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읽는다] 만주족은 과연 한화(漢化)됐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1.01.03


『최후의 황제들-청 황실의 사회사』
이블린 S. 로스키 저, 구범진 역
까치, 510p, 25,000원

지금으로부터 일 백 년 전 이웃 중국에서는 청(淸)제국이 무너지고 이 천여년 이어진 황제지배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수립한 신해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중국의 굴곡진 공화정의 역사가 100년째에 접어 들었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병자로 불리던 중국은 이제 세계 패권을 이야기할 수준에 이르렀다. 지금은 역사적 전환기다. 바로 이 때 공화정 직전의 중국 최후의 왕조 청 제국을 내부자의 시각으로 해부한 이블린 S. 로스키의 역작 『최후의 황제들-청 황실의 사회사』와 함께 신묘년 한 해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구룬(부족, 국가)에는 원래 만주, 하다, 울라, 여허, 호이파 등의 이름이 있었다. 이전에 무식한 자들이 종종 [우리를] 주션이라고 불렀다. 주션이라는 말은 곧 시버와 차오머르건의 야만인을 가리키며, 우리 구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 구룬은 만주라는 이름을 정한다. 우리 구룬의 통치는 무궁할 것이며 많은 세대동안 전해질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우리 구룬을 원래 이름인 만주로 불러야 하며, 과거의 천박한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p.62)

1635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한 말이다. 그는 중원 대륙을 정복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하며 ‘만주’라는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다. 저자는 베이징 자금성에 있는 제1역사당안관에서 잠자고 있던 만주문 사료를 통해 ‘만주족 한화(漢化)론’을 조목조목 해체한다. 만주족 한화론이란 무엇인가? '신중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은 일찍이 중국의 통치자인 만주족이 외래 민족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구미의 침략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인들을 봉기에 동원해 만주족을 무너뜨리고 한족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중국 인민은 공통의 피, 공통의 언어, 공통의 종교, 공통의 관습을 가진 한(漢), 즉 중화민족-단일하고 순수한 종족이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을 침공했거나 중국으로 이주해온 여러 민족들은 수백년에 걸쳐 한인 인구 속에 융합됐다는 논리였다. 이것이 쑨원의 ‘한화론’이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팩트일까? 로스키는 ‘뿌(不, NO)’라고 말한다.

“모든 사회에서 치자(治者)의 시각은 피치자(被治者)의 시각과 크게 다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왕조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라 임금이었다. 따라서 한 왕조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려면 그 왕조의 주인이 누구였느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저자는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없었던 만주어로 작성된 황실 내부의 당안 자료를 통해 ‘내부자의 시각’으로 청 황실을 해부한다. 논거는 다양하다. 우선 다중수도체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성징(盛京, 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세 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일 년 중 자금성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다음은 언어. 홍타이지는 앞에서 인용한 말과 같이 부족 아이덴티티 위에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기 위해 만주문자를 창제한다. 건륭제는 이에 덧붙여 사신들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몽골어와 티베트어, 위구르어 까지 익힐 정도로 코스모폴리탄형 군주였다. 특히 청이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한자로 씌여진 문건을 남기지 않았다.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으로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와의 외교는 한인들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자 사료만 보아서는 청나라 치자의 속내를 읽을 수 없다.

또 다른 에피소드. 어느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한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했다.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었다. 낡은 한자 차용어를 대체할 새로운 만주어 단어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로써 한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다.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 이를 통해볼 때 한국이 서울의 표기로 한청(漢城)을 버리고 서우얼(首爾)을 택한 것은 나쁘지 않은 시도다. 한족의 중국을 이웃한 민족의 현명한 ‘생존 노하우’인 셈이다. 자주 해볼 일이다. 한글이 영향을 끼친 한자어를 국어학자 이기문박사가 연구해 모시(毛施)와 삼(蔘) 정도를 찾아냈지만 그 조차 근거는 불분명하다.

저자는 이 밖에도 청 황실의 의복, 음식, 혼인제도, 기우제 등을 통해 한인왕조와 달리 청만의 독특한 제국통치술을 세세하게 논증한다. 한족의 왕조였던 송(宋), 명(明) 등의 왕조에서 빈번했던 황실의 반란, 외척의 발호 등을 어떻게 예방했으며, 광대한 이민족의 땅을 어떻게 아울렀던가에 대한 해법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청 황제들에게 유교는 제국의 일부분을 이루는 한족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청 제국은 몽골과 위구르, 티베트 등을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와 방법론을 갖췄다. 천자이면서도 칸이며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던 황제는 만주족이었기에 전체 제국의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시점을 현재로 옮겨 과거 청 제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지금의 중국 공산당의 현실을 살펴보자. 그들은 효용이 다한 사회주의 대신 애국주의로 내부를 결속하고 ‘한족의 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을 설파한다. ‘공자학원’이란 간판을 걸어 전세계에 중국어를 ‘선교’중이다. 얼마나 세계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청황실보다 발전된 전략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본서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넓혀보면 한화(漢化)의 허상은 조공(朝貢)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조공제도의 본질은 ‘실용적인 위계질서’였을 뿐이다. 종속의 관계가 아니었다. 즉, 중원의 황제 입장에서 보면 서쪽, 북쪽의 유목민들은 마냥 무력을 동원해 토벌할 수 없었다. 과거 중원왕조와 유목민족의 관계는 재물과 평화의 교환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비겁을 평화라 부른 셈이다. 중국 왕조는 대신 조공이란 이름으로 이를 보기 좋게 포장했다. 몐즈(面子, 체면)만 건지는 식이다. ‘아큐식 정신의 승리’의 과거 버전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다시 로스키의 책으로 돌아가자. 이 책은 만주족의 시각으로 청나라의 역사를 다시 볼 것을 주장하는 ‘신청사(新淸史)의 선구적인 학술서다. 단, 일반인이 읽기 쉽지 않다. 역사의 숨겨진 ‘팩트’는 시각을 바꿀 때 드러나는 법이다. 최근 국내에도 ‘신청사’ 서적이 몇 권 번역되었다. 이시바시다카오 저, 홍성구 역의 『대청제국 1616~1799』(휴머니스트, 335, 15,000원), 마크 C. 엘리엇 저, 이훈, 김선민 역의 『만주족의청제국』(푸른역사, 764p, 35,000원)과 함께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왜 읽어야 할까? 청나라는 21세기 굴기하는 중국의 멘토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아마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 과거에 대한 지식이 현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다.” 솔즈베리의 명저 『새로운 황제들(모택동과 등소평시대의 중국)』 서두에서 인용한 중국 고대철학을 전공한 더크 보데(Derk Bodde)의 말이다. 1949년 베이징에 입성한 마오쩌둥의 손에는 자본론 대신 자치통감이 들려 있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중국의 좌표와 다를 가능성이 크다. ‘뿌(不, NO)라고 외치는 중국’ 중앙일보가 2011년 신년 기획으로 준비한 기획기사다. 왜 중국이 뿔났을까? 뿔난 중국은 어디로 갈까? 만주족의 청나라 역사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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