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지존 ‘후난 쌀국수’ 찾아 끝없는 젓가락질

홍은택의 중국 자전거 만리장정 19 ‘누들로드’ 312번 국도

 

1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의 시환청(西環城)로 북단에서 찍은 중국의 아침 풍경. 중국의 아침은 7시 이전부터 활기차다. 맞벌이 부부가 많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가 출근·등교하면서 함께 길거리 식당에서 만두와 전병, 국수와 같은 아침식사를 사 먹는다.2 허난성 난양(南陽)시의 한 국수가게에서 주인이 면발을 가지런히 뜯어내 펄펄 끓는 솥에 넣고 있다.3 허난성 전핑(鎭平) 부근 312번 국도변에 양고기가 마치 빨래처럼 걸려 있다.4 산시(陝西)성 상뤄(商洛)시 골목길에 있는 아침식사 노점. 다양한 양념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주문하면 바로 떠 준다.


중국여행을 자극한 동기 중 하나는 미국의 식단이었다. 대서양 연안에 바퀴를 담그고 출발해 10개 주를 가로질러 태평양에 입수할 때까지 카페라고 불리는 아침 식당을 수없이 들렀지만 기이하게도 메뉴가 똑같았다. 메뉴에서 당당히 한 줄씩 차지하고 있는 요리 이름이다.
계란 한 개
계란 두 개
계란 세 개
계란 네 개까지는 보지 못했다. 여기에 다양한 가짓수가 있는 양 '서니 사이드 업'이냐 '스크램블'이냐 하는 사소한 선택들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치즈버거·비프버거·피시버거·에그샌드위치 등등 빵 두 조각으로 싸먹는 닮은꼴의 음식들이 잇따르고 마지막으로 오믈렛 메뉴가 있다. 항상 오믈렛만 먹었다. 짠맛과 단맛 이외의 맛은 이것뿐이었다. 점심 메뉴로 가면 여기에 스테이크류와 치킨 누들 수프가 추가된다. 뉴욕과 같은 도시는 예외로 하고 이 광대한 나라에 카페의 메뉴가 이렇게 같을 수 있을까? 개성을 존중한다는 미국이 오히려 획일적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근데 벽촌에 중국식당이 있었다. 내가 창안한 법칙인데 인구 300명만 넘으면 그 촌락에는 반드시 중국식당이 하나씩 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맥도날드, 버거킹, 웬디스의 3대 패스트푸드 식당 전체를 합한 것보다 중국식당이 더 많다. 중국식당에서는 미국화된, 또는 국적 불명의 음식을 내놓기는 하지만 그래도 새콤하거나 매운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중국을 횡단한다면 아침이 더 즐거울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중국에서 음식이 입에 맞는지를 묻곤 했다. 기름을 너무 많이 쓰지 않느냐는 것. 우리는 끓이거나 삶지만 중국에서는 솥의 두꺼운 바닥을 뜨겁게 달군 뒤 기름을 넣고 볶거나 튀겨 먹기 때문에 생긴 인식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중국에는 삶고, 굽고, 찌고, 끓이고, 부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지방에 따라 주요리가 다를 뿐이다. 식칼을 쓰는 방법만 해도 수평으로, 사선으로, 수직으로, 밀고 당기고 썰고 흔들면서 재료를 거의 분자 수준으로 해체한다.

 

5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볶음면의 일종인 치란차오몐, 돌솥면의 일종인 사궈몐, 면발이 넓적한 후이몐.

 

그래서 칼이 중요한데 중국에서 요리기자로 활동한 젠류류는 저서 인민에게 봉사하라(Serve the People)에서 칼만 보고 요리사의 출신지를 알 수 있다고 썼다. 검으로 협객의 유파를 아는 것과 같다. 상하이는 상어의 머리처럼 뾰족한 칼, 쓰촨(四川)은 종처럼 생긴 날, 광둥은 서양 칼처럼 좁고 날카롭고 긴 칼, 베이징은 공포영화에서 나올 법한 뭉툭하고 네모난 칼날을 쓴다. 허난에서는 베이징식 식칼을 많이 썼다. 양고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두툼하고 네모진 칼날이 필요한 것 같다.

과연 중국의 아침 식사는 훌륭했다. 내가 들른 중국은 아침을 일찍 시작, 오전 7시면 길거리에서 아침을 사 먹을 수 있다. 부부 모두 일하기 때문에 등교하는 아이와 길가에서 오순도순 아침 먹는 모습은 마치 야외 식탁을 차린 것처럼 정겨워 보이기도 한다. 아침 식사로는 죽과 콩우유인 더우장(豆漿), 밀가루를 길다랗게 반죽해서 튀겨낸 유탸오(油條), 우리는 보통 찐만두라고 부르는 바오쯔(包子), 찐만두인데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 만터우(饅頭), 구운 빵 안에 숙주·계란 등을 넣은 사오빙(燒餠), 조를 쪄서 갈대 잎으로 싼 쭝쯔(粽子), 양고기탕에 구운 빵을 뜯어서 넣어 먹는 양러우파오모(羊肉泡饃)… 헤아릴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통칭해서 담대하게도 간단한 식사라는 뜻의 샤오츠(小吃)라고 부른다. 샤오츠 중에서 나의 탐구 대상은 국수다. 국수는 빨리 먹을 수 있고 국물도 있어 여행자의 허기와 갈증을 동시에 달래준다. 무엇보다 15년 전 워싱턴에서 일하던 시절 프레스센터 2층에서 4달러50센트를 내고 사먹던 비프 누들 수프를 찾아내야 했다. ‘후난익스프레스’라고 하는 중국 패스트푸드점에서 팔던 그 쇠고기 쌀국수는 내게 중국 국수의 세계로의 초대권이자 잃어버린 사진의 원판 같은 것이다. 그 몇 년 뒤 프레스센터에 일부러 찾아갔지만 그 집은 없어졌다. 실제 후난(湖南)성 창사(長沙)까지 순례했지만 짠맛과 매운맛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 그 감동은 재현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찾아내리라. 도착 첫날 저녁부터 상하이에서 란저우 쇠고기 국수(蘭州牛肉拉麵)를 골랐다. 서북지방인 간쑤(甘肅)성의 수도인 란저우에서 회족인 마바오쯔(馬保子)가 1915년에 처음 지금과 같은 국수를 만들어내 ‘그 냄새를 맡으면 말에서 내리고 그 맛을 알면 차를 세운다(聞香下馬, 知味停車)’라는 명성을 얻었다. 란저우 안에만 수천 개의 라몐(拉麵)집이 있고 중국 전역에 퍼지고 있는 중이다.

원래 후난의 쇠고기 국수도 청나라 옹정제 때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에 따라 후난으로 강제 이주된 회족의 일종인 신장 위구르족이 만든 것이다. 누들로드의 저자 이욱정 PD에 따르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국수는 바로 신장의 투르판 부근 화염산에서 발견된 2500년 전의 국수라고 한다. 신장은 그만큼 국수의 유서가 깊은 곳이다. 개토귀류 정책은 소수민족의 부족장을 중국의 내지로 보내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를 파견, 서부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제 이주된 소수민족의 부족장과 그 가족들은 낯선 타향에서 국수를 먹으려고 하는데 밀이 없어 후난의 주식인 쌀을 썼다. 이후 현지화의 과정을 거쳐 원래 회족들이 먹는 맑은 국물이 아니라 걸쭉한 국물의 쌀국수로 재탄생했다.

란저우 국수는 맛도 맛이지만 위생적일 것 같다. 조리사들은 머리에 둥글거나 육각형 흰색 모자를 쓰고 여자들은 두건을 걸쳐 이슬람교도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마치 전문적인 요리사 복장 같다. 돼지고기와 술에 손대지 않는 이슬람교도의 정결한 생활 태도 역시 맑은 국물로 표상되는 듯하다. 무엇보다 면을 만드는 과정 때문이다. 4 단계다. 깨끗하고 단백질 함유량이 많은 밀가루를 고르고(選麵), 물과 반죽할 때는 30도의 온도를 유지해 탄성과 신축성을 높이고(和麵), 30분 이상 숙성하고(醒麵), 찧고 주무르고 늘이고 내던지기를 되풀이하면서 면을 뽑아낸다(拉麵). 그 과정을 주방 안이 아니라 가게 입구에서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래도 나는 후난 국수처럼 걸쭉한 국물에 입맛이 당긴다. 장쑤(江蘇)성 전장(鎭江)에서 펄 벅의 옛집으로 올라가는 길 모퉁이의 허름한 국수집에서 무심코 면을 시켰다가 따뜻한 국물과 함께 상서로운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름은 솥뚜껑이라는 뜻의 궈가이몐(鍋蓋麵)으로 걸쭉한 후난 국수에 대한 일편단심을 흔들어놨다. ‘우연히 먹은 국수가 이 정도라면’ 하는 기대감으로 편안히 마지막 한 젓가락의 국수를 후르르 빨아들였다. 원래는 부주의하게 솥뚜껑을 솥에 빠뜨려서 끓여낸 면이라서 솥뚜껑 국수지만 지금은 더럽게(?) 솥뚜껑을 넣지는 않는다. 넣은 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쇠고기를 실처럼 가늘게 잘라 넣은 뉴러우쓰(牛肉絲)면을 먹었다. 전장 특유의 간장을 써서 매운맛이 아니라 짭짤함을 기조로 하고 다진 마늘 등으로 시원한 맛을 낸다.

중국 국수의 작명은 계통적 과학 발전이 안 된 것처럼 무정부주의적이다. 면발의 굵기, 국수 뽑는 방법, 국수의 유래 등에 따라 제각각이다. 중국의 6대 국수 중에서 산시(山西)성의 다오샤오몐(刀削麵)은 각진 칼로 대패처럼 면을 잘랐다고, 베이징의 자장면은 춘장을 소스로 버무려서, 허난의 후이몐(烩麵)은 걸쭉하게 끓인다고, 쓰촨의 단단몐(擔擔麵)은 행상들이 어깨에 메고 판 국수여서, 우한(武漢)의 러간몐(熱乾麵)은 한 번 익힌 국수를 식혀서 말린 뒤 소스를 뿌려서 먹는다고, 란저우의 라몐은 국수를 손으로 잡아 늘였다고 해서 각각 이름이 붙었다. 위의 6대 국수가 절대적 기준은 아니고 산시(陝西)성의 쟈오즈몐(饺子麵)이나 광둥의 이푸몐(伊府麵)을 꼽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국수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국수가 모래솥이라는 뜻의 사궈몐(砂鍋麵)이다. 허난의 정저우(鄭州)에서 두 자매가 시작해서 퍼지고 있는데 나는 광산현의 2호점에서 시식할 기회를 잡았다. 매운맛이 강렬하고 중독성이 있다. 한국의 고추장처럼 달짝지근한 매운맛(甛辣)이 아니라 쓰고 시큼한 매운맛(酸辣)이었다.
맛 기행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음식에서 맛을 발견할 때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상하이에서 시안까지 가는 312번 국도는 남쪽으로는 쌀, 북쪽으로는 밀가루의 경작지대를 가르는 분계선이다. 이 국도는 내게 쌀과 밀가루의, 수없이 많은 국수를 체험할 수 있는 ‘누들로드’다. 아직 나의 ‘후난 쌀국수’는 못 찾았지만 그에 맞먹는, 영원히 잊지 못할 국수가 나타났다. 시안으로 가는 친링산맥의 한 산골에서였다.

암흑 지옥 같던 터널 주행...'고양이귀 국수'로 보상받다

홍은택의 중국 자전거 만리장정 20 친링산맥~시안


 터널 5개를 통과해 중국의 남북을 가르는 친링산맥을 뚫고 나가자 내리막길 양쪽으로 수려한 풍경이 펼쳐졌다. 시속 40㎞로 달리다 급제동해 한 장 찍었다. 산맥 남쪽에선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였지만 북쪽에는 뇌쇄적인 햇빛이 한창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안(西安)에서 특정한 날짜에 만나자는 무모한 약속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지인은 한국에서 항공편으로 오고 나는 상하이부터 자전거를 달려 시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4월 18일 시안으로 들어가는 312번 국도의 마지막 터널인 무후관(牧護關)이 막혔다. 산사태가 나서 도로를 덮친 것이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언제 통행이 재개될지 몰랐다. 우회로도 마땅치 않다. G40 고속공로는 자전거 진입이 허용되지 않고 다른 우회로로 가면 시안에 언제 닿을지 기약이 없다.

몰라서 그런 약속을 했고 몰라서 결과적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312번 도로관리공사가 내가 자전거로 통과하기 하루 전에야 통행을 복구한 걸 터널 앞에 아직도 수북이 쌓인 돌 더미 흔적을 보고 알았다. 만약 내가 자전거로 지나갈 때 산사태가 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은 잘 안 하는 편이다. 실제 무후관에 앞서 통과한 마제링(麻街嶺)에선 지난해 9월 돌더미가 차량을 덮쳐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더라도 말이다.

 1 무후관 터널은 산사태로 20일 넘게 폐쇄됐다가 내가 통과하기 하루 전 극적으로 열렸다.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터널에선 자전거 주행이 금지됐다는 걸 알았다.2 지유링 터널을 넘고 나니 상가(喪家)에서 농민들이 음식을 먹고 있다가 내게 권했다. ‘누들로드’ 312번 국도에서 먹은 최고의 국수인 고양이귀 국수였다

산시(陝西)성 상난(商南)에서 시안까지 가는 마지막 229㎞ 구간은 후포산(琥珀山)·우관(武關)·지유링(資峪嶺)·마제링·무후관 등 터널 5개를 통과해 친링(秦嶺)산맥을 뚫고 나간다. 한국에서도 집 근처에 일원터널이 있고 서울 도심으로 자전거 통근을 할 때 금호·옥수터널, 홍천 다녀올 때는 6번 국도의 여러 터널 등을 겪어봐서 터널 주행에 관한 한 역전의 용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링의 터널들은 왕릉에 생매장되기 위해 지하갱도로 들어가고 있는 순장자의 공포를 연상시켰다. 언젠가 뒷문이 닫히면서 어둠 속에서 눈은 달려 있어야 할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처음 만난 터널인 후포산 터널에 선글라스를 쓴 채로 들어갔다가 대낮에 암실에 들어간 것 같은 먹장의 어둠에 갇혀버렸다. 터널 내 전등이 전부 꺼져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었지만 어둠은 밝아지지 않았다. 멀리서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려오고 노면은 울퉁불퉁해서 정주행하기가 어려웠다. 자전거 전등을 켰지만 촛불보다 더 가냘팠다. 공기는 차갑고 축축하다. 오히려 맞은편에서 차가 와줬으면 좋겠다. 앞길을 밝혀주고 뒤에서 오는 차에 나의 존재를 부각시켜줄 수 있을 테니까. 다시 터널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전등의 간격은 넓고 셋 중 둘은 꺼져 있어서 여전히 나를 드러내지 못한다.

3 친링산맥 남쪽 사면엔 앵두가 지천이었다. 주민들이 다디단 앵두를 바구니에 담아서 길에서 파는데 1위안(180원)만 내도 한 움큼 집어준다.

 

터널 끝에서 작은 흰 반점이 점점 말발굽처럼 커지더니 진출구가 어렴풋이 보인다. 햇빛이 왜 광명인지 알 것 같다. 휴우, 빠져 나왔다. 세 번째 통과한 지유링 터널이 가장 무서웠다. 길기도 했지만 완전무결한 어둠의 고문을 당했다. 공포를 필요 이상 느끼는 이유는 중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다. 한 개인의 죽음에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을 것 같은, 14억 명의 나라다.

지유링 터널을 빠져나오자 흰 종이꽃으로 장식한 천막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장례 치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마주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다칠까 봐 자전거를 길가에 대고 기색을 살폈다. 사람들이 그렇게 슬퍼하는 눈치가 아니어서 ‘악상(惡喪)’은 아니라고 생각해 다가갔다. 그들은 기꺼이 맞아주면서 식사를 권했다. 점심도 거르고 길을 서두르던 차여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염치없이 큰 양은냄비가 놓인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게 상갓집의 육개장 같은 음식인가 보다. 양고기 국물에 감자·두부·배추를 넣고 걸쭉하게 끓여서 노란빛이 돈다. 오랫동안 사용한 듯 냄비 밑동은 찌그러져 있다.

느끼할 것 같았는데 도리어 구수하다. 중국식 고추장을 풀어서 먹으니 느끼함도 없다. 특히 탕 안에 든, 국수 같지도 않고 마카로니 같지도 않은 작은 덩어리가 쫀득쫀득했다. 자세히 보니 고깔모자처럼 생겼다. 이걸 뭐라고 부르지? 주민들은 합창하듯 ‘마오얼둬(猫耳朶)’라고 얘기해줬다. 못 알아듣자 누군가 귀를 잡고 누군가는 동물 우는 소리를 냈는데 고양이를 흉내 내는 것 같다. 순간 머리 속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이게 책에서 보고 꼭 한번 먹고 싶었던 고양이귀 국수였던 것이다. 마오(猫)는 고양이, 얼둬(耳朶)는 귀를 뜻한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밀가루 반죽에서 뜯어낸 조각을 손바닥에 놓고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고 돌리면 이런 모양이 나온다. 산시성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특별한 국수를 친링산맥의 외진 산골에서 먹는다. ‘누들로드’ 312번 국도에서는 단연 최고의 국수다.

아마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으면 양은냄비를 두 팔로 안아 코를 박고 흡입해 버렸을 것이다. 두 그릇 연거푸 퍼먹고 나자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장송곡이 귀에 들어오면서 망자에 대한 예의를 먼저 차렸어야 한다고 뉘우쳤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 영정을 찾았는데 망자의 사진이 책상 위에 놓인 액자사진만큼 작다. 연로하신 할아버지 얼굴이다. 1934년에 태어나셨다. 한국에서처럼 분향은 하되 재배는 올리지 않고 가볍게 묵념했다. 멀고 먼 이국의 문상객이 자신의 영전에 찾아온 걸 이 할아버지는 굽어보고 있을까? 굴건을 쓴 상주들이 흐뭇한 눈으로 쳐다본다. 한 그릇 더 먹고 가라고 붙잡는 걸 사양하고 길을 재촉했다.

마지막 터널인 무후관을 통과하고 나서 사진을 찍기 위해 뒤돌아봤을 때 자전거 진입금지 표지판이 보였다. 이제야 보기에 천만다행이다. 산사태 여부를 떠나 원래 갈 수 없었던 길이었다. 하지만 이 터널들이 없었더라면 자전거로 친링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난현이나 단펑(丹風)현의 지세는 모두 산에 둘러싸인 손바닥 모양이다. 상난현은 80%, 단펑현은 90%가 산지다. 한(漢)고조가 되는 유방이 이 산길을 넘어서 시안으로 쳐들어갈 때 병사들이 겪어야 했을 고초가 상상이 안 된다. 그 때는 터널도 없었을 텐데.
그들에게 비할 바 아니겠지만 나도 난징을 떠난 이후 12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은 강행군이었다. 막판에 오르막길과 역풍의 악몽적 조합으로 자전거 바퀴는 원형에서 십이각형, 육각형, 이제는 사각형으로 변해버린 듯하다. 페달 한 발을 밟는 데 온몸을 실어야 한다. 이미 앞 기어는 1단으로 내린 지 오래다. 앞 기어 1단에 뒤 기어 1단까지 내려놓고 갈지자로 최대한 노면의 기울기를 낮춰서 오른다.

길가에서 강아지랑 놀고 있는 청년을 지나쳤다. 이 청년은 자전거에 상자를 매달고 강아지를 싣고 가다가 쉴 때면 강아지를 꺼내서 같이 놀았다. 처음엔 약간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쉴 때는 그가 지나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몇 번 마주친 이후 말을 붙여봤다. 얼마나 더 가야 이 지긋지긋한 오르막이 끝나느냐고. 지금까지 중국 사람들의 길 안내는 틀리거나 부정확했다. 하지만 그의 안내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2㎞만 더 올라가면 터널이 나오고 그 이후로는 시안까지 내리막이다. 저녁 8시 전에는 시안에 닿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마지막 터널인 무후관이 나오고 무후관부터는 이렇게 내려가도 되나 싶게 내려간다. 길 표지판에는 35㎞의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다시 오르막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그의 말대로였다. 시안까지 60여㎞가 기본적으로 내리막이었다. 도중에 몇 번 더 그와 마주쳐서 말을 나눴다. 그는 중국 전역을 강아지 한 마리와 여행하는 중이었다. 그냥 세상을 보는 게 좋아서가 이유다. 꾸밈없는 여행자의 풍격이 느껴진다. 여관에서도 안 자고 캠핑 장비도 없다. 다리 밑이나 버려진 집 안에서 자고 먹고 여행한다. 자전거 짐칸에는 천으로 둘둘 만 침낭이 묶여 있고 앞 핸들에는 커다란 원형의 플라스틱 통을 매달았다. 나처럼 24단 기어가 달린 산악자전거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전거 양쪽으로 짐을 싣는 패니어 가방도 없지만 주유천하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란티엔(藍田)현의 109번 성도(省道)변 다리 밑에서 누군가 소리쳐서 쳐다봤더니 그가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가속하고 있는 상태여서 손만 흔들어주고 내처 갔는데 그게 그와의 마지막 스침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내가 만난 유일한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는 중국의 어딘가를 돌고 있을 것이다.

무후관을 통과하고 나서는 전혀 다른 세계다. 친링산맥의 북쪽 사면은 암벽으로 이뤄진, 내리막에서 보기 아까운 절경이다. 시속 40㎞로 내리막길을 질주하면서 바라보는 경치는 물에 젖은 스케치북처럼 몽롱하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확보한 높이인데 야금야금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장쾌하게 내달려 해발 2000여m의 고지에서 해발 500m의 중국 통일제국 최초의 수도 시안에 뚝 떨어졌다. 지인들은 약속장소인 호텔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상하이를 떠난 지 18일 만에 1700㎞를 달려 약속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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