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1% 시대>③ '바늘구멍' 한국 비자
귀향 조선족 50만 넘어..대부분 방문자 신세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2005년 6월 27일. 조선족 이철구(73)씨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하고 한국 국적을 되찾은 날이기 때문이다. 단속에 대한 두려움에 늘 마음 졸이며 살아야 했던 그는 "너무 기뻐서 술을 실컷 마시고 오랜만에 푹 잠을 잤다"고 회상했다.



1938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여섯살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나 중국 헤이룽장(黑龍江省)성 옌서우(延壽)현으로 이주했다.


당시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선만천주식회사를 만들어 조선의 영세농민들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씨 가족이 만주로 간 시기는 강제이주의 막바지인 1943년이었다.

2년 후 나라는 해방됐지만, 소작농 생활로 연명하던 이씨 가족은 여비를 마련치 못해 끝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55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50년 가까이 살았다.

그가 고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은 1991년 10월. 그의 사연이 한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탔고, 이주 당시 부산 큰집에 맡겨진 채 홀로 남았던 누나와 연락이 닿게 됐다.

하지만 코흘리개로 떠나 반백으로 돌아온 그를 조국은 받아주지 않았다. 출입국사무소는 그가 체류기한을 넘긴 불법체류자라며국적회복 신청을 불허했다.

1995년 서울로 상경한 그는 악착스럽게 살았다. 중국에서 30년간 소학교(초등학교) 교편을 잡았던 그에게 일용잡부의 일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손에 잡힌 물집을 터트려가며 삽질을 했고, 잠수복을 입고 정화조에 들어가 똥물을 푸기도 했다.

그는 중국동포를 재외동포의 범주에서 제외한 재외동포법 개정을 요구하는 국적 회복 운동에 나섰다. 당시 다른 조선족들과 함께 과천 정부청사를 세 번이나 쳐들어갔고, 보름간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2004년 이들의 소원대로 재외동포법이 개정됐고, 그는 이듬해 6월 국적을 회복했다.

그를 따라 부인과 손자가 들어왔고, 뒤이어 한국에 들어온 두 누이동생도 2006년과 2009년에 각각 국적을 회복하고 한국으로 귀화해 자녀, 손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라를 잃고 중국으로 이주했던 이씨 일가는 이렇게 하나, 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합류했다.

"우리가 원해서 중국에 간 게 아니고, 중국 국민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그는 자신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과 '귀한동포연합총회'를 결성해 조선족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씨와 같은 조선족 1세대 혹은 2세대는 한국에 대한 귀속의식이 강해 한국에 들어온 뒤 국적을 회복하거나 귀화하는 게 보통이다.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는 이철구(73)씨가 1943년 중국 만주로 강제이주됐다가 1991년 한국으로 돌아와 국적을 되찾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방문취업제 후 코리안드림 만개
1992년 한중수교로 한국에 본격 유입되기 시작한 조선족은 20년이 채 못돼 50만명을 넘어섰다.

법무부 출입국ㆍ외국인정책본부의 최신 통계를 보면, 4월 기준 국내에 체류 중인 조선족은 총 44만7천600명. 여기에 이씨처럼 한국으로 귀화하거나 국적을 회복해 한국 국민이 된 조선족 7만5천여명을 더하면 국내 조선족은 52만명쯤 된다.

중국 내 조선족이 1990년대 200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족 4명 중 1명은 중국을 떠나 한국에 살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단 국내에 들어온 조선족은 대부분 비자 만료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을 찾으며, 한 명이 들어오면 줄줄이 가족과 친척들이 따라들어오면서 숫자를 불렸다.

조선족의 한국행에 기폭제가 된 것은 2007년 도입된 방문취업제. 5년 간 한국을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일할 수 있는 방문취업제로 많은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으로 향했다.

랴오닝(遙寧)성 무순(撫順)시에서 태어난 중국 조선족 2세대 김철수(48. 가명)씨도 그중 한 명이다. 김씨 부모는 다른 조선족들처럼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고향을 떠나 중국에 정착했다.

중국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김씨도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들어가 돈을 벌겠다는 코리안 드림을 꿈꿨다.

방문취업제에 따라 조선족은 한국에 있는 친척의 초청으로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을 수 있으나 친척이 없는 '무연고' 조선족은 한국어 시험을 쳐야 했다.

2008년 9월 그는 한국어 시험을 쳐서 합격했지만, 신규 입국 쿼터에 맞춰 입국자를 선정하는 추첨에서 연거푸 떨어졌다.

◇ 침체 여파 작년엔 '쿼터 제로'
방문취업제 시행 첫 해인 2007년엔 한국어 시험 합격자 2만5천명 전원이 H-2 비자를 받았으나, 2008년엔 합격자 7만6천명 중 절반 가량인 3만9천명이 비자를 받지 못했고, 2009년엔 비자를 못받은 사람들이 79%까지 치솟았다.

게다가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고 조선족이 내국인 일자리를 뺐는다는 부정적 여론이 일면서 정부는 신규 입국 쿼터를 확 줄였다. 한해 6만명이던 입국 쿼터는 2009년 1만7천명으로 급감한 뒤 지난해엔 아예 신규 쿼터가 없었다.

그는 결국 '기술연수제'라는 '뒷문'을 통해 들어오게 됐다. 기술연수제는 김씨 같은 사람들에게 우선 단기종합(C-3) 비자로 한국에 들어오게 한 뒤 학원에서 기술연수를 받고 해당 분야에서 일하면 단계적으로 비자를 업그레이드 해주는 제도다.

지난해 입국한 김씨는 요즘 서울 영등포의 한 전기통신학원에 다니고 있다. 9개월간 기술연수가 끝나는 이달 중 그도 그렇게 애태우던 H-2 비자를 손에 쥐게 된다.

그간 몸고생,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살 돈이 필요했고, 학원비도 다달이 25만원씩 내야 했다. 그래서 인쇄소, 물류회사, 모텔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건설현장 3층에서 일하다 건설자재 더미 위로 떨어져 허리를 다친 적도 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서러운 것은 조선족을 동포라기보다 못난 외국인 취급하는 차별적인 시선이었다. 공사장에 가면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고 먼저 물었고, 일감도 '원래 한국인', '귀화 한국인', '조선족' 순으로 줬다.

"착실하게 일하는데도 한국인들이 차별해 서운한 생각이 든다"는 김씨는 H-2 비자를 받으면 중국과 한국 기업간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한다. 이미 한ㆍ중 합작회사를 설립하는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김씨처럼 방문취업 자격으로 국내에서 일하는 조선족은 29만명이 넘는다. 국내 체류 조선족 3명 중 2명이 H-2 소지자인 셈이다. H-2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막혀 기술연수제로 들어와 학원에 다니는 조선족은 2만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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