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탄생에서 열창하는 백청강>

요즘 두 백씨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모두 중국 동포다. 어떤 언론은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이건 맞지 않다. 55개 소수민족을 가진 중국의 입장에서, 각기 소수민족을 호칭한 표현 중에 하나인 조선족이라는 표현을 같은 민족인 우리가 쓰는 것은 맞지 않다. ‘중국 교포’나 ‘중국 동포’ 등의 표현을 써야 하는데 보통은 중국 동포가 일상화되어서 필자 역시 그렇게 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20대 초반이다. 20대 초반의 중국 동포들을 보면 필자는 만감이 교차한다. 우선 이들은 말 그대로 당대가 주는 가장 복잡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친척이 있는 몇몇 가정이나 간신히 한국을 드나들었지만 이 때부터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대도시로 진출한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한 중국 동포들의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어느 지역이나 한국인이 사는 만큼 이주해서 새로운 벌이를 찾아나섰다.

지금 중국에 사는 한국인이 100만명을 상회하는데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동포 역시 100만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옌지(연길)를 중심으로한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살았던 200만 중국 동포들의 이주가 시작됐다. 노동인구가 떠나자 고향에 남는 사람은 조부모와 어린 손자손녀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모가 부쳐주는 넉넉한 용돈이 있지만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흔히 조손가정으로 불리는 이런 형태의 가정은 급속히 늘어났다. 더불어 각지에 있던 동포 초중고는 사라지고 그 자리는 한족들이 차지했다. 과거 현(우리의 군) 단위에도 흔했던 동포 학교는 옌지나 선양, 돈화 등 대도시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조손 가정의 문제는 단순히 부모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흔해진 이혼과 별거 등으로 인해 혼돈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들은 자라났다.

이런 상황이 20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 중국 동포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사회 전반에서 본토인과 동포간의 거리는 이제 어느 정도 정돈이 된 느낌이다. 동포들 역시 한국이라는 상수를 충분히 이해하고 거리를 둔다. 또 그간에 한국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 이득으로 나름대로 안정적인 기반을 잡은 동포들이 상당수다.

그리고 우리 곁에 당당하게 자리한 두 젊은이가 감동을 주고 있다. 우선 먼저 ‘위대한 탄생’을 통해 부각된 백청강은 중국에서도 바뀌지 않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과 함께 일본을 겪은 중국 동포들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 북한, 중국이라는 복잡한 변수를 바탕으로 살아야 했다. 한국은 먼 나라였고, 북한은 초반기에 가까웠지만 점차 멀어지는 나라였고, 중국은 대약진,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격변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해방 후 주덕해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터전인 자치주를 형성했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주덕해 자치주 주장은 연변가무단을 통해 우리 문화를 고양하고, 초등부터 대학까지 우리 민족 학교를 만들어 동포의 존재감을 만들었다.

200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조선족은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도 중국에서 탁월한 힘을 보였다. 특히 연변가무단이 주축이 된 문화예술 공연은 중국인들에게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다. 때문에 신년연회에도 항상 초대되어 공연을 펼치곤 한다. 이런 기질은 한-중 수교 이후에도 계속된다. 때문에 노래방 문화나 한류가 가장 먼저 정착한 곳도 옌변조선족 자치주다. 이런 기반이 있었기에 백청강 같은 젊은 음악인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 방송을 보면서 필자 역시 다양한 감회가 있지만 그들이 지내왔을 엄청난 시간의 변화를 생각하면 더욱 더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프로축구인 지아(甲) A리그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체육대회에서 중국 동포들은 절대강자에 가까웠다. 불과 200만명의 조선족 자치주지만 1965년에 열린 중국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이었다. 그러던중 프로리그가 생기자 1955년 클럽 이름을 옌볜 FC로 변경해 중국 프로 축구 리그에 참여하게 된다. 돈이 좌우할 수 밖에 없는 축구세계에서도 최은택 감독이 지휘봉을 잡던 1997년에는 클럽 역사상 최고 성적인 지아 A리그 4위를 기록했다. 이후 다양한 변곡점이 있지만 중국에서 우리 동포들은 축구에 관해서는 결코 뒤지지 않은 성적을 갖고 있다.

동포들에게는 감춰질 수 없는 축구이 기질이 있었고, 이번에 백자건선수가 중국 올림픽 선수로 발탁된 것이다. 물론 한족 부친과 동포인 어머니라지만 그에게는 우리 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난 20년은 중국 동포사회에서 급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북에 집중되어 있던 동포들이 대부분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 대도시로 이주했다. 이에 따라 자치주는 이제 존폐의 위기를 맞을 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한의 절반에 맞먹는 광활한 면적의 땅에서 우리 동포 인구가 절반 가량을 차지해 자치주가 됐지만 지금은 동포 인구가 39%에 미치지 않는다. 이 역시 호구상의 인구이지 실제 거주자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과거의 위상을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중국 동포들의 삶은 현대판 디아스포라라 할 만큼 역동적이었다. 특히 지난 20년간은 그 변화가 너무 컸다. 200만명의 중국 동포가 살기에 중국은 너무 크다. 때문에 지금은 모두 섬처럼 살면서 한족 문화에 편입되어 가고 있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그들을 묶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분들을 봤다. 중앙민족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을 들이던 황유복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동포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물론 국내서도 재외동포재단의 다양한 지원과 언론재단의 한민족 저널지원 등 다양한 활동이 있지만 그 성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전에 ‘신라방, 고려영, 박씨촌, 조선족 그리고 신선족’이라는 글을 쓴적이 있다. 이제 지명에 우리 역사에만 남은 산동성 웨이하이의 신라방, 지명에라도 우리와 연결된 베이징 인근 등지에 고려영, 언어 등을 잃었지만 중국에 없는 박씨라는 성 때문에 우리 민족임을 인정받은 박씨들의 마을 박씨촌과 중국동포들, 또 현재 중국서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인 신선족 등의 과정을 말했다.

사실 중국 동포들이 영원히 우리와 한 민족임을 유지하게 하는 방법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실천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이는 중국 정부의 눈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백청강과 백자건이라는 두 청년을 통해 중국 동포들에 대한 시선을 다시 한 번 고쳐보는 게 어떨까 싶다.<조창완>

[출처]중국, 현재와 미래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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