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당>

<중국 요녕성 심양 남관성당>


나의 신앙의 길 2. 벗―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 전 사베리아

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이다. 화려한 문구로 씌여진 시는 아니지만 소박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으며 반문구로 감정이 절제되고 있다.

우리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볼 때 정말 저런 사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헛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우정”이라면 “의리”와 같은 단어가 동반하면서 흔히들 ≪수호전≫의 량산박 영웅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의리”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 “우정”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를 서로 사양”할수 있는 그런 벗을 가진다는 것은 천운이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일반적으로 “우정”이라면 남성들 사이에만 존재하고 여성들 사이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만큼 여자들의 “의리”는 갈대처럼 흔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다시 말하면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를 서로 사양”할 수 있는 “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그렇게 나를 자신보다 걱정해주는 친구,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나는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바로 권옥산(방지가 로마나)수녀님이다. 세속에 친구들이 많지만 신분이나 격에 어울려 대화가 통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지라 이익관계가 생기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며 관건적인 시각 구명대를 서로 양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하지만 권옥산 친구는 다르다. 우리는 함께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하나의 생활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주소조차 모르는 곳에 떨어져 있다해도 “친구”의 의미를 의심해본적 없으며 또한 기적처럼 만나게 되는 그런 끈끈한 운명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우정의 색깔이 바래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짙어만 간다. 늘 나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가 나는 고마울 뿐이다. 이러한 벗은 이 세상에 하나면 족하다.

먼저번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와 나는 1989년에 9월에 처음 만났다. 당시 신앙을 갈구했지만 종교라는 이 미지의 세계가 너무 낯설었던 나에게 그는 하얀 미소로 다가와 나의 눈을 뜨게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처음으로 성당에 갔었고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한번은 영성체를 할 때 내가 왜 나한테는 면병을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나도 봉헌을 했는데 왜 하느님은 공평하지 않게 나를 성체성사에 참여못하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그처럼 공백상태였다. 이러한 나에게 그 친구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었고 내 머리와 마음이 닫혀있을 때는 그냥 기도하면서 나를 지켜주었다.

1990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자신이 뜻을 둔 수녀의 길에 나섰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알지 못한 채 아주 총망히 헤여졌다. 나는 가끔 그 친구를 생각했지만 어디서 찾을지 방향이 없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호기심으로나마 교회나 성당 같은데 가끔씩 “구경”가는데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종교신앙 자유라는 정책을 떠나서 사람들한테 이해되지 않는 공간이라 저어되는 점이 한두가지 아니었다. 게다가 나를 이끌어주던 그 친구가 없으니 나는 끈 떨어진 연마냥 방향이 없었고 성당에 나갈 재미도 없었다. 참으로 어섯눈을 뜨기 시작할 때 이끌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 어떤 충동을 받아 미사에 참여하러 갔는데 그 친구가 성당에 있었다. 그 친구의 집이 팔도이고 또 졸업 후 어디로 갔을지도 모르던 상태라 성당에 만났을 때 우리 둘은 정말 놀랐고 기뻤다. 나는 그때에야 그 친구의 뜻이 수녀였음을 알았다.

그 친구는 수도생활을 준비하느라 연길성당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연길성당에는 노수녀님(지금 돌아가셨음) 한분 계셨고 조수녀님도 수련수녀로 있을 때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무슨 생각하고 성당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왜 그때 성당에 가서 너를 다시 만나게 되었지? 내가 왜 갔을가, 참”라고 내가 말하면 그 친구는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고. 하느님이 너를 이끌었던 것이야”라고 대답한다.

아무튼 그때의 재회로 하여 우리는 서로의 인생의 뜻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친구는 다시한번 신앙의 길에서의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교리를 역설하면서 나를 성당으로 자주 나오라고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인 나한테 나쁜 영향이 미칠가 두려워 그 친구는 조심스레 나한테 다가왔는데 교리가 필요 없이 그 친구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신앙교과서였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견증은 설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세례 받을 생각을 못했다. 그 후 그 친구가 연변을 떠나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자 성당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은 또다시 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가끔 편지를 보내와 안부를 물었다. 내가 석사공부를 할 때 그 친구는 어느 정도의 수련을 마치고 다시 연길성당으로 돌아왔다. 종신서원까지 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수녀였다. 그 친구가 있어서 나는 또다시 성당으로 나가게 되었고 마침내 석사과정을 마칠무렵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나와 그 친구는 늘 헤어져 있지만 늘 손잡고 있었다. 리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과정에 아주 드라마틱한 만남도 있었다.

1997년 석사를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 왔으며 여러 가지 핑계로 또 다시 신앙을 잊고 살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계속 연길성당에 있겠지 하면서 연락한번 못했다. 연길성당 전화번호도 모르니까. 그러다가 2003년 한국 부산으로 3개월간 연수가게 되었는데 부산일보에서 견학할 때 한 기자분의 연계로 내가 좋아하는 시인 이해인수녀님을 만나게 되었다. 약속한 시간 성베네딕도수녀원의 “해인글방”에서 나는 이해인수녀님을 만났다. 나와 이해인수녀님은 문학에 대해, 신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나의 친구가 연길성당에 수녀로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해인수녀님은 반색하면서 연길성당에 머문적이 있다고하셨다. 내가 “친구의 이름이 권옥산입니다”고 했더니 순간 이해인수녀님은 표정이 굳어져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권옥산수녀라구요?” 다시 물어보시기에 “예”하고 대답했더니 “지금 이 수녀원에 와있어요.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내가 굳어졌다. 나는 친구의 외형까지 그려가며 확인을 했다. 나와 이해인수녀님은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라 서로 마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참으로 우연이라도 그런 우연은 없을 것이다. 그건 하느님이 안배한 필연이었다. 그때 친구는 학교에서 수업중이라 수녀원에 없었다. 후에 이해인수녀님의 연계로 나와 친구는 부산에서 6년만에 극적인 상봉을 했고 나는 성베네딕도수녀원에 초대받아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녀원안의 성당에서 “대림의 밤” 기도모임에 참가하였다.

후에 들을라니 나와 친구의 드라마틱한 만남은 성베네딕도수녀원에서도 연길성당 수녀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이슈였다고 한다.

이렇게 나와 그 친구는 아무 연락 없이 살았어도, 지어 연락처도 모른 채 살았어도 약속 없이 만나게 되어있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늘 가까이에 있어야만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애지각에 떨어져있어도 언제나 서로를 마음에 새겨두고 진심으로축복해준다면 늘 옆에 있는 듯이 서로를 느끼게 되어있지 않을가.

내가 신앙에 게을리 할 때마다 그 친구는 알아채기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보내오는 엽서처럼 조용히 다가와 속삭인다. “잘 지내?”, “멋지게 인생을 가꿔”라는 축복과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뿐이다. “너 요즘 신앙에 게을리 하지 않니? 성당에는 나가?” 이런 재촉이 한마디 없다. 그러나 그러는 친구의 속삭임에 나는 정신이 버쩍 들군 한다.

다시다시 만날 때마다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늘 떨어져 있어도 늘 내 옆에 있는 듯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전에는 너무 보고싶어서 내가 한달음에 심양천주교신학원에 찾아가서 만나본적도 있다. 수녀는 함부로 공동체를 이탈할 수 없으니까. 올 때 기차표를 끊지 못해 비행기를 타고오면서까지 연길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신앙에 대한 나의 마음이 점점 열리자 친구는 나한테 본격적인 이론지도를 해주고있다.

견진성사를 받던 날 친구가 나한테 하는 첫마디가 “너 견진성사를 받아서 시름놨다.”였다. 그 사이 십여년간 나를 지켜보면서 빙빙 에돌아가는 내가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축하 한다”는 말보다 “시름놨다”는 말을 먼저 할가? 나는 그 사이 줄곧 내 손을 잡고 나의 옆을 지켜왔던 친구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때문에 사이좋은 친구들도 몇 년 만나지 않으면 그 사이가 멀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헤여져 있으나 마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마음이 더 깊어지는 이러한 믿음과 우정. 그저 감사할 뿐이다.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할 수 있는 친구, 나는 그 사람을 가져서 너무 행복하다. 친구야,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2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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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주교좌 남당성당>


나의 신앙의길 1. 무엇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

- 전 사베리아

얼마전에 북경에서 교육자로 계셨던 한분의 유작출판기념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은 원래 중국 어느 조선족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셨는데 퇴직후 성경을 읽으셨고 기독교 신자로 되어 돌아가셨으며 기독교장례식을 치뤘었다.

물론 종교는 달랐지만 그분의 작품속에는 정신수련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그날 출판기념식에는 북경의 출판사, 대학교, 사회과학원, 연변대학 동문회, 북경애심여성회 등 직장과 단체의 80여명이 참석하였다.

그날 어찌하다보니 우리 또래의 여자박사 3명이 나란히 한식탁에 앉게 되었는데 그중 한명이 불교를 믿고 한명이 기독교를 믿었으며 나는 천주교신자였다. 그날 모임에 참석한 여자 박사 3명이 100% 종교신앙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중국의 교육환경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종교신앙을 가진다는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그날 석사를 졸업하고 북경에 분배받아 온지 얼마 안되는 후배가 종교를 신앙하는 우리 세 여자 박사가 신기했던지 “선생님들은 어찌하여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까”고 물었다. 우리는 웃고 말았다. 신앙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신앙이 활발하여 어릴 때부터 가정의 영향으로 믿게 되는 그런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이곳에서 종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장님이 막대기를 짚고 한걸음 한걸음 더듬으면서 나가는 격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더듬어 나갔다. 때문에 나의 신앙의 길은 평탄지 않았고 또 지금도 늘 첫발작을 내디딘 기분이다.

나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로부터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중시절(고등학교) 나는 무한한 신비로 가득한 이 세상이 신기했고 우주의 섭리가 참으로 놀라왔다. 모든 것이 우연인듯 하면서 필연인 그 자체가 너무나도 두려웠고 그로하여 “절대적인 진리”, “영원함”, “절대자” 등에 대해 사색하게 되었다. 그때 일기책을 전부 위와 같은 단어로 도배했는데 내가 썼던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읽었을 때 그 뜻을 내가 알수 없다. 난해시라 해도 이렇게 난해할수 없고 추상파라 해도 이렇게 추상적일수가 없다.

고중시절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독교 교회당이 있었다. 나는 기독교가 뭔지 잘 몰랐고 천주교와의 차이는 더더욱 몰랐다. 다만 마루틴 루테르가 종교개혁을 한 신교라는 정도만 알고있었을뿐이다. 하지만 교회당 첩탑의 십자가만 보면 그냥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상한 거룩함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하여 나는 교회당 문을 떼고 들어섰으며 젊은 신도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가운데 몇 번 예배에 참가했었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거룩함은 보이지 않고 그냥 말끝마다 너도나도 뒤질세라 “아멘”을 높이 외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 상상속의 종교는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과 평화로움이 감돌고 환희와 고요함이 깃들며 사람들 사이의 친절함과 지켜야 할 예의법도가 있는 그런 존재였는데 나는 교회에서 축제의 분위기만 느꼈을 뿐 종교의 정숙함과 신성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몇 번 교회에 나간 것이 부모님들에게 전해져 나는 많이 혼났으며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몇 번의 예배에서 나는 어렴풋이 십자가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왜 오셨고 왜 돌아가셨는지 몰랐다.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연관된 단어는 “예수쟁이”(기독교 신도를 비하하여 부른것임)뿐이였고 기독교(천주교)는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를 불에 태워죽이는 무지의 조직이며 “십자군 동정”을 진행한 폭력적인 조직이라는 것 뿐이였다. 거기에 “정신적 아편”이고… 이것이 내가 받은 교육이다. 지금 같은 다문화 시대, 열린 시대에도 이곳에서는 종교신앙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인데 1980년대 말 종교는 우리에게 너무나 멀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을 겪어온 부모님(두분 모두 당원)들은 “종교”란 말만 들어도 두려워했으며 아예 입밖에 내지도 못하게 하였다.

퍽 후에야 안 일이지만 할아버지께서 천주교신자였다고 한다. 일본에 유학하셨고 연변에서 학교를 세우면서 교육자로 일생을 마쳤던 할아버지는 10년 내란 시기 운동때마다 불리워나갔지만 독실한 신자로서 민분이 없었기에 별로 투쟁을 맞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향으로 아버지 형제들은 성분이 나빠 입당할 수 없었다. 다행이 아버지는 성분이 괜찮은 어머니를 만났고 또 남들보다 더 노력하였기에 입당하였지만 아버지 형제들은 입당하려는 소망을 모두 이루지 못했다.

집안의 그런 아픔으로 하여 부모님이 더욱 나를 말렸는지 모른다.

1989년 9월부터 1990년 7월까지 나는 대학입학전의 마지막 일년을 연길성당의 수녀이며 지금 심양천주교신학원에서 공부중인 권옥산(방지가 로마나)수녀님과 한책상에서 보내게 되었다. 휴식시간 우리는 신앙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천주교를 믿는다고 했으며 기독교와의 다른 점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신앙을 갈구하던 나에게 권옥산 친구는 단비를 내려주었고 나는 마침내 그 친구를 따라 연길성당으로 “구경”가게 되였다. 이것이 내가 천주교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보았다.

1989년 10월 15일, 확건하기전의 연길성당안은 사람들로 꽉 찼으며 뭐라 신분을 알수 없는, 여러 가지 색상의 환한 복식을 한 남성들이 제단우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교님과 여러곳의 신부님들이 오셨던것 같다. 그날 중국 조선족의 첫 신부님이신 엄태준(아브라함. 현재 훈춘성당 주임 신부님임.)신부님의 사제서품식이 있었다. 내가 전에 본적도 상상한적도 없는 엄숙한 의식이였고 사제서품 받은 엄신부님은 눈부시게 환했다. 그날 엄신부님은 내 상상속의 예수님이였고, 성당이였고, 종교였으며 신앙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신성하고 화려했다. 그날부터 나는 엄신부님의 “팬”이 되었다. 당시 열아홉살인 우리 여자애들은 주윤발이나 류덕화를 좋아했는데 나는 영화배우보다 엄신부님이 더 멋있었고 존경스러웠으며 자랑스러웠고 또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팬”이란 단어를 알고있지만 그때는 한국과의 교제도 빈번하지 않았던 터라 “팬”이란 단어도 없었다. 그냥 다른 여자애들이 영화배우나 가수를 좋아했다면 나는 영화배우나 가수보다 엄신부님을 좋아했다고 소박하게 말하는것이 더 타당할것 같다. 엄신부님이 사제서품 받던 날부터 즉 엄신부님이 신부생애를 시작한 날부터 내가 “팬”으로 되었으니 엄신부님의 신부생애와 나의 “팬”으로의 력사가 시간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엄신부님은 지금도 내가 팬이라는 것을 모르신다. 1996년 성탄절, 나는 연길성당에서 엄신부님한테서 세례를 받았다.

사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은 도대체 무엇인가? 영원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상대적인 우리의 삶 속에 정말로 절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구도의 길이 신앙의 길에 나서게 하였으며 권옥산 수녀님의 도움과 엄신부님의 사제서품식에서 봤던 그런 정숙하고 신성함이 나로 하여금 천주교의 길에 들어서게 한것같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머리로 해석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것이라고 본다.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는 평화로움과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마지막 정토, 내 영적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그러한 영원함과 그에 대한 추구가 신앙이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 어떤 개념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면서 더듬어가는 내 마음의 길이였다.(2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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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이동경축






:::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

 

1. 김대건 신부님의 약력

2. 김대건 신부님

3.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

4. 아들이신 김신부님

5.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1. 김대건 신부님의 약력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순교자 집안의 후손인 김제준(아나시오)과 모친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남
1836년 여름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에서 나모방 불란서 신부에게 영세받음(세례명-안드레아)
1836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엽,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남
1844년 12월에 부제로 서품됨.
1845년 1월 중국을 거쳐 귀국. 4월 3일 목선으로 11명의 교우를 대동하여 상해로 출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
1845년 8월31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9월 28일에 제주도로 입국. 10월 12일에 강경나바위로 상륙
1846년 6월 5일에 입국 후 사목활동을 하다가 관가에 잡혀서 갖은 고초를 겪음
1846년 9월 16일 나라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받아 10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 그 장소에 매장되었었으나 경기도 안성 미리내로 비밀리 모셔졌음
1857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께서 가경자(可敬者) 칭호를 내리심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79위 한국 순교복자로 시복됨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으로 공포됨

 

2. 김대건 신부님

 

성지 미리내 복자 현양대회 광경

김대건 신부님은 짧은 일생을 진리의 증거자, 민족의 선각자로 주님의 사업에 몸바치다 순교로써 생을 마친 한국 최초의 사제입니다. 그분은 15세 어린 나이로 뛰어난 재주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앙심을 인정받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서품되어 귀국의 길에 오를 때부터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실 때까지가 일대기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기간의 활동은 한마디로 하느님께 대한 자기 봉헌이었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진심한 희생의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 교회의 최초의 사제로서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탁월한 웅변가로서 한국 교회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이 땅에 역사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은 모두 25통입니다.
이 25통의 서한은 김대건 신부님의 피눈물이 나는 활동기요, 하느님께 대한 봉헌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지 내용을 통해서 김대건 신부님의 활동과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특히 잘 알려져 있는 옥중 고별 서한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겹게 만드는 감격적인 서한입니다.

 

4. 아들이신 김 신부님

 

 

"저는 오늘 불란서 배가 조선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 배들이 다만 위협만 하고 그대로 떠나게 되면 교회에는 큰 박해를 가져와서 저도 죽기 전에 무서운 고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아! 천주님이시여, 모든 것을 선종의 길로 인도하소서. 저는 어머님인 우르술라를 주교님께서 보살펴 주시옵기 바라나이다. 10년 동안이나 같이 있지 못하다가 겨우 며칠 동안은 자식과 만나는 일이 허락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도 못 가서 그 자식은 다시 떨어져 갑니다. 원컨대 주교님은 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옵소서(페레올 주교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 신부님의 유해 머리 부분은 1901년 5월 21일에 서울 용산에 있던 신학교의 성당으로 모셔졌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옮겨짐에 따라 소신학교에 모셨다가 1960년 7월 5일에는 가톨릭대학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한국 천주교 성직자단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 안드레아 신부님을 대주보로 받들어 7월 5일을 김 신부님의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복자 노렌조(범주교)와 안드레아(김대건)와 모든 치명자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시복식 때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드린 기도문)."

 

 

김대건 신부님은 3개월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영광된 순교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 신부님이 감옥으로부터 끌려 나와 두 손을 뒤로 돌려 묶이고 새끼로 만든 들것 위에 올라 앉으니 포졸들은 그 들 것을 메고 무수한 군중이 둘러보는 가운데사형장으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판관이 일어서서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자 김 신부님은 군중을 향해 큰 소리로 마지막 설교를 힘차게 하셨습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것은 오직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그 천주를 위해 나는 죽어 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고자 생각 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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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끝난 후 포졸들은 김 신부님의 웃옷을 벗기고 관습을 따라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는 물을 뿜고 흰 회를 발랐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을 꿇어 앉히고 한 가닥의 밧줄로써 신부님의 머리칼을 동여매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신부님은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으시면서 태연하게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몸가짐이 이러하면 좋으냐? 쉽게 자르겠느냐? … 자 나의 목을 잘라라, 준비는 되어 있다." 이래서 12명의 회자수가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빙빙 돌다가 각각 한 칼씩 내리치니 여덟 번째의 칼날에 신부님의 머리는 앞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유흥렬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聖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상세 일대기

동방의 나라 조선에 구원의 빛이 동터 올 때까지는 진리를 갈망 하는 선각자들의 연구와 빛을 찾아 나서는 열성으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은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씨앗이 자라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고 수없는 난관이 있었다. 조선은 당시 양반과 상민의 계급사회였고 주자가례를 실천 철학으로 삼는 시대였으므로 천주교의 새로운 교리는 기존 사회 제도를 위협하는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창립 초기부터 이어지는 박해의 회오리 바람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전 국토를 혈제의 제단이 되게 했다. 그러나 천주를 향한 믿음의 불꽃은 신앙 고백을 통해 곳곳에서 찬란한 빛으로 드러났고, 하느님의 자비는 초기 순교자들의 피로써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섭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 가문에서 태어난 대건의 아명은 재복이었고 세례명은 안드레아였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데레사 성녀는 택현의 딸이요, 대건의 당고모였다. 일찌기 ’내포의 사도’이존창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증조부는 열심한 신앙생활로 신해박해(1791)때 처음 체포되면서 수없이 옥문을 드나들었고 기약 없는 옥 살이 끝에 해미에서 1816년 옥사함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가장인 김진후의 순교로 아들들은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다.

김대건의 조부 택현은 1827년 정해 교난의 박해를 계기로 낯선 타향인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해서 살게 되니 이곳은 비록 험령대산은 아니어도 첩첩산중이어서 그간의 박해를 피해 몰래 이주해 온 교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김 대건의 나이 7세 때였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골배마실로 이주해 온 소년 김대건은 이 때부터 조부 택현의 지도로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김대건의 부친 제준 이냐시오는 열심한 신앙으로 교회 일에 열심 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분이다. 그러나 소년 대건에게 깊은 신심을 키워 준 데에는 모친 고 우르술라의 힘이 컸다. 모범적인 신앙인 가정에서 자란 김대건이 첫 영성체를 한것은 1836년 6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서였다. 1836년1월에 입국한 모방 나 신부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마음을 쓰며 각 방면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결심도 대견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는 부모의 결단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7월에 소년 김대건은 서울로 올라와 최방제와 최양업을 만났으며, 마침내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세 소년도 함께 떠나게 되었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현석문,조신철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인 호송자와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 신학생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경리부 책임자인 리브와 신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이 점령한 이색적인 도시로서 그 당시 서양인의 극동 진출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대건과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은 얼마 후 마카오에서 청국인들에 의한 민란을 겪게 되어 외방전교회 회원들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신학생으로 면학이 계속되었으나 곧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가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고국산천 멀리 이역에서 동학도이자 동포를 잃은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그들은 슬픔과 낙담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일어난 민란으로 근교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면학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때가 1839년 4월이었다. 그해 11월에야 다시 마카오롤 돌아오게 된다. 이해는 조선에서는 기해박해가 벌어져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는 수난의 해였고, 신학생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도 이때 순교했다. 마카오로 귀환한 후 철학 공부에 정진해 1841년에는 철학 과정을 수료하고 신학 과정으로 진급했다. 그들이 전공한 것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철학과 신학이었으나 그것을 익히기 위해 그보다 하부 구조를 이루는 기초교양을 쌓는 서양 학문의 초.중등과정을 거쳐야 했다. 또한 면학 장소가 마카오,마닐라 등 국제 도시여서 학식과 견문이 넓어지고 문화와 교양을 갖춘 이른바 지식인으로 자란 신학생들은 쇄국 조선에서 벗어나 조선인 최초로 해박한 서구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두 신학생이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받고 있던 1840년, 프랑스의 루이 필립 황제는 세 척의 군함을 극동 해역으로 파견해 청국과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군함의 사령관인 세실은 마카오에 기착해 파리외방전교회 지부를 찾아와 유익한 자문을 구하면서 보조자를 청했다. 이리하여 김대건과 조선교구 소속의 메스트로신부는 에리곤호에 최양업과 만주교구의 브뤼니에르 신부는 파보리트호에 올랐다. 서품을 기다리던 두 조선 신학생은 이렇게 귀국길에 오르는 꿈에 부풀었다. 두 군함은 1842년 가을에 양자강 어구에 다다르게 되었으나 때마침 영국과 청국 사이에 남경조약이 맺어지고 전란이 끝나게 되자 신부들과 신학생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돌아가게 되 었다. 김대건의 조선 입국 시도는 이때부터 무수한 장벽과 고난의 길의 연속이었다. 조선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메스트로 신부와 김대건은 거지행세를 하고 입국의 길을 찾았으나 외국인의 입국이 무모한 계획이라 판단되어 김대건만을 보내기로 하고 1842년 12월 23일 두 명의 중국인 교우와 함께 변문으로 향한다. 변문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북경으로 가는 300명 가량의 동지사 일행과 만나게 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조선교회가 보낸 밀사 김 프란치스코였다. 이때 그는 품속에서 앵베르 범 주교가 잡히기 전날까지 기록한 순교행적과 모방,샤스탕 신부의 마지막 편지와 다시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조선 교우들의 탄원서를 대건에게 내어주었다. 7년만에 만난 고국의 교우와 헤어져 홀로 변문으로 들어가 다음날 의주를 향해 길을 떠난 김대건은 중국인 교우에게 김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문서를 메스트로 신부에게 보내주길 부탁하고 130리 길을 하루에 걸어 멀리 의주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수없이 겪고 관문을 통과해 조국땅을 달리던 김대건은 추위에 못이겨 주막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그의 얼굴과 중국신 등을 수상히 여겨 첩자나 도망치는 죄인으로 보고 고발하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체포될 것 같아 김대건은 다시 의주로 발길을 돌렸다. 굳센 김대건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지쳐서 눈 속에 쓰러져 잠들었다. 이때 어디선지 "일어나 걸어라"하는 소리가 들리고,그림자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보였다. 훗날 김대건은 이 일을 천주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3년 1월 6일에는 메스트로 이 신부가 있는 백가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43년 1월 백가점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그곳에 머무르면서 입국길을 트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했다. 훈춘을 거쳐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거기서 서울까지 무사히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이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서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정의 공부를 끝냈으나 만 25세가 되지 않아 신품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부제품을 받게 된 것이다. 1845년 1월 초 의주쪽으로 해서 몰래 김대건 혼자 입국하니, 참으로 10년 만에 대하는 고국산천이었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보고하고 주교를 맞아들여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서울 돌우물골에 작은 짐을 풀고 꼭 만나야 하는 교우들만 접촉하면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열병을 몹시 앓았다. 하느님의 보호로 건강이 회복되자 준비해 온 150냥으로 배 한척을 사서 성직자를 맞을 채비를 했다.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기해박해 때 남편이 순교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유리걸식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어머니를 찾아 뵈올 엄두도 못내니 김대건은 현석문 등 11명의 교우들과 그해 4월에 상해쪽을 향해 배를 띄웠다. 교우들 중에는 배를 타 본 일조차 없던 6명의 농부도 있었다.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 밤낮없이 시달리어 김대건은 끌고가던 종선과 두 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김대건 역시 심하게 배멀리미에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하고 안심을 시켰다. 이렇게 일행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산동 배가 가까이에서 그대로 지나가려는 것을 김대건이 옷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구조를 청해 상해까지 배를 끌고 가 주기로 결정받았다. 김대건 부제 일행이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교는 마카오에 있었다. 반가운 소식을 접한 고 주교는 다블 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로 와서 김대건을 반갑게 만났다. 조선 입국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고 주교는 서둘러 김대건 부제에게 서품식을 올릴 차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쯤 떨어져 있는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열 명도 안되는 조국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건은 페레올 고 주교 집전하에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달 24일 주일에는 만당 소신학교에서 안 다블뤼 신부가 복사 하는 가운데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의 수선탁덕 김대건 신부는 곧 교우들이 수리하고 있는 배로 돌아가서 조선으로 돌아갈 즐거움을 그들과 나누고 있었다. 그해 8월 31일에 고 주교와 안 신부가 남모르게 그 배로 찾아와 고 주교는 길이가 25척이고 폭이 9척이며 깊이가 7척밖에 안되던 그 작은 배에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김대건 신부,안 신부, 조선교우들은 그 밤으로 조선을 향해 바닷길을 떠나게 되었다. 라파엘호는 처음에는 다행히 요동 방면으로 가는 중국 교우의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게 되어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더 이상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물결이 치는 대로 배를 맡기고 있자난 풍파가 차차 가라 않게 되었다. 새로 키와 돛대를 마련해 동쪽으로 뱃머리를 향했다. 라파엘호는 호수천신의 인도를 받아 9월 28일에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되니,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을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리 나바위라는 조그만 교우촌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과 꿈에도 조선입국을 그리워하며 6년을 준비한 고 주교의 기쁨은 어떠했으랴! 이들은 곧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을 틈타 상륙하게 되었으니 1845년 10월 12일이었고, 상해를 떠난 지 42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바위에서 하룻밤을 지낸 김대건 신부는 다음날 서둘러 떠났다. 고 주교와 안 신부는 그곳에 남아서 우리말을 배우며 성무를 집 행하게 되었는데 나바위 교우들은 두 성직자를 맞아 날 듯이 기뻐했다. 천주의 은총으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미사 참례를 날마다 하게 되고 주교와 신부를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는 용기백배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언어와 활동에 제약이 없는 방인 성직자이기에 전국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영신을 위로하고 전교에 힘쓰며 성무에 충실했다. 다시없이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방인 성직자였기에 페레올 주교는 마침내 불고 25세의 청년 사제 김대건 신부를 조선교구 부감목으로 선임했다. 김대건 신부는 먼저 고 주교가 안전하게 있을 곳을 마련해 서울로 오게 하고 자신은 고향으로 내려가 교우들을 돌보고 꿈에도 잊을 수 없던 어머니를 찾았다. 10년 동안 외국을 다니다가 신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는 가슴이 메어지느 듯한 벅찬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리면서 순교하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목숨도 이미 천주께 바친 몸이며 한 어버이의 아들이기 전에 모든 교우의 아버지가 된 책임을 크게 느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아직 입국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메스트로 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본국에서 오는 연락을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다. 고 주교의 밀명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마포 나루를 떠났다. 1846년 4월, 교우 임성룡의 배를 타고 연평도 앞바다를 지나 등산곶에 이르렀다. 마침내 백령도 부근에서 그물을 치고 조기잡이하는 중국어선을 만나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눈치를 보았다.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준비해 간 편지와 지도를 요동반도와 마카오의 연락장소로 전해 주도록 부탁했다. 김대건 신부는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면서 배를 돌려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등산곶 일대를 감시하는 군교들이 중국어선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빌려 달라고 쫓아왔다. 당시의 국법으로 양반 소유물을 정부에서 징발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김대건 신부는 자기 배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여기서 시비가 벌어져 김대건 신부는 폭행을 당하고 옹진 감옥으로 연행돼 갔다. 1846년 음력 5월 12일 밤의 일이었다. 최양업 부제와 이 메스트로 신부 영입을 위해 위험으 무릅쓰고 연평도 조기잡이 배에 접근해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기뻐하던 김대건 신부는 체포됐다. 순위도의 부산진으로 연행된 김대건 신부는 옹진, 해주 감옥을 거쳐 마침내 서울로 압송되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교를 위해 해외로 파견된 샌학생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갖춘 깊은 학식과 해박한 세계 지식은 박해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박해자들의 요청으로 예쁘게 채색한 영어로 된 두 장의 세계 지도를 그려 올렸다.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여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은 학식과 견문은 놀라운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신분과 경력, 그리고 학식이 유별남에 놀란 정부당국은 40여 차례나 심문했고 국왕을 모신 어전회의를 열어 거듭 논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때 8월 9일 프랑스 함대가 홍주 앞바다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나 시부, 샤스탕 신부의 문제를 가지고 문책 소동을 벌이며 국교를 열 것을 요구해 왔다. 일찍이 청국에서의 아편전쟁 소식을 통하여 서구 식민주의 국가 의 침략행위를 알고 있던 조선정부는 당황해 하며 김대건을 활용할 방도를 강구하려 했다. 그를 프랑스 함대에 보내 전날 세 선교사를 죽이게 된 것에 대한 해명과 함께 앞으로의 화의를 제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건도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며 8월 10일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조정은 다시 강경한 쇄국정치를 주장하면서 김대건 새신부를 통외(通外)의 위험분자로 몰아서 마침내 최후의 단안을 내려 군문 효수형을 내린다.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수선탁덕 김 대건은 한강물 굽이쳐 흐르는 서울 성밖 새남터에서 휘광이가 내려치는 칼날 아래 참수치명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굽힐 줄 모르는 김대건 신부는 처형을 받기에 앞서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한 것이니 내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라고 믿음과 신념에 찬 말을 외치고 의연하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비록 서품을 받은 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성무집행을 했으나 그의 생은 참으로 굵직한 삶이었다. 동북 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그의 활동과 국위 구령과 개화를 위해 헌신한 참 삶의 실천은 종교적으로 한국인 성직자 특유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잃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젊은 조선인 신부를 잃은 것은 조선교회에 거의 갚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나는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오직 그의 천국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서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스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제 성직에 오른 분으로 그것도 오늘까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놀란 만한 웅변의 사람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접촉한 교우는 곧 존경과 사랑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러한 영광된 순교는 조선교회의 영원불멸할 명예이며 완전한 승리와 불멸의 약속의 보증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지 11년 후인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 칭호를 받게 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북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를 받들게 되고, 7월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김대건 사제 순교자를 그 첫 자리에 올렸다.

성 김대건신부님의 옥중서간 전문

(1846년 8월 29일 신자들에게 하직 인사 편지로 추정)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님자를 아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영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영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영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영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대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 오,육십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 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야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이십 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야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야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여

사랑을 친구하노라.

부감 김 안드레아

<추신>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이오, 막비주상주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바니 너희 감수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야 너희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러 말고 큰 사랑을 일워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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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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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결한 영혼

詩는 또다른 그의 祈禱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민들레의 영토 - 이해인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聖스러운 깃발

太初부터 나의 領土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眞珠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原色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이해인(본명: 이명숙, 1945.6.7. ~ )은수녀이자 시인.


1945년 6월 7일에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버지가 납북 되었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때는 부산성남초등학교에 다녔고,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창경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에 이해인의 언니가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수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58년에는 풍문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무렵에 시 〈들국화〉가 쓰여졌다. 이후 1961년에는 성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1964년에 올리베타노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세례명은 클라우디아이다. 입회한 이후부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가톨릭에서 발간하는 《소년》지에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 수도자로 살 것을 서원한 후,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경리과 보조 일을 하였다.

이후 필리핀에 있는 성 루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하였다. 귀국한 후 1976년에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을 발간하였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타 종교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으며, 〈시경에 나타난 福 사상 연구〉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1983년 가을에는 세 번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를 발간하였다.

1992년에 수녀회 총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비서직이 끝난 1997년에 '해인글방'을 열어두고 문서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가톨릭대학교의 교수로 지산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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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베들레헴의 별
   
Ave verum corpus
   
예수의 탄생
요한과 제자들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
오병이어 를 바친 아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지붕을 뚫고 내려진 병자를 고치심
탈리다쿰
돌아온 탕자
혈루증 여인
죄인들의 친구 예수님
많은 병자를 고치심
회당에서 가르치심
질문하는 율법학자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
따님이 죽었습니다
성전을 깨끗이 하심
예수를 찾아온 부자 청년
예수께 들려온 사람들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
나를 따르라
열두 제자를 택하심
밀밭 사이로 걸어 가는 예수님의 일행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마지막 만찬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
베드로의 부인
베드로의 눈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를 조롱하는 로마 군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다
골고다에 선 세 십자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
무덤에서 선 천사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디베랴 바닷가에 서신 부활하신 예수님
엠마오로 가는 길
승천하시는 예수님
오순절 성령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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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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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그 자리에 선 '야곱의 우물 성당'


성당 안에 있는 두레박과 감겨있는 줄


긴 세월에 닳고닳은 야곱의 우물

<요한복음 4,5-42>

그때에

5.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 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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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오지 수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가 남긴 마지막 선물…
위대한 사랑의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한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종족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 다해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의 인생이 이제 온 세상을 울린다!


[ INTRO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 About Movie ]

남부 수단의 절망의 황무지, 톤즈를 아시나요?
아프리카 오지 톤즈의 희망 故 이태석 신부를 만나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인 수단은 1956년 독립 직후부터 집권층인 소수의 아랍계와 피지배층인 다수의 원주민 사이의 끝없는 내전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져 있는 상태다. 80년대 남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후 이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은 더 격화되었다. 특히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부 수단은 절망의 황무지라 불리 울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어린 소년들은 소년병이란 명목하에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으며, 느닷없이 시작되는 전쟁의 불안감과 더욱 심해지는 폭력성으로 인해 국민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한 악성 말라리아와 콜레라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강한 햇빛과 습기 많은 우기를 가진 자연환경과 질 낮은 위생 상태, 기본적인 먹거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게 퍼진 전염병은 전쟁 만큼이나 톤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오지 여행가이자 국제 구호전문가인 한비야씨도 근래에 가본 곳 중 남부 수단의 상태가 가장 최악이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톤즈. 그 지옥 같은 곳에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남부 수단을 자원해 부임한 이태석 신부. 그는 인제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까지 마친 의사였으나,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고, 신부가 되자마자 톤즈로 향했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그는 희망이라 기억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지난 1월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톤즈는 지금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이태석 신부와 그가 남긴 사랑과 나눔의 의미를 찾아 우리는 다시 톤즈를 찾았다.


잠들지 않는 톤즈의 병원, 그 곳의 유일한 의사 이태석 신부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그의 투혼이 살려낸 소중한 생명들!

의사로서의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이태석 신부의 몸과 마음은 아프리카의 가장 척박한 땅, 톤즈로 향했다. ‘내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라고 그는 이야기 했지만 실로 그가 톤즈에서 일궈낸 성과는 대단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운 이태석 신부는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땅 톤즈로 향하게 된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독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닌 톤즈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님의 거대한 사랑 안에서 실감하며, 내전과 전염병으로 병든 톤즈에 병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병원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톤즈 사람들은 며칠 밤을 새며 걸어와 치료를 받았고, 그런 환자들을 돌려 보낼 수 없었던 신부님은 잠을 줄여가면서 환자를 맞았다.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치료를 하는 신부님의 투혼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병원은 나날이 많은 환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가 직접 환자를 찾아가 접종을 해주었다. 백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없는 톤즈의 건물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하여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환자들의 아픔을 좀 더 잘 듣기 위해 그들의 말인 딩카어도 열심히 배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꾸려가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진료는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계속되었다. 병과 싸울 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노력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학교를 꿈꾸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난이 대물림 되고 있는 톤즈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기 위해 그는 예수님의 사랑이 깃든 학교를 만들기로 한다. 병원과 마찬가지로 톤즈 사람들과 함께 만든 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한 교정에 있는 톤즈의 유일한 학교로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직접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케냐에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을 선발해 데려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톤즈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12년 과정)는 남부 수단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통 다른 학교들은 오전에 간단한 수업을 하고 선생님이 없을 경우 수업을 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오후 12시면 모든 과정이 끝나는데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는 항상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의 수업은 3시까지 알찬 수업으로 짜여져 있어 많은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학교가 되었다. 수업의 열기 또한 대단하여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의 경우 한 교실에서 120명의 학생이 비좁게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학교 근처에는 기숙사도 만들어서 집이 먼 아이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꿈이 담긴 학교에서 드디어 자신들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
한센인의 아픔을 함께 하다!

이태석 신부의 형인 이태영 신부는 그가 의사의 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다미안 신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당에서 상영해준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하와이 근처 ‘몰로카’ 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8세에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이태석 신부는 어린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고 톤즈의 한센인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몸을 어루만졌다. 톤즈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한센인 마을은 그가 찾기 전까지 초가집에 지하수조차 없던 곳이었다. 그는 그 곳에 벽돌 집을 짓고 지하수를 끌어올린 펌프 시설을 만들었다. 그는 톤즈에서 단 하나뿐인 앰뷸런스를 타고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차 소리가 나면 나무막대기를 집고 걷는 손과 다리가 성하지 않은 어른과 아이들이 몰려 나온다. 이태석 신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직접 고름을 짜내고 붕대를 감아주며 발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위해 직접 만든 신발을 신겼다. 처음으로 한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느낀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사랑 그 자체였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지금, 그들은 그의 사진을 보자마자 너나 할것 없이 사진에 입을 맞추며 애통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들을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준 그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은 안타까운 절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를 ‘영원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브라스 밴드가 만들어낸 희망의 기적!

톤즈에서 내전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그 곳의 아침은 군대의 구호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마음이 음악으로 치유될 수 있길 바랬던 이태석 신부는 그가 오래도록 꿈꾸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바로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악기를 자신이 먼저 스스로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악보를 만들고 한국 살레시오에서 보내준 단복을 입혔다. 총 대신 악기를 든 톤즈의 아이들은 곧 남부 수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는 정부 행사에도 초청 받았다. 남부 수단 대통령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연주를 선보인 브라스 밴드는 정부 공무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아이들은 지금도 새벽이면 모여서 연습을 한다. 이태석 신부가 만들어준 악보를 보고 선배들이 후배를 가르치며 밴드를 꾸려 가고 있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브라스 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 Director’s note ]

울지마 톤즈가 만들어 지기까지,
이태석 신부가 남긴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올해 1월 우연히 이태석 신부의 선종 소식을 접하고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신부의 길을 택한 그의 삶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아프리카 톤즈를 찾아간 이유 또한 궁금했다. <울지마 톤즈>는 그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마흔 여섯의 길지 않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알아가는 여정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신부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 어렵게 키운 아들이 의대에 진학했을 때의 기쁨과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겪었던 갈등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태석 신부의 누나와 형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낸 어머니는 의지했던 아들의 선택을 쉽사리 지지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며 먼저 떠나보낸 아들 이야기에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 만나게 된 이태석 신부의 지인들 또한 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취재를 끝낸 순간 모두 이태석 신부에게 깊게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톤즈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부족간의 전쟁이 시작된 남부 수단의 치안 상황으로 인해 바로 떠날 수 없었다. 우선 수단 어린이 장학회를 통해 건네 받은 40여개의 6mm 테잎을 전달 받아 현지에서 촬영할 내용들을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깊은 슬픔에 빠진 톤즈와의 만남
수단에 도착해서는 아강그리아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던 한만준, 이승준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두 분 모두 이태석 신부의 영향으로 아프리카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만나 취재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은 찰나, 톤즈로 가는 길목에서 총격전이 시작되어 길목이 차단되었다. 결국 수단 남쪽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이용해 비행기를 2번이나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4시간 가량 달려 겨우 톤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기도 없고, 공동 펌프가 만들어내는 식수를 사용하는 톤즈의 사정은 굉장히 열악해 보였으나 그래도 지금은 많이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신부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돈보스코에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신부님이 없는 병원을 여전히 찾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의사도 없는 병원을 왜 찾는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산을 도와 직접 아이를 받아준 신부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며 몇 시간 동안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2010년의 톤즈는 온통 깊은 슬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 Beautiful people ]

사랑이라 불리운 사람,
이태석 신부를 기억하다.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갔고, 그는 집안일을 도우며 어머니를 기다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집 근처의 성당은 어린 그에게는 좋은 놀이터였다. 그에게 사제의 꿈을 가지게 한 ‘다미안 신부’의 영화를 본 곳도 성당이었다. 또한 성당에서 그는 또 다른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풍금을 독학으로 배웠고, 작곡도 했다. 중 3때는 이미 성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음악과 신앙에 대한 믿음은 가난한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반듯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실한 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의대에 합격했다. 군의관 시절, 그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기로 다짐하게 되고, 이미 형제 중 한 명이 사제, 또 한 명은 수녀가 된 상황에서 자신 또한 사제가 되겠노라 어머니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그의 굳건한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허락하게 되고, 그는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살레시오회 수도 사제이자 의사로서 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온통 톤즈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흔 여덟의 불꽃 같았던 삶은 2010년 1월14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가며 끝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 이태석 신부 인터뷰 中

















Yo-Yo Ma, Cello / Ennio Morricone, 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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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도다


요한복음 1, 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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