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성당>


<중국은관에서 발부하는'종교활동장소등록증'을 게시해야 하고, 사진처럼 정부 종교국의 표창패도 있다>

나의 신앙의 길 9. 내 하늘가의 마지막 정토는 어디에?

- 전 사베리아

북경에는 북경교구천주교 신문인 ≪천광(天光)≫보가 있다. 8월 15일 신문에 ≪애국회는 하느님이 중국신도들에게 베푼 귀중한 선물≫이라는 문장을 실어 중국천주교애국회의 성립 60돐을 기념하였다. 나는 이전에 연길에 있을 때도 연길성당 대문에 “천주교애국회”(내 기억으로는)라고 적혀있어서 중국의 모든 성당들은 반드시 “애국회”라는 단어를 적어넣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모든 천주교가 전부 애국회의 소속인줄 알았다.

그런데 성당에 자주 나가면서 나는 교우들의 입을 통해 그 무슨 “지하종교”요 “지상종교”요 하는 단어들을 듣게 되었다. “지상종교”라면 당연히 합법적인 “애국회”소속을 가리킬 것이고 그렇다면 천주교에 불법적인 “지하종교”가 있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지하종교”라면 正道를 걷고 있는 종교에 비해 사이비한 종교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이 가리키는 “지하종교”가 천주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종교라는 말인가? 합법과 불법의 차이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나의 머리에는 많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합법과 불법이란 단어의 적용이 종이장을 뒤엎듯 바뀔 수도 있음을 보아냈다. 애국회를 가지고 있는 성당은 “지상종교”로서 중국의 종교법으로 볼 때 합법적인 종교일 것이지만 주교를 자체로 축성하는 중국의 “지상종교”가 바티칸에서 볼 때에는 불법일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지하종교”라고 일컸는 그 단체가 중국에서는 불법이지만 바티칸에서는 합법일수도 있다는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내가 믿는 순수한 신앙에 정치가 비치일 때 이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8.15”광복 후 동북에는 소련홍군이 들어왔었다. 공산당군대가 미처 동북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소련홍군은 장개석과 손을 잡고 동북에 들어왔었다. 공산당군대의 동북진출을 막으려는 장개석의 부탁을 들어줬던 것이다. 따라서 소련은 중국 동북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많이 실망했었다. 소련은 첫 사회주의 국가이고 중국공산당에 많은 도움을 줬던 형제였다. 그런데 파쑈를 물리치고나니 애당초 형제의 우애는 간데온데없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장개석의 소원들 들어줬던 것이다. 물론 2차세계대전 때의 양국 공산당의 관계를 봐서 적지 않은 소련홍군들이 장개석의 눈을 피해 공산당의 동북진출에 길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 배신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는 참으로 이 세상의 이념이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같은 공산주의를 신봉한다하더라고 관건적인 시각에는 형제고 뭐고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려하는 그런 모습에서 역시 당파는 절대적이 못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천광≫보에서 나는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의 사촉하에 동북에 위만주국이 세웠졌다. 모두들 승인하지 않는 이 괴뢰정부를 바티칸에서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개국식에 대표까지 파견했다고 씌여져있었다. 그리고 1937년 7월 7일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이 시작될 때 교황청에서는 중국 신도들에게 지령을 보내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에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한결같이 반대해 나섰다. 로마교황청에서는 당시 왜서 그런 선택을 했을가? 무슨 이유였을가? 나는 신문에 실은 이 내용들이 “천주교애국회”의 합리화를 위해 꾸며낸 중국의 억지는 아니라고 본다. 중국에는 애국통일전선이라는 것이 있다.이는 일본이 무조건적 투항을 선포한 후 제기된 구호인데 최초의 원칙은 중국공산당을 옹호하든 옹호하지 않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면 모두 이 통일전선의 일원으로 될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많은 당파와 민주인사들을 단결하여 승리를 이룩해내는데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오늘의 애국통일전선은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인바 천주교의 애국회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천주교 애국회의 취지는 아래와 같다. “전국의 성직자들과 신도들은 단결하여 애국주의 정신을 발양하며 국가의 정책과 법률을 지키고 조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며 국제 천주교인사들의 우호적인 왕래를 추진하고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반대하며 세계평화를 수호할 뿐만 아니라 정부를 협조하여 종교신앙자유정책을 관철한다.(团结全国神长教友,发扬爱国主义精神,遵守国家政策法令,积极参加祖国社会主义现代化建设,促进国际天主教人士的友好往来,反对帝国主义、霸权主义,保卫世界和平,并协助政府贯彻宗教信仰自由政策。)”이는 긍정적이고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뭐나 도를 넘으면 애초의 성격이 변하기 마련이다. 그처럼 신성한 종교도 세속의 정치와 얽히었을 때 판단이 흐려지는바 이는 같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나라라 할지라도 서로의 이익관계에 있어서는 배신할 수도 있는 세속의 이념과 다를 바 없다. 현재 중국의 천주교애국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당초 애국통일전선의 민주주의 정신은 점점 색이 바래지고 당과 정부의 영도만 강조하다보니 애국회는 현재 정부에서 종교단체를 공제하려는 기구로만 존재하고 있다. 물론 건국초기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고 안정시키는데 “애국회”는 적극적인 기여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신앙과 애국을 분별하지 못할만큼 신도들이 어리석지 않다.

중국의 종교문제에 대해 중국사회과학원의 류팽(刘澎),임연려(任延黎) 등 많은 학자들은 종교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간섭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정부가 교회를 운영하지 말며 교회가 자체로 움직이게 하여야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 사이 정부의 지나친 관여로 하여 종교내부에 관료주의가 형성되었으며 오히려 “지하종교”가 점점 활성화되고 “지상종교”의 힘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종교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학계의 논거이다. “정부와 종교”문제에서 중국은 1950년대의 소련을 본받아 “국가가 종교를 공제하는 모식”을 도입하였다. 이는 정교합일이나 정교분리가 아니라 “관리와 피관리”의 모식이다. 의법치국가로 나가려는 현시점에 종교법을 보다 완벽화 하여 정부의 관여가 아니라 법에 의해 운영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요즘 학자들의 목소리이다. 법이 보다 완벽화 된다면 같은 종교문제를 가지고 지방 종교국마다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짓는 혼란은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목소리들이 있는 한 나는 중국의 종교환경이 나아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중국에서 주교를 자체로 축성하는데 대해 옳다 그르다 판달 할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에 일부 주교들이 외세의 영향으로 중국에 불리한 일들을 했기 때문에 오늘의 현황을 빚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홍콩의 진일군(陈日君)추기경은 중국에서 자체로 축성한 주교들 중 적지 않은 주교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교황청에 용서를 구함과 동시에 승인해줄 것을 신청했으며 교황청도 조사를 거친 후 너그러운 태도로 그들을 승인해줬다고 했다. 올해 5월 1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베드로광장에서 열린 공개모임에서 중국교회와 중국의 신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세계 여러 신도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처럼 복잡한 정치종교문제를 생각하기에 나란 존재는너무나도 보잘것없다. 나는 다만 중국의 종교환경이 보다 과학적이고 보다 나아질 것을 바랄뿐이며 중국의 성직자들이 하늘을 우러러 보다 양심적으로 목회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며 바티칸 교황청이 보다 성스럽기를 바랄뿐이다.

주위의 신도들은 불법적인 성직자가 집전하는 활동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면서 참가하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누구를 위한 “불법”인가. 나라에서 지명한 “불법”성직자의 명단을 평신도는 일일이 알 수 없다. 교황청에서 지정한 “불법”성직자의 명단은 더구나 알 수 없다.

나는 갑자기 내가 참여하는 이 미사가 “합법”인지 “불법”인지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앞의 문장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분에 대한 내 사랑과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까.

내 하늘가의 마지막 정토, 나는 이 절대의 진리를 “말씀”에서 찾으련다.(201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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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북당 성당,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장 드 퐁타네 신부가 1703년에 건축. 한국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곳>

나의 신앙의 길 8. 예수님이 제3자라구?!

- 전 사베리아

북경 北堂에 류철(刘哲)신부님이 계시는데 이 신부님은 종교윤리학 특히 혼인윤리에 대해 전공하신분이다. 이 신부님의 작품에는 ≪결혼, 당신은 준비되었나요?(结婚,你准备好了吗?)≫ 등이 있다. 류철신부님은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윤리에 대한 특강을 하시는데 얼마나 강의를 멋지게 하시는지 전국에 팬이 널렸다고 한다. 지어 어떤 팬은 류철신부님의 사진을 지갑에 넣고다닐 지경이다.

가끔 남당에 오셔서 토요일 저녁 북경시청년들의 미사를 집전하시기에 나도 한번 강론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신부님의 결혼강좌에 대한 DVD를 본적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언급되어있었다.

하루는 어떤 처녀애가 신부님을 찾아와서 남자친구가 연인관계를 그만두자고 한다면서 고민을 털어놨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천주교를 믿지 않는 그 남자친구가 예수님이 제3자로 자신들의 혼인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처녀애는 독실한 천주교 신도였는데 어찌나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그 남자친구한테 그렇게 보였을가?

예수님이 제3자라구? 당시 그 강좌를 듣던 많은 사람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류철신부님은 그 처녀애한테 성당에 나오는 차수를 좀 줄이면서 남자친구를 많이 동무해주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를 좀 더 관심해주고 사랑해주면서 그 남자친구가 예수님은 제3자가 아니라 두 사람의 혼인을 행복하게 지켜주는 분임을 알게 하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회문화적으로 종교가 얼마나 낯설었으면 이렇게 예수님이 제3자로 군림하는 현상이 나타날가?

얼마 전에 한 신도를 알게 되였는데 신앙생활에 너무나 충실했던 그 신도는 주말을 자원봉사에 바치다보니 종교를 믿지 않는 남자친구와 데이트 할 사이마저 없어서 끝내 헤어졌다고 한다. 나는 그 신도한테 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 신도는 자원봉사가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닌데 너무나 거기에 집착했기에 남자친구를 잃게 되었다면서 좀 더 신중할걸 그랬다고 했다.

서로 신앙의 차이로 헤어진다면 다른 문제이지만 이미 천주교신도라는 것을 알고 사귀였는데 여자친구의 열광에 가까운 신앙생활이 남자친구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끼게 하였다면 그때는 신앙 즉 예수님이 제3자로 군림하는 것이다. 물론 남자친구와 헤어질 정도로 신앙에 충실했다는 증명으로도 되겠지만 이러한 결과가 진정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일가?

예수님이 제3자로 군림한다면 종교문화가 보편화된 외국에서는 이해 못할 일로서 어처구니없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너무나 이해가 갔다. 왜냐하면 결혼 전 나도 바로 그런 선택의 갈림길에 섰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두고 나는 서로 속이는 것이 없어야 되겠다싶어서 남편(당시의 남자친구)한테 세례를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한창 아무 말이 없던 남편은 굳은 표정으로 예수님과 자신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졸업 때까지 친구로 지내왔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무서운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남편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처음에 기독교 교회당에 몇 번 다닐 때 친구였던 그도 함께 갔었는데 나처럼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후에 나는 천주교에 나갔지만 두 종교의 차이를 똑똑히 알지 못했던 남편은 종교신앙문제에서 나한테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수녀로 되고싶다고한적이 있다. 이것이 남편한테는 결정적인 상처였다. 그때 말이 동창생이고 친구이지 한창 나한테 공력을 들이고 있던 남편이었던지라 수녀가 되고 싶다는 나의 생각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정말 수녀가 되고 싶었었다. 그때는 믿음이 굳건하지 않을 때였는데 그저 무작정 수녀로 되는 꿈을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종교를 알기 퍽 이전에 나는 점을 본적이 있다. 그때 점괘에 의하면 내가 전생에 스님이었다고 한다. 깨달음이 부족하여 열반의 경지에 못 올라 윤회에 떨어진 불쌍한 영혼. 그 기운이 있어서인지 나는 20대에 수녀로 되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수도자라면 신부님이건, 수녀님이건, 스님이건, 비구니건, 도사(중국의 도교 사제)건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부름 받지 못했거니와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따로 있었기에 나는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던 남편인지라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말에 그처럼 놀라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했던 것이다. 남편한테 나의 신앙은 곧바로 수도자의 길로 비쳤으니까. 지금도 내가 종교에 대해 말하면 남편은 나를 잃는 줄 안다. 두 사람의 신앙의 차이를 떠나서 나의 끈질긴 신앙이 자신을 밀어낼가 저어하는 눈치다.

나는 그때 속으로 신앙은 마음에 간직하기만 하면 나중에라도 계속 믿을 수 있지만 이 남자를 놓치면 내 인생이 참 힘들겠다 싶어서 일단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결혼을 했다. 당시 만일 내가 류철신부님과 같은 신부님한테 이런 상황을 이야기했었다면 아마 그 신부님도 류철신부님과 비슷한 조언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남편 몰래,직장 몰래일년에 한번정도라도 성당에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아무리 안된다고 도망을 쳐도 가끔 내 발길은 성당으로 향했다. 나는 그냥 성당 구석진 곳에 조용히 앉아 미사에 참여했고 미사가 끝나면 도망가듯 성당을 나오군 했었다.

그러나 성당에 다녀온 날이면 나는 말이 적어졌고 웃음도 사라졌다. 미사에 참여했으면 응당 홀가분하고 기뻐야 할텐데 그때마다 나는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이럴 때면 남편은 내가 그 무슨 딴생각을 하기에 나의 속을 알 수 없다면서 불평을 터놓군 하였다.

나는 지금 몇 달째 정말로 신나게 성당에 다니고 있다. 남편이 반년째 출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귀국날자가 곧 다가오는데 이제 귀국하면 나는 또 전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성당에 나가야 하는 것일가?

나는 얼마전부터 귀국하기 전에 남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려고 메신저로 인생관에 대한 대화를 나누군 했다.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가치관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 이때 남편은 진리를 견지하면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내 인생관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다만 나는 그 진리요 섭리요 양심이요 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표현 할 뿐인데 우리 둘의 인생관이 다를게 뭐가 있냐고 했다. 그리고 우리 둘이 즐겁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 것을 예수님도 바라는 것이니 이제 귀국하면 우리 전보다 더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지 않겠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이미 당신과 전보다 더 잘 살아볼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도 전했고. 그리고 당신이 나의 신앙을 막으니까 나는 몰래 성당에 가게 되고 그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외로웠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약간 격렬한 대화도 오갔지만 도를 넘는다싶으면 나는 화제를 바꾸면서 조심조심 종교에 대한 설명을 하군 하였다. 종교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싫어하던 남편이 지금은 천주교와 서방문화에 대해 아는대로 설명해보라고까지 한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과는 눈치껏 성당에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사이 나는 남편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신앙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전하느라고 참으로 많은 공력을 들였다. 전보다 더 남편한테 아첨(?)했고 남편이 부탁하는 원고심부름을 어김없이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견진성사를 받은 사실은 말할 수 없다. 견진성사가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남편의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싶지 않아서이다. 나는 지금 나의 혼인에 전보다 더 충성하는것이 내 신앙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혼인과 신앙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그런 모순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둘 다 완벽하게 얻고자 한다. 나는 신앙인다운 나의 행동으로 나의 신앙이 올바른 선택임을 남편한테 보여줘야 한다.

신앙에 대한 세계관적인 차이를 떠나 아직도 예수님(신앙)이 제3자로 군림하는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복음전파의 길은 참으로 멀고도 멀다.

(201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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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아기예수님의 탄생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다제자들을 부르시다5000인을 먹이시다물위를 걷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여인 예수님의 발을 씻음 최후의 만찬

 게세마니 동산의 기도 재판 받다 십자가를 지심 십자가에 못박힘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부활승천 

<운보 김기창 -예수 생애 연작>

[로마 8,35.37-39]


형제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대영광송 /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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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동당 천주당>


<동당 성당의 야경, 성당은 북경 최고의 보행자 거리인 왕푸징에 있다>


나의 신앙의 길 7. 두 사람이 모이니 예수님이 계시더이다

- 전 사베리아

나는 평신도들과 거의 사귀지 않았다. 그만큼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는 얘기도 되고 그만큼 소문이 날가 두려웠다는 말도 된다. 나는 신앙 안에서 신부님 몇 분과 수녀님 몇 분만 알고 있을 정도로 꽁꽁 숨었다.

헌데 나는 오늘 북경 東堂에 가서 조선족 신도 한명을 만났다. 갓 30에 나는 젊은 여자애였는데 동북사범대학 영문학과 졸업생으로서 東堂영문미사의 영문성가대였다. 이 카페에 글을 실은 것이 내가 평신도들과 사귀기로 마음을 연 첫 행보라면 이 젊은 친구를 만난 것이 두 번째 행보이다.

오늘 이 두 번째 행보는 참으로 거룩한 행보였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그것을 체험했다.

사실 南堂 신부님의 제의가 아니더라도 나는 은근히 북경에 조선족 천주교 신도들이 없나 살피고 있었다.

북경에서의 조선족 신도들은 참으로 외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분명 우리말 미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집전하는 미사라 우리는 참가할 수 없다. 농담절반 말하면 우리말 미사 참가권을 박탈당한 셈이다. 한국어에 능통한 중국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라면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 및 한국어를 사랑하는 중국 학생들도 참가할 수 있겠지만 외국인종교활동등록을 내고 외국인이 집전하는 미사에는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혹 조선족이 한국인들의 미사에 참가하더라도 나가라고 하지는 않지만 법이 그렇게 된 이상 우리는 한국인들의 미사에 폐를 끼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중국인들은 이 법을 잘 모른다. 북경에 갓 온 조선족들이 성당을 찾아가면 그들은 하나같이 동교민항의 한국인미사를 소개해준다. 그래서 한국인미사 시간에 동교민항성당에 가면 중국인이라서 불편함이 한 두 가지 아니다. 우선 정상적인 교리학습을 받을 수 없고 세례를 받을 수 없으며 간혹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 해도 교적에 들어갈 수 없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북경한인천주교공동체의 수녀님들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으며 조선족들의 처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족들은 중국어미사에 참가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자식을 따라 북경에 온 늙은이들은 한어를 몰라 고해성사도 못 볼 지경이란다.

이래저래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동병상련이라고 끼리끼리 모이기를 원하기 마련다. 南堂신부님도 이를 아셨기에 나한테 북경시조선족신도들을 모아주려고 건의했나 보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북경에 모여온 교우들을 지역별로 민족별로 소모임을 만들어주려고 하셨나 보다. 북경에서 중국인들은 교적관리를 하지 않으며 교무금도 내지 않는다. 아무 성당이나 옮겨가면서 편리 할대로 미사에 참가할 수 있고 영문미사, 프랑스어미사 아무 미사나 참가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중국어 미사에도 외국인들이 많이 온다. 때문에 조선족들한테 한국인들의 한국어 미사시간을 소개해줬던 것이다. 이처럼 교적관리를 엄격히 하지 않기에 작은 소모임을 조직하여 상대적인 인원수를 장악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북경의 현실이고 북경에서의 조선족신도들의 실황이다. 신앙에는 국경이 없지만 신앙인에게는 나라가 있었다. 중국공민으로서의 우리는 우선 이 나라의 법을 지켜야 했으며 또 그러는 것이 한국인들의 미사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는 북경의 조선족천주교신도들은 흩어져서 신도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믿는 둥 마는 둥 한해한해 보내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조선족들의 활발한 활동에 비하면 북경에서 조선족 천주교신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내가 외로웠던 만큼 누군가도 외로울 것이라 생각되어 조선족 신도를 찾기 시작했다. 연길성당의 리.데오도라수녀님의 소개로 오늘 나는 베르니까를 만났는데 그도 나와 똑같은 외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도 북경에 조선족신도들의 모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우리 둘은 비록 나이 차이가 났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둘이 마주 앉아 하는 첫마디가 이구동성으로 “지금 여기에 예수님도 계십니다.”였다.

내가 “우리 작은 모임하나 조직하면 좋지 않을가?”라고 허두를 떼니 베르니까는 너무도 좋아서 어린애처럼 흥분했다. 나는 그를 만날 때까지도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베르니까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무척 기뻤다. 전에 내가 혼자 북경에 조선족천주교신자들의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모든 것이 막막함 뿐이었는데 베르니까와 앉아 이리저리 이야기 하고보니 하나하나 방향이 잡혔다.

우리는 우선 명칭을 뭐라고 부를가 토론했다. “북경시조선족천주교교우회”라는 명칭보다 좀 더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은 세련된 이름을 달자고 해서 우리는 잠시 “하비에르회”로 이름 짓기로 하였다. 선교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꼬 하비에르(사베리오)”가 북경 주교성당에서 동상을 세울 만큼 중요시 하는 성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도 점차 성인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의 모임을 넓혀가자는 의지이기도 했다. 또 내 주보성인이라 작은 욕심을 부린 것도 있고.

우리는 북경의 조선족천주교신자들을 모으기로 했으며 동시에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다. 우리 둘은 웃으면서 공산당소조의 모식을 따라배우는 것이 어떠냐고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 참으로 생각이 비슷해서 좋았다. 우리는 공산당소조의 활동모식을 따라배워 세 사람 모여지면 정기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20명이 모여지면 정식으로 출범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물론 南堂이 지도적 지위에 있는지라 정식으로 출범 할 때는 南堂에서 신부님의 지도와 보호 하에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마음이 정화 될 수 있도록 성경공부도 하고 신부님을 모셔 특강도 조직하기로 하였다. 물론 장소는 사람이 적을 때는 베르니까의 집에서 시작하기로 했고 가끔 야외에서 산보삼아 조직 할 수도 있으며 사람이 많게 되면 東堂, 南堂, 北堂 윤번으로 성당의 도움도 받기로 했다. 우리는 주일마다 각각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 나가지만 한, 두 달에 한번정도 만나기로 약속했다. 영어전공인 베르니까는 만날 때마다 영어성가를 배워주기로 했고.

그리고 우리는조용히 천천히 차분히밀고나가기로 했다. 성급하면 극우를 범하거나 극좌를 범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실을 다지면서 천천히 밀고나가기로 했다. 뿐만아니라 여러 모임들의 활동을 참고하면서 보다 주밀한 계획을 세우며 조직하기로 했다.

둘이 앉아 생각을 모으니 용기도 더 낫을 뿐만 아니라 방법도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회칙을 정하고 회비를 정하고 하는 것은 먼 후일의 일이지만 우리는 오늘 두 사람이 모였다는 것만으로 “거족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 같았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할가.

오늘 우리는 고작 둘이 만났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시작할 뿐이다. 모든 것이 생각뿐이고 엉성하다. 하지만 둘이 만난 자체가 오늘 의미가 컸으며 밀알이 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만남에 예수님이 시종 함께 하고 있었음을 절실히 느꼈다는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우리는 서로 우리를 필요로 할 때가 되어서 우리 둘이 모이게 된 것일지 모른다며 감사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나는 속으로 우리들이 일정한 정도로 모일 때까지만 내가 조직해주고 그 다음은 뒤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적극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그릇의 크기를 잘 안다.너무 부족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너무 제한되어있다. 나는 내가 좀 더 지혜롭게 현실을 헤쳐갈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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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주교좌 성당 남당성당, 초대 주교가 마테오 리치 신부>

<성당 내부와 제대>


나의 신앙의 길 6.후회 없는 견진성사

- 전 사베리아

유아세례를 제외하고 세례 받은 사람이 잇달아 견진성사를 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나는 그 견진성사를 받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이젠 옛말, 요즘은 5년이면 강산이 한번씩 변한다. 그렇다고 볼 때 이 사이 강산이 세 번은 변했음 즉하다.

나는 퇴직한 다음 견진성사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올해 6월 12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나는 견진성사를 받고 말았다.

사실 세례받기 전에 나는 입당신청서를 쓴 적이 있다. 당시 학생당원을 많이 발전시키는 조류가 일었고 학생들 속에서 입당신청서를 쓰는 붐이 일었다. 당규약을 학습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또 모범당원인 부모님들을 봤을 때 나는 공산당조직이 참으로 내가 선호할만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실망시킨 것은 당시 사회상의 부패현상보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신청서를 쓴다는 주위 친구들의 입당동기였다. 졸업분배 때 당원이라면 좋은 일자리에 추천받게 되고 따라서 인생의 통로가 활짝 열리게 된다.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자”는 구호는 선서할 때 맹세뿐이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입당 신청서를 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당동기로 그들이 입당한다고 하면 나중에 그들이 40, 50대가 되어 사회의 중견으로 나설 때 이 사회에 이기주의가 극대화 되지 않겠는가. 학생 때의 어린 생각이긴 하나 나는 이런 고민에 빠졌으며 그들과 한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하긴 당시 대학원생들의 학회에서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오는 거센 억압에도”하면서 ≪동지가≫를 부르던 나였으니까. 비록 나는 파격적인 열성분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 한자락에 정의의 길을 가고싶다는 소박한 소망만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세례를 받은 후 냉담자로 남았다가 다시 십자가 앞에 불리워 나가면서 나는 견진성사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는 그간 신약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언급했지만 나는 종교적 분위기에 깊이 들어간 사람이 아닌지라 더듬으면서 내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부족한 머리로 이리저리 더듬으면서 걷고 있는 나의 생각에 미흡한 점과 맹점들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내가 익숙히 알고 있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한번 예수님을 정리해 봤다. 어느 심리학자가 “예수는 인류 최초의 심리학자”라고 했고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한다. 나는 “예수님은 인류 최초의 무산계급 운동가”라고 부르고 싶다. 당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랑과 평화로 희망을 주면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세웠던 그 응집력. 그로 하여 집권층은 자신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마침내 사형에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만일 그때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투쟁의 길로 이끌어갔더라면 그 결과가 어찌되었을가? 당시 집권층은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예수님은 인류구원의 방법과 수단이 무장투쟁이 아니었기에 고스란히 자신을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예수님의 정신이 로마에서 전파되던 초창기 주로 무산계급과 노예들 속에서 전파되었다. 당시 지하종교, 사이비 종교로 지목받던 천주교가 어찌하여 수난의 250년을 겪으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세례를 받았을가? 단지 죽기보다 못한 최하층 삶이 지겨워서였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사랑과 위로를 갈구했고 평화를 갈구했을 것이며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보았을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수난의 년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마침내 합법화 되고 국교로 된다. 후에 게르만인들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망한 다음에는 당시 야만인으로 불리웠던 게르만인들을 이끌고 문명에로 나가면서 더욱 널리 전파되기도 하였다. 구라파 문명사에 굵은 한획을 긋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후 동로마제국도 망하고 휘황했던 로마제국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예수님의 정신은 오늘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예수님의 정신은 그토록 잔인하게 250년이나 박해했던 그 제국에서 꽃을 피웠으며 제국이 망했어도 예수님의 정신은 오늘까지 살아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역설은 없을 것이다.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무산계급의 운동”에 비할 때 예수님의 “무산계급 운동”의 방법과 수단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용서”를 바탕으로 하는 구원이었다. “용서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사랑보다 더 큰 승리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역사상의 거의 모든 조대가무력으로 바뀐다. 하지만조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인류의 영원불변의 추구가 사랑과 평화의 에덴동산이 아닐가. 그것이 또한 “계급과 국경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 교황이 우주비행사들과 대화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교황은 우주비행사들의 탐구정신과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한 다음 그들에게 우주에서 본 지구는 어떤 모습인가고 물었다.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에서 봤을 때 지구는 국경이 없는 인류가 사는 하나의 천체였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지구의 본 모습으로서 최초의 모습이고 최후의 모습일지 모른다.

사랑과 평화로 영원에로 닿는 그곳이 내 마음의 마지막 정토이고 혼탁한 이 세상에 아무리 부대껴도 힘들지 않는 동력이기도 하다. 나는 천당에 가고자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고 지옥이 두려워 믿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는 그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그분이 계시는 곳으로 가고싶을 뿐이다. 내 마음에 이것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마침내 나는 견진성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자각했다.

견진성사를 받던 날 나는 단정하게 차례입고 성당에 갔다. 이곳에서는 미사포를 쓰지 않는다. 미사포를 쓰게 된 이유와 쓰지 않게 된 이유가 있었고 또한 미사포 자체에 별 의미가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굳이 15년 만에 미사포까지 썼다. 쉽지 않게 결심한 견진성사였던 만큼 그날만은 순수해 보이고 싶었고 에돌았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날만은 정숙해보이고 싶었으며 성당에 나가는 내 모습 중 그날만은 제일 예쁜 모습으로 그분께 가고싶었다.

그날 북경교구의 여러 성당과 기도소들에서 190여명이 견진성사를 받게 되었는데 대부, 대모들까지 합하면 380여명, 거기에 축하하러 온 친구와 가족들까지 합하면 모두 500여명이 북경 남당에 모였다.

견진성사 의식이 끝나자 모두들 축하의 꽃다발을 전한다 사진을 찍는다 하면서 성당 마당은 명절의 분위기에 싸였다.

헌데 나만은 혼자였다. 대모도 성당에서 찾아줬던지라 의식이 끝나자 함께 온 일행한테로 가버렸다.나는 혼자 쓸쓸히 대문을 나서려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웃고 떠들며 성당 마당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견진성사가 저렇게 축하받을 일인가? 나는 어떻게 되어서인지 세례 받을 때에도 부모님이 출국한 틈을 탔어야 했었고 견진성사도 남편이 출국한 기회를 탔어야 했다. 지하공작도 아니고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결혼 전에 세례 받은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지면서 파혼의 변두리에 까지 갔었는데 이제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면 또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다. 그러면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일종 말 못할 회의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이 길을 꼭 가야하는가.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외로운 이 길을 꼭 가야한단 말인가.

그러다 나는 “내가 왜 혼자야. 그분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실터인데.”라고 자아위안 하면서 성당대문을 나섰다. 다행히 그날 저녁 친구수녀의 축하전화가 있어서 더없이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과 함께 그분의 뜻을 깨달아가면서 영원에로 향하는 이 길을 걷게 되어 더없이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말이지 후회 없는 견진성사다. (2011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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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진성당>

나의 신앙의 길 5. 15년 만의 고해성사

- 전 사베리아

마음을 온전히 열고 십자가 앞에 다시 나가던 날 나는 영성체를 함으로서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과 하나로 되고싶었다. 그러나 오래동한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던 나인지라 나에게는 고해성사가 더 시급한 일이였다.

세례를 받고 연길에서 딱 한번 고해성사를 해봤다. 처음에는 학생이라 학교의 눈치가 보여서 성당에 자주 못다녔고 후에는 직장의 눈치가 보여서 성당에 못나갔다. 어차피 성당에 자주 못나갈 바에야 고해성사를 받아선 뭘 하겠냐 하는 생각에 후에 부담 없이 성당에 나가게 될 때 고해성사 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는 사이 죄는 점점 커갔고 나중에는 아름차서 아예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한번 길게 고백하면 되겠지 하는 엽기적인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런데 그분과 하나로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보다 깨끗한 영혼으로 그분 앞에 나서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에 15년 만에 고해성사를 보기로 결심을 내렸다.

15년 전에 교리학습 때 보았던 ≪초대받은 당신≫과 ≪고해성사 길잡이≫, ≪천주교회와 고해성사≫ 등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한번 고해성사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나는 2, 3일간 지나온 15년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졌고 번호를 새겨가며 일일이 생각해낸 후 일요일 일찍 성당에 나갔다. 그때까지 가끔 나는 북경의 동교민항에 있는 한국인미사에 참가했었다. 우선 언어가 같아서 편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생각했던 모든 것을 첫째 둘째 하며 고백했는데 한국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이 용서받을 일이지만 관면혼배를 치르지 않았기에 조당에 걸려있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한국 신부님께서는 간단한 일이라면서 남편과 함께 성당에 가서 잠간 의식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종교라면 “종”자도 못 꺼내게 하는 성실한 당원인 남편더러 성당입구까지 오게 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고해성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지옥 같았다. 내가 중국의 조선족이고 또 15년 만에 찾아왔음을 감안하여 한국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위로해주면서 친절하게 해결책도 대주었건만 내 머리는 점점 공백상태로 되어버렸다. 한국 신부님은 마지막 까지 “예수님은 자매님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이렇게까지 이끌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미사에 참가하세요.”라고 거듭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미사시간에 “기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들 영성체를 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무슨 정신으로 미사에 참가했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름 못할 설음이 자꾸 치밀어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15년 만에 벼르고 별러서 큰 마음 먹고 겨우 고해실에 들어갔는데... 며칠이나 성찰하면서 단단히 준비했는데... 한국 신부님께서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붓 아버지한테서 구박받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는 나한테 세례를 준 엄신부님이 간절히 그리웠다. 엄신부님 앞에 가서 하소연하고 싶었다. 나는 또 친구수녀한테 전화를 걸어 서운함과 배신감을 전부 털어놓았다. 한창 나의 하소연을 듣던 친구는 다른 방법이 있을거라면서 중국 신부님을 찾아보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오다말고 그길로 남당(宣武門주교성당)을 찾아갔다. 남당은 일요일에 라틴어 미사, 중국어 미사 2차례, 영어 미사 2차례, 프랑스어 미사 등 미사가 6차례 있다보니 새벽부터 저녁까지 성당에 사람이 빌 새 없다. 마침 처음으로 성당에 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교우들이 있기에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혼인 관면을 받지 못한 경우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된다고 했다. 워낙 조당에 걸리면 고해성사가 이루어지지 않지만 중국과 어느 이슬람 국가 2개 나라는 국정에 근거하여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특별 사면을 받아 비신도와 결혼 시 관면혼배를 치르지 않더라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도 남편이 공산당 당원이라고 했다. 지어 한 교우의 남편은 공무원이란다. 물론 아직까지도 특별사면에 대한 서면적인 근거는 찾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 순간 내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사실 나의 남편은 불교철학에 심취되어 있는 사람이라 종교를 무턱대고 비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종교적 철학에 수긍할 뿐 그 어떤 규칙적인 신앙생활이나 형식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종교란 “종”자도 꺼내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저 내가 가끔 성당에 나가도록 허락한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며 한국에 갔을 때 명동성당관람을 순순히 따라줬고 또 나를 바티칸 관광까지 보내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더없이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니 아직 20년(남성은 여성들보다 직장생활 5년을 더 할 수 있다.) 직장생활이 남아있는 성실한 당원인 남편에게 성당에 가서 관면혼인 받자고 제기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더 할 데 없는 사치이다.

아무튼 나는 조당에 걸려있어도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어서 날듯이 기뻤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했던 모든 것을 중국어로 머릿속에 정리하였다. 하지만 기도문은 중국어로 미처 외우지 못한 상태라 고백의 기도와 통회의 기도는 그냥 우리 말로 하기로 했다.저 위에 계신 그 분은 다 알아들으시니까.

주말에는 고해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나는 평일 출근 전의 새벽시간을 선택하였다. 고해하러 가던 날 나는 5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성당이 지하철 입구 부근인지라 지하철이 훨씬 편하다. 새벽이라 지하철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문뜩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죄를 작게 하고 작은 죄를 없는 듯 덮어두려고 한다. 세속의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른 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도망가기에 급급한데 자신의 죄를 고백하겠다고 새벽부터 부대끼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도대체 뭐지? 이른바 신앙의 힘이라는 것인가?

15년만의 고해성사, 그것도 한국어와 중국어로 한국 신부님과 중국 신부님을 찾아 똑 같은 죄를 두 번이나 고백해야했던 길고긴 고해성사는 마침내 원만히 끝났다. 자신의 잘못한 일을 한번 고백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두 번이나 고백해야 했던 그때 내 마음은 참말이지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그때 마음 같아서는 다시는 티끌만한 죄도 짓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안되는 것이 인간이다.

고해성사를 끝내고 출근길에 오른 나는 지하철에서 내내 웃기만 하였다. 마음이 너무나 홀가분하여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오는 내가 참으로 여덟살짜리 아이처럼 너무 천진해 보였다. 신앙 앞에서 나는 정말 여덟살짜리 아이로 되어버린다. 평소 우리는 이미지 관리에 무척 신경을 쓴다. 후배들 앞에서, 선배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차림으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른다. 소위 품위와 체통을 지키느라고. 지어 술좌석에서는 젓가락 끝에도 정치가 있다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그분 앞에서 나는 마음 놓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아마 나는 그분이 나를 뼈 속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감출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고해성사의 깊은 의미를 읽고 고해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여러 성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은 후 나는 고해성사가 너무나 거룩해보였다.

그렇게 나는 조금이라도 더 깨끗한 영혼으로 그분께 다가가고 싶었다.(2011.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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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길성당 - 天主敎堂>


<중국 연길성당 미사>


<중국 연길성당 - 조선족 고등학생들의 부채춤>

나의 신앙의 길 4. 십자가앞에 무릎을 꿇어

- 전 사베리아

나는 세례를 받고 북경에 온 후 세례 받은 사실을 극력 숨겨왔다. 북경은 수도인 것만큼 무난하게 살려면 주류를 따르는 것이 편하니까. 때문에 내 가까이에 있는 한 두 명 친구를 제외하고는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다들 모른다. 나는 퇴직 한 후에 성당에 다니기로 하고 재직으로 있을 때는 극력 피하려고 했었다.

나는 그렇게 아닌 척 살았고 아닌 척 살다보니 때론 내가 정말 신앙을 가진 적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사실 나의 직장은 위그르족, 하사크족, 몽골족, 회족, 장족(티베트족) 등 여려 민족이 어울려있기에 종교 신앙에 대해 그리 각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위그르족이나 하사크족 장족 등은 그 민족 자체가 전부 종교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사 공산당에 가입한다 해도 민족전통습관의 각도에서 이슬람교나 라마교가 지켜야할 모든 풍습들을 지키고 있다. 사실 그들 속에는 당원이 많다.

민족정책이나 종교정책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우리직장은 종교신앙에 관대할 수 있다. 하지만 상기한 민족들은 민족공동체가 종교를 신앙하고 민족과 종교가 상호 떨어질 수 없는 개념으로 각인되고 있다. 예컨대 위그르족, 하사크족, 회족 하면 이슬람교민족이고 몽골족, 장족 하면 라마교민족이다. 허나 우리 민족은 다르다. 천주교가 우리 민족 군체가 대대손손 믿어온 종교가 아니기에 신앙과 민족이 별개의 문제이다. 이슬람교나 라마교가 상기한 민족들에게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종교이기에 전반 민족적인 정서를 고려하여 그들의 신앙에 관대할지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경우는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필경은 중앙 직속 사업단위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 사무실은 거의 전부가 당원이며 우리 직장에서 기독교나 천주교는 불가이해의 존재이다.

때문에 나는 극력 내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을 숨겨왔다. 무난히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하면 되니까.

하지만 2년 전 중앙직속사업단위 간부등기표를 다시 작성할 때 사실 나는 조직에 내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회보한 셈이다.

그 번 간부조사등기표에는 “종교를 신앙하느냐?”라는 물음이 있었고 “예, 아니요”로 대답함과 아울러 자신이 믿는 종교를 적어넣어야 했다. 나는 한창 망설였다. 남편도 싫어하고 주위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직장에서의 앞날도 생각하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예”라고 적으려니 고려되는 점이 한두가지 아니었고 그렇다고 죽어도 “아니요”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참말이지 나는 그 부분을 훌쩍 뛰어넘고 싶었다. 여짓껏 잘 속여왔는데... 고민고민 하다가 나는 “예”라고 적었고 믿는 종교가 “천주교”라고 적었다. 아무렴 종교신앙이 법적으로 자유인데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기겠는가. 그리고 누가 그 많은 사람들이 적어내는 당안(서류)을 일일이 펼쳐본단 말인가. 고의로 나를 흠집 내지 않는 한 누가 내 서류를 조사하겠는가.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위로하면서 서류를 조직에 바쳤다. 예상대로 누구도 남의 서류를 뒤지지 않는지라 지금까지 별 탈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나는 조직에 내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회보한 셈이다.

헌데 천주교를 믿는다고 적고나니 순간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내가 정말 신앙인답게 다른 사람들한테 모범을 보였을가? 혹 나의 부족함이 나의 종교를 욕보이지나 않았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잘했을걸...

나는 이렇게 내 신앙의 불씨를 가슴 깊은 곳에 숨기고 살았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어떤 일들이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망간다고 해서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실 2003년도쯤 나는 이상한 것을 체험했다. 한번은 내가 길을 걸어가는데 내 오른쪽 어깨위의 20센티쯤 높은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뒤에서 걸어오던 키 큰 사람이 나를 지나치려나 보다 하여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주었다. 헌데 뒤에 사람이 없었다. 순간 나는 섬직한 생각이 들었다. “귀신이 매달렸나.” 그런데 무섭지 않았다. 잠간 눈을 감고 모습을 새겨봤는데 놀랍게도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성모님의 반신상이었다. 성모님은 머리를 앞쪽으로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에야 나는 금방 길을 걸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모경을 외우고 있었다는 것도 생각해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착각인지, 환각인지, 상상인지 모른다. 내가 이것을 주위사람들과 이야기하면 그들은 십중팔구 내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고 할 것이다. 착각이라 해도 좋고 환각이라 해도 좋고 상상이라 해도 좋다. 그만큼 내 잠의식속에 이미 내 신앙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가?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갑자기 한 며칠씩 묵주기도를 부지런히 한 적도 있다. 그냥 그 어떤 충동을 받아서 기도하군 했었다. 하지만 그 며칠이 지나면 나는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살아가군 했었다. 이렇게 나는 번번이 성모님이 잡아주는 손에서 스스르 미끌어져 내려왔다.

헌데 올 4월에는 성모님 모습이 아니라 십자고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직장에서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고 그냥 한 며칠 십자가를 끌어안고 울고싶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멍하니 성당에 가서 앉아있고 싶었다. 나름 부족함이 없이 산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도대체 무엇때문이지?

나는 성당을 향했다. 성당에서 조용히 그분을 바라보며 앉아있고 싶어서였다. 헌데 성당안의 예수님은 천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웬일이지? 사순시기라고 한다. 사순시기가 뭐지?

도망가기에 바빠서 나는 이것조차 몰랐다. 교리학습 할 때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없다. 나는 예수님을 못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인터넷이며 책들을 뒤지면서 사순시기가 뭔가 찾아보았고 부활의 의미를 새겨보았다. 나는 ≪예수 수난기≫란 영화를 보았고 신약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그렇게 피하고 도망가고 한 나를 계속 기다리고 지켜주신 그 분 앞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이젠 피할 수도 없고 피하지도 않으련다. 아직 15년이나 있어야 정년퇴직하지만 나는 더 이상 퇴직할 날을 기다릴 수가 없다. 물론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있어 이 카페에서 실명조차 밝히지 못하지만 그래도 신앙의 길에서 더 이상 피하지는 않겠다.

올 4월 나는 참으로 거룩하게 보냈다. 나는 십자가 앞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시의 내 마음을 시로 적어보았다.

4월의 어느날

못견디게

당신이 그리웠던

4월의 어느날

당신의 무릎아래 꿇어앉아

이유없이 울고싶었던

4월의 어느날

모시빛 햇살 사이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를 감싸안은

평화의 하늘자락

그리고

내 마음 안에

눈물로 피어나는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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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주성당>

나의 신앙의 길 3. 내 신앙에 불을 놓아

- 전 사베리아

나는 비록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세례받기전의 그 짧은 교리학습수준에 머무른 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업과 생활환경의 영향도 있지만 내 자신이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번의 계기로 하여 실날 같았던 내 신앙의 심지에 불이 달렸다.

몇 달 전에 나는 누구 장례식에 갔었다. 남의 경사에는 참석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례식에 부름 받으면 난 종래로 빠지지 않는다. 궂은 일을 당한 유가족에게 나의 작은 위로를 드림과 아울러 고인의 생전 업적을 되새기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보다 후회 없이 나중에 저 날을 맞이할가 사색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세 분 교수님을 내 차로 모시게 되었다. 서로들 무거운 기분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의논했고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다시한번 느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교수님이 “지옥과 천당”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아마 내 차안에 십자고상이 걸려있는걸 보시고 종교적인 해답을 원하셨나 보다.

그 교수님은 역사, 사회학을 전공하신 분인데 일찍 미국 하버드대학에 공부 겸 교환교수로 가신 적이 있다. 한번은 그 교수님이 미국의 한 학술회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학술회에 참가자중 어떤 분이 교수님더러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권하더란다. 그때 교수님께서 “예수가 전파되지 않은 저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착한 어린이와 예수를 믿으나 살인까지 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천당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느냐? 내가 설복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믿으러 가겠다”고 하셨단다. 그러자 전도를 하던 분은 말문이 막혔고 교수님은 “나는 차라리 그 착한 아이와 함께 지옥에 갈지언정 그 살인자와 함께 천당에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대답하셨단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해답을 드릴 수 없었다. 꼭 나의 해답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데 나는 대답 못드려 미안했고 대답할 수 없어서 나한테 화가 났다. 교수님이 분명 뭔가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았는데 나는 똑 부러지게 해답을 드릴수가 없었다. 나 자신도 확답을 몰랐으니까. 나는 그 교수님이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보다 내가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음이 못내 마음 아팠다. 그러면서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 나의 주님께 많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사실 “지옥과 천당”에 대한 물음은 종교의 시작이자 끝이며 인간의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싶은 문제이자 최초의 문제, 궁극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몇 천 년 논의된 이 문제는 어찌 보면 오늘에 와서 가장 유치한 문제이기도 하다. 중세기 이전이라면 혹시 지붕 우에 사닥다리를 놓고 천당에 올라가보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예부흥도 지났고 계몽기도 지났고, 근현대도 지나 당대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요 하는 이때, 우주 탐험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이때에도 우주 비행사에게 하늘에 올라가니 천당의 하느님의 옥좌가 보이더냐고 묻는다면 그 이상 유치한 물음은 없을 것이다. 우주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유물론의 시각에서 천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것도 편협한 생각이며 따라서 천당에 가느냐 못가느냐를 단순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이분법으로, 흑백의 논리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유치한 발상이 아닐가 싶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난발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내 주위에.

하지만 나 역시 보다 정확한 해답을 몰랐다. 소위 종교를 신앙한다는 사람이 이 조차 잘 알지 못하여 타인을 설복할 수 없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런 물음을 뭐라고 탓할 수 있겠는가.

그 사이 마음속 깊은 곳에 미약한 불씨로 감춰두었던 내 신앙의 심지에 구도의 불이 달렸다. 나는 전에 읽었던 교리책을 펼쳐들었다. 뭔가 연필로 줄도 긋고 적어넣기도 한듯 싶었는데 시험공부 대하듯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대했기에 암송은 한듯 싶으나 아무것도 마음에 남지 않았다. 나는 성경을 펼쳐들었다. 20년 전 선물 받은 성경인데 연길에서 북경으로, 북경에서도 몇 번 이사를 하면서 이사할 때마다 고이 모셔두었을 뿐 읽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몇 페이지 읽고는 덮어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두툼한 성경을 앞에 놓고 보니 어디서 “지옥과 천당”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였다. 단숨에 읽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바 하루 밤 베고 자면 머릿속에 입력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발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나는 신앙 앞에서 두서를 찾지 못하는 여덟살짜리 초등생이 되고 말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친구 수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수업중이여서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 연락번호를 뒤져서 보다 정확한 해답을 줄만한 사람을 찾았다. 마침 얼마전부터 알게 된 한 신부님의 연락번호가 있는지라 나는 그 교수님이 물었던 내용을 신부님한테 메일로 보냈다. 처음에 나는 주저심이 들었다. 믿는다는 사람이 아직도 그런 유치한 물음을 묻는다고 신부님께서 어이없어 하시지나 않으실가?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나절로도 너무 어이없는 일이라 자괴감만큼 주저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들 어떠하리 내가 알고싶은데. 그리고 나는 신앙 앞에서 지금 여덟살이 아닌가. 또한 공자의 말을 빌면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인데”. 나는 이렇게 자아위안 하면서 신부님께 메일을 보냈다. 해답을 기다리는 한편 나는 중국천주교공식사이트를 찾아냈고 거기서도 해답을 찾아보았다.

신부님한테서도 답장이 왔고 사이트에서도 해답을 찾았다.

그 교수님한테 전도한 사람은 기독교였나 보다. 종교개혁을 할 때 마르틴 루텐이 희랍문으로 된 일부 내용을 부정하면서 기독교에는 “연옥”이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믿으면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분법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예수님을 모르더라도 순수한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착하게 살면 천당에 갈수 있으나 예수님을 믿더라도 실천이 어긋나면 나중에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고 하니 교수님 물음에는 해답이 충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천당”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경지로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이며 불가 묘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에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똑 같이 아름다운 곳에 똑 같은 식탁 두 개 있고 똑같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헌데 숟가락이 팔의 길이만큼 길었다. 두 상에 갈라 앉은 사람들 중 한상에 앉은 사람들은 음식을 담아 제 입에 넣느라 분주한데 숟가락이 길어서 도저히 입에 닿지 않았다. 그리하여 음식은 음식대로 지저분하게 널리게 되었으나 한입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 상의 사람들은 숟가락이 닿는 곳의 상대방에게 음식을 떠먹여 줌으로서 서로들 즐겁게 식사를 했다. 이것이 바로 지옥과 천당의 차이란다.

나는 더 이상 피동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내 주위에는 종교를 이해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또한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하나의 지구촌에서 다문화 시대를 살면서 좀 더 대화적이고 화합으로 나가려면 상대방을 알고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가? 하지만 아직도 흑백의 논리로 타문화를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내 생활권에서. 나는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한테 위로의 한마디 전해줄 수 있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한테는 희망과 격려의 한마디 전해줄 수 있으며 천하를 얻을 것 같이 열망에 가득 찬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겸허를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석박사, 교수들한테는 다문화 차원에서 다른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 신앙을 학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신앙 앞에서 나는 지금 금방 문장을 배우기 시작한 여덟살이다. 내가 이 카페에 가입한 목적은 여러 사람들의 실천양상을 보면서 천주교에 대해 좀 더 피부 적으로 느끼고 신도로서의 올바른 삶을 배우며 이 카페에서나마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이다.

내 신앙에 불을 놓아 피보다 진한 꽃으로 피고 싶다.(20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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