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이란 인도어로 몽고가 아니고 페르시아말로 몽고이다. 중아아시아에서 부르던 이름을 페르시아말로 표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몽고를 그대로 계승했다기보다는 차카타인 한국을 계승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사람들이 무굴이라고 부른 것이라기 보다는 바부르가 그렇게 이름을 붙여 불렀을 것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첫 황제인 바부르 이야기/
[페르가나의 소년 왕, 카불의 술탄, 인도의 황제 바부르]
1. 12살에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다
나는 1526년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운 황제다.
무굴 제국은 동방의 빛나는 나라였다.
중국의 명나라와 함께 당대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다.
개국 321년 뒤, 영국에 의해 1857년 문을 닫기 까지 세계에 부(富)를 자랑했다.
당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장해 힘을 키우기 이전이었다.
유럽은 우리의 무역 파트너였을 뿐, 인도의 앞 바다인 인도양에 전함을 보낼 정도로 힘을 키우지는 못하고 있었다.
제국의 이름 ‘무굴’은 사실 인도인들이 발음을 잘 못해서 생겼다.
올바르게 발음하면? 놀라지 마시라 몽골이다.
몽골인이 세운 나라라고 해서 무굴이라고 인도인들이 불렀다.
인도 사상 가장 완벽하고 영역이 컸던 나라를 인도인이 아닌, 몽골인이 세웠다니?
잘 상상이 되시나.
몽골인의 나라가 인도 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였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많은 인도인들은 아직도 그걸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안다.
게다가 나와 내 후손들이 이슬람교도였다는 걸 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다.
힌두가 다수인 나라를 통치하는 게 이슬람교도이고 외국인이었으니 말이다.
내 이름은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흔히 바부르라고 불린다.
바부르는 호랑이를 뜻하는 페르시아 말 ‘바브르‘에서 왔다.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려웠던지, 어려서부터 바부르라고 불렀다.
1483년 2월 23일생.
나는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공국(公國) 왕자로 태어났다.
왕위를 이을 큰 아들이었으니, 어렸을 때 생활은 행복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12살 때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그랬다.
인도 무굴 제국 황제라면서고향이 중앙아시아라고 하니 어리둥절하겠다.
그렇다. 나는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훗날 인도로 내려가 제국을 세웠다.
중앙아시아를 인도에서 너무 멀게 생각하지 말라.
중앙아시아 최고의 도시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려가고, 다시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 힌두스탄 평원으로 가면 그곳이 바로 인도다.
아프가니스탄이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잇는 중간지대라고 보면 된다.
페르가나 공국은 중앙아시아 동쪽 끝 페르가나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의 서쪽 끝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가 맞닿은 곳이다.
페르가나 계곡에서 동쪽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면 오늘날 중국의 서쪽 끝인 카스(喀什) 다.
중국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페르가나 계곡을 지나간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나라의 장군이 된 고선지, 그가 이름을 날린 곳이 이 일대다.
신라의 혜초 스님이 진리의 불법을 찾아 천축국 인도로 갈 때도 내 땅을 지났다.
중국에서 인도로 바로 넘어가는 길은 없으니까 이 길로 가야했다.
요즘은 한국에서 온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조금씩 찾는다.
유럽의 배낭족은 많이 온다.
페르가나 계곡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주요 통로다.
당연히 비단길, 즉 실크 로드의 주요 길목이다.
요즘은 이 땅이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라는 나라들로 쪼개졌다.
낯선 이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 내 얘기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않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페르가나 공국의 수도는 안디잔인데, 오늘날의 안디잔에는 한국 자동차 메이커 GM대우의 자동차 공장이 있다.
참 얼마전 이 공장 이름은 GM 우즈베키스탄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한국인이 그래서 가끔씩 왔다간다.
가장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 한국으로 시집가는 우즈베키스탄의 처녀들이 많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김태희가 밭을 갈고, 송혜교가 물지게를 매고 있더라는 말이 한국에서 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지역에 미인이 많다는 얘기겠다.
내가 12살에 왕이 되었다니 복도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정 모르는 소리다.
나이에 맞춰 할 일이 있다.
나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때에 한 나라를 어깨에 짊어지게 된 소년 왕이었다.
더구나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부왕의 이름은 오마르 셰이크 미르자.
이슬람식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면 그냥 오마르라고 생각하면 된다.
셰이크는 아랍식 존칭이고, 미르자는 페르샤어이다..
셰이크는 부족장, 이슬람 학자, 지도자를, 미르자는 몽골어인칸, 아랍어인 아미르와 같은 왕을 뜻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미르자는 지도자의 아들, 즉 공자를 뜻하기도 했다.
부왕은 그때 왕국의 또다른 주요 도시 아크시에서 계셨는데, 비둘기집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1494년 6월 9일이었다.
아크시의 성채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서있었다.
아버지는 어찌된 일인지 당신이 키우던 비둘기들에 모이를 주다가 비둘기들과 같이 절벽에서 허공으로 날았다.
중앙아시아 제국의 황도였던 사마르칸트에서 태어났던 그가 숨졌을 때는 나이 39세이었다.
국가적 위기는 아버지가 변을 당했을 때 마침 외적이 침략하면서 증폭됐다.
이웃 나라의 왕이던 외삼촌과, 큰 아버지가 각각 동맹을 맺고 페르가나 공국을 공격해왔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급서했으니 10대 초반인 나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외삼촌과 큰 아버지가 왜 쳐들어왔느냐고 묻지 말라.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의 법이 당시는 그랬다.
(안디잔의 바부르 광장에 서있는 바부르의 기마상)
중앙아시아의 중심지는 사마르칸트이다.
사마르칸트는 오늘날은 우즈베키스탄의 두 번째 도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나의 6대조 할아버지인 티무르 아미르는 사마르칸트를 황도(皇都)로 중앙아시아와 인도, 이란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는 칭기스칸 이후 초원을 다시 통일한 위대한 군인이었다.
유럽인들은 절름발이라고 그를 놀리지만, 동양과 서양을 잇는 초원의 길은 그로 인해 다시 열렸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을 잇는 길을 따라 상인은 세상의 부를 실어 날랐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의 무덤 ‘구르 아미르’에 누운 뒤 제국은 분열됐다.
아들들이 제국을 나눠가졌다.
그 아들들은 아들들에게 또 영토를 나눴고, 제국은 무한 분열했다.
제국은 사라지고, 작은 영토를 가진 공국들이 세를 다투고 있었다.
이웃나라들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친척이었다.
동생의 땅을 빼앗고, 조카의 나라를 노리는 게 당시 초원의 법칙이었다.
할아버지(술탄 아부사이드 미르자)는 사마르칸트의 통치자였고, 아버지는 그의 네째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당초 아버지에게 카불을 봉토로 떼어줬다.
카불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수도다.
미국이 밀고 들어가 쑥대밭이 된 나라다.
그때 카불은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동부(호라산), 중앙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초원 지대의 남쪽 지방에 해당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영을 받자 카불을 향해 출발했다.
할아버지는 카불 출신 바바를 아버지의 보호자로 달려 보냈다.
분가를 꿈꾸던 아버지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 발흐를 지나 데라 게즈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사마르칸트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동생들의 할례 행사에 참석하라는 이유였다.
이슬람에서 할례 행사는 의미가 크다.
성인이 된다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의 옛 궁전인 톱카프 궁전에 가보면 할례의 방이 있다.
왕자들의 할례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잘 보관되어 있다.
사마르칸트에서의 할례 행사가 끝났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남쪽의 카불 대신, 동쪽의 페르가나로 가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생각이 바뀐 건 위대한 아미르였던 티무르 할아버지에게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티무르 할아버지가 그의 아들인 오마르 셰이크 미르자에게 페르가나를 준 걸 떠올린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티무르 할아버지의 아들은 이름이 같다.
티무르가 되기를 꿈꿨던 할아버지는, 티무르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자신의 4남에게도 페르가나를 떼어줬다.
(티무르의 무덤이 있는 사마르칸트의 '구르 에미르')
큰 외삼촌(술탄 마흐무드 칸)은 몽골계로 당시 몽골의 한 부족을 이끄는 왕, 즉 가한(可汗)이었다.
몽골의 부족장은 칸이라고 불린다.
투르크와 아랍계의 왕은 술탄이라고 불린다.
중앙아시아는 몽골과 투르크족이 만나는 땅이니 이런 호칭이 두루 사용됐다.
큰 외삼촌의 이름 앞뒤로 술탄과 칸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 이런 정치사회적 배경 탓이다.
외삼촌과 나의 어머니 쿠틀룩 니가르 카눔은 할아버지 유니스 칸의 피를 이어받았다.
어머니 이름 뒤 ‘카눔‘은 ’칸‘의 여성형이다.
외삼촌인 술탄 마흐무드 칸은 유니스 칸의 큰 아들이었다.
그와 사마르칸트의 왕(술탄 아흐메드 미르자)은 아버지로 인해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
사마르칸트의 왕은 아버지의 형이다.
외삼촌과 큰 아버지는 공동 전선 구축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고, 사마르칸트의 왕인 큰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는 걸 고리로 반(反)페르가나 왕국 동맹은 출범했다.
외삼촌인 술탄 마흐무드 칸과 큰 아버지인 술탄 마흐무드 칸은 페르가나 계곡의 서쪽에서 동시에 쳐들어왔다.
페르가나 왕국에 들어오는 길은 이 방면 밖에 없다.
다른 3면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장애물이다.
난 당시 나라의 수도인 안디잔에 있었다.
안디잔 성의 궁성 내의 정원이 아름다운 차르박 궁에서 부왕이 급서했다는 걸 사고 다음날에 들었다.
나는 서둘러 말에 올랐고, 즉각 동원이 가능한 수하들을 데리고 안디잔 성 장악을 위해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공백기에 재빨리 권부를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미르자의 문에 막 도착했을 때 수하인 쉬림 타가이가 내 말의 고삐를 쥐며 성채로 그냥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사마르칸트의 강력한 지배자인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강한 왕이고 많은 병력을 이끌고 접근해오고있는 만큼 안디잔의 귀족들이 나라를 그에게 넘길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이 나라를 들어 바친다면 어떻게 하나.
쉬림 타가이는 일단 도시 한 복판의 이드가로 가자고 했다.
이드가는 이슬람 왕국의 도시에 있는 종교 건축으로, 메카를 향해 절하도록 하는 긴 벽을 갖고 있는 곳이다.
벽을 향해 일자로 늘어서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쪽으로 기도를 하는 게 무슬림의 전통이다.
나는 순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버지에 끌려가기 보다는 외삼촌인 일체 칸이나 마흐무드 칸 술탄에게 갈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안디잔에서 집안 대대로 이슬람 종교청 수장 자리를 맡고 있는 집안 출신인 콰자 물라나 카지와, 성에 있던 가신들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냈다.
콰지 무함마드였다.
콰지는 종교 재판관을 말한다.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콰디(qadi)라고도 한다.
무함마드는 아버지가 신뢰하던 늙은 가신이다.
무함마드를 보낸 건 내가 불필요한 우려를 하지 않도록 위해서였다.
무함마드는 아버지의 딸 중 한 명의 수양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이드가 앞에서 나를 맞은 뒤 왕성으로 안내했다.
콰자 물라나 콰지와 신하들은 내 앞에서 왕국을 지킬 대책을 협의했다.
그들은 의견을 교환한 뒤 계획을 세우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나가기로 했다.
핫산 야쿱, 카심 쿠친과 몇몇의 다른 신하들은 당시 마르그히난과 그쪽 지역에 경계를 나가 있었는데 하루 이틀 후에 안디잔으로 돌아와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 모두가 한 마음과 몸으로 안디잔을 지키기로 했다.
큰 아버지이자 사마르칸트의 왕인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도시들을 잇따라 점령한 뒤 카바로 진군했다.
그곳은 안디잔에서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아흐멧 미르자는 그곳에 진영을 차렸다.
적이 압박해오자 안디잔 내부에서 균열이 생겼다.
안디잔의 유명한 한 수피인 데르위스 가오가 선동적인 발언을 했다.
수피는 이슬람 신비주의파로 알려져있다.
가오를 즉각 선동 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후 주민들 사이의 불온한 기운은 외견상 가라앉았다.
나는 가신인 콰자 카지와, 우준 핫산, 콰자 후세인을 사절로 사마르칸트의 술탄에게 보내 사태를 해결할 메시지를 전달했다.
“해결책은 아주 쉽습니다. 이 나라를 책임질 당신의 종 한 명을 이 나라에 두십시요. 내가 당신의 종이자 아들이 되겠습니다. 이 임무를 내게 맡겨주시면 당신의 뜻은 매우 만족스럽고 쉬운 방법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사마르칸트의 왕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온화하고 유약한 사람으로 말이 별로 없고, 신하들이 없으면 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술탄의 장군들은 내 제안을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게 돌아온 건 무례한 답이었으며, 그들은 안디잔을 향해 진군을 계속했다.
이들에 제동을 가한 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알라는 적들이 큰 곤경에 처하게했고, 원정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적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이렇다.
검다는 카바는 강 지역에 늪이 많아 다리를 통해서만 건널 수 있다.
그들은 병력 수가 매우 많았고, 좁은 다리 위를 통과하려다 보니 다리 위에서 극심한 혼잡이 일어났고, 많은 말과 낙타가 강으로 떨어져 죽었다.
이 사건 3, 4년전에도 술탄의 군대는 치르 강을 건널 때 큰 패배를 당한 바 있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그때 사건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병사들은 카바 강을 건너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마르칸트 진영에서는 말들이 집단 발병하기도 했다.
갑자기 많은 말이 죽기 시작했다.
오늘날 같으면 구제역과 같은 병일 것이다.
그들이 퇴각한 세 번째 이유는 나의 병사들과 백성이 한 뜻이 되어 뭉쳐있고, 방어를 하겠다는 의지가 단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울 것이며, 침략자의 정부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이 굳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적군은 사기가 꺾였고, 큰 아버지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결국 안디잔에 약 5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뒤 무함마드 테르칸을 사자로 보내왔다.
무함마드 테르칸은 안디잔 성 내의 이드가에서 나의 가신인 핫산 야쿱을 만났다.
그들은 평화를 일궈냈고, 침략군은 철수했다.
반면 외삼촌인 마흐무드 칸 술탄은 호젠드 강 북쪽으로 페르가나 공국을 침략, 아크시를 포위했다.
이복 동생 자항기르 미르자가 그곳에 있었고 총리인 셰이크 압달라도 그와 함께 있었다.
웨이스 라가리와 미르 기아스 타가이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 사이에 일부 오해가 있어 그들은 카산으로 철수했다.
웨이 라가리는 나시르 미르자의 총독이었다.
마흐무드 칸 술탄이 아크시 주변에 도착하자 마자, 이들은 그에 굴복했고 카산을 들어바쳤다.
미르 기아스 타가이는 칸과 함께 계속 있었고, 그를 모셨다.
칸이 아크시에 접근, 몇 차례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아크시의 귀족들과 젊은 이들은 놀라운 용기를 갖고 싸웠다.
마흐무드 칸 술탄이 병에 걸렸고, 전쟁에 신물이 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12살에 왕이 된 나의 즉위 당시의 위기는 해소됐다.
[페르가나 공국의 소년왕, 카불의 술탄, 무굴제국의 황제 바부르]
2. 페르가나 계곡, 아시아의 스위스
페르가나 공국의 수도는 안디잔.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네 번째 도시다.
20세기 마지막 해에 조사한 인구 32만9000명, 그리 작지 많은 않다.
이 도시의 한 복판에는 내 동상이 서있다.
16세기 한때 이 도시를 지배했던 소년왕을 잊지 않고 동상을 세워준 후예들이 고마울 뿐이다.
말을 타고 있는 청동상 속 나는 안디잔 시절의 소년왕인 내 모습은 아니다.
북인도에 가서 힌두스탄 평원을 제압해 무굴 제국을 세우고 제국을 호령하는 성년의 모습이다.
역사의 변방 지대에 머물고 있는 페르가나 계곡의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에 섰던 옛 고향 사람을 통해 자신들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세웠다.
페르가나 계곡에 대해 오늘날 서양 사람들은 아일랜드 크기에 비교한다.
섬나라 영국 옆의 더 작은 섬나라인 아일랜드보다 조금 작다고 말한다.
아일랜드 크기가 8만4421평방킬로미터이니, 남한(10만평방킬로미터) 보다 페르가나 계곡은 작은 셈이다.
페르가나 계곡은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3개국으로 쪼개져 있다.
북쪽과 동쪽의 천산(天山)산맥과 그 끝자락의 알라이 산맥 지역은 키르기스스탄, 중부의 평야 지대는 우즈베키스탄, 남서쪽의 산악 지역은 타지키스탄 영토다.
‘스탄‘으로 이름이 끝나는 나라는 이슬람 국가라는 건 알 것이다.
이중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역이라서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린다.
한번 와보시라. 기가 막힌 설산과, 그 아래 푸른 녹음 지역이 어우러진 알라 아르하 국립공원에도 가보시길.
참고로, 네이버에서 ‘연실낭자’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20대 한국 열혈여성의 키르기즈스탄 여행기를 읽을 수 있다.
(안디잔에서 제일 큰 금요일 모스크)
내 고향 페르가나 공국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는 내가 남긴 회고록 ‘바부르나마’를 보면 알 것이다.
차가타이 언어로 쓴 이 책은 페르가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책을 안 읽어본 사람들을 위해 일부를 옮겨본다.
“페르가나는 작은 나라이나 곡물과 과일이 많이 난다.
페르가나 국은 7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이중 세이훈 강(시르 다리야 강) 남쪽에 다섯 개, 세이훈 강 북쪽에 두 개 주(州)가 있다.
강의 남쪽에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안디잔 주이다.
이곳은 페르가나 계곡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페르가나의 수도다.
곡식과 과일이 많이 나고, 과일 중에서는 포도, 멜론이 뛰어나며 풍족하다.
멜론 철에 멜론을 행인에게 파는 건 전통이 아니다.
공짜로 준다.
안디잔의 멜론보다 더 맛있는 건 없다.
마와라운 나흐르(Ma Wara'un Nahr-시르 다리아 강과, 아무 다리아 강 사이의 지역. 로마 시대에는 아무 다리아 강은 옥시아나 강이라고 불리었다. 이 때문에 아무 다리아 강 저편의 시르 다리아 강까지의 지역을 트랜스 옥시아나라고 불리었다: 저자 주)에서는 사마르칸트와 케쉬 성 다음으로 어떤 곳도 안디잔 성만큼 크기가 되지 않는다.
안디잔에는 세 개의 성문이 있다.
왕성은 도시 내부의 남쪽에 있다.
물이 도시에 들어오는 물길은 아홉 개다.
놀랍게도 도시로 흘러들어온 물들이 하나도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이곳에는 사냥용 새와 야생 동물이 풍부하다.
꿩은 살이 통통해서 네 사람이 죽으로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이며, 다 먹을 수 없다고들 말한다.
이 나라 주민은 모두 튀르크계이며, 도시나 시장에서 튀르크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지역 언어는 글로 쓰기에 좋으며, 그래서 알리 셰르 나보이는 작품을 이 언어로 썼다.
(15세기 중앙아시아의 작가. 이 지역의 언어인 차가타이어를 사용해 작품을 썼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국민 시인으로 존경받는다: 저자 주)
미르 알리 셰르는 헤라트(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도시)에서 성장하고 유명해졌다.
주민들은 잘 생겼다.
음악에서 유명한 콰자 유숩이 안디잔 출신이다.
공기는 건강에 좋지 않고, 가을에는 학질이 횡행한다.“
21세기 사람들이 500년전 나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는 건 위에서 얘기한대로 내가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적인 국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일기와 같은 형식의 회고록을 썼다.
나의 아들 후마윤(무굴 2대 황제), 손자 아크바르(무굴제국 3대 황제)도 회고록을 남겼다. 왕실의 많은 사람이 회고록을 남겼다.
(오쉬의 전통 시장)
페르가나 계곡에서 알아야할 도시 몇 개를 더 살펴보자.
안디잔 외에 오쉬, 마르기난(영어로는 Marghinan-오늘날 페르가나 주의 주도인 페르가나 시), 호젠트, 아스페라, 아크시, 카산이 있다.
우선, 오쉬(Osh 혹은 Ush).
이 도시는 안디잔의 남동쪽에 있다.
안디잔에서는 그 옛날 걸어서는 나흘 걸리는 거리였다.
오늘날 단위로는 47킬로미터.
중국의 카스에서 육로로 중앙아시아로 넘어오려면 첫 관문 도시인 오쉬를 지나야 한다.
카스에서 국제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이르케쉬탐 고개(Irkeshtam Pass)를 넘으면 된다.
이르케쉬탐 고개를 넘으면 그림같은 설산과 그 아래 푸른 초원의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오쉬는 오늘날은 키르기즈스탄 땅이다.
오쉬의 공기가 좋고, 물이 풍족하며, 특히 봄이 되면 상쾌하다.
이 도시는 비단길의 주요 경로이어서 바자르, 즉 시장이 최대 볼거리다.
중국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온 상인들이 들고 온 물건이 오쉬의 바자르에서 거래됐다.
오쉬는 또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성지이자, 성스러운 지역인 ‘술레이만 성산(聖山)Sulaiman-Too Sacred Mountain’으로 유명하다.
이 산은 오쉬의 평야 지대에 우뚝 서있는데 1500년 이상 이 지역의 성산으로 숭배되어 왔다.
이곳은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유산으로 지정됐다.
봉우리 네 개와 많은 동굴들이 있는 술래이만 성산의 이름은 코란에 나오는 예언자 솔로몬(이스라엘의 왕. 아랍식 표기로는 술래이만)이 잠을 잤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로 가는 길에 이곳을 거쳤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에 이어 이곳 술레이만 성산이 주요 순례지다.
술레이만 산은 비단길의 어느 방향에서 오는 대상들이었던 그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오래도록 해왔다.
산 정상에는 나의 큰 아버지이자 사마르칸트의 왕을 지낸 술탄 마흐무드 칸이 세운 작은 여름 궁전이 있었다.
나는 이보다 아래에 더 큰 궁전과, 돌 기둥이 일렬로 늘어선 건축물인 콜로네이드를 지었다.
그때가 아마 1510년이었을 게다.
내가 세운 작은 모스크가 아직도 남아있다.
쌍둥이 모스크라는 뜻의 주자 모스크(Jouza Mosque)인데, 요즘은 바부르 모스크로 알려지고 있다.
주자 모스크 밖에는 클로바 초원이 펼쳐져 있다.
여행객이나 과객은 누구나 이곳에 누워 낮잠을 자고 싶어한다.
오쉬의 교외를 흐르는 강은 안디잔으로 흘러 내려간다.
이 강이 중앙아시아의 2대 강 중의 하나인 시르 다리아이다.
강의 양안에는 정원들이 있고 특히 꽃이 아름답다.
꽃과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 훗날 ‘무굴 정원’의 원형을 나는 만드는데, 오쉬에서 본 여러 가지 꽃을 기억한다.
특히 제비꽃이 우아하고, 흐르는 물가에 많다.
봄에는 튤립과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다.
페르가나 계곡 어떤 곳도 건강과 주위의 아름다움에서 오쉬를 당할 곳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