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서 싸운 베토벤, 받아들인 모차르트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

 

손열음 피아니스트

 

모차르트의 음악은 가볍고 발랄한 것이 많지만 피아노협주곡 23번 2악장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꼽히기도 한다. 1780년 네포무크(Johann Nepomuk della Croce)가 그린 초상화의 시선에서는 슬픔 또는 불안의 느낌이 묻어난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 종류가 방대하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 중 제일 힘센 감정을 하나 꼽으라면 그건 바로 ‘슬픔’이 아닐까. ‘슬프다’는 느낌은 너무 많은 세부적인 감정, 즉 고통·분노·고독·연민·공포 등과 쉽게 연관 지어져 또렷이 구분해 내기가 힘든 감정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가 느끼는 지독한 슬픔이야말로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오래 기억되고, 쉽게 남의 호응을 얻으며, 따라서 재빨리 주변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임무를 부여받은 음악가들에게는 최고의 소재인 셈이고, 그래서 오래도록 모든 음악가에게 편애받는 소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슬픔을 받아들이고 다시 그려내는 개개인의 형태가 곧 그들의 음악관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일례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슬픔에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음울한 성향에 누구보다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지만 그는 사실 타고난 낙관주의자였다. 그의 음악에는 삶의 비극성과 관계없이, 혹은 현실의 잔혹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반대로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피아노 소나타 7번 D장조 작품번호 10의 3 중 2악장은 그런 긍정성이 배제된 매우 드문 베토벤의 작품 중 하나다. ‘mesto’, 슬픈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를 곡 첫머리에 적어 넣은 이 악장은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마치 앞으로 자신의 삶에 드리울 모든 고독을 예감한 것 같은, 그야말로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악장이다. 물론 길고 어두운 이 독백이 끝나고 이어지는 3악장은 다시 희망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으며, 4악장은 처음과 같이 다시 환희 넘치는 분위기로 되돌아온다. 결국 그에게 슬픔이란 마지막에는 꼭 이겨야만 하는 인생의 경쟁자였던 걸까?

여기에 가장 대조되는 음악관이 있다면 그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일 것이다. 나태해 보일 정도로 슬픔에 관조적인 그는 이 감정을 참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또한 그대로 풀어놓는다. 독주 피아노를 위해 쓰인 A단조의 론도 작품번호 511이 좋은 예다. 그의 슬픔에는 특별한 근원도, 변명도 없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더더욱 없으며 이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대상으로 규정짓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만큼 슬프고, 이만큼 아프고, 이만큼 힘들다고 너무도 쉽게 인정해 버리는 그 태도가 초인간적으로 보일 정도다. 피아노 협주곡 제23번 A장조 작품번호 488의 2악장은 또 다른 예다. 기꺼이 깊숙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버리는 이 악장은 그 어떤 실낱 같은 희망도 제시하지 않은 채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끝나버리는데, 주목할 것은 그 뒤에 등장하는 3악장이다. 이전 악장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듯이 다시없을 유쾌함을 자랑하는 이 악장은 마치 “슬펐던 건 어쩔 수 없고, 이젠 그만 다음 차례로”라며 아무렇지 않게 삶의 그 다음 장에 스스로를 맡겨버리는, 모차르트의 참 근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정확히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중간 지점 정도에 위치한 게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 세계는 슬픔이라는 키워드를 제외하고는 설명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지극히 적은 수의 곡을 제외한 그 모두에 특유의 애수가 어려 있다. 특히 말년의 작품들에는 그의 음악을 아끼는 친구들이 모두 우려할 정도로 침울한 정서가 깊게 드리웠는데 피아노 삼중주 2번 E플랫장조 도이치번호 929,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도이치번호 934,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도이치번호 940, 현악5중주 C장조 도이치번호 956, 그리고 가곡집 ‘겨울 나그네’ ‘백조의 노래’ 등이 모두 그러하다. 여기에는 슬픔 자체보다도 모든 인간이 으레 가지는 슬픔에 대한 두려움과 방어적 태세가 아주 상세히 그려져 있어 애처롭기 그지없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맞서 이겨낼 힘도 없어 그에 대한 부정이나 혹은 착란으로밖에 대처하지 못하는 연약한 한 개인의 모습은 현실에서의 우리와 제일 닮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의 작품들에는 마치 이내 돌아올 봄을 기다리는 듯한 작은 희망이 늘 도사리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베토벤 식의 희망과는 사뭇 다르다. 훌륭한 한 인간의 의지의 발로라거나 성취의 구현이라기보다는 그저 이 삶이 끝나지 않고 지속되기만을 바라는 한 개인의 최소한의 소망과도 같은 것이다. 그의 슬픔이 우리 모두에게 특별히 가깝고도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음악가들이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이 그들의 음악관이 되듯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이 곧 그 인간의 인생관이 될 것이다. 무작정 닥쳐오는 슬픔에 맞서 싸워 이기든, 혹은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름대로 즐기든,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상황에 시달리든,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린 것일 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슬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언젠가는 지나가고 말리란 사실이다. 언젠가는 지나갈 슬픔에 되레 애도를 표하며 외쳐보자. 오라, 달콤한 슬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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