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100년 …‘뿌’라고 외치는 중국
중앙일보 | 유상철 | 입력 2011.01.03 02:21
올해는 중국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을 통해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제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를 향해 거칠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은 G2로 부상한 중국을 표현하기 위해 미국의 건국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한 '워싱턴 모뉴먼트'를 배경으로 중국 오성홍기를 촬영한 것이다. [김태성 기자]
지난해 12월 9일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孫文·손문)의 고향 광뚱성 중산(中山)을 찾았다. 하루 5000여 명이 몰리는 쑨중산기념관에선 쑨원이 1924년 5월에 행한 육성 연설이 흘러나왔다. "제군들, 중국은 수천 년간 일등 강국이었다 …. 최근 100년간 우리는 잠자고 있었다. 중국인이여, 이제 깨어나라." 때마침 민안(民安)소학교 학생 700여 명이 참관을 나왔다. "쑨원 선생의 뜻을 받들어 중화 부흥을 위해 분투하자." 대표 학생이 선창하자 학생들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분투하자"를 따라 외친다. 애국심 궐기대회 같다. 2000여 년 지속된 왕조(王朝) 체제를 무너뜨린 주역을 기리는 현장에서 또 다른 중화제국이 탄생하고 있음을 보는 듯하다.
굴기(崛起)를 외치는 중국의 목소리는 외부로 향할 때 무척이나 거칠다. "미국놈들아, (전쟁) 한 번 일으켜 봐. 누가 100년 뒤로 후퇴하는지 보자." 신세대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대본영(大本營)으로 불리는 인터넷 카페 '사월청년(四月靑年 )'. 지난해 12월 초 이곳은 '펀칭(憤靑·분노한 중국의 애국청년)'들이 올린 미국 성토의 글로 도배됐다.
거친 중국의 모습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중국은 한국을 손봐 줄 지렛대가 많다' '한국은 취권(醉拳)하나'. 지난 열흘 사이 중국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사설을 통해 쏟아 낸 말들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조금이라도 중국과 부딪히면 곧바로 '중국의 적'으로 간주되는 형국이다. 말뿐 아니다. 행동도 적극적이다. 노별평화상 시상식 보이콧을 요구하고, 전투기를 일본 영공 가까이 출격시키기도 한다.
중국은 왜 거친가. 왜 'NO'라고 말하나. 지난해 12월 30일 찾은 베이징 시내 중화세기단(中華世紀壇). 광장 바닥엔 유장한 중국 역사가 길이 262m, 폭 3m 특수합금판에 새겨져 있다. 한데 1839~1841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동판이 훼손돼 있다. 아편전쟁의 상처가 적힌 부분이 심하게 긁혀져 있다.
중국 역사는 1840년 아편전쟁 이전과 이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영광의 역사와 치욕의 시대다. 특히 아편전쟁 때부터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까지 100년 역사는 국치(國恥)의 시기로 여겨진다. 이제 중국은 설욕을 강조하는 양상이다. 중국이 말하는 '국익'과 부딪히면 모두 중국의 부상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큰 목소리로 '뿌(不)'라고 외치며 맞서는 것이다.
◆신해혁명
=1911년(辛亥年)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일어난 중국의 공화혁명. 2000여 년 지속된 봉건왕조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共和)정이 시작됐다.
◆굴기(崛起)
=산 봉우리가 우뚝 솟아나는 모습. 중국 관영 CC-TV가 2006년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조명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방영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유상철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ysc08/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불칭패 → 도광양회 → 유소작위 → 화평굴기 → 돌돌핍인
[중앙일보] 입력 2011.01.03[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을 잡자
수세서 공세로 … 중국 외교의 변신
“당신은 물주와 협상할 때 얼마나 세게 나갈 수 있느냐.” 세계 수퍼파워인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 물주는 ‘중국’을 가리킨다. G2로 부상한 중국을 대하는 미국의 어려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이 그럴진대 나머지 국가는 말해 무엇하랴. 중국 외교가 소극·수세적에서 적극·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중국 성립 이듬해인 1950년 중·소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됐다. 소련은 중국을 동유럽 위성국가 취급했다. 중국은 반발하지 못했다. 미국이 중국 대륙을 공습할까 떨던 50년대, 소련은 후견의 대가로 만주의 주요 항구와 철도 운영권을 요구했다. 중국은 ‘노(NO)’라고 하지 못했다. 54년 제네바 회의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총리가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에게 내밀었던 악수의 손은 거부됐다. 중국은 분했지만 참았다. 70년대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팔았지만 중국의 반발은 스치는 바람처럼 가벼울 뿐이었다.
‘심알동 광적량 불칭패(深挖洞 廣積糧 不稱覇).’ 굴을 깊게 파고, 식량을 비축하며, 패권자라 칭하지 말라. 이 같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교시는 당시 미국과 소련 두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국 외교의 생존전략이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80년대에도 중국 외교는 숨을 죽여야 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제창한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춰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면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가 외교정책의 기조가 됐다. 경제성장을 위해선 불필요한 대외 마찰은 줄여야겠다는 현실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덩은 “100년간 이 기조를 유지하라”는 특별한 당부를 내리기까지 했다.
중국 외교가 의미 있는 ‘노’를 외치기 시작한 건 90년대 들어서였다. 91년 중국의 철낭자 우이(吳儀·오의)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이 칼라 힐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마주 앉았다. 중·미 지적재산권 협상을 위해서였다. 힐스가 “우리는 좀도둑과 협상하러 왔다”고 독설을 내뱉자 우이가 되받아쳤다. “우리는 강도와 협상하고 있다.” 미 박물관 내 중국 문화재를 지적하면서다.
90년대 중국 외교가에선 ‘책임대국론(責任大國論)’이 제기됐다. 97년 장쩌민(江澤民·강택민) 국가주석은 “대국으로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덩의 오랜 도광양회 기조에서 벗어나 ‘필요한 역할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로의 변신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주석 시기엔 한동안 ‘평화로 운 굴기(和平崛起)’가 나오더니 이제는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 대한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반쪽이 됐다. 세계를 상대로 시상식 보이콧을 요구한 중국은 17개국 100여 개 국제단체를 불참시켜 세를 과시했다. 그보다 석 달 전의 센카쿠(尖閣) 열도 영유권 분쟁 때에는 희토류 수출 중단, 간첩혐의 일본인 억류 등 무차별 공세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거칠어진 중국 외교에 국제사회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외교정책이 고압적으로 변해 각국 외교관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존 헌츠먼 주중 미국대사의 본국 보고다. 나이지리아의 한 관리는 “중국이 원조를 앞세워 에너지 공급계약을 강요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 같은 진보 성향의 매체도 이젠 미국이 동맹국들을 규합해 중국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단호하다. “중국의 국익과 존엄이 침해받는 상황에 대해 항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우리를 오만·무례하다고 한다. 세계는 우리가 ‘노’라고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러위청(樂玉成) 중국 외교부 정책기획국장의 말이다. 중국 외교는 왜 ‘노’라고 할까. 배경은 복합적이다. 자원 확보가 한 원인이다. 정비젠(鄭必堅) 중앙당교 학술위원회 주임은 “자원의 안정적 공급 없이는 중국의 평화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서구 모델에 대한 불신이 커진 탓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대표적 현실주의 학자인 옌쉐퉁(閻學通) 칭화대 국제문제연구소장은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국력에 걸맞은 영향력 행사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 내에 국제사회의 미래를 구상하는 비전이 없다는 지적은 눈여겨볼 만하다. “중국 지도자와 토론해 보면 미래의 세계질서와 중국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친야칭(秦亞靑) 중국 외교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이 때문에 눈앞의 국익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외교가 날로 생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그럴진대 나머지 국가는 말해 무엇하랴. 중국 외교가 소극·수세적에서 적극·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신중국 성립 이듬해인 1950년 중·소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됐다. 소련은 중국을 동유럽 위성국가 취급했다. 중국은 반발하지 못했다. 미국이 중국 대륙을 공습할까 떨던 50년대, 소련은 후견의 대가로 만주의 주요 항구와 철도 운영권을 요구했다. 중국은 ‘노(NO)’라고 하지 못했다. 54년 제네바 회의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총리가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에게 내밀었던 악수의 손은 거부됐다. 중국은 분했지만 참았다. 70년대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팔았지만 중국의 반발은 스치는 바람처럼 가벼울 뿐이었다.
‘심알동 광적량 불칭패(深挖洞 廣積糧 不稱覇).’ 굴을 깊게 파고, 식량을 비축하며, 패권자라 칭하지 말라. 이 같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교시는 당시 미국과 소련 두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국 외교의 생존전략이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80년대에도 중국 외교는 숨을 죽여야 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제창한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춰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면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가 외교정책의 기조가 됐다. 경제성장을 위해선 불필요한 대외 마찰은 줄여야겠다는 현실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덩은 “100년간 이 기조를 유지하라”는 특별한 당부를 내리기까지 했다.
중국 외교가 의미 있는 ‘노’를 외치기 시작한 건 90년대 들어서였다. 91년 중국의 철낭자 우이(吳儀·오의)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이 칼라 힐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마주 앉았다. 중·미 지적재산권 협상을 위해서였다. 힐스가 “우리는 좀도둑과 협상하러 왔다”고 독설을 내뱉자 우이가 되받아쳤다. “우리는 강도와 협상하고 있다.” 미 박물관 내 중국 문화재를 지적하면서다.
90년대 중국 외교가에선 ‘책임대국론(責任大國論)’이 제기됐다. 97년 장쩌민(江澤民·강택민) 국가주석은 “대국으로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덩의 오랜 도광양회 기조에서 벗어나 ‘필요한 역할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로의 변신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주석 시기엔 한동안 ‘평화로 운 굴기(和平崛起)’가 나오더니 이제는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 대한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반쪽이 됐다. 세계를 상대로 시상식 보이콧을 요구한 중국은 17개국 100여 개 국제단체를 불참시켜 세를 과시했다. 그보다 석 달 전의 센카쿠(尖閣) 열도 영유권 분쟁 때에는 희토류 수출 중단, 간첩혐의 일본인 억류 등 무차별 공세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거칠어진 중국 외교에 국제사회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외교정책이 고압적으로 변해 각국 외교관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존 헌츠먼 주중 미국대사의 본국 보고다. 나이지리아의 한 관리는 “중국이 원조를 앞세워 에너지 공급계약을 강요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 같은 진보 성향의 매체도 이젠 미국이 동맹국들을 규합해 중국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단호하다. “중국의 국익과 존엄이 침해받는 상황에 대해 항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우리를 오만·무례하다고 한다. 세계는 우리가 ‘노’라고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러위청(樂玉成) 중국 외교부 정책기획국장의 말이다. 중국 외교는 왜 ‘노’라고 할까. 배경은 복합적이다. 자원 확보가 한 원인이다. 정비젠(鄭必堅) 중앙당교 학술위원회 주임은 “자원의 안정적 공급 없이는 중국의 평화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서구 모델에 대한 불신이 커진 탓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대표적 현실주의 학자인 옌쉐퉁(閻學通) 칭화대 국제문제연구소장은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국력에 걸맞은 영향력 행사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 내에 국제사회의 미래를 구상하는 비전이 없다는 지적은 눈여겨볼 만하다. “중국 지도자와 토론해 보면 미래의 세계질서와 중국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친야칭(秦亞靑) 중국 외교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이 때문에 눈앞의 국익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외교가 날로 생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을 잡자 - 신해혁명 1 ① 중국은 왜 NO라고 말하나
입력 2011.01.03
‘거친 중국’의 굴기 지난해 12월 10일 찾은 광둥성 광저우의 황화강(黃花崗) 공원. 100년 전 신해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72열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쑨원(孫文·손문)이 이끄는 동맹회(同盟會)의 간부 황싱(黃興)이 ‘타도 청조(淸朝)’를 내세우며 광저우에서 봉기한 게 1911년 4월 27일. 황화강 사건이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혁명의 정신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그해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신해혁명을 촉발시켰다.
그 변혁의 불길을 따라가기 위해 광저우~우한(武漢) 1068㎞를 잇는 우광(武廣) 철도에 몸을 실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정부의 슬로건인 ‘허셰(和諧·조화)’를 이름으로 붙인 고속열차는 불과 8분 만에 시속 300㎞를 돌파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창장(長江)과 한수이(漢水)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우한(武昌·漢口·漢陽이 통합돼 武漢이 됨). 그곳에서 들른 신해혁명 기념관은 민족주의의 교육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제 타도의 대상은 더 이상 청조가 아니라 외세로 비쳐졌다. 하오바이녠(好百年) 호텔 앞에 세워진 ‘열강은 점령한 조계지를 돌려 달라’고 울부짖는 중국인들의 석상이 전율감마저 안겼다. 열차에서 만났던 사업가 리광화(李光華)의 말이 떠올랐다. “미국은 히틀러 같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뽐내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외세에 대한 강한 반감이 묻어났다.
인터넷과 융합된 바링허우 세대의 민족주의는 중국이 경제·문화대국이라는 자부심에서 출발하는 ‘신애국주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성화 봉송이 세계 곳곳에서 부딪히면서 신애국주의는 유감없이 분출됐다. 한한은 “그전까지는 세계가 그렇게 중국을 반대하는지 몰랐다. 경악 그 자체였다. 자발적으로 애국심이 솟구쳤다. 국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애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저술가 쑹창(宋强)은 “신애국주의는 관방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개혁·개방의 수혜자인 바링허우가 주체로 나선다는 점에서 1990년대의 민족주의와 다르다”고 평한다. 그는 96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NO라고 말하는 중국 열기에 불을 지폈던 『중국은 NO라고 말할 수 있다(中國可以說不)』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이다.
‘뿔난 중국’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대표적 논객들은 주로 2009년 나온 도서 『앵그리 차이나(中國不高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왕샤오둥(王小東), 군 장교 출신의 쑹샤오쥔(宋曉軍), 학자인 황지쑤(黃紀蘇)와 류양(劉仰) 등. 왕샤오둥은 “중국이 서방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쓰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한다. 그는 또 미국의 ‘팔류 인간’도 중국에 오면 도련님 대접을 받는데 이는 미국이라는 일류 국가의 후광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NO’라고 말하는 중국의 꿈은 무얼까. “전 세계가 글로벌화를 추진하면서 금융위기를 맞았다. 이젠 중국이 리더로 참여하는 새로운 글로벌 전략이 필요하다”는 황지쑤의 말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천하세계론’을 부르짖는 자오팅양(趙汀陽)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의 주장도 눈길을 끈다. 그는 “국가와 만민이 동등하고 중심이나 중앙이 없는 초국적 세계가 천하”라며 “국가와 국제정치를 넘어선 천하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중국이 부상한 만큼 기존의 국제 정치·경제 영역에서 펼쳐지던 ‘게임의 룰’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NO’라는 중국의 외침은 새로운 ‘중국식 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으로 보인다.
중국 “애국심 팔아라” 중국의 언론과 출판계가 ‘애국심 팔기’에 혈안이다. ‘중화주의·애국주의·민족주의 저널리즘’이 꽃피고 있는 것이다. 그 맨 앞자리에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대표적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100% 출자해 1993년 창간했지만 경영은 독자적으로 이뤄진다. 광고와 판매로만 생존해야 하는 전형적인 상업지인 셈이다. “우리는 인민일보 방침도 고려하지만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독자에게 팔리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후시진(胡錫進) 환구시보 총편집의 말이다. 선정적 보도가 불가피한 것이다.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베이징 최대 서점인 시단(西單)의 ‘도서빌딩(圖書大廈)’에선 미국의 몰락을 예견하는 『미국 침몰』 『미국 쇠락』 『미국 비판』 등의 서적과 함께 중국의 부상을 선전하는 『중국의 힘(中國力)』 『중국의 꿈(中國夢)』 『중국 모델(中國模式)』 등의 도서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중국으로부터 ‘노(NO)’라는 비판을 받는 단골 국가는 일본·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과거 중국을 침략했던 열강이다. 지난해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노르웨이도 비판 목록에 추가된 양상이다. 또 중국의 부상에 수시로 딴죽을 거는 인도도 중국에선 곧잘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최근엔 미국과의 합동 군사훈련으로 중국을 불편하게 한 한국도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을 힘으로 누르자’는 환구시보 보도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그 변혁의 불길을 따라가기 위해 광저우~우한(武漢) 1068㎞를 잇는 우광(武廣) 철도에 몸을 실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정부의 슬로건인 ‘허셰(和諧·조화)’를 이름으로 붙인 고속열차는 불과 8분 만에 시속 300㎞를 돌파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창장(長江)과 한수이(漢水)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우한(武昌·漢口·漢陽이 통합돼 武漢이 됨). 그곳에서 들른 신해혁명 기념관은 민족주의의 교육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제 타도의 대상은 더 이상 청조가 아니라 외세로 비쳐졌다. 하오바이녠(好百年) 호텔 앞에 세워진 ‘열강은 점령한 조계지를 돌려 달라’고 울부짖는 중국인들의 석상이 전율감마저 안겼다. 열차에서 만났던 사업가 리광화(李光華)의 말이 떠올랐다. “미국은 히틀러 같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뽐내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외세에 대한 강한 반감이 묻어났다.
신해혁명의 불길을 댕긴 후베이성 우한의 하오바이녠(好百年) 호텔 앞에 놓인 석상. ‘열강이 점령한 조계를 돌려 달라’는 중국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우한=장세정 특파원]
그런 반감이 중국의 신세대 사이에선 곧잘 자부심과 뒤섞여 나타난다. “중국이 엑스포를 통해 혜택을 봤다고? 아니다. 엑스포가 중국 덕을 톡톡히 봤다.” 중국의 ‘바링허우(八零後, 1980년대 이후 출생자)’ 작가 한한(韓寒·29)의 말이다. 작가 겸 레이서로도 활동하는 그는 고교 중퇴 후 18세 때 쓴 소설 『삼중문(三重門)』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등 바링허우 세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2009년엔 타임지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한한의 셈법에 따른 상하이 엑스포의 대차대조표는 ‘중국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보통신이 발달한 현대에선 엑스포가 갈수록 위축된다. 그러나 상하이 엑스포가 중국에 의해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지면서 엑스포의 격을 한층 높였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는 두 가지”라며 “하나는 글로벌 스탠더드, 다른 하나는 차이나 스탠더드”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중국의 인터넷 세계엔 그의 발언록을 수집해 퍼나르는 추종자들이 부지기수다. 그의 블로그 방문자 수는 2억 명대에 이른다. 역사적 굴욕을 겪지 않고 고도 성장의 열매를 맛보며 자란 신세대는 중국이 이제는 실력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NO라고 말하는 중국’이 나오는 배경이다.인터넷과 융합된 바링허우 세대의 민족주의는 중국이 경제·문화대국이라는 자부심에서 출발하는 ‘신애국주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성화 봉송이 세계 곳곳에서 부딪히면서 신애국주의는 유감없이 분출됐다. 한한은 “그전까지는 세계가 그렇게 중국을 반대하는지 몰랐다. 경악 그 자체였다. 자발적으로 애국심이 솟구쳤다. 국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애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저술가 쑹창(宋强)은 “신애국주의는 관방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개혁·개방의 수혜자인 바링허우가 주체로 나선다는 점에서 1990년대의 민족주의와 다르다”고 평한다. 그는 96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NO라고 말하는 중국 열기에 불을 지폈던 『중국은 NO라고 말할 수 있다(中國可以說不)』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이다.
‘뿔난 중국’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대표적 논객들은 주로 2009년 나온 도서 『앵그리 차이나(中國不高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왕샤오둥(王小東), 군 장교 출신의 쑹샤오쥔(宋曉軍), 학자인 황지쑤(黃紀蘇)와 류양(劉仰) 등. 왕샤오둥은 “중국이 서방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쓰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한다. 그는 또 미국의 ‘팔류 인간’도 중국에 오면 도련님 대접을 받는데 이는 미국이라는 일류 국가의 후광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NO’라고 말하는 중국의 꿈은 무얼까. “전 세계가 글로벌화를 추진하면서 금융위기를 맞았다. 이젠 중국이 리더로 참여하는 새로운 글로벌 전략이 필요하다”는 황지쑤의 말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천하세계론’을 부르짖는 자오팅양(趙汀陽)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의 주장도 눈길을 끈다. 그는 “국가와 만민이 동등하고 중심이나 중앙이 없는 초국적 세계가 천하”라며 “국가와 국제정치를 넘어선 천하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중국이 부상한 만큼 기존의 국제 정치·경제 영역에서 펼쳐지던 ‘게임의 룰’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NO’라는 중국의 외침은 새로운 ‘중국식 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으로 보인다.
중국 “애국심 팔아라” 중국의 언론과 출판계가 ‘애국심 팔기’에 혈안이다. ‘중화주의·애국주의·민족주의 저널리즘’이 꽃피고 있는 것이다. 그 맨 앞자리에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대표적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100% 출자해 1993년 창간했지만 경영은 독자적으로 이뤄진다. 광고와 판매로만 생존해야 하는 전형적인 상업지인 셈이다. “우리는 인민일보 방침도 고려하지만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독자에게 팔리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후시진(胡錫進) 환구시보 총편집의 말이다. 선정적 보도가 불가피한 것이다.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베이징 최대 서점인 시단(西單)의 ‘도서빌딩(圖書大廈)’에선 미국의 몰락을 예견하는 『미국 침몰』 『미국 쇠락』 『미국 비판』 등의 서적과 함께 중국의 부상을 선전하는 『중국의 힘(中國力)』 『중국의 꿈(中國夢)』 『중국 모델(中國模式)』 등의 도서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중국으로부터 ‘노(NO)’라는 비판을 받는 단골 국가는 일본·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과거 중국을 침략했던 열강이다. 지난해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노르웨이도 비판 목록에 추가된 양상이다. 또 중국의 부상에 수시로 딴죽을 거는 인도도 중국에선 곧잘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최근엔 미국과의 합동 군사훈련으로 중국을 불편하게 한 한국도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을 힘으로 누르자’는 환구시보 보도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중국 사회는 현재 ‘여론을 자극하는 언론의 선정적 보도→중국 당국의 소극적 여론 통제→대중적 분노의 폭발→중국 정부의 상대방에 대한 강경대응 선언→상대국으로부터의 사과와 배상 획득→중국 언론의 자제 촉구’ 패턴을 보이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국가주의적 분노가 통제 불능에 빠지거나 반정부 투쟁으로 변질되지 않는 한 배출구를 열어두고 외교적 카드로 활용한다.” 클라크 랜트 전 주중 미국대사의 말이다.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② 중국의 꿈은 군사 강국인가
[중앙일보] 입력 2011.01.04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마오쩌둥 ‘양탄일성’으로 덩샤오핑 경제가 가능했다
올해엔 항공모함 발진, 태평양 패권까지 넘본다
#1 이웃 으르는 ‘해상 패권주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구축한 군사력이 있었기에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경제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브라마 첼라니 인도 정책연구센터 교수의 말이다. 중국은 수천만 아사자가 발생한 1950년대의 대약진운동 시기와 60년대 문혁의 혼란 속에서도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 개발을 중단 없이 추진했다. 그 결과 핵을 갖춘 군사 강국이 됐다. 이는 중국이 ‘국익’과 부딪치는 일에 대해선 상대가 누구이건 과감하게 ‘뿌(不·NO)’라고 외칠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중국인민해방군 현역 대령인 류밍푸(劉明福·유명복) 중국국방대 교수. 작전통인 그는 중국에서 ‘스타 강사’로 유명하다. 지난해 초 펴낸 책 『중국의 꿈(中國夢)』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국은 경제력에서 시작해 문화대국, 과학기술대국, 그리고 군사대국으로 완성된다. 지금 필요한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이다.” 류밍푸의 외침이다.
그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던 지난해 6월 22일. 남중국해의 인도네시아령인 나투나(Natuna)제도 해상에서 인도네시아 해양경비정과 중국 어선 16척이 대치했다. 인도네시아 해경이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침범한 중국 어선 한 척을 나포한 게 발단이었다. 잠시 후 중국어업감시선 두 척이 접근했다. 인도네시아 경비정보다 다섯 배나 컸고, 대구경 기관총도 탑재돼 있었다. 중국 감시선에서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인도네시아 EEZ는 인정할 수 없다. 중국 어선을 풀어주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총구를 맞댄 10시간의 대치 끝에 인도네시아는 중국 어선을 풀어줬다. “중국의 무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네시아 해경의 회상이다.
날로 강해지는 중국의 군사력이 이젠 수세적 차원을 넘어 인접 국가로 점차 투사되고 있는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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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해군의 바다는 넓다” ………… 제1도련(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 제2도련(사이판~괌~인도네시아) 전략은
수천만 굶어죽어도 핵무장했던 중국
우크라이나 항모 개조, 진수 박차
중국이 아시아서 무력 과시할수록
인접국의 미군 의존도는 높아질 것
서해가 와약고로? 한국의 선택은
소규모 분쟁은 자체 해결 가능해야
도발 비용 높여 억지효과 거둬야
협력과 견제, 동시추진 전략 절실
대륙 국가인 중국이 ‘대양 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해양 전략을 상징하는 게 바로 ‘섬 사슬’을 뜻하는 ‘도련(島鏈)’ 해양 방위 경계선이다. ‘제1 도련’은 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로 연결되고, ‘제2 도련’은 미국령 사이판-괌-인도네시아로 이어진다. ‘도련 전략’이 만들어진 것은 1982년이다. 류화칭(劉華淸·유화청) 당시 해군사령관이 ‘2010년까지 제1 도련 안의 제해권(制海權)을 확립해 내해(內海)화하며, 2020년까지 제2 도련 내의 제해권 확보, 그리고 2040년까지는 미 해군의 태평양·인도양 지배를 저지한다”는 내용의 해군 해양계획 시나리오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해권 확보라는 중국의 야심 찬 ‘도련 전략’을 실현시킬 수단은 무얼까. 중국은 그 해답을 ‘항공모함’에서 찾고 있다. 량광례(梁光烈·양광렬) 국방부장은 2009년 3월 방중한 일본의 하마다 야스카즈 방위상을 만났을 때 “유엔 상임이사국 중 항공모함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는 중국뿐”이라며 “중국이 영원히 항공모함을 갖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선 99년 5월 코소보 사태 때 나토 전투기가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誤爆)해 3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한 중국인들이 ‘항모 건조를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경제력과 군사과학기술의 총집합체로 평가받는 항공모함은 언제 중국 바다에 뜰 것인가. 로이터 통신은 익명의 군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공산당 창당 90주년을 맞는 오는 7월 1일을 점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사들여 다롄(大連)에서 개조작업이 한창으로 규모는 6만5000t급이다. 현재 중국 언론에서는 중국 제1의 항공모함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마오쩌둥함, 베이징함 등.
중국 항공모함이 뜨면 아시아 모든 해역에서 미·중 항공모함이 각축하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서해에서 중국의 마오쩌둥함과 미국의 조지 워싱턴함이 대치하는 국면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대함탄도미사일(ASBM)인 ‘둥펑(東風)-21D’로 미국 항모를 견제할 움직임이다. 반면 미국은 항모에 대한 공격은 핵으로 대응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다.
서해가 한반도 정세에 따라서는 화약고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중국과의 전쟁을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소규모 분쟁이 발생했을 때 자체 해결하는 능력은 갖춰야 한다.” 김태호 한림대학원대학교 중국학과 교수의 말이다. 그는 또 “상대로 하여금 도발 비용을 증폭시켜 억지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석준 외교안보연구원 중국연구센터 교수(현역 대령)는 “더욱 정교한 첨단 함정을 통해 1인치 앞선 해군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또 공통적으로 중국에 대한 ‘협력’과 ‘견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전략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브라마 첼라니 교수는 중국군의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안보가 중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나리오는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중국이 무력을 과시할수록 인접 국가들은 미국 지원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힘 키우기에만 몰두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도련(島鏈)=‘섬들로 이어진 사슬’을 뜻한다. 1951년 미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창안한 공산권 봉쇄 해양 라인인 ‘Island chain’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중국은 서태평양을 제1 도련, 제2 도련으로 나눠 대양 해군 건설의 가이드 라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3 중국 “군사분쟁 대비”
한국엔 서해훈련 자제 요구하더니
작년 중국 공개훈련만 100여차례
군부 “실제 전투 상정” 공개 발언
중국군에 더 이상 ‘인해전술’은 없다. 천문학적 군사비를 투입해 첨단 장비를 갖춘 현대군으로 거듭나고 있다. 중국의 연간 국방비 지출액은 780억 달러(약 93조6000억원).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수치일 뿐 실제 국방비는 이보다 3배 가까이 될 것이라는 게 미 국방부의 추산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은 현재 개편 중이다. 7대 군구의 현 체제를 4대 전략연합사령부로 개편하고 있다. 러시아군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진다. 명령 계통도 군구→집단군→사단→여단의 4단계 지휘계통에서 연합전략사령부→전역사령부→여단 등 3단계로 간소화할 계획이다.
공군과 미사일 작전 능력은 미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지난해 11월 17일 미 의회 자문기구인 ‘미·중 경제안보 검토위원회(UCESRC)’는 “중국 공군은 영토 방어를 넘어 역외 공격 작전까지로 교전 능력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미군 기지에 대한 인민해방군의 미사일 공격과 공습이 성공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오산과 군산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의 미군기지가 폐쇄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었다.
실전에 대비한 군사 훈련의 강도와 횟수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중국 시사지 ‘랴오왕 동방주간(瞭望東方周刊)’에 따르면 2010년은 창군 이래 군사훈련이 가장 빈번하게 펼쳐진 한 해였다. 공개된 훈련만도 100여 차례가 넘는다. 지난해 7월 18일엔 작전명 ‘교전(交戰)-2010’이라는 해상 응급 작전이 서해에서 펼쳐졌다. 해방군 창군 이래 처음으로 진행된 전시 군사·교통 종합 훈련이었다. 일주일 후에는 난징(南京)군구의 포병부대가 서해 부근에서 대규모 실탄 발사 훈련을 펼치기도 했다. 이 훈련에서 중국산 신형 로켓포가 등장해 서방 군사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군사훈련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던 중국이 훈련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한다.
국방비 증액→군구 개편→해·공군 강화→실전훈련 급증으로 이어지는 중국군의 변화는 무얼 의미할까.
량광례 국방부장이 일주일 전인 지난달 29일 행한 발언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5년 동안 군사 분쟁에 대한 대비를 진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질적인 전투를 상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군사부문도 이젠 도광양회(韜光養晦, 실력을 감추고 힘을 기름)에서 돌돌핍인(咄咄逼人, 상대를 호통치고 윽박지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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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의 금융굴기 시대로 … 미국의 달러 찍어내기에 넌더리 친다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 중국은 이제 제조업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세계 금융을 재편해야 한다고 달려든다. 2008년 가을 터진 뉴욕발 금융위기가 결정적 계기였다.
세계 최대의 미국채권 보유국인 중국은 미국 정부의 ‘달러 찍어내기’에 넌더리를 쳤다. 그래서 나온 게 위안(元)화 국제화다. 저우샤오촨(周小川·주소천) 인민은행장은 달러 기축통화에 정면으로 ‘노(NO)’라고 말했다. 위안화 무역 결제에서 시작된 위안화 국제화 작업은 착실히 진행 중이다. 지난해 6~11월 위안화 결제 규모는 3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전무했던 수치다. HSBC는 3~5년 안에 중국의 한 해 무역거래(현재 약 2조 달러) 중 절반 이상이 런민삐(人民幣)로 거래될 것으로 예상했다. 달러와 유로에 이은 제3대 결제통화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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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화 국제화의 척도는 외국 중앙은행이나 기업·금융기관이 얼마나 위안화를 선호하느냐에 달렸다. 말레이시아는 지난해 9월 위안화 표시 채권을 매입, 위안화를 외환 보유 구성 화폐의 하나로 선택했다. 미국 중장비업체인 캐터필라는 지난달 홍콩에서 10억 위안(약 1억5000만 달러)의 위안화 표시 채권(일명 딤섬본드)을 발행했다. 맥도날드에 이어 두 번째다. 이치훈 국제금융센터연구위원은 "딤섬본드가 향후 5년 안에 아시아 지역에서 양키본드 시장을 누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현상을 관통하고 있는 논리는 ‘훙삐(紅幣·Redback·위안화)’와 ‘뤼삐(綠幣·Greenback·달러)’의 대결이다. ‘훙삐’가 세계 금융위기 이후 흔들리고 있는 ‘뤼삐’를 공격하는 양상이다. ‘훙삐’의 위력은 중국의 제조업 위상과 맞물려 ‘뤼삐’에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일이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중동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중국은 부지런히 아프리카를 드나들며 자원 포식에 나섰다. 정부가 사냥감(자원)을 정하면 국유기업이 달려가 물어오는 식이다. 이제 ‘훙삐’의 공격은 미국의 코밑 중남미를 겨냥한다. 브라질·베네수엘라 등을 돌며 자원을 사들이고 있다. 중국은 지난 한 해 약 150억 달러를 이 지역에 투자했다. 미국 등 서방은 속수무책이다. “세계경제는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Slowly but surely) 그린 달러 시대에서 레드 위안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HSBC 이코노미스트 취훙빈의 말이다.
중국은 심지어 ‘미국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서방 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대신 그들은 국가가 경제 행위의 주체로 참여하는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를 내세운다. 국가가 국유기업을 앞에 내세우고, 국유상업은행의 자금을 끌어들여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외환보유액에서 2000억 달러를 떼어 만든 국부펀드 중국투자공사(CIC)는 최근 미국 전력회사 AES의 지분 15.8%를 매입하는 등 해외 에너지·자원 사냥에 나서고 있다. CIC는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에서도 큰손이다. 모건스탠리 지분 9.9%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게 2001년이었다. 중국은 서방 세계가 만들어 놓은 시장경제 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기에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서방 시장경제 질서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얌전한 규범 수용자 역할을 거부하고 있다. 중국에 맞지 않는 규범에 대해선 과감하게 ‘NO’라고 외친다.
규칙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Rule-taker)에서 이제는 룰을 만드는 존재(Rule-maker)로 변한 것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시대 … 브라질의 경제성장률 8.9%는 중국이 만들었다
#3 글로벌 성장 기여율 40%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구축한 군사력이 있었기에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경제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브라마 첼라니 인도 정책연구센터 교수의 말이다. 중국은 수천만 아사자가 발생한 1950년대의 대약진운동 시기와 60년대 문혁의 혼란 속에서도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 개발을 중단 없이 추진했다. 그 결과 핵을 갖춘 군사 강국이 됐다. 이는 중국이 ‘국익’과 부딪치는 일에 대해선 상대가 누구이건 과감하게 ‘뿌(不·NO)’라고 외칠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중국인민해방군 현역 대령인 류밍푸(劉明福·유명복) 중국국방대 교수. 작전통인 그는 중국에서 ‘스타 강사’로 유명하다. 지난해 초 펴낸 책 『중국의 꿈(中國夢)』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국은 경제력에서 시작해 문화대국, 과학기술대국, 그리고 군사대국으로 완성된다. 지금 필요한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이다.” 류밍푸의 외침이다.
그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던 지난해 6월 22일. 남중국해의 인도네시아령인 나투나(Natuna)제도 해상에서 인도네시아 해양경비정과 중국 어선 16척이 대치했다. 인도네시아 해경이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침범한 중국 어선 한 척을 나포한 게 발단이었다. 잠시 후 중국어업감시선 두 척이 접근했다. 인도네시아 경비정보다 다섯 배나 컸고, 대구경 기관총도 탑재돼 있었다. 중국 감시선에서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인도네시아 EEZ는 인정할 수 없다. 중국 어선을 풀어주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총구를 맞댄 10시간의 대치 끝에 인도네시아는 중국 어선을 풀어줬다. “중국의 무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네시아 해경의 회상이다.
날로 강해지는 중국의 군사력이 이젠 수세적 차원을 넘어 인접 국가로 점차 투사되고 있는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2 “중국 해군의 바다는 넓다” ………… 제1도련(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 제2도련(사이판~괌~인도네시아) 전략은
수천만 굶어죽어도 핵무장했던 중국
우크라이나 항모 개조, 진수 박차
중국이 아시아서 무력 과시할수록
인접국의 미군 의존도는 높아질 것
서해가 와약고로? 한국의 선택은
소규모 분쟁은 자체 해결 가능해야
도발 비용 높여 억지효과 거둬야
협력과 견제, 동시추진 전략 절실
대륙 국가인 중국이 ‘대양 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해양 전략을 상징하는 게 바로 ‘섬 사슬’을 뜻하는 ‘도련(島鏈)’ 해양 방위 경계선이다. ‘제1 도련’은 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로 연결되고, ‘제2 도련’은 미국령 사이판-괌-인도네시아로 이어진다. ‘도련 전략’이 만들어진 것은 1982년이다. 류화칭(劉華淸·유화청) 당시 해군사령관이 ‘2010년까지 제1 도련 안의 제해권(制海權)을 확립해 내해(內海)화하며, 2020년까지 제2 도련 내의 제해권 확보, 그리고 2040년까지는 미 해군의 태평양·인도양 지배를 저지한다”는 내용의 해군 해양계획 시나리오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해권 확보라는 중국의 야심 찬 ‘도련 전략’을 실현시킬 수단은 무얼까. 중국은 그 해답을 ‘항공모함’에서 찾고 있다. 량광례(梁光烈·양광렬) 국방부장은 2009년 3월 방중한 일본의 하마다 야스카즈 방위상을 만났을 때 “유엔 상임이사국 중 항공모함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는 중국뿐”이라며 “중국이 영원히 항공모함을 갖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선 99년 5월 코소보 사태 때 나토 전투기가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誤爆)해 3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한 중국인들이 ‘항모 건조를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경제력과 군사과학기술의 총집합체로 평가받는 항공모함은 언제 중국 바다에 뜰 것인가. 로이터 통신은 익명의 군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공산당 창당 90주년을 맞는 오는 7월 1일을 점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사들여 다롄(大連)에서 개조작업이 한창으로 규모는 6만5000t급이다. 현재 중국 언론에서는 중국 제1의 항공모함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마오쩌둥함, 베이징함 등.
중국 항공모함이 뜨면 아시아 모든 해역에서 미·중 항공모함이 각축하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서해에서 중국의 마오쩌둥함과 미국의 조지 워싱턴함이 대치하는 국면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대함탄도미사일(ASBM)인 ‘둥펑(東風)-21D’로 미국 항모를 견제할 움직임이다. 반면 미국은 항모에 대한 공격은 핵으로 대응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다.
서해가 한반도 정세에 따라서는 화약고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중국과의 전쟁을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소규모 분쟁이 발생했을 때 자체 해결하는 능력은 갖춰야 한다.” 김태호 한림대학원대학교 중국학과 교수의 말이다. 그는 또 “상대로 하여금 도발 비용을 증폭시켜 억지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석준 외교안보연구원 중국연구센터 교수(현역 대령)는 “더욱 정교한 첨단 함정을 통해 1인치 앞선 해군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또 공통적으로 중국에 대한 ‘협력’과 ‘견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전략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브라마 첼라니 교수는 중국군의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안보가 중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나리오는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중국이 무력을 과시할수록 인접 국가들은 미국 지원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힘 키우기에만 몰두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도련(島鏈)=‘섬들로 이어진 사슬’을 뜻한다. 1951년 미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창안한 공산권 봉쇄 해양 라인인 ‘Island chain’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중국은 서태평양을 제1 도련, 제2 도련으로 나눠 대양 해군 건설의 가이드 라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3 중국 “군사분쟁 대비”
한국엔 서해훈련 자제 요구하더니
작년 중국 공개훈련만 100여차례
군부 “실제 전투 상정” 공개 발언
중국군에 더 이상 ‘인해전술’은 없다. 천문학적 군사비를 투입해 첨단 장비를 갖춘 현대군으로 거듭나고 있다. 중국의 연간 국방비 지출액은 780억 달러(약 93조6000억원).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수치일 뿐 실제 국방비는 이보다 3배 가까이 될 것이라는 게 미 국방부의 추산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은 현재 개편 중이다. 7대 군구의 현 체제를 4대 전략연합사령부로 개편하고 있다. 러시아군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진다. 명령 계통도 군구→집단군→사단→여단의 4단계 지휘계통에서 연합전략사령부→전역사령부→여단 등 3단계로 간소화할 계획이다.
공군과 미사일 작전 능력은 미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지난해 11월 17일 미 의회 자문기구인 ‘미·중 경제안보 검토위원회(UCESRC)’는 “중국 공군은 영토 방어를 넘어 역외 공격 작전까지로 교전 능력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미군 기지에 대한 인민해방군의 미사일 공격과 공습이 성공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오산과 군산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의 미군기지가 폐쇄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었다.
실전에 대비한 군사 훈련의 강도와 횟수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중국 시사지 ‘랴오왕 동방주간(瞭望東方周刊)’에 따르면 2010년은 창군 이래 군사훈련이 가장 빈번하게 펼쳐진 한 해였다. 공개된 훈련만도 100여 차례가 넘는다. 지난해 7월 18일엔 작전명 ‘교전(交戰)-2010’이라는 해상 응급 작전이 서해에서 펼쳐졌다. 해방군 창군 이래 처음으로 진행된 전시 군사·교통 종합 훈련이었다. 일주일 후에는 난징(南京)군구의 포병부대가 서해 부근에서 대규모 실탄 발사 훈련을 펼치기도 했다. 이 훈련에서 중국산 신형 로켓포가 등장해 서방 군사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군사훈련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던 중국이 훈련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한다.
국방비 증액→군구 개편→해·공군 강화→실전훈련 급증으로 이어지는 중국군의 변화는 무얼 의미할까.
량광례 국방부장이 일주일 전인 지난달 29일 행한 발언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5년 동안 군사 분쟁에 대한 대비를 진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질적인 전투를 상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군사부문도 이젠 도광양회(韜光養晦, 실력을 감추고 힘을 기름)에서 돌돌핍인(咄咄逼人, 상대를 호통치고 윽박지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③ 레드 위안이 그린 달러 밀어낸다
[중앙일보] 입력 2011.01.05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이젠 중국만이 자본주의 구할 수 있다” 자신감
“훙삐가 뤼삐 몰아낸다” 글로벌 머니 색깔 바꾸기 야심
#1 제조업에서 힘 키운 중국
‘1979년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只有資本主義才能救中國). 2009년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只有中國才能救資本主義)’. 중국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30여 년 전의 중국 개혁·개방이 서방의 자본주의 도움을 받았지만 현재 세계경제는 중국 덕에 먹고산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이제 맘에 들지 않는 서방의 경제 스탠더드에 대해선 ‘뿌(不·NO)’라고도 말한다.
이 같은 ‘경제 패권’ 선언의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제조업이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 중국과 독일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제조업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미국 일각에선 아직도 ‘중국은 기껏해야 휴대전화 껍데기나 만드는 나라’란 비아냥이 나온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체질은 예전의 ‘하청 공장’ 수준을 넘는다. 그동안 추진한 자주창신(自主創新·독립기술 개발) 전략에 힘입어 하청 공장에 두뇌까지 갖춰지고 있는 것이다.
사례는 많다. 흔히 중국에 대해 ‘셔츠 1억 장 만들어 보잉기 한 대를 사가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1달러에 수출하는 셔츠 1억 장을 죽어라 만들어봤자 한 대에 약 1억 달러 하는 보잉기 한 대를 사면 끝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주하이(珠海)에어쇼에 등장한 중국의 첫 민간항공기인 C919는 이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이 항공기가 독자 개발한 엔진을 사용했고, 항법장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산 기술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C919가 시험비행에 들어가는 2014년 중국은 보잉(미국)과 에어버스(유럽연합)가 양분하고 있는 세계 민간항공기 시장을 3각 구도로 재편할 것으로 자신한다. 여행객 수요가 8~9%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은 한 해 약 150대의 항공기를 구입해야 한다. 국내 수요만 충족해도 C919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게 중국 제조업의 힘이다. 중국 경제가 세계를 향해 ‘뿌’라고 외치는 근거이기도 하다.
‘1979년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只有資本主義才能救中國). 2009년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只有中國才能救資本主義)’. 중국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30여 년 전의 중국 개혁·개방이 서방의 자본주의 도움을 받았지만 현재 세계경제는 중국 덕에 먹고산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이제 맘에 들지 않는 서방의 경제 스탠더드에 대해선 ‘뿌(不·NO)’라고도 말한다.
이 같은 ‘경제 패권’ 선언의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제조업이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 중국과 독일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제조업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미국 일각에선 아직도 ‘중국은 기껏해야 휴대전화 껍데기나 만드는 나라’란 비아냥이 나온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체질은 예전의 ‘하청 공장’ 수준을 넘는다. 그동안 추진한 자주창신(自主創新·독립기술 개발) 전략에 힘입어 하청 공장에 두뇌까지 갖춰지고 있는 것이다.
사례는 많다. 흔히 중국에 대해 ‘셔츠 1억 장 만들어 보잉기 한 대를 사가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1달러에 수출하는 셔츠 1억 장을 죽어라 만들어봤자 한 대에 약 1억 달러 하는 보잉기 한 대를 사면 끝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주하이(珠海)에어쇼에 등장한 중국의 첫 민간항공기인 C919는 이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이 항공기가 독자 개발한 엔진을 사용했고, 항법장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산 기술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C919가 시험비행에 들어가는 2014년 중국은 보잉(미국)과 에어버스(유럽연합)가 양분하고 있는 세계 민간항공기 시장을 3각 구도로 재편할 것으로 자신한다. 여행객 수요가 8~9%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은 한 해 약 150대의 항공기를 구입해야 한다. 국내 수요만 충족해도 C919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게 중국 제조업의 힘이다. 중국 경제가 세계를 향해 ‘뿌’라고 외치는 근거이기도 하다.
#2 중국의 금융굴기 시대로 … 미국의 달러 찍어내기에 넌더리 친다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 중국은 이제 제조업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세계 금융을 재편해야 한다고 달려든다. 2008년 가을 터진 뉴욕발 금융위기가 결정적 계기였다.
세계 최대의 미국채권 보유국인 중국은 미국 정부의 ‘달러 찍어내기’에 넌더리를 쳤다. 그래서 나온 게 위안(元)화 국제화다. 저우샤오촨(周小川·주소천) 인민은행장은 달러 기축통화에 정면으로 ‘노(NO)’라고 말했다. 위안화 무역 결제에서 시작된 위안화 국제화 작업은 착실히 진행 중이다. 지난해 6~11월 위안화 결제 규모는 3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전무했던 수치다. HSBC는 3~5년 안에 중국의 한 해 무역거래(현재 약 2조 달러) 중 절반 이상이 런민삐(人民幣)로 거래될 것으로 예상했다. 달러와 유로에 이은 제3대 결제통화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안화 국제화의 척도는 외국 중앙은행이나 기업·금융기관이 얼마나 위안화를 선호하느냐에 달렸다. 말레이시아는 지난해 9월 위안화 표시 채권을 매입, 위안화를 외환 보유 구성 화폐의 하나로 선택했다. 미국 중장비업체인 캐터필라는 지난달 홍콩에서 10억 위안(약 1억5000만 달러)의 위안화 표시 채권(일명 딤섬본드)을 발행했다. 맥도날드에 이어 두 번째다. 이치훈 국제금융센터연구위원은 "딤섬본드가 향후 5년 안에 아시아 지역에서 양키본드 시장을 누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현상을 관통하고 있는 논리는 ‘훙삐(紅幣·Redback·위안화)’와 ‘뤼삐(綠幣·Greenback·달러)’의 대결이다. ‘훙삐’가 세계 금융위기 이후 흔들리고 있는 ‘뤼삐’를 공격하는 양상이다. ‘훙삐’의 위력은 중국의 제조업 위상과 맞물려 ‘뤼삐’에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일이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중동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중국은 부지런히 아프리카를 드나들며 자원 포식에 나섰다. 정부가 사냥감(자원)을 정하면 국유기업이 달려가 물어오는 식이다. 이제 ‘훙삐’의 공격은 미국의 코밑 중남미를 겨냥한다. 브라질·베네수엘라 등을 돌며 자원을 사들이고 있다. 중국은 지난 한 해 약 150억 달러를 이 지역에 투자했다. 미국 등 서방은 속수무책이다. “세계경제는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Slowly but surely) 그린 달러 시대에서 레드 위안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HSBC 이코노미스트 취훙빈의 말이다.
중국은 심지어 ‘미국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서방 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대신 그들은 국가가 경제 행위의 주체로 참여하는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를 내세운다. 국가가 국유기업을 앞에 내세우고, 국유상업은행의 자금을 끌어들여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외환보유액에서 2000억 달러를 떼어 만든 국부펀드 중국투자공사(CIC)는 최근 미국 전력회사 AES의 지분 15.8%를 매입하는 등 해외 에너지·자원 사냥에 나서고 있다. CIC는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에서도 큰손이다. 모건스탠리 지분 9.9%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게 2001년이었다. 중국은 서방 세계가 만들어 놓은 시장경제 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기에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서방 시장경제 질서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얌전한 규범 수용자 역할을 거부하고 있다. 중국에 맞지 않는 규범에 대해선 과감하게 ‘NO’라고 외친다.
규칙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Rule-taker)에서 이제는 룰을 만드는 존재(Rule-maker)로 변한 것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시대 … 브라질의 경제성장률 8.9%는 중국이 만들었다
#3 글로벌 성장 기여율 40%
원자바오 중국 총리(2010년 10월)
“위안화 환율이 불안정해져 중국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세계경제엔 재난이 닥칠 것이다.” 원자바오(溫家寶·온가보) 총리가 지난해 10월 브뤼셀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미국의 위안(元)화 평가절상 압박에 대한 대응이었다. 듣기에 따라선 세계경제에 대한 협박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중국경제는 과연 세계경제를 ‘볼모’로 잡을 정도로 위협적 존재인가? 수치로 보자면 ‘그렇다’. 세계경제 성장에 대한 중국의 기여율은 2008년 23%, 2009년엔 40% 안팎에 이르렀다. 중국이 세계의 성장 엔진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경제학자 벤 심펜도퍼(Ben Simpfendorfer)는 “세계경제에 새로운 패턴의 성장 주기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차이나 사이클’(중국이 주도하는 성장 주기) 시대가 열렸다는 해석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시작은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시작됐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면서 일본·한국·대만 등 인접국들은 그 공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기지 역할을 했다. 고부가 부품 생산은 일본·한국 등이 맡고, 조립은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이 담당하는 분업 구조다.
이웃 국가의 중국경제 의존도는 높아졌다. 중국은 2003년 한국의 최대 수출 대상국이 된 데 이어 2005년에는 일본의 최대 수출국이 됐다. 중국이 기침을 하면 인접국들은 독감에 걸리는 구조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아프리카에 공을 들였다. 자원 확보가 목표였다. 자원외교는 중앙아시아·호주·중동 등으로 확장됐다. 이들 지역에 막대한 ‘차이나 머니’가 뿌려지면서 자원 부국은 경제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앞마당 중남미도 타깃이다. 중국은 2009년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의 최대 교역 대상국에 올랐다. 지난해 상반기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9%. 현지 언론들은 ‘중국이 만든 성장’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자원 부국 역시 ‘차이나 사이클’을 타게 된 것이다. 심지어 미국의 우방인 유럽연합(EU)도 중국 영향권에 편입되고 있다. 중국이 그리스·포르투갈 등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의 국채를 사주기로 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경제학자 벤 심펜도퍼(Ben Simpfendorfer)는 “세계경제에 새로운 패턴의 성장 주기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차이나 사이클’(중국이 주도하는 성장 주기) 시대가 열렸다는 해석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시작은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시작됐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면서 일본·한국·대만 등 인접국들은 그 공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기지 역할을 했다. 고부가 부품 생산은 일본·한국 등이 맡고, 조립은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이 담당하는 분업 구조다.
이웃 국가의 중국경제 의존도는 높아졌다. 중국은 2003년 한국의 최대 수출 대상국이 된 데 이어 2005년에는 일본의 최대 수출국이 됐다. 중국이 기침을 하면 인접국들은 독감에 걸리는 구조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아프리카에 공을 들였다. 자원 확보가 목표였다. 자원외교는 중앙아시아·호주·중동 등으로 확장됐다. 이들 지역에 막대한 ‘차이나 머니’가 뿌려지면서 자원 부국은 경제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앞마당 중남미도 타깃이다. 중국은 2009년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의 최대 교역 대상국에 올랐다. 지난해 상반기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9%. 현지 언론들은 ‘중국이 만든 성장’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자원 부국 역시 ‘차이나 사이클’을 타게 된 것이다. 심지어 미국의 우방인 유럽연합(EU)도 중국 영향권에 편입되고 있다. 중국이 그리스·포르투갈 등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의 국채를 사주기로 한 것이다.
다국적기업 역시 중국 시장에 목을 매야 하는 실정이다. 중국이 ‘세계의 백화점’으로 부상하면서 이 시장은 다국적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곳으로 등장했다. 중국 경제의 움직임에 많은 나라와 기업이 웃고 운다. 세계경제가 중국을 축(軸)으로 움직이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④ 다시 쑨원에게 길을 묻는다
[중앙일보] 입력 2011.01.06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서양 패도 따를 것인가, 동양 왕도 지킬 것인가”
87년 전 일본에 던진 쑨원의 경고 … 오늘날 중국에 다시 묻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연설
‘차(次)식민지’. 100여 년 전 중국의 상황을 쑨원(孫文·손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갈가리 찢긴 중국의 모습이 식민지만도 못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조공체제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의 좌파 이론가 마틴 자크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의 압도적 파워와 불평등한 관계 설정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은 불편하지만 대신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는 ‘21세기판 조공체제’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과연 그럴까. 새로운 한·중·일 시대의 바람직한 동아시아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해 12월 19일 찾은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신해혁명박물관. ‘쑨원과 우메야 쇼키치(梅屋壯吉)’라는 이름의 특별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쑨원과 우메야가 주고받은 편지, 도쿄에서 있었던 쑨원과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의 결혼식 사진 등 신해혁명 당시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전시됐다. 현장에서 눈물을 훔치던 82세의 한 중국 노인과 맞닥뜨렸다. 그는 “내 팔십 평생이 격동의 중국 역사와 일치하는데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느냐. 쑨원과 우메야 두 사람의 우의는 오늘날 중·일 양국 국민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우메야는 쑨원의 숨은 협력자였다. 영화사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27세 때 두 살 위의 쑨원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후 요즘 돈으로 환산해 2조 엔이라는 거액을 무기와 탄약 구입 등의 혁명자금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근 우메야의 증손 고사카 아야노(小坂文乃)가 책을 내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쑨원에겐 많은 일본 친구가 있었다. 그는 30여 년의 혁명활동 기간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에서 보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서 중국의 미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대(大)아시아주의’란 형태로 정리된다. 그는 서양을 무력과 이익에 바탕을 둔 패도(覇道)문명으로, 동양을 인의와 도덕에 기초한 왕도(王道)문명으로 구분하고,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의 피압박 민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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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 중국은 이제 미국과 어깨를 견줄 G2 국가로 부상했다. 하지만 중국의 굴기를 바라보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지난해 9월 센카쿠(尖閣)열도 분쟁 때 중국이 보여준 맨얼굴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의 재무장론이 들썩이며 서점에선 중국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책들이 인기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을 보는 한국의 시선에도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과연 중국의 이런 거친 모습이 쑨원의 유지에 부합하는 것일까. 혹자는 중국이 서구와 대등한 힘을 갖게 돼 쑨원의 뜻이 이뤄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모습을 바라는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주장한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국가주석의 외교 브레인으로 알려진 그는 “중국이 패권을 지향해서도 안 되지만,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한·중·일 시대는 어떻게 펼쳐져야 할까. “우리가 바라는 건 패권국가 중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함께 번영을 구가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하는 중국이다.” 이홍구 전 총리의 말이다. 그는 또 “중국의 장래에 대해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인들의 예지가 창조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중·일 협력체제, 나아가 동북아 집단안전보장체제와 경제공동체 창설 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중·일 GDP 합치면 세계 18.6% … EU, NAFTA 맞먹는 경제권
신해혁명 당시 변방에 불과했던 동아시아가 100년 만에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한·중·일 3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세계의 18.6%에 이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 맞먹는 경제권이다. 외환보유액은 세계 절반에 가깝다. 돈과 물건이 이 지역으로 몰린다는 이야기다. 세 나라가 힘만 모으면 세계 중심이 되는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한·중·일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선 다양한 한·중·일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현재 한·중·일 간에는 100개 이상의 협력 사업이 정상회담 합의를 거쳐 가동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세 나라 대학에서 서로 학점을 인정해 주는 동북아판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구상이나, 서울(김포공항)-도쿄(하네다공항)-상하이(훙차오공항)를 셔틀편으로 엮는 항공협력 등은 실질적인 효과가 크다. 3국 정부 간 채널만 50여 개에 달한다. 2008년부터는 3국 정상 간의 협의 채널이 정례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협력은 여전히 취약하기만 하다. 세 나라가 그리는 지역의 장래상에 대한 그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법 도출이 어려운 영토 분쟁이 한·일 간, 중·일 간 뇌관으로 존재한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 해결방식을 둘러싼 인식의 괴리도 크다. 이 지역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해서도 큰 차이가 있다. 더 큰 문제는 허심탄회한 논의를 힘들게 하는 신뢰 부족의 문제다.
3국 간 불안 요소가 불거질 때마다 한반도는 요동친다. 반대로 이런 취약한 환경은 한국에 기회이기도 하다. 지역의 미래상을 그리고, 이를 실현시킬 전략과 로드맵을 짜고, 중·일을 조정하는 역할은 한국의 몫이기 때문이다. 3국 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을 오는 3월 인천 송도에 설치키로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많은 이익 … 패권은 득보다 실이란 걸 안다”
[왕이저우 베이징대 부원장 인터뷰]
“쑨원이 일본의 패권 추구를 경계한 발언은 지금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사진)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그는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역설한다. 지난해 12월 17일 베이징대 연구실에서 왕 교수를 만났다.
-중국의 부상이 새로운 패권 국가의 출현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도 그렇다. 패권을 추구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것을 중국은 안다. 개혁·개방이 그랬듯이 중국의 이익은 다른 나라와의 협력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싫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웃 나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은 점점 배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정치 자유화와 언론의 자유도 발전하는 과정에 있고, 그 방향은 세계 여러 나라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외국 친구들도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할 때 미국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민 중에는 중국이 미국을 아시아에서 배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그런 의도는 없다. 장기적으로 미국은 이 지역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고, 군사적 관계도 유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중·북한 관계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는 걸 안다. 중국과 북한은 옛날부터 혈맹관계였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혈맹관계에서 정상관계로 조정 중에 있다.”
-세계 질서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나.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어 태평양을 건너 중국·인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지금은 약간 다르다. 글로벌화 시대는 여러 나라가 다같이 발전하는 것이므로 중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원래의 중심이 낙후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쑨원은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주창했는데.
“그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패도는 불평등한 아시아,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관계다. 왕도는 평등과 협력의 관계다. 쑨원의 가르침은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말했는데 대(大)자는 뭔가 거만한 어감을 주므로 나는 신(新)아시아주의로 고쳐 말한다.”
‘차(次)식민지’. 100여 년 전 중국의 상황을 쑨원(孫文·손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갈가리 찢긴 중국의 모습이 식민지만도 못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조공체제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의 좌파 이론가 마틴 자크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의 압도적 파워와 불평등한 관계 설정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은 불편하지만 대신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는 ‘21세기판 조공체제’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과연 그럴까. 새로운 한·중·일 시대의 바람직한 동아시아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해 12월 19일 찾은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신해혁명박물관. ‘쑨원과 우메야 쇼키치(梅屋壯吉)’라는 이름의 특별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쑨원과 우메야가 주고받은 편지, 도쿄에서 있었던 쑨원과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의 결혼식 사진 등 신해혁명 당시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전시됐다. 현장에서 눈물을 훔치던 82세의 한 중국 노인과 맞닥뜨렸다. 그는 “내 팔십 평생이 격동의 중국 역사와 일치하는데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느냐. 쑨원과 우메야 두 사람의 우의는 오늘날 중·일 양국 국민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우메야는 쑨원의 숨은 협력자였다. 영화사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27세 때 두 살 위의 쑨원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후 요즘 돈으로 환산해 2조 엔이라는 거액을 무기와 탄약 구입 등의 혁명자금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근 우메야의 증손 고사카 아야노(小坂文乃)가 책을 내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쑨원에겐 많은 일본 친구가 있었다. 그는 30여 년의 혁명활동 기간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에서 보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서 중국의 미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대(大)아시아주의’란 형태로 정리된다. 그는 서양을 무력과 이익에 바탕을 둔 패도(覇道)문명으로, 동양을 인의와 도덕에 기초한 왕도(王道)문명으로 구분하고,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의 피압박 민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 중국은 이제 미국과 어깨를 견줄 G2 국가로 부상했다. 하지만 중국의 굴기를 바라보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지난해 9월 센카쿠(尖閣)열도 분쟁 때 중국이 보여준 맨얼굴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의 재무장론이 들썩이며 서점에선 중국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책들이 인기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을 보는 한국의 시선에도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과연 중국의 이런 거친 모습이 쑨원의 유지에 부합하는 것일까. 혹자는 중국이 서구와 대등한 힘을 갖게 돼 쑨원의 뜻이 이뤄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모습을 바라는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주장한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국가주석의 외교 브레인으로 알려진 그는 “중국이 패권을 지향해서도 안 되지만,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한·중·일 시대는 어떻게 펼쳐져야 할까. “우리가 바라는 건 패권국가 중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함께 번영을 구가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하는 중국이다.” 이홍구 전 총리의 말이다. 그는 또 “중국의 장래에 대해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인들의 예지가 창조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중·일 협력체제, 나아가 동북아 집단안전보장체제와 경제공동체 창설 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대중연설이 된 1924년 11월 일본 고베에서의 강연회 장면.
1924년 11월 쑨원은 일본 고베에서 일생의 마지막 대중 강연을 한다. ‘아시아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의 마지막 결론은 이랬다.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 쑨원의 기대와 달리 점점 더 제국주의를 향해 치닫는 일본을 향해 던진 마지막 충고였다. 그 이후 일본이 어떤 길을 갔는지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이젠 쑨원이 일본에 던졌던 일갈을 중국에 되물을 차례다. 쑨원은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한·중·일 GDP 합치면 세계 18.6% … EU, NAFTA 맞먹는 경제권
신해혁명 당시 변방에 불과했던 동아시아가 100년 만에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한·중·일 3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세계의 18.6%에 이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 맞먹는 경제권이다. 외환보유액은 세계 절반에 가깝다. 돈과 물건이 이 지역으로 몰린다는 이야기다. 세 나라가 힘만 모으면 세계 중심이 되는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한·중·일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선 다양한 한·중·일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현재 한·중·일 간에는 100개 이상의 협력 사업이 정상회담 합의를 거쳐 가동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세 나라 대학에서 서로 학점을 인정해 주는 동북아판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구상이나, 서울(김포공항)-도쿄(하네다공항)-상하이(훙차오공항)를 셔틀편으로 엮는 항공협력 등은 실질적인 효과가 크다. 3국 정부 간 채널만 50여 개에 달한다. 2008년부터는 3국 정상 간의 협의 채널이 정례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협력은 여전히 취약하기만 하다. 세 나라가 그리는 지역의 장래상에 대한 그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법 도출이 어려운 영토 분쟁이 한·일 간, 중·일 간 뇌관으로 존재한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 해결방식을 둘러싼 인식의 괴리도 크다. 이 지역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해서도 큰 차이가 있다. 더 큰 문제는 허심탄회한 논의를 힘들게 하는 신뢰 부족의 문제다.
3국 간 불안 요소가 불거질 때마다 한반도는 요동친다. 반대로 이런 취약한 환경은 한국에 기회이기도 하다. 지역의 미래상을 그리고, 이를 실현시킬 전략과 로드맵을 짜고, 중·일을 조정하는 역할은 한국의 몫이기 때문이다. 3국 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을 오는 3월 인천 송도에 설치키로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많은 이익 … 패권은 득보다 실이란 걸 안다”
[왕이저우 베이징대 부원장 인터뷰]
“쑨원이 일본의 패권 추구를 경계한 발언은 지금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사진)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그는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역설한다. 지난해 12월 17일 베이징대 연구실에서 왕 교수를 만났다.
-중국의 부상이 새로운 패권 국가의 출현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도 그렇다. 패권을 추구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것을 중국은 안다. 개혁·개방이 그랬듯이 중국의 이익은 다른 나라와의 협력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싫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웃 나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은 점점 배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정치 자유화와 언론의 자유도 발전하는 과정에 있고, 그 방향은 세계 여러 나라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외국 친구들도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할 때 미국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민 중에는 중국이 미국을 아시아에서 배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그런 의도는 없다. 장기적으로 미국은 이 지역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고, 군사적 관계도 유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중·북한 관계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는 걸 안다. 중국과 북한은 옛날부터 혈맹관계였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혈맹관계에서 정상관계로 조정 중에 있다.”
-세계 질서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나.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어 태평양을 건너 중국·인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지금은 약간 다르다. 글로벌화 시대는 여러 나라가 다같이 발전하는 것이므로 중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원래의 중심이 낙후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쑨원은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주창했는데.
“그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패도는 불평등한 아시아,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관계다. 왕도는 평등과 협력의 관계다. 쑨원의 가르침은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말했는데 대(大)자는 뭔가 거만한 어감을 주므로 나는 신(新)아시아주의로 고쳐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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