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새 고민 영어냐, 중국어냐

홍콩(香港) 정부가 고민에 빠졌다. 중국으로 반환된 지 12년이 흘렀지만 학생들에게 모국어로 중국어(광둥어나 베이징어)를 가르칠지 영어를 가르칠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문제는 홍콩 내부에서 친중파와 반중파를 둘러싼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게다가 홍콩 특유의 언어환경까지 이 논쟁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다. 홍콩에서 주로 사용하는 광둥어는 중국 대륙에서 사용하는 베이징어와 차이가 커서 양자 간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다. 중국어를 모국어로 가르친다고 해도 광둥어냐 베이징어냐가 다시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최근 홍콩 정부 조사에 따르면 홍콩인 중 89%가량이 광둥어를 생활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수업 중인 홍콩의 한 영어 학교. photo 야후 홍콩 / 쑤엔밍영 홍콩 교육국장
중국 반환 후 영어 대신 중국어 교육 강화
“청소부 되려 해도 베이징어 배워야”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직후부터 홍콩 교육의 대세는 중국어였다. 중국 정부가 국가정책적으로 ‘모어교학정책(모국어 교육정책)’을 실시하며 홍콩 현지의 중국어 교육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현재 홍콩의 600여개 초·중·고교 가운데 114개 영어 사용 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학교에서는 광둥어를 사용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997년 홍콩 반환 전까지 학교에서 사용하는 공식언어는 영어였다. 일부 학교들은 모어교학정책에 따라 ‘식민지 언어’였던 영어 수업시간을 대폭 줄이고 지난 2006년부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베이징어 수준별 테스트를 도입하는 등 베이징어 수업을 강화하기도 했다. 중국 교육당국도 “중국과의 경제·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려면 베이징어를 더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며 간접적 압력을 가했다.

특히 연 10%가 넘는 중국의 경제성장은 홍콩의 중국어 교육에 불을 붙인 최대 요인이다. 광둥어와 영어를 사용하면서 베이징어를 구사하는 인재들은 중국과 홍콩 양 지역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재가 됐다. 때문에 한동안 홍콩에서는 “청소부가 되기 위해서도 베이징어를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퍼지기도 했다.


찬밥 신세됐던 영어교육 부활 움직임
당국도 “영어강화 절실” 새 정책 발표


지난 2003년 6월 홍콩과 중국 사이에 FTA협정에 준하는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이 체결되면서 경제적 교류가 심화된 것도 중국어가 각광받게 된 계기가 됐다. 실제 홍콩과 마주한 선전(深?)에서는 홍콩 기업 주재원의 자녀들을 포함해 7000명이 넘는 홍콩 국적 학생들이 현지 중국학교에서 중국어로 수업을 받고 있다. 지난 2006년 홍콩 정부는 자체 조사를 통해 “홍콩의 24세 미만 청소년 가운데 53%가량이 베이징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던 영어가 다시 부활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홍콩 교육당국이 영어교육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30일 쑤엔밍영(孫明揚·마이클 쑤엔) 홍콩 교육국장(교육부 장관에 해당)은 “중국어 사용 학교에서도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한 ‘신교학언어정책’을 오는 2010년 9월 신학기부터 실시한다”며 “이를 위해 향후 3년간 9억8000만홍콩달러(약 1700억원)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선 학교들도 홍콩 정부의 영어수업 강화 방침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새 교육정책 실시 이후 전체 수업시간의 25%가량만 영어교육에 할애하고 있는 400여곳의 중국어 사용학교 중 약 80여 학교가 영어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과과정을 전환할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 학부모들도 영어교육 강화에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실 1998년부터 실시된 ‘모국어 교육정책’은 비교적 교육열이 낮은 홍콩의 현지 학부모들한테서조차 반발을 샀었다. 소수의 영어 사용 학교는 ‘일류학교’ ‘귀족학교’로 취급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니는 400여개가 넘는 중국어 사용 학교는 홍콩 학부모들 사이에서 이류 학교로 취급됐다. 더군다나 영어수업을 제한하고 중국어만 가르쳐온 중국어 사용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영어학교 학생들에 밀려 대학진학률도 떨어지는 추세에 있었다. 물론 일부 학부모들과 중국어 사용학교 관계자들은 “영어교육이 다시 강화되면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도 내고 있다.


‘국제금융 중심 빼앗길라’ 위기감 한몫
본토도 ‘영어교육 기지로 만들자’ 환영

최근 영어교육 강화론이 제기된 데는 국제적인 금융·무역도시로서의 홍콩의 위상이 추락한 것도 주된 이유가 됐다. 그동안 홍콩 현지와 중국 본토 언론들은 “홍콩의 국제 금융·무역 중심지 타이틀이 상하이나 베이징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를 수시로 쏟아냈다. 영어 강화론자들도 “영어 대신 중국어 교육을 강화하면서 중국과의 경제적 유대관계는 강화됐지만 상대적으로 국제적인 금융·무역도시로서의 위상은 약화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홍콩의 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초등학교 6학년 학생 가운데 40%가량만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어 교육을 소홀히 한 사이 홍콩의 가장 큰 경쟁력이던 영어 구사력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홍콩에서 금융업과 무역업 등을 포함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2%에 달한다(2008년 기준).

영어교육 강화론에는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다는 경제적 이유도 한몫했다. 지난 수년간 급증하기 시작한 중국 본토 유학생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홍콩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교육환경이 우수한 홍콩대(조선일보 아시아 대학평가 1위), 홍콩중문대(2위), 홍콩과학기술대(4위), 홍콩시립대(18위) 등에서 유학 중인 전체 유학생 가운데 80%가량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유학생들이다. 홍콩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지난해 전체 학부과정에서 차지하는 외국인 유학생 비중을 10%에서 20%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또 오는 9월 신학기부터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영국식 학제를 미국식 학제인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제로 전면 수정할 계획이다.

한동안 중국어 강화정책을 펴던 중국 정부도 홍콩의 영어교육 강화에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오히려 중국 본토의 일부 학계에서는 “홍콩을 중국인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영어교육기지로 만들자”는 움직임까지 나오고 있다. 인구 700만명의 홍콩을 13억 중국인들의 ‘영어마을’로 만들어 외화낭비를 막자는 움직임이다. 최근 영국과 캐나다 등 영어 사용국가에서 유학, 어학연수를 하는 중국 유학생이 급증하자 유학비용 증가는 중국의 사회문제로 급부상했다. 중국의 사회평론지인 중국평론은 “홍콩 교육당국이 문호를 개방하면 많은 대륙학생들이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해 영어를 배울 수 있다”며 “이것은 홍콩에도 유리하고 대륙에도 유리한 정책”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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