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8. 15 인천공항 Incheon-Yanji 행 비행기에 몸을 싣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연길 평야와 동네들. 우리 조상들이 처음 벼농사를 시작한 땅이다.


집에 들어가기 전 1주일간 묵은 연변대우호텔.


거주등록을 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하러 간 연변대학병원


그 사이에 북경대사관을 다녀왔다. 잠시 들른 천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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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 없이 통일도 없다

평양과기대 설립 추진 정진호 교수 인터뷰


"스룹바벨을 아십니까?" 10여 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무작정 연변으로 떠났던 정진호 교수. 그는 평양과기대 설립을 '스룹바벨프로젝트'라 부른다. 서울대 공대, MIT 박사후 과정(Post-Doc.)을 거쳐 포항공대, 한동대 교수를 지낸 그에게 당시 '연변'은 영락없는 '광야'였다.


그는 물론 그의 가족들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그 허허벌판에서 그는 자신과 가족들을 먹어야 할 떡을 떼어 학생들을 먹였다.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는 공산권 학생들을 사랑하는 일은 긴 인내와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학기가 지나기 전에 그들의 마음 문을 여셨다. "방학이 문제예요. 아이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방학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다들 집에 가기를 싫어해서..." 단순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들을 돌보는 연변과기대 학생들에게 정 교수를 포함한 모든 교수진은 가족이 된지 오래다. 정 교수 역시 7년 만에 갖는 짧은 가족나들이지만 벌써 그들이 그립다고 말한다.


이러한 학생들을 향한 큰 사랑이 있었기에 10여년의 광야세월도 모자라 '평양'까지 개척하려는 용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혹자는 묻는다. "왜 하필 적을 돕느냐?"고.


한국에도 인재를 길러낼 교육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해 이공계 인재가 사장되는 판인데 왜 평양에 거금을 들여 학교를 세워야 하느냐고.


그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이화여대 연세대의 역사를 든다. 당시 한국인은 피죽도 못 먹어 고통당하는 상황이었다. 경제적 기반은 커녕 끼니를 떼우는 일이 가장 큰 난제였던 한국인에게 미국인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운 것은 단기적으로 볼 때 터무니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 학교들을 통해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들이 수없이 배출됐다. 학교를 세울 당시 아무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비전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정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평양과기대 설립을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빌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강조한다. 한국 정부의 자금지원이 답보된 상태여서 3월말까지 중국 건설회사 측에 공사비 350만 불을 치르지 못하면 완공이 난관에 부딪친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을 믿으며 그를 포함한 연변과기대 교수들은 한국과 미국 전역을 넘나들며 후원을 호소하고 있다. 처음엔 '평양'에 대학을 세운다는 말만 듣고 색안경을 끼던 사람들도 '민족의 막힌 담을 헐고 하나 되게 하는 인재 양성의 장'이 될 것이라는 그들의 비전을 들으면 적극적인 후원자가 된다. 교회들을 방문하여 평양과기대의 설립 의의와 비전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북한을 돕는다'는 편견을 허물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칼과 창으로 얼룩진 민족 역사를 바라보는 것도 괴롭지만 역사에 무관심한 청년들을 볼 때 더 안타깝습니다"


정교수는 청년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올바른 역사관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대학입시와 취직에 대한 걱정으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KOSTA 강사로 나서는 것을 비롯해 연변과기대 제자들을 돌보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는 것도 청년 사역에 대한 뜨거운 열정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정 교수의 남다른 사연이 있다. 그 역시 지금 대부분 한국 학생들이 그러하듯 대학입시 외에는 민족과 역사에 무관심한 청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목표를 달성한 대학 입학 이후 이렇다할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잃어 나부꼈다"며 당시의 방황을 설명했다.


미국 유학시절 중 'Gate Bible Study Group'을 통해 늦깎이 크리스천이 된 그는 회심 이후 밤낮으로 "10년 전으로 저를 돌려 달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청년시절 하나님을 몰라 선택한 진로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으로 자신을 이끌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여느 때와 같이 잃어버린 청년시절을 통회하는 기도를 하고 있던 그에게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10년 전 너와 같은 청년들을 복음으로 이끌라"는 음성을 들려주신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도 구체적인 방향을 찾지 못했던 그에게 1990년 코스타(KOSTA,해외유학생수양회)는 학문과 신앙을 어떻게 민족의 역사에 접목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당시 강사로 나선 김진경 총장은 대뜸 "나와 함께 우리 민족과 13억 중국인을 이끌러 가자"고 외쳤다.


정 교수는 이 순간이 "나의 사명이 구체화 되는 순간이자 '복음, 통일, 중국'이라는 인생의 화두를 안게 된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당시는 한중 수교도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 김 총장의 초청에는 4년 후인 94년에 응하게 됐다.


코스타 참석 이후 한중수교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위험한 곳으로 여겨졌기에 아내를 설득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앙이 없는 부모님께 "연변으로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도 때마다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던 정 교수는 인간적인 생각을 모두 접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아내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어느 날부터는 아내도 옆방에서 기도하더라고요. 아마 저 남자 정신 좀 차리게 해달라고 기도했겠죠"


한 집안 두 기도 전쟁은 결국 아내 최문선 교수가 연변 행을 결단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 교수는 "연변 행을 결정한 이후에도 심지어 연변에 도착한 이후에도 적응까지는 갖가지 진통을 겪어야 했지만 어려운 순간마다 오히려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었기에 10여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10년 간 연변과기대가 일군 성과들은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학생들 내면에 생긴 변화에 주목할 때 더욱 빛난다. "교수님들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제자들의 고백은 삶이 가장 강력한 메시지임을 보여준다.


젊음은 오만하다. 죽음이 아직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에 인생의 주인인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알기에 더딜 수 있다. 전도서의 기자는 "너는 청년의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했다. 지금도 많은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귀한 청년의 때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부끼고 있다.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청년들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생을 살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몇몇 교육자만의 몫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이것은 한국 내 입시제도에 갇힌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체성의 문제, 부모세대와의 갈등으로 방황하는 이민사회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민족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비전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제대로 된 인생관을 갖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 교수는 청년의 문제를 해결할 가장 확실한 답이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 온 몸을 찢어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신 그 사랑을 어른들이 먼저 삶으로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다. 머리에 지식만 가득한 빈 깡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멀고 척박한 땅까지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라는 '떡'을 떼어 나눌 수 있는 참된 인재를 기르는 일. 그것이 연변과기대에서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룹바벨 프로젝트(평양과기대 설립)'을 이끄는 모든 교수진의 염원일 것이다.


현재 평양과기대는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가 있던 터위에 지어지고 있다. 공사에 착공한 후에야 밝혀진 이 사실은 2007년 100주년을 맞는 '평양대부흥' 운동과 맞아 떨어진다.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 땅. 지금은 사랑과 십자가를 대신한 우상으로 가득한 그 땅에 민족 화합의 염원을 갖는 국제적 인재를 키우는 대학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례적으로 북한 정부 역시 '상하이 쇼크' 이후 적극적인 협력을 하고 있다. 대학 설립 요청도 북한 정부에서 먼저 제의했다. 98년 연변과기대 측에서 나진과기대를 설립하고자 북측에 제안을 했던 것을 거절했던 것을 감안할 때 괄목할 만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상하이 쇼크'란 중국이 시장경제를 수용한 이후 상해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전의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호의적인 북측의 태도에 대해 더욱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 교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민족 화해의 기회라고 확신한다.


바벨론 포로 시대에 스룹바벨은 생활고에 지쳐 영적인 무기력에 빠졌던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들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이끌었다.


스룹바벨과 선지자 학개의 독려로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으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대학을 세우는 그 날을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연변과기대 교수들은 벗은 발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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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자치정부 청사 정문]



[연변대학 정문]

연변조선족자치주 []

중국 지린성[] 동부에 있는 자치주.
위치중국 지린성 동부
면적4만 3547㎢
인구219만 5000명(1998)

주도()는 옌지시[]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옌지[]·투먼[]·둔화[]·허룽[]·룽징[]·훈춘[]의 6개 시와 왕칭[]·안투[] 2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조선족이 41%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한족(만주족(滿후이족[]의 순이다.

지린성 동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헤이룽장성[]과 접한다. 창바이산맥[]과 라오예링산맥[] 경내로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옌지분지가 펼쳐진다. 이 때문에 해발고도 500∼1,000m 지점이 많다. 이 산지에서 흘러 나오는 하천은 둥베이수계[]의 근원이 된다.

주요 하천으로는 투먼강·
쑹화강[]·무단강[쑤이펀강[] 등이 있다. 투먼강 유역에 있는 중국의 국제개발지인 훈춘경제개발지를 ‘동북아 금삼각주()’라고 부른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나 변화가 잦고, 강수량은 산지가 많기 때문에 하천의 수량이 풍부하다. 연평균기온 2∼6℃, 1월
평균기온 -14.1℃, 7월 평균기온 21.6℃, 연평균강수량은 500∼700mm이다. 농업은 주로 곡저평지()에서 이루어지며, 쌀·콩·조 등의 곡물을 생산한다. 특히 벼농사는 한국인이 이주한 뒤에 발달하였으며, 9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또 잎담배는 지린성 생산량의 대부분을 생산하며, 그밖에 특산물인 인삼과 과일도 많이 난다.

산지에는 삼림이 우거져 중국의 중요한 임업지대를 이룬다. 투먼·둔화·다스터우[]에 3대 제재소가 있으며, 그밖의 여러 곳에서
목재공업이 이루어진다. 또 이 목재를 원료로 하는 제지공장이 투먼·스옌[]·카이산툰[] 등에 산재한다.

동부에는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며, 그 중 허룽과 훈춘의 석탄, 왕칭의
오일셰일(유혈암), 톈바오산[]의 구리·납, 훈춘의 금 채굴이 손꼽힌다. 공업으로는 농업기계·철강·정유·전자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지며, 공장은 옌지 등의 시 지역에 분포한다.

교통은 창춘[]·지린·투먼을 잇는 창투철도[]가 지역안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옌지에서 허룽과 카이산툰으로 지선()이 분기한다. 또 투먼에서 무단강과
함경북도 온성()으로 통하는 무투철도[]가 갈라진다. 도로는 철도를 따라 뻗어 있는데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항공편으로는 옌지공항이 있는데, 국내선으로는 베이징·창춘·선양까지 운항하고, 국제선으로는 한국 부산까지 운항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므로 청산리항일전승지()·봉오동()항일전승지·일송정() 등 유적지가 많다. 그밖에 백두산천지·정줴사[]·전샤오공주묘 []·룽후석조각[]·이커당아비[]·시구청[西아오둥청[]·바롄청[] 등의 고대유적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연변대학·연변의과학원·연변사범대학·연변예술학원·농업학원이 있고,특히 연변과학기술대학은 짧은 기간동안 괄목한 발전을 이루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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