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빈(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 1611~1646)을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한 방송사의 역사 다큐로 재현됐고, 몇 작가들의 소설로 세상과 만난 강빈은 아직 많은 이들에게 낯설다. 그래도 무릇 중국과 인연이 있는 이들이라면 강빈의 슬픔과 한을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강빈의 성공과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길 바란다.

사실 세계 양대 강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패권놀이'를 하기 시작한 지금은 어찌보면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려 포효를 시작하던 그때와 닮아 있다. 그리고 강빈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그 중국을 상대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말해준다.

강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년) 가례(嘉禮)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강빈이 궁에 들어온 때는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나던 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째인 1636년(인조 14) 청은 형제지국에서 군신지국으로 위치를 바꾸는 것을 포함해 여러 명분으로 조선을 침입한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14일에 개성을 넘고, 그날 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불과 닷새만에 일국의 수도가 비게 된다. 임진왜란 때도 보름여만에 수도가 비었으니 당시 조선군은 막상막하의 막장 군대였다. 그러면서 조정안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피터지는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피는 청군의 칼날에 무참히 유린되는 백성들의 목에서 터졌다.

전쟁은 한달반 여가 지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 등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례를 한 뒤에 끝났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가 심양에서 머물렀다.

이 때 함께 끌려간 소현세자빈, 강빈은 비극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심양에 머무는 9년 동안 경영수완을 발휘해 국제무역과 농사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유목 중심이었던 청의 한계를 극복해 농사를 짓고, 장사 수완을 벌여 돈을 벌였다. 그 돈을 바탕으로 불행한 처지의 포로들을 구하고, 청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강빈의 수고가 화를 부를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나약한 정신력의 인조는 아들 부부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다양한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다.

그 히스테리의 결말은 1645년 귀국한 소현세자의 의문의 독살로 귀결된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강빈도 유폐되어 사약이 내려지고, 세 아들마저 제주도로 유배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얼마전 인기를 끈 ‘추노’라는 드라마도 이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강빈의 슬픔은 바로 밖의 적과의 싸움보다 정작 내부에서의 싸움이 훨씬 힘들었다는 데 있다. 문치를 바탕으로 한 조선은 군사적으로 약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을 극복한 민중의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라는 불과 임란이 끝난지 38년만에 처들어온 적에게 불과 닷새만에 한양을 내어주는 참변을 당한다. 그 것 뿐일까.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국으로 성장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 땅의 위정자들은 소현세자와 강빈을 죽이듯이 내부의 싸움에만 치중해 결국 병자수호조약(1876년), 을사조약(1905년)을 거쳐 경술국치(1910년)에 이른다.

이 와중에 보여준 우리의 정치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을사조약이 있기 전인 1905년 7월 29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에게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해 11월 17일 을사조약을 체결한다. 내외부의 적으로 이 나라가 순식간에 넘어가는 꼴이다.

그리고 다시 이 땅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가장 첨예한 곳이 되어 버렸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배경이 되던 구한말과 많이 닮아있다. 하지만 이 위기를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임진왜란을 앞두고 김성일과 황윤길이 벌이던 유치한 일본의 침략 논쟁이 그리울 정도다.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넘어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바라보는 중국은 한반도가 불안할수록 이쪽에 힘을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현상은 천안함, 서해안 군사훈련을 넘어서 후톈마 기지 이전까지 이어지면 더 급물살을 탈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올 상반기 우리나라의 대외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5.12%를 기록했다. 미국(10.6%)과 일본(5.8%)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거기에 화교권을 합치면 40%에 육박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국은 필요충분조건인 반면에, 중국에게 우리는 그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을’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할 때 가장 많이 내세운 논리는 한반도가 없을 경우 일본이 침략을 받으면 4개의 주요한 섬으로 된 일본이 적에게 공격받기 쉽다는 명분이었다. 고로 한반도를 일본이 점해야 한다는 논리다. 지금 중국이 내세우는 가장 큰 논리는 중국의 코 앞에 경쟁국인 미국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그 바다의 인근에서 미군의 군사작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1962년 10월부터 11일간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도 미국의 목전에 소련의 미사일이 장치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런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친중적인 사고라고만 단정할 것인가.

외교에서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1905년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듯 지금 중국과 한반도를 둔 새로운 밀약을 맺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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