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젊은이들을 향한 KAIST 이병태 교수의 엄숙한 하소연 !

젊은 당신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들~! 풍요와 자유 ! 그 어떤 것들도 당신들이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헬조선이라 빈정거리지 마라? 부모세대야말로 전부 울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청년들에게 앞 세대의 성취와 피땀을 폄하하지 말라는 KAIST 이병태 교수의 호소가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가 지난 7월16일 페이스북에 올린 ‘젊은이들에게 가슴으로 호소 합니다’라는 글이다.

그의 글은 7월 17일 오후까지 25 만명  이상 공유되는 등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젊은이 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

이 땅을 헬조선이라고 할 때, 이 땅이 살 만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욕할 때, 한번이라도 당신의 조부모와 부모를 바라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기 바랍니다.

초등학교부터 오뉴월 태양 아래 학교 갔다오자 마자 책가방 팽개치고 밭으로 가서 김을 매고...

저녁이면 소 먹이를 거두려고 강가로 가고 겨울이면 땔감을 마련하려고 산으로 갔던 그런 분들을 쳐다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라.

초등학교 졸업하는 딸은 남의 집 식모로 보내면서 울었던 당신의 할머니를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라.

대기업이 착취를 한다구요?

한국에 일자리가 없어서 대학을 나오고도 독일의 광산 광부로 갔고 간호사로 갔던 그래서 국제미아가 되었던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의 이야기를 물어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라.

지금도 대학을 나오고도 대한민국에 불법 취업을 와서 노동자로 일하는 필리핀과 몽고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야기하라.

신혼 초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두고 지하 방 반 칸이라도 마련해 보려고 중동의 뙤약볕으로 건설 공사장의 인부로 갔던 당신의 삼촌들을 보고 그런 응석을 부려라.

월남전에 가서 생명을 담보로 돈 벌이를 갔던 당신의 할아버지, 삼촌 세대를 생각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라.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지 않나?

앞 세대의 성취와 피땀을 그렇게 부정하고 폄하하고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나?

사람들은 내가 미국 가서 박사하고 KAIST 교수하고 반기업 정서에 대응하니까 무척 금수저인 줄 아는 가 보다.

나는 위에 적은 일들을 직접 경험했고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신들처럼 그런 배부른 소리를 못할 뿐이다.

나는 부모 모두 무학으로 농부의 아들이고, 그것도 땅 한 평 없던 소작농의 아들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 등잔과 호롱불로 공부했다.

나보다 더 영특했던 우리 누이는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으로 취업해 갔고, 지금까지도 우리 어머님의 지워지지 않는 한이다.

나는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내 생활비를 마련하며 다녔고, 때로는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면서 다녔다.

나는 돈 한푼도 없이 결혼했고 집없는 설움을 겪으며 신혼 초에 치솟는 전세값 때문에 서울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단돈 3백만원으로 가족을 데리고 유학을 가서 배추 살 돈이 없어서 김치를 만들어 먹지 못했고,   내 아내는 남의 애들을 봐주고,
딸은 흑인애들이 받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서 우유와 오렌지 쥬스를 사 먹이면서 학교를 다녔다.

나는 회사에 취업해서 주 6일을 근무하던 때에 입사 첫해에 크리스마스 날 단 하루 쉬어 보았다.

공장 창고의 재고를 맞추려고 퇴근 안하고 팬티만 입고 냉방도 안 되는 높다란 창고 위를 기어 올라 부품을 세면서 생산을 정상화하려 애썼다.

그렇게 야근하는 날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삼겹살인 줄 알고 살았다.

그렇게 살아 왔기에, 무책임한 노조가 망가뜨리는 회사를 보아왔기에,
우리보다 잘사는 것으로 알았던 많은 나라들이 꼬꾸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어떻게 잘 사는 사회인지 보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처럼 아프다고 못하고 힐링해야 한다고 응석을 부리지 못한다.

제발 당신의 고결한 조부모와 부모들을 더 이상 능멸하지 말라.

당신들이 우습게 보는 대한민국 기업들 가발공장에 납품하는 하청업체부터 시작해서 배워서 지금까지 일군 것이다.

정부의 벤처 지원책도, 금융도 없었고, 대학도 없었고, 컨설팅 없이 자유수출공단에 진출한 일본인들에게 술사주고 접대하면서 배우고 일군 것들이다.
당신의 이모 고모가 그렇게 술 따르면서 번 돈으로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제발 응석부리고 빈정거릴 시간에 공부하고 너른 세상을 보라.

우리 사회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뜰하게 공부하고 나서 비난해도 늦지 않다.

사람 값이 싸다고 투덜 대기 전에 누구 한번 월급 줘보고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하고, 월급보다 더 가치있는 직원이라고 증명해라.

그런 직원 찾으려고 기업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나는 당신들의 그 빈정거림과 무지에 화가 난다.

그러니 나보다 더 고생하고 생존자체를 위해 발버둥쳐야만 했던 나의 앞 세대, 내 부모님 세대는 오죽하겠나?

당신들이 아프다고 할 때, 나는 그 유약하고 철없음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다.

당신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들, 스타벅스 커피, 스타크래프트 게임, 해외 배낭여행, 그 어떤 것들도 당신들이 이룬 것은 없다. 당신들은 지금 이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것으로 지금 누리는 것에 보답해야 한다.

우리 세대는 누리지 못했기에 당신들이 누리는 것을 보는 것으로 행복할 따름이고 부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조롱받을 아무런 이유는 없다.

당신들의 앞 세대는 그저 물려 받은 것보다 몇십 몇백 배로 일구어 넘겨준 죄뿐이고 당신들에게 인생은 원래 고달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려주지 못한 것 뿐이다.

사기꾼들이 이 나라 밖에는 어디 천국이 있는 것처럼 거짓을 전파할 때, 설마 저런 소리에 속을까하며 미리 막지 못한 죄 뿐이다.

당신들의 부모들이 침묵하는 것은 어이가 없거나, 말해도 못 알아 듣거나, 남보다 더 해주고 싶다는 한 없는 자식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지 당신들의 응석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속으로 울화통이 터져서 울고 계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 한다

출처 :   [한국경제]
"헬조선이라 빈정  대지마라…부모들은 모두 울고 싶은 심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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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배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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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 나쁜 나무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1116)

첫눈도 내리고 했으니 이젠 겨울임에 틀림없다. 이즈음 산에 가면 눈에 잘 띄는 나무가 있다. 겨우살이다. 이름도 겨울에 사는 나무란다. 하지만 겨우살이가 겨울에만 사는 건 아니다. 1년 내내 푸른 잎을 달고 사는 상록성인 나무지만 다른 나무들이 모두 잎을 떨군 이맘때에야 비로소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산에 가면 큰 나무들의 높다란 가지 위에 새집처럼 둥글게 모여 달려있는 푸른 잎을 가진 식물들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겨우살이다. 이 나무에 붙여진 이름을 생각해보니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 붙여준, 참 자기 중심적인 이름이다 싶다.

그 겨우살이가 요즈음 인기가 높다. 항암 성분이 있어 여러 사람의 암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나서부터다. 서양 겨우살이는 이미 항암제로 증명됐고, 우리 겨우살이는 얼마나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실험하고 알아보고 있는 단계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불치병에서 고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 이 나무는 그 하나의 미덕만으로도 얼마나 훌륭한지 모른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겨우살이는 반기생성 식물이며, 기주(寄主)가 되는 참나무나 서어나무 등에 기생근을 박고 양분을 빼앗아 살아가니 애써 만든 양분을 겨우살이에게 내주는 기주 나무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약한 식물인 것이다. 겨우살이가 기생이 아닌 반기생인 것은 초록색 잎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광합성을 해 양분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연구자가 혹시 언제나 양분을 빼앗기던 기주 식물이 양분을 공급할 형편이 되지 못하면 거꾸로 겨우살이가 만든 양분을 기주에 주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실험을 했다. 그 결과는 말라죽을 때까지 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정말 기주 나무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 존재다. 겨우살이는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유명한 아까시나무도 그렇다. 가장 미움을 받은 나무 중의 하나인데, 무성한 가시에 찔리고, 그 무성하게 뻗는 뿌리에 조상의 묘가 위협받는 입장에서 보면 참 나쁜 나무다. 더욱이 우리 나무들이 잘 살고 있어야 할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로 일제 시대에 이러한 조림이 이뤄졌으니 우리 국민의 감정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아까시나무는 세계에서 꿀값이 가장 비싸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꿀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무다. 수많은 양봉업자들에겐 생계가 달린 일이다. 게다가 알고 보면 척박해 다른 나무들은 정착하기 어려운 땅에 빨리 뿌리 박고 자라 토양을 좋게 한다. 그리고 우리 숲을 푸르게 하는 공신의 하나다. 게다가 잎들은 가축의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제대로 자란 줄기는 가시가 없어지고 통직해져 좋은 목재로 이용할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시나무 입장에선 억울한 면이 많을 것이다.

얼마 전 언론에 침엽수 숲에서 한 일부 조사 결과가 호흡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흡수량보다 많다는 조사 결과가 알려져 작은 논란이 있었다. 잠시 그럴 수 있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나무들은 산소를 배출하고 이산화탄소를 소모하므로 궁극적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우리의 환경은 전적으로 나무들의 혜택을 받고 있다.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무를 포함한 초록 식물 덕택인 것이다. 자칫 이러한 절대적인 가치에 혼란을 주는, 검증없이 선정적인 보도가 나간 것은 나무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 나무들을 평생 연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쁜 나무로 비칠 수 있는 것은 억울하고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무뿐 아니라 풀도 그러하다. 토양을 좋게 하고, 토끼에겐 먹이가 되고, 아이들에겐 반지며 목걸이가 돼 주며, 그 누군가에겐 행운의 네잎 클로버가 되기도 하는 토끼풀도 잔디밭에선 그저 뽑아버려야 할 잡초에 불과하다. 하긴 밀밭에선 보리도 쓸모없는 잡초가 아니겠는가.

이 무궁하고 방대한 자연에서 우리가 보고, 짐작한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을 ‘좋은 나무’ ‘나쁜 나무’로 가르고 그에 따라 베어라 심어라, 좋다 싫다가 결정되는 일이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의 결과인지 모르겠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편가르기는 더욱 심한 것 같다. 어떻게 나와 생각이 좀 다른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자신의 책이 가장 훌륭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모든 학자를 엉터리로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보면 다른 것은 일부에 불과한 일이고 다른 것을 볼 수 있어야 같은 것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데 전체를 다 알고 있는 진정한 현자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한없이 경솔한 판단과 집요한 행동이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김으로써 아름다워야 할 우리의 세상은 각박하고 힘들어지는 듯싶다.

한 해의 끝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왜곡된 시선과 편가르기로 소외된 그 무엇이 우리 주변에 있는지 살펴보면서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나도 오늘 이 시간부터 시작해 보련다.(문화일보)

 

 담쟁이덩굴이 사는 법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1019)

가을이 깃든 이즈음, 연구실 창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건물의 벽을 타고 자라고 있는 담쟁이덩굴의 단풍이 한창이다. 자유롭게 뻗은 듯한 줄기며 그 줄기를 따라 줄줄이 달려 있는 크고 작은 잎새들, 그리고 각각의 잎새마다 형형색색의 가을이 물들고 있다. 마치 화려하고도 장엄한 벽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마른 듯한 가지에서 말랑거리고 반질거리던 여린 잎을 내놓던 지난 봄, 무성해 시원하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곱고도 곱게 가을이 담쟁이덩굴 잎새에 머문다. 이번 가을엔 유난히 이 담쟁이덩굴 잎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간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가을엔 동그랗고 노란 싸리 잎이 가는 곳마다 눈가에 맺혔고, 그 전 해엔 계수나무 낙엽질 때의 달콤함이 번번이 마음을 흔들었었는데…. 매년 새롭게 다가오는 가을이 신기하기도 하다.

가을 단풍은 왜 이리 고운가! 사람들은 저마다 그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화려한 등산복을 차려 입고 놀이를 떠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나무들의 입장에서 단풍이 드는 것은 가을이 오면 성장을 멈추고 다가올 모진 추위를 준비해야 하는 과정의 표현이다. 잎이 초록인 것은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만드는 잎의 엽록소 때문이다. 나무들이 생장을 포기하면 엽록소가 파괴돼 간다. 그러면 이 초록빛 색소에 가려 발현되지 못하던 카로틴이나 크산토필 같은 노란색 색소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 생강나무나 은행나무처럼 노란 단풍이 들고, 잎의 활력이 쇠약해지면서 붉은 색소인 화청소가 새로 생겨나면 단풍나무처럼 붉은 단풍이 드는 것이다.

담쟁이덩굴의 단풍든 잎을 보면 빨강, 노랑, 자주, 주홍 등 이런저런 색소들의 조합이 가득 들어 있다. 파괴와 발현의 과정이 오묘하고 신비롭게 얽혀 있는 이 모습은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비장한 순간이다. 어려움을 앞둔 순간을 이토록 아름답게 발현하는 것이 나무라는 존재 말고 또 어디 있으랴 싶기도 하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과정이 바로 담쟁이덩굴을 비롯한 나무들이 사는 법이다.

담쟁이덩굴은 땅을 덮는 비단이라는 뜻의 ‘지금(地錦)’ 또는 ‘석벽려’라는 별칭이 있다. 숲에서 붙어 올라갈 것이 없는 담쟁이덩굴은 지면을 덮으며 땅위에서 자라기도 하는데 바로 이즈음 그렇게 땅이며 바위를 덮으며 물들어가는 비단처럼 고운 모습은 상상만 해도 그윽하고 멋지다.

담쟁이덩굴은 담을 타고 올라가 이름도 담쟁이덩굴이다. 나무들은 대부분 굵은 줄기를 곧게 세우고 가지를 만들며 살아가지만 덩굴식물들은 이를 포기하고 곧게 올라간 다른 물체를 감거나 붙어 올라간다. 왜 일까? 숲속의 식물들은 양분을 만들기 위해 햇볕을 잘 받으려고 경쟁적으로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덩굴식물들은 한 위치를 차지하고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줄기를 포기한다. 우아함과 존재감을 포기하는 대신 그를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아껴 양분을 만들고 결실을 하는, 보다 본질적인 일에 충실할 수 있다. 바로 덩굴식물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나무 줄기를 칭칭 감아 타고 올라가 그 나무를 억누르고 못쓰게 만드는 덩굴식물이야 일면 얌체 같은 짓일 수 있겠다.

하지만 담쟁이덩굴은 결코 다른 나무의 도움을 받아 타고 올라가면서도 그 나무의 줄기를 감아 옥죄거나 덮어 가리지 않는다. 담쟁이덩굴의 가지에는 동글동글한 흡착근이라는 기관이 있어 나무나 벽의 표면에 붙어 올라가기 때문에 그 나무에 물리적인 해를 주지 않는다. 이 흡착근은 마치 우리가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를 할 때 몸에 붙이는 동그란 고무 같기도 하고, 오징어 다리에 있는 흡반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착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모양이다. 이쯤 되면 담쟁이덩굴의 사는 법은 기대어 사는 비굴함이 아닌 지혜로운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올곧게 올라가는 대쪽 같은 대나무, 낙락장송 곧고 절개 있는 소나무, 큰 그늘을 만드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각각의 모습에 의미가 있듯 환경을 잘 이용해 살면서도 다른 나무에 해를 끼치지 않고, 그 모습에서 아름다울 수 있는 담쟁이덩굴은 어쩌면 다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더욱 적절한 모습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을 움직여 남들이 하찮게 여겼던 담쟁이덩굴로 돌아서게 한 반전의 순간은 바로 오 헨리(본명 윌리엄 시드니 포터)의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마지막까지 남아(비록 노인이 그린 그림이더라도) 존시라는 소녀에게 삶의 희망을 준 잎새가 바로 담쟁이덩굴임을 알고 나서다. 담쟁이덩굴은 그렇게 언제나 우리의 창 밖에서, 눈길을 주는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준 식물이다. 소녀에게는 희망과 위로를, 소녀를 위해 마지막 잎새를 그리고 죽어간 노인에게는 마지막 숭고한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오늘 세상에 부딪혀 상처받는 우리에겐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방식으로 살아가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온 나뭇잎을 흔들며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에게 충만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하도록 이야기하는 담쟁이덩굴은 참으로 멋진 삶을 사는 나무임에 틀림없다.(문화일보)


내 몫의 독도 사랑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921)

가을 태풍이 또 하나 지나갔다. 매년 찾아오는 태풍이지만 최근 몇 해 동안의 태풍들은 숲의 나무들에도 매우 폭력적인 형태로 덮치곤 했다. 취약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면 그 방향으로 이리저리 연결됐던 나무들은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자연의 힘은 때론 상상하기 힘들 만큼 무섭기도 하다. 사람의 힘으로는 작은 나무 하나 움직이기 어려운데 그 큰 나무들이 넘어져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모습은 위협적이다.

내가 일하는 광릉숲에서도 이번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여럿이다. 행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나무들과 정리된 일부 조림지를 제외하곤 그냥 놓아둘 생각이다. 그렇게 쓰러진 나무를 터로 삼아 살아가는 곤충도, 버섯 같은 분해자들도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이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자연의 질서를 들여다보는 것이 자연과학자의 몫이니까. 학문도 유행처럼 모두 분자생물학을 쫓아갈 때도 어딘가 누군가는 의연하게 작은 것부터, 사소한 기초부터 차곡차곡 알아야만 큰 자연의 흐름을 예측하고 대비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주 초에 제16호 태풍 ‘산바’가 불어닥치던 내내 광릉숲의 나무들만큼이나 마음이 쓰이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독도의 풀들이다. 동해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독도는 참으로 외로워 보였다. 그 외로운 섬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에 살고 있던, 모처럼 만났던 정겨운 풀과 나무들이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을 그 비바람을 생각하니 아릿아릿 가슴에 신호가 왔다. 유난스러운 이런 느낌은 바로 얼마 전 독도를 다녀왔기에 마음의 잔영이 유독 선명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도 조사는 내겐 이번이 처음이었다. 학술조사도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리는 곳, 이슈가 되는 시기에 가기보다는, 정말 중요하지만 알아주지 않고 돌보지 않아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곳에 마음이 먼저 쓰이는 청개구리 같은 성향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가려는 독도에 구태여 나까지 발을 디디는 것은 오염을 보태지 않나 싶은 다소 삐딱한 생각에 간절한 마음을 그간 외면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 자연스러운 기회가 닿았다.

막상 가 보니 독도는, 아니 독도의 식물들은 수없이 문헌으로 보고 듣고 상상하던 모습보다 훨씬 친근하게 다가왔다. 온통 돌뿐인 그 섬에 바위 틈틈이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50여 종류의 식물을 대부분 확인했고, 국립수목원 연구팀이 새로 찾아내 기록을 보낸 종류도 버섯 등 식물과 곤충 등 동물 몇 가지를 추가하는 성과를 냈다.

독도엔 섬기린초나 갯사상자·갯제비쑥·도깨비쇠고비 등처럼 울릉도와 같은 동해의 한 섬임을 나타내는 섬식물들도 있었고, 쇠비름·명아주·닭의장풀처럼 우리 국민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징표같은 식물들도 있었다. 또한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길에 묻어 간 것으로 보이는 방가지똥이나 왕포아풀 같은 귀화식물들도 있었다. 마지막 여름을 붙잡고 피어 있는 가녀린 술패랭이 연분홍빛 고운 꽃의 흔적도 반가웠고, 한창 피어 있는 박주가리의 꽃들과 한 방향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꽃이 피는 시기를 놓친 탓에 지난 봄에 섬기린초와 땅채송화의 아름다운 노란 꽃이 피어 있는 모습과 이제 좀더 계절이 흘러 가을이 깊어지면 보랏빛 해국(海菊)들이 저마다 꽃을 피우는 장관은 상상으로 만났다.

그렇게 몇 시간을 하나하나 만나다 보니 독도는 울분에 찬 마음으로 떠올리던 관념적인 우리의 섬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제 독도를 생각하면 이런저런 식물들을 떠올리며 꽃이 피었을지, 열매가 맺었을지, 지난 태풍에 박주가리 꽃들이 다 떨어져 버렸을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뭄과 눈보라에 그 각각의 식물들이 어떻게 견딜지를 염려하고 이런 식물들의 군락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를 연구하는 계획을 짤 것이다. 함께 일하는 곤충이나 버섯을 연구하는 박사들과 함께 분포의 특성고민해 볼 것이다. 그것이 막연한 독도에 대한 안타까움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 몫의 독도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니 각자의 모습으로 독도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곳에서 콘서트를 하고, 여러 달을 머물며 다큐멘터리를 찍고, 이국(異國)의 문서고에서 기록을 뒤지고, 갈매기를 벗 삼아 경계근무를 하고…. 무조건적인 구호 대신 이렇게 각자 독도의 모든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닌 우리 땅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일상 속에 하나가 되도록 자기 몫의 독도 사랑을 시작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싶다.

문득,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손에 잡히지 않는 거창한 이상보다 제 곁에 있는 나의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진짜 나의 삶이다. 혹, 지금도 여전히 허명과 허세와 소홀히한 내 몫의, 나의 작지만 소중한 사람은, 일은, 삶은 없는지 한번 둘러봐야겠다. 9월이 가기 전에 놓쳐버린 꽃구경은 없는지 이제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숲으로 산책을 나서련다. (문화일보)

 

달빛 아래 솔씨 이야기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727)

어젯밤, 문득 하늘을 보니 초승달에서 상현달로 통통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달은 언제 봐도 참 곱다. 달빛은 언제나 마음 한편을 아릿하게 하면서도 이내 그 시선을 부드럽고 평화롭게 만든다. 차오르는가 싶으면 이내 기우는 달을 보자면 정말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는 걸 느낀다. 낮이 길어 여름밤의 어둠은 천천히 스며오고, 어슴푸레 움직이는 구름의 실루엣도 멋진데다가 선듯선듯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씩 조금씩 한낮의 더위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달 구경이 일품이라는 월악산(月岳山) 언저리의 크고 깊은 계곡을 찾아갔었던 때가 벌써 지난 그믐이다. 이즈음은 산수 좋은 곳에 달 구경을 다닐 만큼 여유 있는 때가 아닌데다, 바위산 사이로 불쑥 다가서는 가장 크고 밝은 달을 만날 수 있다는 그곳에 간 때가 하필 달이 없는 날이라니…. 내가 몸담고 있는 수목원의 연구 분야 중 미래 10년을 준비하는 토론 자리여서 방해되는 모든 것이 차단된 곳을 택한다며, 차량 접근도 쉽지 않고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적막한 산자락을 골랐다. 큰비가 오고 난 끝이라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만이 우렁찬, 눈 앞의 하나로 이뤄진 커다란 바위에 앉아 상상으로나마 만나는 달빛도 생각보다 깊이있고 좋았다. 일이 아니라, 휴가를 이렇게 보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일이라도 이런 곳에서 할 수 있으니 행운인가!

그 바위 산, 틈틈이 만들어진 숲을 둘러보다 문득 눈에 띈 게 소나무였다. 암봉(巖峰)이 그대로 드러난 바위산, 조금의 흙이라도 머무를 수 있는 곳이면 섬처럼 띠처럼 어김없이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뿐이 아니었다. 바위 위를 이단, 삼단으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계류의 옆으로 드러난 뿌리에 물을 적시며 자라고 있는 나무 중에 섞여 자라는 풍치 좋은 소나무들이 곳곳에 있었다.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 자라며 건조해도 잘 버티는 나무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풍부하게 쏟아지며 흐르는 물가에서 자라난 소나무들은 새삼 생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천천히 생각해보니 소나무가 살아가고자 하는 땅은 본래 척박한 곳이 아닌 것이다. 비옥한 토양에는 무엇이든 자랄 수 있지만 너무 환경이 어려운 그런 땅에는 다른 나무들은 살지 못하므로 비로소 소나무의 차지가 가능해진 것이다. 소나무를 생태학적으로는 양수(陽樹)라고 한다. 숲은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 이를 천이(遷移)라고 하는데, 햇볕이 있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양수 소나무 숲이, 그늘에서도 견디는 참나무 같은 음수(陰樹)가 커가게 돼 이내 햇볕을 가리게 되면 점차 도태(淘汰)되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숲은 이제 소나무 숲에서 참나무 숲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열악해 다른 활엽수들이 제대로 자랄 수 없는 땅에 떨어진 솔씨들은 햇빛을 가리는 다른 나무들에 치이지 않고 비로소 자신만의 터를 잡아 꿋꿋하게 살아간다. 내가 만난 소나무들이 바로 그런 나무들이다. 그러니 소나무의 독야청청(獨也靑靑) 홀로 푸르른 강직함보다 더 큰 미덕은 숲의 요소로 태생적인 불리함을 가지고도 자신만의 강인함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니, 그래서 그 푸르름이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싶다. 제각기 타고난 역량과 환경은 모두 다 다르고 때론 여러 가지 불리함으로 출발을 한 듯싶지만, 바위틈에 자리잡아 아름다운 솔씨처럼, 우리 스스로에게 적절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나만의 삶이 존재하리라 믿는다.

이 여름은 이 산야의 곳곳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 구경을 권하고 싶다. 경북 울진 소광리의 금강소나무 숲은 올곧고 푸르른 기상의 우리 소나무에 대한 자긍심을 절로 키워준다. 대관령의 금강소나무는 내력을 알고 보면 80년 전, 좋은 솔씨를 하나하나 뿌려 만든 숲이다. 소나무 숲도 긴 안목으로 잘 가꾸면 얼마나 아름다운 숲으로 만들 수 있는지, 성심(誠心)을 가진 노력이 얼마나 큰일을 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안면도의 소나무 숲은 소나무 핏줄에 곰솔(海松)의 혈통을 아주 약간 섞어 바닷바람에도 아름답고 곧게 잘 자라고 있으니 환경에 잘 적응해 거듭나는 지혜와 용기를 담고 있다. 가야산 해인사나 통도사를 가는 길목의, 또는 배경의 소나무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성찰해 평화로움과 선(善)함을 지향하게 한다.
 

어디 이 소나무들뿐인가. 우리나라 소나무의 탄생 신화쯤 되는 무가(巫歌) ‘성주풀이’에 천상 천궁에서 죄를 짓고 내려와 안동 땅 제비원에 거처를 정한 성주에 명을 받은 제비가 전국의 산천 곳곳에 퍼뜨린 소나무들…. 이렇게 어렵게 자리잡고 살아남은 그 숱한 이 땅의 소나무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오며 만들어낸 자연문화역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어느새 기품 있는 소나무의 푸르름이 우리에게 스며들 것이다.

이렇게 소나무들과 여름을 보내고 나면 이내 선선한 바람이 불 것이다. 그 즈음 다시 월악산의 달 구경을 떠날 날을 기약해 본다. (문화일보)

 

 식물의 가뭄 고통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628)

“올해 비에게 졌습니다.” 지난해 여름 ‘푸른광장’ 코너에 ‘나무의 변’이란 제목으로 실었던 글에 뉴스 앵커의 말을 빌려 썼던 첫 문장이다. 그때에는 너무 많이 쏟아져 산사태가 일어나서 인용한 말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하고 싶은 지금은 그와 정반대로 너무 비가 오지 않아서다.

예측할 수 없는 비, 가뭄, 저온 또는 고온, 조기 개화(開花)나 낙화(落花)…. 자연은 정말 섬세하고도 오묘한 조화로움이 가득한 세상인데 그 질서가 혼란에 빠져 있다. 내가 참여해 수행하는 연구 가운데는 이런 과제도 있다. 구상나무처럼 지구가 자꾸 더워지면 이 땅에서 살아가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는 한대성(寒帶性) 식물들이 자생지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 떨어지기까지의 과정이 기후변화와 함께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모니터링해 이후를 예측하며, 수목원에 인공적인 풍혈시설을 만들어 이들의 안전한 도피처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잡을 수 없는 기상 변화로 인해 큰 난항에 빠져 있다. 어떻게 이 복잡한 현상을 데이터로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필자의 이러한 고민은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어려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수확할 농사를 망쳐버린 농민들의 어려움에 비하면, 값싼 채소마저 장바구니에 담기 어려운 현실과 길가의 가로수에까지 물을 주어야 하는 노고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도록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생명력 왕성했던 길가의 잡초들마저 늘어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 느껴진다.

식물에 있어 물은 생명 그 자체다. 아니, 이는 비단 식물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해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몸은 75% 이상이 물이라고 하는데 식물은 80∼90% 이상이 물이다. 그 가운데 벼의 경우에는 10%포인트만 물이 부족해도 말라 죽어버리니 이 가뭄 속에서 겪는 식물들의 고통을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식물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양분을 만들기 위해 광합성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빛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물이며 이렇게 만든 양분을 이동시키는 일도 물이 한다. 지금 물이 없으면 이후의 식물들의 삶도 암담하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물은 운반이 이뤄지는 과정은 복잡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증산(蒸散)을 통해 대기 중으로 나가고 다시 구름이 되고 비가 돼 떨어지는 지구의 물순환이 이뤄진다. 흔히 나무가 가득한 숲은 홍수와 가뭄을 조절한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꺼번에 내린 비가 나무뿌리가 뻗은 토양에 흡수되고 뿌리를 통해 운반되면서 조절된다. 식물이 이용하는 물은 1%가 광합성에, 10% 이하가 잎이나 줄기, 열매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니 대부분은 자연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잎이나 열매도 사람이나 동물에게 먹거리로, 약으로 나눠 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유기체적 지구에 빨간불이 켜졌다. 20년 만에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20’ 환경 정상회의가 지난주에 폐막했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입장 차이로 구속력 없는 선언문을 남긴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평가들이다. 1992년 당시 세계 정상들의 생각만큼 노력했다면 오늘 이 이상스러운 기후의 변화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빨리 우리가 살고 있는 초록별 지구가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해 갈등을 지속하며 각자의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젠 정말 자연을 함부로 손대고 개발하는 것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잡는 일과 같다는 것이 시시각각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남 탓하기 전에 나부터 자연을 달래는 일에 노력해 봐야겠다. 무엇이 있을까? 우선 전기를 아껴 쓰고, 가능한 한 일회용품 사용을 삼가고(여전히 쓰고 있는 일회용품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수돗물을 틀어 놓고 쓰지 말고,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분리수거를 더 철저히 하고…. 그리고 나무를 더 많이 심고 가꾸고.

“올해는 자연을 달래도록 노력해 볼랍니다.”(문화일보)

 

산딸나무의 비밀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531)

산딸나무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봄꽃들은 지고 여름꽃들은 아직 풍성해지기 전, 이즈음 잠시 숲에 꽃피는 식물들이 드문 시기다. 그 가운데 산딸나무 꽃들이 환하게 피어나는 시기여서 덩달아 마음도 환해진다.

산딸나무는 산딸기와는 집안 자체가 다른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큰키나무지만 산딸기 같은 붉은 열매가 달려 그 이름이 산딸나무가 되었다. 나무 가득 피어나는 산딸나무의 꽃들을 보고 있자니 그 순결한 아름다움이 감탄스럽기도 하고, 이 말 못하는 나무 하나가 하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게 한다.

산딸나무 꽃은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오묘한 모습 가운데는 지혜로운 메시지들이 숨겨져 있다. 우선, 협력과 조화의 미덕이다. 원래 산딸나무 꽃 하나하나는 매우 작다. 가뜩이나 우거진 숲에서 꽃들이 너무 작아 일부러 찾아와주는 곤충들이 없자 작은 꽃들이 공처럼 동그랗게 모였다. 한 번의 방문으로 수 십 송이의 꽃가루받이가 가능하도록 말이다. 우리가 산딸나무의 꽃을 보고 수술과 암술 부분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수십 개의 꽃이 모인 꽃차례에 해당한다. 산딸나무는 그러고 나서도 곤충들의 눈에 잘 안 뜨이나 싶었던지 꽃차례를 싸고 있는 포(苞)라는 부분을 희고 큰 꽃잎처럼 변신시켜 전체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변신했다.

말하자면 보잘것없는 작은 꽃들이 서로 힘을 모으고 스스로 변신해 가장 효율적인 집합체를 만들고, 더욱이 그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목표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국민에게 결코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신문 지상의 여러 모습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산딸나무의 작은 꽃들이 각각의 주장을 버리고 협력과 조화의 미덕으로 아름답게 공공의 목표를 향해 가면서 몇 십 배의 효율을 올렸고, 결국은 각각이었으면 하지 못했을 꽃들은 꽃가루받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모두 충실하게 이룬 것이다.

산딸나무 꽃들의 두 번째 메시지는 겉모습이 아닌, 말치레가 아닌 진실을 담은 진심을 보는 마음이다. 산딸나무는 영어로 ‘도그우드(dog wood)’라고 하는데, 한때 이 나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든 나무라는 소문이 크게 돌아 한동안 교회마다 이 나무를 구해 심는 일이 유행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산딸나무 종류는 예수가 살았던 지역에 살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의 모순으로 인해 낭설임이 밝혀졌다. 그러자 나무 그 자체의 소중함을 소홀히하고 그저 떠도는 말만 맏고 이 나무를 심었던 사람들은 다시 베어내 다른 나무를 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얄팍한 사람들의 마음에 경종이라도 울리듯 남겨진 곳의 나무들은 이듬해 일제히 꽃으로 수십 수백 개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를 만들어 나무 가득히 피워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꽃잎처럼 생긴 포는 각각 4장이 마주 달려 전체적으로는 십자가처럼 보인다.

이런 이야기는 사찰에서도 볼 수 있다. 염주나무나 찰피나무를 두고 부처님이 득도하신 나무라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모으는 일이 있는데 피나무 종류의 열매로 염주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처님이 진리를 깨우친 나무는 무화과나무과에 속하며, 우리나라에는 추워서 살지 못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나무 구경이 아니고 기도하며 부처님의 뜻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지금 막 피어나는 산딸나무 한 그루가 내게 건넨 말이 이러하니 그 숱한 나무가, 풀이 소리없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숲은 1년 중 지금이 가장 생명이 충만한 때다. 나무든 풀이든 서로 다른 달력과 전략을 가지고 때론 늦게, 때론 이르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때론 꽃샘추위나 성급한 고온에 당황해 그 시기를 조절하기도 하지만, 이즈음 열심히 광합성을 하며 생장하고 더불어 신록이 푸르러 가는 그런 때다. 지금 숲에 가면 나무들은 초록빛 잎새를 반짝이며 싱그러운 기운이 넘쳐난다. 산림욕도 가장 좋은 시기가 바로 이 오월과 유월 사이 오전이라고 하지 않나. 지금 숲을 향해 문 밖을 나서자. (문화일보)

 

맑은 영혼 되찾기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503)

어느 누구의 어떤 삶이든, 삶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다. 세상이 나날이 편리해지고 있긴 하지만 일상은 나날이 더 어렵고 팍팍하다. 세월의 깊이만큼, 일상의 고단함만큼, 거기서 느끼는 스스로의 한계만큼 내 마음도 얼굴도 굳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누구나 한때 가장 천진한 웃음을 웃던 아기였고,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이 맺히다가도 구르는 낙엽에 까르르 소리내어 웃던 소녀였으며, 그 소녀를 바라보며 수줍어하던 소년이기도 했다. 처음 손을 잡았던 첫사랑의 설렘도 두근거림도 다 한때 우리의 것이었다. 하지만 문득 이 맑고 천진한, 말랑거리는 우리의 순수한 모습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감춰져 있는 건 아닐까, 오래 가려 있어서 어느새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고귀한 이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과 삶에 힘겨워 허덕이며 그저 물질적·육체적 생활로 살아가는 사람이 본래부터 따로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양면이 있다. 나이가 들며 존경했던 인물들이 점차 줄어들게 되는 이유도 위대한 일면을 보고 감동했다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한 편린을 엿보게 돼 실망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신부님이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동창 모임이 있어 가셨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인데, 조금 전까지 추억에 젖어 웃고 떠들며 놀던 친구들이 신부님을 보자 돌연 진지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인생의 상담을 해와 어쩔 수 없이 친구가 아닌 성직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성직자도 신을 전하는 모습과 삶의 모습들이 함께 존재한다. 우리 모두에게도 존귀하고 아름다운 영혼과, 삶과 타협(妥協)하는 마음이 함께 존재함을 안다.

이제 삶에 가려졌던 맑고 깨끗한 영혼을 들깨우고 싶다. 더 굳기 전에 그래야 한다. 굳어진 가슴을 열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음악일 수도, 마음을 뒤흔드는 시 한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이 찬란하게 펼쳐진 봄의 숲에서 자연을 만나는 일이 아닐까.

고개를 들어 둘러보자. 그리고 이미 와 버린, 그리고 너무 빨리 가 버릴까 안달이 나는 봄을 보고 느껴 보자. 내 마음처럼 수십, 수백년을 살아 오면서 오랫동안 딱딱하게 굳었던 느티나무 고목의 줄기에서 얼마나 연하고 순결한 새순을 내어 놓는지 그 어린 잎의 솜털 보송거리고 야들거림을 들여다보자. 얼어서 딱딱하던 대지가 녹고 푸석거리는 땅속에서 잎새를 돌돌 말아 올라오는 청나래고사리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둣빛 잎을 펼쳐내는지, 어느새 복수초 꽃잎이 지고 얼레지가 펼쳐내는 분홍빛 꽃잎들은 또 얼마나 요염한 모습인지 들여다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자리에 이런저런 풀들이 돋아나고 홀아비꽃대가 흰꽃들을 쑥 뽑아올린다.

잠시 눈을 감고 온몸의 오감을 열어본다. 나를 감싸고 도는 그 부드러운 봄바람 속에 산뜻산뜻 느껴지는 꽃향기를 느껴본다. 발끝으로 손끝으로 촉감을 집중하면 대지의 풀이나 나무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가깝게 생명을 느낄 수 있다.

숲이 멀다면, 현관 앞에만 나서도 자연은 존재한다.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올라온 보랏빛 작은 꽃, 앉은뱅이 제비꽃이 보이고, 노랑저고리를 입은 길가의 민들레가 방긋방긋 웃고 있다. 작은 빈터엔 벌써 삼각 열매를 매단 냉이의 작고 흰 꽃무리와 타원형 열매를 매단 꽃다지의 노란 꽃무리가 어우러져 있다. 가로수 은행나무엔 손톱만한 어린 잎들이 삐죽삐죽 돋아 무지 귀엽다. 정말 신기하게 그렇게 들여다보면 은행나무의 개성 넘치는 꽃구경도 가능하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서 이렇게 생명력 넘치는 풀이며 나무며 자연을 만나고 있노라면 어느새 입가엔 미소가 맴돌고, 긴장됐던 어깨 근육은 스르르 풀어지며 눈은 반짝거린다. 삶에 가려 있던 맑고 아름다운 영혼들이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문화일보)

 

초록 나라, 푸른 미래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405)

오늘은 제67회 식목일이다. 엊그제 봄비가 내려 온 땅을 흠뻑 적셨다. 봄비는 말 그대로 생명의 물이 되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며 풀에다 초록빛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식목일은 휴일이었다. 온 국민이 나무를 심기 위해 하던 일도 잠시 멈추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그 정도로 부지런히 나무를 심어 국토를 푸르게 하는 데 한 마음이 되었다. 그 노력의 성과로 이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녹화의 선진국이 되었다. 그간 우리가 심은 나무는 100억그루가 넘는다고 한다. 그렇게 심어진 나무들은 흘러내리는 땅을 붙잡고, 가뭄과 홍수를 조절하며 대기를 맑게 바꾸고, 헐벗은 국토를 아름다운 국토로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졌다. 산림헌장(山林憲章)에는 ‘숲은 생명이 숨 쉬는 삶의 터전이며, 꿈과 미래가 있는 민족만이 숲을 지키고 가꾼다’는 말이 들어 있다. 꼭 맞는 말이다.

세계 1위를 꼽으라면 떠오르는 것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지만 이렇게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국토녹화에 성공한 것은 세계 무대에 나가면 단연 최고의 성과로 꼽히면서 전 세계인들은 신화(神話)에 가까운 이 일을 부러움과 존경의 눈으로 본다. 그리고 잘 살고 싶은, 아니 제대로 살고자 하는 여러 나라에 그 비결 전수를 요청하곤 한다. 산림청에서는 아시아산림협력기구를 설립하고, 산림협력센터를 설치해 아시아는 물론 멀리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협력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는 일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정한 녹화 선진국이 되기 위해 숲을 가꾸는 일은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심었던 나무들은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나날이 훼손돼 가는 척박한 땅에 빨리 정착해 자라는 것이 목표였다.

특히, 아까시나무와 리기다소나무, 은사시나무 등은 그에 적합한 나무들로, 그들이 해야 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오늘의 이 국토를 만든 일등 공신이다. 이제 그 나무들이 만들어준 좋은 여건을 토대로 특성과 목적과 장소에 맞게 각각의 나무들을 골라 적절한 방법으로 심고 가꾸며, 숲을 건강하게 만드는 섬세한 기술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사이 숲의 역할도 훨씬 중요해졌다. 산림에서 나오는 다양한 생물 자원의 미래 가치는 뒤로하고라도 기후변화가 지구 생태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숲은 유일한 탄소의 흡수원인 것이다. 이러한 역할은 단순히 환경보호의 측면을 넘어 온실가스 감축 의무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국가의 부담을 줄여주는 직접적인 경제적 효과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의 직접적인 삶으로 가 보아도 그렇다. 산소를 공급하고 대기를 정화시키는 등의 눈에 잡히지 않은 공익적(公益的) 기능은 나중에 따져 보더라도, 건강하고 쾌적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질을 볼 때에도 숲을 떠나서는 미래를 생각하기 어렵게 됐다.

산림청이 내놓은 생애주기 맞춤형 산림복지를 보면 아이들은 엄마의 배속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태교(胎敎)의 숲’에서 부모와 함께 자연과 교감하며 건강하게 출발해 ‘숲유치원’에서 숲과 더불어 뛰어 놀고 배우며 창의력과 품성을 익힌다. 청소년들은 숲교육 프로그램을, 청년들은 다양한 산악 레포츠와 트레킹을 즐기고, 중장년층들은 자연휴양림과 산림치유 공간을 제공하며, 노년기가 되면 숲에서 요양을 하거나 자원봉사 서비스를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수목장(樹木葬)에서의 휴식까지 배려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현대판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것이다.

지구에, 나라에, 이웃에, 나아가 제대로 살고 싶은 우리 자신에게 빚지고 싶지 않다면, 오늘 나무 한 그루라도 심을 방법을 찾아보자. 심을 땅이 없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다. 함께 미래를 꿈꾸지 않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음만 먹으면 나무시장도 있고 나무 심는 이런 저런 행사가 곳곳에서 열린다. 오늘 심은 한 그루 나무가 내 마음에 초록빛 삶을 심은 것이고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문화일보)


 

꽃샘추위, 사람샘추위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308)

계절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엊그제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린 뒤 한결 부드러워진 대기의 기운은 이미 봄이 가까이 와 있음을 말해준다. 하긴 복수초꽃소식이 전해진 지도 한참 되었다. 꼬물꼬물 새싹이며 올망졸망 키 작은 봄꽃들이 올라와 파릇하니 덮여가고 있을 남도의 들녘이며 산자락으로 지금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은 충동에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들썩거린다.

생각해보면 신비롭다. 그 무엇도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이, 돌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얼어 있던 땅도 때가 되자 어느새 사르르 녹았다. 그뿐인가! 꽁꽁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이 가장 연하디 연한 새순이며, 다칠까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작고 고운 꽃들이 아닌가. 노루귀, 한계령풀,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현호색… 하나같이 그러하다.

어디 땅 위의 풀들만 그런가. 굳은 나무 위에 부풀어 터진 새순이며, 특히 봄의 나무들은 꽃이 먼저 가득 피어나 화사하고 보드랍기 이를 데 없다. 진정으로 큰 변화는 때가 돼야 비로소 이뤄지는가 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작고도 소중한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런 역경을 견디고 피어난 봄꽃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꽃샘추위다. 영하의 혹독한 겨울도 모두 이겨낸 이 장한 봄의 생명들이지만 막상 갑작스럽게 몇도 내려가 어는 기온이 되면 큰 피해를 받는다. 어찌된 일일까? 이는 준비하고 대비해 겪어내는 일과 예측하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의 차이다. 겨울 동안 풀들은 뿌리줄기에 붙은 눈이나 씨앗의 형태로 겨울을 견딘다. 나무들은 지난 계절의 연한 조직들은 다 떨궈내고, 새봄을 맞이할 연한 순들은 두껍고 견고한 겨울눈 속에 담아 그렇게 혹한의 계절을 견딘다. 닥쳐올 어려움을 알고 있으므로 미리미리 준비하고, 식물들마다 나름의 비법으로 한동안 포기하고 굳게 견디어 겨울 추위를 견뎌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돋아난 새순과 이미 피어난 꽃들은 화사한 새봄이 왔음을 알고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노력해 경쟁 없는 봄 햇살을 한껏 누리며 꽃 잔치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추위까지는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상처 입고 때론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리기도 한다.

만일, 이른 봄철에 저 꽃들도 뒤늦게 올라오는 다른 식물들처럼, 예측할 수 있는 모든 추위를 다 보내고, 느지막이 천천히 싹을 올리면 어떻게 될까? 꽃샘추위에는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숲속의 다른 경쟁 식물들이 모두 솟아오른 뒤다. 서로가 서로의 빛을 가리고, 양분과 수분을 더 차지하려는 뜨거운 경쟁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 확률로 보면 예측하지 못한 꽃샘추위의 피해를 감내하고서라도 오롯이 봄 숲을 차지하는 게 나을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아니면, 경쟁에 치이더라도 안전하게 천천히 살아나가는 것이 좋을까? 알 수는 없다. 그건 식물마다 제각각 해야 할 선택의 문제다.

사람들의 삶에도 이런 샘을 내는 추위가 있는 듯하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미있게 노력해 비로소 세상을, 혹은 목표한 바를 얻은 듯하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샘을 내는 추위처럼 예측할 수 없었던 변수들이 나타나고, 생각보다 아주 사소한 돌발 변수에 삶의 방향이 바뀌어 버리곤 하니 말이다. 요즈음 한참 달아오르는 선거 마당도 그러하고.

그렇다면 꽃샘추위에 당한 봄꽃들은 이제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피해를 본 꽃들은 세상을 다 잃은 듯싶지만, 옆에 있던 줄기의 눈이 새롭게 터져 새순이 다시 올라오기도 하고, 땅속에서 몇 년씩 묻혀 살던 씨앗이 움트기도 한다. 물론 숲을 구성하는 종류가 바뀌고 밀도가 달라질 수 있다. 또 한 계절을, 한 세대를 건너가야 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자연은 푸르게 이어진다.

나는 이른 봄꽃들의 이러한 노력과 모험심이 좋다. 안주하여 평이하게 묻히기보다는, 어떤 샘을 내는 추위가 닥칠지 몰라도 내가 선택한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며 내 인생의 봄을 만들어내고 싶다.(문화일보)

 

동백꽃과 매화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202)

2월은 시작의 계절일까, 아니면 매듭을 맺는 계절일까. 2012년 새해는 양력 1월1일에 이미 시작된 지 오래고, 설날을 보내면서 또 한번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수없이 건넸다. 하지만 각급 학교나, 계절이 매우 중요한 우리 같은 식물학자들에게 해마다 2월은 학년이 바뀌고 졸업도 하는 때이자 봄 식물조사를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다.

2월에 꽃구경가능한 나무는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좀 늦은 동백꽃과 좀 이른 매화가 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의 꽃이 가지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우선, 동백꽃은 겨울꽃이다. 바다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온 대청도 북쪽한계선이나 고창 같은 곳에서는 이른 봄에 꽃구경이 가능하니 말 그대로 왜 동백(冬柏)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지천으로 꽃이 피는 제 고장 남쪽으로 가면 이미 지난해 12월에 꽃이 피기 시작해 지금이 한창인 것이다.

매화는 열매를 기준으로 보고 매실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표준 추천 이름이긴 하지만, 오늘은 지극히 꽃 중심의 이야기이니 ‘매화’로 이야기하겠다. 그런데 이 꽃나무는 대표적인 봄 꽃나무다. 수많은 매화의 품종 가운데 눈 속에서 꽃이 필 만큼 빨리 핀다고 해서 ‘설중매(雪中梅)’라고 부르는 종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지금부터 꽃눈을 부풀리며 열심히 준비해 다른 나무보다 조금 빨리 꽃을 피우는 이른 봄의 꽃인 것이다.

좀처럼 흰 눈을 볼 수 없는 남쪽 섬, 불붙듯 피어난 붉은 동백꽃잎에 바다 소금이 변하여 된 듯 흰 눈발이라도 흩날리다 앉으면 동백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 된다. 언제 보아도 싱그러운 잎새는 사시사철 윤기로 반질거린다. 또 잎겨드랑이에 꽃자루도 없이 달리는 꽃은 조금씩 겹쳐져 달리는 그 붉은 꽃잎 사이로 드러나는 수많은 노란 수술은 마치 일렬로 붙여 돌돌 말아 놓은 듯 단정해 짙푸른 잎새와 함께 멋진 색의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 오래돼 회갈색으로 매끈거리는 그 운치 있는 수피(樹皮)라도 어울리면 동백나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선보인다. 게다가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 그 붉은 꽃 송이가 그대로 툭툭 떨어지는 그 선연한 낙화(落花)의 모습이라니.

매화는 또 어떠한가? 군자의 고결함을 가지고 있어 예로부터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꼽혔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매화를 귀하게 여긴 것은, 첫째로 함부로 번성하지 않은 희소함 때문이고, 둘째는 나무의 늙은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며, 셋째로 살찌지 않고 마른 모습 때문이며, 넷째로는 꽃봉오리가 벌어지지 않고 오므라져 있는 자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으랴. 매서운 추위를 뚫고 꽃을 피워 내는 그 의연한 기상과 함께 향기 또한 매력적인 게 어떤 이는 매화 향기가 ‘귀로 듣는 향기’란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마음을 가다듬고 잔잔한 분위기에서 비로소 진정한 향기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동백꽃이나 매화가 늦은 겨울부터 피었다고, 혹은 이른 봄부터 핀다고 해서 더 중요하거나 덜 아름다운 게 아닐 것이다. 이 꽃나무들은 그 각각이 갖고 있는 생태적·생리적 특성에 맞게 적응하고 조절하여 건강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리라. 물론 그렇게 살아가기까지 남쪽 꽃 동백과 북쪽 꽃 매화는 각각의 환경에 적응하며 자리잡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과 세월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학교에서 개학을 일찍 시작하도록 일정을 잡아놓다 보니, 힘들어 꾀가 난 아이와 아침부터 갈등을 겪었다. 트인 부모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참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 문제인 것을 절감한다. 생각해보면 조금 늦게 정열의 붉은 빛이 아름다운 동백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아이들을, 혹은 한여름 눈부신 자귀나무 같은 개성 넘치는 꽃을 피울 아이들을 모두 다 미리미리 준비해 남보다 먼저 매화꽃으로 피어나라고 하는 것이 조급한 부모의 마음인 것 같다.

수없이 이렇게 깨닫고 알고 결심을 해 보지만 머리와 가슴과 말이 모두 따로따로 행동하는 것 또한 부모의 한계이니 이를 어찌할꼬.(문화일보)

 

겨울 소나무를 보며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20105)

영하의 매서운 날씨가 며칠간 계속됐다. 눈 소식도 있었다. 지구를 함부로 사용한 대가는 종종 기후변화로 나타나곤 한다. 갑자기 따뜻해지는 것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 유난히 돋보이는 나무들이 있다. 늘푸른나무, 곧 상록수들이다. 이 상록수는 소나무·전나무·주목처럼 침엽수가 대부분이지만, 따뜻한 남쪽지방에 가면 후박나무·굴거리나무·동백나무처럼 넓은잎을 가진 상록수들도 있다.

엄동의 지금은 그 중에서도 소나무가 더욱 돋보인다. 나무들도 사람처럼 인위적으로 유명하거나 가치를 높이 치거나 존재를 모르거나 서로 다른 대우를 받고 있지만, 사실 나무들 모두 각각의 의미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어디 귀하지 않은 생명의 존재가 있을 것인가.

하지만 때론 어떤 나무들은 특별한 상징이 되고, 가치가 된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가진 나무를 꼽는다면 바로 지금 떠오르는 이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 모진 추위에 더 이상의 생장과 함께 초록을 포기해 버린 뭇 나무들 틈에서 독야청청 푸른 소나무 말이다.

소나무는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문간에 금줄을 치고 솔가지를 끼워 나쁜 기운을 막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솔가지로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나무껍질에서 꽃가루까지 많은 먹거리를 제공한다. 죽어서 들어가는 관(棺)도 소나무관을 최고로 치며, 소나무가 있는 산에 묻힌다 하니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나무의 신세를 진다는 말은 과히 틀리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 소나무를 사랑하여 가슴에 담은 이유는,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을 견디며 살아남았음에도 여전히 푸르고 올곧은 그 풍모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멋진 소나무도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 그대로 같은 의미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숲은 언제나 그대로인 게 아니라 변화한다. 이를 생태 용어로 천이(遷移)라고 한다. 소나무는 자라는 데 햇볕이 꼭 필요한 양수(陽樹)여서 천이과정의 초기에 있는 나무다. 그런데 우리의 숲은 그늘에서 견디다 올라온 참나무와 같은 음수(陰樹)로 바뀌고 있다. 환경이 바뀌어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소나무 중에서도 특별히 아름답고 올곧게 올라가서 늠름한 금강송은 바람을 받기 좋은 강원 울진·삼척과 같은 지역에서 자라는 특별한 생태형이다. 이 소나무의 씨앗을 안온한 남쪽의 바닷가에 심으면 춘양목이라고 불리는 그 소나무의 장대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나무가 진정한 가치를 발하는 또 하나의 모습은, 아무도 살 수 없는 그러한 땅, 심지어 암반으로 이뤄진 절벽에서조차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얼었다 갈라지는 작은 바위 틈에 조금씩 실뿌리를 내려 마침내 굵은 뿌리를 박고 살아남는, 그래서 더욱 모진 겨울이 다가와도 여전히 의연한 그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소나무들이 도심 곳곳에 심어지고 있다. 하지만 소나무는 오염이 있는 도시에서는 살아가기에 어려움이 많은 나무다. 천이가 한창 진행되는 자연적인 숲의 흐름을 거슬러 소나무들의 세상을 다시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그 아래에서 견디며 자라고 있는 다른 나무들을 제거해 줘야 한다. 또 도시에서 보려면 그 어떤 산에서나 잘 자라고 있던 나무들을 옮겨와야 한다. 그리고 해마다 죽은 가지들을 잘라주는 등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제 살 곳이 아닌 데서 수많은 초록과 회색에 묻힌 소나무는 더 이상 돋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는 그 자리, 그 숲에서 그 모습으로 그렇게 도도히 변화하는 환경과 시대적인 위치를 느끼며 살아갈 때 진정 그 속기(俗氣) 없는 아름다움이 가슴에 새겨진다.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무쌍할 올 한 해, 이 험난한 세상 독야청청 푸르고 아름다운 많은 이들이 각기 그 모습으로, 각기 그 가치로 오래오래 아름답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가슴에 여전히 푸르게 살아가기를.(문화일보)

 

메타세쿼이아는 나의 멘토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11208)

불 붙은 단풍이 마음을 휘젓고 지나간 지난 몇 주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에 빠져 살았다. 내가 일하는 국립수목원 들어가는 입구, 왕숙천가에 이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하루 하루 나뭇잎에 깊어가는 가을 빛깔이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같은 갈색이었지만 처음엔 초록에서 갈색으로 이어가는 듯하더니, 눈여겨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은 붉은 빛이 나다가 이제는 그 갈빛이 담담한 무채색이 되어 가는 듯하다. 드디어 깃털같은 잎새를 하나 둘 떨구기 시작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나무들처럼 나이 들고 싶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분명 나무의 일생은 한 해의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음과도, 이 메타세쿼이아란 종(種)의 흥망성쇠와도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시작이 있고 절정을 넘어 그 어떤 끝으로 가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같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그렇게 가버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이토록 깊이 있고 품격을 가진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 또, 어떻게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평화로움으로 젖어들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한해 한해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을, 높고 단단해지는 나 자신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생각해보면 이 의연한 메타세쿼이아란 나무의 삶은 정말 격동의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메타세쿼이아는 은행나무와 같이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오랜 옛날, 이제는 화석으로만 볼 수 있는 공룡과 함께 살았던 이 나무는 한때 지구상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전쟁을 벌일 당시 중국 정부가 서쪽의 산간 지대로 쫓겨 가면서 발견됐다고 한다. 이후 임업 공무원이 처음 보는 이 나무의 이름을 몰라 채집해서 난징대학에 보냈고, 군락이 있는 자생지 조사와 함께 1946년 학계에 공식 발표됐다. 그 후 전 세계인은 더 이상의 멸종을 막자며 뜻을 모아 기금을 출연하고 연구해 대량 증식에 성공했다. 마침내는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됐다.

물론 이렇게 극적인 스토리도 있지만 잔잔한 삶의 편린들도 볼 수 있다. 가장 늦게까지 단풍들지 않는 오래 묵은 침엽수이면서도 새봄이면 어김없이 연한 새순을 내놓는다. 노쇠해 안주하지 않고 항상 젊은 느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남 담양 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로 사랑받는다. 그러면서도 오래된 아파트의 큰 나무들은 한 순간 그 거대함으로 때 아닌 눈총을 받기도 하니 그게 바로 영화같고 인생같은 나무의 삶이다.

메타세쿼이아의 잎들마저 지고 나면 나무를 덮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고스란히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무 줄기와 가지들은 그 각각이 나무가 가지는 개성이 되고, 한편으로는 치열한 빛의 경쟁 속에서 토양과 수분 등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피라미드 수형을 가진 이 나무들을 보면 얼마나 일생 동안 균형잡힌 모습으로 살아오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섬세하게 발달한 잔가지들은 조금의 잎이라도 더 달고 더 많이 생장하려고 노력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더욱 멋진 것은 경쟁하고 있는 이웃 나무와의 경계에 있다. 각 가지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서로 양보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모습은 바로 가지와 가지가 닿을 듯 닿을 듯하지만 서로 나눠 쓴 공간에서 볼 수 있다. 그 오랜 세월의 초록별 지구에서 살아오면서 시간에 초연하고, 스스로의 집착에 의연했으며, 항상 새로움으로 거듭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삶의 기복 끝에 운치 있고 기품 있으며 지극히 평화로운 존재로 살아가니 어찌 이 메타세쿼이아를 닮고 싶지 않겠는가.

정말 아름다운 것은 숲속 나무들은 제각기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숲으로 나가 고스란히 맨몸을 드러내고 섰는 나무들 가운데 나와 닮은 나무 하나씩 골라 친구로 삼아 평생 격려하고 지켜보며 살아가면 어떨까. 모두에게 권해 본다. 장담컨대, 어떤 형태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아낌없이 줄 것이다.(문화일보)

 

나무, 사람 그리고 나라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11110)

며칠 만에 숲이 텅 빈 듯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더니 한동안 깊이깊이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던 나뭇잎들이 사방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길이며 숲이며 낙엽이 가득하고 이내 숲은 드러난 가지들로 휑하고 서늘하다. 문득 눈앞에 펼쳐진 숲이 허전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겨울을 맞고 우린 또 새봄을 기다릴 것이니 그 속에 희망이 숨어 있음을 안다.

지난달에 경남 창원시에서는 제10차 유엔 세계사막화방지협약(UNCCD) 당사국 총회가 열렸다. 알고 보면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린, 국제적인 유엔기구 총회, 장·차관급만 81개국에서 참가했고, 전체적으로는 156개국 6450명이 참가한 엄청난 규모의 국제회의였다. 하지만 그 규모나 중요성에 비해 국민의 관심이 적어 참으로 아쉬웠다.

생각해 보면 선거라는 큰 이슈가 있었고, 당장의 사막화가 사막이 없는 우리나라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에 대해 인식이 덜 된 탓이기도 하지만, 한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봄마다 불어오는 황사에 우리가 가지는 직간접적인 피해만 생각해도, 또 사막화에는 포괄적으로 황폐화가 포함돼 있고 세계적으로는 해마다 우리나라 면적만큼의 땅에 황폐화가 진행되며,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에 바로 한반도의 북한이 포함돼 있으니 이 문제는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와 있는 매우 중요한 현안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일에 대한 해법은 결국은 그 땅에 나무를 심어 푸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 황폐화한 땅을 녹화하는 데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가지고 있으니 대한민국에서 열고 산림청에서 주관하는 일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세계 1위 반도체·조선…. 하지만 이 밖에도 잘 드러나지 않는, 오랫동안 부동의 세계 1위가 있다. 나무를 심어 짧은 기간에 국토를 푸르게 만든 성과다. 그런데 이 다소 막연했던 자랑거리가 뜻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UNCCD에 참석했던 수천 명이 실제로 체험하고 크게 감동하여, 공식 회의 시간 외에도 회의장 곳곳에서 사람마다 모임마다 화제가 되고 공감하는 일이 기적처럼 있어났다. 바로 인천공항에서 김해공항까지 가는 동안 비행기 속에서 대한민국 국토의 아름다움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였다. 나무로 가득 찬 산들이 강과 바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산엔 초록 또는 당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빛이 그윽하고 그 언저리 적절한 곳에 아기자기하게 마을과 도시가 앉아 아늑하게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토에 대한 경탄이었다.

전쟁으로 가난했던 나라가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것은 분명 부러움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졸부’에게 보내는 질시도 조금은 섞여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 불모의 헐벗은 산을 초록숲으로 만든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놀라움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것 같다. 더욱이 이 푸르름이 먹고 살기 위해 바둥거려야만 했던 경제 개발 시기에 함께 이뤄졌기에 이내 진정한 존경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언지를 생각하게 해줬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런 칭찬과 감탄을 듣다보니 가슴 깊이에서부터 자긍심이 차올라왔다. 월드컵 응원 같은 곳에서 잠시 일었지만 대부분 잊고 지냈던 나라에 대한 뭉클함 말이다. 간혹 애국심이라는 말이 다소 엉뚱하고 특정한 모습으로 표현돼 의도와는 달리 그룹지어지고, 이젠 말할 때 고려할 것이 많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생기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라사랑은 그 나라에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국토를 이루는 자연을 사랑하는 일이며,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이뤄낸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무가 가득한 숲, 푸른 하늘과 맑은 물,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게 존중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런 일 말이다.

‘나무사랑, 나라사랑, 사람사랑’. 1960~1970년대에 표어로 들었음직한, 그래서 다소 구태의연함이 염려되기조차한 이 단어들이 깊어가는 이 가을을 바라보는 오늘 아침, 내게 가장 절절한 화두다.(문화일보)

 

결실을 생각하며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11013)

가을이 깊어 간다. 하룻밤 사이에 점점이 물들기 시작한 가을 단풍은 이제 숲 깊숙이까지 스며들고 있다. 가을은 서늘하고, 풍요롭게 넉넉했다가도 때론 스산하고 비장하다. 시리도록 청명한 가을 하늘에 햇살은 그지없이 맑기도 하고 그 사이에서 스며드는 바람결이 차고 냉정하기도 하다. 매년 맞이하는 가을이지만 한번도 심상하지 않았다.

가을이 풍요로운 것은 결실하기 때문이리라. 수확으로 넉넉해진 마음이 지난 계절들의 노고도 잠시 잊게 하는 듯하다. 나무나 풀의 입장에서 보아도 결실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을 듯하다. 궁극적으로 지난 여름 열심히 광합성을 하여 성장하고, 꽃을 피워 내어 기기묘묘 갖가지 방법으로 꽃가루받이를 효과적으로 하려고 애썼던 일도 결국은 잘 결실하여 후손을 기약하고자 했던 한 가지 일념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어쩌면 식물들도 그 풍요로운 보람 속에 쓸쓸함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무들은 겨울을 견뎌야 하고, 풀들은 이제 지상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땅속에서 뿌리 눈으로 혹은 씨앗으로 지내야 하니 어쩌면 자기 개체, 그 존재 자체로 눈부시게 발현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식물들의 노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애써 맺은 열매와 씨앗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퍼트려야 하는 숙제 말이다.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져 살구빛 껍질이 뿜어내는 고약한 냄새도 알고 보면 나무의 심통이 아니라 내년에 싹이 틀 씨앗에 끝까지 손이 타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이니까. 밤송이의 가시도, 도토리의 떫은 맛도 모두가 자구책의 하나다.

하지만 모든 식물이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방어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맛있게 과육을 만들기도 한다. 열매를 사람이나 동물들이 먹으면 그로써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씨앗은 동물의 몸속에서 다리를 빌려 멀리 이동하여 배설물로 다시 땅 위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단단한 종자의 껍질이 쉽게 발아되도록 도움을 받기도 하고, 양분을 얻기도 한다. 물론 사람들은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골라내고 육종해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들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말이다.

다른 전략들도 있다. 민들레나 박주가리 같은 씨앗은 씨앗을 작고 가볍게 하고 거기에 솜털까지 달아 자신을 바람에 얹는다. 민들레 씨앗은 바람을 따라 얼마만큼 멀리 갈 수 있을까. 한 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40㎞까지도 간다고 한다. 고집스럽게 웅크리지 않고 스스로를 한없이 가볍게 만듦으로써 참으로 긴 여행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초등학교 시절에 들었던 도둑놈의갈고리, 도둑놈의지팡이, 진득찰 같은 식물의 열매들은 끈끈이를 이용해 남의 몸에 붙어 간다. 물론 그것은 이름에 명예롭지 못한 단어를 붙인 채 사람이나 동물들이 귀찮아 털어내버리고 던지는 모멸감을 견뎌낸 대가다.

어떤 식물의 방법이 가장 좋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식물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스스로가 가진 환경에 맞게 적응하고 변화해 오늘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가치관이 달라 밤 속의 가시를 택하든, 사과의 달콤함을 고르든, 진득찰의 끈끈함을 가지든…. 하지만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저마다의 방식은 다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더불어 자연 속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가지 못하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은 잠시의 영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 지구생태계에서 만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흑과 백, 극단으로 나뉘는 오늘의 우리가 걱정이다.

가을이 좀 더 깊어져 낙엽이 수북수북 쌓일 즈음, 그 낙엽을 베고 가을 숲에 누워 보고 싶다. 구수하기도 달콤하기도 한 낙엽 냄새를 맡으며 시린 하늘을 전경으로 가지마다 마지막 남은 나무 잎새들을 시야 가득 만나고 싶다. 한 줄기 바람이 일고 그 바람 따라 떨어지는 단풍나무 열매의 날갯짓을 만나 보려 한다. 희망을 품은 채 작별을 고하는 그 열매가 마지막 순간에도 가지는 그 자유로움을 닮고 싶다.(문화일보)

 

계수나무가 불러준 가을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10915)

문득 가을이 왔음을 알았다. 계수나무가 알려주었다. 어제 오후 산책길, 아직은 수목원 마당에 푸르름이 성성하지만 바람결에 살짝 묻어나는 그 달콤한 향기가 코 끝으로 스며들며 나는 온 몸과 마음으로 가을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물론 절기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가을의 조짐은 이미 사방에 퍼져 있다. 아침저녁의 찬 기운은 물론이고 들판에 가을강아지풀이 무성함도 그러하다. 하나둘씩 국화과 식물들이 숲에서 득세하고 있음도 그러하고, 전나무숲의 짙푸른 때깔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도 이미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름의 끝과 가을의 모호한 경계에서 가을로 선을 그어주는 일은 언제나 계수나무가 한다.

내가 일하는 광릉숲 국립수목원의 많은 나무 중에서 이 계수나무는 가장 먼저 가을을 알려주는 나무의 하나다. 이미 초록의 잎새가 하나둘씩 노란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계수나무가 가장 먼저 가을을 맞이하며 향기로 혹은 때깔로 이를 알려주는 이유는 계수나무의 고향이 가을과 겨울이 먼저 시작되는 북쪽이기 때문이다. 국립수목원 마당에 자라고 있는 계수나무는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나간 모든 계수나무의 부모가 되는 나무라고 한다. 광릉숲의 일부는 우리나라 나무심기의 산 역사이기도 한데, 팔십년쯤 되었을까! 하여튼 오래 전, 좋은 나무들을 들여와 우리나라에 잘 적응하고 살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연구하던 곳이었고 그 중에 이 계수나무들이 포함돼 있었으며 이 나무들이 매년 만들어낸 씨앗들이 묘목으로 키워져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 정도면 이 아름다운 거목 계수나무들이 이 땅에 살 역사가 만만치 않은데 오래 전 일찌감치 겨울을 준비하던 고향에서의 본성을 잊지 않고 여전히 그렇게 가을을 열고 있는 것이다.

북쪽 고향보다 훨씬 온화한 땅에 대를 거듭해 살았다면 이제 변해 그만 다소 게으르고 편안하게 지내도 될 것 같건만 계수나무는 여전히 스스로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를 잊지 않고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나무들이 완고하고 고집스럽게 사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잘 적응하여 부채살같이 수려한 가지를 펼쳐내고, 봄이면 꽃잎도 없는 사소한 꽃들이 잔잔하게 피어나가 전체를 보면 마치 이른 봄의 아침 연자주빛 꽃안개가 피듯 은은한 모습으로, 여름이면 심장을 닮은 귀여운 잎새가 이어져 크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이내 가을엔 이렇게 달콤함으로 사람을 사로잡고 있으니 새로운 환경에서, 그에 적절하게 가장 잘 변신하여 새로운 가치로 자리잡아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전통과 특성을 소중히 계승하는 부분과, 새로운 환경을 적절하게 받아들여 아름답게 변화하여 세상에 득이 되고 발전되게 지금을 살고 미래를 이뤄가는 것은 서로 상반된 가치가 아니라 함께 조화돼 이뤄져야 하는 것임을 계수나무는 여전히 첫 가을을 맞이하며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가치를 둘로 나눠 말 한마디에 내편과 네편이 돼 나눠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부(富)의 정도와 사는 곳에 따라 편이 갈리고 가치도 획일화되는 것은 정말 옳지 않다고, 자연에서 보여주는 순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계수나무의 가을은 이제부터가 진짜다. 동글동글 잎새들이 노랗게 물들어 눈부실 것이고, 그 향기는 온 숲으로, 우리 마음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매년 이즈음이면 좋은 일을 나 혼자 차지할 수 없어서 항상 권하는 일이 가을 숲길 걷기다.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그리고 자신있게 권한다.

등진 사람이 있다면,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솜사탕 향이 진동하는 광릉숲 계수나무 밑을 걸어보라. 그저 묵묵히 그 나무길을 걷기만 해도 무욕(無慾)의 나무향은 어느새 우리의 마음을 녹여 주고 우리는 어느새 손잡고 돌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꼭 계수나무길이 아니어도 좋다, 낙엽이 져 구수해진 숲의 향기, 맑고 서늘한 가을 바람, 그 바람 따라 팽그르르 단풍나무 열매의 비상… 가을을 맞이하는 숲의 풍광들은 경쟁과 긴장의 일상에서 잠시 나를 치유해줄 것이다.(문화일보)

 

나무의 변(辯)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10818)

“올해 비에게 졌습니다.” 특별한 이 한마디로 인기가 치솟은 한 방송국 9시 뉴스 앵커의 말이다. 언제가 끝일 줄 모르고 내리는 비에 대한, 비로 인해 생겨난 이런저런 일들을 이보다 더 간략하고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비는 언제나 과하기도 모자라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맙고, 요긴하고 때론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비에게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이런 큰비 소식이 들려올 때 많은 일이 나타나지만 간간이 산사태가 일어나고 나무가 넘어져 무엇인가를 덮치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그때마다 나무의 대변인도 아니건만 마음이 불편하고 무엇인가 말 못하는 나무들을 대신해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들이 불쑥불쑥 들곤 한다. 알고 보면 그건 나무 탓이 아니고 우리 사람 탓이다.

산사태는, 예전에는 흔히 일어나 자주 듣던 이야기다. 한동안 뜸했다. 국토가 헐벗고 산 위의 흙을 아무것도 잡아 주지 못하던 시절에는 작은 비에도 수시로 산이 흘러내리곤 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군 세계 최고의 성과 중 하나인 산에 나무를 심어 푸르게 만들어낸 덕분에 나무들은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혀 흙을 붙잡아 국토의 유실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알고보면 나무 탓이 아니라 그동안 나무 덕을 보며 무사히 살아왔던 것이다.

산사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산사태가 일어나는 곳은 그 많고 많은 산자락 중에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산에 비가 내리면 물이 흐르는 길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무심히 잘라놓은 물길로 갈 곳을 모르게 된 물이 이리저리 스며들다 결국은 지반을 약하게 하여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산자락에서 무엇인가를 계획할 때에는 당연히 물길이나 나무 방향 등을 따져보며 건물이나 시설을 앉혔건만 그간 공사하는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인지, 숲에 들어찬 나무들로 산이 저절로 잘 조절해준 덕분인지 이런 것을 고려해 계획하는 일에 소홀해졌다. 그 대신 회색의 도시를 피해 시원한 산 가까이에, 초록의 생명이 가득한 나무들 사이에, 공기를 맑게 걸러내고 산소를 뿜어내는 그 숲 옆에 살고자 하는 욕구들은 늘어만 갔다. 정말 한동안 조심하지 못했다.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시하곤 했었다.

나무 중에는 논란에 휩싸였던 잣나무가 겪었을 마음 고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물론 잣나무의 뿌리는 소나무보다 깊게 내리지 않아 흙을 붙잡는 능력이 다른 나무보다 약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가장 먼저 넘어져 산자락과 함께 밀려 내려올 수 있지만, 보다 다양하게 숲에 나무들을 심고 가꾸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지원했더라면 좀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잣나무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코리안 파인(Korean Pine)’으로, 잣을 맺어 행복한 결실을 제공해주며 보람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잣나무라면 참으로 섭섭하고 허무할 것 같다.

비가 많이 오면 나무들도 걱정이 많다. 꽃을 피워 꽃가루받이를 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풍매화든 충매화든 종족 번식에 근본적인 어려움을 겪어낼 것이다. 어렵사리 성공하여 결실이 이뤄진들, 후손을 기약할 만큼 충실하게 열매를 성숙시키는 데 한계가 올 것이다. 그러면 먹이사슬로 연결된 숲속의 다른 생물들도 살아가기 힘들어질 텐데. 햇살이 부족하니 양분을 만들어 키와 품을 키울 엄두를 못 낸다. 약한 가지들은 부러지고 그 틈을 다소 병충해의 침입에 속수무책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멀리 보면 충분히 내린 비는 생명을 가진 나무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며, 쓰러진 나무들은 분해돼 가며 버섯 같은 미생물을 키워내고 비옥한 토양으로 돌려줄 것이다.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볕이 들어와 새 봄에는 보다 많은 풀들과 작은 나무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릇되게 부를 과시하는 졸부처럼, 내편이냐 네편이냐로 옳고 그름이 갈리는 정치처럼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 더 멀리 보고 신중하고 겸허하며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잊지 않고 함부로 하지 않으면 된다. 아주 오래된 산골 마을은 아무리 험한 산세 속에서도 아무리 큰 비가 내려도 여전히 의연한 이유를 잘 생각할 줄 알면 된다.(문화일보)

 

연꽃 단상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20110721)

비가 그쳤다. 뜨거운 햇살도, 청명하게 드러난 햇살도 눈부시다.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 끈질기게 이어지던 빗소리를 잊고 후덥지근한 느낌에 짜증을 내고, 내리쬐는 폭염에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날씨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간혹 엇나가기는 했어도 그래도 대강은, 무엇이든 예측이 가능했었다. 계절이 바뀌고 이 즈음 우리 땅 어느 산야에선 어떤 꽃들이 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장마여도 그 사이사이 드는 볕이 있어 여름 식물조사의 일정을 어찌 잡아야 한다는 ….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참 좋아했었는데 길고 길었던 비의 끝에서 문득 두려워졌다.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 정말 많이 다가와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그래도 모처럼 햇살을 받은 숲 속의 나무들은 활력을 얻어 반짝인다. 내가 일하고 있는 광릉숲 한쪽의 봉선사에서는 백련의 꽃송이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진흙 벌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날 그 백련 꽃송이들이 주는 맑음과 향기로움을 생각해보니 비로소 가슴 깊이 드리워졌던 걱정의 무거움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비 갠 숲길의 산책만으로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백련꽃 한 송이의 순결함으로 이렇게 큰 위로가 돼 줄 수 있다니 내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내 전국의 이곳저곳에서 연꽃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물가에 탐스럽고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면 세상의 걱정일랑 뒤로 하고 더없이 평화롭게, 웬만한 동요에는 동요하지 않은 채 유유히 물가에서 살아가는 모습이어서 부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알고 보면 연꽃의 평화로움도 거저 얻어지는 건 아니다. 연꽃은 남들이 살지 않는 물가의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여기저기 뿌리줄기를 뻗어 자리를 잡느라 분주하고, 잎은 물 위에 가볍게 뜨게 하고, 산소가 들어오지 않는 물속에서 숨을 쉬느라 뿌리며 줄기며 구멍이 숭숭하다. 우리가 먹는 연근에 난 구멍이 바로 연뿌리가 숨을 쉬는 통로다.

세상살이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참으로 고달프고 벅차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스스로를 느끼며 내 삶의 질펀함과는 무관하게 화려하고 풍성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욱 큰 외로움과 좌절을 느끼기도 하지만 크고 작고 길고 짧음의 차이일 뿐 제각각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는 것이라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정말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도 진흙 속에서 싹을 틔워 피어난 연꽃처럼, 그렇게 어려움 속에서 충만하게 아름답고 의미있게 엮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밀을 폭로하면 대단한 연꽃이지만 알고 보면 생물들의 삶은 다 그만그만하다. 고결한 연꽃도 그러하다. 이 땅에서 사라져 가는 수많은 수생식물을 모아 보전하고 있는 나의 일터 국립수목원의 수생식물원에는 연꽃이 없다. 일부러 키우지 않는다. 연꽃의 무성함이, 때로는 살기 힘들어 입지가 연약한 다른 자생 물풀들의 삶을 위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꽃들은 다양한 수생식물들과 더불어 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 연꽃은 물이 고여 썩어가는 수중 공간을 자신은 더럽히지 않은 채 향기롭게 만들어 주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을 한다.

연꽃의 잎은 구조가 특별하여 물방울이 스며들지 않고 스스로 자기들끼리 데구루루 뭉쳐 굴러 떨어진다. 매우 배타적인 것 같지만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는 지혜다. 사람들은 과학으로 이를 모방하고 자동차 유리에 적용한다.

한여름에 피어난 연꽃 송이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그 무엇이든 내가 지금 서 있는 모습에서 바라보이는 잣대로 단정지을 수 없는 이유와 우리는 너무도 아는 것이 적어서 인간과의 관계든 자연과의 관계든 조심스러운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다.

갓 피어난 백련 한 송이의 찻잎을 넣고 그 향기를 갈무리해 두었다가 반년을 기다리고, 한겨울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산사에서 지인들과 그 순백의 연꽃을 다시 피워 향기와 차를 나누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호사라는 한 스님의 삶처럼, 이 여름 우리의 삶도 그렇게 맑고 향기롭게 비워가는 일이 간절하다.(문화일보)

 

나무처럼 풀처럼

오랜 가뭄 끝의 단비가 반갑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식물들에게도 더없이 반가울 것이다. 예전 같으면 조금은 먼 출근길이 힘겨울 것도, 성급하게 올라온 꽃송이들이 행여 다칠 것도 염려됐겠으나 서두르다 어려움을 겪어낸 나무나 풀들은 그 곁에서 숨 쉬고 있던 새로운 희망의 눈(芽·아)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마음 아파도 참을 수 있고, 개인적인 불편함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희망의 새봄을 준비하고 있을 이 산야의 새싹들에게도 그야말로 단비일 것이다. 이제 산불에 대비하느라 주말을 포기해온 나와 같은 산림공무원들도 한시름 덜게 됐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숲은 말 그대로 약동하고 있다. 언 땅이 녹고 봄비에 촉촉해진 땅에서는 온갖 생명이 기지개를 켠다. 나뭇가지에 잎이 나기 훨씬 전부터 그 생명의 움직임은 시작된다. 나무줄기엔 수액이 돌고, 겨우내 숨죽이던 식물들은 땅속이나 줄기 위에서 꽃이며 잎이 될 눈들을 부풀리거나 씨앗의 껍질을 벗겨내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을 터이다. 대견하게도 말이다. 대부분은 봄꽃이며 새순들이 눈앞에 펼쳐져야 봄을 절감하지만, 자연처럼 예민하게 감각을 세워 다가서 보면, 물이 오른 나뭇가지의 탄력이며 생명이 올라오는 땅의 흙냄새며, 들썩이는 겨울눈의 미세한 변화를 우리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낭만적인 봄타령은 행복하기 그지없는데, 살아간다는 것은 보다 긴박하다. 언 땅이 녹아 물이 오르기를 가장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마도 고로쇠 수액을 모아 파는 사람들이 아닐까. 다른 이들이 눈치 채기 훨씬 전에 이 봄의 기운을 알아내 설치를 해야 한다. 사실 물이 오른다 함은 나무로서는 새로운 성장에 대한 희망으로 설레는 엄숙하고도 감동적인 순간이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인 사람들은 고로쇠나무의 양분이 될 수액을 가로채 마시는 새로운 재미와 즐거움을 알아버렸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누군가는 나무에 구멍을 내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그 물을 모으는 노고를 해야 하는 것이 삶이긴 하다.

수액이란 나무의 도관을 흐르는 액체로 양분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이동된다. 모든 나무에 수액이 흐르지만 고로쇠나무 수액은 양이 많고 맛이 달아 상품이 된다. 세계적으로는 캐나다의 설탕단풍이 가장 유명한데, 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흔히 파는 메이플시럽이란 것도 바로 이 수액을 졸여 만든 천연 당분이다. 고로쇠나무나 설탕단풍 모두 단풍나무 집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산에 갔다가 링거주사를 꽂고 있는 환자들처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채취통을 보면 마음이 짠해지며 나무에 해롭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래서 관련 연구자들이 이 문제로 실험을 해보았는데 역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산림청에서는 그 결과에 따라 어린 나무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나무의 지름에 따라 채취 구멍수를 제한해 수액 채취 허가를 내주고 있다.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듯, 쇠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을 키우듯 우리는 나무가 주는 잉여의 선물을 받아 쓸 수 있다는 개념이다. 많은 수익이 되니 일부 지방에선 논에 벼를 키우듯, 산에 이 나무를 심어 키우기도 한다.

문제는 늘 그렇듯 지나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눈앞의 소득에 급급해 나무가 우리를 위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채취하다보니 결국 나무가 쇠약해지고, 구멍을 뚫었던 곳을 방치해 병균이 침입하게 만들어 아낌없이 자신의 피와 살이 될 양분을 내어준 나무를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언제나 매일 황금알을 낳아주던 거위에 더 큰 욕심을 내 배를 가른 악덕 주인이 생각난다.

수액이 점차 줄어들 즈음, 숲엔 물이 올라 삐죽삐죽 다투어 올라오던 새순들이 햇살을 받아 쑥쑥 잘도 자란다. 나무마다 풀마다 새싹의 모양도 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할 수 있으나 숲에서 보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순결한 새싹들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봄 숲이 이런 어린 잎들로 가득할 즈음, 숲은 이를 탐내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든다. 곰취, 참나물, 돌나물… 이름만 들어도 신선하고 입맛이 도는 산나물들이다. 산나물도 숲이 우리에게 주는 참으로 근사한 선물의 하나다. 그것도 적절히 골라서 알맞게만 이용하면 언제까지고 지천으로 보내주는 그런 선물이다.

하지만 산나물도 지나친 욕심을 내는 게 문제다. 일부 잎들만 살짝살짝 떼어내 근본을 다치지 말아야 식물은 다시 새잎을 내보낼 수 있고 그래야 그 잎으로 광합성을 해서 식물이 자라야 뿌리를 퍼뜨리고 꽃을 피우고 결실하여 다시금 새 생명들이 그 숲에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산 옆에서 산에 삶을 기대어 사는 이들은 나물을 뜯을 때 손가락에 도구를 끼고 잎만 일부 떼어내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한다. 문제는 무모한 욕심으로 뛰어든 얼치기 나물꾼들이 자연이 내어준 무궁한 나물밭을 망치는 일이다. 줄기마다 하나의 순도 남기지 않아 더 이상 펼쳐낼 잎이 없어 죽어가는 두릅나무의 가시 가득한 줄기도, 높은 줄기에 오르기 어려운 나머지 베어내 가지와 잎만 잘라간 음나무와 껍질째 벗겨진 느릅나무 모두가 사람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배를 가른 또 다른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눈앞의 작은 욕심으로 내일의 희망까지 잃지 말았으면 싶다. 어려울수록 고로쇠나무나 산나물이나 두릅나무를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혹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그 일의 순서가 생기지 않을까…. 학문이든 경제든 정치든.

이 나무와 풀들이 욕심 내지 말고 살라 한다. 추운 겨울 끝에 어김없이 봄이 오는 일이 진리이듯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엔 다시 풍성한 가을이 오며 결국 우린 풀처럼 나무처럼 일생을 또는 한 해를 마감한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 연구관]]

 

가을…, 비우기 연습

 

금수강산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숲이 아름답고 가을빛이 곱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광릉숲이 제 일터입니다.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해마다 이즈음이 되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가을 때깔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지요. 제가 스스로 만들어 붙인 ‘광릉 8경’엔 국립수목원 생태통로에 무리지어 피는 샛노란 피나물군락도 있고, 제각기 돋아나 몽실몽실해진 4월의 소리봉 활엽수림,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늠름한 전나무길….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년 이맘때면 푸르디 푸른 가을 하늘빛 아래 가지가지 빛깔로 물든 나무들이 둘러싸고 그 푸르고 붉은 빛이 그대로 물 위에 담긴 육림호 가을 풍광이 가장 빼어난 모습의 하나랍니다.

그런데 올해 자연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제 시간표에 약간의 이상이 생겼습니다. 비도 너무 많았고, 청명한 가을 하늘 구경하기가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습니다. 들과 산에 피고 지는 꽃들도 적응하기 힘이 들었던지 여름꽃과 가을꽃이 뒤엉켜 계절의 감각을 놓치곤 했습니다. 광릉숲의 가을빛도 더디게 오고 있습니다.

정말 좀처럼 거스르기 힘든 자연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일까.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은 우리들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유린한 수많은 자연과 그 속의 생명들 때문일까. 지구 차원의 변화를, 자연의 섭리를 작은 시각으로 속단하고 너무 호들갑스럽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제 지론이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덕분에 가슴과 머리를 모두 열고 시시각각 숲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항상 숲에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바쁜 일상에 쫓겨 필요에 의해 풀과 나무를 찾던 때가 더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눈앞에 턱 하니 다가선 변화무쌍한 모습들을 바라보면 감동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그런데 올가을 매일 매일 차곡차곡 간절한 눈으로 숲을 바라보노라니 새로운 모습들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을빛은 전체가 붉게 혹은 갈빛으로 스르륵 전면에 물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섬세한 점으로 다가선다는 사실입니다. 초록 속에 하나둘씩 점점이 붉어지기 시작한 잎새들, 한 나무에서도 나무의 끝과 속, 아래와 위가 하나도 같지 않고, 한 잎새마저도 조금씩 조금씩 연한 오렌지빛에서 하나하나 바뀌어 이내 붉은 빛으로 바뀌어 갑니다. 순간 순간이 모여 나무들을 지금 이 순간의 가을빛으로 만들어 갑니다. 세상의 모든 성취도 아주 작고 작은 노력들이 쌓여 이루어지듯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한순간에 물든 가을 단풍을 느낀다는 것은 평소엔 제대로 그 나무들에 눈길을 두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올가을을 기다리며 느낀 또 하나의 모습은 초록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더디게 숲의 초록빛이 오래도록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울긋불긋한 가을빛이 오기 전의 초록은 분명 여름의 반짝이면서도 왕성하던 그 초록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가을의 초록은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한 초록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일부로서 우리 인간도 매 순간이 아름답고 의미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여름의 초록빛 청춘만이 눈부신 것은 아니라는군요.

다 아는 것처럼 나무 이파리가 초록인 것은 생장을 위한 왕성한 광합성을 위한 엽록소의 발현이니 이는 곧 생명이며 성장입니다. 우리에게 눈부신 화려한 단풍빛은 더 이상의 성장을 포기한 나뭇잎들의 장렬한 표현이지요. 이내 낙엽이 지고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나의 일생을 나무의 한 해와 비교하면 어느 쯤 될까. 분명 한여름의 그 무성한 생명력이 넘쳐나는 때는 지난 듯합니다. 지금의 내가 가을을 맞이한 숨을 죽인 초록빛, 하지만 따뜻한 초록빛이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리고 내 앞의 인생엔 고운 단풍빛과 그윽한 낙엽의 시절이 남아 있을 터이고 그것은 결코 쓸쓸함이나 절망이 아닌 하나하나가 소중한 시간들일 것입니다.

요즈음이 나무들이 이리 고울 수 있는 것은 버릴 것을 버릴 줄 알며 그 때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뭇잎들은 지금 아무도 모르게 잎자루에 떨켜를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계절이 다 가도록 나뭇잎을 움켜쥐고 있다면 제때 아름답게 물들지 못하고 갑자기 닥쳐온 추위에 마르거나 상해버릴 것입니다.
 

평소에 존경하던 많은 분들이 나무처럼 가질 때와 버릴 때를 생각하지 않아, 그동안 이루었던 많은 것을 잃으시는 경우를 더러 봅니다. 스스로의 결단과 희생을 전제하지 않고 지금까지 일군 최고의 경지를 영속하기 위해 주변의 희생을 무감각하게 당연시하는 일들이 생기기 쉽지요. 반대로 지금까지 이룬 것을 내주고 비워내 어느 순간 더 깊은 존경을 받고 계신 분들도 많이 계시지요.

정말 내 인생은 가을에 들어서 따뜻한 초록빛이고자 한다면 새로이 채우기, 부풀리기보다는 진정으로 비우기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 때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끝에 단풍 빛이 곱고 결실이 충실한 삶으로 이내 의연하게 겨울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비가 그치고 나니, 그리도 시시각각 크게 뜨고 바라보는 내 눈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단풍빛이 변해 버렸습니다. 알지 못할 감동으로 눈물이 울컥 쏟아질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그리 조바심치며 기다리던 모습이 하루이틀 새 성큼 다가서 버린 것입니다. 가장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눈앞에 두고 날짜를 꼽아보니 지난해와 난 차이가 불과 며칠이었습니다. 지난 몇 달간 그리 이상한 징조들이 가득했었는데 말입니다. 진부하기조차 한 말이지만 그래도 안할 수 없습니다.

자연은 진정 위대합니다. 내 삶도 그 한 조각을 닮고자 합니다. 비우기부터.

[[이유미 / 국립수목원 생물표본과 연구관]]

 

가로수, 어떻게 가꿀 것인가

거리를 지나노라면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적절한 여름비처럼, 한여름에 가로수 그늘이 정말 고맙다. 가로수 없는, 그래서 초록을 느낄 수 없는 뜨거운 거리를 지난다고 생각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 여름 가로수가 어디 그늘 주는 일만 하랴. 잎에서 하는 증산운동으로 주변이 시원해지고, 더러운 먼지들은 흡착되어 줄어들고…. 게다가 가로수 좋은 것이 또 어디 여름뿐이겠는가. 새순이 지고 낙엽이 지기까지 시시각각 계절의 변화가 생명의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가로수일 터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가로수가 지난 10여년 사이에 몰라보게 좋아졌다. 어디나 길을 내면 으레 나무를 심으니 많아지기도 하고, 플라타너스나 은행나무 일색이던 것이 튤립나무·회화나무에서 환한 이팝나무, 늠름한 메타세콰이아 등으로 다양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예전에는 선진국에 출장을 가면 도시의 멋진 가로수가 많이 부러웠는데 이제 크게 뒤질 것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요즈음, 이 가로수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고민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지방자치단체장 가운데서 “우리 동네 가로수를 바꾸어 주세요” 하는 민원들을 5·31 지방선거 공약으로 내건 신임 지자체장들은 가로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좋게 생각하면 아주 행복한 일이다. 많은 시민이 거리의 가로수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보니 말이다.

문제는 가로수를 바꾸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벚나무만 해도, 왕벚나무 원산지는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이니 심자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그 나무가 많이 심어진 배경에는 식민지 치하의 아픔이 있으니 삼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 봄이면 거리가 밝고 즐거우니 심자는 의견도 있고, 전국이 일색이니 우리 지역만큼은 개성있는 다른 나무로 심자고도 한다.

그래도 벚나무는 행복한 편이다. 요즈음 가장 미움을 받는 것은 플라타너스다. 예전에 두목림 작업이라 하여 가지를 댕강 하니 잘라버려 느낌이 안 좋기 때문일까? 아니면 버즘나무라는 우리말 이름 때문일까? 잎 뒤에 털이 있어 날리니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한다는데, 나뭇잎 뒤에 더 많은 털이 있는 나무가 수두룩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사실, 플라타너스는 세계 3대 가로수다. 가장 아름다운 마로니에 가로수로 유명한 파리도 교통량이 많은 도심에는 이 나무로 바뀌었다. 플라타너스는 열악하고 척박한 도시환경에서 잘 견딜 수 있는 많지 않은 나무의 하나이며, 공기를 정화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나기도 하다.

이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수많은 세월 동안 그 도시 그 자리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늘과 깨끗한 공기, 때론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할 뿐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생명이며 그 거리의 식구인데, 순기능을 무시하고 일부나마 지금의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억울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청주를 상징하는 플라타너스 나무 터널을 생각해보자. 유럽의 아름다운 거리에서 잘 다듬어져 멋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들을 생각해보자. 사실, 가로수는 정원에 심는 나무와 달리, 기능적인 역할을 해야 하므로 고르기가 쉽지 않다. 한때 복자기나무가 단풍이 고와 심었다가 오염으로 인해 사라져간 사실이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가 칭찬을 받았다가 천공성 해충의 피해를 일시에 받은 예들이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잘 지내오던 나무 식구를 취향 때문에 바꾸려는 마음은 거두고 어떻게 멋지게 가꿀 것인지를 고민하고, 나무를 심을 새로운 거리가 생긴다면 유행처럼 다른 지역에서 좋다는 나무를 따라 심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특색과 환경에 맞는 나무를 골라 심는 것이다.

아무리 자동차도 휴대전화도 빨리 바꾸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해도, 생명을 가지고 가지를 펼쳐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가로수까지 똑같이 생각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유미 / 국립수목원 연구관]]

나무처럼 나이먹기

오랜만에 길을 떠났다. 남도로.

언뜻 들으면 여유롭게 남도로 가을 여행을 떠난 사람 같겠지만, 어렵사리 떠난 출장길이다. 많은 절차를 거치고 두어 번쯤 미루어졌다가 산더미처럼 밀린 일들을 여러 날의 야근으로 급한 대로 정리하고, 더 이상 계절이 가버리면 이번 연구 결과를 제대로 낼 수 없을 듯싶어 감행한 출장이다.

두 개의 산에 있는 식물들을 조사하고 표본을 수집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인데, 가는 길에 겸사겸사 일이 붙는다. 수목원에 새로이 정비하는 수생식물원에 심을 종자도 따야 하고, 희귀식물이 보이면 그것도 조사하고, 산과 더불어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루를 보내는 산의 날 행사에 쓸 재료도 확보해야 하고…, 아휴~.

그래도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가을 하늘을 이고 길을 떠나니 마음이 설렌다. 내가 일하고 있는 수목원 정원엔 계수나무가 맨 처음 물들기 시작하여 낙엽을 만들면서도 솜사탕처럼 달콤한 가을 냄새를 지천에 풍기고 있었는데, 그리고 광릉숲에서 가장 붉게 물드는 복자기나무는 가지 끝에 비로소 가을을 담기 시작했는데, 남쪽은 얼마만큼 가을이 무르익었을까?

봄은 남쪽에서 시작하지만, 가을은 북쪽에서 시작하니 내가 사무실에 갇혀, 놓쳐 버린 가을의 편린들이 그 들녘엔, 산자락엔 아직 남아 있을까? 도착하여 이리저리 헤매고 보니 그 땅엔 지금 보랏빛 쑥부쟁이, 향그러운 구절초, 그리고 보랏빛 꽃향유가 지천이다.

노란 감국이 그 땅의 주인이 되려면 한두 주쯤은 여유가 있을 듯 싶다. 나무들도 모두 아직은 초록빛을 유지하지만 성급한 검양옻나무와 벚나무는 이미 물들기 시작했다. 단풍나무는 아직도 멀었다.

가을 길을 떠남에 들뜬 마음과 많은 목적을 달성해야 하므로 어깨를 누르는 이번 출장길에서 가장 내게 의미있게 생각되는 일은 참으로 오랜만에 P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간다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식물을 알려주시고, 박사 학위를 주신 교수님들은 이미 모두 작고하셨으니 P 선생님이 지금 내게는 가장 좋은 식물선생이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내게, 많은 사람들은 식물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묻기만 하고, 무엇이든 잘 알기를 기대하며 부탁을 한다. 그래서 한없이 부족하고 마음 약한 나로서는 모르는 것을 겁내하며 언제나 긴장하며 허겁지겁 일상을 엮어간다.

그런 내게 무엇이든 무조건 가르쳐주시는 유일한 선생님. 선생님은 오늘도 무심하게 망초려니 하고 지나가는 내게 총포에 붉은 점이 있으니 애기망초라고 일러주신다. 학생이 되어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나도 학생이던 때에는 몰랐다).

P 선생님은 지금 우리 수목원에 초빙연구원으로 와 계시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셨기에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연구비를 받고 그 결과를 업적으로 쌓으며 하는 식물연구를 박봉을 잘라 쓰며, 아무 평가 없이도 평생 스스로 좋아서 해오셨고, 때가 되자 학교를 미련없이 조기퇴직하시고 수목원에서 마음껏 식물과 더불어 살고 계신다. 그런 선생님은 외적인 사회적 지위와 전혀 무관하여도 우린 진심으로 존경하고 마음으로 우러른다.

훌륭한 성취를 이루었던 많은 분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와 그 전에 일구었던 것을 토대로 더 많은 것을 쌓아오느라 도리어 더 큰 것을 잃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알고 계신 무엇이든 알려 주고 나누어 주시며, 스스로를 비워 가시기에 진정으로 훌륭한 스승으로 거듭나고 계신 듯하다.

그런 선생님이 꼭 지금 이즈음의 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한 해를 초록으로 유기물을 합성하고, 대기를 맑게 하며 기후를 조절하고, 그늘도 만들며 열심히 살아오던 나무는 가을이 되어 풍성히 열매를 달고, 또 하나의 유익함을 만들어낸다. 그 나무의 가지 끝은 서서히 세상에서 가장 붉고 아름다운 단풍빛으로 물들어 간다.

생각해 보면 단풍은 환희라기보다는 한 해의 마감을 준비하는, 어찌 보면 비장하고도 슬픈 순간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좀 흐르면 장렬한 낙엽과 겨울 바람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 순간에 스스로 이토록 아름다운 빛깔을 펼쳐내며 우리 앞에 온전히 서 있는 것은 나무와, 그리고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시며 평생 하시고 싶은 식물 연구에만 마음을 두셨던 선생님 말고 또 있을까?

나도 한 생을 생각하니 후하게 주어도 반쯤을 더 온 듯하다. 온전한 나의 삶을 엮어 가는 데 세상의 부(富)와 명예가 헛되다는 것쯤은 이제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처럼 무조건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달리 바꾸어갈 특별한 길이 있지도 않은 듯하여 망설이는 나이.

결코 쉽지는 않을 듯 싶지만, 쌓아가는 일보다 비워 가는 일을 잘 하고자 좀 더 노력한다면 나도 나무처럼, 선생님처럼 내 삶의 어느 한 순간에 더없이 고운 빛으로 발현할 수 있을까.

산길을 내려오다 버려둔 밤나무들이 쏟아내놓은 반질한 밤톨 몇 알을 주웠다. 밤이 늦도록 낮에 조사한 식물표본을 누르느라 아직, 여장도 풀지 못하신 선생님께 잘 깎아 드려야겠다. 사각사각 들쩍 하고 아삭이는 생밤에 이 가을의 향그러움을 모두 담아서.

몸은 고된데 마음이 충만하다. 이 가을처럼.

[[이유미 / 국립수목원 연구관]]

 

가로수는 도시의 얼굴이다

문득 나무 그늘 밑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랐다. 불과 엊그제만 해도 따듯한 봄볕을 쫓아 길을 나서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느새 제법 따가워진 햇살을 피해 다녀야 하는 때가 된 것이다.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가로수가 절실한 계절 말이다.

우리의 가로수를 생각하면 정말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아쉬움들이 항상 남는다. 하지만 가로수란 말 그대로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이어서 좋은 수종인지, 잘 심어져 있는지,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를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나무가 서 있는 거리엔 각기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과 차와 건물과 문화가 있으며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살아가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엔 남도로 조사를 다녀왔다. 이미 담양을 비롯한 그 지방의 여러 곳에서 명물이 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는 그 기하학적인 이등변삼각형 수관(樹冠)을 싱그러운 초록으로 바꾸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녹색의 수벽 사이를 지나는 기쁨이라니. 서울엔 왜 이렇게 멋진 가로수가 없느냐고 동행자가 물어왔다. 대도시엔 이 초록수형으로 가려서는 안 될 너무 많은 건물들이 있고, 나무의 높이만큼 땅속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야 안전한데 땅속의 흙이 넉넉지 않아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런데 뾰족한 삼각형으로 서 있어야 하는 나무가 일부 구간에서는 줄기 끝이 잘려 수형이 뭉툭해져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큰 나무를 옮겨심다 보니 운반과 식재 후 활착을 쉽게 하려고 잘랐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제 편한 대로 살기 위해 메타세콰이어 가로길의 멋스러움을 반감시켜 버린 것이다.

다시 길을 조금 더 내려가니 이팝나무 가로수에 흰 꽃이 한창이다. 이팝나무는 ‘이밥’ 즉 쌀밥같은 꽃송이들을 보며 한해의 풍흉을 점쳤다는 나무이다. 상상해 보라. 순백의 꽃송이가 나무마다 거리마다 가득한 모습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밝겠는가 청주를 생각하면 입구의 플라타너스를 연상하듯, 앞으로는 그 도시를 생각하면 이팝나무가 떠오를 것 같다.

서울도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로수가 아니라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하는 노래처럼 도시에 잘 어울리는 가로수 수종을 골라 심자. 그리고 시민들의 정성으로 잘 가꾸어 한 도시 한 거리의 상징물처럼, 자랑처럼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어제 가회동에 다녀왔다.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곳이다. 한옥마을 풍경과 잘 어우러져 좋은 이미지를 갖는다. 그 길에 사옥을 가진 한 출판사 분의 말씀을 들으니 그 동네 분들은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너무 소중하여 가물다 싶으면 물도 주고, 나무가 자라 전깃줄에 가로막힐까봐 모두들 큰 걱정을 하며 애지중지 여긴단다. 처음 그 길에 소나무를 심는다고 했을 땐 공해에 약한 나무를 심는 데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가로수 하나가 그 지역 문화의 상징처럼 존재하고 공동체를 묶어 자긍심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면서 새삼 진화해가는 우리의 가로수에 대한 인식을 읽게 되었다.

가로수의 조건 가운데, 공해와 병충해에 강하고 겨울에 낙엽이 져 음습함을 막아야 하는 등 원론적인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때론 이러한 교과서적인 조건들보다 문화나 상징이 더 큰 가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적절한 가로수에 대한 정책과 관리방안이 나오려면 좀더 장기적인 안목과 투자가 필요하다. 성공한 이웃동네를 기웃거리기보다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거리마다 잘 어울리는 수종을 고르고, 묘목을 키우고 옮겨 심어 지역과 잘 조화를 이루도록 가꾸어 아름다운 도시 문화를 엮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가로수는 그 도시, 그 지역, 그 거리의 상징이자 얼굴이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 연구관]]

 

움트는 봄이 주는 삶의 교훈

이유미(국립수목원 생물표본과 연구관)

모처럼 시간을 내어 연구실을 싸고 있는 광릉 숲길을 거닐었다. 그 부드러운 봄의 기운이 햇살을 타고 숲길에 스며든다. 이미 복수초는 양지바른 산비탈의 길목에 자리잡고 반질반질 윤기 나는 노란빛 꽃송이들을 터트렸다. 얼었던 땅들은 녹아 푸슬푸슬하기 시작하고 그 속에서 삐죽이 움터 오르는 새싹들이 생명들이 눈에, 마음에 가득 들어온다.

온갖 생명들이 움트고 이러저러한 꽃과 잎들이 터져나오는 봄은, 언제나 마음을 붕붕 띄워내는 그런 설렘이었는데, 이 봄의 느낌은 조금 특별하다. 잔잔하지만 뭉클하니 마음을 움직인다. 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따뜻함을 가슴에 차곡차곡 채워가는 그런 느낌이다. 세상에 어떤 것이 더 편안하고 부드러울 수 있을까

봄의 기운이 부드럽다는 것을 말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것도 이 봄의 새로운 체험이었다. 우리 곁에 있는 생명의 움직임을 얼마만큼은 현상에서 존재의 의미로 바라볼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 듯도 하다.

봄이 되어 땅 위로 올라오는 식물들의 연두빛 모습뿐 아니라, 그러기 위해 지난 겨울 땅속에서 겪어내었을 인고의 어려움이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냉이, 꽃다지, 제비꽃, 앉은부채, 회리바람꽃, 얼레지…. 이름만 들어도 기분좋아지는 그 숱한 봄꽃들의 곱고 여린 모습 속에는, 숲의 수많은 경쟁 식물들이 잠깨기 전에 꽃을 피워내기 위해 이미 지난 가을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모진 겨울을 견뎌낸 인내와 부지런함이 숨어 있음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흔히 땅 위로 보이는 식물의 크기만큼 땅속에 뿌리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남달리 빨리 봄을 여는 이 꽃들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튼실한 뿌리를 땅속에 가지고 있다. 새봄을 맞이하기 위해 이겨낸 어려움의 크기만큼. 아무것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바위틈에도 뿌리를 내리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것도 그 시작은 섬세한 뿌리 끝이 어딘가에 있는 아주 작은 틈새를 파고 들어가는 일이었고 조금씩 조금씩 그 뿌리가 길고 굵어지면서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다.

연일 독도 문제로 들썩거린다. 한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들 누구나 그러하듯 독도는 마음에 살아 있다. 내 가슴에 가장 깊이 남은 독도의 모습은, 수려한 경관도 아니고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괭이갈매기의 군무도 아닌, 바다를 보고 바위틈에 자리잡은 해국(海菊) 사진 한 장이다.

아무도 심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 그 자리에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꽃 해국은 여느 그 섬세한 뿌리로 자리를 잡고, 유난스러웠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며 피워내는 연보랏빛 꽃송이들은, 그리고 그 잎에 생겨난 보송보송한 솜털들은 그 어떤 구호보다도 강렬한 외침을 주고 있음을 느낀다. 그 모습이 장하다 못해 경외감을 갖게 한다.

아무 말없이 말하고 있는 식물이 어디 해국뿐이랴. 섬장대, 털머위 같은 풀들은 그 땅이 울릉도와 연이은 우리 섬임을, 쇠비름과 쑥, 강아지풀 같은 것들은 독도에서 우리들이 드나들고 있음을 그 존재 자체로 말해주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가치와 힘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일순간 화려하게 살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스타들도, 좋은 머리를 잘 써서 불려나간 부동산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자도, 욕심을 대의로 가려 앞에서 외치는 사람들도 아니고, 바로 보이는 것은 지극히 사소해도 진정을 가지고 하나하나 이어가는 우리 민초들의 삶 말이다. 비바람을 맞고 있는 말없는 독도의 해국처럼, 자신의 몇 배가 넘는 뿌리를 내려 겨울을 극복하고 피어나는 봄 숲의 앉은부채처럼.

이제 기꺼이 작은 풀처럼 차근차근 하나하나 맡은 자리에서 하찮을지도 모르는 일을 해나가는 내 삶이 부끄럽지 않다. 그 일이 쌓여 나가 하나의 밀알이, 혹은 터받이가 되어 새로운 희망을 품어갈 것을 의심하지 않기에 말이다.

새봄에 지극히 부드러운 봄 햇살이, 그리고 세월이 가르쳐준 이야기이다.

 

이유있는 ‘끼리끼리’

봄 꽃들이 지천으로 가득하다. 그 사이로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참 보기 좋다. 밝게 웃는 얼굴들을 들여다보노라면 어쩜 저렇게 ‘끼리끼리’ 잘 어울리게 만났을까, 숱하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확률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인연을 맺고 가족을 이루며 서로 닮아가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

하지만 세상엔 보기 좋은 끼리끼리만 있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참으로 많은 끼리끼리가 있다. 평상심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많은 모임이 생기고 끼리를 형성한다. 10년, 20년씩 세월을 거슬러 말할 수 있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 유쾌하지만 어느 틈엔가 동문은 새로운 끼리가 되고, 모처럼 선거를 하면 지역끼리 감정을 엮는 것은 사라지나 싶었는데 그도 아닌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경험해 보니 이러한 경향은 여자보다 남자들의 세계가 훨씬 더하다.

식물의 세계에도 끼리끼리가 있다. 붉디붉은 진달래 무리는 소나무 숲과 함께 자라는 것이지 우거진 서어나무와는 함께 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식물의 끼리끼리는 좀 다르다.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생태적으로 조건에, 서로에 맞는 궁합에 따라 만난다.

우리의 옛 동산이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핏빛 진달래로 기억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불과 몇 십년 전 우리의 토양은 유기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주 척박한 상태였고, 숲에서 다른 나무들은 잡목이라고 베어 나무들의 싹을 없앴다. 그래서 경쟁자가 없는 소나무와 산성 토양에서도 강한 진달래가 소나무 숲을 통해 들어오는 볕을 받으며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숲의 조건이 변했으니 살아가는 나무도 변하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는 숲도 아주 치열한 경쟁의 세계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식물들이 먹고 살아가는 데는 햇볕이 필수적이다. 광합성을 해야 하므로. 하지만 일정한 면적의 숲에서 하늘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차지하려면 얼마나 열심히 전략을 세우며 커 나가야 하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땅 속에서는 수분과 양분의 경쟁이 또다시 일어난다. 나무들은 좀더 많은 햇볕을 차지하기 위해 위로 위로 키를 키우고, 적당히 그늘에 적응하여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나무나 풀도 있고, 약삭빠르게 남이 애써 키워 놓은 나무에 기대어 올라가는 덩굴식물들도 있다. 심지어는 다른 식물을 못살게 만드는 화학물질을 내보내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경쟁자를 일찌감치 물리치는 작용도 있다.

생태학에서 식생을 연구하시는 분들과 조사를 같이 가보면 우리나라의 숲을 짝을 만들어 식생형으로 구분한다. 앞서 말한 소나무와 진달래 군락 이외에도 신갈나무와 당단풍 혹은 산철쭉 군락, 동해안에 많이 보이는 소나무들은 하고 많은 참나무들 중에 굴참나무와 주로 짝을 이룬다. 남쪽으로 가면 서어나무와 조릿대 군락도 만나고…. 숲에는 이유 있는 끼리끼리가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만든 끼리끼리와 다른 것은, 숲의 세계에는 서로 열심히 살아가며 경쟁하지만 적절한 곳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조화점을 찾는다는 점이다. 숲을 아래에서 혹은 위에서 보면 아주 섬세하게 나뭇가지를 만들어 공간을 채우는 큰나무들의 조화가 드러난다. 조금의 빈 구석도 없이 아름답게 펼쳐진 그 가지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조화가 얼마나 열심히 산 흔적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숲을 옆으로 보아도 그렇다. 큰 나무들과 중간 키 나무 그리고 키 작은 풀들이 공간을 나눈다. 노루귀나 모데미풀처럼 큰 나무의 잎이 나기 전 꽃을 피우고 결실하는 봄꽃들이 있듯이 계절을 나누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조화를 이룬, 그래서 가장 풍부한 다양성이 존재하는 더불어 사는 숲이 우리가 말하는 가장 안정되고도 값진 숲이 된다. 세상에 있는 명예와 부(富), 그 어떤 것이 우리 자신들의 삶을 값지고 행복하게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 있을까.

새 순이 갓 돋아나기 시작하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봄의 숲을 바라보며, 끼리끼리 모여 위로만 올라가는 나무들의 고독함일랑 미련 없이 버리자. 더불어 사는 행복을 찾아보자.

이유미/국립수목원 생물표본과 연구관

 

광릉숲을 찾아온 아이들

며칠 전,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만큼 무덥던 날 몇십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내가 근무하는 국립수목원을 찾아왔는데, 생태 체험을 떠난 경기 북부에 있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광릉 숲을 보기 위해 찾아왔는데 잠시만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는 솔직히 조금 내키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간혹 강의나 숲 해설을 하는데,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쓰는 나로서는 애써 만든 시간에 성의껏 이야기하는 마음과는 달리, 건성으로 그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만난 아이들은 정말 밝고 순수했으며 아침의 나뭇잎처럼 싱그러웠다. 이미 까매진 얼굴에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그 아이들이 얼마나 예쁘던지, 무더위도 잊은 채 10분만 하려던 이야기는 자꾸만 이어졌다. 몇몇 아이들이 내가 지은 나무 책을 사서 보고 있는데 그 앞에 붙여놓고 보고 싶다고 저마다 종이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을 때, 내 사인 100장 있어도 god사인 한 장과 바꿀 수 없다고 만류는 하면서도, 혹 오늘의 짧은 인연이 이 아이들이 평생 나무를 친구로 하여 살아가는 데 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 성의껏 짧은 이야기를 써주었다.

‘김남일 안 부럽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선생님께서 인사를 건네왔다. 사실 아이들과 똑같이 입고 섞여 있어서 선생님이신지조차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지난 해 생태교사 연수 때 뵈었던 분. 더운 날 수고하신다고 인사를 했더니 오랫동안 이러한 일을 혼자 해오셨는데 이제는 지자체의 지원도 좀 있고 무엇보다도 의견을 나눌 선생님들이 여러 분 계셔서 아주 행복하시단다. 우리 나라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이렇게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시는 살아 있는 선생님들이 계셔서 아직 희망이 있구나 싶었다.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분은 서울에 있는 학교의 생물 선생님이셨는데 어떻게 이 팀에 오셨나 싶어 그 이유를 물었다. 그 선생님의 서울 학교 학생들은 학원 일정 등이 너무 바빠 도대체 이러한 생태체험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모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아주 씁쓸한 마음이 되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유명한 학원을 좇아 이사를 가고 학원 스케줄을 따라 오가며 방학을 지내는 아이들보다 오늘 자연 속에서 만난 이 아이들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즐거움,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참된 인간으로 성숙해나갈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과학경시대회를 준비하느라 특별 과외를 받는 아이들보다 입시 미술학원에 앉아 색깔을 공부하는 아이들보다 비를 맞고 한창 싱싱해진 초록의 싱그러움과 키재기, 연보랏빛 벌개미취 꽃송이마다 노랗게 살아나는 꽃가루의 질감과 역할, 꽃을 찾아드는 곤충들의 비행의 조화로움과 정교한 질서를 직접 보고 체험한 아이들이 궁극적으로는 더욱 가능성 있는 전문인이 되지 않을까.

또 원정 출산이다, 외국 국적 소유다 하여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을 가지고 정확히 자신의 나라가 어디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일부 상류층의 아이들보다, 땀흘리며 국토 구석구석의 소중함과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들을 체험한 오늘 내가 만난 이들이 훨씬 구체적으로 이 땅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풀 한 포기조차 소중히 하는 훌륭한 국민으로 커나갈 가능성도 훨씬 크지 않을까.

부모들도 높은 점수가 바로 행복과 직결된다는 최면을 풀고, 우리 아이들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회적으로 규정한 신분 상승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 각박하고 긴장된 삶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가치와 기쁨이 존재하는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수목원의 푸르른 나무들을 뒤로하고 그 아이들은 나무보다 더 늠름한 모습으로, 참나리꽃보다 더 환한 얼굴로 떠났다. 매향리 현장을 보고 서해안으로 가서 갯벌체험을 할 것이란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원

 

교과서에 왜 ‘우리식물’ 없나

봄이 왔다. 따사로운 봄볕에 병아리 떼처럼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이 새학기를 맞이한다. 봄은 아이들에게나 식물들에나 시작의 계절이고 보니 덩달아 가벼운 흥분도 인다. 좋은 계절이다.

식물을 공부하면서, 혹은 이를 보전하는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식물의 소중함은, 생각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른들보다는 새싹처럼 여린, 그리고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린이 때부터 심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마음에 담은 식물들이나 혹은 자연은 평생을 두고 가슴속에서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해 전부터 어린이를 위한 식물도감을 준비했었다. 단순히 어른들의 식물도감을 숫자만 줄이고 글자의 크기만 키우는 ‘무늬만 어린이 도감’인 그런 책 말고 정말 눈높이를 낮추어 아이들의 입장에서 재미있고 흥미롭고 유익할 수 있을 그런 도감을 만들고 싶었다.

우선 전문가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식물을 고르고, 생태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반드시 알아야 할 식물들을 또 고르고,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어떠한 형태로든 등장하는 식물들도 골랐다. 바쁜 일과로 몇년째 진도를 붙잡고 있다 보니 그 새 전폭적인 교과서 개편까지 있어서 다시 온갖 교과서들을 검토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렇게 공들여 정리한 식물들을 나란히 놓고 보니 생각보다 우리 아이들이 책에서 접하고 살아야 하는 식물의 현실은 아주 심각했다. 적어도 식물을 전공한 내게는 말이다.

물론 요즈음 교과서는 우리가 학교 다닐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아름답고, 재미있고 유익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6년 동안 접하는 식물들은, 아름다운 꽃이 피는 식물들은 대부분 초롱꽃이나 구절초같은 우리 꽃 대신 히야신스나 아마릴리스 같은 외국 꽃이 훨씬 많았고, 그 외에는 여간해서는 만나지지 않는 농작물이 압도적이었다.

물론 오미자나 머루같은 우리 과일을 알기 전에 방울토마토나 멜론을, 코리안 파인(korean pine)이라고 부르는 잣나무 대신 일본잎갈나무인 낙엽송을 교과서에서조차 먼저 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세상에, 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풀과 나무가 이렇게나 많은데 말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흔히 보는 맨드라미나 분꽃, 칸나 같은 것도 사실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가 크게 오래되지 않은 다른 나라의 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을 먼저 알아서 친근감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고 살아가는데도 진짜 우리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온통 남의 것인 요즈음 아이들에게 이 땅에서 절로 자라는 풀과 나무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숨겨진 놀랄만한 자연의 진리는 누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일까. 그 자연의 세상을 눈여겨볼 줄 알아야 그 안에서 미래과학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첫 단추를 끼운다는 사실은 아직도 말뿐인 것일까?

아이들의 책은 훨씬 넓고 멀리 보아야 옳다. 정확하고 과학적인 내용을 쉽게 이야기하는 것과 본질에서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식물을 설명하면서 노란색 꽃이 피니까 유채민들레의 꽃을 묶어주는 일은 옳지 않다.

사실 이들은 식물학적으로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식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를 잘 관찰하게 하고 꽃의 색깔은 흰색이지만 똑같이 꽃잎을 4장 가진 냉이가 더 가까운 식구임을 이해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거기에서 먹을 수 있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게 되고, 이것이 나중에 냉이집안 식물에서 중요한 비타민을 찾아내는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탐구에서 미래의 생명공학과 기초과학의 기반을 가질 수 있는 과학적인 사고가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 아이들이 수십가지 ‘포켓 몬스터’의 차이점을 구별하여 이름을 외우고 수없이 다양한 탑블레이드(요즈음 초등학생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팽이 이름이다)를 돌리며 길을 걷는 대신, 식물도감을 손에 들고 그 이름과 차이점을 구별해내고 길가에 지천인 질경이를 알아보며 그 질긴 생명력을 배우기를 바란다면 이는 꿈이 너무 큰 것인가.

혹시 모르겠다, 교과서에 나온다면 과외라도 하며 이를 배우게 될지.

/글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원

 

봄을 준비하는 단풍의 지혜

지난 달 시작되어, 설악산에 줄줄이 밀려든 행락인파가 이어져 그 길고 긴 산길에 인간의 띠를 만든채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던 단풍의 행렬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이제 저 남도의 끝자락쯤에 머물러 있다.

지금쯤 오백나한을 바라보며 오르는 한라산 영실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봄에 들려오던 꽃 소식이 남에서 시작되어 더디게 북으로 올라왔다면 그 고운 단풍의 행렬은 그 경로를 고스란히 거꾸로 하여 빠른 속도로 남하한다. 그렇게 가을은 가고 겨울이 다가설 것이다.

흔히들 단풍의 절정을 이야기하지만, 단풍을 제대로 느끼는 것에 때가 있는 것은 아닐듯싶다. 좀 이르다 싶을 때에는 아직은 초록인 잎사귀들 사이에 묻어나는 붉디붉은 당단풍의 빛깔이 선연하게 가슴에 새겨들어 좋고, 절정이라 말할 즈음이면 바라보는 이를 황홀경으로 몰아넣는다.

지금처럼 한때가 지났다 싶은 시기에도 숲으로 향하면 가지 끝에 남은 마른 잎, 산길에 소복하게 쌓여가는 낙엽들, 그리고 더없이 부드럽고 운치있게 물들어 가는 뒤늦은 참나무 숲의 그 갈빛이 갈피갈피 가슴에 묻히고 그렇게 가을은 깊어만 간다.

그러고 보면 가을 숲이 붉은 단풍나무 빛깔만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닌 듯싶다.

노란색 고로쇠, 자주빛 산철쭉, 황갈색 느티나무 나무마다, 잎사귀마다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가지각색의 색깔들이 모여 그야말로 울긋불긋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다른 개성들이 모여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은 아닐까.

사람들은 이 고운 단풍을 보러 단풍 빛깔보다 더 화려한 원색의 옷을 차려입고 단풍‘놀이’를 떠난다.

하지만 나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즈음의 순간들은 참으로 감내하기 어렵고 힘겨운 시간들이다.

가을이 되어 초록의 잎사귀들이 변화하는 것은, 이제 곧 닥쳐올 무서운 겨울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더 이상의 생장을 중단하고자 결심을 하고 광합성 작용으로 양분을 만들던, 잎을 초록으로 보이게 하던 엽록소들이 파괴되고 그 속에 숨어 있던 노란계통의 색소가 나타나거나 새롭게 화청소라는 색소의 발현으로 붉게 보이는 것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긴장된 순간들을 견뎌내고 준비하며 자신을 보시하듯 묵묵히 그 아름다운 단풍빛깔을 만들어 내는 나무들은 참 장하다.

작은 어려움에 신의를 버리고 절망하여 추락하는 우리네 사람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어찌보면, 이 시기는 우리들이 놀이로 흥청거려야 하는 때가 아니고, 가을이 만들어준 숲 길을 조용히 걸으며 자연이 아주 낮은 소리로 건네주는 큰 의미들을 깊이 사색하며 지난 시간들을 되짚어 볼 때이다.

아직 한 해가 다 가기에는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 그래서 돌이켜 만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남아 있으니 더욱 좋지 않은가.

지난주, 지리산 한 계곡에서 만났던, 가지 끝에 남아 있던 생강나무의 마지막 잎사귀 두 장이 떠오른다.

곧 떨어질 듯한데 그 샛노란 빛깔은 여전히 곱다. 누렇게 시들어 가는 마당에 혹은 뒷산의 생강나무 잎과는 사뭇 다르다.

나무도 사람과 멀리멀리 떨어져 살수록 때묻지 않은 순순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강나무의 빛깔을 보며 한 이동전화기 모델이 되었다가 불행해진 산골 소녀가 생각났었던 것은 너무 감정이 비약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생강나무의 마지막 잎사귀 아래로 유난히 볼록한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겨울 눈(冬芽)이다. 조심스레 겉껍질을 들추어보니, 내년 봄 그 숲을 파스텔 톤으로 은은하게 퍼지듯 피워낼 노랗고 작은 꽃송이들이 이미 만들어져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세상에 겨울 준비도 벅찰텐데 그 어려움 다음에 다가올 좋은 계절까지 이미 준비하다니. 그래 너희들 나무 참 장하다. 한치 앞을 준비하지 못하고 눈앞의 것에 연연하여 허둥대는 우리 인간을 생각하니 더욱 그러하구나.”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원>

풀 한포기가 주는 교훈

여름의 끝머리에 러시아 식물채집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그것도 식물을 보기 위한 러시아 대륙으로의 여행이라면 아주 낭만적인 기분이 들지만 사실 섣부른 감상과는 거리가 먼, 특히 몸이 아주 고된 여행이었다. 이동하는 곳을 모두 신고해야 하는 나라에 가느라 사전 서류준비도 힘겨웠지만 희귀한 식물들을 만나기 위해 도시나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오지 중의 오지로의 여정이 무척 힘들었다. 전투기의 폭격이라고 할 만한 모기의 공격 속에서, 낮이 긴 까닭에 밤 9시쯤 조사에서 돌아와 저녁식사와 표본정리까지 하면 쉽게 1, 2시가 넘는 날이 휴일도 없이 반복되는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내에서 몸을 기대고 돌이켜보니, 무협지의 표현을 빌려 그야말로 안계를 넓힌 시간들이었다. 떠날 때의 목표를 크게 초과 달성한 성과는 뒤로하고서라도, 그 곳에서 처음 만난 그러나 만나고 싶었던 식물들과의 감격적인 해후, 러시아 학자의 진지함과 깊은 학식, 처음에는 무뚝뚝했지만 며칠을 함께 지내고 나서 그것이 정많은 러시아 사람들의 수줍은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대목에서는 흐뭇한 미소까지 떠올랐다.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우리나라 식물분류학자들은 우리나라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방문, 연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식물을 처음 발견하여 이름을 짓고 발표하는 데 증거가 되는 기준표본이 우리나라에 있지 않고 일본이나 혹은 다른 유럽의 선진국에 있기 때문이다. 또 이웃하는 나라의 식물을 보지 않고는 진짜 우리식물의 자리매김을 하기 어려운데, 우리나라는 한 자리에서 이러한 식물표본을 볼 수 있는 변변한 식물표본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늦은 감이 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립수목원에 표본관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고, 이번 여행은 이 표본관에 지리적 연계를 가진 국가들의 식물표본을 확보하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었다. 거기에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식물들, 예를 들면 북한에만 분포하거나 한반도에서 희귀하거나 자원화 가능한 식물들을 확보하는 것도 그 목적에 있었다.

그곳에서 식물들을 만나면서 느낀 반가움과 설렘은 잠시였다. 참으로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간 우리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 살고 있었나 하는 문제였다. 우리나라에서 특산식물이라고 규정지어 놓고 한반도 안에서 왈가왈부했던 종(種)들이 엄연히 극동 러시아에도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간의 논의가 한심스러운 경우도 있었고, 깽깽이풀·월귤·분홍바늘꽃처럼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한 분포를 가지고 있어 애지중지 수많은 에너지를 쏟아내던 식물종들이 그곳엔 지천으로 있어서 국경 안에 범주를 한정하여 희귀(稀貴)를 논하며 지나치게 불필요한 인력을 소모했던 것이 안타까웠다.

또, 아침 저녁으로 백리향을 말려 끓인 차를 마시면서, 티무스(Thymus)라는 허브차로 이름을 널리 알린 이 식물 하나 우리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식물 자원화의 중요성을 말로만 외치고 있는 현실도 참 부끄러웠다. 게다가 가회톱·빈추나무·돌부채손과 같이 그간 도감에서만 보았던 북한 분포 식물들을 대하며 감동하면서, 같은 한반도에 사는 같은 민족의 땅에서는 볼 수 없고 이념도 체제도 민족도 다른 나라에서나 볼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새삼 가슴에 닿아 왔다.

처음에 부끄러웠던 것은 그간 인위적인 국경 혹은 휴전선을 식물의 세계에 그어 놓은 채 식물을 보고 규정지었던 안목없는 학자로서의 부족함이었지만, 그 부끄러움은 점차 식물만큼도 못하다는 것으로 증폭되었다. 식물의 세계에도 햇볕을 차지하기 위한 하늘 공간, 양분과 수분을 차지하기 위한 땅속 공간에서 서로 치열한 경쟁과 투쟁이 자리하지만, 서로의 발전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며, 이내 공존할 수 있는 선에서 조화가 만들어지는데 우리 인간이라는 종(種)은 그것이 그렇게도 어렵다는 점이 특히 가슴에 걸렸다.

인천국제공항에서 2시간만 비행기로 가면 알 수 있는 전체 속에 우리 식물의 모습이 보이듯, 지금 처한 당파나 인맥이나 이념의 틀에서 한발짝만 떨어져 바라보면 정말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외면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야말로 사소한 풀 한포기의 지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더도덜도말고 풀처럼만 살았으면.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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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관광지 99곳

'경복궁, 수원 화성, 정선 5일장, 담양 소쇄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99'를 선정했다. 대표적인 국내 관광지 가운데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고 전문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99곳을 뽑았다. 서울에서는 5대 궁궐과 인사동, N서울타워, 국립중앙박물관 등 4개의 장소가 목록에 올랐다. 전남도는 여수 거문도, 화순 고인돌, 강진 다산초당 등 15곳이 선정돼 가장 많은 관광지의 이름을 올렸다. 이밖에 수원 화성(경기), 정선5일장(강원), 경주 양동마을(경북), 부안 채석강(전북), 우도(제주) 등도 포함됐다. 문화부와 관광공사는 10월에 관련 웹 사이트를 열고 이날 선정한 관광지를 적극 소개해 국내 여행을 독려할 계획이다. 문화부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할 국내 관광지 99곳을 매년 선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관광지 99

지역

관광지

지역

관광지

지역

관광지

서울 (4)

서울 5대 궁궐

설악산 권금성

무안 회산백련지

서울 인사동

충북 (5)

충주호

완도 보길도 세연정

서울 N 서울타워

속리산 법주사

완도 청산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청원 청남대

진도 운림산방

부산(1)

부산 해운대

괴산 화양구곡

신안 홍도

대구(1)

대구 근대골목

단양 도담삼봉

신안 증도

인천 (3)

인천 차이나타운

충남 (8)

천안 독립기념관

경북 (13)

포항 호미곶

강화도 장화리 갯벌

공주 송산리 고분군

경주 불국사

백령도

대천 해수욕장

(보령 머드축제)

경주 남산

광주(1)

광주 무등산

서산 마애삼존불

경주 양동마을

울산(1)

울산 반구대 암각화

부여 부소산성

안동 하회마을

경기 (9)

수원화성

금강 하구언

(*전북에도 포함)

영주 부석사

구리 동구릉

태안 천리포 수목원

영천 별빛마을

파주 임진각

태안 안면도 꽂지해변

문경새재

안성 남사당놀이

전북 (10)

전주 한옥마을

청송 주왕산

광주 남한산성

군산 선유도

영덕 블루로드

포천 국립수목원

정읍 내장산내장사

울진 불영계곡

포천 산정호수

남원 광한루원

울릉도 대풍감

여주 영릉

김제 지평선

독도

양평 두물머리

완주 대둔산

경남 (10)

창원 진해 군항제

강원 (14)

춘천 남이섬

진안 마이산

진주 진주성

강릉 정동진

무주 덕유산 향적봉

통영 통영항

강릉 대관령 옛길

고창 선운사

거제도 해금강

동해 망상 오토캠핑장

부안 채석강

창녕 우포늪

동해 추암해변

전남 (15)

여수 거문도

남해 금산

태백산 천제단

순천 순천만

하동 십리벚꽃길

삼척 대이리 동굴지대

광양 섬진강 매화

지리산 둘레길

영월 동강

담양 소쇄원

함양 상림

평창 월정사 전나무 숲길

고흥나로도

합천 해인사

정선 5일장

보성차밭

제주 (4)

제주 우도

철원 DMZ

화순 고인돌

제주 거문오름

고성 통일 전망대

강진 다산초당

제주 한라산 백록담

인제 내린천

해남 땅끝마을

제주 올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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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회화나무>

 

 

회화나무 심은 뜻은

   이유미/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회화나무가 보인다. 회화나무는 이곳저곳 공원이나 길가에 제법 많이 심어져 있으며 한여름 피기 시작한 꽃들은 여름이 다 가도록 여전히 지지 않고 있으니 해마다 회화나무를 자주 보아 왔지만 올해 비로소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야 회화나무를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지난해에는 싸리나무 잎에 물든 노란 단풍이었다. 싸리라고 하면 나무로 쳐도 굵은 줄기 하나 없는 작고 왜소한 관목이며, 꽃도 잔잔하고 잎은 그저 동들동글해 비범한 것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나무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이 깊어가면서 문득문득 산길에서 눈길을 잡고, 마음 깊은 곳을 톡톡 건드리며 흔들어 놓은 것은 어김없이 싸리 잎의 노란빛이었다. 서늘한 가을 기운에 흩어지는 그 노란빛이 어찌나 애잔하던지….


올해는 조금 일찍 여름부터 그렇게 눈길과 마음을 잡는 나무가 바로 회화나무였다. 밤이 깊어가기 시작할 즈음 달빛이었는지, 먼 가로등 빛이었는지 어느 순간 눈앞이 환해지도록 풍성하게 눈부신 꽃송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평생 나무와 풀을 공부하는 사람임에도 마치 처음 보는 나무인가 싶을 만큼 새로운 모습이었다. 회화나무에 대한 숱한 사람의 칭송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가는 곳마다 회화나무가 눈으로 마음으로 가득가득 보인다.


회화나무는 영어로는 ‘차이니스 스칼라 트리(Chinese scholar tree)’, 그래서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른다. 옛 사람들은 집안에 이 나무를 심고 학자들이 나오기를 바랐다.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주나라 때 조정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의 3정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이 각각 회화나무와 마주 앉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최고 벼슬의 상징이 바로 회화나무가 되었다. 정승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출세를 하는 것이니 이를 바라면서 심기도 하고 과거에 합격하면 회화나무를 심어 기념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출세수(出世樹), 행복을 준다 하여 행복수(幸福樹)라 했고, 이러한 것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까닭에 양반수(兩班樹)란 별칭도 가졌다. 또한 판관(判官)이 송사(訟事)를 들을 때에는 회화나무를 가지고 재판을 했다. 그 연유는 회화나무의 정갈함으로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모든 좋은 것의 상징인 길상목(吉祥木)이었다.


꽤 여러해 전 재미난 일이 었었다. 나무를 키워 팔던 한 분이 내게만 특별히 천기를 알려 준다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고 건넨 말이, 회화나무를 심으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자기도 회화나무를 키워 팔면서 소득이 늘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부유한 동네인 압구정동 가로수가 회화나무라는 것이었다. 출세와 행복에 이르는 가치 기준이 학문을 이루는 것에서 부(富)를 이루는 것으로 바뀌었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회화나무 가로수는 부자 동네, 가난한 동네 할 것 없이 골고루 볼 수 있다.


일단 마음에 회화나무를 두고 보니 회화나무는 참 멋진 나무다. 녹색의 기운이 도는 유백색 꽃빛이며,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받으면서 만들어내는 그 푸른 그늘, 오늘처럼 몹시 비바람이 치고 난 뒤 우수수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들의 장렬함, 밤하늘에 눈부셨던 특별한 변신…. 이제 하나둘씩 꽃들은 잘록잘록 귀여운 열매로 바뀌어 가는데 꽃빛과 열매의 때깔이나 그 그윽함이라니. 수백 년씩 살아가는 고목에 매년 돋아나는 잎과 꽃들은 언제나 청년처럼 싱그러운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처음 보면서 돋보이지 않은 나무라고 생각했던 선입견에 갇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수한 모습들을 새로이 알게 되면서, 나무를 바라보는 내 안목이 여전히 일천한 것에 실망하고 반성하게 된다. 또 한편으론 이 무궁한 자연 속의 풀과 나무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를 설레게 할까 싶어 기대도 된다.


그리고 나무든, 풀이든 혹은 사람이든 한 면만 보고, 한 번의 선입견으로 속단하지 말라는 말없는 경고도 함께 읽는다. 나무도, 사람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담은 무궁한 존재다. 그럼에도 회화나무를 편갈랐던 나도, 오늘날의 우리 사회도 무엇이든 속단하고 내가 속한 사회의 틀 안에서 그 밖의 것들은 무조건 흑백논리로 양분하여 편가르는 일들이 더욱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


회화나무는 한자로 ‘괴(槐)’로 쓰고, 이를 중국어 발음으로 ‘훼’ 혹은 ‘회’라고 읽어 회화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회화나무의 그 맑은 빛의 꽃들은 괴화(槐花)라고 하여 꽃차를 만들어 마신다. 이 꽃차에는 루틴이라는 성분이 있어 눈을 밝게 한다고 한다. 매년 여름이면 피어나는 은은한 회화나무 꽃 향기는 갈수록 편협해지고 고집스러워지는 내게 또는 우리들에게 눈과 마음을 밝게 깨우고 살아야 한다는 경종이 될 것 같다.


가을이 오기 전에 더위에 흩어진 마음을 푸르게 가다듬어 보려 한다면 회화나무 구경을 하길 권해 본다. 동네의 가로수로 심어져 있거나, 오래된 서원이나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를 찾아봐도 좋고, 서울이라면 정동길이나 창덕궁의 수백 년 된 회화나무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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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이 정도는 치열하게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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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일 동안 중국 4800km를 자전거로 달린 홍은택!!!


상해-서안-북경-항주의 큰 삼각형을 달리면서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몸으로 느낀 대역정을 그의


미투데이
http://me2day.net/zixingche 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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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상해의거 80주년을 맞으며 '내가 본 윤봉길'을 정리해 본다.

(사진은 모두 현장을 방문하여 직접 찍은 것임)

 

윤의사님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1908. 6. 21. 태어나셨다. 생가인 광현당(光顯堂)

 


4살때 바로 옆으로 이사하여 23세까지 성장하셨다. 청소년기 생가인 저한당(狙韓堂)

 


윤의사님은 19세에 농민독본을 짓고 광현당 옆에 강당을 짓고 야학운동을 하셨다. 강당인 부흥원(復興院)

 


저한당의 가을

 


도중도 일대에서는 해마다 윤의사 의거기념윤봉길 문화축전이 벌어진다.

 


윤의사님은23세인 1930.3. 6. ‘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선생을 만나 거사를 계획하다. 상해임시정부 유적

 


1932. 4. 29. 일본군 상해전승축하식장에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다. 상해 의거 현장인 홍구공원

 


홍구공원(현재 중국명은 노신공원)에 있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윤봉길기념관 매헌(梅軒)

 


기념관 안에 전시하는 도시락 폭탄과 물병

 


'나라와 겨례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을 적어간 윤의사님의 서한문

 


윤의사님은 다음해인 1932. 12. 19. 일본 이시카와현 산자락에서 이마에 총을 맞고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셨다.

 


1946년 유해 송환시까지 암장되어 있던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의 암장지

 


암장지 옆에 기념사업회가 세운 순국기념비

 


의사가 만든 월진회는 지금도 이어져 일본 카나자와시와 교류하며 윤봉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忠義祠)

 

 


<매헌 윤봉길 일대기>

▲1908년 6월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1911년 3월 4세,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

▲1918년 11세, 덕산공립 보통학교입학

▲1919년 12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보통학교 자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수업

▲1921년 14세,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

▲1922년 15세, 성주 배(裵)씨 용순(用順) 여사와 결혼

▲1923년 16세,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

▲1925년 18세, 시집 「오추(嗚推)」「옥수(玉睡)」「임추(壬椎)」등 발간

▲1926년 19세, 오치서숙 한학수업 마침, 「매헌(梅軒)」 아호를 얻음, 농촌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시작

▲1927년 20세,「농민독본」(3권) 편저

▲1928년 21세, 부흥원 설립기념 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 월례강연회 개최,「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쓰심, 위친계(爲親契) 조직,월진회(月進會) 및 수암 체육회 조직

▲1930년 3월6일 23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유서를 남기시고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만주 독립군기지를 돌아보고, 중국 청도에 도착 (처음 어머님께 편지를 송부)

▲1931년 5월 8일 24세,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옮김, 한인공우회 조직하고, 노동야학 및 노동운동. 김구, 이유필, 최동오, 김현구, 김의한, 김두봉, 박창세, 안공근 등과 독립 운동

▲1932년 4월 26일 25세, 대한민국 14년에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선생과 기념촬영.

▲1932년 4월 29일 25세, 오전 11시40분 (한국시간 12시40분) 상해 홍구공원의거,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응징

▲1932년 5월 28일 25세,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11월18일 25세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8일 25세,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

▲1932년 12월 19일 25세, 아침 7시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1946년 유해송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됨.

196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변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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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경치! 잠시 쉬어가는 우리나라 대표 경관도로!!

북한강변 45호선 등 ‘한국의 경관도로 52선’ 선정

 

 

국토해양부는 북한강변을 따라가는 남양주 관내 국도 45호선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관도로 52선을 선정하고, ‘한국의 경관도로 52선’ 홍보책자와 브로셔를 발간해, 관련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경관도로(Scenic Road)는 도로와 주변 환경이 어우러져 도로 이용자가 시각적ㆍ심미적으로 쾌적함을 느끼며, 전망이 좋은 곳에서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도로이다.

이러한 경관도로를 일반 시민들이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한국의 경관도로 52선’을 선정했으며, 선정시에는 미적 경관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적 가치도 함께 고려했다.

또한, 1년, 52주에 걸쳐 매주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경관도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52선으로 구성하였으며,공정한 선정을 위하여 각 지자체별로 경관이 뛰어난 도로를 추천받아 현지답사와 전문가 평가 등의 검증과정을 거쳤다.

홍보책자와 브로셔에서는 바다, 호수, 역사ㆍ문화 등 경관도로별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소개하고 있으며, 도로여행에 유용한 주변 여행명소, 지역축제 및 먹거리, 특산물에 대한 정보를 함께 담고 있어, 아름다운 경관과 다양한 체험을 같이 즐길 수 있는 풍성한 여행이 가능하다.

이번에 선정된 ‘한국의 경관도로 52선’은 전국 경관도로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보이며, 지역 축제ㆍ관광명소와 연계되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토해양부는 ‘한국의 경관도로 52선’ 선정을 계기로 2010년부터 추진중인 경관도로 조성사업을 확대 시행하고, 도로경관 설계편람을 제정하는 등 경관도로 활성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경관도로 52선’구간 현황

도별

연번

위치

노선번호

구간연장

(km)

주제

경기도

1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 금대리

지방도391호선

11.9

낭만과 추억 가득 북한강변길

2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 고성리

지방도391호선

21.2

아침햇살 아름다운 청평호반길

3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 화도읍 금남리

국도45호선

12.5

강물소리 산새소리 화음길

4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 서종면 수입리

지방도391호선

11

꿈에도 그리운 강변길

5

파주시 조리읍 ~ 문산읍

국도1호선

24

녹색디자인 숨쉬는 통일로

강원도

6

고성군 간성읍 흘3리 ~ 장신리

국도46호선

10

삼림욕 절로 되는 산중도로

7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

~ 주문진읍 주문리

군도11호선

15.4

해변전시장 감상 도로

8

동해시 묵호동 ~ 망상동

시도

(중로2-18호선)

4.7

연인들의 데이트 바닷길

9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

~ 근덕면 궁촌리

국도7호선

24.3

머물고 싶은 해변도로

10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 물치리

국도7호선

5.1

일출 보며 희망 찾는 길

11

양양군 손양면 여운포리 ~ 양양읍 조산리

군도5호선

10.3

소박하되 품격높은 해안길

12

영월군 영월읍 덕포리

~ 삼옥리

군도13호선

8.5

동강 물줄기 따르는 길

13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 정선읍 용탄리

군도6호선

20

동강 강변마을 잇는 길

14

춘천시 신동면 의암리

~ 서면 신매리

시도

(삼천순환로)

15

신바람나는 문화콘텐츠길

15

춘천시 서면 원당리

~ 신매리

지방도403호선

12.5

희망싣고 달리는 마라톤길

16

평창군 진부면 간평리

~ 강릉시 성산면 산리

지방도456호선

30.3

볼 것 많은 산악경관도로

충청

북도

17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직티리

군도1호선

8

월악산과 소백산 사잇길

18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

~ 속리산면 중판리

지방도505호선

12.6

서원계곡과 어울린 에코로드

19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

~ 안내면 정방리

국도37호선

8

‘향수’에 젖어보는 길

20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 금성면 구룡리

국지도82호선

11

청풍호 정취 그윽한 길

21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

~ 청풍면 교리

군도20호선

22

남한강, 청풍호 만남의 장

22

충주시 안림동

~ 앙성면 단암리

군도28호선

38.4

남한강의 대표적 그린로드

충청

남도

23

서천군 종천면 장구리

~ 서면 신합리

군도5호선

17.7

낙조 감상하기 좋은 해안길

24

태안군 안면읍 중장리 ~ 정당리

국도77호선

11.5

안면송 솔향 그윽한 섬길

25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 창기리

군도14호선

11.1

해수욕장 즐비한 바닷길

도별

연번

위치

노선번호

구간연장

(km)

주제

전라

북도

26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 정령치

지방도737호선

9.2

하늘로 다가가는 길

27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 두길리

국도37호선

10

구천동계곡 따라가는 길

28

임실군 운암면 운암리 ~ 쌍암리

지방도749호선

16.5

옥정호반의 낭만도로

29

진안군 마령읍 동촌리

~ 진안읍 단양리

국도30호선

11

마이산 조망하기 좋은 길

전라

남도

30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 산동면 좌사리

지방도861호선

15

하늘아래 첫동네 향한 길

31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

~ 오지리

국도17호선

10

섬진강 물길따라 가는 길

32

곡성군 죽곡면 하한리

~ 구례군 구례읍 봉서리

국도18호선

10

전라선과 잘 어울린 강변길

33

담양군 석당간

~ 금성면 석현교

국도24호선

4

멋진 메타세쿼이아 길

34

영광군 백수읍 백암리

~ 대신리

국도77호선

5

해당화 피는 해안도로

35

진도군 지산면 가치리

지방도803호선

4

낙조 감상 명품 도로

36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

군도10호선

17

청산도를 안내하는 길

경상

북도

37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 삼동리

국도35호선

10.5

청량산 운치에 취하는 산길

38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 원남면 덕신리

지방도917호선

11.8

해안절벽 따르는 해변길

39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 ~ 북면 천부리

국가지원 지방도90호선

39.8

화산섬 울릉도 일주도로

40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

~ 석리

국가지원

지방도20호선

10.5

풍차 조망 즐기러 가는 길

41

포항시 대보면 구만리

~ 대동배리

지방도929호선

20

한반도 정기가 담긴 길

경상

남도

42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 연초면 연사리

국도14호선

20

견내량 승전역사 품은 길

43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 ~ 다포리

지방도1018호선

10

거제도 남단의 전망대

44

남해군 남면 덕월리

~ 당항리

지방도1024호선

20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

45

남해군 설천읍 노량리

~ 하동군 금남읍 노량리

국도19호선

1.7

한국 최초 현수교, 남해대교

46

하동군 화개면 탑리

~ 대성리

지방도1023호선

12

청춘 남녀를 위한 혼례길

제주도

47

서귀포시 대정읍 상포리 ~ 안덕면 사계리

군도14호선

5

산방산 손짓하는 해안길

48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 하귀리

군도22호선

10

바람 불어 좋은 절경로

부산시

49

해운대구 중동~ 송정동

지방도31호선외

4.6

달빛 내음 가득한 해안로

대구시

50

동구 백안동~ 송정동

광역시도

150호선

14.7

명찰의 향기가 흐르는 길

광주시

51

동구 지산동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중로3류19호선 지방도887호선

10.9

무등산과 광주호 감상 길

대전시

52

동구 비룡동

~ 대덕구 삼정동

중로1류23호선

18

대청호반을 따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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