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무치에서 만났던 평화로운 위구르 가족
성난 그들
위구르인의 恨 그리고 통곡
"한국인은 한(漢)족과 구별하기 어려워 테러의 대상이 됩니다. 한족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옷차림을 하세요" 10여년 전6개월 정도 배낭여행으로 중국 대륙을 돌아다녔다. 여행 코스에는 당연히 실크로드가 포함됐고, 실크로드의 관문인 신장성의 성도 우루무치를 방문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이해 준 말이다. 안내양의 말에 따라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축하한다'는 영문 글귀가 새겨진 반팔 T셔츠를 한 달 내내 입고 다녔다. 다행히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50세의 한국 여성이 이번 시위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우루무치로 여행을 간 50세의 박모씨는 시위가 처음 발생한 5일 저녁 위구르인 밀집지역인 시장에서 쇼핑을 하다 시위대에 휩쓸렸다. 박씨는 한족으로 몰려 시위대에 구타당할 뻔했으나 한 소수민족 여인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보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뒤늦게 한국 대사관과 연락이 됐고, 베이징에서 급파된 외교관에 의해 안전하게 후방으로 이송된 것으로 전해졌다. 8일 현재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인의 시위로 인해 최소 156명이 숨지고 10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위구르인들의 독립시위에 맞서 한족들이 맞불 시위를 벌이는 등 사태는 민족갈등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 공산당의 철저한 탄압과 언론 통제로 위구르의 사정이 밖에 안 알려졌을 뿐 매년 수십 명의 위구르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티베트의 독립운동은 달라이 라마 때문에 외부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구르는 티베트보다 더한 화약고다. 티베트는 라마불교를 숭배하고 티베트족은 동양인이지만 위구르족은 이슬람을 숭배하고 인종도 코카서스인에 가깝다.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KBS의 ‘미수다’에 출연하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구잘이 전형적인 위구르족이다. 중국 공산당은 한족들을 위구르와 티베트로 대거 이주시켜 위구르와 티베트의 중국화를 시도하고 있다. 실제 티베트와 위구르의 주요 도시는 한족이 압도적으로 많다. 원래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은 중국 왕조가 강성할 때는 중국 땅에 편입되고, 현지의 왕조가 강성할 때는 독립을 유지했다. 이들은 공산당이 중국을 해방시키기 이전에는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을 해방시킨 공산당이 티베트와 위구르를 점령함에 따라 공산 중국에 편입됐다.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됐다. 공산당이 주로 내세우는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공산당은 인민해방이란 슬로건 아래 티베트와 위구르를 접수했지만 티베트와 위구르인들에게 있어 중국 공산당은 압제자일 뿐이다. 따라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중국 공산당은 일정 부분 자치권을 인정하는 한편 막대한 자금을 풀어 경제개발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이들을 관리해 왔다. 특히 최근 서부 대개발 바람이 불면서 티베트와 위구르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 개발에 대한 과실이 한족에게만 집중됨에 따라 현지인들의 분노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번 위구르족의 시위도 그동안 쌓인 분노가 표출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번 시위의 끝은 어디일까. 결국 키는 후진타오 주석이 쥐고 있다.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 중이던 후진타오 주석은 8일 급거 귀국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소수민족 전문가다. 그는 티베트성 당서기를 지냈고,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한 공로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1989년 중국 대륙은 천안문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자유화 바람은 티베트에도 상륙해 대규모 독립시위가 발생했다. 후진타오는 당시 티베트의 당서기였다. 그는 직접 철모를 쓰고 현장에 나가 독립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장면은 CCTV로 그대로 중계됐다. 덩샤오핑은 그 장면을 유심히 보아 두었다. 얼마 후 덩샤오핑은 후진타오를 직접 발탁하고 4세대의 우두머리로 지명했다. 이후 후진타오는 승승장구, 국가 주석까지 오르게 됐다. 후진타오는 위구르의 독립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보한 중국 공산당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 신장과 위구르 지역은 자원의 보고다. 현재의 경제발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원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중국 공산당은 결코 위구르와 티베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위구르 사태의 원인은 공격적 이주정책 때문”
대규모 사상자를 낸 위구르 사태의 원인은 중국의 공격적 이주정책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1950년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위구르족 비율은 74.7%로 한족(6.1%)의 10배가 넘었다. 그러나 위구르족은 내보내고 한족은 유입시키는 중국의 인구재조정 정책으로 현재 위구르족 대 한족 비율은 45% 대 41%로 좁혀졌다. 중국의 위구르족 이주 정책은 모집 과정의 강제성과 비인간적 처우로 비판받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06년 위구르인 350만명(89%)이 거주하는 남동부 카슈가르 지역에서 20대 젊은이, 그 중에서도 18∼25세 여성 노동자를 모집해 다른 성(省)에 취업시키는 집단 이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명목은 일자리 제공이었지만 가임 여성 수를 줄여 위구르족 인구를 줄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모집은 사실상 강제적으로 이뤄졌다. 동의하지 않는 부모들에게는 토지를 몰수하겠다는 등 협박이 가해졌다. 2007년 자유아시아방송 보도에 따르면 페이자와트현에서만 1년 만에 3000명의 젊은 여성들이 톈진 등 대도시 공장지대로 취업했다. 이주 후 생활은 처참했다. 한족 노동자에 비해 급여는 현저하게 낮았고 그나마도 이주 비용 등을 이유로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벌금 5000위안이 무서워 귀향도 불가능했다. 노예나 다름없었다. 세계위구르인대회(WUC)는 2006∼2007년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강제 이주한 노동자가 24만명이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광둥성 사오관시 장난감 공장에도 이런 식으로 이주한 위구르 노동자 800여명이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위구르족 집단 이주는 해당 지역 한족 노동자들의 불만도 커지게 했다. 저임 노동자가 출현하면서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한족의 신장위구르자치구 이주도 꾸준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계속되고 있다. '중국판 서부개척'으로 불리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대한 한족 이주 정책은 1954년 신장생산건설병단 건설과 함께 시작됐다. 중국 정부는 한족에게 보조금과 일자리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며 서부 이주를 장려하고 있다. 최근에는 간쑤성 농부 50만명이 정부 지원을 받고 신장위구르자치구로 이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