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가면 소리없는 소리가 있다
돌담을 타고넘어 갈잎을 빗질하는
바람 속에 무수한 소리가 있다

골목을 내달리는 아이들 웃음소리
물질을 끝내고 돌아오는 아낙들의 즐거운 수다
창문으로 비쳐나오는 호롱불 아래
가족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귀 기울이면 그 소리 다 들린다

유채꽃 찬란히 흐드러지던 4.3
생각이 싸우고 말이 싸우고 사람이 싸웠다
사람이 죽고 집들이 불타고
마을은 아비규환

아이를 찾는 여인의 다급한 소리
총 앞에 죽어가는 청년의 외마디
불구덩에서 기는 노인의 통곡

칠백년 마을이 이틀만에 없어지고
긴 세월 서로 회피해 온 침묵
곤을동 돌담 골목에 서면
바람에 실려 그 소리 다 들린다

<곤을동>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제주 4·3 당시 초토화되어 터만 남아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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