이면 맛이 변하고 색과 향이 모두 나간다’(一日色變,二日香變,三日味變,四日色香味盡去)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런데 역사상 이 여지를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당현종의 사랑을 듬북 받았던 양귀비다. 그녀가 즐겼던 여지는 낙주(洛州 지금의 四川 涪陵)나 가주(嘉州 지금의 樂山)에서 나온 것이다. 충칭에서 멀지 않은 낙주나 청두에서 멀지 않은 가주에서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으로 물건을 보내면 어쩔 수 없이 검문촉도를 지나야 한다. 그런데 신선한 여지의 유통시한은 3일 정도다. 때문에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선한 여지를 배달하는 것이고, 이 배달 속도는 곧 목숨을 의미한다. 그러니 여지를 실은 파발들은 걸어가도 힘든 검문촉도를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야 한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지를 배달하기 위해 그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실제로 신당서(新唐書) 양귀비전(楊貴妃傳)에는 ‘양귀비는 여지를 매우 좋아한다. 여지가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여지를 양귀비 앞에 즉시 대령해야 된다. 그래서 현종(玄宗)은 기병(騎兵)을 파송하여 수 천리 길을 달려 신선한 여지를 따가지고 여지의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長安) 까지 도착하였다’(妃嗜荔枝 必欲生致之 乃置騎傳送 走數千里 味未變己至京都)는 기록이 있다.


시인 두목(杜牧)도 그런 정경을 두고 ‘화칭궁을 지나며’(過華淸宮)에서 ‘장안에서 고개를 들어 화청궁을 바라보니 궁전과 수목만이 어우러져 비단을 둘러놓은 듯하구나. 여산 위의 궁문이 차례대로 열리고 멀리서 한 필의 말이 홍진을 일으키며 화청궁을 향해 달려오는구나. 양귀비는 궁 안에서 다소곳이 이 모습을 보고 흡족한 듯 웃음짓네. 여지가 오는 것을 것을 아는 이는 없겠지’(長安回望繡成堆,山頂千門次第開. 一騎紅塵妃子笑,無人知是荔枝來)라고 읊었다. 여기서 먼지(紅塵)는 한시각이라도 빨리 여지를 배달해야하는 이들의 운명을 은유한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며 여지를 즐겼던 양귀비의 끝도 좋지 못했다.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 갈 때 따르던 군사들은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그녀는 함양성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우궁(武功)에서 목이 매달린다.


훗날 환궁한 현종은 그녀의 제사상에 여지를 올렸다. 하지만 죽은 자는 먹을 수 없는 법이기에 여지는 쓸쓸한 과일로 사람들의 머리에 남아있다.


당시에는 그토록 귀했을 여지지만 이제는 여름철 중국의 길거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과일이 됐다. 10위안 정도면 작은 봉지에 다 찰 정도다. 그런데 유학생들에게는 여지를 먹는 금기가 있다. 바로 여지를 너무 많이 먹으면 코피가 난다는 것이다.


여지는 당분이 아주 많은 과일로 영향도 풍부하다. 대뇌조직에도 영향을 주고, 불면증이나 기억력, 신경쇠약에도 좋은 과일이다. 비타민C나 단백질도 풍부해 저향력 강화의 작용도 한다. 지혈이나 통증해소에도 좋은 과일이니 많이 먹으면 코피가 난다는 속설은 좀 과장된 측면도 있다. 필자도 여름이면 이 과일을 끼고 살았는데, 코피가 난 일은 없었다. 다만 저혈당의 환자 등이 급하게 여지를 많이 먹으면 여지병에 걸릴 수 있으니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냉장고에 넣어서 열렸다가 꺼내어 껍질을 까서 먹으면 독특한 맛과 재미가 있다.


그런데 양귀비도 먹었다는 이 과일이 우리나라에는 보급되지 않았다. 아마도 제주도에서 조차 자라기 힘든 열대과일이라는 특징과 더불어 양귀비에게 이 과일 공수하다가 죽은 것을 아는 현명한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고려시대에 여지가 나던 푸젠 지역과 교류가 있어서 여지가 알려질만도 한데 여지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기록이 없다.


이후에도 여지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 조선왕조실록 연산군때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사신으로 가는 이들에게 용안(龍顔)과 여지를 많이 사오게 하라고 지시한 것을 보면 왕실에서는 여지에 맛을 들인 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인지 1497년 성천 부사 민효증의 임금이 실천해야 할 10가지 일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면서 “옛날의 밝은임금은 노대(露臺)) 를 짓고자 하다가 중인(中人)의 열 집 재산이 허비된다고 생각해서 짓지 않았으며, 여지(荔枝)가 생각나도 만백성의 무궁한 화(禍)를 염려해서 사지 아니하였으니 그 온공하고 겸박함이 천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스림을 이룩한 비중이 이때가 제일 성하였던 것입니다”라고 쓰는데, 이를 보면 여지가 사치스런 과일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참 후 우리 기록에서 이 여지에 대한 유쾌한 추억이 나온다. 바로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서다. 연암 일행은 ‘야출고북구기’나 ‘일야구도하기’ 에 나타나는 험난한 여정을 겪은 후 1780년 8월 9일 열하(熱河 지금의 승덕)에 도착한다. 열하에서도 이런저런 곡절을 겪는데 건륭제의 만수절인 8월 13일 황제는 잔치가 끝난 상에서 “저녁 무렵에 젊은 내시 한 사람을 보내 주석으로 만든 네모난 항아리 하나를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항아리에 든 것이 여지 즙이었다. 이것을 연암은 “색은 누렇고도 약간 붉은 빛이 나는데 술과 같았다. 서장관이 말하기를, 이 까닭에 이 술을 ‘황봉주’(黃封酒)라 한다고 했다. 맛은 달아도 아무런 향기가 없고 조금도 술기가 없었다. 다 따르고 보니 여지 여남은 개가 떠서 나왔다”고 적는 데 밤에 가서 친구에게 물이니 술이 아니라 여지즙이라는 말을 듣고 박장대소 한다.


필자가 실제로 여지나무를 본 것은 2002년이었다. 중국 철학의 이단자인 이탁오(李贄 1527~1602)를 보기 위해 그의 고향 마을은 푸젠성 추안저우(泉州)에 들렀다. 추안저우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고려 때는 벽란도에서 떠난 배들이 명주(明州 지금의 닝보)를 지나서 추안저우까지 왔다. 또 아랍이나 인도 사람들도 이곳에 들러서 기독교, 이슬람까지 보급된 국제도시였다. 이탁오는 이런 다양한 사상을 접해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남녀평등이나 동심론(童心論)까지 폈던 인물이다. 물론 이탁오는 이단자로 치부되다가 마지막에는 베이징 인근 통저우(通州)의 감옥에서 자결하는 슬픈 인생을 가진 이이기도 하다.


그곳에 들렀을 때가 마침 여지가 나오던 8월이었다. 작은 구릉에는 여지나무들이 무성했는데, 모두 풍성하게 여지가 달려 있어서 따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도 사시사철 여지를 볼 수 있다. 중국의 4성급 정도 이상의 호텔에는 대부분 냉동된 여지를 녹여서 아침 디저트로 제공한다. 냉동했든 안했든 여지를 입안에 넣고 작은 상채기를 내서 처음 껍질을 깐 후 즐기는 여지는 추안저우의 싱싱한 맛은 없지만 그래도 맛없는 경우가 많은 수박이나 하미과 보다는 휠씬 만족도 높은 과일이다.

이제 그 검문촉도에도 고속도로가 나서 시속 110킬로미터로 싱싱 달릴 수 있으니 여지 운반자들의 운명은 옛일이 되고 말았다.

<조창완:新차이나소프트>


털이 많은 毛荔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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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섯 마을

中国最美的六大乡村古镇

一、丹巴藏寨:空谷有佳人 (빈 골짜기에 가인이 있어 - 단빠 티벳마을)
  丹巴藏寨是嘉绒藏寨中最具特色的。尤以甲居、聂呷、革什扎和巴底乡最为突出,几百幢民居依山就势、错落有致地融于自然环境中,体现了天人合一的理念。远远看去,充满灵气的山谷中,翡翠般的青草绿树之中,是那沉甸甸的田地和隐在密林深处的寨房,伴着时有时无的潺潺溪流,一幅富有动感的绝妙山寨画卷随之展现在你的眼前。

 二、哈尼村落:万千明镜映炊烟 (천만 거울에 노을 비치고 - 하니족 마을)
  哀牢山的地势险峻,山高谷深,海拔在3000米与600米间变化,形成了一个寒温带、亚热带和热带的立体气候。
  那片山高谷深,沟壑纵横,山地连绵,层峦叠嶂中藏着哈尼人的故事。哈尼人用顽强的毅力在这崇山峻岭中开凿出了世界闻名的、壮美的梯田。这片土地给了哈尼人物质所需的同时也给了我们一个美丽的艺术圣地。

三、图瓦村:所谓伊人 在水一方 (카나스의 강가 마을 - 투와촌)
  喀纳斯图瓦村位于喀纳斯湖南岸2-3公里处的喀纳斯河谷地带,周围山清水秀,环境优美,是从布尔津县前往喀纳斯湖旅游的必经之路,海拔1390米。
  喀纳斯图瓦村居民是自称蒙古族的图瓦人,图瓦亦称“土瓦”或“德瓦”、“库门恰克”。历史悠久,早在古代文献中就有记录,隋唐时称“都播”,元称“图巴”、“秃巴思”、“乌梁海种人”等。有些学者认为,图瓦人是成吉思汗西征时遗留的部分老、弱、病、残的士兵,逐渐繁衍至今。而喀纳斯村中年长者说,与现在俄罗斯的图瓦共和国图瓦人属同一个民族。
  图瓦人保存着自己独特的生活习惯和语言,图瓦语属于阿尔泰语系突厥语族与哈萨克语组相近,因此图瓦人均会讲哈萨克语,与现在的蒙古语不同。现在图瓦人学校基本上是普及蒙古语。在生活习惯上,图瓦人除欢度蒙古传统的敖包节外,还有当地的邹鲁节(入冬节),汉族人的春节与正月十五元宵节。图瓦人信仰佛教。但萨满教对他们影响也较深。图瓦人的房屋皆用原木筑砌而成,下为方体,上为尖顶结构,游牧时仍住在蒙古包。
  喀纳斯图瓦村与喀纳斯湖相互辉映,融为一体,构成喀纳斯旅游区独具魅力的人文景观和民族风情。

四、黎平肇兴侗寨:白云深处有人家 (흰구름 깊은 곳에 인가가 있네 - 리핑 동족 마을)
  这里是黎平县最大的侗寨,也是最古老的侗寨之一。
  侗族乡素有“七百贯洞,千家肇洞”之说。七百贯洞,指从江县贯洞;千家肇洞,指的便是肇兴。想要感受南部黎、从、榕地区侗家人气的旺盛、侗族文化的根深叶茂,就非得来肇兴不可。论规模之大,苗家有西江大寨,侗家有车江大寨、肇兴大寨。相比较车江大寨,肇兴大寨因为五座村寨难分彼此地团结在一起而在气势上更胜一筹。且不说别的,单是五鼓楼、五戏台、五座风雨桥,聚集在一起所造就的风景,就不只是美丽,而是壮丽了。再加上那些鳞次栉比的吊脚木楼、歌坪、禾晾、禾仓、石子路,走在被溪流环绕分割的寨子里,甚至会有失去方向、没有尽头的感觉。
  大的侗寨都居住着几个房族。房族也就是支系。肇兴共有5家房族,对外一律姓陆,内部有各自不同的姓。各个房族居住在不同的地段,并各自建造了本房族的鼓楼。整个寨子的形状就仿佛一艘大船,寨内5座气势雄伟的鼓楼就仿佛船头、船舱、船篷和船尾。无论经历怎样剧烈的风暴,这艘船都会稳当地航行,永不沉没。

五、婺源:最爱村头油菜花 (유채화 가장 아릿다운 - 우위안)
  江西婺源地处赣东北,与皖南、浙西毗邻,已被国内外誉为“中国最美丽的农村”。它的美,除了山川之迷人——峰峦、幽谷、溪涧、林木、奇峰、异石、古树、驿道、亭台、廊桥、溶洞和鸟类奇多之外,就是古村落古民居建筑堪称九州大地之一绝。
  婺源古村落的建筑,是当今中国古建筑保存最多、最完好的地方之一。全县至今仍完好地保存着明清时代的古祠堂113座、古府第28栋、古民宅36幢和古桥187座。村庄一般都选择在前有流水、后靠青山的地方。村前的小河、水口山、水口林和村后的后龙山上的林木,历来得到村民悉心的保护,谁要是砍了山上的一竹一木,就要受到公众的谴责和乡规民约的处罚。自1992年建立自然保护区后,河流、林木、古民宅、古树、古桥、古祠堂、古府第、古楼台、古碑和珍禽飞鸟保护得更好了,成了全国“生态文化旅游示范县”。
  婺源明清时代的徽式建筑几乎遍布全县各乡村。走进古村落,可以看到爬满青藤的粉墙,长着青苔的黛瓦,飞檐斗角的精巧雕刻,剥落的雕梁画栋和门楣。古村落的民居建筑群,依山而建,面河而立,户连户,屋连屋,鳞次栉比,灰瓦叠叠,白墙片片,黑白相间,布局紧凑而典雅。门前听水响,窗外闻鸟啼。许多古村落被影视导演看中,成了影视拍摄的镜头。
  婺源民居中的“三雕”(石雕、木雕、砖雕)是中国古建筑中的典范。不仅用材考究,做工精美,而且风格独特,造型典雅,有着深厚的文化底蕴。号称“江南第一祠”的汪口喻氏宗祠,占地665平方米,其梁、柱、窗上的浅雕、深雕、浮雕、透雕、圆雕形成的各种图案达100多组,刀功细腻,工艺精湛,被我国古建筑学家誉为“艺术殿堂”。
  值得一提的是,婺源县城乡今天人们建造的公寓、酒楼和民舍,也按县政府要求,均为清一色的明清式建筑,与古代的建筑相辉映。

六、丽江大研镇:琶琶弦上说相思 (비파줄에 사랑을 담아 - 리쟝 대연진 마을)
  丽江古城大研镇坐落在玉龙雪山下丽江坝中部,依象山、金虹山,西枕狮子山,东南临数十的良田沃野。海拔2400米,是丽江行政公署和丽江纳西族自治县所在地,为国家历史文化名城,世界文化遗产。古城以江南水乡般的美景,别具风貌的布局及建筑风格特色,被誉为“东方威尼斯”,“高原姑苏”等称号。
  当你漫步古城,眼前呈现出一幅古朴,典雅,幽静饿的画面。纳西风格的名居鳞次栉比,清清的溪流穿城过巷,一座座小桥如彩虹横跨小溪,排排垂柳在清风中摇。无数小巷弯弯曲曲。纵横交错,晃若迷宫。古城中店铺林立,各式商品琳琅满目,尤其是晶亮闪光的各式铜器和花样翻新,款式新颖的各色皮革时装,引着众多的游客。擅长于经营 的纳西妇女们沉着地讨还价,一桩桩生意就在她们的笑容中做成了。在幽静的深巷里,不时看到 披七星披 的纳西老人,或三五成群,玩一种古老的纸牌游戏,或神态悠闲地在古城中漫步,或独坐屋檐之下,若有所思。在古城幽 的环境里,人的心境顿时变得舒适而欢愉了。在敞开的院门中,你可以看到纳西人家的庭院里那争奇斗艳的各式花卉,给你一种“满园春色关不住,一枝红杏出墙来”的感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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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西省 婺源县 - 油菜花的 故乡>











婺源位于东北,

东邻国家历史文化名城衢州市,西毗景德镇市浮梁县乐平市

北枕国家级旅游胜地黄山市,南接江南第一仙山三清山

铜都德兴市,是一颗镶嵌在、赣三省交界处的绿色明珠。

婺源素有“书乡”、“茶乡”之称,是全国著名的文化与生态旅游县,

被外界誉为“中国最美的乡村”。

2005年10月23日,中国最美的地方排行榜在京发布。

此次活动由《中国国家地理》主办,

评选出的中国最美的六大乡村古镇其中就有婺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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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秋白桦林

永恒的光影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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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中國國家地理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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