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풀 「산경표」에는 1대간(백두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의 산줄기 이음이 있다. 13정맥은 청천강을 기준으로 한 청북정맥과 청남정맥, 한강을 에워싸는 한남과 한북정맥, 금강을 두른 금남과 금북정맥, 낙동강 좌우의 낙동과 낙남정맥,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임진북예성남정맥과 해서정맥, 호남정맥, 한남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등이다. 대부분의 산줄기 이름을 강에서 따온 것은 노년기 산지의 애매한 줄기 이어짐을 역으로 물흐름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는 대동여지도의 발문에 ‘산줄기는 분수령을 따르게 마련(山自分水嶺)’으로 명문화하고 있는 줄기가름의 대원칙이다.

circle11_pink.gif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2,750m)에서 시작하여 원산, 낭림산, 금강산을 거쳐 태백산까지 내려와 속리산에서 다시 지리산까지 뻗은 제일 큰 산줄기이다. 한반도를 관통하며 큰 획을 긋고 있다.

circle11_pink.gif 장백정간(長白正幹)
북쪽으로 두만강, 남쪽으로 어랑천· 수성천의 분수령이다. 백두대간의 원산 설령봉에서 일어나 만탑봉(2,205m), 괘상봉(2,136m), 궤상봉(2,541m), 관모봉(2,541m), 도정산(2,201m)을 지나 함경북도 내륙을 서북향으로 관통하는 산줄기이다. 도정산 이후 산세가 죽어들어 이후 고성산(1,756m), 차유령, 백사봉(1.138m), 송진산(1,164m)으로 이어져 두만강 하구 서수라곶에서 끝을 맺는다.

circle11_pink.gif 낙남정맥(洛南正脈)
북쪽으로 줄곧 낙동강을 받드는 낙남정맥은 남부해안지방의 분계선으로 생활문화와 식생, 특이한 기후구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산줄기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남하하다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盆山)에서 끝난다.

circle11_pink.gif 청북정맥(靑北正脈)
평안북도 내륙을 관통하며 압록강의 남쪽 울타리를 이룬다. 웅어수산에서 시작하여 낭림산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갑현령(1,001m), 적유령(964m), 삼봉산(1,585m), 단풍덕산(1,154m)을 지나 온정령(574m)에서 산세가 수그러들어 신의주 남쪽 압록강 하구의 마곶산에서 끝난다.

circle11_pink.gif 청남정맥(靑南正脈)
웅어수산에서 시작하여 낭림산이 첫산이며 청천강의 남쪽 유역과 대동강의 북쪽 유역을 경계하는 분수령이다. 청남정맥의 으뜸산은 묘향산(1,365m)이며, 이후 산줄기는 용문산(1,180m), 서래봉(451m), 강룡산(446m), 만덕산(243m), 광동산(396m)을 지나 용강의 남포에서 대동강 하구 광량진으로 빠진다.

circle11_pink.gif 해서정맥(海西正脈)
우리나라 북부와 중부지방의 문화권역을 경계하고 있는 분수령이다. 백두대간 두류산에서 시작하여 서남쪽 개연산에 이르러 다시 북상하다 언진산(1,120m)에서부터 남하하기 시작하여 멸악산(816m) 지나 서해의 장산곶에서 끝난다.

circle11_pink.gif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황해도의 오른쪽 울타리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임진강, 남쪽으로 예성강의 분수령이다.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시작하여 학봉산(664m), 수룡산(717m), 천마산(762m), 송악산(488m)을 지나 정맥의 끝은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점 즉 개성의 남산인 진봉산(310m)이다.

circle11_pink.gif 한북정맥(漢北正脈)
북쪽으로 임진강 남쪽으로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백봉에서 시작한 한북정맥은 백암산(1,110m), 법수령을 지나 휴전선 가까운 오성산(1,062m), 철책 넘어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포천 백운산(904m), 운악산(936m), 서울 도봉·북한산(837m), 고봉산(208m)을 지나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인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끝난다.

circle11_pink.gif 낙동정맥(洛東正脈)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천의봉(매봉산,1,303m)에서 시작하여 태백 백병산(1,259m), 통고산(1,067m), 울진 백암산(1,004m), 청송 주왕산(720m), 경주 덕석산(829m), 울산 가지산(1,240m), 신불산(1,209m), 부산 금정산(802m)을 지나 백양산(642m)을 넘어 다대포 몰운대에서 끝난다.

circle11_pink.gif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속리산 천황봉(1,058m)에서 시작하여 말티고개, 선도산(547m), 상당산성, 좌구산(657m), 보현산(481m)을 지나 칠현산(516m)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갈라지면서 한남금북정맥은 끝이 난다.

circle11_pink.gif 한남정맥(漢南正脈)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분계한다.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 북쪽 2㎞ 지점에 위치한 칠장산(492m)에서 시작된다. 백운산, 보개산, 수원 광교산(582m), 안양 수리산(395m)을 넘으면 김포평야의 낮은 등성이와 들판을 누비다 계양산(395m), 가현산(215m) 지나 강화도 앞 문수산성에서 끝맺는다.

circle11_pink.gif 금북정맥(錦北正脈)
금강의 북쪽 울타리이다. 한남정맥과 헤어진 후 칠현산(516m),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519m), 아산 광덕산(699m), 청양 일월산(560m), 예산 수덕산(495m)을 지난다. 산줄기는 예산 가야산(678m)에서 멈칫거리다 성왕산(252m), 백화산(284m)를 거쳐 태안반도로 들어 반도의 끝 안흥진에서 끝을 맺는다.

circle11_pink.gif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장수 영취산(1,076m)에서 시작하여 장안산(1,237m), 수분현(530m), 팔공산(1,151m), 임실 성수산(1,059m), 진안 마이산(667m), 진안 부귀산(806m)에서 끝난다.

circle11_pink.gif 금남정맥(錦南正脈)
전주의 동쪽 마이산(667m)에서 북으로 치달아 대둔산(878m), 계룡산(828m)을 거친후 서쪽으로 망월산을 지나 부여 부소산 조룡대에서 끝난다. 금강의 온전한 남쪽 울타리를 이루지 못하는 이 산줄기는 운장산 지나 왕사봉에서 남당산~까치봉~천호봉~미력산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circle11_pink.gif 호남정맥(湖南正脈)
낙남정맥과 함께 우리나라 남부해안문화권을 구획하는 의미있는 경계선이다. 정맥의 동쪽은 섬진강, 서쪽은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이다.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래친 후 강진 만덕산(762m)을 처음 만나고 이후 내장산(763m), 추월산(729m), 무등산(1,187m), 제암산(779m), 조계산(884m) 등 남도의 큰산을 지나 광양 백운산(1,218m)이 끝이다. 백운산에서 아쉬운 산자락의 여운은 백운산 남쪽을 달려 섬진강을 휘감으며 망덕산(197m)에서 비로소 끝난다.

<자료 : 사람과 산>

구간별

구 간 주 요 지 점

소요
시간

도상
거리

지역명

안내지도

A형

B형

합 계

9구간

실산행
(총산행)


(㎞)

제1구간
(2010.00.00)

주화산~입봉~연석산~운장산서봉~피암목재

14.1
접속0.5

제2구간
(2010.00.00)

피암목재~장군봉~싸리재~백암산~백령고개

18.7

제3구간
(2010.00.00)

백령고개~622봉~인대산~오항동고개~배티재

13.2

제4구간
(2010.00.00)

배티재~깔딱재~월성봉~바랑산~물한이재

제5구간
(2010.00.00)

물한이재~깃대봉~함박봉~천마산~양정고개

16.9

제6구간
(2010.09.18)

양정고개~계룡산~쌀개봉~관음봉~만학골재

7:20
(9:20)

16.8

제7구간
(2010.10.10)

만학골재~팔재산~널티~성황산~복룡재

6:15
(8:40)

14.6

공주

고향동네 앞산

제8구간
(2010.10.00)

복룡재~망덕봉~진고개~오석산~채미소고개

6:25
(7:35)

16.5

공주·부여

제9구간
(2010.10.23)

채미소고개~석목고개~금성산~구드래나루

3:10
(4:50)

5.5

부여

※ 소요시간중 총산행은 접근구간, 정맥구간, 하산구간과 휴식 및 중식시간을 모두 포함한 시간임.
( ) 안에 표시한 것은 구간별 마루금상 휴식시간 등을 제외한 순수산행시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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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는 눈 뜨고 펀치 맞죠, 난관 닥쳐도 눈 감지 마세요”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14> 스물여섯 챔프 김주희가 청춘에게 주는 글

 

 

딸 둘을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 치매로 걸핏하면 사고를 치는 아버지, 동생과 아버지 뒷바라지에 허리 펼 날이 없었던 언니…. 곰팡내 나는 지하 월셋방에는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았다. 300원짜리 크림빵을 훔쳐먹고는 자책감과 서러움에 제 뺨을 때리며 울었다.

편의점·주유소·호프집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언니는 몰래 권투체육관을 다니고 있었다. 1999년 겨울, 언니 심부름으로 동생은 문래동 거인체육관을 찾는다. 그리고 권투라는 운명과 정문호 관장이라는 ‘새아버지’를 만난다.

김미나의 동생 김주희는 언니 대신에, 언니가 내준 회비로 권투를 배웠다. 권투가 너무나 좋아 죽을 만큼 훈련에 매달렸다. 주희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악성 빈혈이 있었고, 뼈는 쉽게 부러지는 ‘닭뼈’다. 희고 고운 피부는 몇 대만 맞으면 퉁퉁 부어올라 권투선수로서는 핸디캡이다.

김주희는 이 모든 역경을 넘어서 세계 정상에 있다. 고3이었던 2004년 12월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최연소 챔피언에 올랐다. 차근차근 챔피언 벨트를 수집했고, 지난 9일 여자국제복싱평의회(WI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이겨 세계 여자프로복싱 5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형편은 나아졌지만 아직 그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요양원에 모신 아버지는 풍까지 맞았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날아간 언니는 고된 노동 때문에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 2006년 염증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사진)을 잘라낸 그는 권투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를 벼랑 끝까지 몰렸다.

김주희는 왼손이 강하다. 약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강점이었다. [중앙포토]
그래도 김주희는 씩씩하다. 자신을 덮친 모진 운명을 향해 쉴 새 없이 펀치를 날린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대학원(중부대 교육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요즘은 기업체 특강 강사로도 인기 절정이다. ‘도전과 열정’을 주제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어떤 고담준론보다 울림이 크다. 지난달에는 책도 냈다. 자서전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다산북스)의 부제는 ‘스물여섯 챔피언 김주희의 청춘노트’다.

스포츠 오디세이가 지난 22일 거인체육관을 찾았다. 김주희의 왼쪽 눈은 아직 충혈되고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 요즘 사는 얘기로 가볍게 몸을 푼 뒤 ‘본 게임’은 책 얘기로 했다. 밑줄 치며 읽었던 단락을 내놓으면 그가 차분하게 설명하는 식이었다. 스물여섯 김주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을 향해 조용조용 말을 풀어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온 삶과 체중이 실린 강펀치였다.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35p)
언니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미국에 편도 비행기표만 들고 갔다. 우린 비빌 언덕도 없었다. 뭘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기회다. 기회는 찾아왔을 때 만들어가야 한다. 언니가 어렵게 번 돈으로 배운 권투니까 열심히 해야 했다. 언제까지 다닐 수 없다는 불안감 속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

-왼손을 재발견하고 나서는 누구에게도 고정된 단점이나 장점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47p)
보통 오른손잡이에게 왼손은 잽을 던지는 선제 손이다. 난 빈혈·닭뼈·약한 피부 등 모든 게 핸디캡이었다. 그런데 관장님과 훈련을 하다가 왼손이 굉장히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난 왼손잡이였다. 왼손이 강하니 상대가 압박을 받았다. 날 때부터 단점만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헝그리 정신이란 배고픈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62p)
권투선수에게 헝그리 정신은 다운 당한 뒤 벌떡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위기에 처했을 때 극복해 나가는 방법이 있겠지만 권투선수는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걸 배운다. 권투를 통해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극복할 수 있다는 배포가 생겼다. 배추 장사를 한다고 해도 그 분야에서 톱이 될 자신 있다.

-두렵다고 눈을 감아버려서는 안 된다. 눈을 감는다고 벌어진 일을 피해가지는 못하니까. 아무리 무
섭더라도 눈 똑바로 뜨고 맞서야 하는 것이다.(71p)
권투선수는 펀치를 맞는 순간에도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눈을 감는 순간 또 맞는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눈 질끈 감아버린다고, 참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나도 힘든 일 있을 때 방에 틀어박혀 울고불고 아무한테도 못 털어놓고 꾹꾹 참아본 적도 있다. 포기하는 것보다 그나마 낫지만, 문제 해결 방법은 아니다. 눈 부릅뜨고 정면으로 맞서 치고 나가는 게 가장 현명하고 마음 편하다.

-상상할 수 없이 멋진 일들이 세상에는 많았고, 권투로도 그런 멋진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꼈다.(92p)
모든 순간이 다 멋졌지만, 18세에 첫 세계챔피언이 된 순간(사진)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뭐 대단하다고 TV에 나오고, 영화 찍고, 강의하고. 이렇게 강의할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원고도 없다. 처음부터 제 얘기를 하는 것뿐인데 호응해 주시는 게 신기할 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로 직업을 삼고 돈 버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고 좋은 일이다.

-무식한 자는 복종을 못하지만 지혜가 있는 자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다.(160p)
관장님은 권투선수 무식하다는 얘기를 가장 싫어하신다. 그래서 늘 “공부해라” “책 읽어라” 얘기하신다. 난 관장님 뜻을 잘 알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한다. 링에 올라가면 제정신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때리고 피한다. 10년 이상 함께한 관장님은 쟤가 왜 저런 제스처 하는지 안다. 그래서 지시를 내리고 작전을 바꾼다. 권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팀워크다.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그만’이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169p)
관장님은 내가 운동하다 쓰러져도 물을 뿌리며 “일어나” 하실 분이다. 그런데 내가 발가락 수술 이후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니까 정말 진심으로 그만두라고 하셨다. 수술 직후에 꼼짝도 할 수 없어 바지에 소변을 본 적도 있다. 그때 관장님이 병원에 찾아오셔서 맛있는 것 잔뜩 사주시고는 “주희야, 이제 그만하자. 이젠 네가 스무 살 예쁜 아가씨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난 “지금까지 관장님이 모두 옳았지만 지금 하신 말씀은 틀린 거예요. 정말 힘들었지만 권투 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저보고 그만두라면 죽으라는 겁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링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울며 매달렸다.

-진짜로 걱정해야 하는 순간까지는 걱정하면 안 된다. 걱정과 싸우면 누구든 지게 돼 있다.(203p)
난 하루에도 수십 가지 걱정을 달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달 동안 극도의 긴장과 집중 속에 준비한 경기가 끝나면 난 가장 겸 주부로 돌아간다.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아빠가 또 사고친 건 없는지 챙기고, 대학원 리포트 내고, 스파링 준비하고…. 처음엔 걱정에 포위돼 살았지만 지금은 20분 이상 생각해서 그날 해결 안 나면 다음 날로 갖고 간다. 이미 벌어진 일은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 건지만 생각한다.

-‘밥도 못 먹는 처지에 대학은 무슨 대학! 분수껏 살아라’라고 한 사람들에게, 분수껏 살라는 말을 듣고 눈물 흘렸을 나 같은 아이들에게, 나는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225p)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탈선하라는 법은 없다. 편견을 갖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다. 자기 처지에 대해 원망하면 끝이 없다. 누구든 열심히 했을 때 기회가 있고, 도와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는 증거가 되고 싶었다. 난 ‘권투선수의 체중 감량에 대한 연구’로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박사 과정을 밟아 내 분야의 최연소 교수가 되는 게 꿈이다. 지금은 넉넉하지 않지만 앞으로 돈도 많이 번다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내 인생의 최종 목표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근처의 쇼핑센터로 가서 카트를 제자리에 밀어놓고 100원을 번다.(241p)
체육관 가는 길에 문래동 홈플러스가 있다. 쇼핑센터 입구에 쇼핑객이 택시를 타면서 버려놓고 간 카트가 몇 개씩 있다. 그거 다 돈이다. 알아보는 사람도 있지만 신경 안 쓴다. 카트 제자리 꽂아두는 게 뭐 훔치는 건 아니니까. 10원짜리 하나가 없어서 배고파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아끼는 게 습관이 됐다. 그런데 언니는 내가 궁상 떤다고 가슴 아파한다. 하지만 난 내가 맞아가며 떳떳하게 번 돈 일부를 기부한다. 남들보다 힘도 세니까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데 가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한다.

-성적표, 증서, 시합 때 입었던 운동복, 심지어 빠진 발톱까지 하나하나 모았다.(246p)
관장님은 “네가 다음에 유명해질 것에 대비해서 너의 역사가 될 만한 것을 모아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훈련하며 빠진 발톱까지 모았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서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좋았던 순간이 있지 않았나. 그 무대에 다시 오르는데 왜 그걸 두려워하나’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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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지구>와 <라이프>에 이어서, 이 8부작 다큐멘터리는 신기하고 복잡하며 심오한, 그리고 때로는 대립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담고 있다.

제작: BBC, Discovery, France Television 공동제작
배급: BBC Worldwide
영국방송: 2011년 1월 13일(목) BBC1 첫 방송.
(560만명의 시청자 수. 점유율 22.3%로 BBC1 동시간대 평균 점유율 25% 상승)

로케이션 장소
캄보디아 / 캐나다 / 카리브해-쿠바 / 칠레 / 중국 / 에티오피아 / 그린란드 / 하와이 / 홍콩 / 인도 / 시베리아 / 나미비아 /
인도네시아 / 이탈리아 / 브라질 / 알제리 / 말리 / 파푸아뉴기니 / 라오스 / 몽골 / 케냐 / 마다가스카르
총 76대의 카메라 동원 / 촬영 장비 무게 125,000kg

음악: 니틴 소니,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는 인도계 영국인인 세계적인 뮤지션.
제작 기간: 4년
총 제작비: 160억원
야영 900일 /모기 퇴치제 190개
트레킹 120일 / 촬영 장비 125,000kg

휴먼 플래닛(Human Planet)은 자연과 인간의 신비한 관계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만한 놀랍고도 감동적인 시리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모든 환경에서 적응하고 번영하는 동물이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는 북극, 산, 바다, 정글, 초원, 사막, 강, 도시 등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들을 찾아가 위험한 자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같은 환경을 공유하고 있는 동물들과 때로는 복잡하고 놀라운 관계를 쌓으며, 때로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소개한다. 휴먼 플래닛은 약 80여 곳에서 촬영되었고 지금까지 TV에서 방영된 적이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HD 카메라와 영화제작용 최신 장비들을 사용하여 하늘과 지상, 수중에서 촬영했다. 세계적인 자연사 및 다큐멘터리 촬영 팀과 프로그램 제작자가 만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뛰어난 영상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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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 61주년… 故 김영옥 대령의 조국애 기린다



이번주 6·25 남침 61주년이 다가온다. 김일성의 기습 남침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민과 군대, 그리고 유엔군의 희생으로 저지·격퇴됐지만 한반도 전체를 참화로 몰아넣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묘사돼온 6·25는 정확히 말하면 김일성의 야심과 소련의 승인, 중국의 지원속에 이뤄진 동족학살극이었다. 6·25남침은 김일성의 전쟁 준비에 무지했던 대한민국과 국제 사회의 오판을 다시 일깨워주는 사건이자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역사 기록이다.


6·25 남침은 전사·부상·실종을 합해 100만명에 육박하는 대한민국 장병과 20만명에 이르는 유엔군의 희생으로 격퇴됐다. 미국 MSN 닷컴이 최근 미국 역사를 통틀어 16대 전쟁영웅으로 선정한 고 김영옥 대령도 그중 한 분이다. 고 김 대령은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1943년 육군 장교로 제2차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 로마 탈환작전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의 대치상태를 돌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전후 이탈리아 정부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또 프랑스 동북전선에서 기관총탄 3발을 맞는 큰 부상을 입고도 대활약해,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김 대령은 미국 16대 전쟁영웅으로서, 미 독립전쟁 당시 혁명군 총사령관이던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남북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제2차대전에서 연합군 승리를 이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조지 패튼 장군 등과 나란히 섰다.


고 김 대령은 제2차대전 부상으로 예편했다가 6·25 발발 직후 다시 입대해 한국전선으로 달려왔다. 미군이 그가 한국어 통역장교를 맡아주기를 원하자 그는 한국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전투부대를 맡아 이끌었다. 제2차대전 전투 공적을 통해 미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전투 대대장이 된 김 대령은 한국전에서 미 최초의 아시아계 연대장이 됐다. 그는 강원 화천군 일대의 전선을 60㎞나 북쪽으로 진격시켜 오늘의 중동부 휴전선이 북쪽으로 돌출하게 만들었다. 전시에도 300여명의 전쟁고아까지 돌본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특히 제2차대전 당시 일본계 부대를 이끌었던 김 대령은 전쟁 이후 아시아계는 물론 특히 일본계 미국인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2007년 일본계인 마이크 혼다 의원은 미 하원에서 일본군대위안부 결의안을 주도한 이유가 젊은 시절 미 캘리포니아에서 일본계 사회의 정신적 기둥으로 활약했던 김 대령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금도 북한은 제3차 핵실험을 준비하면서 백령도 기습상륙용 공기부양정 기지 공사까지 완료했고, 지난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이어 서해지역의 휴전체제를 무너뜨리고 분쟁지역화하려는 기습도발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했던 호국 용사들, 그리고 6·25전쟁 부상으로 고생하면서도 2005년 타계 때까지 조국애를 잃지 않았던 고 김영옥 대령을 가슴속 깊이 기린다.


<문화일보 6.20.자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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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조선 | 기사입력 2005-08-18 13:53

총알도 피해간 불사조 ‘무적신화’ 로 적진 돌진


철모대신 털모자 쓰고 총탄 사이 종횡무진 … 기발한 작전으로 2차대전 승리 앞당겨
적진침투 독일포로 생포, 홀홀단신 적과 대치등 수많은 전설 남겨

김영옥이 참가한 첫 전투는 1943년 9월 이탈리아 나폴리 남쪽의 작은 해안도시 살레르노에 상륙한 연합군이 로마를 향해 진격하는 과정에서였다. 그의 나이 24살. 그가 속한 100대대는 뉴욕을 출발해 2주일간의 항해 끝에 북아프리카 오란에 도착해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이 이끄는 미5군 6군단 산하 34사단 133연대에 배치됐다. 아프리카로 건너오는 배 안에서 심한 배멀미를 앓으면서 ‘첫 전투가 벌어질 때 나는 과연 어떨까? 나중에 평생을 두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비겁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라고 끊임없이 반문했다.

그는 “60여년 전 이탈리아 시골에서의 첫 전투가 신비스런 경험이었다”고 회상한다. “탱크 포탄이 터지고 포성이 들려오는 방향에서 독일군 탱크를 보는 그 혼돈의 순간에 모든 주변 상황이 한눈에 들어와 차분히 정리됐다. 이와 함께 마치 전생에서 지금과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고 해법도 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최소한의 공포도 없었고 극도로 냉철해졌다.”

전장 한복판에서 드러난 그의 이런 면모는 키 173㎝의 평범한 체구의 동양인이 이후 숱한 전투에서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주는 바탕이 됐다.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그는 철모 대신 털모자를 쓰는 게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당시 미군 규정상 전장에서 철모를 벗어서는 안됐지만(위반시 1회 약 50달러 벌금), “철모가 번거롭다”며 털모자를 쓰고 빗발치는 총탄 사이를 누비는 그에게는 예외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는 생각으로 참호도 파지 않고 맨땅에서 자는 기벽(奇癖)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장교후보생 교육을 받을 때부터 탁월한 독도법(讀圖法)과 방향감각 능력을 보였다. 그는 “지도를 보면 머릿속에 실제 지형이 그대로 그려졌고, 처음 가는 곳이라도 일단 지도를 본 후에는 상상한 그대로 실제 지형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커널 김’의 신화는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 2차대전 ◆

■■로마 해방전쟁

1943년 9월 로마의 외항(外港)인 안지오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북쪽에서 보강 병력이 대거 내려와 안지오를 포위한 독일군과 장기 대치상태에 빠졌다. 로마 해방을 목전에 둔 연합군으로서는 독일군이 북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인 정예 탱크사단을 어디에 배치해두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연합군의 주공(主攻) 루트를 독일군이 정확히 예측하고 탱크사단을 매복시켰다면 만사는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이듬해 5월이 되자 클라크 사령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을 의식해 적정(敵情) 파악을 다그쳤다. 김영옥 중위가 속한 34사단도 안지오 전투에 합류, ‘독일군 포로를 생포해 적정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당시 100대대 정보참모를 맡고있던 그는 대대장 싱글스 중령에게 포로생포 작전을 자원했다. 수색대조차 수차례 포로생포에 실패했던 터라 “미친 소리”라는 말을 들었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적의 허를 찌르고자 했다. 극소수 인원으로 밤에 적진으로 침투해 적당한 장소에 매복해 있다가 낮에 움직인다면 승산은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계획은 ‘승인 불가’라는 딱지가 붙어 34사단 본부, 6군단 본부를 거쳐 5군 사령부까지 올라갔고 군사령부는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결행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회신했다.


그는 작전지역 일대 항공 입체사진 수백장을 놓고 지형을 머릿속에 담기 시작했다. 적진에 침투하려면 아군의 참호, 철조망, 지뢰밭을 통과한 다음 그 반대 순서로 적군 지뢰밭, 철조망, 참호를 통과해야 했다. 5월 16일 일본계 아카호시 일병과 단둘이서 밤 10시30분 적진으로 침투했다. 악명 높은 독일군 지뢰밭을 40분에 걸쳐 포복으로 통과한 뒤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도랑에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 뜬눈으로 밤을 샌 아군이나 적군이 모두 잠든 시간, 경계가 풀린 독일군 보초들의 시선을 피해 그는 개인참호에서 잠을 자던 2명의 독일군에게 다가가 입에다 총구를 쑤셔박았다. 그리고는 총으로 위협하며 4인 종대 포복으로 온 길을 되짚어 아군 진지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 광경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연합군 수뇌부는 마치 영화장면과 같은 포로 생포 소식에 광분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직접 전화를 걸어 “특별무공훈장을 수여하겠다”고 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훈장 수여식 때 부관의 계급장을 떼 그에게 즉석에서 대위 계급장을 달아줬다. 그의 포로생포 작전은 UPI 종군기자를 통해 세계로 타전됐다. 연합군은 그가 잡아온 포로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5월 23일 ‘버펄로 작전’이라는 총공격을 개시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이틀 전인 6월 4일 로마에 입성했다.

“그와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

■■‘사무라이 김’의 전투

미국 본토에서 훈련을 할 때 한국계라는 이유로 일본계 사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김영옥 소위가 실제 전투에서 부대원의 신뢰를 얻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레르노에 상륙해 치른 첫 전투에서부터 B중대 2소대장이었던 그는 중대장과 맞섰다. 그는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계곡을 가로질러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공격했고, 중대장과는 다른 전진 루트를 고집했다. 지형지세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상관으로부터는 미움을 살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투결과는 그의 판단대로였고, 그는 부하들로부터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상륙 2개월여인 1943년 11월 산타마리아 올리베토에 있는 600고지 전투를 치른 뒤 부하들은 그를 ‘사무라이 김’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2개 분대를 이끌고 기관총 진지 수개를 수류탄 공격으로 박살내고 독일군을 포로로 잡는 등 괄목할 전과를 올렸다. 허벅지에 총탄이 박히는 첫 부상을 입고 첫 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것도 이 전투에서였다.

그가 대대 정보참모로 발령받은 1944년 1월 무렵 100대대는 첫 동계전투인 몬테 카지노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입었다. 2주일 반 만에 잔여병력의 90%를 잃을 정도였다. 특히 몇 차례 전투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줬던 다케바 부소대장 등 많은 전우들이 옆에서 죽어갔다. 이 전투 이후 ‘영(Young)과 함께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는 믿음이 부대원 사이에 퍼져나갔지만 그는 거꾸로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전우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만일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남은 평생을 내가 속한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불사조 같던 그도 1944년 10월 프랑스 동북부 산악지대 비퐁텐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당시 100대대는 인근 브뤼에르 해방전투에서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으나 사단장의 무모한 전진 명령에 내몰리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했고, 그는 적의 기관총탄 3발을 맞았다. 그는 들것에 실려 퇴각하다 적의 포위망에 갇혀 포로로 잡힐 뻔했다. 하지만 다른 전우들과 달리 항복을 거부하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상처 부위가 썩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심장을 향해 몸이 식어들어오는 생사의 고비를 살겠다는 의지로 넘긴 끝에 페니실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1944년 6월 치러진 벨베데레 전투부터 작전장교의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미 보병대대는 2개 중대를 병렬로 포진시켜 공격하고 나머지 1개 중대는 예비중대로 뒤를 받치는 게 관례지만, 그는 지형에 맞지 않는 이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3개 중대를 동시에 작전에 투입했다. 이후 치른 사세타 전투에서도 그는 교과서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대대 공격에 군단과 군사령부의 포병 지원을 요청하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치밀한 작전과 강력한 화력 지원을 앞세운 공격은 이후 그의 장기가 됐다.

‘가짜 도강 작전’으로 피사 무혈입성


■■피사 해방전쟁

피사 해방전도 김영옥의 작전 능력이 돋보인 전투였다. 로마를 함락하고 북상하던 연합군이 피사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을 건너야 했다. 대대 작전참모로 도강(渡江)작전을 짜는 데 골몰하던 그는 ‘가짜 도강’을 핵심으로 한 허허실실(虛虛實實) 작전을 짰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피사에 대한 직접 공격 없이 강을 건너자는 게 핵심이었고, 로마 해방 후 독일군의 야포 수와 폭격 강도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꿰뚫은 작전이었다. 작전의 요지는 디데이(D-day) 나흘 전 가짜 도강작전을 한 번 하고 그로부터 이틀 후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가짜 작전을 한 번 더 한 뒤 바로 다음 날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진짜 작전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작전은 그의 예상대로 맞아떨어졌다. 탱크 30대를 동원한 1차 가짜 도강작전에 독일군은 엄청난 포격을 가했다. 이틀 후 2차 작전이 실시되자 독일군의 포격 강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9월 1일 막상 진짜 작전이 실시됐을 때 독일군은 이번에도 가짜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포탄이 바닥났는지 단 한 발의 포격이나 총격도 가해오지 않았다. 부대는 도강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30분 만에 선두가 이미 아르노강을 건너고 있었다. 미군의 도강을 막지못한 독일군은 피사를 버리고 철수했고 연합군은 텅빈 피사에 아무 저항 없이 입성할 수 있었다.

◆ 한국전쟁 ◆

제대후 한국전 소식에 다시 사선으로

1945년 4월 그가 휴가차 LA로 돌아왔을 때 LA타임스는 그와 어머니가 만나는 사진과 함께 ‘전쟁영웅의 귀환’이라는 큼지막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가다가 독일군의 항복(5월 8일)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정보장교로 남아달라는 펜타곤의 요청을 뿌리치고 1946년 명예 제대를 했다.

그는 군대에서 모은 3000달러로 당시로서는 생소한 ‘코인 론드리’(빨래방)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사업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부모의 나라’를 돕기 위해 다시 사선(死線)으로 향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1951년 3월은 1·4 후퇴 직후였다. 그가 배치된 유엔군 9군단 산하 미 육군 7사단은 흥남철수로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와 다시 북진을 준비 중이었다. 1952년 9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1년6개월간 전투에 참가했지만 유럽 전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빡빡한 전투를 치렀다. 또 가장 큰 부상을 입은 것도 한국에서였다.

적진 앞에서 도망치는 국군 돌려세워

■■소양강 전투

김영옥 대위는 7사단에 부임하자마자 ‘베니대 그룹’(흥남철수 때 7사단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을 이끌고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곧 31연대 정보참모로 발령이 났다.

2차대전에서 발휘했던 그의 대담함이 요구되는 상황은 우연히 찾아왔다. 1951년 4월, 31연대는 소양강을 건너 중공군과 장기 대치하던 17연대와 교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자마자 공산군의 제1차 춘계 공세가 시작됐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소양강을 건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방의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후퇴하자 그는 맥카프리 연대장으로부터 인제군 개운동 계곡에 있는 다리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일제 때 세워진 이 자그마한 다리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보장할 전략 요충지였다. 이 다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소양강을 건너야 하는 모든 부대가 엄청난 희생을 낼 상황이었다. 홀로 남은 그에게는 탱크 1개 소대(5대)가 보내졌다. ‘최소한 몇 시간은 적을 지연시켜야 아군이 소양강 남쪽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다’는 지시였지만 이미 전방의 한국군 3사단과 5사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무너져 마구 후퇴하고 있는 긴급 상황이었다.

황당한 명령이었지만 그는 탱크 다섯 대를 다리 남쪽 공터에 일렬로 배치한 뒤 다리 앞에 버티고 섰다. 포성과 함께 적이 코앞에 다가오는 상황에서 탱크 5대 앞에 혼자 버티고 선 한국계 미군 장교의 모습은 기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침착하고 당돌한 행동은 허겁지겁 후퇴하던 한국군을 되돌려세우는 효과를 발휘했다. 150명 정도의 한국군이 후퇴를 멈추고 탱크 뒤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결국 적은 합동 방어진지가 효과적으로 구축된 것으로 판단했는지 다리 쪽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후퇴할 수 있었다.

유엔군 최선봉, 연전연승 ‘무적의 부대’

■■역사상 첫 유색인 대대장

그는 한국에 부임한 지 7개월 만인 1951년 10월 31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소령진급은 9월에 있었다. 그의 대대장 부임은 미군 역사상 ‘큰 사건’이었다. 2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백인만이 실전에서 중대급 이상을 지휘할 수 있다’는 뿌리깊은 인종편견이 있던 미군의 전통 아래 아시아계가 전쟁 한가운데서 전투부대 대대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실제 김영옥은 미군 역사상 첫 소수인종 출신 전투부대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인 대대장 역할을 한 것은 훨씬 전부터였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던 맥카프리 연대장은 연대 정보참모인 그에게 곧 작전참모 역할까지 맡겼고, 5월 23일부터는 실전 경험이 없던 대대장을 교체하고 그에게 대대지휘까지 맡겼다. ‘대위 계급으로는 대대장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명목상의 대대장을 두고 실질적인 지휘는 그가 맡는 편법까지 동원됐다.

그가 1대대를 맡았을 때 병사들 사이에는 패배감이 만연해 있었다. 북진하다 함경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연대장까지 잃으며 궤멸되다시피 했던 31연대에는 ‘장진호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중공군에 대한 공포감이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태를 그대로 놓아둘 사람이 아니었다.


그해 5월 자신의 지휘 아래 구만산·탑골 전투를 치르면서 부대원에게 승리를 맛보게 했다. 포격으로 공격대형이 무너지곤 했지만 그는 병사들이 후퇴하면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포탄이 작렬하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곤 권총을 빼들고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겠다”며 전투를 독려했다. 부대의 사기를 다시 높인 이 두 전투로 그는 이탈리아 전투에 이어 두 번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 능선을 팔짱을 낀 채 왔다갔다 했다. 산봉우리에서 중공군이 쏘아대는 총탄에 겁먹은 병사들이 머리를 처박고 적군을 보지도 않은 채 총을 쏘는 것을 교정해주기 위해서였다. 병사들 사이에서 “너무 위험하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왔지만 그는 “나를 보라. 괜찮지 않으냐”고 했다. 결국 머리를 내밀고 총을 쏜 미군에게 중공군은 쫓겨갔다. 이 전투에서 그의 군복에 난 총탄 구멍만 세 개였다.

현재의 남이섬 인근에서 벌어진 금대리 전투 때는 적진 30㎞를 4시간만에 관통하는 야간행군을 시도해 승리를 낚았다. 중공군은 적군의 대대병력이 사전포격도 없이 자신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다 밤을 새워 달려온 그의 부대에 일격을 당하고 패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면모를 일신한 1대대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무적의 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대대를 앞세운 31연대는 중공군의 마지막 총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의 재반격을 인도하는 견인차가 됐는데, 5월 27일 유엔군이 전 전선에서 일제히 38선을 다시 넘었을 때 선두로 돌파한 보병부대가 1대대였다.

그의 탁월한 전투 지휘능력은 전황도로도 증명된다. 그가 1대대 지휘를 맡은 5월 23일 작전 전황도에는 1대대가 다른 부대와 같은 선상에 있지만 1주일 후인 5월 31일 전황도에는 1대대가 혼자서 삐죽이 화천 이북까지 진격해 유엔군 9군단의 최선봉이 됐다. 이후 6월의 전황도에도 중부전선의 가장 선두에 그의 부대가 있었다. 중부전선이 북으로 치솟아 지금의 휴전선 모양이 만들어진 데는 그의 역할이 컸던 셈이다.

그가 평강-철원-금화로 연결되는 철의 삼각지대에 들어가 오인포격을 당한 것도 빠른 진격속도 때문이었다. 그의 부대는 화천 인근 541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휴식을 취하다가 아군의 오인 포격으로 대대본부가 쑥대밭이 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 사고로 그는 오른쪽 무릎을 파편이 관통하고, 왼쪽 다리 발목이 파편에 맞는 중상을 입었다.

일본 오사카로 후송돼 다리 절단의 위기를 넘긴 그는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8월 27일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리곤 그 해 10월 정식으로 1대대장에 부임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 전선을 지키던 그는 신임 연대장 모세스 대령이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의미없는 전투를 계속하자 1952년 9월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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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전설, 86세 노병 김영옥 미 육군 대령

그의 피엔 뜨거운 조국이 흐르고 있다

김영옥(86) 옹은 지난 7월 12일 미국 LA에 있는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 6월에 이어 방광암 2차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숱한 전쟁터를 누빈 무쇠 같은 몸이지만 전장(戰場)의 상처와 세월의 무게는 노병(老兵)을 놓아두지 않았다.
한국전 때 부상으로 수술 40차례
▲ 2003년 사회봉사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김영옥 옹. 하지만 김 옹은 한국전 참전의 공로에 대해서는 아직 한국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지 못했다.
이미 김 옹의 몸은 전쟁터에서의 부상으로 보통 사람이 인내키 어려운 고통을 견뎌왔다. 총알과 파편이 헤집어놓은 그의 몸은 모두 11군데의 신경이 절단돼 있는 상태다. 2차 세계대전 때 손가락 일부를 잃었고, 한국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그는 무려 40차례의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80대 노병(老兵)의 몸은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김영옥이 누구인가. 신문을 꼼꼼히 읽는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잠깐만 더듬어봐도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다.
‘미 육군 예비역 대령, 미 역사상 미 육군 전투대대를 지휘한 첫 소수인종 장교,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긴 주역,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두 차례 받은 전설적 일본계 부대(100대대)를 이끈 장교, 한국전쟁에서 무패의 신화를 남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 미국·프랑스·이탈리아 정부로부터 20여개의 무공훈장 수여….’
‘커널(colonel·대령) 김’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사(戰史)를 새로 쓰게 한 위대한 군인’으로 각인돼 있다. 프랑스 동북부 브뤼에르 지방 등 그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킨 지역에서는 ‘카피텐 김(김 대위)’이라는 동양인 장교의 이름이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또 한국전쟁 당시의 ‘김영옥 소령’은 그가 거두고 보살핀 수백 명 전쟁고아들로부터 평생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佛,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2차대전과 한국전쟁이라는 20세기의 가장 처참한 전쟁을 온몸으로 뚫고 온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데 삶을 던졌다. 한번은 파시스트 독재로부터, 또 한번은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느라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2차대전 종전 60주년, 한국전쟁 휴전 52주년을 맞은 지금도 그의 삶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2월 60년 전 그의 공적을 재평가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하기도 했다.
▲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클라크 사령관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있는 김영옥 중위.
무엇보다 그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기억될 필요가 있다. 미국에 건너온 한국인 부모 밑에서 이민 2세로 태어난 미국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인 한국에 대한 애정을 평생 간직해왔다.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훨씬 편하지만 이름만큼은 한국이름 ‘김영옥’을 고집했다. 소수계 부대에는 전투를 맡기지 않으려 할 만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강한 미군에서 그렇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Young Oak Kim’을 동료 미군들은 ‘영(Young)’으로 불렀다. 2차대전 종전 후 생업(빨래방 운영)으로 복귀해 대위 봉급의 5배를 벌던 그가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평화로운 일상을 박차고 재입대를 결정한 것도 부모의 나라에서 터진 전쟁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100% 한국인…프라이드 갖고 살아”
그는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던 심경에 대해 “한국계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돕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도,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이 한국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도 한국으로 가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소위 ‘애치슨 라인’을 설정, 한국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이 북한의 남한 침공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고, 그래서 미국은 한국인에게 빚을 졌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미국인이면서 왜 한국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평소 “나는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고 답한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을 갖고 있다는 말이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차별을 겪으며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념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코리안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와 프라이드(pride)를 갖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종료와 함께 한국을 떠났던 그는 1960년대 미군 군사고문단 일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고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 잿더미에서 발돋움하려는 조국의 모습을 봤다. 이후 1970년대의 경제발전을 지켜보면서 그는 “한국에서 피흘린 것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말했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 보며 눈물
▲ 60년대 한국군 군사고문단 시절 고문단장인 옌시(Yancy)소장과 함께 한 김영옥 중령.
그는 맹목적인 전쟁지지자가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도주의자다. 지난 2000년 미 육군으로부터 ‘노근리 사건’에 대한 외부전문가위원회(outside experts committee) 위원으로 위촉돼 노근리 사건 진상보고서도 작성했던 그는 “다시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숱한 전쟁을 겪어서인지 그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
그는 “단기간에 걸쳐 공산군과 유엔군이 번갈아 점령을 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서 민간인이 겪은 고초는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경우보다 더 심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전 당시 북한강 지역에서 작전을 하다가 피란을 떠나지 않은 한 노인과 얘기할 기회가 있어 ‘이곳 주민은 공산주의를 지지합니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지지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며 “그 노인 얘기가 ‘우리는 들풀이오. 어제는 소가 밟고 지나가더니 오늘은 말이 밟고 지나가는군. 소에게 밟히든, 말에게 밟히든 들풀에게는 마찬가지오’라고 해서 그날 이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주민에게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결코 다시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관련 뉴스를 꼼꼼히 챙기는 그는 한반도를 둘러싼 북핵 문제도 지혜롭게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북핵 문제가 상당히 걱정스럽지만 전쟁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며 “미국의 대북 정책이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면 안된다”고 충고했다. 대북 문제에 관한 한 DJ 정부 이후의 햇볕정책 지지론자다.
그가 조국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이었다. 그는 전방의 7사단을 찾아가기 위해 부산역에 들렀을 때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눈 덮인 부산역은 10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이들로 가득했는데 사내아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추위에 옷이라곤 러닝 셔츠나 걸쳤을 정도고 온몸에는 땟물이 흘렀다. 아이들은 기차를 향해 손을 내밀기도 하고 석탄을 구하기 위해 기차 밑을 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새로 도착한 미군이 역 안으로 들어서면 떼를 지어 쫓아와 먹을 것을 구걸하곤 했다.”
그는 열차에 오르자 전투식량인 시레이션 더미에서 자기 몫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객실에 있던 25~30명 가량의 미군 장교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나는 육군 17연대로 가는 대위 김영옥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지요. 지금 저 밖에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쳐다보고 있습니다.…여기 쌓여있는 시레이션은 여러분들 것입니다. 한두끼쯤 배불리 먹지 않아도 죽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앞에 깡통 한두 개씩만 빼고 나머지를 내게 주십시오. 아이들에게 주겠습니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담배 다섯 개비에 몸을 파는 여자도 보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부여잡고 어머니를 찾으며 울부짖는 병사도 본 그였지만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틀어 전쟁과 관련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참담한 순간은 그때였다”고 한다. 그는 “내 평생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부대원 도움받아 고아원 후원
▲ 1952년 여름 김영옥의 1대대가 도움을 줬던 경천애인사의 전쟁고아들.
그의 조국애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전쟁고아들을 통해 구현됐다. 전쟁 중 그가 이끈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는 한국의 고아원 하나를 정해 정기적으로 재정지원을 한 유일한 일선 전투부대였다. 1대대는 서울 삼각지에 있던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는데 고아원 후원은 부대원들이 모은 첫 지원금 145달러로 시작해 점점 큰 규모로 발전했다. 부대원들은 미국의 가족에게 편지를 써 갖가지 구호품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그는 부대원들의 자발적인 애정을 확인한 후 캔맥주 등 남아도는 군 보급품의 절반 가량을 암시장에서 처분해 경천애인사를 지속적으로 도왔다. 그는 2003년 한국 정부로부터 사회봉사 활동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으면서 “한국전쟁에서 보살폈던 고아들을 보고 싶다”는 소감을 피력했고, 훌륭하게 성장한 당시의 전쟁고아들이 이 말을 언론을 통해 전해듣고 그와 극적으로 재회하기도 했다.
전장에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72년 샌프란시스코의 군병원에서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와서도 LA 한인사회를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한 달에 7500달러에 이르는 적지 않은 연금을 받지만 LA 새턴(saturn) 거리의 월세 1200달러짜리 아파트에 혼자 살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사회봉사활동에 쓰고 있다. LA 한인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 때문에 많은 동포들이 그를 따르며 존경하고 있고, 투병생활을 하는 그를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인권익단체 밑거름 만들어
그는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대의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의 LA 지부(chapter) 이사를 지냈다. 당시 미국은 정부 예산 삭감 바람이 거셌는데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한인사회를 위한 많은 예산을 따냈다. 미국 최대의 한인 봉사단체로 성장한 한인 정신건강정보센터(KHEIR), 한인 2세들을 위한 한인청소년회관(KYCC), 한미연합회(KAC) 등의 권익보호단체들이 그의 지원 아래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자신의 공적을 절대 알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LA 한인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스스로 떠벌리는 인사들에 의해 그의 공적이 가려져온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불만이 없다. 그는 평소 “일을 할 때는 처음에 잘 디자인하고 토대를 닦아 다른 사람이 ‘내가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게 하는 게 오히려 중요하다”고 말한다.
▲ 2003년 LA의 로즈 퍼레이드에서 한인교민들과 함께 한 김용옥 옹(앞줄 왼쪽 두번째)
사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1997년부터 관련자 인터뷰와 현장취재 등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써오고 있는 재미 저널리스트 한우성씨는 “그의 아파트에는 벽에 걸려있을 법한 훈장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며 “그에게 훈장을 보자고 하니까 차고에서 먼지 낀 종이상자를 꺼내와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훈장 경력에서 아쉬운 점은 정작 그가 스스럼없이 조국으로 여기고 있는 한국으로부터는 아직 무공훈장 소식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에서 그는 중부전선을 책임지던 미 육군 7사단의 선봉부대를 맡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며 북쪽으로 60㎞를 치고올라가 현재의 휴전선을 긋는 데 기여를 했다. 이런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아직 아무런 무공훈장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국에 불만이 없다”고 말한다. 한우성씨는 “당초 일대기를 쓰자고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김 대령은 ‘자랑하고 싶은 인생이 아니다’며 취재를 거부했었다”며 “숱한 설득 끝에 ‘당신의 인생을 기록하는 게 한국을 위한 마지막 큰 봉사로 생각해 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인 사회에서도 전설로
그는 LA 한인사회뿐 아니라 일본인 사회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2차대전이 터진 후 입대할 때 ‘일본인’으로 분류돼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 숱한 전쟁에서 일본계 미국인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다. 미국으로 망명해 편의점을 운영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부모로부터 “일본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고 일본 음식은 먹지도 말라”는 엄한 민족 교육을 받은 그로서는 무척이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의 일본계 전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를 ‘사무라이 김’으로 부르며 존경했고, 지금도 그의 무공은 LA 일본사회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미국의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재단은 그의 일대기를 담은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LA 등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나와 일본계 미국인과의 프렌드십(friendship) 같은 게 돼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일본의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도 분명하다. 그는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원인 마이클 혼다(현 연방 하원의원)가 2차대전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정신대 결의안’(AJR 7)을 추진했을 때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당시 일본계 사회는 결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반대 로비를 벌였지만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인 김 대령이 “반대하면 안된다”고 설득하자 “지지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노병 김영옥. 그의 주목할 만한 삶은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점차 인정받는 분위기다. 인천광역시는 최근 2007년 개관 예정인 이민사 박물관에 ‘김영옥 부스’를 설치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이민 2세로서 조국을 빛낸 그의 업적과 인생을 영구전시해 알리겠다는 취지다. 그는 2003년 미국 이민 100년을 맞아 선정된 ‘이민영웅’에 문대양 하와이대법원장, 야구선수 박찬호 등과 함께 선정되기도 했다. 한우성씨는 “할리우드나 국내 관계자들이 김 대령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자고 접촉해온다”고 말했다.
“한국의 미래를 낙관한다”고 말하는 그의 말년은 앞서 세상을 떠난 한 유명한 군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 중령
  •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 - 마크 클라크 前 미 5군 사령관
  • “미 보병학교 시절 한국계인 김영옥 대령 덕에 어깨가 으쓱했다.” - 채명신 前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
  •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닮았으면 하는 인물” - 김영옥의 전기를 쓴 한우성


■ 김영옥 연표
1919년 미국 LA에서 이민 1세대인 아버지 김순권과 어머니 노라(Nora) 고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6년 LA 벨몬트고등학교 졸업
1937년 LA 시립대학 입학
1938년 LA 시립대학 중퇴 후 프랭크 위긴스 국립 디젤엔진학교 입학
1941년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
1942년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당시 유일한 유색인 후보생)
1943년 소위 임관 후 일본계 미국인 부대인 100대대 부임. 9월에 유럽 전선으로 파병돼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상륙. 이후 1945년 4월 본국 귀환 때까지 로마·피사 해방전투 등을 치름. 1944년 1월 중위, 6월 대위 진급
1946년 명예제대
1946~1950년 LA에서 세탁소 운영
1950년 9월 한국전 발발 소식을 듣고 재입대
1951년 3월 한국 도착. 이후 유엔군 9군단 산하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에 부임해 구만산·탑골·청병산·금대리·노동리 전투 등을 치름. 1951년 9월 소령 진급, 10월 1대대장 부임
1952년 9월 한국을 떠남
1952~1956년 포트 베닝 보병학교 교관
1956~1959년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독일 근무
1959년 중령 진급
1959~1963년 캔사스 포트 리브에서 교관
1963~1965년 미군 고문으로 한국 근무. 1965년 대령 진급
1965~1971년 유럽, 하와이 등지에서 근무
1971년 부상 후유증으로 입원
1972년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
1978~1988년 미국 최대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 LA 지부 이사로 근무
2000~2001년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한 외부전문가위원회 활동
미국의 두 번째 등급 무공훈장인 특별무공훈장, 프랑스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 등 20여개의 무공훈장 받음. 2003년 한국의 국민훈장 모란장, KBS 해외동포상 수상

2005년 12월 29일 사망.하와이 호눌룰루 근처 펀치볼 국립묘지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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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 졸업식 축사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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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gjmunhong/13645



* 국제전화 거는방법?!


한국에서뉴욕에 (핸드폰)전화하실때는

001,002...(국제전화 접속번호) + 1(미국국가번호) + 347(지역번호)+ 825 7982(상대방 전화번호)

한국에서 뉴욕에 (집) 전화 하실때는

001,002...(국제전화 접속번호) + 1(미국국가번호) + 718(뉴욕지역번호)+ 847 7982(상대방 전화번호)



뉴욕에서 한국에(핸드폰) 전화 하실때는

011(국제전화 접속번호) + 82(한국국가번호) + 11(0을 뺀 지역번호)+758 2312(상대방 전화번호)

뉴욕에서 한국에 (집) 전화 하실때는

011(국제전화 접속번호) + 82(한국국가번호) + 31(0을 뺀 안양지역번호)+477 2312(상대방 전화번호)

이런방법으로 하시면 됩니다.

A

국가


아프가니스탄 Afghanistan

국제전화 접속번호


00

국가번호


93

알바니아 Albania

00

355

알제리아 Algeria

00

213

아메리칸사모아 American Samoa

011

1

안도라 Andorra

00

376

앙골라 Angola

00

244

안귈라 Anguilla

011

1

안티구아 Antigua and Barbuda

011

1

아르헨티나 Argentina

00

54

아르메니아 Armenia

00

374

아루바 Aruba

00

297

어센션 섬 Ascension

00

247

호주 Australia

0011

61

오스트리아 Austria

00

43

아제르바이잔 Azerbaijan

00

994

B

바하마 Bahamas

011

1

바레인 Bahrain

00

973

방글라데시 Bangladesh

00

880

바베이도스 Barbados

011

1

벨로루시 Belarus

8 누르고 대기후 10누름

375

벨기에 Belgium

00

32

벨리제 Belize

00

501

베넹 Benin

00

229

버뮤다 Bermuda

011

1

부탄 Bhutan

00

975

볼리비아 Bolivia

00

591

보스니아
Bosnia and Herzegovina

00

387

보츠와나 Botswana

00

267

브라질 Brazil

0014 - Brasil Telecom
0015 - Telefonica
0021 - Embratel
0023 - Intelig
0031 - Telmar

55

영국령버진군도
British Virgin Islands

011

1

브루나이 Brunei

00

673

불가리아 Bulgaria

00

359

부르키나 파소 Burkina Faso

00

226

부룬디 Burundi

00

257

C

캄보디아 Cambodia

001, 007, 008

855

카메룬 Cameroon

00

237

캐나다 Canada

011

1

케이프버드 Cape Verde

0

238

케이만제도 Cayman Islands

011

1

중앙아프리카공화국
Central African Republic

00

236

챠드 Chad

00

235

칠레 Chile

00

56

중국 China

00

86

콜롬비아 Colombia

00444 - Comcel
005 - Orbitel
007 - ETB
009 - Telefonica

57

코모로스 Comoros

00

269

콩고 Congo

00

242

쿡 제도 Cook Islands

00

682

코스타리카 Costa Rica

00

506

크로아티아 Croatia

00

385

쿠바 Cuba

119

53

사이프러스 Cyprus

00

357

체코 공화국 Czech Republic

00

420

D

도미니카공화국
Democratic Republic of Congo

00

243

덴마크 Denmark

00

45

Diego Garcia

00

246

지부티 Djibouti

00

253

도미니카 Dominica

011

1

도미니카공화국
Dominican Republic

011

1

E

East Timor

00

670

에콰도르 Ecuador

00

593

이집트 Egypt

00

20

엘살바도르
El Salvador

00

503

적도기니아 Equatorial Guinea

00

240

에리트리아 Eritrea

00

291

에스토니아 Estonia

00

372

이디오피아 Ethiopia

00

251

F

포클랜드섬
Falkland (Malvinas) Islands

00

500

Faroe Islands

00

298

피지 Fiji

00

679

핀라드 Finland

00, 990, 994, 999

358

프랑스 France

00

33

프랑스령기아나 French Guiana

00

594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French Polynesia

00

689

G

가봉 Gabon

00

241

감비아 Gambia

00

220

그루지아 Georgia

8 누르고 대기후 10누름

995

독일 Germany

00

49

가나 Ghana

00

233

지브랄타 Gibraltar

00

350

그리스 Greece

00

30

그린랜드 Greenland

00

299

그레나다 Grenada

011

1

과델루프 Guadeloupe

00

590

괌 Guam

011

1

과테말라 Guatemala

00

502

기니Guinea

00

224

기니아비쏘Guinea-Bissau

00

245

가이아나 Guyana

001

592

H

아이티 Haiti

00

509

온두라스 Honduras

00

504

홍콩 Hong Kong

001

852

헝가리 Hungary

00

36

I

아이슬랜드 Iceland

00

354

인디아 India

00

91

인도네시아 Indonesia

001, 008

62

Inmarsat Satellite

00

870

이란 Iran

00

98

이라크 Iraq

00

964

아일랜드 Ireland

00

353

Iridium Satellite

00

8816/8817

이스라엘 Israel

00, 012, 013, 014, 018

972

이태리 Italy

00

39

아이보리코스트 Ivory Coast

00

225

J

자마이카 Jamaica

011

1

일본 Japan

010

81

요르단 Jordan

00

962

K

카자흐스탄 Kazakhstan

8 누르고 대기후 10누름

7

케냐 Kenya

000

254

키리바티 Kiribati

00

686

쿠웨이트 Kuwait

00

965

키르기즈스탄 Kyrgyzstan

00

996

L

라오스 Laos

00

856

라트비아 Latvia

00

371

레바논 Lebanon

00

961

레소토 Lesotho

00

266

라이베리아 Liberia

00

231

리비아 Libya

00

218

리히텐슈타인 Liechtenstein

00

423

리투아니아 Lithuania

00

370

룩셈부르크 Luxembourg

00

352

M

마카오 Macao

00

853

마케도니아 Macedonia

00

389

마데이라 Madagascar

00

261

말라위 Malawi

00

265

말레이시아 Malaysia

00

60

몰디브 Maldives

00

960

말리 Mali

00

223

말타 Malta

00

356

마샬군도 Marshall Islands

011

692

마티니끄 Martinique

00

596

모리타니아 Mauritania

00

222

모리셔스 Mauritius

00

230

마요뜨 Mayotte

00

262

멕시코 Mexico

00

52

마이크로네시아 Micronesia

011

691

몰도바 Moldova

00

373

모나코 Monaco

00

377

몽골 Mongolia

001

976

몬테네그로 Montenegro

00

382

몬트세라트섬 Montserrat

011

1

모로코 Morocco

00

212

모잠비크 Mozambique

00

258

미얀마 Myanmar

00

95

N

나미비아 Namibia

00

264

나우루 Nauru

00

674

네팔 Nepal

00

977

뉴질랜드 Netherlands

00

31

네덜란드령안틸레스
Netherlands Antilles

00

599

뉴칼레도니아
New Caledonia

00

687

뉴질랜드 New Zealand

00

64

니카라과 Nicaragua

00

505

니제르 Niger

00

227

나이지리아 Nigeria

009

234

니우에 Niue

00

683

노르웨이 Norfolk Island

00

6723

북한 North Korea

99

850

마리아나 제도 Northern Marianas

011

1

노르웨이 Norway

00

47

O

오만 Oman

00

968

P

파키스탄 Pakistan

00

92

벨라우 Palau

011

680

파나마 Panama

00

507

파푸아뉴기니 Papua New Guinea

05

675

파라과이 Paraguay

00

595

페루 Peru

00

51

필리핀 Philippines

00

63

폴란드 Poland

00

48

홀란드 Portugal

00

351

푸네르토리코Puerto Rico

011

1

Q

카타르 Qatar

00

974

R

레위니옹 Reunion

00

262

루마니아 Romania

00

40

러시아 Russian Federation

8 누르고 대기후 10누름

7

르완다 Rwanda

00

250

S

세인트헬레나 Saint Helena

00

290

세인트키츠 Saint Kitts and Nevis

011

1

세인트루시아 Saint Lucia

011

1

쌍피에르미켈론
Saint Pierre and Miquelon

00

508

세인트빈센트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011

1

사모아 제도 Samoa

0

685

산마리노 San Marino

00

378

상토메프린시페
Sao Tome and Principe

00

239

사우디아라비아 Saudi Arabia

00

966

세네갈 Senegal

00

221

Serbia

00

381

세이쉘 Seychelles

00

248

시에라리온 Sierra Leone

00

232

싱가폴 Singapore

001, 008

65

슬로바키아 Slovakia

00

421

스로베니아 Slovenia

00

386

솔로몬섬 Solomon Islands

00

677

소말리아 Somalia

00

252

남아프리카공화국 South Africa

00

27

한국 South Korea

001, 002

82

스페인 Spain

00

34

스리랑카 Sri Lanka

00

94

수단 Sudan

00

249

수리남 Suriname

00

597

스와질렌드 Swaziland

00

268

스웨덴 Sweden

00

46

스위스 Switzerland

00

41

시리아 Syria

00

963

T

대만 Taiwan

002

886

타지키스탄 Tajikistan

8 누르고 대기후 10누름

992

탄자니아 Tanzania

000

255

태국 Thailand

001

66

Thuraya Satellite

00

882 16

토고 Togo

00

228

Tokelau

00

690

퉁가 Tonga

00

676

트리니다드토바고
Trinidad and Tobago

011

1

튀니지 Tunisia

00

216

터키 Turkey

00

90

터크메니스탄 Turkmenistan

8 누르고 대기후 10누름

993

터스케이코스제도
Turks and Caicos Islands

0

1

투발루 Tuvalu

00

688

U

우간다 Uganda

000

256

우크라이나 Ukraine

00

380

아랍 에미리트 연방
United Arab Emirates

00

971

영국 United Kingdom

00

44

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

011

1

U.S. Virgin Islands

011

1

우루과이 Uruguay

00

598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

8 누르고 대기후 10누름

998

V

바누아루 Vanuatu

00

678

바티칸 Vatican City

00

379, 39

베네주엘라 Venezuela

00

58

베트남 Vietnam

00

84

W

웰리스푸투나 Wallis and Futuna

00

681

Y

예멘 아랍 공화국 Yemen

00

967

Z

잠비아 Zambia

00

260

짐바브웨 Zimbabwe

00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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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이란 인도어로 몽고가 아니고 페르시아말로 몽고이다. 중아아시아에서 부르던 이름을 페르시아말로 표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몽고를 그대로 계승했다기보다는 차카타인 한국을 계승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사람들이 무굴이라고 부른 것이라기 보다는 바부르가 그렇게 이름을 붙여 불렀을 것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첫 황제인 바부르 이야기/

[페르가나의 소년 왕, 카불의 술탄, 인도의 황제 바부르]

1. 12살에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다

나는 1526년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운 황제다.

무굴 제국은 동방의 빛나는 나라였다.

중국의 명나라와 함께 당대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다.

개국 321년 뒤, 영국에 의해 1857년 문을 닫기 까지 세계에 부(富)를 자랑했다.

당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장해 힘을 키우기 이전이었다.

유럽은 우리의 무역 파트너였을 뿐, 인도의 앞 바다인 인도양에 전함을 보낼 정도로 힘을 키우지는 못하고 있었다.

제국의 이름 ‘무굴’은 사실 인도인들이 발음을 잘 못해서 생겼다.

올바르게 발음하면? 놀라지 마시라 몽골이다.

몽골인이 세운 나라라고 해서 무굴이라고 인도인들이 불렀다.

인도 사상 가장 완벽하고 영역이 컸던 나라를 인도인이 아닌, 몽골인이 세웠다니?

잘 상상이 되시나.

몽골인의 나라가 인도 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였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많은 인도인들은 아직도 그걸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안다.

게다가 나와 내 후손들이 이슬람교도였다는 걸 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다.

힌두가 다수인 나라를 통치하는 게 이슬람교도이고 외국인이었으니 말이다.

내 이름은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흔히 바부르라고 불린다.

바부르는 호랑이를 뜻하는 페르시아 말 ‘바브르‘에서 왔다.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려웠던지, 어려서부터 바부르라고 불렀다.

1483년 2월 23일생.

나는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공국(公國) 왕자로 태어났다.

왕위를 이을 큰 아들이었으니, 어렸을 때 생활은 행복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12살 때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그랬다.


인도 무굴 제국 황제라면서고향이 중앙아시아라고 하니 어리둥절하겠다.

그렇다. 나는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훗날 인도로 내려가 제국을 세웠다.

중앙아시아를 인도에서 너무 멀게 생각하지 말라.

중앙아시아 최고의 도시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려가고, 다시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 힌두스탄 평원으로 가면 그곳이 바로 인도다.

아프가니스탄이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잇는 중간지대라고 보면 된다.

페르가나 공국은 중앙아시아 동쪽 끝 페르가나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의 서쪽 끝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가 맞닿은 곳이다.

페르가나 계곡에서 동쪽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면 오늘날 중국의 서쪽 끝인 카스(喀什) 다.

중국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페르가나 계곡을 지나간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나라의 장군이 된 고선지, 그가 이름을 날린 곳이 이 일대다.

신라의 혜초 스님이 진리의 불법을 찾아 천축국 인도로 갈 때도 내 땅을 지났다.

중국에서 인도로 바로 넘어가는 길은 없으니까 이 길로 가야했다.

요즘은 한국에서 온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조금씩 찾는다.

유럽의 배낭족은 많이 온다.

페르가나 계곡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주요 통로다.

당연히 비단길, 즉 실크 로드의 주요 길목이다.

요즘은 이 땅이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라는 나라들로 쪼개졌다.

낯선 이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 내 얘기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않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페르가나 공국의 수도는 안디잔인데, 오늘날의 안디잔에는 한국 자동차 메이커 GM대우의 자동차 공장이 있다.

참 얼마전 이 공장 이름은 GM 우즈베키스탄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한국인이 그래서 가끔씩 왔다간다.

가장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 한국으로 시집가는 우즈베키스탄의 처녀들이 많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김태희가 밭을 갈고, 송혜교가 물지게를 매고 있더라는 말이 한국에서 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지역에 미인이 많다는 얘기겠다.


내가 12살에 왕이 되었다니 복도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정 모르는 소리다.

나이에 맞춰 할 일이 있다.

나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때에 한 나라를 어깨에 짊어지게 된 소년 왕이었다.

더구나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부왕의 이름은 오마르 셰이크 미르자.

이슬람식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면 그냥 오마르라고 생각하면 된다.

셰이크는 아랍식 존칭이고, 미르자는 페르샤어이다..

셰이크는 부족장, 이슬람 학자, 지도자를, 미르자는 몽골어인칸, 아랍어인 아미르와 같은 왕을 뜻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미르자는 지도자의 아들, 즉 공자를 뜻하기도 했다.

부왕은 그때 왕국의 또다른 주요 도시 아크시에서 계셨는데, 비둘기집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1494년 6월 9일이었다.

아크시의 성채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서있었다.

아버지는 어찌된 일인지 당신이 키우던 비둘기들에 모이를 주다가 비둘기들과 같이 절벽에서 허공으로 날았다.

중앙아시아 제국의 황도였던 사마르칸트에서 태어났던 그가 숨졌을 때는 나이 39세이었다.

국가적 위기는 아버지가 변을 당했을 때 마침 외적이 침략하면서 증폭됐다.

이웃 나라의 왕이던 외삼촌과, 큰 아버지가 각각 동맹을 맺고 페르가나 공국을 공격해왔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급서했으니 10대 초반인 나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외삼촌과 큰 아버지가 왜 쳐들어왔느냐고 묻지 말라.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의 법이 당시는 그랬다.

(안디잔의 바부르 광장에 서있는 바부르의 기마상)

중앙아시아의 중심지는 사마르칸트이다.

사마르칸트는 오늘날은 우즈베키스탄의 두 번째 도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나의 6대조 할아버지인 티무르 아미르는 사마르칸트를 황도(皇都)로 중앙아시아와 인도, 이란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는 칭기스칸 이후 초원을 다시 통일한 위대한 군인이었다.

유럽인들은 절름발이라고 그를 놀리지만, 동양과 서양을 잇는 초원의 길은 그로 인해 다시 열렸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을 잇는 길을 따라 상인은 세상의 부를 실어 날랐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의 무덤 ‘구르 아미르’에 누운 뒤 제국은 분열됐다.

아들들이 제국을 나눠가졌다.

그 아들들은 아들들에게 또 영토를 나눴고, 제국은 무한 분열했다.

제국은 사라지고, 작은 영토를 가진 공국들이 세를 다투고 있었다.

이웃나라들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친척이었다.

동생의 땅을 빼앗고, 조카의 나라를 노리는 게 당시 초원의 법칙이었다.

할아버지(술탄 아부사이드 미르자)는 사마르칸트의 통치자였고, 아버지는 그의 네째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당초 아버지에게 카불을 봉토로 떼어줬다.

카불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수도다.

미국이 밀고 들어가 쑥대밭이 된 나라다.

그때 카불은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동부(호라산), 중앙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초원 지대의 남쪽 지방에 해당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영을 받자 카불을 향해 출발했다.

할아버지는 카불 출신 바바를 아버지의 보호자로 달려 보냈다.

분가를 꿈꾸던 아버지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 발흐를 지나 데라 게즈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사마르칸트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동생들의 할례 행사에 참석하라는 이유였다.

이슬람에서 할례 행사는 의미가 크다.

성인이 된다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의 옛 궁전인 톱카프 궁전에 가보면 할례의 방이 있다.

왕자들의 할례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잘 보관되어 있다.

사마르칸트에서의 할례 행사가 끝났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남쪽의 카불 대신, 동쪽의 페르가나로 가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생각이 바뀐 건 위대한 아미르였던 티무르 할아버지에게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티무르 할아버지가 그의 아들인 오마르 셰이크 미르자에게 페르가나를 준 걸 떠올린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티무르 할아버지의 아들은 이름이 같다.

티무르가 되기를 꿈꿨던 할아버지는, 티무르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자신의 4남에게도 페르가나를 떼어줬다.

(티무르의 무덤이 있는 사마르칸트의 '구르 에미르')

큰 외삼촌(술탄 마흐무드 칸)은 몽골계로 당시 몽골의 한 부족을 이끄는 왕, 즉 가한(可汗)이었다.

몽골의 부족장은 칸이라고 불린다.

투르크와 아랍계의 왕은 술탄이라고 불린다.

중앙아시아는 몽골과 투르크족이 만나는 땅이니 이런 호칭이 두루 사용됐다.

큰 외삼촌의 이름 앞뒤로 술탄과 칸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 이런 정치사회적 배경 탓이다.

외삼촌과 나의 어머니 쿠틀룩 니가르 카눔은 할아버지 유니스 칸의 피를 이어받았다.

어머니 이름 뒤 ‘카눔‘은 ’칸‘의 여성형이다.

외삼촌인 술탄 마흐무드 칸은 유니스 칸의 큰 아들이었다.

그와 사마르칸트의 왕(술탄 아흐메드 미르자)은 아버지로 인해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

사마르칸트의 왕은 아버지의 형이다.

외삼촌과 큰 아버지는 공동 전선 구축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고, 사마르칸트의 왕인 큰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는 걸 고리로 반(反)페르가나 왕국 동맹은 출범했다.

외삼촌인 술탄 마흐무드 칸과 큰 아버지인 술탄 마흐무드 칸은 페르가나 계곡의 서쪽에서 동시에 쳐들어왔다.

페르가나 왕국에 들어오는 길은 이 방면 밖에 없다.

다른 3면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장애물이다.

난 당시 나라의 수도인 안디잔에 있었다.

안디잔 성의 궁성 내의 정원이 아름다운 차르박 궁에서 부왕이 급서했다는 걸 사고 다음날에 들었다.

나는 서둘러 말에 올랐고, 즉각 동원이 가능한 수하들을 데리고 안디잔 성 장악을 위해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공백기에 재빨리 권부를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미르자의 문에 막 도착했을 때 수하인 쉬림 타가이가 내 말의 고삐를 쥐며 성채로 그냥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사마르칸트의 강력한 지배자인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강한 왕이고 많은 병력을 이끌고 접근해오고있는 만큼 안디잔의 귀족들이 나라를 그에게 넘길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이 나라를 들어 바친다면 어떻게 하나.

쉬림 타가이는 일단 도시 한 복판의 이드가로 가자고 했다.

이드가는 이슬람 왕국의 도시에 있는 종교 건축으로, 메카를 향해 절하도록 하는 긴 벽을 갖고 있는 곳이다.

벽을 향해 일자로 늘어서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쪽으로 기도를 하는 게 무슬림의 전통이다.

나는 순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버지에 끌려가기 보다는 외삼촌인 일체 칸이나 마흐무드 칸 술탄에게 갈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안디잔에서 집안 대대로 이슬람 종교청 수장 자리를 맡고 있는 집안 출신인 콰자 물라나 카지와, 성에 있던 가신들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냈다.

콰지 무함마드였다.

콰지는 종교 재판관을 말한다.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콰디(qadi)라고도 한다.

무함마드는 아버지가 신뢰하던 늙은 가신이다.

무함마드를 보낸 건 내가 불필요한 우려를 하지 않도록 위해서였다.

무함마드는 아버지의 딸 중 한 명의 수양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이드가 앞에서 나를 맞은 뒤 왕성으로 안내했다.

콰자 물라나 콰지와 신하들은 내 앞에서 왕국을 지킬 대책을 협의했다.

그들은 의견을 교환한 뒤 계획을 세우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나가기로 했다.

핫산 야쿱, 카심 쿠친과 몇몇의 다른 신하들은 당시 마르그히난과 그쪽 지역에 경계를 나가 있었는데 하루 이틀 후에 안디잔으로 돌아와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 모두가 한 마음과 몸으로 안디잔을 지키기로 했다.

큰 아버지이자 사마르칸트의 왕인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도시들을 잇따라 점령한 뒤 카바로 진군했다.

그곳은 안디잔에서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아흐멧 미르자는 그곳에 진영을 차렸다.

적이 압박해오자 안디잔 내부에서 균열이 생겼다.

안디잔의 유명한 한 수피인 데르위스 가오가 선동적인 발언을 했다.

수피는 이슬람 신비주의파로 알려져있다.

가오를 즉각 선동 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후 주민들 사이의 불온한 기운은 외견상 가라앉았다.

나는 가신인 콰자 카지와, 우준 핫산, 콰자 후세인을 사절로 사마르칸트의 술탄에게 보내 사태를 해결할 메시지를 전달했다.

“해결책은 아주 쉽습니다. 이 나라를 책임질 당신의 종 한 명을 이 나라에 두십시요. 내가 당신의 종이자 아들이 되겠습니다. 이 임무를 내게 맡겨주시면 당신의 뜻은 매우 만족스럽고 쉬운 방법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사마르칸트의 왕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온화하고 유약한 사람으로 말이 별로 없고, 신하들이 없으면 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술탄의 장군들은 내 제안을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게 돌아온 건 무례한 답이었으며, 그들은 안디잔을 향해 진군을 계속했다.

이들에 제동을 가한 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알라는 적들이 큰 곤경에 처하게했고, 원정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적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이렇다.

검다는 카바는 강 지역에 늪이 많아 다리를 통해서만 건널 수 있다.

그들은 병력 수가 매우 많았고, 좁은 다리 위를 통과하려다 보니 다리 위에서 극심한 혼잡이 일어났고, 많은 말과 낙타가 강으로 떨어져 죽었다.

이 사건 3, 4년전에도 술탄의 군대는 치르 강을 건널 때 큰 패배를 당한 바 있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그때 사건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병사들은 카바 강을 건너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마르칸트 진영에서는 말들이 집단 발병하기도 했다.

갑자기 많은 말이 죽기 시작했다.

오늘날 같으면 구제역과 같은 병일 것이다.

그들이 퇴각한 세 번째 이유는 나의 병사들과 백성이 한 뜻이 되어 뭉쳐있고, 방어를 하겠다는 의지가 단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울 것이며, 침략자의 정부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이 굳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적군은 사기가 꺾였고, 큰 아버지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결국 안디잔에 약 5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뒤 무함마드 테르칸을 사자로 보내왔다.

무함마드 테르칸은 안디잔 성 내의 이드가에서 나의 가신인 핫산 야쿱을 만났다.

그들은 평화를 일궈냈고, 침략군은 철수했다.

반면 외삼촌인 마흐무드 칸 술탄은 호젠드 강 북쪽으로 페르가나 공국을 침략, 아크시를 포위했다.

이복 동생 자항기르 미르자가 그곳에 있었고 총리인 셰이크 압달라도 그와 함께 있었다.

웨이스 라가리와 미르 기아스 타가이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 사이에 일부 오해가 있어 그들은 카산으로 철수했다.

웨이 라가리는 나시르 미르자의 총독이었다.

마흐무드 칸 술탄이 아크시 주변에 도착하자 마자, 이들은 그에 굴복했고 카산을 들어바쳤다.

미르 기아스 타가이는 칸과 함께 계속 있었고, 그를 모셨다.

칸이 아크시에 접근, 몇 차례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아크시의 귀족들과 젊은 이들은 놀라운 용기를 갖고 싸웠다.

마흐무드 칸 술탄이 병에 걸렸고, 전쟁에 신물이 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12살에 왕이 된 나의 즉위 당시의 위기는 해소됐다.

[페르가나 공국의 소년왕, 카불의 술탄, 무굴제국의 황제 바부르]

2. 페르가나 계곡, 아시아의 스위스


페르가나 공국의 수도는 안디잔.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네 번째 도시다.

20세기 마지막 해에 조사한 인구 32만9000명, 그리 작지 많은 않다.

이 도시의 한 복판에는 내 동상이 서있다.

16세기 한때 이 도시를 지배했던 소년왕을 잊지 않고 동상을 세워준 후예들이 고마울 뿐이다.

말을 타고 있는 청동상 속 나는 안디잔 시절의 소년왕인 내 모습은 아니다.

북인도에 가서 힌두스탄 평원을 제압해 무굴 제국을 세우고 제국을 호령하는 성년의 모습이다.

역사의 변방 지대에 머물고 있는 페르가나 계곡의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에 섰던 옛 고향 사람을 통해 자신들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세웠다.

페르가나 계곡에 대해 오늘날 서양 사람들은 아일랜드 크기에 비교한다.

섬나라 영국 옆의 더 작은 섬나라인 아일랜드보다 조금 작다고 말한다.

아일랜드 크기가 8만4421평방킬로미터이니, 남한(10만평방킬로미터) 보다 페르가나 계곡은 작은 셈이다.

페르가나 계곡은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3개국으로 쪼개져 있다.

북쪽과 동쪽의 천산(天山)산맥과 그 끝자락의 알라이 산맥 지역은 키르기스스탄, 중부의 평야 지대는 우즈베키스탄, 남서쪽의 산악 지역은 타지키스탄 영토다.

‘스탄‘으로 이름이 끝나는 나라는 이슬람 국가라는 건 알 것이다.

이중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역이라서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린다.

한번 와보시라. 기가 막힌 설산과, 그 아래 푸른 녹음 지역이 어우러진 알라 아르하 국립공원에도 가보시길.

참고로, 네이버에서 ‘연실낭자’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20대 한국 열혈여성의 키르기즈스탄 여행기를 읽을 수 있다.

(안디잔에서 제일 큰 금요일 모스크)

내 고향 페르가나 공국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는 내가 남긴 회고록 ‘바부르나마’를 보면 알 것이다.

차가타이 언어로 쓴 이 책은 페르가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책을 안 읽어본 사람들을 위해 일부를 옮겨본다.

“페르가나는 작은 나라이나 곡물과 과일이 많이 난다.

페르가나 국은 7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이중 세이훈 강(시르 다리야 강) 남쪽에 다섯 개, 세이훈 강 북쪽에 두 개 주(州)가 있다.

강의 남쪽에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안디잔 주이다.

이곳은 페르가나 계곡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페르가나의 수도다.

곡식과 과일이 많이 나고, 과일 중에서는 포도, 멜론이 뛰어나며 풍족하다.

멜론 철에 멜론을 행인에게 파는 건 전통이 아니다.

공짜로 준다.

안디잔의 멜론보다 더 맛있는 건 없다.

마와라운 나흐르(Ma Wara'un Nahr-시르 다리아 강과, 아무 다리아 강 사이의 지역. 로마 시대에는 아무 다리아 강은 옥시아나 강이라고 불리었다. 이 때문에 아무 다리아 강 저편의 시르 다리아 강까지의 지역을 트랜스 옥시아나라고 불리었다: 저자 주)에서는 사마르칸트와 케쉬 성 다음으로 어떤 곳도 안디잔 성만큼 크기가 되지 않는다.

안디잔에는 세 개의 성문이 있다.

왕성은 도시 내부의 남쪽에 있다.

물이 도시에 들어오는 물길은 아홉 개다.

놀랍게도 도시로 흘러들어온 물들이 하나도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이곳에는 사냥용 새와 야생 동물이 풍부하다.

꿩은 살이 통통해서 네 사람이 죽으로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이며, 다 먹을 수 없다고들 말한다.

이 나라 주민은 모두 튀르크계이며, 도시나 시장에서 튀르크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지역 언어는 글로 쓰기에 좋으며, 그래서 알리 셰르 나보이는 작품을 이 언어로 썼다.

(15세기 중앙아시아의 작가. 이 지역의 언어인 차가타이어를 사용해 작품을 썼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국민 시인으로 존경받는다: 저자 주)

미르 알리 셰르는 헤라트(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도시)에서 성장하고 유명해졌다.

주민들은 잘 생겼다.

음악에서 유명한 콰자 유숩이 안디잔 출신이다.

공기는 건강에 좋지 않고, 가을에는 학질이 횡행한다.“

21세기 사람들이 500년전 나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는 건 위에서 얘기한대로 내가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적인 국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일기와 같은 형식의 회고록을 썼다.

나의 아들 후마윤(무굴 2대 황제), 손자 아크바르(무굴제국 3대 황제)도 회고록을 남겼다. 왕실의 많은 사람이 회고록을 남겼다.




(오쉬의 전통 시장)


페르가나 계곡에서 알아야할 도시 몇 개를 더 살펴보자.

안디잔 외에 오쉬, 마르기난(영어로는 Marghinan-오늘날 페르가나 주의 주도인 페르가나 시), 호젠트, 아스페라, 아크시, 카산이 있다.

우선, 오쉬(Osh 혹은 Ush).

이 도시는 안디잔의 남동쪽에 있다.

안디잔에서는 그 옛날 걸어서는 나흘 걸리는 거리였다.

오늘날 단위로는 47킬로미터.

중국의 카스에서 육로로 중앙아시아로 넘어오려면 첫 관문 도시인 오쉬를 지나야 한다.

카스에서 국제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이르케쉬탐 고개(Irkeshtam Pass)를 넘으면 된다.

이르케쉬탐 고개를 넘으면 그림같은 설산과 그 아래 푸른 초원의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오쉬는 오늘날은 키르기즈스탄 땅이다.

오쉬의 공기가 좋고, 물이 풍족하며, 특히 봄이 되면 상쾌하다.

이 도시는 비단길의 주요 경로이어서 바자르, 즉 시장이 최대 볼거리다.

중국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온 상인들이 들고 온 물건이 오쉬의 바자르에서 거래됐다.



오쉬는 또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성지이자, 성스러운 지역인 ‘술레이만 성산(聖山)Sulaiman-Too Sacred Mountain’으로 유명하다.

이 산은 오쉬의 평야 지대에 우뚝 서있는데 1500년 이상 이 지역의 성산으로 숭배되어 왔다.

이곳은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유산으로 지정됐다.

봉우리 네 개와 많은 동굴들이 있는 술래이만 성산의 이름은 코란에 나오는 예언자 솔로몬(이스라엘의 왕. 아랍식 표기로는 술래이만)이 잠을 잤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로 가는 길에 이곳을 거쳤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에 이어 이곳 술레이만 성산이 주요 순례지다.

술레이만 산은 비단길의 어느 방향에서 오는 대상들이었던 그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오래도록 해왔다.

산 정상에는 나의 큰 아버지이자 사마르칸트의 왕을 지낸 술탄 마흐무드 칸이 세운 작은 여름 궁전이 있었다.

나는 이보다 아래에 더 큰 궁전과, 돌 기둥이 일렬로 늘어선 건축물인 콜로네이드를 지었다.

그때가 아마 1510년이었을 게다.

내가 세운 작은 모스크가 아직도 남아있다.

쌍둥이 모스크라는 뜻의 주자 모스크(Jouza Mosque)인데, 요즘은 바부르 모스크로 알려지고 있다.

주자 모스크 밖에는 클로바 초원이 펼쳐져 있다.

여행객이나 과객은 누구나 이곳에 누워 낮잠을 자고 싶어한다.

오쉬의 교외를 흐르는 강은 안디잔으로 흘러 내려간다.

이 강이 중앙아시아의 2대 강 중의 하나인 시르 다리아이다.

강의 양안에는 정원들이 있고 특히 꽃이 아름답다.

꽃과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 훗날 ‘무굴 정원’의 원형을 나는 만드는데, 오쉬에서 본 여러 가지 꽃을 기억한다.

특히 제비꽃이 우아하고, 흐르는 물가에 많다.

봄에는 튤립과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다.

페르가나 계곡 어떤 곳도 건강과 주위의 아름다움에서 오쉬를 당할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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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는다] 만주족은 과연 한화(漢化)됐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1.01.03


『최후의 황제들-청 황실의 사회사』
이블린 S. 로스키 저, 구범진 역
까치, 510p, 25,000원

지금으로부터 일 백 년 전 이웃 중국에서는 청(淸)제국이 무너지고 이 천여년 이어진 황제지배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수립한 신해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중국의 굴곡진 공화정의 역사가 100년째에 접어 들었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병자로 불리던 중국은 이제 세계 패권을 이야기할 수준에 이르렀다. 지금은 역사적 전환기다. 바로 이 때 공화정 직전의 중국 최후의 왕조 청 제국을 내부자의 시각으로 해부한 이블린 S. 로스키의 역작 『최후의 황제들-청 황실의 사회사』와 함께 신묘년 한 해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구룬(부족, 국가)에는 원래 만주, 하다, 울라, 여허, 호이파 등의 이름이 있었다. 이전에 무식한 자들이 종종 [우리를] 주션이라고 불렀다. 주션이라는 말은 곧 시버와 차오머르건의 야만인을 가리키며, 우리 구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 구룬은 만주라는 이름을 정한다. 우리 구룬의 통치는 무궁할 것이며 많은 세대동안 전해질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우리 구룬을 원래 이름인 만주로 불러야 하며, 과거의 천박한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p.62)

1635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한 말이다. 그는 중원 대륙을 정복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하며 ‘만주’라는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다. 저자는 베이징 자금성에 있는 제1역사당안관에서 잠자고 있던 만주문 사료를 통해 ‘만주족 한화(漢化)론’을 조목조목 해체한다. 만주족 한화론이란 무엇인가? '신중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은 일찍이 중국의 통치자인 만주족이 외래 민족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구미의 침략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인들을 봉기에 동원해 만주족을 무너뜨리고 한족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중국 인민은 공통의 피, 공통의 언어, 공통의 종교, 공통의 관습을 가진 한(漢), 즉 중화민족-단일하고 순수한 종족이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을 침공했거나 중국으로 이주해온 여러 민족들은 수백년에 걸쳐 한인 인구 속에 융합됐다는 논리였다. 이것이 쑨원의 ‘한화론’이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팩트일까? 로스키는 ‘뿌(不, NO)’라고 말한다.

“모든 사회에서 치자(治者)의 시각은 피치자(被治者)의 시각과 크게 다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왕조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라 임금이었다. 따라서 한 왕조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려면 그 왕조의 주인이 누구였느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저자는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없었던 만주어로 작성된 황실 내부의 당안 자료를 통해 ‘내부자의 시각’으로 청 황실을 해부한다. 논거는 다양하다. 우선 다중수도체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성징(盛京, 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세 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일 년 중 자금성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다음은 언어. 홍타이지는 앞에서 인용한 말과 같이 부족 아이덴티티 위에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기 위해 만주문자를 창제한다. 건륭제는 이에 덧붙여 사신들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몽골어와 티베트어, 위구르어 까지 익힐 정도로 코스모폴리탄형 군주였다. 특히 청이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한자로 씌여진 문건을 남기지 않았다.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으로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와의 외교는 한인들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자 사료만 보아서는 청나라 치자의 속내를 읽을 수 없다.

또 다른 에피소드. 어느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한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했다.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었다. 낡은 한자 차용어를 대체할 새로운 만주어 단어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로써 한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다.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 이를 통해볼 때 한국이 서울의 표기로 한청(漢城)을 버리고 서우얼(首爾)을 택한 것은 나쁘지 않은 시도다. 한족의 중국을 이웃한 민족의 현명한 ‘생존 노하우’인 셈이다. 자주 해볼 일이다. 한글이 영향을 끼친 한자어를 국어학자 이기문박사가 연구해 모시(毛施)와 삼(蔘) 정도를 찾아냈지만 그 조차 근거는 불분명하다.

저자는 이 밖에도 청 황실의 의복, 음식, 혼인제도, 기우제 등을 통해 한인왕조와 달리 청만의 독특한 제국통치술을 세세하게 논증한다. 한족의 왕조였던 송(宋), 명(明) 등의 왕조에서 빈번했던 황실의 반란, 외척의 발호 등을 어떻게 예방했으며, 광대한 이민족의 땅을 어떻게 아울렀던가에 대한 해법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청 황제들에게 유교는 제국의 일부분을 이루는 한족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청 제국은 몽골과 위구르, 티베트 등을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와 방법론을 갖췄다. 천자이면서도 칸이며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던 황제는 만주족이었기에 전체 제국의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시점을 현재로 옮겨 과거 청 제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지금의 중국 공산당의 현실을 살펴보자. 그들은 효용이 다한 사회주의 대신 애국주의로 내부를 결속하고 ‘한족의 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을 설파한다. ‘공자학원’이란 간판을 걸어 전세계에 중국어를 ‘선교’중이다. 얼마나 세계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청황실보다 발전된 전략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본서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넓혀보면 한화(漢化)의 허상은 조공(朝貢)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조공제도의 본질은 ‘실용적인 위계질서’였을 뿐이다. 종속의 관계가 아니었다. 즉, 중원의 황제 입장에서 보면 서쪽, 북쪽의 유목민들은 마냥 무력을 동원해 토벌할 수 없었다. 과거 중원왕조와 유목민족의 관계는 재물과 평화의 교환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비겁을 평화라 부른 셈이다. 중국 왕조는 대신 조공이란 이름으로 이를 보기 좋게 포장했다. 몐즈(面子, 체면)만 건지는 식이다. ‘아큐식 정신의 승리’의 과거 버전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다시 로스키의 책으로 돌아가자. 이 책은 만주족의 시각으로 청나라의 역사를 다시 볼 것을 주장하는 ‘신청사(新淸史)의 선구적인 학술서다. 단, 일반인이 읽기 쉽지 않다. 역사의 숨겨진 ‘팩트’는 시각을 바꿀 때 드러나는 법이다. 최근 국내에도 ‘신청사’ 서적이 몇 권 번역되었다. 이시바시다카오 저, 홍성구 역의 『대청제국 1616~1799』(휴머니스트, 335, 15,000원), 마크 C. 엘리엇 저, 이훈, 김선민 역의 『만주족의청제국』(푸른역사, 764p, 35,000원)과 함께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왜 읽어야 할까? 청나라는 21세기 굴기하는 중국의 멘토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아마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 과거에 대한 지식이 현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다.” 솔즈베리의 명저 『새로운 황제들(모택동과 등소평시대의 중국)』 서두에서 인용한 중국 고대철학을 전공한 더크 보데(Derk Bodde)의 말이다. 1949년 베이징에 입성한 마오쩌둥의 손에는 자본론 대신 자치통감이 들려 있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중국의 좌표와 다를 가능성이 크다. ‘뿌(不, NO)라고 외치는 중국’ 중앙일보가 2011년 신년 기획으로 준비한 기획기사다. 왜 중국이 뿔났을까? 뿔난 중국은 어디로 갈까? 만주족의 청나라 역사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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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100년 …‘뿌’라고 외치는 중국

중앙일보 | 유상철 | 입력 2011.01.03 02:21



올해는 중국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을 통해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제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를 향해 거칠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은 G2로 부상한 중국을 표현하기 위해 미국의 건국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한 '워싱턴 모뉴먼트'를 배경으로 중국 오성홍기를 촬영한 것이다. [김태성 기자]

올해로 중국에서 청(淸)이 망하고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공화정(共和政)이 수립된 지 100년. '동아시아 병자(東亞病夫)'에서 주요 2개국(G2)으로의 부상이 눈부시다. 그러나 세계는 당혹스럽다. 중국의 굴기가 거칠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중국이 말하던 '평화적 부상(和平崛起)'의 구호는 폐기된 모습이다. 대신 중국은 세계를 상대로 '뿌(不·NO)'라고 외친다. 중국은 왜 거친가. 중국의 부상이 새로운 한·중·일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4회에 걸쳐 살펴본다.

 지난해 12월 9일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孫文·손문)의 고향 광뚱성 중산(中山)을 찾았다. 하루 5000여 명이 몰리는 쑨중산기념관에선 쑨원이 1924년 5월에 행한 육성 연설이 흘러나왔다. "제군들, 중국은 수천 년간 일등 강국이었다 …. 최근 100년간 우리는 잠자고 있었다. 중국인이여, 이제 깨어나라." 때마침 민안(民安)소학교 학생 700여 명이 참관을 나왔다. "쑨원 선생의 뜻을 받들어 중화 부흥을 위해 분투하자." 대표 학생이 선창하자 학생들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분투하자"를 따라 외친다. 애국심 궐기대회 같다. 2000여 년 지속된 왕조(王朝) 체제를 무너뜨린 주역을 기리는 현장에서 또 다른 중화제국이 탄생하고 있음을 보는 듯하다.

 굴기(崛起)를 외치는 중국의 목소리는 외부로 향할 때 무척이나 거칠다. "미국놈들아, (전쟁) 한 번 일으켜 봐. 누가 100년 뒤로 후퇴하는지 보자." 신세대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대본영(大本營)으로 불리는 인터넷 카페 '사월청년(四月靑年 )'. 지난해 12월 초 이곳은 '펀칭(憤靑·분노한 중국의 애국청년)'들이 올린 미국 성토의 글로 도배됐다.

 거친 중국의 모습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중국은 한국을 손봐 줄 지렛대가 많다' '한국은 취권(醉拳)하나'. 지난 열흘 사이 중국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사설을 통해 쏟아 낸 말들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조금이라도 중국과 부딪히면 곧바로 '중국의 적'으로 간주되는 형국이다. 말뿐 아니다. 행동도 적극적이다. 노별평화상 시상식 보이콧을 요구하고, 전투기를 일본 영공 가까이 출격시키기도 한다.

 중국은 왜 거친가. 왜 'NO'라고 말하나. 지난해 12월 30일 찾은 베이징 시내 중화세기단(中華世紀壇). 광장 바닥엔 유장한 중국 역사가 길이 262m, 폭 3m 특수합금판에 새겨져 있다. 한데 1839~1841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동판이 훼손돼 있다. 아편전쟁의 상처가 적힌 부분이 심하게 긁혀져 있다.

 중국 역사는 1840년 아편전쟁 이전과 이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영광의 역사와 치욕의 시대다. 특히 아편전쟁 때부터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까지 100년 역사는 국치(國恥)의 시기로 여겨진다. 이제 중국은 설욕을 강조하는 양상이다. 중국이 말하는 '국익'과 부딪히면 모두 중국의 부상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큰 목소리로 '뿌(不)'라고 외치며 맞서는 것이다.


◆신해혁명

=1911년(辛亥年)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일어난 중국의 공화혁명. 2000여 년 지속된 봉건왕조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共和)정이 시작됐다.

◆굴기(崛起)

=산 봉우리가 우뚝 솟아나는 모습. 중국 관영 CC-TV가 2006년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조명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방영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유상철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ysc08/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불칭패 → 도광양회 → 유소작위 → 화평굴기 → 돌돌핍인

[중앙일보] 입력 2011.01.03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을 잡자
수세서 공세로 … 중국 외교의 변신

“당신은 물주와 협상할 때 얼마나 세게 나갈 수 있느냐.” 세계 수퍼파워인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 물주는 ‘중국’을 가리킨다. G2로 부상한 중국을 대하는 미국의 어려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이 그럴진대 나머지 국가는 말해 무엇하랴. 중국 외교가 소극·수세적에서 적극·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중국 성립 이듬해인 1950년 중·소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됐다. 소련은 중국을 동유럽 위성국가 취급했다. 중국은 반발하지 못했다. 미국이 중국 대륙을 공습할까 떨던 50년대, 소련은 후견의 대가로 만주의 주요 항구와 철도 운영권을 요구했다. 중국은 ‘노(NO)’라고 하지 못했다. 54년 제네바 회의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총리가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에게 내밀었던 악수의 손은 거부됐다. 중국은 분했지만 참았다. 70년대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팔았지만 중국의 반발은 스치는 바람처럼 가벼울 뿐이었다.

 ‘심알동 광적량 불칭패(深挖洞 廣積糧 不稱覇).’ 굴을 깊게 파고, 식량을 비축하며, 패권자라 칭하지 말라. 이 같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교시는 당시 미국과 소련 두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국 외교의 생존전략이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80년대에도 중국 외교는 숨을 죽여야 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제창한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춰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면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가 외교정책의 기조가 됐다. 경제성장을 위해선 불필요한 대외 마찰은 줄여야겠다는 현실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덩은 “100년간 이 기조를 유지하라”는 특별한 당부를 내리기까지 했다.

 중국 외교가 의미 있는 ‘노’를 외치기 시작한 건 90년대 들어서였다. 91년 중국의 철낭자 우이(吳儀·오의)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이 칼라 힐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마주 앉았다. 중·미 지적재산권 협상을 위해서였다. 힐스가 “우리는 좀도둑과 협상하러 왔다”고 독설을 내뱉자 우이가 되받아쳤다. “우리는 강도와 협상하고 있다.” 미 박물관 내 중국 문화재를 지적하면서다.

 90년대 중국 외교가에선 ‘책임대국론(責任大國論)’이 제기됐다. 97년 장쩌민(江澤民·강택민) 국가주석은 “대국으로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덩의 오랜 도광양회 기조에서 벗어나 ‘필요한 역할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로의 변신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주석 시기엔 한동안 ‘평화로 운 굴기(和平崛起)’가 나오더니 이제는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 대한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반쪽이 됐다. 세계를 상대로 시상식 보이콧을 요구한 중국은 17개국 100여 개 국제단체를 불참시켜 세를 과시했다. 그보다 석 달 전의 센카쿠(尖閣) 열도 영유권 분쟁 때에는 희토류 수출 중단, 간첩혐의 일본인 억류 등 무차별 공세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거칠어진 중국 외교에 국제사회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외교정책이 고압적으로 변해 각국 외교관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존 헌츠먼 주중 미국대사의 본국 보고다. 나이지리아의 한 관리는 “중국이 원조를 앞세워 에너지 공급계약을 강요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 같은 진보 성향의 매체도 이젠 미국이 동맹국들을 규합해 중국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단호하다. “중국의 국익과 존엄이 침해받는 상황에 대해 항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우리를 오만·무례하다고 한다. 세계는 우리가 ‘노’라고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러위청(樂玉成) 중국 외교부 정책기획국장의 말이다. 중국 외교는 왜 ‘노’라고 할까. 배경은 복합적이다. 자원 확보가 한 원인이다. 정비젠(鄭必堅) 중앙당교 학술위원회 주임은 “자원의 안정적 공급 없이는 중국의 평화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서구 모델에 대한 불신이 커진 탓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대표적 현실주의 학자인 옌쉐퉁(閻學通) 칭화대 국제문제연구소장은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국력에 걸맞은 영향력 행사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 내에 국제사회의 미래를 구상하는 비전이 없다는 지적은 눈여겨볼 만하다. “중국 지도자와 토론해 보면 미래의 세계질서와 중국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친야칭(秦亞靑) 중국 외교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이 때문에 눈앞의 국익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외교가 날로 생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을 잡자 - 신해혁명 1 ① 중국은 왜 NO라고 말하나

입력 2011.01.03
‘거친 중국’의 굴기  지난해 12월 10일 찾은 광둥성 광저우의 황화강(黃花崗) 공원. 100년 전 신해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72열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쑨원(孫文·손문)이 이끄는 동맹회(同盟會)의 간부 황싱(黃興)이 ‘타도 청조(淸朝)’를 내세우며 광저우에서 봉기한 게 1911년 4월 27일. 황화강 사건이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혁명의 정신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그해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신해혁명을 촉발시켰다.

 그 변혁의 불길을 따라가기 위해 광저우~우한(武漢) 1068㎞를 잇는 우광(武廣) 철도에 몸을 실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정부의 슬로건인 ‘허셰(和諧·조화)’를 이름으로 붙인 고속열차는 불과 8분 만에 시속 300㎞를 돌파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창장(長江)과 한수이(漢水)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우한(武昌·漢口·漢陽이 통합돼 武漢이 됨). 그곳에서 들른 신해혁명 기념관은 민족주의의 교육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제 타도의 대상은 더 이상 청조가 아니라 외세로 비쳐졌다. 하오바이녠(好百年) 호텔 앞에 세워진 ‘열강은 점령한 조계지를 돌려 달라’고 울부짖는 중국인들의 석상이 전율감마저 안겼다. 열차에서 만났던 사업가 리광화(李光華)의 말이 떠올랐다. “미국은 히틀러 같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뽐내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외세에 대한 강한 반감이 묻어났다.


신해혁명의 불길을 댕긴 후베이성 우한의 하오바이녠(好百年) 호텔 앞에 놓인 석상. ‘열강이 점령한 조계를 돌려 달라’는 중국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우한=장세정 특파원]
 그런 반감이 중국의 신세대 사이에선 곧잘 자부심과 뒤섞여 나타난다. “중국이 엑스포를 통해 혜택을 봤다고? 아니다. 엑스포가 중국 덕을 톡톡히 봤다.” 중국의 ‘바링허우(八零後, 1980년대 이후 출생자)’ 작가 한한(韓寒·29)의 말이다. 작가 겸 레이서로도 활동하는 그는 고교 중퇴 후 18세 때 쓴 소설 『삼중문(三重門)』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등 바링허우 세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2009년엔 타임지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한한의 셈법에 따른 상하이 엑스포의 대차대조표는 ‘중국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보통신이 발달한 현대에선 엑스포가 갈수록 위축된다. 그러나 상하이 엑스포가 중국에 의해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지면서 엑스포의 격을 한층 높였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는 두 가지”라며 “하나는 글로벌 스탠더드, 다른 하나는 차이나 스탠더드”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중국의 인터넷 세계엔 그의 발언록을 수집해 퍼나르는 추종자들이 부지기수다. 그의 블로그 방문자 수는 2억 명대에 이른다. 역사적 굴욕을 겪지 않고 고도 성장의 열매를 맛보며 자란 신세대는 중국이 이제는 실력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NO라고 말하는 중국’이 나오는 배경이다.

 인터넷과 융합된 바링허우 세대의 민족주의는 중국이 경제·문화대국이라는 자부심에서 출발하는 ‘신애국주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성화 봉송이 세계 곳곳에서 부딪히면서 신애국주의는 유감없이 분출됐다. 한한은 “그전까지는 세계가 그렇게 중국을 반대하는지 몰랐다. 경악 그 자체였다. 자발적으로 애국심이 솟구쳤다. 국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애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저술가 쑹창(宋强)은 “신애국주의는 관방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개혁·개방의 수혜자인 바링허우가 주체로 나선다는 점에서 1990년대의 민족주의와 다르다”고 평한다. 그는 96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NO라고 말하는 중국 열기에 불을 지폈던 『중국은 NO라고 말할 수 있다(中國可以說不)』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이다.

 ‘뿔난 중국’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대표적 논객들은 주로 2009년 나온 도서 『앵그리 차이나(中國不高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왕샤오둥(王小東), 군 장교 출신의 쑹샤오쥔(宋曉軍), 학자인 황지쑤(黃紀蘇)와 류양(劉仰) 등. 왕샤오둥은 “중국이 서방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쓰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한다. 그는 또 미국의 ‘팔류 인간’도 중국에 오면 도련님 대접을 받는데 이는 미국이라는 일류 국가의 후광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NO’라고 말하는 중국의 꿈은 무얼까. “전 세계가 글로벌화를 추진하면서 금융위기를 맞았다. 이젠 중국이 리더로 참여하는 새로운 글로벌 전략이 필요하다”는 황지쑤의 말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천하세계론’을 부르짖는 자오팅양(趙汀陽)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의 주장도 눈길을 끈다. 그는 “국가와 만민이 동등하고 중심이나 중앙이 없는 초국적 세계가 천하”라며 “국가와 국제정치를 넘어선 천하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중국이 부상한 만큼 기존의 국제 정치·경제 영역에서 펼쳐지던 ‘게임의 룰’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NO’라는 중국의 외침은 새로운 ‘중국식 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으로 보인다.



중국 “애국심 팔아라” 중국의 언론과 출판계가 ‘애국심 팔기’에 혈안이다. ‘중화주의·애국주의·민족주의 저널리즘’이 꽃피고 있는 것이다. 그 맨 앞자리에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대표적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100% 출자해 1993년 창간했지만 경영은 독자적으로 이뤄진다. 광고와 판매로만 생존해야 하는 전형적인 상업지인 셈이다. “우리는 인민일보 방침도 고려하지만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독자에게 팔리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후시진(胡錫進) 환구시보 총편집의 말이다. 선정적 보도가 불가피한 것이다.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베이징 최대 서점인 시단(西單)의 ‘도서빌딩(圖書大廈)’에선 미국의 몰락을 예견하는 『미국 침몰』 『미국 쇠락』 『미국 비판』 등의 서적과 함께 중국의 부상을 선전하는 『중국의 힘(中國力)』 『중국의 꿈(中國夢)』 『중국 모델(中國模式)』 등의 도서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중국으로부터 ‘노(NO)’라는 비판을 받는 단골 국가는 일본·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과거 중국을 침략했던 열강이다. 지난해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노르웨이도 비판 목록에 추가된 양상이다. 또 중국의 부상에 수시로 딴죽을 거는 인도도 중국에선 곧잘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최근엔 미국과의 합동 군사훈련으로 중국을 불편하게 한 한국도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을 힘으로 누르자’는 환구시보 보도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중국 사회는 현재 ‘여론을 자극하는 언론의 선정적 보도→중국 당국의 소극적 여론 통제→대중적 분노의 폭발→중국 정부의 상대방에 대한 강경대응 선언→상대국으로부터의 사과와 배상 획득→중국 언론의 자제 촉구’ 패턴을 보이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국가주의적 분노가 통제 불능에 빠지거나 반정부 투쟁으로 변질되지 않는 한 배출구를 열어두고 외교적 카드로 활용한다.” 클라크 랜트 전 주중 미국대사의 말이다.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② 중국의 꿈은 군사 강국인가

[중앙일보] 입력 2011.01.04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마오쩌둥 ‘양탄일성’으로 덩샤오핑 경제가 가능했다
올해엔 항공모함 발진, 태평양 패권까지 넘본다

#1 이웃 으르는 ‘해상 패권주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구축한 군사력이 있었기에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경제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브라마 첼라니 인도 정책연구센터 교수의 말이다. 중국은 수천만 아사자가 발생한 1950년대의 대약진운동 시기와 60년대 문혁의 혼란 속에서도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 개발을 중단 없이 추진했다. 그 결과 핵을 갖춘 군사 강국이 됐다. 이는 중국이 ‘국익’과 부딪치는 일에 대해선 상대가 누구이건 과감하게 ‘뿌(不·NO)’라고 외칠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중국인민해방군 현역 대령인 류밍푸(劉明福·유명복) 중국국방대 교수. 작전통인 그는 중국에서 ‘스타 강사’로 유명하다. 지난해 초 펴낸 책 『중국의 꿈(中國夢)』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국은 경제력에서 시작해 문화대국, 과학기술대국, 그리고 군사대국으로 완성된다. 지금 필요한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이다.” 류밍푸의 외침이다.

 그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던 지난해 6월 22일. 남중국해의 인도네시아령인 나투나(Natuna)제도 해상에서 인도네시아 해양경비정과 중국 어선 16척이 대치했다. 인도네시아 해경이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침범한 중국 어선 한 척을 나포한 게 발단이었다. 잠시 후 중국어업감시선 두 척이 접근했다. 인도네시아 경비정보다 다섯 배나 컸고, 대구경 기관총도 탑재돼 있었다. 중국 감시선에서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인도네시아 EEZ는 인정할 수 없다. 중국 어선을 풀어주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총구를 맞댄 10시간의 대치 끝에 인도네시아는 중국 어선을 풀어줬다. “중국의 무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네시아 해경의 회상이다.

 날로 강해지는 중국의 군사력이 이젠 수세적 차원을 넘어 인접 국가로 점차 투사되고 있는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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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해군의 바다는 넓다” ………… 제1도련(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 제2도련(사이판~괌~인도네시아) 전략은

수천만 굶어죽어도 핵무장했던 중국

우크라이나 항모 개조, 진수 박차
중국이 아시아서 무력 과시할수록
인접국의 미군 의존도는 높아질 것

서해가 와약고로? 한국의 선택은

소규모 분쟁은 자체 해결 가능해야
도발 비용 높여 억지효과 거둬야
협력과 견제, 동시추진 전략 절실

대륙 국가인 중국이 ‘대양 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해양 전략을 상징하는 게 바로 ‘섬 사슬’을 뜻하는 ‘도련(島鏈)’ 해양 방위 경계선이다. ‘제1 도련’은 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로 연결되고, ‘제2 도련’은 미국령 사이판-괌-인도네시아로 이어진다. ‘도련 전략’이 만들어진 것은 1982년이다. 류화칭(劉華淸·유화청) 당시 해군사령관이 ‘2010년까지 제1 도련 안의 제해권(制海權)을 확립해 내해(內海)화하며, 2020년까지 제2 도련 내의 제해권 확보, 그리고 2040년까지는 미 해군의 태평양·인도양 지배를 저지한다”는 내용의 해군 해양계획 시나리오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해권 확보라는 중국의 야심 찬 ‘도련 전략’을 실현시킬 수단은 무얼까. 중국은 그 해답을 ‘항공모함’에서 찾고 있다. 량광례(梁光烈·양광렬) 국방부장은 2009년 3월 방중한 일본의 하마다 야스카즈 방위상을 만났을 때 “유엔 상임이사국 중 항공모함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는 중국뿐”이라며 “중국이 영원히 항공모함을 갖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선 99년 5월 코소보 사태 때 나토 전투기가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誤爆)해 3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한 중국인들이 ‘항모 건조를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경제력과 군사과학기술의 총집합체로 평가받는 항공모함은 언제 중국 바다에 뜰 것인가. 로이터 통신은 익명의 군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공산당 창당 90주년을 맞는 오는 7월 1일을 점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사들여 다롄(大連)에서 개조작업이 한창으로 규모는 6만5000t급이다. 현재 중국 언론에서는 중국 제1의 항공모함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마오쩌둥함, 베이징함 등.

 중국 항공모함이 뜨면 아시아 모든 해역에서 미·중 항공모함이 각축하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서해에서 중국의 마오쩌둥함과 미국의 조지 워싱턴함이 대치하는 국면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대함탄도미사일(ASBM)인 ‘둥펑(東風)-21D’로 미국 항모를 견제할 움직임이다. 반면 미국은 항모에 대한 공격은 핵으로 대응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다.

 서해가 한반도 정세에 따라서는 화약고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중국과의 전쟁을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소규모 분쟁이 발생했을 때 자체 해결하는 능력은 갖춰야 한다.” 김태호 한림대학원대학교 중국학과 교수의 말이다. 그는 또 “상대로 하여금 도발 비용을 증폭시켜 억지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석준 외교안보연구원 중국연구센터 교수(현역 대령)는 “더욱 정교한 첨단 함정을 통해 1인치 앞선 해군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또 공통적으로 중국에 대한 ‘협력’과 ‘견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전략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브라마 첼라니 교수는 중국군의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안보가 중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나리오는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중국이 무력을 과시할수록 인접 국가들은 미국 지원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힘 키우기에만 몰두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도련(島鏈)=‘섬들로 이어진 사슬’을 뜻한다. 1951년 미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창안한 공산권 봉쇄 해양 라인인 ‘Island chain’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중국은 서태평양을 제1 도련, 제2 도련으로 나눠 대양 해군 건설의 가이드 라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3 중국 “군사분쟁 대비”

한국엔 서해훈련 자제 요구하더니
작년 중국 공개훈련만 100여차례
군부 “실제 전투 상정” 공개 발언

중국군에 더 이상 ‘인해전술’은 없다. 천문학적 군사비를 투입해 첨단 장비를 갖춘 현대군으로 거듭나고 있다. 중국의 연간 국방비 지출액은 780억 달러(약 93조6000억원).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수치일 뿐 실제 국방비는 이보다 3배 가까이 될 것이라는 게 미 국방부의 추산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은 현재 개편 중이다. 7대 군구의 현 체제를 4대 전략연합사령부로 개편하고 있다. 러시아군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진다. 명령 계통도 군구→집단군→사단→여단의 4단계 지휘계통에서 연합전략사령부→전역사령부→여단 등 3단계로 간소화할 계획이다.

 공군과 미사일 작전 능력은 미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지난해 11월 17일 미 의회 자문기구인 ‘미·중 경제안보 검토위원회(UCESRC)’는 “중국 공군은 영토 방어를 넘어 역외 공격 작전까지로 교전 능력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미군 기지에 대한 인민해방군의 미사일 공격과 공습이 성공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오산과 군산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의 미군기지가 폐쇄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었다.

 실전에 대비한 군사 훈련의 강도와 횟수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중국 시사지 ‘랴오왕 동방주간(瞭望東方周刊)’에 따르면 2010년은 창군 이래 군사훈련이 가장 빈번하게 펼쳐진 한 해였다. 공개된 훈련만도 100여 차례가 넘는다. 지난해 7월 18일엔 작전명 ‘교전(交戰)-2010’이라는 해상 응급 작전이 서해에서 펼쳐졌다. 해방군 창군 이래 처음으로 진행된 전시 군사·교통 종합 훈련이었다. 일주일 후에는 난징(南京)군구의 포병부대가 서해 부근에서 대규모 실탄 발사 훈련을 펼치기도 했다. 이 훈련에서 중국산 신형 로켓포가 등장해 서방 군사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군사훈련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던 중국이 훈련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한다.

 국방비 증액→군구 개편→해·공군 강화→실전훈련 급증으로 이어지는 중국군의 변화는 무얼 의미할까.
량광례 국방부장이 일주일 전인 지난달 29일 행한 발언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5년 동안 군사 분쟁에 대한 대비를 진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질적인 전투를 상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군사부문도 이젠 도광양회(韜光養晦, 실력을 감추고 힘을 기름)에서 돌돌핍인(咄咄逼人, 상대를 호통치고 윽박지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③ 레드 위안이 그린 달러 밀어낸다

[중앙일보] 입력 2011.01.05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이젠 중국만이 자본주의 구할 수 있다” 자신감
“훙삐가 뤼삐 몰아낸다” 글로벌 머니 색깔 바꾸기 야심

#1 제조업에서 힘 키운 중국

‘1979년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只有資本主義才能救中國). 2009년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只有中國才能救資本主義)’. 중국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30여 년 전의 중국 개혁·개방이 서방의 자본주의 도움을 받았지만 현재 세계경제는 중국 덕에 먹고산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이제 맘에 들지 않는 서방의 경제 스탠더드에 대해선 ‘뿌(不·NO)’라고도 말한다.

 이 같은 ‘경제 패권’ 선언의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제조업이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 중국과 독일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제조업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미국 일각에선 아직도 ‘중국은 기껏해야 휴대전화 껍데기나 만드는 나라’란 비아냥이 나온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체질은 예전의 ‘하청 공장’ 수준을 넘는다. 그동안 추진한 자주창신(自主創新·독립기술 개발) 전략에 힘입어 하청 공장에 두뇌까지 갖춰지고 있는 것이다.

 사례는 많다. 흔히 중국에 대해 ‘셔츠 1억 장 만들어 보잉기 한 대를 사가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1달러에 수출하는 셔츠 1억 장을 죽어라 만들어봤자 한 대에 약 1억 달러 하는 보잉기 한 대를 사면 끝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주하이(珠海)에어쇼에 등장한 중국의 첫 민간항공기인 C919는 이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이 항공기가 독자 개발한 엔진을 사용했고, 항법장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산 기술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C919가 시험비행에 들어가는 2014년 중국은 보잉(미국)과 에어버스(유럽연합)가 양분하고 있는 세계 민간항공기 시장을 3각 구도로 재편할 것으로 자신한다. 여행객 수요가 8~9%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은 한 해 약 150대의 항공기를 구입해야 한다. 국내 수요만 충족해도 C919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게 중국 제조업의 힘이다. 중국 경제가 세계를 향해 ‘뿌’라고 외치는 근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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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의 금융굴기 시대로 … 미국의 달러 찍어내기에 넌더리 친다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 중국은 이제 제조업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세계 금융을 재편해야 한다고 달려든다. 2008년 가을 터진 뉴욕발 금융위기가 결정적 계기였다.

세계 최대의 미국채권 보유국인 중국은 미국 정부의 ‘달러 찍어내기’에 넌더리를 쳤다. 그래서 나온 게 위안(元)화 국제화다. 저우샤오촨(周小川·주소천) 인민은행장은 달러 기축통화에 정면으로 ‘노(NO)’라고 말했다. 위안화 무역 결제에서 시작된 위안화 국제화 작업은 착실히 진행 중이다. 지난해 6~11월 위안화 결제 규모는 3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전무했던 수치다. HSBC는 3~5년 안에 중국의 한 해 무역거래(현재 약 2조 달러) 중 절반 이상이 런민삐(人民幣)로 거래될 것으로 예상했다. 달러와 유로에 이은 제3대 결제통화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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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화 국제화의 척도는 외국 중앙은행이나 기업·금융기관이 얼마나 위안화를 선호하느냐에 달렸다. 말레이시아는 지난해 9월 위안화 표시 채권을 매입, 위안화를 외환 보유 구성 화폐의 하나로 선택했다. 미국 중장비업체인 캐터필라는 지난달 홍콩에서 10억 위안(약 1억5000만 달러)의 위안화 표시 채권(일명 딤섬본드)을 발행했다. 맥도날드에 이어 두 번째다. 이치훈 국제금융센터연구위원은 "딤섬본드가 향후 5년 안에 아시아 지역에서 양키본드 시장을 누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현상을 관통하고 있는 논리는 ‘훙삐(紅幣·Redback·위안화)’와 ‘뤼삐(綠幣·Greenback·달러)’의 대결이다. ‘훙삐’가 세계 금융위기 이후 흔들리고 있는 ‘뤼삐’를 공격하는 양상이다. ‘훙삐’의 위력은 중국의 제조업 위상과 맞물려 ‘뤼삐’에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일이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중동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중국은 부지런히 아프리카를 드나들며 자원 포식에 나섰다. 정부가 사냥감(자원)을 정하면 국유기업이 달려가 물어오는 식이다. 이제 ‘훙삐’의 공격은 미국의 코밑 중남미를 겨냥한다. 브라질·베네수엘라 등을 돌며 자원을 사들이고 있다. 중국은 지난 한 해 약 150억 달러를 이 지역에 투자했다. 미국 등 서방은 속수무책이다. “세계경제는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Slowly but surely) 그린 달러 시대에서 레드 위안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HSBC 이코노미스트 취훙빈의 말이다.

 중국은 심지어 ‘미국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서방 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대신 그들은 국가가 경제 행위의 주체로 참여하는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를 내세운다. 국가가 국유기업을 앞에 내세우고, 국유상업은행의 자금을 끌어들여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외환보유액에서 2000억 달러를 떼어 만든 국부펀드 중국투자공사(CIC)는 최근 미국 전력회사 AES의 지분 15.8%를 매입하는 등 해외 에너지·자원 사냥에 나서고 있다. CIC는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에서도 큰손이다. 모건스탠리 지분 9.9%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게 2001년이었다. 중국은 서방 세계가 만들어 놓은 시장경제 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기에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서방 시장경제 질서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얌전한 규범 수용자 역할을 거부하고 있다. 중국에 맞지 않는 규범에 대해선 과감하게 ‘NO’라고 외친다.

규칙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Rule-taker)에서 이제는 룰을 만드는 존재(Rule-maker)로 변한 것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시대 … 브라질의 경제성장률 8.9%는 중국이 만들었다

#3 글로벌 성장 기여율 40%


원자바오 중국 총리(2010년 10월)
“위안화 환율이 불안정해져 중국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세계경제엔 재난이 닥칠 것이다.” 원자바오(溫家寶·온가보) 총리가 지난해 10월 브뤼셀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미국의 위안(元)화 평가절상 압박에 대한 대응이었다. 듣기에 따라선 세계경제에 대한 협박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중국경제는 과연 세계경제를 ‘볼모’로 잡을 정도로 위협적 존재인가? 수치로 보자면 ‘그렇다’. 세계경제 성장에 대한 중국의 기여율은 2008년 23%, 2009년엔 40% 안팎에 이르렀다. 중국이 세계의 성장 엔진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경제학자 벤 심펜도퍼(Ben Simpfendorfer)는 “세계경제에 새로운 패턴의 성장 주기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차이나 사이클’(중국이 주도하는 성장 주기) 시대가 열렸다는 해석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시작은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시작됐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면서 일본·한국·대만 등 인접국들은 그 공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기지 역할을 했다. 고부가 부품 생산은 일본·한국 등이 맡고, 조립은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이 담당하는 분업 구조다.

이웃 국가의 중국경제 의존도는 높아졌다. 중국은 2003년 한국의 최대 수출 대상국이 된 데 이어 2005년에는 일본의 최대 수출국이 됐다. 중국이 기침을 하면 인접국들은 독감에 걸리는 구조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아프리카에 공을 들였다. 자원 확보가 목표였다. 자원외교는 중앙아시아·호주·중동 등으로 확장됐다. 이들 지역에 막대한 ‘차이나 머니’가 뿌려지면서 자원 부국은 경제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앞마당 중남미도 타깃이다. 중국은 2009년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의 최대 교역 대상국에 올랐다. 지난해 상반기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9%. 현지 언론들은 ‘중국이 만든 성장’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자원 부국 역시 ‘차이나 사이클’을 타게 된 것이다. 심지어 미국의 우방인 유럽연합(EU)도 중국 영향권에 편입되고 있다. 중국이 그리스·포르투갈 등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의 국채를 사주기로 한 것이다.
 다국적기업 역시 중국 시장에 목을 매야 하는 실정이다. 중국이 ‘세계의 백화점’으로 부상하면서 이 시장은 다국적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곳으로 등장했다. 중국 경제의 움직임에 많은 나라와 기업이 웃고 운다. 세계경제가 중국을 축(軸)으로 움직이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④ 다시 쑨원에게 길을 묻는다

[중앙일보] 입력 2011.01.06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서양 패도 따를 것인가, 동양 왕도 지킬 것인가”
87년 전 일본에 던진 쑨원의 경고 … 오늘날 중국에 다시 묻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연설

‘차(次)식민지’. 100여 년 전 중국의 상황을 쑨원(孫文·손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갈가리 찢긴 중국의 모습이 식민지만도 못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조공체제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의 좌파 이론가 마틴 자크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의 압도적 파워와 불평등한 관계 설정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은 불편하지만 대신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는 ‘21세기판 조공체제’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과연 그럴까. 새로운 한·중·일 시대의 바람직한 동아시아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해 12월 19일 찾은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신해혁명박물관. ‘쑨원과 우메야 쇼키치(梅屋壯吉)’라는 이름의 특별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쑨원과 우메야가 주고받은 편지, 도쿄에서 있었던 쑨원과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의 결혼식 사진 등 신해혁명 당시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전시됐다. 현장에서 눈물을 훔치던 82세의 한 중국 노인과 맞닥뜨렸다. 그는 “내 팔십 평생이 격동의 중국 역사와 일치하는데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느냐. 쑨원과 우메야 두 사람의 우의는 오늘날 중·일 양국 국민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우메야는 쑨원의 숨은 협력자였다. 영화사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27세 때 두 살 위의 쑨원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후 요즘 돈으로 환산해 2조 엔이라는 거액을 무기와 탄약 구입 등의 혁명자금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근 우메야의 증손 고사카 아야노(小坂文乃)가 책을 내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쑨원에겐 많은 일본 친구가 있었다. 그는 30여 년의 혁명활동 기간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에서 보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서 중국의 미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대(大)아시아주의’란 형태로 정리된다. 그는 서양을 무력과 이익에 바탕을 둔 패도(覇道)문명으로, 동양을 인의와 도덕에 기초한 왕도(王道)문명으로 구분하고,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의 피압박 민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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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 중국은 이제 미국과 어깨를 견줄 G2 국가로 부상했다. 하지만 중국의 굴기를 바라보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지난해 9월 센카쿠(尖閣)열도 분쟁 때 중국이 보여준 맨얼굴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의 재무장론이 들썩이며 서점에선 중국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책들이 인기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을 보는 한국의 시선에도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과연 중국의 이런 거친 모습이 쑨원의 유지에 부합하는 것일까. 혹자는 중국이 서구와 대등한 힘을 갖게 돼 쑨원의 뜻이 이뤄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모습을 바라는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주장한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국가주석의 외교 브레인으로 알려진 그는 “중국이 패권을 지향해서도 안 되지만,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한·중·일 시대는 어떻게 펼쳐져야 할까. “우리가 바라는 건 패권국가 중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함께 번영을 구가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하는 중국이다.” 이홍구 전 총리의 말이다. 그는 또 “중국의 장래에 대해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인들의 예지가 창조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중·일 협력체제, 나아가 동북아 집단안전보장체제와 경제공동체 창설 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대중연설이 된 1924년 11월 일본 고베에서의 강연회 장면.
 1924년 11월 쑨원은 일본 고베에서 일생의 마지막 대중 강연을 한다. ‘아시아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의 마지막 결론은 이랬다.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 쑨원의 기대와 달리 점점 더 제국주의를 향해 치닫는 일본을 향해 던진 마지막 충고였다. 그 이후 일본이 어떤 길을 갔는지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이젠 쑨원이 일본에 던졌던 일갈을 중국에 되물을 차례다. 쑨원은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


한·중·일 GDP 합치면 세계 18.6% … EU, NAFTA 맞먹는 경제권

신해혁명 당시 변방에 불과했던 동아시아가 100년 만에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한·중·일 3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세계의 18.6%에 이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 맞먹는 경제권이다. 외환보유액은 세계 절반에 가깝다. 돈과 물건이 이 지역으로 몰린다는 이야기다. 세 나라가 힘만 모으면 세계 중심이 되는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한·중·일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선 다양한 한·중·일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현재 한·중·일 간에는 100개 이상의 협력 사업이 정상회담 합의를 거쳐 가동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세 나라 대학에서 서로 학점을 인정해 주는 동북아판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구상이나, 서울(김포공항)-도쿄(하네다공항)-상하이(훙차오공항)를 셔틀편으로 엮는 항공협력 등은 실질적인 효과가 크다. 3국 정부 간 채널만 50여 개에 달한다. 2008년부터는 3국 정상 간의 협의 채널이 정례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협력은 여전히 취약하기만 하다. 세 나라가 그리는 지역의 장래상에 대한 그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법 도출이 어려운 영토 분쟁이 한·일 간, 중·일 간 뇌관으로 존재한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 해결방식을 둘러싼 인식의 괴리도 크다. 이 지역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해서도 큰 차이가 있다. 더 큰 문제는 허심탄회한 논의를 힘들게 하는 신뢰 부족의 문제다.

 3국 간 불안 요소가 불거질 때마다 한반도는 요동친다. 반대로 이런 취약한 환경은 한국에 기회이기도 하다. 지역의 미래상을 그리고, 이를 실현시킬 전략과 로드맵을 짜고, 중·일을 조정하는 역할은 한국의 몫이기 때문이다. 3국 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을 오는 3월 인천 송도에 설치키로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많은 이익 … 패권은 득보다 실이란 걸 안다”

[왕이저우 베이징대 부원장 인터뷰]


“쑨원이 일본의 패권 추구를 경계한 발언은 지금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사진)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그는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역설한다. 지난해 12월 17일 베이징대 연구실에서 왕 교수를 만났다.

 -중국의 부상이 새로운 패권 국가의 출현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도 그렇다. 패권을 추구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것을 중국은 안다. 개혁·개방이 그랬듯이 중국의 이익은 다른 나라와의 협력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싫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웃 나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은 점점 배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정치 자유화와 언론의 자유도 발전하는 과정에 있고, 그 방향은 세계 여러 나라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외국 친구들도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할 때 미국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민 중에는 중국이 미국을 아시아에서 배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그런 의도는 없다. 장기적으로 미국은 이 지역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고, 군사적 관계도 유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중·북한 관계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는 걸 안다. 중국과 북한은 옛날부터 혈맹관계였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혈맹관계에서 정상관계로 조정 중에 있다.”

 -세계 질서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나.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어 태평양을 건너 중국·인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지금은 약간 다르다. 글로벌화 시대는 여러 나라가 다같이 발전하는 것이므로 중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원래의 중심이 낙후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쑨원은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주창했는데.

 “그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패도는 불평등한 아시아,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관계다. 왕도는 평등과 협력의 관계다. 쑨원의 가르침은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말했는데 대(大)자는 뭔가 거만한 어감을 주므로 나는 신(新)아시아주의로 고쳐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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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1283년만에 고국땅에…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展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비롯해 중국 신장(新疆)·간쑤(甘肅)·닝샤(寧夏) 등 3개 성(省) 10여 개 박물관의 실크로드 관련 유물 220여점을 선보이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가운데 ‘왕오천축국전’은 727년 혜초에 의해 기록된 이후 128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데다 세계 최초로 일반에 공개 전시되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오는 2011년 4월3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을 개최 중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문명 교류의 젖줄인 실크로드를 테마로 한 이번 전시의 부제는 ‘혜초와 함께 하는 서역 기행’. 크게 4부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8세기 혜초가 여행했던 길을 따라 파미르 고원 동쪽의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다.

1부 ‘실크로드의 도시들’에서는 서역북로의 카슈가르·쿠차·투루판, 서역남로의 호탄·누란, 천산북로의 우루무치 등의 오아시스가 소개되고 있다.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7마리가 구름 위에서 노는 듯한 모습을 표현한 카라샤르에서 출토된 황금대구(허리띠 잠금장치)가 이 코너의 대표 유물이다. 용의 몸 여러 곳에 터키석을 상감했으며 용의 형체는 모발처럼 매우 가는 황금실을 용접해 만들고 그 사이에 작은 금 구슬을 가득 채워 장식했다. 한국 평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2부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서역남로에 있는 호탄, 니야, 누란 등의 오아시스 도시 및 서역북로, 천산북로 등 실크로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초점을 맞췄다.

3부 ‘둔황과 왕오천축국전’에서는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던 둔황의 석굴과 벽화 및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혜초의 여행을 보여준다. 서역이 시작되는 관문으로서 번영을 누린 둔황 막고굴의 유물 16점과 복제품 20점(벽화 17점 포함)이 전시돼 있다. 둔황 막고굴의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세계를 현장에서와 같이 느낄 수 있는 둔황 석굴 모형 2점(17호굴, 275호굴)과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문화·경제·풍습 등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인 ‘왕오천축국전’ 등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4부 ‘길은 동쪽으로 이어진다’에서는 둔황에서 시안에 이르는 간쑤와 닝샤 지역 및 경주의 유물이 출품됐다. 중국적인 전통의 청동의장행렬과 흉노 등 유목민 사이에 유행했던 매머리 장식, 닝샤에서 발견된 동로마 금화 등이 전시돼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일보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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