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靑海省玉樹藏族自治州 玉樹縣의 지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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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다람살라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 망명해 있는 티베트인들은 제군도에서 발생한 지진 소식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성명을 발표해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17일에는 지진 현장 방문 허용을 중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하였다. 티베트 망명사회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성금을 모금하고 성명을 발표하는 등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티베트 동부 캄지방 제군도….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다. 모든 언론은 지난 14일 발생한 이 비극적인 지진을 중국 서부 칭하이(靑海)성 위수(玉樹)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명명하여 보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진 발생한 곳이 분명한 티베트 지역이며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티베트인이라는 것이다.
티베트의 잊혀진 역사
티베트는 1950년 10월 6일 중국의 침략을 받은 이래로 현재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남아있다. 티베트는 크게 암도(Amdo 현재 중국의 칭하이성, 간쑤성과 쓰촨성 일부 지방), 캄(Kham 현재 중국의 쓰촨성, 윈난성과 칭하이성 일부 지방), 우창(U-Tsang 현재 티베트 자치구) 세 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1965년 중국은 행정적인 이유로 우창 지역만을 티베트 자치구(TAR)로 지정하였으며, 이는 실제 티베트의 절반도 안 되는 부분이다. 이번에 지진 피해가 발생한 지역은 역사적으로 동티베트 캄지방의 일부였으며, 오래전 티베트 동부의 상업도시로서 티베트인들에게는 제군도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중국의 점령 기간에 티베트 전역에 대규모의 한족 이주가 시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다수의 주민이 티베트인인 이 지역에는 티베트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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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험준한 산악 지역의 사람들은 늘 용맹했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캄파(Kham-pas)'와 '암도와(Amdo-wa)'(캄 지방과 암도 지방의 사람을 일컫는 말)는 중국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했다. 티베트인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라는 대다수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추시 강드룩(티베트 무장독립투쟁 군으로 '네 줄기의 강과 여섯 줄기의 산맥'이라는 뜻. 이는 동티베트의 지리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전사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의 직접적인 권고로 무기를 내려놓기 전까지 중국 정부에 대항해 오랫동안 게릴라 전투를 벌여왔다. 이 전사들 대부분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거나 중국의 점령을 맞닥뜨리기보다 자살을 택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티베트를 탈출했다. 제군도를 둘러싼 역사는 정치인과 기자들에 의해 잊히거나 무시당하고 있다. 어떤 언론도 이 지역에 얽힌 잔인한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티베트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거대한 지진 앞에 힘없이 무너진 사람들은 중국인으로 명명될 뿐이다. 하지만, 제군도에서 사망한 티베트인들은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으로 죽을 권리가 있다.
티베트, 중국 그리고 재난의 정치
물론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어떠한 정치적, 역사적 논쟁도 무너진 건물 더미에 파묻혀 구조만을 기다리는 실종자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의 고통보다 앞설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골치 아픈 정치적, 역사적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는 이 비극적인 재난 속에서 재난의 정치학이 발동되는 것을 경계해서다.
우리는 종종 국가적인 재난 상황을 국민 화합과 국가 통합의 매개로 사용하는 국가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재난의 정치에 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에 앞서 이러한 정치적 선전이 제군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몇 가지 징후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제군도에 지진이 발생하자 수많은 중국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 물론 그들은 처참한 잔해 속에서 실종자를 찾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곳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에서 초등학생을 구조하기 위해 티베트 승려들과 중국 군인들이 힘을 합쳤다는 따뜻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많은 승려들이 티베트 불교를 '분리주의'로 보는 시각 아래서 사원에서 쫓겨나야만 했고,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군인들의 감시 아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비록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힘을 합치고 있지만,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현실적인 갈등은 한 치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재난이 수습된 이후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 된 우리'라는 선전이 성행할 것이 우려된다. '지진을 계기로 갈등을 봉합하고 화합의 길로 들어섰다'는 중국 당국의 선전은 '중국이 티베트를 해방했으며,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통치 아래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라는 익숙한 선전 문구처럼 모든 사람의 눈과 귀를 가려버릴지도 모른다. 티베트인들은 지난 2008년 티베트 전역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민중봉기를 통해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전 세계에 소리쳤다.
또한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중국 군인들이 제군도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티베트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이러한 재앙이 제군도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중국에게 단순한 재난이 아닌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다. 제군도를 둘러싼 캄지방은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에 맞서 가장 맹렬한 저항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또한, 2008년 티베트 민중봉기 당시에도 말 위에 올라탄 티베트 민중들이 중국 경찰서를 점거한 것을 비롯해 광범위한 독립 투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지금 중국정부가 바라는 것은 재난으로 이성을 잃은 티베트인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언급이나 항의시위를 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불안한 지역과 티베트를 관련짓는 어떠한 국제적인 관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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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징후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몇몇 국제부 기자들이 피해 지역으로 들어갔고, 중국정부는 구조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취재를 허용했었다. 그러나 피해 지역 접근 제한은 벌써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홍콩 <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 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선전부가 중국 언론들에게 지진이 일어난 제군도 지역을 제외한 주변지역 취재를 금지했다고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여진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에 외부인의 접근을 되도록 차단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미국 < 뉴요커 > 는 중국 당국이 국가가 허가하는 검색 엔진의 결과를 제한하고 지진을 '중국지진'으로, 희생자들을 '중국인'으로 명명하는 방법으로 제군도 지진이 어떻게 보도되는지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 당국은 지난 2008년 발생한 쓰촨(四川)성 대진진 당시 3일 만에 외국 지진 구조대를 받아들인 것과는 다르게 대만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구조대 파견 제의를 거절했다. 당국자는 '지진 피해 지역의 공간이 비교적 제한 적이며, 구호활동의 역량이 충분하다'며 외국의 구조 의료 지원과 물적 지원을 거절하고 금전적 지원만을 용인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중국으로서 가장 민감한 티베트 지역에 외국인 구조대가 파견되면 국제적으로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한 관심을 유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땅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죽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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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말미암은 첫 번째 비극에 이은 두 번째 비극이 시작되고 있다. 바로 진실의 죽음이다. 간단히 말해서 제군도 사람들은 중국인이 아니다. 그들은 티베트인이다. 제군도에서 사망한 티베트인들은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으로 죽을 권리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낼 정당한 권리가 있다. 이것은 점령군에 의해 침공당한, 반세기가 넘게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점령의 굴욕과 무게를 견뎌온 유목민과 승려, 농부들의 이야기이다. 제군도 사람들은 그들의 땅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책임은 이 이야기의 진실을 찾아주는 것이다. 지진이 일어난 지역이 중국 칭하이 성이 아닌 점령된 티베트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중국발 기사들 속에서 국제 사회가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이번 지진의 희생자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하루 빨리 복구가 진행되고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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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중국 윈난성 리장. 동파교의 신년행사 취재를 위해 자료 수집 중이던 나의 시선이 한 고서점 벽에 붙어 있는 사진에 머물렀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리장의 고색창연한 고성,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부인 사방가의 돌길에 줄 지어 가고 있는 말들의 행렬을 찍은 사진이었다. 묵직해 보이는 자루를 두 개씩 짊어진 말의 캐러밴 행렬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 그거요? 차마고도를 다니는 마방들입니다. 자주 왔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안 보이네요.” ‘차마고도? 마방(말무리를 이끄는 사람들)이라?’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 사람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내 물음에 책방 주인은 “이제는 그 사람들 만나기 힘들지” 하며 말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캄으로 가야지요.”
캄으로 ‘캄이라고?’ ‘캄’이란 단어를 듣자 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89년 티베트의 수도 라싸. 당시 나는 계엄령이 발효된 그곳에 잠입해 취재를 하고 있었다. 티베트 독립을 외치며 일어난 소요사태로 라싸 시내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현재 중국의 지도자인 후진타오가 당시 티베트 공산당서기장으로, 직접 헬멧을 쓰고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벌여 원성이 자자했다. 무장군인들이 시내 곳곳에서 거친 검문을 하고 있었고, 라싸 주변의 거대한 사원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철저하게 파괴된 그대로 방치된 채 주민의 출입이 금지돼 있었다. 그래도 라싸에는 티베트 전역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온 순례자들이 끝없이 모여들었다. 그 순례자들 중에 눈길을 확 휘어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우 먼 길을 걸어온 듯 해질 대로 해진 의복, 검문하는 중국 군인에 대한 반항적 태도, 상대방의 눈을 얼어붙게 만드는 섬뜩한 눈길, 머리에 묶은 붉은 실타래, 검게 그을린 피부….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강빠한즈들입니다. 싸움을 잘하고 성격이 거칠어요. 그중엔 강도도 많으니 조심하세요.” 중국어로 강빠한즈는 ‘캄파 건달’ ‘캄파 사나이’란 뜻인데 거지ㆍ악당ㆍ한량ㆍ산적 등 부정적 이미지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원래 캄파는 티베트어로 ‘캄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15년 만에 차마고도 마방의 사진을 통해 ‘캄’이란 지명을 다시 접한 나는 1989년 라싸에서 캄파의 얼굴을 촬영할 때 그들의 강렬한 눈빛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마고도와 캄을 취재해 보기로 했다. 막상 취재에 나서니 캄파들은 3등 민족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싸움이나 일삼는 건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뛰어난 문화를 지니고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차마고도의 첫 취재지는 윈난성에서 티베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차카롱(중국명 옌징)의 계곡이었다. 메콩강 상류에서 고대 제염방식 그대로 소금을 만들어 마방을 조직해 인근 산악지대에 팔러 다니는 차카롱 사람들에게 차마고도는 잊혀진 옛길이 아니라 오늘에도 생생하게 이어오는 길이다. 목숨 건 취재 그러나 이해 가을 캄파 마방의 캐러밴을 촬영하던 나는 절벽의 비좁은 길에서 무거운 소금부대를 짊어진 말에 떠밀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절벽 가운데 자라난 가시나무에 걸려 생명은 건졌지만 1억원이 넘는 HD카메라가 부서져 모든 취재를 중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촬영한 필름으로 구성한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되자 ‘차마고도’는 중국 관련 정보 중에서 많은 사람이 접하는 단어가 되었다. 2006년 6월 나는 칭짱 철도의 개통식 취재를 위해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있었다. ‘현대판 차마고도’로 불리는 칭짱 철도는 중국 공산당 창건기념일인 7월 1일에 맞춰 개통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인 없는 포탈라 궁 전면에는 애드벌룬이 떠 있었고 ‘칭짱 철도 개통 경축. 당 중앙의 세세한 관심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7월 1일 오전 라싸역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공안당국이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식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일반 티베트인들도 출입이 금지되었다. 비밀스러운 개통식을 벌이고 있는 4m 높이의 붉은 담장 밖에서 나는 앞으로 티베트와 캄에 닥칠 미래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라싸 중심가에서 2시간 넘도록 쉬지 않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교외의 야영지에서 열린 마지막 차마고도 마방의 해단식을 지켜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차마고도를 기억하리라 그동안 내가 캄에서 보고 들은 그들의 피눈물 나는 얘기, 그 구구절절한 얘기들을 앞으로도 방송 프로그램에 담아낼 수 있을까. 티베트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들조차 1959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1950년의 캄 침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온 세계가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지금 그 사실을 새삼 들추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캄이 멸망한 이래 캄의 모든 지명은 전부 중국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캄의 주민인 캄파의 이름도 과거 일제강점기 우리의 창씨개명처럼 중국식으로 바뀐 지 오래다. 가령 ‘골무드’라는 지명은 중국식으로 ‘꺼얼무’가 되었는데 이제는 누구도 ‘골무드’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제쿤도’라는 지명도 ‘옥수현’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관점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는 티베트 민족이 한결같이 장족으로 표현된다. 그 장족으로 표현되는 티베트인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티베트인으로 부르는 것보다 캄파로 불러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식민지 시대를 겪은, 남의 지배를 받아본 나라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내가 캄파들에게 가졌던 연민과 동정, 그들의 피로 얼룩진 사연을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차마고도에 대한 기록만은 계속해 나갈 것이다. 차마고도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들, 캄파의 삶 속에서 차마고도가 사라질 때까지.(박종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