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所有 法頂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것을 더이상 출간하지 말며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마라." <법정>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머니투데이 김태은 기자] = 11일 열반에 든 법정스님이 창건한 길상사는 이날 그의 원적(圓寂)을 공식적으로 고지하며 그의 유지를 공개했다.
길상사에 따르면 법정은 이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스님 저서에서 약속하신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했다.
길상사는 "그 동안 풀어 논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기 위하여 스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고 전했다. 법정은 '무소유', '일기일회' 등 종교를 초월해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법정은 또 "평소에 말한 바와 같이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했다.
이에 따라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13일 오전 11시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다비할 예정이다.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길상사는 이날 "‘무소유’의 지혜를 일러 주시고,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몸소 실천하시던 법정스님께서 불기 2554년(서기 2010년) 3월11일 오후 1시 51분,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에서 원적(서거를 뜻하는 불교용어)하셨다"고 공식 공지했다.
"스님(속명 박재철 朴在喆)은 1932년10월8일 전남 해남군에서 출생하셨고, 근대 고승 중 한 분인 효봉스님을 은사로 1954년 출가하셨으며,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셨고, 해인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고 연혁을 밝혔다.
【서울=뉴시스】윤근영 기자 = 11일 입적한 서울 성북2동 길상사 회주 법정(78) 스님의 생전 법문은 곧 삶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복(福)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험난한 세상에서 복이 우리를 받쳐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복 받을 행동을 해야 하고, 복 받을 마음을 지녀야 한다. 순간순간의 자기 행동이 복을 받을 만한 언행인가 되돌아보고 스스로 살펴야 한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살기도 죽기도 한다. 또한 시간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친구를 만나 서로에게 유익한 시간을 만들었다면 시간을 살리는 것이고 남의 흉이나 본다면 시간을 죽이는 일이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잘 쓰면 살리는 것, 귀중한 시간을 무가치하게 흘려버리면 죽이는 것이 된다.”
살아있다면 걸어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삶을 내딛습니다. 발걸음을 떼어 놓고 또 걷고 걷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짊어지고 온 발자국은 없습니다. 그냥, 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우리 삶이고 세월입니다. 한 발자국 걷고 걸어온 그 발자국 짊어지고 가지 않듯 우리 삶도 내딛고 나면 뒷발자국 가져오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냥 그냥 살아갈 뿐…. 짊어지고 가지는 말았으면 하고 말입니다. 다 짊어지고 그 복잡한 짐을 어찌 하겠습니까. 그냥 놓고 가는 것이 백번 천번 편한 일입니다. 밀물이 들어오고 다시 밀려 나가고 나면 자취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애써 잡으려 하지 마세요. 없어져도 지금 가고 있는 순간의 발자국은 여전히 그대로일 겁니다. 앞으로 새겨질 발자국, 삶의 자취도 마음 쓰지 말고 가세요. 발길 닿는대로 그냥 가는 겁니다. 우린 지금 이 순간 그냥 걷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걷기만 하세요’) 무념무상 땅을 밟으라는 법정의 주문은 ‘무소유’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산문 ‘걷기 예찬’을 통해서도 이 생각을 전했다.
“사람이 일반 동물과 크게 다른 점은 꼿꼿이 서서 두 발로 걷는 기능에 있다고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너무 의존하면서 직립보행의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내 자신의 경우만 하더라도 먼길을 오고 갈 때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는 걷는 일보다 타는 일이 더 많다. 그 때마다 내 몸이 퇴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미리 쓰는 유서 -법정]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 올런지 알수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 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런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걸음 한걸음 죽어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결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있는 생의 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만한 처지가 못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처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런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수 없는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 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덤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 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때 저지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 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 무일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술 더떠 거창한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게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구하는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 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수 없다. 다시 출가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이해인 수녀의 추모글]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추모시]
3월의 바람 속에
이해인
차갑고도 따뜻한 봄눈이 좋아
3월의 눈꽃 속에 정토로 떠나신 스님
'난 성미가 급한 편이야' 하시더니
꽃피는 것도 보지 않고 서둘러 가셨네요
마지막으로 누우실 조그만 집도 마다하시고
스님의 혼이 담긴 책들까지 절판을 하라시며
아직 보내 드릴 준비가 덜 된 우리 곁을
냉정하게 떠나가신 야속한 스님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을 정화시키려
활활 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셨나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중생들을 깨우치시고자
타고 타서 한 줌의 재가 되신 것인가요
스님의 당부처럼 스님을 못 놓아 드리는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할까요
타지 않는 깊은 슬픔 어찌할까요
많이 사랑한 이별의 슬픔이 낳아준 눈물은
갈수록 맑고 영롱한 사리가 되고
스님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은 환희심 가득한
자비의 선행으로 더 넓게 이어질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한 끝없는 기도는 연꽃으로 피어나고
하늘까지 닿는 평화의 탑이 될 것입니다
하얀 연기 속에 침묵으로 잔기침하시는 스님
소나무 같으신 삶과 지혜의 가르침들 고맙습니다
천정한 삶 가꾸라고 우리를 재촉하시며
3월의 바람 속에 길 떠나신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라도 3월의 바람으로 다시 오십시오. 우리에게
법정스님의 좋은글 모음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 무소유 중에서 -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 홀로 사는 즐거움 에서 -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아름다움이다.
- 버리고 떠나기 에서-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 답게 살고 싶다
- 오두막 편지 에서 -
빈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 는 것이다.
- 물소리 바람소리 에서-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을 뜻한다.
- 홀로 사는 즐거움 에서-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 산방한담 에서 -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 홀로 사는 즐거움 에서 -
가슴은 존재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가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인 사람도,다정한 눈빛도,
정겨운 음성도 가슴에서 싹이 튼다.
가슴은 이렇듯 생명의 중심이다.
- 오두막 편지에서-
나는 누구인가.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 산에는 꽃이 피네 에서 -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달로 있는 것이 아니다.
- 봄 여름 가을 겨울 에서 -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산에는 꽃이피네 에서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 버리고 떠나기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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