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개조론

김문학

사적인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할까 합니다. 필자는 일본과 한국의 독자들로부터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을 종종 받곤 합니다.

이에 대해 나는 어디까지나 ''조선족''이라고 생각하고 나만?무상의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득이하게,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처럼 조선족을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엉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내가 태어난 우리 조선족 사회를 객관화시켜 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 있을 때는 체감을 잘 못합니다. 어느 정도 체감을 한다해도 철저한 자기반성과 해부는 어렵다고 봅니다.

''도대체 우리 조선족은 왜 이렇게 추악하고 저급하고 유치하고 또 들떠 있을까? 우리의 이미지는 왜 이렇게 실추되었을까?''

''정말 우리는 어째서 안 되는 것일까? 우리의 체질에 어떤 병적인 요소가 있어 우리를 망치고 있는 것일까?''

누구 한사람 나서서 따끔하게 비판하지 않는 사회, 연애소설이나 조선족의 자랑스런 발자취를 핏대를 세우며 찬미하는 책들은 수없이 쏟아내면서도 우리의 고질적 병폐를 비판하거나 반성하는 책이 아직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다들 가볍게 비아냥거리다가 비웃음은 잘 치지만 피가 나오게 따끔한 말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사람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싸구려 민족애보다도, 아무 의미도 없는 들뜬 수식어보다도 우리의 체질과 민족성을 철저히 해부하여 우리 민족 내부에 깊숙이 박힌 악성 종양을 제거해 내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민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과 이상이 크면 클수록 비판도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버트 케네디의 명언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을 통해 우리 체질의 병폐를 해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라한 젊은 조선족 문인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박쥐형 문화에 대한 이해

중국 조선족 문화의 형(型)은 어떤 것일까? 이 문화의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이솝의 "박쥐우화"를 일례로 들어 보고자 한다.

박쥐 한 마리가 그만 발을 헛디뎌 땅에 떨어져 쥐들한테 붙잡혔다. 박쥐는 죽을 위험에 빠지자 박쥐도 쥐라는 주장을 펴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박쥐는 불행하게 또 땅에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새들에게 잡혀 먹힐 지경이 되자 자신은 날개가 있어서 새와 같은 종족이라고 주장하며 다시 한번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 우화가 주는 파생적 의미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박쥐의 특징을 잘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박쥐우화''를 통해 우리 조선족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듯 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우리의 문화를 일컬어 ''박쥐형 문화''라고 이름짓고 싶다.

나는 일찍이 1988년 조선족에서는 최초로 우리의 문화를 반성의 시각으로 쓴 논문 <중국조선족 문화의 반성>을 통해 조선족의 문화 패턴을 쌍원구조(雙元構造)란 말로 표현했고 ''박쥐형 문화''로 분석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뿌리가 옅은 천근성(淺根性) 문화에 속한다. 중국 문화나 한국 문화가 수천 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뿌리를 깊숙이 박은 소나무의 심근성(深根性)이라면 우리는 땅에 꽂으면 그 자리에서 쉽게 뿌리를 내리는 버드나무의 성질을 지닌 천근성을 갖게 된 것이다.

100여 년의 조선족 역사가 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장대한 중국과 한국의 문화에 비하면 우리는 촌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한 세기 동안 우리는 조선 반도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다.

거의 8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체제로 인해 자발적으로 또는 부득이하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투쟁 속에서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해서는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우세 속에서 우리는 문화에 대해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부터 개혁, 개방은 서양 문화, 한국 문화나 해외 조선민족 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등한시했던 문화에 대해 깊이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의 베일을 벗고 본 우리의 문화는 중국의 그것과는 이질적이고 그렇다고 한국 문화의 속성과도 많은 거리감이 있었다.

흔히 우리는 중국 사회에서 국적은 중국이지만, 문화는 조선민족 문화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문화와 한국인을 직접 대할 때 우리는 중국인의 시각에서 한국 문화와 한국인을 바라본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나는 박쥐의 전형적인 생태와 닮았다고 보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재일 동포를 보는 시각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분명히 한국과 조선이지만 문화는 거의 일본 문화에 동화되어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연변과 같은 자치주를 형성하고 있기에 문화적 동화(同化), 즉 내적인 동화만은 모면했으나 더불어 중국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독특한 박쥐형 문화를 낳게 되었다.

유연한 갈대를 닮은 문화

나는 앞에서 우리 문화를 박쥐형 문화라고 지적했지만 더 나아가 천근성에 기초한 ''갈대형 문화''로 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혹자는 하필 그 초라한 갈대에서 우리 문화의 모습을 찾느냐고 질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갈대는 생명력이 강하다. 물과 땅만 있으면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고 산다. 또한 갈대는 땅에 얕게 뿌리박고 살면서 무리를 지어 사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갈대는 바람의 벗이다. 바람이 없으면 갈대의 존재는 너무나 적막하고 고독할 것이다. 바람 속에 있을 때 갈대는 춤추는 듯 수려하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흡사 바람과 더불어 가슴을 울리는 교향곡을 연주하면서 또한 군무를 추는 듯하다. 이런 갈대의 성질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박쥐형 문화를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에 부는 여러 가지 바람 즉, 혁명, 투쟁, 운동의 바람 속에 있으면서 갈대처럼 바람에 맞추어 흔들리면서 자신을 지켜왔던 역사적 체험을 갖고 있다. 이런 바람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부대끼면서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물론, 농민들도 다 이렇게 흔들리며 바람 부는 대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의 유연성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나는 우리 문화의 유연 구조가 일본문화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자기만 고집하지 않고 갈대같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유연성이 우리 민족과 닮은 일본 문화의 구조적인 특색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이질적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그들 특유의 유연성으로 소화시켜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창조하는 典範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한편으로 ''모방문화''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구미인들 쪽에서 본 견해일 뿐이다.

일본문화의 유연성을 잘 체현시킨 것이 일본의 건축이다. 지진이 많은 일본은 건물 자체도 지진에 따라 흔들리게 하는 공법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나는 히로시마 시영아파트 20층에서 살면서 지진을 많이 경험했다. 그때마다 아파트는 진동에 따라 흔들리며, 그것은 마치 흔들리는 요람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의 현대 건축은 바로 갈대와 같은 유연성 구조를 이용해 지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터키 등은 이런 유연성 구조가 아닌 경직구조로 건물을 짓기 때문에 지진으로부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인류학자들은 21세기를 ''유연구조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절대 이념이 지배하는 문화가 아닌 여러 문화의 장점을 고루 갖춘 복합문화가 문화적인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갈대형 문화도 활용만 잘하면 거대한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문화도 밝은 전망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 상태로서는 미래에 대해 무조건 낙관 만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족 사회의 다원화 구조

일본에서나 한국에서 가자들의 취재를 받을 때 언제나 꼭 물어오는 사항이 있다.

"김문학 선생은 조선족이니까 당연히 연변 출신이죠?", "김문학씨는 연변 연길시 태생입니까?"

물론 대답은 No다. "아니요, 저는 료녕성 심양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조선족이니까 연변출신이 당연할 것이라고 여기는 배경에는 중국 조선족하면 ''연변조선족''이란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인들이 연변 외의 심양이나 장춘, 하얼빈 등지에 사는 조선족 사회를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내 자신이 연변사람으로 오인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여기에는 내가 연변과는 거리가 먼 심양 태생이라는 생래적인 이유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겠지만, 그보다도 조선족사회가 연변 이외 여타 지방에서도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당당히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싶은 욕심에서 일 것이다.

나는 1988년 "중국 조선족문화의 반성"이란 글에서 조선족사회의 다원화 구조를 연변을 하나의 축으로 한 부채형 선상(扇狀)구조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그때 나는 주로 문화적 차원에서 북경, 심양, 하얼빈 등의 조선족사회가 급속도로 변하는 정보화시대에 맞 춰 다양한 정보와 문화, 생활양식의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고 있기에 연변보다 앞서 국제 무대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진단한 바 있다.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나의 예측이 적중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는 중국에 갈 때마다 조선족사회의 문화적 차이를 갈수록 실감하고 있다. 정확하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조선족 사회의 특색을 내 나름대로 요약해 본다면, 연변은 전통적인 조선족의 모델지역으로서 규모나 역사로 보아 조선족의 센터이지만 너무 무거운 전통과 지정학적으로 편벽한 오지에 위치해 발전속도가 느리고 보수성이 강해 변화와 발전에 약한 곳이다.

심양은 동북 조선족사회의 새로운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동북3성의 정치, 경제의 중심인 심양에 위치해 있어 지리적으로 유리하며 정보가 빠르고 의식이 앞서있어 행동도 과감한 데가 있다. 장춘은 길림성 성소재지로서 조선족의 수는 많지 않지만 문화도시답게 문화적 분위기가 농후하며 듬직하다. 하얼빈을 대표로 한 흑룡강지역은 경상도 출신의 조선족이 많으며, 성격은 선비정신과 저돌적인 기백이 혼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북경은 중국의 문호로서 정치적 감각이 민첩하고 각지방에서 모여들었기에 민주적이며 지방색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상해와 천진은 상업 도시로서의 특색이 농후해 장사 나온 조선족이 많아 문화적, 문학적으로 활약하기엔 아직 어려운 곳이다. 청도는 한국기업이 가장 많은 곳으로서 조선족은 중-한을 잇는 통역문화의 특색을 띠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조선족 사회가 다원화?탈중심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단일 지향, 획일성은 조선족 문화를 쇠망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고 판단된다.

조선족은 다이애스포러

조선족의 문화는 4차원의 세계를 갖고 있어 동양에서도 특수한 문화세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의 문화를 ① 조선반도의 고유문화 ② 중국문화 ③ 서양문화 ④ 조선족문화가 4차원적으로 층층이 축적되어 종합적인 문화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중국문화 한국문화와 서양문화를 동시에 흡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것이 조선족 문화인이나 각계 인사들이 한결같이 조선족 문화의 무한한 가능성, 우월성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자찬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유감천만인 것은 아직도 우리는 우리만의 우수성, 우월성을 인정할 만한 문화를 창출해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득 국경을 초월한 문화를 주장하는 ''다이애스포러'' 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다이애스포러''란 자기문화와, 이 문화도 아닌, 고유문화를 이탈한,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고 문화적 틈새에 살면서 또 다른 창조적 에너지를 얻어내는 문화인을 가리킨다. 이국사회에 들어가 생활하지만 자신의뿌리를 잃은 무근초는 결코 아니며, 자기의 원래 문화와 새로운 문화 속에서 이들과는 또 다른 문화를 발전시키고 창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문화적인 소수파의 입장에서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려는 행위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조선족 문화인 중에서는 처음으로 이 이론을 받아들여 ''문화적 다이애스포러''를 자임하고 있다. 이 같은 다이애스포러들은 이를테면 자신의 특성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문화 환경이 가장 잘 조성된 미국에 모여들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매력 이는 문화 실적을 쌓아 올리고 있다. 홍콩영화도 그 유사한 경우의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박쥐형 문화는 유연성 구조로써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 조건을 이데올로기 투쟁에 정력을 기울이면서 그 에네르기를 다 거기에 쏟아 버렸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에게 이런 조건을 관리하고 발전시킬 만한 재능이나 견식이 아직 없다. 또한 환경적으로도 우리는 중국의 거대한 힘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폐쇄되고 침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도시형 문화 보다도 농촌형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비근대적 면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 조선족은 중국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융합하는 그런 틈을 스스로 만들지 못했다. 말하자면 중국 문화 속으로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조선족 인재들이 일본이나 미국에서 또는 중국의 대도시에서 활동하면서 박쥐형, 즉 ''다이애스포러'' 적인 힘을 발휘하는 젊은 엘리트들에 의해 점차 그것이 실현되고 있는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자못 크다 하겠다.

해외나 중국 대도시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조선족 젊은 문화인들의 성장은 국제적으로도 괄목할 만하다. 나는 이런 우리의 젊은이들 속에서 조선족 문화의 가능성을 기대해 보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문화에 대해서 심각하게 반성하고 다양한 연구를 통해 문화적 저변을 확대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 1

어디서 쉴 새 없이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잠시 귀를 기울여 보자.

"개굴개굴, 우리 연변의 하늘이 최고로 맑아!"

"소쩍 소쩍 소쩍, 우리 조선족이 전국에서 최고 민족이다. "

"얼씨구절씨구 좋다. 우리는 중국의 유태인, 제일 우수한 민족!"

"벌컥 벌컥, 카-, 연길 빙천맥주가 중국에서 최고야."

"쟁쟁쟁쟁 쟁쟁쟁-, 우리 연변문학이 한국문학을 초월했다! 한국문학, 흥, 까짓거 별거 아니여. 쟁쟁쟁 쟁쟁쟁"

"?바라밤바 ?바라, 우리는 중국에서 넘버 원! 부유한, 돈 있는 민족입니다요."

조선족 사회의 우물안 개구리 (사실은 올챙이) 명창을 수집해 보았다. 나는 일시 귀국할 때마다 주위 조선족 사회에서 들려오는 이런 허무맹랑한 왕나발 소리를 들으면서 이들을 모아 "20세기 조선족의 개구리 명창"이란 책으로 발간하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까지 떠올려 보았다.

1999년 여름, 고향 심양에 갔었을 때 나는 쇼킹한 조선족의 에피소드를 듣고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면서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문제의 조선족은 서울서 졸부가 되어온 50대의 농민이다. 흔히 조선족 사회니 연길 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수수한 조선족 아저씨다.

그가 한족이 경영하는 술집에 가서 호스티스 아가씨를 꼬시다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인민폐 한뭉치와 달러 한 뭉치를 손가방에 꺼내 보이면서 흔들었단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 우리 조선족이 부잔 줄 몰라? 이런 달러, 이런 돈 구경한 적 있어?"

이 못난 졸부 아저씨에게 "정말 도대체 누가 웃기는 줄 모르겠네." 해 주고 싶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졸부들이 조선족 사회에서 달러를 내흔들며 하던 행세가 지금은 조선족 개구리들의 메뉴가 된 모양이다.

한족들 중에 돈 있는 억만장자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을, 그 하늘이 얼마나 넓고 넓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지한 조선족이 왜 이렇게 득실거리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이 무지한 농민 아저씨는 그래도 많이 배우지 못해 먹물이 없어서 그랬다 치고, 이해하고, 한번쯤 눈감아 주기로 하자.

그러나 먹물 깨나 먹었다는 우리의 엘리트 지식인, 문화인들이 오히려 더 ''우물안 개구리 명창''의 달인들처럼 보인다.

2000년 4월, 서울에서 내가 직접 체험한 일이다. 그 날 서울의 연극 배우와 나의 고향친구, 그리고 연변에서 온 시인 S씨가 동석하여 호프집에서 잔을 기울이며 한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서로 회포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어떤 사소한 일로 연변의 S씨와 서울의 연극배우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열을 받은 S씨가 "나는 연길의 최고 시인이야. 우리는 김문학 씨가 조선족에서 천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면, 나는 백년에 하나 나올까 하는 인재야. 너희 서울 사람들 뭘 안다고 떠들어. 까불지 마. 네까짓 놈들이 다 뭐냐? 오늘은 문학 씨 낯을 봐서.." 운운, 정말 낯이 뜨겁다.

우물 안 개구리 2

조선족 시인 K씨로부터 들은 얘기다.

몇 년 전 K씨가 조선족 젊은 시인 H와 함께 서울에서 민족시인협회의 고은, 신경림 등 유명 시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날 뜻하지 않은 희극이 벌어졌다.

한국측 협회에서 H에게 고은과 신경림 시인들을 소개하면서 "아십니까?"하자, 그 자리에서 H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그럼 중국 조선족 유명시인 ○○○를 아십니까?"하면서 방자하게 놀았다고 한다. 마치 자신을 서울에서 모르냐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K씨는 나에게 이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다시는 조선족 문인을 해외 동포 문인의 모임에 동행하지 않기로 맹세했단다.

한 수 양보하여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H를 한번 봐주자. 그러나 H의 ''우물 안 개구리''식의 모습에서 우리는 조선족 문인의 후진 문화권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실감할 수 있다. 그 콤플렉스가 동전의 앞뒤와 같이 표면으로 오만한 행동이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역시 무지한 ''우물안 개구리'' 그 자체이다. 망신을 당해도 제대로 당했다.

또 이런 작가를 보았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처음으로 책 한 권을 낸 B라는 작가가 있다. 책이 나 오자 B는 흥분하여 "연변작가는 다 안돼!"하고 다녔다. 그 의미는 자신이 조선족 문학의 최고 정상에 섰다는 것이다. 자신이 연변출신이지만 연변작가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뽐내며 조선족문학을 혼자서 다 하는 듯이 희언(戱言)했다.

그러나 솔직히 평가해보면 B의 수준도 자기가 떠드는 희언같이 ''최고 수준''이 아니란 것은 자타가 모두 아는 사실이다.

나는 B를 보면서 질책하기보다는 동정이 앞선다. 한번도 해외에서 책을 출간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책을 한 권 냈으니 그 기쁨과 자랑이 가벼운 유치성으로 한꺼번에 확대되어 ''최고'' 운운하는 개구리 명창의 ''정상급''으로 승화한 것이리라. 아직까지 우리는 여전히 어디를 가도 의식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 같은 우리 문단의 우물 안 개구리 현상은 독자들의 반응에서도 잘 나타난다. <문학과 예술>(2000년 2호)에 게재된 백두옹의 "나발 그만 불고 실속을"이라는 글을 옮겨 본다.

"(전략)조선 민족은 어쩌면 나 발 불기에 버릇이 돼 온 족속이다. 모든 문제를 세계와 인류, 영원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나''만을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잖은가.

문학계를 보자. 역시 나발불기를 좋아한다. 작가, 시인에 또 기자까지 가세해 무작정 나발부는 판이다.(중략) 시 몇 편, 소설 몇 편을 썼거나 지방 문학상이라도 받으면 벌써 나발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한족문단도 그저 그래. 볼 게 없어!'', ''한국문학도 그저 그런 거야! 나보다 못해!''

주제 넘는 소리! 한족문단의 우수작도 아니 보고 무슨 소린가. 한족문학은 한어가 능하지 못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한국의 일류 작가, 시인들의 우수작, 다른건 몰라도 능란한 민족어의 구사와 묘미를 따르는 이 몇인가. 누군가?"

독자들의 두 눈은 더 밝다.

우물 안 개구리 3

구름같이 세계를 떠도는 사나이로 알려진 재미동포 문인 피터현이 일찍 한국 문단의 ''''개구리 명창''''을 꼬집으면서 한국 소설의 치명적인 결함을 갈파한 적이 있다.

"한국 소설들, 특히 대하소설들은 대부분 기초적인 예술 형식이 결여되어 있고, 또 시퀀스(sequence, 순서)의 흐름이 아주 비논리적이며, 내용의 문제만 보더라도 작가의 사고나 창작 과정이 지극히 반논리적이어서 그들의 작품 세계는 마치 작은 연못 속 개구리의 세계처럼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가 부족하다."

이런 약점 또한 우리 조선족 문단이 안고 있는 결함 중의 하나 임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400명 가까운, 결코 적지 않은 작가 군단을 갖고 있는 우리 조선족 문단은 몽골족이나 여타 문단처럼 전국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그 영향도 아주 미미하다. 심지어 조선족 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한족이 많다.

우리는 ''''전국소수민족상''''이요, 무슨 상이요 하면서 "봐라, 우리는 인정받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도 있지만, 알고보면 우리의 문학 수준이 보편적 의미와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준 미달이라 해도 소수민족 우대정책의 일환으로 관대하게 봐 주는 것일 뿐이다.

아름다운 착각의 함정을 자기가 파고 자기가 빠지는 건 아닐까?

우리는 좀 더 ''''우리''''라는 울타리와 우물을 넘어서 보편적인 가치와 의식을 가진 인물과 작품을 많이 키워야 한다.

한가지 기이한 현상은 우리는 늘 ''''우리 조선족''''이라는 울타리 의식, ''''우물한 개구리'''' 식 구조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문단의 작가, 문인들은 대부분 시야가 좁고 의식 구조가 유사하다. 출신도 대부분 연변이며 대학도 연변대학 조문학부나 중앙민족대 조문학부라는 동일한 출신이 많다. 어쩌다 어렵사리 연변을 나와 해외를 간다해도, 일본에 왔다해도 현지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재일교포가 아니면 한국에서 온 동포, 특히 조선족끼리 모여서 내왕할 뿐이다.

결국 언제나 조선족, 한국교포, 해외교포, 조선족 하는 패턴으로 외국문화를 외면하고 ''''우리끼리''''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로 한사코 파고든다.

나는 일본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결과적으로 해외에 온 의미가 약해진다.

이 같은 울타리적 관성과 타성이 우리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문화풍토가 아닐까?

좁은 우물 속의 개구리 안목으로 기껏 쓴다는 것이 해외견문이나 해외체험, 일기 정도로 독자들을 눈가림하는 하위 레벨의 작품일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않는 한 영원히 선진 문단권, 한족 주체 문단권과 국제적인 무대에서 무시당하는 외로운 ''''고아''''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우리 문단은 아직 작다. 그리고 약하다. 그런 만큼 작게 시작하고 나발을 불지 말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나발통이 아니다. 실천하는 행동력 밖에 없다. 이 역시 우리 민족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이다.

시민문화가 없다 1

없다, 없다 우리에게/이 땅을 산/아버지의 무덤이 없다/어머니의 족보가 없다/없다, 없어 시방은/ 멀쩡한 20대 사나이에게/ 그 씨받이의 여인이//산 하나, 땅 한 뙈기/인삼 같은 존재를/무우 같이 버린다/어제는 빼앗겨 없고/오늘은 버려서 없고/있어도 결국은 없는/(無)...무...무...

흑룡강의 향토시인 강효삼의 시 〈없다, 있다-내 겨레의 자화상〉의 일부분이다. 조선족 농민들이 지금껏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소중한 땅을 버리고 도시로 진출하는 가슴 아픈 조선족 사회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이 남편과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돈벌이를 떠나면서 이별하는 사랑의 슬픔을 묘사한 에세이 〈리별의 쓰라림〉(김홍철)의 한 대목을 보자.

"…그녀는 이제 부득불 떠나야 한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무슨 말을 더 하랴? 다만 내 귓전에는 그녀의 리별의 리유만 쟁쟁하다."

다음은 현대 조선족의 가요 〈리별〉이다.

"촌구석에서 눈꼽만한 책임전(논밭)에 매달려 사노라니 얼마나 고달파요? 도시로 떠나겠어요…" 마치 전쟁터로 남편을 보내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이렇듯 1980년대로부터 조선족의 대이동은 시작된 것이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변경지역으로부터 내륙부로, 소도시로부터 대도시로, 연해지역으로 그리고 해외로 진출하는 이동은 하나의 전민족적 붐으로 가열화 돼 가는 상황이다.

농촌의 집거지구 조선족사회가 해체되고 농촌의 교육이 위기를 맞고, 조선족 남녀구조가 균형을 잃고, 조상이 개척한 땅을 버린다고 유지들은 대단히 걱정하고 있다. 농촌인구의 대이동은 농촌에 뿌리박은 터전을 타민족에게 양도하거나 폐기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조선족 농촌의 황폐화 위기를 유발한다고 여기저기서 야단법석이다.

조선족의 대이동은 하나의 폭발과 같은 사회 현상이며, 그것 또한 하나의 추세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마이너스적으로 잃어버릴 것만 통탄하고 가슴 아파해서 는 안 된다. 우리의 발상을 한 번 바꾸어 보자. 그 전통적인 향토의식을 180도로 바꿔서 플러스적 사고로 한 번 생각해 보자.

여기서 벌써 우리 조선족의 미래의 청사진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조선족 미래의 큰 밑그림이 이미 그려져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 없었던 도시 문명의 건설, 시민문화의 창출이다.

우리의 소중한 땅을 잃고 농촌이 폐허가 되는 위기 앞에서 무슨 소리냐고 질타하기 전에 우선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최근에 한 조선족 대학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 대학의 학생들의 시대적 감수성이나 정보의식은 북경시내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파는 노파만큼도 못하다"

우리 농촌 문화의 후진성을 질타한 비유로 해석된다.

시민문화가 없다 2

현재 우리 민족 부흥의 최대과제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유해지려면 도시화의 길 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시골구석에서 땅을 사시장철 대대손손으로 파봤자 금 노다지가 안나온다. 시장경제, 상품경제의 시대에 는 도시에 진출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통계를 보아도 현재 우리 연변자치주 인구의 60%가 넘는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산업과 서비스업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료녕성의 30만 조선족 중에 10만명이 심양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연변과 길림성, 흑룡강성 시골에서 속속 이주해오고 있는 실정으로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과거 북경을 중심으로 조선족이 몇 천명밖에 없었던 천진, 상해, 위해, 청도, 심수, 대련 등 대도시, 연해도시에 수 만 명의 조선족들이 이주하여 조선족 생활권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앞서 내가 조선족의 다원화구조를 얘기한 것은 바로 이런 현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같은 도시문화권 속에서 우리의 많은 기업가, 백만장자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민족기업이 하나의 산맥을 이루기 시작했다. ''백두산의 얼''이니 ''천지의 물줄기'' 니 하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같은 경제의 산맥, 문화의 물줄기를 마련하는 것이리라. 지금이 어느 때라고 ''랄랄라, 우리네 살기 좋은 고향이여!''하고 종달새 노래하는 흉내를 내야 하나?

2000년 5월, 심양에서 나는 전문 저술로 살아가고 있는 D라는 조선족 자유기고가를 만났는데 그는 신속히 대도시의 정보를 수집하여 기사나 리포트를 써서 국내 조선족 신문, 잡지에 기고하거나, 좋은 아이디어를 해외에 발표하여 적지 않은 원고료를 챙기고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원고료나 인세로 생활하기는 어렵겠지만 문화인의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하나의 패턴은 될 수 있다.

또 신문사 친구의 소개로 흑룡강성 출신의 동년배 기업가를 만났는데 그는 10년 전 흑룡강성의 벽촌에서 심양 시내로 80元을 들고 와 처음엔 풍찬노숙하면서 막노동을 닥치는대로 했다고 한다.

"다시 시골에 가면 영원히 일어날 길이 없다는 걸 심양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어요. 이렇게 좋은 도시를 놔두고 왜 우리 선조들이 한평생 땅만 파고 개구리 뒷다리만 따랐는지 리해가 안 갑니다…"

그는 현재 수 천만 元의 자산을 가진 기업그룹회사를 경영하는 패기 있는 젊은 사업가로 활약하고 있다.

도시문화권은 우리의 소질, 지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시키고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필수적인 바탕이다.

우리 조선족과 재일동포와의 비교에서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바로 도시문화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교포는 처음부터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고차원의 도시문화를 형성했기에 일본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인물들이 각계에 수없이 많다.

우리는 무엇으로 조선족인가? 1

우리는 무엇으로 조선족인가?

조선족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무엇으로서 조선족인가에 대해선 별로 사색하지 않는다.

투박하고 유니크한 함경도 사투리의 연변말을 쓴다고 해서, 뚝뚝하고 악센트 강한 평안도 사투리를 그대로 쓴다고 해서 우리가 조선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쌀밥을 먹고 〈아리랑〉과 〈도라지〉를 부르고, 백두산이 있고 해란강이 있어 우리가 조선족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신분증에 명기된 ''조선족''이란 한자가 있어서 우리가 조선족이 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중국 56개 민족 중 주목받는 민족이라고, 중국 속의 유태인이라고 아무리 우리가 개구리 명창으로 목이 쉬도록 외친다고 해서 조선족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너무 ''우리의 것'', ''우리 민족''을 유별나게 강조하고 내세우려 했다.

사실 우리가 조선어를 사용하고 벼농사를 짓고 우리 노래 전통문화를 꽃피우고 백두산 밑에서 해란강변에서 사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만으로도 여타 한족, 소수민족과 구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는 무엇이다''가 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엇이 아니다''가 우리를 열린 우리로 만든다.

즉 이론적으로 풀이하면, 우리는 무엇이다라고 해서 자신의 주체성이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 아닌지가 더욱 자신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날까지 우리는 거대한 중국사회 앞에서 포위되어 작은 마이너리티로써 《우리를 꼭 지켜야 한다. 우리 것만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라는 강박적 관념에서 우리 스스로를 옥죄어 왔다. 이 같은 강한 주체성의 확립 지향은 오늘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가 무엇으로써 조선족인가 하는 아이덴티티의 건설에 하나의 굵은 에너지가 되어온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정적인 하나의 큰 위험스런 함정을 스스로 파 놓았다. 우리 것만 내세우는 한편 우리 것을 너무 신성시하고 고집하여 폐쇄와 스스로 자신의 파워공간을 줄이는 함정을 판 것이다.

20세기 말의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세계 지구촌은 말 그대로 급속한 세계화, 글로벌화(全球化)를 이룩해왔다. 한번 고개를 들고 세계를 둘러 보라.

국제화, 세계화의 급속 행진에 따라 정보화시대, IT산업혁명시대로 들어선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 터진 뉴스가 금방 TV나 방송, 인터넷을 통해 안방에도 동시에 알려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와 동시에 세계 각 민족, 각 지역 인간의 생활 스타일이나 풍속, 취미, 사고도 유사하게 닮아가고 있다.

문화인류학적인 면에서 볼 때 인류의 역사상 지극히 독립적이고 순수한 문화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으로 조선족인가? 2

우리가 증류수의 순도같이 순수하다고 여긴 호주의 원주민사회도 결국 메라네시아 지역 속에서 여타 민족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규명되었다.

특히 근대 사회에서 문화란 고인 물이 아니라 언제나 유동하는 흐르는 물과 같이 이(異) 문화와 접촉하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혼합문화, 잡종문화, 복합문화라는 말과 같이 외래문화를 수입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형성해 가는 것이 오늘날의 문화다.

다만 그 혼합의 방법에 의해 문화가 다른 양상을 나타낼 뿐이다. 이를테면 중국문화, 한국문화, 일본문화 또는 조선족문화 하는 식으로 각기 다른 모습, 각기 다른 특징을 나타낼 뿐이다.

나는 복합문화의 시각에서 우리 조선족 문화 속에 5가지의 문화 시간이 혼합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있다.

첫 번째가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적 시간, 토착적 시간이다. 우리는 조선반도에서 탄생한 토착적인 샤먼, 즉 무속의 시간을 지금까지 갖고 있으며 우리 문화의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두 번째로 아시아적 문화시간으로 한자, 유교, 불교, 도교 등 동아시아의 고대문명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문화시간이다.

세 번째는 서구적 근대화, 산업 화의 문화시간으로 일상생활에서 두루마기를 벗고 양복을 입으면서 생활양식의 거대한 변화를 거쳤듯이 서구적인 논리, 경제발전, 도시문명 등 다이내믹한 시간이다.

네 번째로 중국 속에서 살면서 지대한 중국문화의 영향 아래 여타 소수민족의 문화도 흡수하는 현대 중국문화의 시간이다.

다섯 번째로 이상 네 가지 문화의 총 집결체로 우리가 ''조선족문화''라고 이름할 수 있는 문화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족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의 문화를 막론하고 이러한 복합을 통해서 자신들의 문화를 구축했으며 또 해가고 있다.

이런 대복합 문화의 오늘을 살면서 순수한 ''우리것'', ''우리민족''만을 고집해나간다는 것은 폭풍우 속의 촛불처럼 어려운 일이다. 내가 2000년 5월 귀국했을 때 심양의 코리아타운인 서탑에서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간이 앙케이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우리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되는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고 문제를 설정해주었다.

돌아온 답안에 가장 많은 항목이 ''조선말?조선어''와 ''습관'', ''조선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특징적이라는 조선말도 실제로 분석해 보면 단어의 70%가 漢字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음식도 우리의 고유라고 감히 소리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의 전통 명절인 정월 초하루 날도 사실 중국에서 온 것이며, 이날 우리 음식과 죠즈라는 중국음식을 다 같이 먹는다.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는 심벌로서의 ''조선족''역시 한자어다. 우리의 조상 단군도 한자다. 이런 것들이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우리 문화의 현실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조선족인가? 3

조상 단군이나 ''조선''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리고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의 디자인까지 새삼스럽게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가 정말 ''우리의 것''이라고 소리칠 만한 것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우리의 사랑스러운 애족가(愛族家)들은 "우리를 지키자. 굳건한 철벽같이 지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우리가 당장이라도 이 땅위에서 사라져 버릴 것처럼 부산을 떤다. 마치 ''우리 것''을 부르짖지 않으면 우리 조선족이 아닌 것처럼 떠든다.

물론 나도 ''우리 것''을 지켜야 하고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한다는데 대해 추호도 이의(異意)가 없으며 이것을 절대 나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조선족 동화의 위기의식''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민족의 유지(有志)라는 사람들이나 문화인 치고 누구하나 외쳐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위기의식을 느끼는 ''위기 의식파''의 일원이다.

위기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의 생사존망의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 민족을 지키는 하나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구호를 부르짖기만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유일한 수단은 아닌 것이다.

민족 유지인사들은 "우리는 민족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런 구호식 표현을 우리민족혼을 심어주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언뜻 보기엔 여간 멋진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누구 하나 특별한 사명을 띠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문인들은 걸핏하면 "우리는 우리 민족문학의 사명을 떠멨다"고 말하면서 문학을 하는 것이 마치 민족을 위해 싸우는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데,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문인 개개인의 직업일 뿐이다. 문학적인 작업은 글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직업이지, 그렇게 고상하게 떠벌릴 필요는 없다.

''민족을 위하여''란 말도 추상적인 말로써 진부하게 들릴 뿐이다. 민족의 진흥, 민족의 사명감, 민족의 자존심, 민족의 자랑과 긍지…

이 같은 중복되는 말, 비슷한 이념의 나열로 우리가 부유해지고 강대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름다운 수식어나 미사여구보다는 실제로 뭔가 하나라도 실천에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래서 좀 더 냉철해져야 하고 좀 객관적이어야 하고 좀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 쓸데없는 껍데기는 과감히 버리되, 남겨서 유지할 것은 지켜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것''만 내세우는 경직된 담벼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무 경직되어 딱딱하면 오히려 외래의 힘을 더 막아내지 못하고 그만큼 많은 충격을 받아 무너질 위험성이 크다. 일본의 지진방비 건축물의 유연 구조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

내가 소리높여 주장한 이민족과의 적극 통혼도, 도시로의 적극 적인 진출도 모두 이런 의미에서의 실천이다.

우리만 모르는 우리의 비극

지금 우리는 우리 조선족력사상 최대의 비극을 앞두고있다. 아직 많은 조선족과 매스컴도 눈과 피부로 느끼지 못했기때문에 과장된 표현으로만 받아드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머지 않은 미래 그 누구의 눈앞에도 확실히 비극이 되여, 재난이 되여 지진이나, 화산같이 일거에 폭발할것이다. 지진이나 화산하면 일본같이 지진, 화산의 나라가 아닌 우리에게 실감나지 않을수 있다. 예기하지 않고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이 예고없이 찾아들것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그리고 우리 조선족사회를 붕괴로 끌고갈 가능성도 없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교육체질이 내부로부터 썩어가고있기때문이다.《썩는다》는 나의 표현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냐》는 식으로 《당신 지금 제 정신 있냐》고 야단칠 사람이 한둘이 아닐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중국에 포위돼 살면서 우리 민족교육을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구전한 시스템구조를 이루며 어느 민족보다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면서 교육수준 최고의 선진민족으로 우뚝 솟아있지 않냐고 《조선족의 NO.1》설을 들먹이면서 나에게 반론할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렇지만》이다. 우리의 교육이 구조 내부로부터 병들고 썩고있다는것을 나는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민족의 수원(水源)인 교육이 병들고있는데도 어찌 외면하고 《랄랄라 번영하는 우리 단군의 민족》 할수가 있을가?
내 지론은 여기서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한(恨)이라는 에네르기가 어느새 살벌한 배금주의로 변질됐단 사실을 보았다. 개혁개방후 단시기내에 성급한 경제성장을, 부유의 축적을 시도한 리유로 서로가 잘 살아보려고 아우성치며 일제히 배금주의로, 금전만능주의의 외곬으로 몰려들었다.
전반 중국대륙의 경향이 그러하지만, 우리 민족은 전례없는 에네르기를 돈벌이에 주입하고있다. 조선족사회에 그 어디를 가든지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들리는 말이 돈, 돈 얘기뿐이다. 그래서 조선족의 사전에는 《돈》이란 단어밖에 남지 않았냐고 생각할 정도였다. 내가 아직 중국에 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살벌한 배금사상은 아니였다.
물론 배금주의가 근대화의 과정에서 거치지 않으면 안될 하나의 프로세스다.
예전에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에서도 배금주의병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휴머니즘운동이 생기고 발런스를 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배금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개인이나 민족이 있을수 있다는 점이다. 구미에는 민주주의의 근본이 있고 기독교라는 모럴티가 처방이 된다. 일본에 민주주의의 사상과 신도라는 리념과 집단주의의 모럴티가 강력히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민주주의도 기독교도 일본적인 모럴티도 결여된다.
배금주의가 만연되던 사회에는 단연코 사람들의 마음의 부패와 사회의 황페가 뒤따른다. 따라서 이런 사회는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모델, 본보기가 되는 가치관이나 리념, 모럴을 심어주게 돼버린다.

교육립국(敎育立國)이란 말이 있다. 우리에겐 아마 교육립족(敎育立族)으로 되겠지만, 교육이 근본이란 의미가 되겠다. 우리의 사회가 배금주의라면 우리의 교육은 배점주의(拜点主義), 즉 점수만 따내는 주의다. 어른들이 돈만 버는것 같이 아이들은 점수만 벌려고 한다. 아이들을 점수의 노예로 내모는것이 우리의 교육이다. 어떤 어른들은 아이가 시험에서 따낸 점수에 따라 용돈을 주는 배금주의와 배점주의의 기묘한 방법까지 아끼지 않는다.
우리에게 진짜 《교육》은 있는가? 교육(敎育)이란 말그대로 《가르쳐서 기른다》는것인데 인간은 이 속에서 지성, 감성과 창조력, 인간성을 배우면서 인간으로 성장되고 성숙된다.
우리의 교육은 대학을 나온 아이들도 지성, 감성과 창조력이 메말라있고 도대체 레벨이 말이 아니다. 많은 지수에서 한족대학생보다 졸업후의 발전이 없다는 결론이 나있다.
우리 민족은 IQ지수가 높다지만, 유치원부터 암기력 교육뿐이며, 독창적인 창의력교육은 터브이고 백지상태다. 시험이란 학교교육에서는 바로 암기력을 의미하며 표준답안에 의해 점수를 매기고, 점수만으로 학생의 능력을 평가한다.
외관으로부터 사고에 이르기까지 창의력이나 유별난 행동을 억누르며, 남과 같이 말 잘 듣고 점수 많이 따는 아이가 《우수한 학생》의 기준이다. 우리가 대학생 수자는 많아도 지적 창조력이 없고 전국적으로 국제적으로 눈부신 실적을 올린 학자, 문화인이 없는 큰 리유의 하나가 바로 이 배점주의의 희생양을 양산했기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소학이나 중학교, 고등학교는 엄청난 배금주의에 점령되여 선생들의 비즈니스터가 돼버린듯하다. 학생들에게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명목으로 비용을 거두는데 그야말로 가렴잡세보다 더 엄중하다. 《학교가 뭐 세무서인가?》고 학부형들의 불평이 분분하다. 우리의 교육이 벌써 교육이란 신성한 이름을 쓴 상사로 전락된 느낌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비외엔 비용이 안들었는데, 지금 예비반에 다니는 조카가 일년에 드는 비용은 내가 소, 중, 고등학교를 다닌 비용보다 많이 드니 웬 비용인가 아연해진다. 물가가 벼룩같이 뛰는 오늘이지만, 의무교육인 나라에 가중한 잡비는 아무래도 배금주의의 만연이 빚어낸 악과라고 민족유지들이, 학부형들이 분노한다.
이렇게 엄청난 학비를 치르고도 우리의 아이들은 민족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무얼 받는가? 우리 말만 배우면 민족교육인가? 우리의 민족력사교육은 백지상태다. 우리는 후대들에게 우리가 걸어온 뿌리를 알려주지 않고, 전통문화를 배워주지 않고도 당당히 민족교육이라고 자부한다.
조선족교육은 조선민족력사교육이 공백인 흑싸리껍데기다. 그래서 한족들이 우리에게 《조선력사》에 대해 물어보면 우리는 소개할것이 없다. 모르니까 당연히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당신들 조선민족이라고 하는데 민족의 상식조차 모르고 무엇을 가지고 조선족이라 할수 있냐》고 비아냥거린다.
우리의 교육과정에 조선력사, 전통문화과를 꼭 설치해야 한다. 우리의 행정, 교육을 관리하는 나으리님들은 여태껏 뭘하고있었는가? 까짓 감투가 떨어질가봐 두려워서 민족력사문화과목 설치하자는 말 한마디 제기못하나? 아니면 카라오케 아가씨의 환심을 사는것이 우리 아이들의 교육대사보다 더 중요한건가?

정치를 한다는 졸장부가 안되면 우리 인테리, 교육자들도 나서서 이런 정책을 만들게끔 왜 못하는지 나로서는 리해가 안간다. 세계사도 배우는데 같이 곁들여서 당당히 민족사도 배우면 안될가?
중국땅에서 살면서 우리의 뿌리를 아는것은 우리의 민족혼, 민족의 자부심과 프라이드를 심는 유일한 프로세스다. 이 제일 중대한 교육의 프로세스를 우리는 모르는지, 알면서도 외면하는지 선뜻 해결하지 않는것이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우리는 인구출생률의 저하현상에 대해 누구나 대서특필하지만, 왜 있는 아이들에게 대해서도 변변히 민족교육을 못시키는가? 있는 민족부터 잘 키워야 하지 않을가?
우리가 스스로 민족교육NO.1이란 화려한 간판에 가리워 교육이 썩는것을 체감못한다. 민족교육의 체질을 갱신하고 살리는것이 우리 민족을 파멸의 비극에서 구원하는 길이다.

타락하는 남자 추락하는 녀자(남자는 졸장부 녀자는 창부)

중국인(한족)들이 조선족을 무어라고 비아냥거리는줄 아는가?
《조선족이 중국사회에 공헌한것은 랭면, 김치에 구육(狗肉), 인육(人肉)》이란다. 랭면과 김치, 개고기를 대표로 하는 음식문화는 알만한데 《인육(사람고기)》이란 웬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릴가?
좀더 로골적으로 《조선족은 개고기와 사람고기를 함께 판다》고 비아냥거린다.
이래도 사람고기 판다는 얘기를 모른단 말인가? 바로 다름아닌 조선족의 녀성의 범람하는 매춘과 창녀를 빗댄 말이다.
화가 나고 당장이라도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상대방을 때려죽이고싶은 심정이지만 유감스럽지만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사정이다.
중국인들에겐 《미국의 집에, 독일의 자동차, 프랑스의 료리에, 일본녀자를 아내로 데리고 사는것이》 궁극적인 생활의 리상상이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가지 사항이 더 늘어났는데 《조선족녀자를 애인으로 삼는다는것》이며 좀더 로골적으로 《조선족창녀의 육체맛을 보는것》이라고 한다.
이런 희담까지 쉽게 당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동포녀성의 《성적매력》이라고만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상황이 너무 어긋난다. 분명히 한족들은 우리 녀성들을 우습게 보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희언과 비아냥거림에 대해서 분노하고 규탄하기전에 우리 자신의 추악한 모습, 우리 녀성들의 추락에 대해 반성적인 비판을 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바람직한 자세다.
예전에 중국에서 《현처량모》, 《현숙한 녀자》, 《유순한 녀성》의 대명사로 통하던 좋은 이미지는 《창녀》, 《기생》, 《매춘부》, 《야한 녀자》로 추락하고 있지 않는가!
당연히 나는 유교륜리의 치하에 있었던 우리 전통적 녀성의 《현처량모》, 《현숙한 녀자》에 대해서 비장하게 수호하고싶진 않다. 우리의 녀성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현처량모》형으로부터 야한 녀자의 전환은 이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진보적인 갱신일것이다. 현처량모가 부드러운 달이라면 야한 녀자는 끓는 태양이라 해야 할것이다. 네거티브한, 소극적인 전통적인 보수적 현처량모에 비해 야한 녀자는 포지티부하고 적극적인, 현대적인 개혁적인 요소들이 돋보인다. 우리 민족에게는 물론 현처량모가 필요하며 그뿐만아니라 야한 녀자의 적극적인 모습들도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적 진보의 필연적인 탈바꿈이며 하나의 민족갱신의 에너지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들을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주고싶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녀성들은 《야한 녀성》의 진보적인, 적극적인 차원을 껑충 뛰여넘어서 《추한 녀성》으로 추락되는것은 아닐가.
지금 조선족 사회가 번영창성(繁榮娼盛)시대라고 누군가 롱담으로 말하듯이,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성적써비스를 하면서 매춘부나 창녀로 일하는 조선족녀자들이 조선족의 기반인 동북3성은 물론, 중국 남부지역으로, 연해도시에 대거 진출하여 북경에서 상해, 광주, 심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국의 최남단인 해남도에까지 승승장구로 진출하고 있다. 상해에는 조선족 호스티스만 해도 2000명은 충분히 된다는 말이 있다. 전국 대도시에 널린 호수티스군단은 수만명은 된다는 짐작도 있다.
이래서 조선족호스티스, 창녀군단을 중국사회에서는 《20세기 조선족의 위안부》라고도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해남도에서 대학교수로 있는 한족동창에게 들은 얘기지만 해남도에서도 조선족호스티스를 만났는데 서슴없이 매춘까지 강요했다면서 예전에 있던 조선족녀성의 이미지가 떨어졌어도 이렇게까지 떨어진줄은 몰랐다고 술회하는것이였다.
실제로 심양에서 한족문인에게 들은 체험담이다. 그는 조선족술집과 한족술집을 자주 가서 이 두민족 호스티스를 비교하여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수치심이 강하고 유순하던 조선족호스티스가 더욱 방탕무진하고 쉽게 매춘을 한다는것이다. 오히려 한족호스티스가 더 수치심이 있고 매춘도 쉽게 안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심양같은 대도시에서는 조선족술집이 더 번창하다고 한다. 번창(繁娼)이라 표기해야 한다고 롱담으로 말하면서 말이다.
그야말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현시대의 조선족 희비극들이 여기저기서 빈발하고있다. 심양 조선족 S씨가 회사 출장으로 광주를 갔다가 현지 조선족술집에서 만난 20대초반의 호스티스와 눈이 맞아 흥정끝에 그날 밤으로 호텔로 직행하여 화려한 사랑을 나누었단다.
뜨거운 《운우지정》끝에 서로 나이차이를 넘어 애틋한 련정까지 싹트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S는 그 아가씨를 현지처로 달콤한 밀월을 보냈다. 차츰 서로의 신세와 프라이버시까지 공개하면서 S는 결국 20여년동안 만나보지 못한 사촌누이의 딸이란것을 알게 된다. 그때의 S의 심정이 어떠했을가는 더 말할나위도 없다. 이것은 희극? 비극? 그러나 웃음으로, 분노로만 넘겨버릴 얘기가 아니다.
오늘도 이런 희비극들이 조선족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재연되고있다.
D라는 조선족이 모여사는 향(鄕)이 있다. 10년동안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온 이곳 조선족인구가 60%를 차지하는데 거의가 향에서 건설한 아파트를 사고 아파트생활을 한다. 이 제법 규모가 큰 조선족단지(團地)에서 조선족의 추태극이 벌어진다.
호스티스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내에서 매일 벌어지는 스캔들, 추한 뉴스들이다. 한집에 남편이 아니면 아내가 한국에 건너가 돈벌이하는 가정이 수백세대 되는데 바로 아파트에 남은 조선족남녀들이 고독에 못이겨 회식을 하고 파티를 벌이다가 화통을 하고 불륜을 일삼듯하여 나중에는 집단 프리섹스까지 벌였다고 한다. 외국의 포르노 비디오를 같이 보면서 그 장면의 체위대로 프리섹스파티를 즐기면서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스캔들을 두고 한족들은 또 뭐라고 비아냥거리는줄 아는가? 초우센주( 鮮族)라고 한다. 아침이라는 그 《朝》자가 어느새 섹스한다는 《 》자로 바뀐것이다.
과연 남도녀창(男盜女娼)의 조선족사회다. 옛날에 중국인들이 함께 배신하지 않음을 맹세할 때 《천주지멸(天誅地滅) 남도녀창(男盜女娼)》이라고 외웠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이 언제 남자는 남의 녀자를 도둑질하고 녀자는 서슴없이 벗어주는 창녀가 돼버린걸가.

이런 조선족의 추악한 모습을 한국동포들에게 어떻게 묘사됐을가?
중국사정이 밝은 한국인 김윤호씨는 인터넷에서 《중국조선족에 관한 나의 보고서》에서 조선족의 못난 몰골을 이렇게 꼬집었다.
《연변의 거리에서 옷 잘 입고 돈 잘 쓰는 사람은 조선족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 가보면 말이 아닙니다. 물론 그 사람은 일이 없고 놀고 아내가 중국식 노래방에 다니고요. 한국에 돈을 벌려고 나온 중국 조선족아줌마들의 남편들은 연변에서 대부분 실업자로 술만 먹고 아내가 보내준 돈만 축내고있습니다.
옛날에 한국남자들이 중동에서 거지처럼 힘들게 돈벌어서 보내줄 때 한국아내는 그 피같은 돈으로 춤바람나서 다 써버린 그런 꼴을 지금 연변조선족남편들이 하고있습니다…》
김씨가 지적한것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다.
어디 그뿐이랴. 무능한 남편은 살기 위해서 아내까지 술집호스티스로 내보내며 심지어 매춘을 해도 눈을 감고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자기도 술집에서 창녀와 노는것으로 위안을 받으려고 한다. 심지어는 녀편네가 매춘을 하고 그 현장을 집앞에서 망보는 조선족못난이가 다 있다고 들었다.
아, 우리 남자들은 언제 이렇게 바보멍청이로, 못난이로 전락되였나? 술만 마시면 호랑이를 맨손으로 휘여잡고 룡도 올라타서 제압한다고 호언장담까지, 아니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같은 광언마저 서슴지 않던, 세상 똑똑하고 세상 잘난 호남아 대장부라고 뽐내던 사람들이 이럴수가 있을가.
내가 아는 조선족 가운데 30초반에 아내를 팔아 돈 쓰던 멍청이 하나가 목매여 자살했다고 한다. 참 잘 죽었다. 이런 졸장부가 살아서 귀한 식량과 물질을 허비할뿐 사회에 무슨 메릿트가 되는가!
요즘 우리 사회에 녀자가 남자를 뺨치고 서슴없이 버리는 풍조는 우리 남자들, 아니 졸장부들에게 대한 경종이다.
그러고도 무슨 개고기 먹고 개소리로 《남자는 하늘이고 녀자는 땅》이라고 수캐불알 앓는 소린가? 이런 녀성이 많아지면 졸장부도 줄어들것이다.
우리 사회가 우리의 남자와 녀자가 한족인들한테, 한국의 동포들로부터 서슴없이 희언과 폭언을 들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가슴아프고 안타깝고 괴로울지라도 당연하다. 욕먹어 싸다.
나는 이런 우리의 들뜬 현상들, 졸장부같은 남자, 창녀같은 녀자의 현상이 욱실거리는것은 우리 격변시기의 하나의 과정이라고 좀 넓게 푸짐하게(?) 보아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진보와 격변의 과정이라 해도 이건 해도 너무 하다. 못났어도 너무 못난 모습들이다.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알맹이는 남으라. 이건 굳이 외치지 않아도 사회진보의 생물학적인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이제 이 바글바글 끓는 격변의 가마가 어느 정도에 이르러 좀 냉정해지고 낙착해지면 남는것은 무엇일가 뻔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늦지 않다.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의 이미지 갱신을 위해,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 이제 못난이들은 사라져라. 우리의 이미지 갱신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실천력에 달렸다.

독안의 참게와 진흙밭의

소년시절 시골마을에서 본 참게(민물게)들의 모습은 오늘도 내 기억속의 영사막에 선명히 떠오른다.
시골의 강에는 민물게가 욱실거린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것없이 한가한 철이면 게를 잡는것이 시골사람들의 심심풀이기도 했다. 잡아온 참게들을 항아리나 독안에 집어넣고 애들은 그것들이 싸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게 한마리면 별 재미가 없다. 왜냐면 참게는 몸에 털이 보시시 나있고 발톱 또한 아주 날카로와 깊은 독안에 넣어도 어떻게 해서든 다시 기여나온다. 그 예리한 발과 몸에 난 털을 무기로 삼아 독 표면에 조금씩 울퉁불퉁한데와 흠집들을 타고 기어이 올라오고야 만다.
그러나 몇마리씩 복수로 함께 집어넣으면 어느 한마리도 못기여 나온다.
왜냐면 한놈이 오르기 시작하면 무조건 뒤에서 잡는놈이 있다. 가령 두놈 세놈이 꼬리를 잡고 같이 올라갔다면 네번째 놈이 밑에서 잡으니까 결국 네놈이 다 한꺼번에 미끄러져 떨어져버린다. 그래서 참게들은 영원히 독안에서 못빠져나오고만다.
나는 어쩐지 우리 조선족사회가 바로 이 독안의 참게와 같아보인다. 어느 한 사람이 튀여나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밑에서 잡아당긴다. 남다르게 빼어나면 배가 아파서 그냥 두고는 못견딘다는것이다. 자기보다 못하든지 적어도 같아야지 잘 났으면 환장한다. 가령 자기보다 월등 재주있고 잘 나가는 친구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친구의 유일한 흠이라면 큰 재주에 비해 키가 아주 작은것이다. 그의 재질에 샘나고 질투심이 엄청나니까 그의 작은 키도 욕하는 상대로 되여버려 《그자식 키 꽤 작다》고 비아냥거린다. 《작다》도 그냥 《작다》가 아니라 《짝다》로 된소리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것이 조선족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보다도 《별거 아니야》 《그저 그래》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앞에서 달리는 우수한 인재나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실적을 쌓아올린 실력자, 해외에서 많은 저서를 간행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젊은 문화인이 있다면 바로 《별거 아니야》, 《그저 그렇지 뭐》하는 식으로 우선 적극적인 긍정을 잘 안해주고 천방백계로 자기의 낮은 차원으로 끌어내려야 안심한다.
이것은 그래도 괜찮은 수준이다. 심지어는 튀는 사람에 대한 음으로 양으로의 인신공격, 명예훼손을 유치하려는 비렬한 짓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국제적인 문화비평가 백양(栢楊)의 《추악한 중국인》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그 중국인의 질투와 내홍의 모습을 상기시켜보자.
《매 한사람의 중국인은 모두 룡으로 보인다.
중국인은 저마다 말을 하는데는 달변이며 태양도 단숨에 불어 꺼버릴 기세여서 온 천하를 다스릴듯하다. 중국인은 단독으로 어떤 위치에 있을 때, 이를테면 연구실이나 수험실 같은 인간관계가 없는 상황하에서라면 대단한 발전을 가져올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이 셋이 모이면 즉 세마리 룡이 모이면 이내 한마리 돼지로 변하고만다. 한마리 벌레, 아니 심지어 벌레보다도 못하다. 그것은 중국인에게 내홍이 뿌리박혀있기때문이다.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내홍이 따르며 영원히 단결을 모른다. 아마 중국인의 체질에는 단결의 세포가 결여되여있는지 모른다. (중략) 중국인의 협력을 모르는 성질, 중국인의 내홍은 바로 중국인의 렬근성(劣根性)이다. 그것은 중국인의 품성이 악해서가 아니라 중국문화속에 병독이 있기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인》을 그대로 《조선족》으로 바꿔놓아도 꼭 알맞는다. 내가 한국인 비판서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에서 한국인의 질투와 내홍은 한국인을 호랑이로부터 지렁이로 만들었다고 독설을 서슴지 않았는데 한국인을 닮은 조선족이 다른것 티끌만큼도 없잖은가.
시골벽촌의 농민으로부터 엘리트 지식인, 문화인에 이르기까지 조선족이 있는 구석이면 언제나 그 추악한 모습이 그림자같이 동반한다.
연변문단도 시기와 질투와 내홍이 심하다고 들었다. 손바닥만한 연변땅에서, 그것도 얼마 되지 않는 문인들끼리 단합해도 시원치 않겠는데 무슨 파요, 무슨 패요 하면서 끼리끼리 질시와 반목이 거듭된다고 한다. 한 유명한 산재지구의 문인은 《연변에 가면 어느 쪽과 어느 누구와 술 한잔 마셔도 서로 라이벌이 심하니까 조심스럽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나는 연변밖의 문인들로부터 수많이 이런 고백을 들어왔고 내가 연변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기도 했다.
문인들의 이런 추악한 근성은 심지어 해외에 나가서까지도 그 악마같은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내가 일본에서 살면서 주위에 연변출신의 조선족이 모이고부터는 나의 조용한 삶을 깼다. 문인으로서의 나는 내 일에도 바빠서 숨을 못돌리겠는데 언제 누구하고 싸울 여가가 있겠는가! 또 내가 누구를 시기하고 미워할 추호의 리유도 없으며 내가 질투할만큼 재질있고 실적 올린 문인은 적어도 내가 사는 주변에는 없다. 박사생이 석사도 못따낸 약자에게 배아플 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야말로 수양버들은 조용히 살고싶은데 괜히 옆에서 바람만 분주히 부는격이랄가. 그래서 덕분으로 나는 그 악명자자한 《연변식 내홍》을 실체험할수 있었다.
나는 사실 이 《독안의 참게》를 운운하는 글도 별로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리 조선족사회의 여건이 새삼스럽게 이 진부한 렬근성을 들춰내게끔 만드는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고 무위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유감스럽지만 지금껏 누구나 이 렬근성에 대해 지적하고 꼬집고 규탄은 쉽게 하지만 이 렬근성의 발생근원에 대해 반성적해부를 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흔히 우리 민족의 질투심을 《사촌이 논 사도 배 아프다》는 속담으로 집약시킬수 있는데 질투심도 다 나쁜건 아니다. 적어도 경쟁의식에서 에너지로 전환될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 경쟁의식이 서양의 경쟁의식과 전혀 대조적이다. 서양의 경쟁이 공정하고 긍정적이며 건전한 경쟁인데 비해 우리는 음흉하고 부정적이며 저질적이다. 이것은 또 동양식 질투, 동양식 경쟁이라 하는데 우리는 순 신경성, 심리적인 저급단계에 머물며 그것이 일단 로출되면 그 신경질적인만큼 음흉한 행동, 상대에 대한 명예훼손, 프라이버시까지 공개비난하며 신체적인 훼손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공평한 겨룸의 행동이기 전에 상대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기가 서려 한다. 공평경쟁원리의 부재다. 우리는 옛날 조선시대의 촌스러운 마을의식을 그대로 지게에 지고 중국으로 왔기에 그것을 연변같은 특수한 촌울타리에서 고수해온 력사적 체험자이다.
극언하자면 우리는 아직 근대의 경쟁원리사회에 비해 원시적인 촌닭싸움하는 수준일뿐이다.
자유경쟁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현대의 경영경쟁에도 우리는 촌닭의 싸움일수밖에 없다. 자유적인 근대경쟁원리가 아니라 우리의 경제, 실업계의 문제는 잘 나가면 훼방하고 질투하면서 뒤에서 추악한 작간까지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연변《종합신문》에 북경지역 조선족기업인의 실태를 다룬 리포트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전분투가 조선족경제인들에게 있어서 고귀한 정신이라면 그에 따르는 지나친 독자적인 경영방식, 상호불신에서 파생되는 배타주의 등은 그들이 가져야 할 국제적안목을 흐리고있다(중략). 우리 경제사회에서 경영인들지간의 상호협력과 경제그룹화진척을 저애하는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온 사회가 이런 촌닭싸움의 질투와 시기덩어리가 여기저기 팽창하면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런데 이런 《독안의 게》보다 사람잡는것이 《니전투구(泥田鬪狗)》식 싸움이다. 연변동포들은 스스로도 《니전투구》란 말을 잘 쓴다. 《진흙밭에서 싸움하는 개》라는 뜻으로 원래 억척스럽고 끈질긴 투쟁정신을 상징한것이였다. 함경도 사람의 기질을 비유한 말인데 그것은 부정적으로 시기를 잘 하고 서로 개같이 헐뜯고 싸우는 추악한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 팔도의 기질이 나온김에 잠간 보기로 하자. 함경도가 《니전투구》라면 평안도는 《맹호출림》으로서 용맹한 기질, 황해도는 《석전경우》로 부지런한 성품, 강원도는 《엄하불석》으로 듬직한 성격, 경기도는 《경중미인》, 충청도는 《청풍명월》, 경상도는 《태산교악》, 전라도는 《세류춘풍》 하는 식으로 그 기질이 서로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연변지역은 주로 그 출신상 함경도가 많아 그같은 기질을 두만강을 건너 연변이란 오지에서 오래동안 동질성을 확보하면서 살아온데서 기질상 《니전투구》의 특질을 벗지 못했다고 한다. 문화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면 같은 지역의 사람들이 균질성 문화를 유지하면서 기질적으로 동질성을 지니면서 산다고 한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연변식 싸움을 《니전투구》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한것은 이같은 억척스러운 끈질긴 투쟁심을 경쟁사회에 도입시켜 활용했으면 엄청난 사회의 동질적인 에너지를 창출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이 기질을 서로의 시기, 질투 싸움, 쟁파싸움에 활용했던것이다.
중국의 력대의 혁명운동과 캠페인, 그리고 고금동서에 공전의 문화대혁명때 연변지구의 조선족동포들은 이 《니전투구》를 200%로 초대발휘를 실행해 반목하고 동포들끼리 싸우고 사람잡는데 악용했다는것은 이미 자타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주덕해의 비극을 한번 떠올려보라.
이래서 옆에서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변경내에서 비일비재했으며 한족들도 보기 민망하여 《왜 같은 동포들끼리 저렇게 물고 뜯을가?》고 경탄을 했다.
《니전투구》의 기본패턴은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여러가지 올가미와 족쇄를 만들어 생사람 잡는 것이다.
이런 투쟁의 전통이 오늘도 연변에서 《극좌》의 사악한 바람으로 여전히 살아있다고 한다. 문학작품도, 예술도 모두 극좌의 자대로 휘둘러 사람 잡으려고 든다. 그래서 북경이나 심양에서 발표할수 있는 글도 연변에서는 발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우리의 문인들도 야단법석이 아닌가!
연변에서 정치운동의 회오리 바람에 말려 언제나 타도의 대상으로 돼오던, 살아있는 증인 원로문인 김학철의 불운은 이점을 너무도 잘 상징적으로 말해주고있지 않을가? 김학철선생의 불운에 대해서는 따로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하겠다.

우리는 자신이 우리의 언어로 당당히 표현하고 발표할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목을 죈다. 재일동포문인들은 중국조선족문인을 제일 부러워한다. 자신의 말과 글로 발표할 자유의 공간을 우리는 어리석게 자신이 죽여버린다. 멍청이도 이런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대단한것도 아닌데도 지극히 당연한 리치를 표현했는데도 괜히 두눈을 씻고 계란에서 뼈다귀 고르듯, 발광한다. 그러다못해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격으로 한국의 상층기관에까지 밀고하고 훼방놓는 일도 한다고 한다. 그래 연변은 담벼락 없는 사상의 감옥이란말인가!
북경의 한창희씨는 이런 일을 술회한다. 지방에서 책임자로 일하던 조선족간부가 북경중앙기관의 요직에 승직했을 때 고향의 어떤 조선족동료들이 중앙조직부에 위조죄명으로 밀고한적이 있다고 한다. 이 고소장탓으로 중앙에서는 그 조선족간부에 대해 반년이상이나 엄격한 심사를 거쳤는데 결과 그 고발이 모두 허위와 날조한 것이 판명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희극은 그뒤에 씨나리오가 더 있을거라고 나는 단언한다. 중앙조직부에서는 《너희들 조선족은 왜 자기들끼리 미친듯이 물어뜯고 야단이냐!》하고 비아냥거렸을것이다. 다행히도 중앙어른들이 《니전투구》란 연변사람의 기질을 모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 바보같은 조선똥개들아》하고 꾸짖었을것이다.
우리는 《조선똥개》도 《독안의 게》도 아니여야 한다. 질투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의 하나라면 그것을 나는 없애자는 소리는 하고싶지 않다.
질투도 시기심도 있어야 한다. 하물며 개도 아닌데 사람사는 동네에 질투가 없으란 법이 있는가. 그러나 이 질투심을 끌어내리고 서로 사람잡는 똥개, 촌닭의 싸움이 아니라 근대적인 경쟁심, 공평한 경쟁의식, 라이벌 의식을 탄생시키면 우리 사회가 건전해지고 건강하게 발전하는 원동력으로 전환될것이다. 결론은 이것뿐이다.

왜 우리는 유치한가

도대체 왜 우리 조선족은 이렇게 유치하게 되였을가?
우린 잘못됐어도 엄청 잘못된것이다. 예전에 《연변일보》나 《료녕조선문보》기자의 인터뷰를 응할 때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한 기억이 나는데 정작 신문에 실린 인터뷰기사를 보니까 거의 흔적도 없다싶이 했다. 그래서 이번에 한편을 쓸수밖에 없다.

당연히 내 숨김없는 직설적인 지적에 불쾌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한다. 읽지 않으면 나로서도 별수없는 일이고.
우선 녀성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한족들은 우리 조선족(녀성)을 두고 《3H》라고 곧잘 칭찬해준다. 3H란 《會穿(입을줄 알고)》, 《會玩(놀줄 알며)》 《會打扮(치장할줄 안다)》. 3회의 영문자 첫머리가 H이기때문에 나는 《3H》라고 간편하게 략어화했을뿐이다.
확실히 우리의 녀성들은 멋 부릴줄도 몸 가꿀줄도 안다고 소문났다. 한족들은 조선족녀자들은 대개 얼굴이 둥글넙적하고 관골이 튀여나와서 잘 생기진 못했지만 얼굴화장을 잘한다고 폄하절반 칭찬절반으로 곧잘 평가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사람과 재일동포를 외모로 가려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그만큼 두 민족이 닮았거나 문화의 동질성이기때문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우리 동포와 한족은 첫 눈에 바로 구별이 간다. 생김과 몸의 육체적 스타일도 있겠지만 옷이나 화장으로 금방 금방 식별이 되기때문이다.
조선족, 특히 우리의 동포녀성들은 너무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있다. 나는 일본에서 살다가 한번씩 귀국하면 우리 동포녀성들의 획일한 모습과 화장술에 새삼스럽게 놀라며 웃어보곤 한다. 시력이 매우 나쁜 나에게도 옷차림과 겉모습으로도 금방 우리 동포녀성이 공항에서 내리자부터 내 시야안으로 들어온다.

조선족 《아줌마패션》은 한결같이 이런 모습이다. 위로부터 헤어 스타일은 영락없이 뽀글뽀글 양털같이 지진 파마머리다. 30대로부터 60대까지의 전형적 조선족 아줌마의 패션이다. 웃옷은 불라우스차림이 많은데 한결같이 진한 원색 이를테면 빨강, 검정, 노랑, 파랑 등 꽃무늬가 란무하는 헐렁헐렁한 차림이다. 그리고 아래로는 바람에 나붓기는 가랭이가 통나무같이 넓은 몸빼바지가 아니면 주름치마나 롱스커트다. 그것 역시 원색에 꽃무늬가 위주다.
젊은 아가씨들의 패션은 미니스커트에 불러우스나, 로출도가 높은 T셔츠가 많은데 그것은 막말로 《모기장》같은 투명도가 높은 나일론같은 소재다. 그리고
남녀로소 할것없이 크고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착용하고 다닌다.

특히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은 개눈알만한 보석이 붙은 반지가 주종인데, 그것을 자랑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언젠가 조선족랭면집에 들어갔는데 역시 그 개눈 보석반지를 낀 아줌마가 국수그릇을 들고 나왔는데 이것을 자랑하려고 보라는듯이 손을 그릇우에 올려놓고 들고오기에 그 시커먼 손가락이 절반은 국수그룻에 파묻혔다. 나는 국수를 못먹고 그 자리서 값만 지불하고 나와버린적이 있다.

화장도 똑같이 진하게 한다. 입술 립스틱이 빨강 진한 적색계렬이 위주더니, 요즘은 또 검은색 립스틱이 류행이여서 특히 젊은 녀자층에 많이 보인다. 연길의 호텔에서 서빙하는 다방아가씨를 보고 속으로 제발 죽은 사람같이 검은 립스틱은 안 발랐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웃었다.
조선족은 원래 몽골계통이여서 쌍까풀눈이 적은데 요즘은 열에 아홉은 다 쌍까풀눈이다. 왜냐면 한국의 영향으로 쌍까풀 성형수술을 다 하기때문이다. 더 우습강스러운 얘기가 있다.
내가 결혼하기전에 1996년 여름방학때 중국에서 조선족 아가씨선을 무려 11명이나 보았는데 다 똑같이 눈섭을 문미(紋眉)했다. 그 인공적으로 살에다 문신한 눈섭이 똑같고 보기 구차해서 다 퇴짜를 놓았다. 한번은 예술을 전공한 아가씨에게 《왜 눈섭을 인공으로 만드냐?》고 물었더니 《다 그렇게 하잖아요.》하고 대답한다. 다 하니까, 류행이니까 따른다는것이 그 리유였다. 10번째만에 선보는 아가씨는 다행히 문미는 안했는데 입술이 개피 바른듯 무서웠다. 결국 11번째까지 선을 보아야 했는데 결과는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
개피를 바르든 밀가루를 칠하든 다 자유이며 나는 그 자체에 대해선 전혀 시비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꼬집고자 하는것은 너무 류행의 포로가 되여 자기자신의 스타일, 개성적인것이 없다는것이다.
자기가 그 옷차림이나 화장이 맞나 안맞나에 대해선 전혀 상관치 않고 자기다운 리성과 개성이 없이 류행이라면 닭똥도 바르는 그런 유치성, 자기를 잃은 우렬(愚劣)한 유치원아이같은 유치성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있다.

《한국에서 류행이래요.》
이것이 우리 조선족 남녀로소 패션이 류행하는 전부의 리유다. 우리 조선족의 패션, 화장은 그야말로 한국을 그대로 모방한 유치성, 획일성, 그리고 몰개성 그대로다.

요즘은 또 조선족사회에도 노랑머리염색이 류행하고있는것 같다. 서탑거리에서 만난 조선족 10대애들에게 그 리유를 물어본적이 있다. 이쪽도 싱겁게 물어보긴 뭐 물어봤냐고 나중에 혼자서 웃었지만.
《요즘 한국에서 류행하잖아요.》란 대답이 돌아와서 《역시》했다.
우리는 《개성》이란 단어 자체를 잊고 살고있다. 그리고 자기의 감정이 우선이 되여 사고하는 지성을 잃고있다. 대신 유치하디 유치한 가벼운 문화가 만연하고 우리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있다.
배웠다는 소위 문화인들도 다른데없다. 일본에서 만난 조선족문인은 자기옷 입는데 얼마나 센스가 있고 멋있다고 자찬을 했는데, 입은 양복의 옷소매에는 메이커의 라벨이 그대로 붙어다녔다. 중국에서 하던 류행을 그대로 여기까지 가지고온 모양이다. 그러나 국제적상식으로 옷소매에 붙인 상품라벨은 입을 때는 떼는것이 당연한 리치이다. 일본학생들이 뒤에서 나보고 《중국인들은 왜 양복소매에 상품라벨을 떼지 않는가?》고 몰래 물어왔을 때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우리의 문학창작도 한국모방이 획일적인 류행이 되여, 경박스러운감을 준다. 제일 《개성》이 있어야 할 창작에도 우리는 개성을 유치한 모방에 양도하고있다. 나는 10여년전에도 우리 문학을 모방문학이라고 꼬집어서 어떤 사람들의 불쾌를 샀었는데 요즘의 모방은 더 격심하고 점입가경이다.

우리의 유치성을 우리의 감정 표현방식에도 큰 문제가 있기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김치와 매운마늘, 고추장을 먹어서 그런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랭정한 사고력이 부족하며 언제나 감정을 억제할줄 모르는것이 탈이다.

감정에 충실하다는것은 직설적이여서 좋은면이 되겠지만 감정의 억제와 콘트럴없는 발산은 유치의 극치일수밖에 없다.
동창회, 결혼식, 회갑식 등 모임에서 보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우리의 녀성들은 아무래도 어른다운 행동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만나서 반가우면 서로 손벽을 마주치고 퐁퐁 뛰며 까르르 웃는 모습이 마치 유치원아이들같다.
남자들도 한수 위를 뜬다. 만나면 서로 자기 말부터 시작한다. 그저 자기 말 아니라 그것은 가벼운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자랑판이 된다. 한족사람들은 자기 자랑을 잘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선족은 자랑을 잘하는 민족이다.》고 곧잘 혹평했다. 내가 체험한데 의하면 일본인도, 한족들도 자랑을 잘하지 않으며 감정을 억제하는 능란한 감정컨트럴의 처세술이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와 정반대다. 감정을 표현하는것까지는 좋은데 어린이같이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놓는것은 너무 유치하고 우직하다 할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한 조선족은 뒤에서 별명이 3부곡(3部曲)이라고 불리는데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다. 모여 앉으면 화제가 홍수같고 말수가
많은데 그 대부분이 자기자랑이다. 그 3부곡이란 1, 자기 자신의 자랑에서부터 시작되여 2, 자기 딸자랑 3, 나중에 자기 와이프자랑으로 승화되여 《자랑 3부곡》을 이룬다. 그것은 전혀 유머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경박하고 유치의 극치다. 차라리 말수나 적고 하면 자기 자신의 무지가 탄로나지 않기나 하련만. 그 친구가 없는데서 주위 사람들은 쉬쉬한다. 《왜 체통도 큰 사람이 저렇게 덩치값도 못하고 가볍냐!》
나는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에서 한국인의 유치함을 빗대여 《9살짜리 미숙아》라고 혹평을 한적이 있다. 일찍 맥아더장군이 일본인의 유치성을 보고 일본인의 정신년령은 12살이라고 갈파한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의 정신년령은 얼마냐면 나는 7살반이라고 하고싶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한국인보다 많이 유치하고 또 유치하기때문이다.
7살반, 그래도 유치원수준은 넘어서지 않았는가! 소학교 1학년생의 정도는 되니까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인은 뛰기전에 생각하고, 일본인은 뛰면서 생각하고, 한국인은 뛰고난다음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뛰는 과정에 뛰는 리유를 잊어먹는다.
우리는 아직 그만큼 어리기때문이다. 어리다는것은 앞으로 성장하면서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좀더 커가면서 성숙돼가자
.

! 연길 음주왕국

우리는 술이 술술 들어가는 술의 사회다. 술타령을 새삼스럽게 우리 체질갱신의 큰 덕목으로 떠올려야 되는 현실이 나는 안타깝다. 제목도 그래서 이렇게 《아! 연길음주왕국》하고 술술 나왔다.
그 옛날 한족이 기술한 《위지동이전》의 내용까지 들추어낼것없이 우리는 《술, 노래, 춤》의 3대 이미지를 세기말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전국에 알려져있다고 한다.
제일 인상 깊은것이 북경대학의 유명한 학자 계선림교수의 《연변기행》에세이의 조선족에 대한 묘사다.
《연길시는 작지만 택시가 많이 달리고 있었으며 거리는 아담하고 또 초라해보였으나 레스토랑과 노래방이 많았다.
연길사람들은 편벽한 변강오지에 살고있지만 맥주왕국의 독일사람들보다도 맥주를 더 많이 마신다.(중략) 독일사람들이 맥주를 음료수로 마시기때문에 나는 맥주의 고향, 천하제일은 모름지기 독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번 연길을 방문해서야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어리석은 착각을 했다고 깨닫게 되였다.》
이 말에 대해서 누구하나 반론할 조선족이 있을가? 당연히 없다.
내가 중국에 갈 때마다 파티나 회식에 나가면 초면인 친구도 내가 조선족이란걸 알면 첫인사가 《당신네 조선족들 술 꽤 좋아하죠》부터 시작된다.
뭐 내가 술주정뱅이 조선족의 대표라도 되기나 한듯 이런 수작이다. 그러나 화낼 리유는 없다. 왜냐면 이미 우리의 행동으로 이같은 호주(好酒)의 이미지를 확립시켜주었고 최근에는 호주에 호색(好色)이란 이미지까지 가세하여 호주호색이 돼버렸단다. 다 좋은 이미지는 아닌 모양이다.
음주량의 통계를 보아도 한족들은 기절초풍한다. 30만 인구의 연길시의 음주량이 1300만의 대도시 상해시보다 많다고 한다.
4000명을 상대로 앙케드조사를 샐행한 결과 알콜의존증환자나 알콜중독자가 한족은 천명당 28명인데 비해 조선족은 71명이나 되였다.
연변에 갈 때마다 나는 눈으로 《음주왕국》의 파워를 새삼스럽게 느끼군 한다. 연길의 밤은 울긋불긋한 네온싸인과 함께 술잔 부딪치는 소리로 찾아온다. 도시사이즈는 작지만, 서울의 명동이 그대로 이식한 모습들이다. 말그대로 불야성이다.
음주는 일차로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1차는 식당에서 머리를 마비시키고 2차는 다방에서 좀 깨고, 3차는 노래방에서 다시 취하고 4차는 양고기꿰임으로 밤참을 챙기고 5차는 사우나에서 몸을 풀어 또 한잔…》
이것이 연길시 음주의 스타일이란다. 연길시의 유흥업소가 특별히 번창하는 리유를 나는 알만했다. 그 작은 연길시에서 유흥업소에 하루밤 300만원씩 탕진해버린다는 얘기를 현지 문인들한테서 들었다.
중국의 동북에서, 아니 지금 중국의 북경, 상해, 청도, 해남도에서도 야외에서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발견된다면 백프로로 조선족이다.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고 원초적인 카오스속으로 들어가야 술판이 잘된것이다

술을 안마셔도 우리들의 목소리는 굉장히 크다. 술마시면 목청은 꼭 아버지 죽인 원쑤와 싸움판 벌이는것 같다. 원래 연변함경도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연변동포들이 모여서 술이 거나한 다음 큰 목청으로 떠들썩하면 더 못알아듣겠다. 언젠가 그런 연변친구에게 좀 목청을 낮추라고 했다가 버럭 화를 내면서 잡아먹을듯이 고함질러서 나는 아연실색한적이 있다. 한족들의 목청도 큰 축이지만 우리는 한족들을 뺨칠 정도로 떠든다.
내가 지금 연변조선족이라 했지만 사실 우리 전체 조선족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럴 때면 꼭 리성이 없는 감정밖에 남지 않은 광인들같다.
보통 로씨야같은 추운 나라사람들이 강추위로 인해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사는 동북지역이 추워서 그런가? 여름의 음주소비가 더 량적으로 많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만으로 리유를 캔다면 어딘가 여전히 석연치 않다.
우리는 말 그대로 《시도 때도 없이》술을 퍼마신다. 지금 한족들은 셋만 모이면 장사를 의논하거나 조직적인 방을 뭇는다지만 우리는 셋만 모이면 무조건 마셔대고 떠들어댄다.
한족들은 술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선족같이 만취하도록 꺼꾸러질 때까지 무진장 마셔대지는 않는다. 그들에겐 절제와 자기 억제의 리성이 언제나 앞선다.
《삼국지》, 《위지동이전》도 그렇고 예로부터 오늘까지 한족들은 우리 조선민족을 《조선사람들은 좀 먹고 살만하면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면서 놀기를 즐긴다.》고 칭찬만은 아닌 말을 했다.
궁리진성(窮理盡性)의 한족들과 고무진신(鼓舞盡神)의 조선족은 리성과 정서에서의 차이에서 대조적이라고 한다.
오랜 력사적 흐름속에서 우리는 랭철한 리성보다, 뜨거운 감정, 정서를 앞세우는 기질을 키웠다. 그래서 우리의 성격이 냄비같이 순식간에 엄청난 열을 내지만 또 그와 못지 않게 순간적으로 식어버린다.
술, 노래, 춤판으로 승화되면 우리는 신명난다. 신바람 난다고 한다. 술이 들어가면 우리는 신이 들어 엄청난 힘을 발산한다. 내가 심양에서 자랄 때만 보아도 조선족 마을에서는 모내기나 가을철 수확시절이 오면 농민들이 술을 마시고 신명이나서 노래까지 해가면서 엄청 초스피드로 일을 해버린다. 3일분을 하루에 다 끝낸다. 인근의 한족농민들은 《조선족은 힘이 나면 호랑이와 같다》고 경탄했다.
한국경제의 기적 역시 이같은 신바람이 낳은 경제적기록이였다. 그러나 일단 그 목표에 도달하면 우리 민족은 사명의식이 곧 시들시들 무기력해진다. 그러다가 이번에 IMF를 당해야 하는 불운을 맞게 된것이다.
우리는 술마시는 스타일도, 술문화를 체질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술이 없으면 개솔린없는 자동차와 같으니까. 우리가 술을 독약으로 여기고 끊는다는 금주는 좀 무리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우리는 술을 우리 민족이 분발하는 행동의 에너지로 바꿔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술마시는 그런 엄청난 정력으로, 술마시는 그런 거대한 물리적 정열을 뭔가 창조하는 에네르기로 전환시키자는 얘기다.
지금 우리가 잘 살아보겠다는 민족의 소원을 갖고 경제성장기에 처해있는 이때, 한족이 없는 이런 엄청난 에네르기를 발휘할 때가 왔다.

이미 고국인 한국의 한강의 기적이 본을 보여주었는데 우리라고 못할 리유가 있을가?
문제는 어떻게 경제발전의 파워로 바꾸는가에 달렸다. 우리의 신바람을 허비하지 말자.

동굴속에 사는 조선족

플라톤의 《공화국》에 동굴안에서 사는 신기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공화국 국민들은 모두 야밤같이 캄캄한 동굴속에서 공동으로 살아가고있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그 공화국의 한 남자가 동굴속을 빠져나와 몰래 바깥세상을 보게된다. 동굴을 나서면 안된다는 터브를 깨고말이다.
동굴밖의 세상이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줄을 몰랐다. 찬연히 빛나는 해빛과 한없이 맑은 공기, 그리고 여태껏 보도듣도 못한 밝은 세상… 이날까지 캄캄한 동굴에서 산것이 너무 한스러웠다.
남자는 다시금 동굴안으로 돌아와서 동굴밖의 세상이 그렇게 밝고 아름다울수 없다고 공화국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동굴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결국 남자는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보지 말아야 할것을 보았기 때문 이였다.
오늘의 우리 조선족사회가 바로 이 동굴과 같다. 또한 여기서 사는 우리는 해빛과 공기를 거부하려 한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가를 모르면서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나는 《우물안 개구리》로 우리 조선족을 비판한적 있는데 우물안 개구리는 그래도 매일 우물만한 하늘을 보면서 그 작디작은 하늘을 통해 언제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부는가에 대해 천기예보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민감하고 뛰여난 예지능력을 갖고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맑은 하늘과 해빛 그리고 별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물안이 아니라 캄캄한 동굴에서 사는것은 아닐가? 세계를 보고 세계를 알면 우리가 얼마나 비좁고 어두운 동굴안에서 페쇄돼있다는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겨우 20세기말 90년대에 한국을 통해 직접 세계를 보게 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은 세계적 선진국이 아니라 선진국 문턱에 바야흐로 들어서려다만 나라다. 하더라도 우리는 장족이나 몽골족보다는 운이 좋았다. 아세아의 룡의 나라의 하나인 한국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굴속에서 한 세기동안 키워온 페쇄성과 고집때문에 진짜 세계의 좋은것을 풍부한 감수성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고흐나 모네의 탁월한 일류의 미술작품을 보고 그 진가를 리해한다면 우리 자신들의 그림을 보고 스스로 평가를 내릴수 있을것이며 《한국문학도 별것 아니며, 한국문학도 거기서 거기야》라는 난센스한 소리는 안했을것이다.

우리는 세계적 브랜드(명품)을 좋아하지만 그 브랜드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누가 브랜드라고 하면 무조건 브랜드라고 믿고 속아넘어간다. 그것은 우리가 브랜드에 대한 상식조차 없기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어떤 브랜드가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한국의 쌍방울표 양말을 세계적 브랜드로 착각하거나 심지어《MEDE IN CHINA》란 영문자도 브랜드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소위 작가라는 량반이 양복소매에 달린 상품라벨을 떼지 않고 다니면서 자랑하려는 우습강스러운 《국제적 조크》는 없어야 한다.

진짜 세계적인 브랜드에 대해 너무 아는것이 적기에 사기를 당하고, 스스로 망신을 당하는것이다. 브랜드지향은 나쁘지 않다. 다만 진짜 좋은것, 진짜 브랜드를 우선 많이 알아야 추구를 해도 추구할수 있지 않은가.
어느 조선족 친구에게서 이런 우스운 얘기를 들었다. 물론 누가 만들어낸 조크다.
대련에서 청도로 행하던 려객선이 고장이 나서 침몰될 위험에 직면했을 때 열댓명 승객이 바다에 뛰여들지 않으면 배가 곧 침몰되기에 선장이 각 민족에게 뛰여내리게끔 한 말이 있다. 그 말에 따라 배에 탔던 민족이 용감하게 뛰여내렸다고 한다.

한족에게 《당과 인민을 위하여》라고 하자 그들이 뛰여내렸다. 장족에게는 《라마의 자유와 사랑을 위하여》하자 뛰여들었다. 몽골족에겐 《칭키스칸의 위대한 명예를 위하여》하자 뛰여들었다. 마지막 남은 조선족에게 《자, 모두가 뛰여내렸으니, 따라서 뛰여내려야지요!》하자 따라서 뛰여내렸다고 한다.
동굴공화국의 사람들같이 아무 주체성없이 따라하는것이 조선족이라는것이다. 개성이 강하다고 띵띵 소리치는 속내는 텅빈 몰개성과 유치에 가득차, 류행을 따르는데는 최고로 돼버렸다.
제일 개성이 있다고 여기는 우리가 도리여 제일 개성이 없고, 제일 국제감각이 있다고 자처하는 우리가 오히려 제일 국제적 감각이 없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따라하는데만 열중하여 진짜 정보의식은 빵점에 가깝다.
배운다는것이 돈자랑에, 허영심에 들뜬 과시 따위다. 한국에 많이 드나들면서 배운것이 고작해야 이것뿐이다.
이래서 나는 조선족은 노래음치는 아니지만 정보음치라고 본다. 좋은 정보, 좋은 뭔가를 못배운다. 그런 찬스가 모처럼 차례졌는데도 포착을 못한다.
《왕바두즈》의 이야기를 또 해야겠다. 조선족의 할머니가 60이 넘도록 배운 한어란 왕바두즈(씹새끼란 뜻)밖에 없었다. 어느날 자기 아들이 근처 한족남자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했는데 아들을 두둔해서 그 한족사나이를 찾아가서 만나자마자 무조건 《왕바두즈》를 퍼부었다. 사실 중국서 평생 살아도 중국어를 배우지 않은 할머니가 그 욕의 뜻을 전혀 리해할수 없었으며 막연하게 욕이란것만 알고있을뿐이였다.
왕바두즈란 중국어에서 최고 치욕의 욕말이다. 별거 아닌것 가지고 이렇게 지독한 욕을 먹어야 했던 한족남자는 분하기도 했지만 이 조선족할머니가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그래서 《할머니,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말 좀 많이 배우세요.》하고 한마디 하고는
웃고말았다고 한다.
우리의 정보의식은 질박한 할머니와 같은 수준이다. 배우고 열심히 자신의 레벨을 향상시키고자하는 의식조차도 모자란다.
나는 일본사람들이 어떻게 정보의식이 드높고, 어떻게 국제적감각이 있으며 외국의 선진문물을 잘 배우는가를 더 언급하고싶지도 않다.
일본사람만 높이 올리추고 우리 민족은 내리 폄하시킨다는 불평이 먼저 나오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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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족사람들도, 우리가 미개하고 게으르다고 경멸하였는데 어느사이 그들은 정보를 적극 파악하고 좋은것을 배우는 감수성이 우수하게 탈바뀜하지 않았는가. 김치, 랭면, 보신탕에 고추장까지 우리 수준을 릉가할 정도며 벼농사도 그들이 더 잘 짓는다.
우리는 정보력과 감수성, 좋은것을 따라 실천하는 능력에 예전은 한족보다 앞섰다고 했으나 지금은 후진이 돼버렸다.
선진문화를 먼저, 또 직접 접촉한다고 해서 발전한다고는 단언할수 없다. 문제는 그 선진문화를 먼저, 거기서 발신하는 정보, 지식들을 어떻게 민첩하게 입수하는 감수력과 우수한 실천력이 따르는가에 달렸다.
우리는 동굴의식의 폐쇠성, 소심성, 자승자박의 터브따위가 너무 우리를 옥죄이면서 밖에 나갔다 해도 의식은 여전히 동굴을 못리탈하고있다.
그러기에 찬스를 놓치고 눈앞에 있는것도 잡지 못하고 버린다. 우리의 그 어둡고 캄캄한 동굴의식을 철저히 부수지 않는한 우리는 언제나 동굴안의 바글거리는 신세를 면키 어려울것이다.
우리의 정보의식부터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우리는 전례없는 의식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터브주식회사

조선족사회에는 예나 지금이나 늘 개운치 못하고 석연치 못한 일종의 유니크한 공기가 가슴을 압박하는 플래셔 장치같이 떠도는듯 하다.
이것은 한족사회, 특히 해외에 나와보면 무의식적인 비교를 통해 더한층 강렬히 느껴온다.
이 플래셔장치같은 공기가 지금까지 내가 이 책에서 언급해온 여러가지의 마이너스적 렬악한 실태를 낳은 장본인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조선족사회에 압박하는 무거운 공기의 원류는 바로 터브가 너무 많기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조선족사회를 《터브주식회사》라고 칭하고싶다. 터브주식회사란 내 발명이 아니라, 조선족사회의 상황이 이런 닉넴을 산출시킨것이다.
왠지 조선족은 스스로 터브를 만들려는 성향이 강하게 존재한다. 저마다 이 주식회사안에서 터브란 제품생산에 열중하는듯하다.
우리에겐 분명 자기비판과 자기해부를 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같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외면하거나 변소뚜껑을 덮듯 구린내를 덮어버리고 터브로 취급해버리려고 한다.
영국의 메아리 쉐리가 쓴 기괴소설《프랑켄슈타인 혹은 프로메터우스》(1818)에 등장하는 주인공 프랑켄슈타인은 추악한 인조인을 만드는 사람이다. 1931년 미국 유니버설영화사에서 영화로 제작하여 히트를 쳤다.

우리는 마치 터브라고 하는 추악한 인조인을 만들어놓고 그런 추물에게 잡혀서 옴짝달싹 못하는것이다.
내가 처음 터브와 정면으로 트러블을 일으킨것은 소학교 5학년 때였다.
그때는 공부를 하는것도, 숙제를 하는것도, 운동으로 축구를 하는것도 모두 조국과 당을 위해서 한다는 말이 일색으로 통하던 1970년대초였다.
나는 그때 벌써 구소학생 륙상대회에서 이미 여러번 각학년조에서 쳄피언을 한 100m, 60m단거리선수로 뛰였다.
체육선생님은 열심히 맡은 일에 충성하는 모범체육교원이였다. 구륙상경기대회 바로 전날, 동원대회에서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며, 《친선은 첫째, 시합은 둘째》라고 당시 류행했던 말로 연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셨다.
이런 설교는 이미 귀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들어온터라, 무료하여 그만 하품을 크게 했다.
평소에 나를 끔찍이 아끼는 체육선생님은 나를 지명하면서 왜 하품하냐고 꾸짖었다.
《너무 많이 들은 얘기라서 재미없었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속으론 무명의 화같은것이 치밀어올랐다.
《 〈친선제1, 시합제2〉는 우리가 지켜야 할 당중앙의 교시인데 재미 없단말인가?》
선생님은 더욱 큰소리로 버럭 고함질렀다.
《운동시합은 시합이 첫째지 왜 친선이 첫째가 됩니까? 그럴바엔 시합 안하고 서로 악수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이런 말이 리치가 없다고 여기던차라 나는 더욱 솔직해졌고 그것을 여럿에게 말하고싶었다.
《이건 사상문제야…》
나는 얼굴이 빨개진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망신시키는것 같아서 더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후 안정되자 선생님은 상냥하게 나에게 타일렀다. 만일 래일 경기에서 1등을 따낸다음 선전보도자 기자들이 일등한 감상을 물으면 꼭 《조국을 위해 모주석을 위해 몸을 단련했기에 일등했다.》고 대답하라는것이였다.
그때 나는 반발해나섰다.
《나는 나를 위해서 일등을 했다고 대답할래요.》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지?》
《내가 몸이 약하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 단련한것이지. 조국 위해, 모주석 위해 한다는건 너무 거짓이예요.》
그러자 선생님의 얼굴이 파랗게 변색했다.
《절대 그런 소리 말아, 꼭 조국 위해 단련한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서 정 그렇다면 래일경기에 못참가시키겠다고 하였다. 나는 경기에 나가기 위해 선생님의 말씀대로 하겠노라는 대답은 했지만 속은 여전히 불복이였다. 나는 지금도 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반골정신이 있었다고 새삼스레 느껴지군 한다.
우리 조선족사회에는 지금도 그 선생님의 설교같은 터브,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터브, 유형, 무형의 터브가 너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조선족사회에 아직도 정치이데올로기적인, 문화대혁명의 그런 《터브》들이 우리 사회에 떠돌면서 자승자박하고있다.
원로문인 김학철선생은 이것을 《유령, 밀령주의라는 유령이, 우리의 주변을 떠돌고있다.》고 언급하시면서 이런 터브가 존재하는 한 《하늘아래 사람답게 한번 좀 제대로 살아볼 생각을랑 아예 마시라》고 한탄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런 무시무시한 터브로 조선족 스스로 억압을 가하니 비통한 일이다. 그리고 우습강스럽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이런 유형의 강력한 터브가 아니고라도 우리 일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크고작은, 유형, 무형, 음으로 양으로의 터브들을 낳고있는가!
우선 어린이가 밥먹는데 숟가락을 왼손으로 쥐면 안된다는 터브로부터 이색적인 괴짜의식을 우리는 말살해버리려 한다.

조선족 교육현장에서 흔히 글쓰기작문으로부터 벌써 터브의 허들을 겹겹으로 세워놓는다.
작문에는 꼭 도덕적인것을 담아야 한다는 터브가 획일성으로 존재하고있다. 우리의 교원들은 소학생의 일기장을 체크하며 《고상한 도덕사상》주입을 강요하고있다. 그림을 그려도 사상내용을 담은 도덕이 꼭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야지 형식만 있는 예술은 배제당한다.
그러니까 우리 조선족 아이들의 비판정신과 창조력은 시초부터 이런저런 지켜야 할, 아니 깨지 못할 터브에 눌려 죽어버리고만다.
내가 10대에 문학공부를 할 때 어떤 어르신님이 내 글을 보고 고개를 저으면서 《글을 이렇게 제멋대로 쓰는게 아니다. 사상과 도덕을 담아 인민대중을 교육할 힘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인민대중들을 교육할 힘도 감화시킬 재간도 없었으며 단지 좋아서 쓸뿐이였다.
나는 어렸을적부터 자질구레한 터브가 싫었다. 지금도 이런 소위 《빈곤정신》은 나에게 살아 숨쉬고있으며, 아마 내가 이 조선족을 비판하는 책을 써낼수있는 리유도 역시 여기서 비롯될것이다.
우리 조선족은 아직 중국에서는 소년다운 어진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우리는 아직 미증유의 세계를 많이 겪어야 하고, 많이 접촉하기 마련이다. 왜냐면 전에 없었던것이 개방을 통해 만나는 상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선족은 없었다고 무조건 《안된다.》는 식이다. 이미 선진국이나 선진민족에서 실험이 끝난 완성상태인데도 우리는 《안된다.》는 터브를 새로 만들어 거부하거나 감히 다치지도 못하는 버릇이 있다.
좀더 대담해지고, 과감해지고 열려야 한다.
술 잘먹고 간이 하늘만해서 뽐내던 그런 호언장담의 혼백은 어딜 갔나?
터브가 무슨 쓸데있는가? 무엇이
있다고 미련을 두고 쉬쉬들 하나?
이제 터브를 위한 터브는 끝내야 한다. 그것을 끝내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이 끝나버린다.
진짜 자유의 공간에서 사람으로 살아갈수있는 관용과 여유의 하늘을 자신들이 만들어야 한다.
《터브주식회사》, 이제는 폭발해버리고, 그 우에 자유의 공원을 짓자. 모두가 자유라는 제품을 파는 인간이 되자
.

왜 유명 조선족학자, 문화인이 탄생할수 없을가?

우리는 56개 민족가운데서도 대학진학률이 최고이며, 교육보급률이 제일이라는 《문화민족》으로 알려진듯하고, 우리 자신들도 이것으로 자부하고있지만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학자, 문화인, 탤런트가 없다. 유명인 탄생률은 《문화민족》이란 라벨에 부끄러울만큼 꼴지에 속한다. 꼭 56개민족의 제일 끄트머리로 꼴찌가 아니더라도 하위수준에 속한다고 해야 할것이다.
하늘과 땅의 차이다. 이 격심한 갭(격차)은 분명 뭐가 잘못되여도 단단히 잘못됐다. 기초가, 지반이 그만큼 든든하다면 쌓아올린 빌딩은 하늘을 찌르도록 높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초, 지반만 있을뿐 그 기초위에다 겨우 4층반짜리 5층도 못되는 초라한 시골벽촌의 향정부건물 수준급밖에 안된다.
대체 그 무엇이 우리의 영웅들, 위인들, 유명인들을 배출시키지 못하는 리유일가?
《독안의 참게》가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독안의 참게》같아서 누가 튀면 안된다. 꼭 밑에서 끌어내려 평범한 수준으로 균질수준으로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린다. 튀는 사람을 밀어주고 세워서 우리의 얼굴인 하이러로 만드는 사회적풍토가 우리에겐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나란히!》부터 배운다. 줄을 서도 조금이라도 튀여나오면 엉덩이 채인다. 모두가 나란히 똑같이 일치성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오른손이라는 균일성의 강박관념에 맞추려고 왼손잡이마저도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어렸을 때 왼손으로 글쓰던것이였는데 부모님과 선생님이 억지로 왼손으로 글을 못쓰게 하여 결국 오른손으로 쓰게 되였다.
서양에는 왼손잡이도 오른손잡이만큼 동등하게 본다. 클린턴대통령도 왼손잡이고 다빈치도 모차르트도, 그리고 미켈란제로도 왼손잡이다. 정상과 함께 이상도 같이 살려주는 서양은 개성을 존중하고 개성을 키우는 교육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성은 이단이 되며 전반급에서 조금이라도 선생님말씀을 안 들으면 《나쁜 아이》취급하기 일쑤며 선생님의 말대로 졸졸 따르는 《해바라기》어린이가 리상적인 좋은 학생이였다. 온 사회가 그러했다.
지금도 우리는 조금만 튀는 패션까지도 아니꼬운 눈초리를 보내며 《왜 저 모양이야.》하면서 한번 더 흘겨보고 한바탕 설교라도 해주고픈 심정들이다.
지나치게 남의 행동을 감시하는 버릇과 함께 우리는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버릇이 있다. 우리는 질서의식은 한족보다 그나마 강하지만 개성표현의식은 주위시선에 경계하며 미약하다.
우리에게는 왼손잡이도 허용하지 못하는 버릇과 같이 조금 이질된것을 허용하지 못한다. 조금 이상한 사람, 괴이한 특색, 이재(異才), 괴재(怪才), 귀재(鬼才)는 하나도 없다. 허용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스스로도 이렇게 눈에 튀게 나올 용기를 우리는 갖추지 못했다.
수십년이나 유능한 괴짜들을 상대로 연구에 몰두해온 에딘매러대학의 교수 데이비드 위스크는 《정상과 이상의 연구》에서 괴짜들의 특징을 《용기있게 자기개성을 내세우고 일반인들에게 즐거움을 주며, 개방적이고 락관적이며 어떤 틀에 얽매이기를 꺼리며 창조적이고 호기심 왕성하며 리상주의적》이라고 갈파했다. 아무튼 일반성과 다른 《개성》과 《기이항》에 그 비중을 둔 인재들이다.

우리는 위스크의 괴짜의 조건까지 들먹일것없이 개성 하나도 변변히 갖추었거나 표현하는 의식이 없다. 뽐내거나 자화자창은 있어서 그것은 싸구려 호언장담이나, 가벼운 자기과시욕일뿐 내심엔 개성이란 실물이 비여있다.
우리 사회가 개개인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창조력을 유발하고 충분히 발휘시킬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개성적인 표현을 너그럽게 대해주고 괴짜들을 박수쳐주고 부족하면 만들어서 완성시켜주어야 한다.
우리의 문단을 보아도 좀 색다른 작품, 이색적인것, 기성적인 틀을 깬 작품구상과 그런 작품이 나왔다하면 편집도 그렇고 작가도 그렇고 그런것은 《우리에게 없다》,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로 일축하여 그 생기발랄한 창의력을 싹트는 단계에 죽여버리기가 일쑤다.
벌써 근 20년전의 일인데 당시 아직 10세인 나는 좀 이색적인 습작을 해야겠다고 제법 서양모더니즘 표현양식을 흉내내여 단편소설이라고 써보았다. 딴에는 자신감있게 편집이나 문학을 하는 선배들께 보이면 《이런것들은 우리 사정에 맞지 않으니 쓰지 말고 딴것으로 쓰라》는 천편일률적인 설교가 되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공식같은 설교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내 배짱에는 소설을 안하면 안했지 내 주장은 꺾이고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소설가로 되지 못한채로 있다.
우리는 개성과 함께 좀더 다양한 능력, 다양한 아이디어를 비롯한 우리 사회, 문화자체의 다양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사회, 특히 연변의 조선족사회는 너무 동질성, 획일성을 띠고있다. 내가 보건대 술먹는 스타일도 옷입는 스타일도 쓰는 작품도 너무 획일적인 동질성을 띠고있다고 본다. 좁은 울타리속에서 그런 균일성은 기피할수 없다고 역설하면 더 이상 할말은 없지만, 우리는 분명히 다양성, 개성을 추구하는 의식조차 별로 중요시되지 않는것 같다. 그리고 매일 생활양식도 거의 똑같은 동질성속에서 술 마시는 회수나 회식하는 차수는 무지 많아도 실질적인 정보교류, 열린 개방적인 대화가 결여하다.
례를 들어 한국의 어떤 훌륭한 문학작품(책)을 누가 갖고있다면 동료로서 당연히 공개해야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리용되면 마치 자기가 뭐 손해라도 보는듯이 여긴다. 개방적인 정보, 지식교류가 차단된 이상 실제로 서로 플라스될것이 무언가? 열린 대화와 교류의 문화가 형성되여야 서로 자극을 받고 창작을 활성화시키며 다같이 발전할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인물의 재능을 공정히 평가해주고 격려하고 부추겨주는 분위기가 없다. 끌어내리지 않으면 흔히 인물이 갖고있는 결점이나 성격을 갖고 흐지부지 시비하며 비난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인물, 능력보다도 뚱딴지같은 《정치, 사상각오》라는 자대로 휘둘러 내리까려는 악질행위가 고질로 잔존하고있다. 학문과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츄어가 정치표준이라는 어마어마한 고깔모자로 생생한 재능과 인재를 죽이려고 덤빈다. 《천재죽이기》의 싸움은 오늘도 치렬하다.
바로 우리의 동포사회가 그런 전형적모델이다. 개성과 창의력과 기발한 아이디어, 유능한 인재, 괴짜들이 여기서는 생길수도, 살아남기도 어렵다.
우리의 조선족력사가 짧지도 않은 100여년, 한세기가 되였지만 우리 사회에서, 니전투구의 용사들은 무지하게 많이 났지만 유능한 전국 내지는 국제적으로 얼굴을 내민 유명학자, 문화인은 너무도 적다.
굳이 김학철선생님을 《연변인재》로 꼽는다면 그가 그렇게 불운했던 인생을 감내해야 했던 비극은 바로 연변사회가 장본인이다. 북경이나 여타지역에 있었다면 이같은 불운을 평생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을가. 아무튼 그는 연변의 불행 그자체다.
문화의 자유로운 분위기, 개성을 허용하는 문화적인 풍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기 위해서 나는 우의 인물과 사실을 부득이하게 든것이지 뭐 별다른 의도가 있는것은 아니란것을 독자제현들도 리해하리라 믿고싶다.
이제 연변의 자유로운 문화환경만 만들어지면 뭐 그리 비관할건 없다. 잠재력을 개발하는것도 큰 능력이라면 연변사회가 잠재력을 발휘시킬수 있는 분위기, 객관환경을 만드는것이 경제의 부흥과같이 중요한 급선무다.

이제 조용히 살자

언어의 특색이나 표현방식에 따라 그 언어가 어느 직종, 어느 상황에 적합한가를 따져보면 재미난 결론이 나온다.
중국어는 4성이 있으므로 음악적이여서 사랑을 속삭이는데 알맞고, 일본어는 늘 상대의 립장을 우선하여 이쪽을 낮추는 수신(受身)의 언어이므로 비지니스하는데 적합하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어는 어떨가? 직설적인 표현과 억양의 높고낮음의 차이가 분명해 싸움에 적합한 언어다. 말그대로 그것은 싸움을 위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중국어도 억센 느낌이지만 4성이 있어 그래도 그것을 커버해주어 률동적이지 않은가.

특히 조선족의 조선말은 한국인의 한국말에 비해서도 너무 터프하다. 함경도사투리, 평안도사투리, 경상도사투리가 우리 언어의 주종을 이루는데 어느것을 보아도 부드러운 맛이 결여하다.
우리가 이야기하는것을 옆에서 보고 한족들은 《조선족들은 말하는것도 꼭 싸움하는것같이 들린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일본에서 살면서 일시 귀국하여 보면 진짜 내가 조선어를 모른다면 싸움하는것으로 착각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목청은 왜 이리 작탄폭발하듯 커졌을가? 집안에서도 가족끼리 목청을 높이고 자기주장을 한다. 한족들도 목청이 절대 작지는 않은데 우리의 목청은 그네들보다도 한수 더 뜬다.
서탑이나 연길의 호텔커피숍엘 가도 두 세명이 한 테이블에 모여앉으면 방약무인으로 큰소리로 떠든다. 옆에 사람이 있건없건 떠든다.
한족의 아침은 코푸는 소리로 시작되고, 조선족의 아침은 떠드는 소리로 시작된다는 말까지 있다.
내가 어쩌다 귀국했다가 부모님집에 묵고있노라면 도무지 시끄러워 못견디겠다. 부모님 계신 아빠트 아래층의 조선족식당에 카라오케기계설비를 갖추었는데 먹고난 다음 노래부르게끔 손님을 끌기 위해서다.
식당은 식당대로, 카라오케술집은 술집대로 따로 있어야 한다는 분업적원칙도 없다. 더구나 시민이 사는 아빠트에 소음이 해가 되는 카라오케는 없는것이 법적으로도 있는데도 우리는 그까짓 법은 개방귀만큼도 안 여긴다나.
대낮부터 카라오케 노래소리가 들리는데 심야에도 소리는 쉴줄 모르고, 아침에도 누가 노래연습하는지 《돼지멱따는 소리》(부근 주민들은
다 이렇게 말한다.)가 들린다.
견디다못해 어머니께서 내려가서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냐, 좀 조용히 살자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부터 며칠은 조심하는척하더니 또 그 버릇 못고친다는것이다.
어쩌다 친구들끼리 식사후 스트레스 해산으로 카라오케를 가보면 방음설비가 돼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너집 떨어진 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잘 들릴 정도다. 이건 술집이니까 그만큼 리해해서 한걸음 양보하자.
온 조선족이 《당신 내는 소음은 들어줄수 없어도 내가 내는 소음은 참아라》는격이다. 너만 참고 나는 못참는다는 엉터리론리가 어디 있는가.
일본에서도 소란스레 떠드는 사람은 중국인과 한국인이며, 그리고 물론 수자적으로 적지만 떠드는데는 이골이 난 조선족이다. 오사카에 살 때 내가 조선족류학생모임 결성에 참여를 했는데 내 동생 아빠트에서 동생옆집과 아래집, 웃집에 사는 일본인이 하루밤 세번이나 항의를 해왔다. 평시에는 별 커뮤니케이션이 없던 한 아빠트사람들도 너무 못견디겠다고 조선족의 얼굴을 보러 오는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는 중국인, 한국인(물론 조선족도 포함)이면 아빠트주인이 주춤하거나 입거를 반대한다. 리유는 너무 떠들어 근처 거주인들에게 피해를 안긴다는것뿐이다
.

그것을 갖고 우리는 또 일본인이 외국인 차별이니 인종차별이니하면서 떠들다가 관둔다. 이것은 분명 《외국인차별》이기전에 이쪽에서 반성을 해야 할 차원의 문제지, 일본인을 탓할수도 없는것이 아닌가. 자기 잘못은 덮어감추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자신의 어글리 코리언 모습을 체감못하니까 문제가 된다. 나는 그래서 조선족회식이나 모임같은데도 되도록 삼가하기로 했다. 떠드는 어글리 코리언의 모습에 내 못난 얼굴까지 보태고싶은 심정이 아니기때문이다.
물론 해외에서 살면서 고독한것도 있겠지만, 우리는 너무 우리들끼리만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랄라라―》하면서 마시고 떠들기를 좋아한다. 당연히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외에서까지 별 실적이나 우수성을 보이지 못하면서 조선족이 떠드는 어글리의 모습을 스스로 자진해서 보여줄 리유는 없지 않은가. 그런 열정과 정신을, 현지문화를 리해하고 현지문화속으로 들어가 이문화의 우수성을 배우는데 실천하여 배움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른다.
결국 일본인들에게 듣는 칭찬이 《조선족들은 술이 세구만요. 노래 잘 부르시고…》
이건 칭찬인지 핀잔인지, 아니면 야유인지도 모른다. 한족사람들에게서 듣는 평판을 꼭같이 일본인에게서도 들어야 한다.
국내에 갈적마다 번마다 강렬하게 받는 느낌 하나가 있다. 그것은 조선족사회가 마치 하나의 냄비같이 끓는다는것이다.
말그대로 《보글보글》이다. 한족들처럼 큰 가마라면 《부글부글》 그 사이즈도 크련만 우리는 어린이의 모자같이 작은 냄비로 보글보글거린다.
어딜 가도 들떠있다. 화제도 거의 똑같은 화제뿐이다. 돈을 어떻게 하면 한꺼번에 벌수 있을가? 어디 좋은 돈벌이감 없나? 한국 나갈 방법 없나? 어느 카라오케 술집의 호스티스 아가씨 이쁘고 어디는 구차하더라. 다음번엔 어딜 술먹으러 가자…
가볍고 유치하고 또한 거의 획일적인 똑같은 화제가 술집에서 커피숍에서, 식당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전화와 핸드폰에서 오간다.
왜 이렇게 화제가 빈약하고 경박하고 모두들 들떠 보글보글거릴가?
우리는 고독을 모른다. 고독을 잃어버린지가 오래다. 고독이 제일 필요한 문인들에게도 고독은 없다. 고독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고독이란 물리적인 고독, 정신적인 고독이 있겠지만 우리는 둘다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가?
어디 조용히 앉아서 고독이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사고하고 독서하는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사고하는것까지 게을러진 정신라태환자가 돼버린것 아닐가? 사고가 결여한 곳에서 우수한 작품을 기대하긴 어렵다.
물론 스트레스를 풀고 고독을 풀기 위해 술집을 가고 회식을 해야 한다. 나도 매번 책 한권 집필을 끝내면 엄청 마시고 한번쯤은 망가지고싶다는 해방감을 맛보곤한다.
그러나 이런것이 너무 자주 있다면 그건 스트레스를 푸는것이 아니라 향락우선이 돼버린다. 결국 우리에겐 너무 넌센스다. 우리 문인들이 이런 넌센스에 빠져 글쓰는 본업에는 즐거움을 잃은것이 아닐가. 조용히 고독을 맛보면서 사고하는 즐거움을 우리는 망각해가고있다.
사람이 사는데 제일 중요한게 무엇이냐고 굶주린 사람에게 묻는다면 먹는것이라고 대답할것이다. 추위에 떨고있는 사람이라면 따스한 봄날이라고 대답할것이요, 외로운 사람이라면 친구라고 대답할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조건이 모두 충족된다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것이 또 무엇일가?
그렇다. 사람은 모두 먹어야 하고 사랑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밖에도 절실히 필요한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왜 살고있는가를 알고싶어하는 절실한 욕구를 우리는 모두 갖고있다.
1500만부나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피의 세계》의 첫 시작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노르웨이의 작가 요스타인 골덴이 쓴 이 철학책은 세계적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만끽했다. 일본에서만 해도 200만부나 팔려나갔다. 14세 소녀 소피를 위한 미스터리 소설같이 명료하고 흥미있게 꾸민 이 책은 인간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사고를 환기시키고, 그런 사고의 발상을 통해서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있는 인류에게 크나큰 계시를 던져주고있다.
내가 알건대, 우리 조선족독자들, 문인들도 이 책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알고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꼭 이 책을 알아야 된다는것보다도 이 정도로 우리는 사고와 철학을 멀리한 민족이 됐다는 얘기다.

온 민족이 보글보글 끓으며 왜들 그렇게 떠들고 야단법석인지 우리는 그것조차도 생각할 겨를을 망각했다.
대체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고, 무엇때문에 달리는지도 모른다. 다 보글보글 끓으니까 나도 끓지 않으면 안된다는식이다.
우리 민족의 위기가 바로 사고하는 즐거움을 잊어버린것이다. 조금 끓어오른 머리속을 랭각시키고, 랭철히 사고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봐야 하지 않을가?
보글보글 끓다가 남는데없이 어디론가 거픔으로 증발되여버리는건 아닌지 우려된다.
이제는 사색을 하면서 조용히 살자.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후손답게.

작은것부터 시작하자

세계적으로도 한족만큼 큰것을 좋아하는 국민은 드물것이다. 그 끝없이 넓고 넓은 광활한 국토가 상징하듯 큰 대자만이 한족이 추구해온 최대의 리상(理想)상이였다. 밥그릇도 큰 대완, 밥상도 큰 대탁, 저가락도 굵고 긴 대저, 장저다. 같은 저가락을 상용하는 한자문화권인 중국, 한국, 일본을 비교해도 중국의 저가락은 유별나게 길고 큰것이 특징이다. 인물은 대인기질, 작품은 대작, 성격은 대기(大氣), 품성은 대도(大度), 소리는 대성, 하다못해 자기의 방귀소리도 커야 직성이 풀리는 중국인들이다. 말그대로 《거대지향의 중국인》이라고 표현해야 할것이다.
대륙과 직결된 반도의 조선반도 역시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큰것을 좋아한다.
《아시아의 4마리 룡》의 하나로 불렸던 한국은 이날까지 너무 눈높이 살아왔다는 외국인 관찰가들의 혹평을 좋든 싫든 자주 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세계에 우뚝 솟은 동방의 례의지국》, 《세계의 선진국 행렬에 들어섰다》며 큰 소리로 떵떵 웨치면서 달려온 한국, 아세아의 대국으로 된듯이 열광적인 착각에 빠졌었다.
세계경영이요, OECD하면서 너무 허황하게 《일류대국병》에 빠졌다가 망친것은 결국 나라와 불쌍한 국민들뿐이 아니였는가! 좀더 작게 평범한 인간답게 살아왔으면 제2의 망국이라는 IMF국면도 아마 미연에 방지했을것이다.
중국과 한국에 대조적인것이 일본이다. 일본인들은 작은것을 좋아하며 작은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미의식을 갖고있다. 리어령박사의 《축소지향》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그들은 천성 섬세하고 정밀함을 따지고 과대한 눈높이나 목표를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 일본에서 살면서 보면 늘 《작은 행복 만들기》, 《작은 스마일봉사》서비스를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작은것을 실천하는것으로 착실히 부적가치로 쌓아가는 프로세스가 돋보인다.
지금까지 내가 중·한·일 3국의 《대》와 《소》의 문화적 지향성을 비교언급한것은 다름 아닌 우리 조선족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을 세워보이기 위해서다.
우리는 어떤가? 중국이란 땅에 이주해살면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거대지향의 민족성을 많이 닮아, 지금은 오히려 《청출어람》이란 말이 실감나게 이 두 스승을 월등 초월했다고 해야 할 정도다.
1999년 여름에 일시 강연으로 귀국했을때 나에게 자그마한 충격을 준 사소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이라 해야 사실은 뭐 큰 대사건이 아니라 나의 장남 철야(哲也)의 첫 돌생일 파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날 일본에서 우리 가족 세사람이 왔다고 평시 얼굴을 보고도 거리서라면 몰라서 스쳐지냈을만한 친척까지 수십명 모여 축하를 해주었다. 전통적인 상을 마주하고 해물해물 웃는 철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태여난 시절에는 가난하여 이런 돌상도 못받아봤다는 생각을 하면서 많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오늘과 격세지감을 느끼며 감개무량했다.

그 감개가 채 깨지기도전에 문제의 《사건》이 생겼다. 돌상에 앉아 축의금을 주면서 일가친척들마다 한마디씩 축사를 하는 대목이 있다.
《철야야, 커서 동아세아 3국을 판치는 큰 인물이 되거라.》
《철야야, 커서 큰 억만장자가 돼야지.》
《장래 나라 대통령이 돼야 한다.》
《큰 인물이 돼야지. 아무렴, 데츠야(철야)는 비범한 대물이 틀림없어.》
《……》
백이면 백이 다 철야에게 《큰인물》이 되라는 축사였다. 물론 어른들이 들으면 기뻐하게끔 길하도록 한 인사말정도로 취급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날 어쩐지 아쉬웠고 우리 민족이 큰것을 좋아하는 성미를 다시한번 실감했다.
누구 하나 평범한 인물, 수수한 인간으로 되라는 사람은 없었다. 20세기, 21세기 우리 민족의 최대의 비원은 《우리의 소원은 큰 인물》이다. 누구나 자식이 엘리트가 되고 나라를 떠멘 대물, 거물이 되는것은 시비할 여지없이 비원이기도 한 미원(美願)이지만 바로 지극히 일상적인 체질에서 우리에게 푹 배인것은 바로 다름아닌 평범한것, 작은것에 대한 무시나 경멸이다. 작은것도 아름답고 평범한것도 좋다는 발상이 우리에겐 너무나 공백인것 같다.
나는 주변에서 너무도 많은 거대한것만 추구하는 조선족들을 보아왔다. 내가 20여년이나 사귄 친구중에 문학대가의 꿈을 꾸며 살아온 S라는 40대 친구가 있다. 그는 20대에 소설을 습작하기 시작하여 이날까지 《조선족의 소설대가》로 되기 위해 애간장을 태워온 사나이다. 그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그것은 소설 한편을 써도 조선족문단을 잡아흔드는 소설대작, 그것도 장편소설을 쓰는것이였다. 그의 말대로 하면 《벽소설이나 단편소설은 너무 작아서 대가의 기질이 나타나지 않는다》는것이며 《기왕 할바에는 큰 대하거작 장편을 써야 한다.》는 지론이다.
물론 그의 웅대한 목표와 거대한 청사진에 대해 나는 흐지부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큰 목표의 청사진은 그의 말과 같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것은 절대 아니다. 벽소설 한편 변변히 습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가 대작거편을 완성한다는것은 거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S는 이날까지 장편소설은커녕 단편소설도 한편 못써보고 장사의 길에 들어서고말았다. 작년에 오래만에 만난 그의 술회가 인상깊다.
《너무 큰것만 따르다가 작은것까지 놓쳤어.》
장사에서도 우리 조선족은 이같이 첫번에 일획천금을 꿈꾸는 사람이 허다하다. 단판승부로 거액의 리익을 노리다가 결국 실패한 케이스는 얼마나 많은가. 지금까지 나는 주변친구나 아는 사람중에 시체말로 《하해(下海》하여 비즈니스대렬에 투신했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성공했다는 사람은 가물에 콩나듯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는 수자밖에 안된다.
우리의 백만장자가 적은 리유가 이제 알만하다. 아까 S의 말마따나 큰것만 노리다가 작은것까지 놓친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너무 허영심과 체면에 사로잡혀 작은 돈벌이, 사소한 일은 아주 무시해버리고, 챙피하다고까지 여기기가 일쑤다. 주변에 하면 얼마든지 돈벌이 구멍이 있는데도 그것을 다 외면해버린다.
여기에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연길시에서 개방도시로 지목되면서 거리의 모습은 빌딩이 수풀같이 일떠서고 일사천리로 그 모습을 바꿔가고있다.
이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가 사천성, 안휘성, 강소성이나 기타 남방지역의 한족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그대로 해뜨기전에 시작하여 달을 이고 돌아오는 결사적 정신으로 근면히 일에 몰두한다.

밤이면 밤마다 공사장의 기계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아빠트에 편안히 앚아서 TV를 보던 조선족이 들창을 열고 시끄럽다고 야단이다.
《야, 너희들 힘들지도 않아? 돈 몇푼 벌겠다고 목숨거니?》
그러나 그들은 못들은척하고 묵묵히 일하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연길시내에 《외지인로무시장》이 있다. 외지사람이라 해보았자 관내나 남방에서 온 민공로력이다. 그들은 여기에 몰려와서 하루 일당으로 일감을 찾는다. 그러나 수백명이 일감걱정 없다는것이다.
왜냐면 조선족들이 조금 자질구레한 가사로동이 있어도 이런 한족들을 삯으로 쓰기때문이다. 공동변소 소제로부터 4층 아빠트에 짐을 운반하는 일, 구두닦기까지 그들은 서슴지 않고 한다. 보수가 2원, 3원짜리도 그들은 달갑게 한다.
중국인들은 큰것을 좋아하지만, 실익을 위해서라면 큰 체면을 버리고 작은 리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조선족은 그까짓 큰 체면(?), 작은 허영심때문에 자질구레한 일을 삯군한테 시킨다.
심양서탑에서도 나는 이런 조선족들을 심심치 않게 볼수가 있었다.
《우린 그래도 체면이 있는 민족이야. 까짓 너희들 한족들은 이런 체면이 필요없으니 너희들이나 해라!》
일종의 우월감(?)까지 느끼며 한족을 비아냥거린다. 그렇다고 조선족의 지갑에 한족보다 몇배나 돈이 많을가? 그런것도 아니다. 없으면서도 그 아주아주 큰 체면에, 허영심에 얼마 되지 않은 돈까지 살금살금 그 한족의 호주머니로 빼앗기고만다.
결국 밑천이 거덜날것은 다름아닌 조선족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족이 비아냥거린다. 《칸, 니먼 쩌세 초우센주(봐! 너희들 조선족 꼴을.)히히…》
우리 조선족사회가 어쩐지 모두 이런 식이다. 그까짓 한국에 가서 돈 몇푼 벌어왔다고 한족사회를 무시하고 경멸하기까지 하는 풍조가 만연하고있다.
《우리는 중국 56개 민족중 제일 강한 민족이다.》
《한족은 대단한것 없다. 우리야말로 중국속의 유태인이다.》
떵떵 신이 나서 외치지만 한족들은 별로 손자벌이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간지럽힌다고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약소민족의 콤플렉스가 발로한것밖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실 한족들이나 여타민족들도 조선족의 이같은 저돌한 행동에 조소가 비실비실 새여나온다고 한다.
200만 조선족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랴. 10억의 한족과 맞상대로 싸워(?)봤자 계란을 바위에 갖다 부딪치는격이지. 5천년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갖고있는 한족앞에서 내노라고 우쭐해봤자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개혁, 개방후 너무 분수없이 방자하게 행동을 해온건 아닐가? 너무 거창한 세계, 그것도 한국같은 고국을 통해 조금이나마 얻어낸 부유를 통해, 선진민족 행세하는것 아닐가?
그리고 너무 허황한 다툼속에서 《제일의 총명한 선진민족》이라는 실속없는 환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있다.
이제부터는 좀 실속있게, 착실하게 살자. 이런 들뜬 체면, 크다고 여기는 《선진민족》의 라벨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기 신변의 자그마한것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 실체에 맞게 너무 눈높은 허영과 욕망보다는 하나하나의 프로세스를 착실히 밟으며 살자. 그리고 엘리트나 거울보다는 참다운 사람으로 살자.
작은만큼 작게 시작하자. 이것이 우리에게 박절히 필요한 급선무다.

우리는 3등문화민족?

우스개소리부터 시작하자.
유엔기구 산하의 유네스코에서 중국 여러민족의 민족성과 문화수준을 테스트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란 주름말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백만딸라라는 거액의 상금을 준다고 중국에 와서 TV에 광고를 냈다. 이 광고를 본 중국 각 민족의 행동이 재미있었다.
한족은 도서관으로 달려가 방대한 주름말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 서장의 장족은 아프리카 지도를 사들고 말을 타고 사냥총을 쥐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위글족은 아반티가 타던 당나귀에 푸른 물감칠을 하기 시작했다. 몽골족은 말에다 푸른 털을 한대씩 수놓았다.
그런데 조선족은 어떻게 했을가? 도서관도 아니고 지도도 아니며 푸른 물감도, 푸른 털의 이식(移植)도 아니다. 막걸리를 잔뜩 사놓고 잔치판을 벌였다. 며칠사이로 큰 횡재한다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마시고 또 부어라, 우린 부자가 됐다.》하며 밤새도록 놀음판을 벌였던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우스개소리를 미국의 롱담을 본따서 창작해놓고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웃고 스쳐버릴 현실이 아니기때문이다.
우리는 도서관과 독서와 멀리하고있는건 아닐가? 사고와 지성보다도 놀음에, 소비생활, 향락에만 달리고있는건 아닐가?
연변도서관을 찾았을 때도 건물은 괜찮았지만 너무 썰렁한 기분이였다. 독자들이 많지 않았는데다 장서마저도 빈약했다. 옛 희랍사람들이 《마음의 병원》이라고 례찬한 도서관의 분위기는 없었다. 《사상의 생산을 위한 분만실, 력사가 생명을 갖게 되는 장소》라고 웨친 노만 커즈슨의 말과 같은 이미지는 여기엔 없었다.
내가 늘 리용하는 일본의 대학도서관과는 비교가 안되고, 하다못해 집근처의 시민도서관의 초만원상태와는 너무 대조적인 광경을 보면서, 어떤 형언할수 없는 콤플렉스와 함께 무명의 화가, 분노가 치밀었다. 《차라리, 폭파해버리든지, 아니면 카라오케 술집이라도 만들든지》하면서 폭언까지 하고싶은 심정이였다.
우리는 일본의 국립도서관이나 북경도서관, 프랑스의 국립도서관, 자본론을 쓴 맑스가 애용한 대영박물관과는 잠시 비교하지 말자. 우리의 경제상황과 인구적 규모로 그건 그런대로 눈감아주자. 그런데 있는 도서관도 우리는 외면한다.
심양의 조선족 타운 서탑에서도 나는 살풍경인 조선족서점을 갈 때마다 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졸저 《벌거숭이 3국지》가 이 서점에서 그나마 조선어 서적치고는 항상 베스트 3의 웃자리를 지킨 덕으로 나는 이 서점의 책임자와 종업원 셋과 제법 싸인까지 해주며 친하게 되였다. 백평방메터도 안되는 서점은 들어갈 때마다 손님이 10명되는것을 나는 한번도 보질 못했다.
조선어서적이 약 백여종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십여년이나 묵은것이 아니면 이미 수년이나 쌓인 중고서적이였고 문학서적과 실용서외 사전이 주종을 이루었다. 조선족작가의 책은 거의 안팔리는데 초판부수도 판권페이지를 펼쳐보면 천책정도였다. 문학은 다시 조선족독자에게 매력을 잃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는 이렇지가 않았다. 나는 소학교때 어디서 들춰낸 보풀이 인 《3국지연의》와 《수호전》을 밤가는줄 모르고 탐독했으며, 또 책 읽는것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랐다. 특히 시골 온돌우에서 뒹굴며 책보는것은 하나의 향수였다. 덕분에 천도의 근시안경을 걸게 된 나지만 책은 영원한 애인이 돼버렸다. 책을 읽는 즐거움만큼의 기쁨도 흔치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제의 어린이들은 안데르쎈의 동화를 읽으면서 꿈을 키웠지만, 오늘의 우리 어린이들은 TV나 만화를 보면서 책을 멀리한다. 어린이들의 본이 된다는 부모들부터가 책을 버리는데 어린이가 무슨 책을 읽는단 말인가?
서점의 종업원 K양은 술회한다.
《조선족이 책 보는가요. 책 사는 돈 몇원도 아까와서 우물쭈물하지만 술집, 사우나에 가면 아가씨 팁으로도 하루밤 수백, 수천원씩 날리고도 눈 하나 끔쩍 안해요. 그래도 한국서적과 함께 중문서적을 같이 파니까 우리 서점이 지탱할수 있어요. 조선문책만 경영하면 우린 벌써 문을 닫아야 했어요…》
당연히 중문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해도 우리 조선족독자가 너무 상상밖으로 적다. 그렇다고 해서 중문책이 잘 팔리는 사정도 아니라는것이다.
서점 맞은켠은 바로 서탑거리의 동포호텔 정창호텔과 서울호텔이다. 거기엔 매일 조선족과 서울에서 온 동포들이 득실거리고 커피숍, 술집에도 초만원을 이룬다고 한다.
서탑거리가 하나의 거대한 유흥가로 되였다. 나는 서울의 장안동을 썩둑 잘라서 여기에 옮긴 착각을 늘 받는다.
서탑거리의 화려한 모습에 비해 조선족서점의 초라한 모습, 주눅이 든 외소한 간판은 무언가를 호소하고 하소연하는것만 같다.
나는 우리의 엘리트들인 문화인, 문인, 작가들마저도 책을 별로 안읽는다는것을 늘 새삼스레 실감한다. 서울에서 책 한권 냈다고 《최고작가》라고 자찬하기를 잘 하는 작가 B와 언젠가 우리 집서재에서 밤을 새워가며 환담을 한적이 있는데 나는 실로 아연해지는 대목이 많았다. 소위 조선문학을 전공했다는 B가 전혀 상식적인 자신의 전공분야의 책도 읽지 않았으며 일반서적은 더 형편없이 읽지 않았다. 차라리 B가 말수가 적었다면 몰라도 자기 아는건 다 도도히 쏟아내니까 자기의 무식을 자신 스스로 폭로시키는것이였다.
이런 류형의 독서하지 않는 문인을 나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작년에 《연변일보》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독서하지 않고 사고하지 않는 조선족》이라고 질타한적이 있다.
화려하게 어마어마하게 수식어를 붙여서 《민족문화의 사명을 띤》우리 문인이 책 안 읽는다고 나는 민족사명까지 들먹이고싶지 않다. 독서로서 절대적인 에너지로 살고있는 문화인, 작가가 책을 멀리하니 그 본래 빈약하던 감수성과 지성이 메말라갈수밖에 없으니 창의력은 허공에 뜬 고무풍선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의 작품도 거기서 거기라는것이 실감나지 않은가.
도대체 우리는 문화의 분위기가 있는가? 우리에게 문화의식은 있는가? 연변에 가끔 국제전화를 걸면 그쪽의 문인친구들이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하소연이다. 왜냐 물으면 《우리 연변이란 땅은 매일 술판에 책볼 시간이 있어야지. 연변을 떠나 조용히 국외에 가서 살면서 몇년동안 책을 읽고싶어…》하고 절박히 호소한다. 내가 《정 그렇다면 술 안먹으면 되지 않냐》고 하자 상대는 《안 먹으면 안될 풍토가 연변이라》고 역설한다.
우리가 지금껏 《중국 일등의 문화민족》, 《최고수준의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으로서 자화자찬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런 사탕발린 소리도 별 힘이 없다.
나는 일등의 문화민족으로부터 3등문화민족으로 추락됐다고 본다.
《랄라라, 우리는 일등 우수한 민족》하다가 여타 후진 민족에게 뒤떨어져버렸다. 실제로 종합적 생활지수를 보아도 우리는 일등이 아니다. 4등, 5등이면 괜찮다.
《일등 문화민족》이란 사탕발린 소리보다도 책 한권 더 읽자. 술 한잔보다도 책 한페이지 더 보자.

세계 각 나라사람의 성격기질을 역설(逆說)적으로 빗대여 비유한 유머가 있다.
가장 리상적인 국제인이란 어떤 모습일가? 로 유머는 시작된다.
영국인처럼 료리를 무지 잘하고, 이딸리아인처럼 감정억제를 잘하고, 프랑스인처럼 신중하게 처사하고, 독일인처럼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네델란드인처럼 인심이 좋고, 벨기인처럼 출근률이 높고, 룩셈부르그인처럼 안면이 넓고, 아일랜드인처럼 언제나 맨숭맨숭하고, 희랍인처럼 깨끗이 정돈을 잘하고, 뽀르뚜갈인처럼 기계를 잘 조작하고, 로씨야인처럼 술을 잘 안마시고, 스위스인처럼 정이 두텁고, 미국인처럼 어학에 능하고, 멕시코인처럼 정직하고, 일본인처럼 개성이 풍부하고, 중국인처럼 단합하고, 한국인처럼 검소하고 약속 잘 지킨다.
또 이런 국민성비교의 조크가 있다.
심야 국제호텔에 화재가 일어났다. 과학적인 사고를 즐기는 미국인은 매트릭스를 배에 대고 창문으로 뛰여내렸다. 일본인은 이불을 몸에 꽁꽁 싸서 뛰여내렸고, 인내력 강한 중국인은 이불을 물에 푹 적셔 몸을 싸고 있으면서 레스큐대가 구원해주기까지 기다렸다. 성급한 한국인은 알몸으로 뛰여내렸다.
이런 유머와 조크는 비록 롱담이지만, 한 나라, 한 민족의 성격기질을 극명적으로 표현하고있다고 봐야 한다.
나라나 민족, 지역의 생활환경, 력사체험, 문화풍토에 의해 그 속에 살고있는 대다수 멤버들은 성격적으로 동질성을 자연 띄게 된다.
중국조선족의 민족성, 민족기질은 어떤것일가? 어떤 마이너스적인 병페나 고질이 있을가?
이것들은 내가 근 20여년동안 사고해오면서 규명하려 고심해온 지대한 관심사였다.
중등학교시절 문호 로신선생의 국민성해부에 예리한 메스를 들이대던 날카로운 잡문, 에세이들을 접하면서 나는 조선족의 민족성을 해부해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로신선생이 일생동안 국민성해부와 비판에 혼신을 다해온 최종적 취지는 그의 말대로 《병고(病苦)를 로출시켜 료구(療救)의 주의를 환기시키기》위해서였다.
내가 10여년전에 《중국조선족문화의 반성》을 쓴것도 이런 소박한 동기에서 출발한것이며, 오늘 다시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쓰는것도 이 취지를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일뿐이다.
우리 민족같이 쉬쉬하고, 보고도 못본척 하는 사회풍토속에서 내 글같이 날카로운 말들은 《욕》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집필하는 과정에 중국의 어느 조선족문인에게 소견을 듣고싶어서 국제전화의 푸슈버튼을 눌렀다. 그 역시 《조선족이 좋아할가?》하는것이였다.
나는 약이 쓰다는 말을 할가하다가 너무 진부하게 느껴져서 관두고 웃고말았다. 이런 나의 고심을 알아주었으면 할뿐이다. 그래도 《욕》이라고 나를 욕하겠다면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이 책은 주로 조선족의 결함과 병페에 대해서 서슴없이 지적했는데 자기비판, 자기반성을 통해 자기갱신, 자기개조를 위한 목적외엔 아무것도 없다.
이래서 나는 우리 조선족의 성격기질가운데서도 우수하고 위대한 장점들은 거론의 대상에서 빼내고, 단점, 병페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해보았다. 나는 이 과정에서 꽤나 고심했다. 마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심사위원이 그 많은 출중한 미인중에 어느 누구를 지목해야 할지 고민한것보다 더 고민했었다.

상기의것이 미에 대한 고민이라면, 이번에는 추에 대한 고민이라는 점이 다를뿐이다. 그렇게 많은 단점, 병페들을 《10대병증》이란 랭크안에 집어넣자니 힘겨웠고 빼자니 아쉬웠기때문이다.


이제 《조선족 성격기질의 10대 병증》들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1> 조급증

한족에게 제일 널리 알려진 조선어는 《빨리빨리》다. 조선족이 중국어에 공헌한 외래어는 《빨리빨리》밖에 없다. 한족들은 그것을 《 利 利》로 적는다. 한족들은 조선족을 만나면 자기가 얼마나 조선족을 안다고 그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꼭 《 利 利(빠리빠리)》하고 외우면서 웃는다.
그만큼 그네들은 조선족을 보고 《너희들은 뭐 그리 빠리빠리냐? 크지도 않은 사람들이 뭐 그리 성급한지 모르겠다.》고 곧잘 비아냥이 뒤따른다.
고국인 한국인이 국제적으로 성급한 민족이라고 정평이 있다면 조선족은 중국내에서 《빨리빨리》민족으로 소문났다.
왜 그렇게 서두르고 매사에 성급히 구는지 리유도 없다. 걸음걸이도 심양이나 연길에서 보면 빠르고, 뛰다싶이 서두는 사람이 있으면 틀림없이 조선족이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목표와 결과에 이르려고 서두른다. 그것은 결국 서두르다 결과까지 놓치는 졸속주의로 치닫는다. 빨리빨리 서두르다가 잘 안되면 화부터 낸다. 화김에 싸우고 공연히 정력을 소비하다가 결과나 찬스는 무산해버리고만다.
심양의 외국령사관앞에 가보면 출국비자를 받으려고 아침부터 수백메터나 뻗은 대렬이 심심찮게 보인다. 그속에서도 기다리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거의 99%로 조선족이다. 출국하는데, 더우기 많은 사람이 다 나가려고 줄서서 기다려야 되는데 그만한 과정도 못참는다는것이다.
한편 이렇게 조급한 성격이 있는 반면에 또한 아주 느릿한 극단의 성미가 한쪽에 웅크리고있다. 빨리빨리와 느릿느릿의 량극을 구유한것이 조선족이다.
빨리빨리 서두르다가 안되면 느긋느긋이다. 아예 결과를 포기하고 될대로 되라 모르겠다하면서 극단적으로 죽고 늘어진다. 한족속에서 살면서 한족의 그 유명한 만만디에 물젖은 까닭이랄가, 아주 느긋해지는 때가 많다. 이 점은 언제나 빨리빨리인 모국의 한국인과 다르다. 식사하는 풍경을 보아도 한국인은 아무리 찬이 길더라도 15분 아니면 30분안으로 먹어치운다. 펄펄 끓는 된장찌개도 불면서 금방 먹어버리는 한국인에 비해, 조선족은 식사시간이 한족만큼 길다. 먹고 마시고 얘기하면서 세월이 없다. 성급한 기마민족성격과 유연(悠然)한 농경민족의 성격을 중국이란 풍토속에서 조선족은 여타지역의 동족들보다도 잘 병행시킨것이라고 나는 본다.
이 두가지 극단적 성격이 중국 조선족의 바이리털리티의 원천이라 할수 있다. 이 조급증과 유연성을 잘 활동하여 민족창달의 에너지로 만들면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전환시킬수 있지 않을가. 조선족이 고민할 과제이다.

<2> 허풍증

아마 조선민족은 표현하고 과시하기를 즐기다못해 뽐내기를 좋아하고 나아가서는 허풍떨기를 즐기는 허풍증환자들일가?
한국인의 허풍증은 이미 IMF의 검증으로 국제적으로 백일하에 드러난, 다 아는 웃음거리가 되였다.
그런데 중국의 조선족들도 모국인들 뺨칠 정도로 허풍증이 혹심한것 또한 실정이다. 한족들이나 여타 민족들로부터 《조선족은 너무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과시를 즐긴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늘 들어야 한다.

대학교시절에 나와 절친한 한족 친구, 지금은 유명한 문인이 되였는데 그 친구가 그때 캠퍼스에서 자기는 걸음걸이만 보면 금방 조선족학생을 알아맞출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리유를 물으니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조선족학생들, 더우기 남학생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어깨를 흔들고 동작의 폭이 크고 활력이 있어. 좋게 말하면 활기 있다고 할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아주 방약무인의 오만한 팔자걸음이란 말이야.》
그후 세심한 관찰을 안해도 그의 말이 얼마나 적중했는가를 알수 있었다. 조선족의 흔하디 흔한 술좌석은 허풍증이 란무하는 허풍증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의 술상에서 서로 다투어 떠드는 호언장담이나 희언, 광언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간행하면 민족의 유머, 진담으로서 베스트셀러 탄생의 가능성은 아주 크다고 봐야 할것이다.
술상에서 조선족아저씨들은 누구나가 한번씩은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숨은 영웅이 안되본 사람은 없다. 요즘은 또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아가씨까지도 가맹하여 얼마나 많은 호랑이(남자손님?)를 때려엎었다고 희언에 색언(色言)까지 첨가되였다고 하니 점입가경이 아닐수 없다.
차비 몇십원이 없어서 외출하는데 티켓도 사지 못하고 담배마저 없어 남의 엽초를 빌어 피우던 아저씨가 뭐라 방언하는줄 아는가?
《속담에 물려도 호랑이한테 크게 물리라고 했다고 할바엔 크게 해야죠. 중국 되놈들은 안되요. 돈 일전 갖고 다투고, 술 한잔 아까워서 안마시고 맹물 퍼마신다나요. 내가 요 며칠전에 8만원을 그 되놈 왕가한테 빌려주었더니 글쎄 그 자식이 사업이 푹 망하다나니까 본전은커녕 리자도 못받아요. 그래두 우리 조선족이 부자고 잘살고 통 크지요…》
이것이 시골 조선족농민아저씨의 귀여운 허풍이라면 도시의 조선족의 허풍은 어떨가?
집안에 가보면 침대에 탁상밖에 없고, 언제나 된장에 김치나 먹으면서도 옷은 어디서 외국제라는 양복을 빌렸는지 샀는지 멋있게 걸치고 다닌다. 그리고 그 외국 《브랜드》라는것을 뽐내기 위해 옷소매에 달린 《브랜드》상표는 때가 꼬질꼬질한데도 그냥 그대로 두고 팔을 흔든다.
술집에 가서도 《××국제무역회사 사장》이라 찍은 명함을 내놓고 미인 호스티스를 데려다놓고 고급양주, 맥주를 시키는대로 탕진하고는 《나 유명한 백만장자야. 돈은 무진장 있다…》로 떠들다가 계산할 때는 이 핑게 저핑게로 외상이다. 아가씨에게 주는 팁도 없어서 《미안해, 다음번 또 봐》한단다.
너무 귀여워서 웃음도 안나온다. 《사실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더니 과연 그 꼴이다.
배웠다는 조선족지식인도 허풍떠는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족문인친구와 여러 조선족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석사과정도 입학하지 못한 사람이 류학갔다 박사학위를 따왔다고 떵떵 소리친단다. 그리고 좀 아는 사람에게는 석사 나왔다 하면서 또 외국에 박사과정 밟으러 간단다. 그것도 외국의 대학에서 자기를 너무 우수하다고 인정하여 특별초청으로 간다고 한다.
결국 그가 류학때 전혀 석사과정에서 공부한것도 아니고 다만 연수했다뿐이며, 그것도 나중에는 분명히 퇴학으로 귀국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도 그가 다닌 대학원 교무과에 가면 분명 서류에도 《퇴학》으로 돼 있다. 특별초청으로 박사과정 운운도 결국 석사과정일뿐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한 조선족 친구가 《우리 조선족에도 눈 한번 감빡 안하고 허풍을 떠는 위인들이 있구만요. 그런 허풍, 아니 거짓말은 금방 탄로날거고, 또 결국 그러면 자기 인격에 똥칠한다는걸 그렇게 총명한 사람이 모를가요? 허풍증에 머리가 돈거 아녜요.》 라고 했다.
하긴 이런 허풍쟁이들이 있으니까 우리 조선족사회가 재미 있지 않은가. 덕분에 내 책 쓰는데 좋은 소재감을 무료로 제공해주어 감사드리고싶다.
그러나 이건 롱담이 아니다. 롱담을 하고 웃어버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허풍떨다가 무슨 리득 보고 무슨 메릿트가 있는가?
결국은 최종적으로 자기자신을 속인것에 불과하고 자신의 얼굴에 똥칠한것에 불과하며 자신을 망칠뿐이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는 우리 민족에 이같이 허풍증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득실거린다. 진짜 허풍떨고 표현하고싶으면 실력부터 키워라. 배속에 진짜 물건을 채워라. 진짜 부자가 된 다음, 박사가 된다음 허풍 떨어도 늦지 않으니까.

<3> 평균증

조선족은 시초부터 농민들이다. 중국땅에 말 그대로 표주박과 지게를 지고 이주해올 당초부터 조선족은 연변이나 변경지역 시골에다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 가난했고 페쇄돼있었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는 페쇄속에서 자그마한 마이크로 코스모스로 그 내부의 기능으로서만 충분히 먹고 살수 있었다. 이 가운데서 절대적으로 가능한것이 바로 공존의식, 동질의 평균의식이다.
이런 농경문화의 협소한 균질의식은 비록 연길과 같은 규모를 갖춘 도시에서도 별 변화는 없다.
이 동질적인 평균의식의 지배아래서 조선족들은 서로 돕고 서로 동정하면서 상부상조의 미덕으로 공동체를 지켜왔으며 그것이 하나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했다.
평균수준의 아래거나 평균수준이래도 평균수준을 초월하면 안되는것이 평균의식의 터브다. 그래서 남다르게 잘 살거나 남다르게 재질있거나 남다르게 빼여나오면 밑에서 끌어내린다.
내가 이 책에서 쓴 《독안의 게나 니전투구식 싸움》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것이다.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픈 시기, 잘 되면 못되기를 바라는 마이너스적 음흉한 심리, 그리고 잘 지내다가도 누가 튀면 배가 아파서 뒤에서 욕을 하고 흉보고 헐뜯는다.
이렇게 욕하고 험담하는것으로 심리적으로 평균의식을 바로 잡으면서 일종의 쾌감같은것을 느낀다.
이런 의미에서 직언하자면, 조선족의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농민의 촌닭의식을 리탈하지 못했다는것이다.

<4> 체면증

조선족이 기질적으로 한족과 비교하여 무슨 차이점이 있냐고 물어보는 일본기자의 말에 나는 서슴없이 《체면》이라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전혀 예상밖이였는지 일본기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족만 체면이 있는줄로 알았는데, 조선족의 체면이 한족을 퍽 릉가한다니…》하면서 혀를 두른다.
아마 그 기자는 한족과 조선족을 모두 같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조선족이 체면이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조선족사회에서도 자명한 론제이고 진부한감까지 들지만 굳이 아 이이템을 10대 랭크속에 집어넣는 나의 고심을 독자제현들도 리해하시리라 믿는다. 그것은 체면이 그만큼 우리 민족의 걸림돌로 마이너스적 작용을 하면서 에이즈병같이 만연되고있기때문이다.

한족 호스티스아가씨들에게는 조선족 남자들의 지갑에서 많은 돈을 빼내는 테크닉이 있다고 한다. 무슨 아주 고명한 수단인줄로 알았는데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체면만 세워주면 남자가 기분이 둥둥 떠서 돈을 팍팍 쓰고 팁도 몇배로 던져준다는것이다. 나중에 중국인 호스티스들이 이런 조선아저씨를 보고 뒤에서 뭐라고 쉬쉬하냐고 하면 《사탕폭탄(糖衣砲彈)의 포로가 제일 잘되는 멍청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계렬의 말로 《비행기를 잘 타는 민족》이라고도 비아냥거린다고 한다.
우리가 언제 《비행기민족》이 되였을가?
일본에 와있는 조선족류학생이야기가 더 신선한 화제거리가 될것이다.
아르바이트를 대하는 태도와 의식에서도 조선족과 한족 류학생은 아주 대조적이다.
한족류학생들은 무조건 오는 이튿날부터 사발닦기요, 빌딩소제요, 신문배달이요, 야외건축로동이요 하면서 닥치는대로 육체로동에 달라붙는다. 여기엔 멘즈고, 체면이고 눈치따위의 고상하다는 허례허식이 없다. 그리고 그네들은 오늘 어떤 힘들고 더러운 일을 했다면서 돈을 얼마 벌었다고까지 자랑할 정도다.
그러나 조선족류학생은 어떤가? 시작부터 체면타령이다. 내가 이래 보여도 중국에서는 한다하는 지식인이고, 선생인데 어찌…하면서 서푼어치도 없는 과거타령이다.
육체로동은 체면 깎이는 일이니까. 어학 가르치는 일이나 무슨 우아한 일부터 찾는다. 그런데 아직 일본어 50음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우아한 일거리가 차례지랴.
어떤 조선족류학생은 할수 없이 이사짐부리기나 기타 자질구레한 육체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이런 일은 안해야 된다》고 억울하다고 푸념질이다. 정 그렇게 억울하면 안하면 다 아닌가. 무슨 허영심이 그리도 많아 야단일가? 싫으면 짐 싸지고 귀국하면 좋잖은가.
자기가 육체로동을 하면서도 국내 친구들에게는 《어학을 가르치고 강연으로 돈번다》고 공공연히 떠벌인다. 그리고는 하다못해 일본내에서도 외지를 놀러갔다 해도 《강연하러 갔다》는 허위보고를 태연스레 해댄다. 이런 허위증, 체면병에 걸린 동족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사람의 몸에는 무엇이 진실이냐고 의심이 갈 정도였다.
조선족의 허영심, 체면병은 이 몇년사이 더 널리, 깊게 만연하고있다. 특히 한국을 위시로 외국에 나가 돈을 벌었지만, 새롭게 수입증대를 위해 노력하는것이 아니라, 그 체면을 세우기 위해 서로 집안장식과 인테리어 구입, 브랜드 전자제품 구입, 사치호화의 경쟁을 벌이다가 밑천을 일거에 까먹고만다.
조선족마을에는 가요소리가 들리지만 한족마을에서는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한족집울안에는 닭과 짐승이 득실거리고, 닭알을 받아서 판다지만 조선족집울안에는 트럼프치는 소리밖에 안들린단다. 흔한 계란도 이제는 한족집에 가서 사오는 형편이란다.
조선족지구를 장편기행문으로 쓴 류연산씨의 《혈연의 강》에 이런 조선족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료녕성 철령시 교구의 조선족들은 아직도 초가집에서 사는 형편이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집집마다에서는 벼짚이영을 이는데, 요즘 세월에는 보기 드문 구경거리가 아닐수 없다. 그런데 이영을 이는 일군들은 20리 상거한 한족마을의 한족들이고, 집주인과 마을 사람들은 구경군이 되여 뒤짐을 지고 어슬렁대며 잔소리만 퍼붓는다고 한다. 집 한채의 이영을 이는 삯전은 70원, 점심 한끼까지 대접한다는것이다. 아직 초가신세도 벗어나지 못한 주제에 격에 맞지 않게 품을 사면서도 한다는 짓거리는 더욱 한심하다.
《더럽고 힘들고 손이 닳는 짓을 어떻게 해요? 까짓것 한사람에 30원만 퍼주면 단걸, 마작 한판값도 안되는데!》
한족들은 이런 조선족을 두고 《조선족들이 암만 돈 많다 떠들어도 부럽지 않다. 조만간에 우리 궤춤에 흘러들거니까》고 자신만만히 얘기한다.
육체로동을 천시하는 유교의 극단적인 체면의식을 조선족들은 아직도 무슨 금덩이같이 고수하고있다. 유교의 종주국인 한족들도 유교의 그 보잘것 없는 체면을 버린지 옛날인데, 우리는 어디가 잘 났다고 이 모양인가?
유교의 낡은 의식들을 버릴건 버려야 한다. 유효기간이 끝난 이런 유교의식이 우리를 조만간에 해치고만다.

<5> 변덕증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변덕도 많네.》
우리 조선족에겐 이 가사가 더욱 어울린다. 《변덕이 죽 끓듯하다》는 말이 생길만큼 표변하는 성격이 우리에게 너무 강하다.
일시 귀국할적마다 외조카 훈이의 노는 모양이 재미있어 늘 지켜보곤 했다. 소학교 일학년생인 훈이의 놀이가 보여주는 그 변덕증이 우리 민족의 성격 그것을 리얼리티하게 나타내고있었다.
뽈차러 나간다며 축구공을 갖고 나가더니 10분도 안되여 들어와서는 그림 그린다고 온 책상우에 화지며 물감이며 크레용을 널려놓고는 절반도 못그리고 《래일 그릴래》하고는 전자게임에 달라붙는다. 드래건이니 UFO전쟁이니 하는 게임을 보다가 10분도 안되여 싫증이 났는지 숙제한다고 야단이다.
그 어느 하나의 행동이 시간으로 따진다면 10분으로 끝나는, 지속성이라곤 없다.
우리 민족의 어른들도 아이보다 별 다른점은 없다. 내가 귀국할적마다 놀라는 사연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고향에 있는 한 조선족친구의 한다는 사업이 볼 때마다 변해있었기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외국산 캉벨오리를 기른다고 사와서는 부산을 떨더니 3,4개월도 못되여 오리새끼 팔아먹고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꾸렸다. 그것도 반년이 못되여 집어치우고 무슨 중계회사같은 복덕방을 꾸렸는데 역시 한달로 그 수명이 끝났다. 그런 다음 또 컴퓨터 장사를 한답시고 시내에다 사무실을 빌려 멋있는 간판까지 걸어놓고 법석이다가 역시 5개월도 못갔다. 요즘은 또 새롭게 외국인 안내하는 관광가이드로 뛰고있다는데 몇날 갈지 내 일같이 걱정스럽다.
조선족이 지금까지 개혁개방정책 실시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한다. 기업을 만든다고 서둘렀지만, 이 지구력이 결여한 약점으로 하여 성공했다는 사람은 가물에 콩나듯한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시 같은 고향의 한족친구는 작은 구멍가게로 시작하여 부지런히 끈기있게 경영을 하여 지금은 슈퍼가게 두개와 목욕탕사우나까지 갖춘 당당한 기업인으로 일어섰다. 그 조선족친구와 아는 사이인데, 그때 조선족친구가 이 한족친구에게 《그 잘난 구멍가게를 앉아서 지켜 무슨 큰일을 하는가》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성공한 사람은 바로 조선족친구의 조소를 당하던 느긋한 한족친구였으니 세상은 이래서 아이러니컬하고 드라마틱한것이 아닌가!
대학생이 공부하는 태도 역시 조선족과 한족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한족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꾸준히 공부한다. 20년전 내가 동북사대를 다닐 때 그네들은 명물 두가지가 있었다. 한손에는 크고 투박한 보온병을 들고 또 한손에는 역시 크고 두툼한 방석 하나씩 들고 다닌다.
어디 공원놀이 가는것이 아니다. 바로 도서관에, 교실에 가서 오래 앉아도 엉치가 배기지 않게끔 방석을 준비한것이고, 오래 앉아 정신소모를 하면 갈증이 오니까 의례 끓인 열탕을 준비해놓고 훌훌 마셔가면서 공부를 하고 또 하는것이다.
이와 대조적인게 조선족대학생이다. 평시에는 부지런히 놀기에 여념이 없다. 남자들은 축구, 녀자들은 배구로 즐기고 밤에는 식당에 모여앉아 술을 퍼마시고 노래하고 떠든다. 중국 대학에서도 조선족의 별명은 역시 호주(好酒), 호가(好歌)로 통한다.
그러다가 시험날자가 닥쳐와서야 번개불에 콩 닦듯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고 야단이다. 성적은 그런대로 좋지만, 그 지적 축적이 없는 기억에 의한 좋은 성적은 일종 화려한 신기루에 불과하다.

일시적인 엄청난 냄비열정에 의한 성적이 어찌 지구력있게 축적의 프로세스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스케일이 큰 한족의 기질에 당해낼수 있으랴.
결국 이날까지 우리 조선족의 대학입학률은 높지만 그에 비해 유명한 학자, 문화인이 배출하지 못하는 기본 리유도 여기에 있다.
이같이 지적인 변덕증, 지구력의 결여가 우리 민족의 발전과 질향상의 걸림돌이라면, 이것만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다. 또 하나 우리의 치명적 걸림돌이 되고있다. 그것은 바로 모랄, 륜리에서 나타나는 변덕증이다.
조선족의 도시진출의 붐이 일면서 조선족의 땅에만 의탁하던 전통적 보수성을 깨고 열린 조선족 만들기에 실천하고있는것은 기꺼운 경사다. 특히 한국기업에서 조선족의 취업기회가 많고 일하고 배우는것은 조선족 자신에게 있어서 절호의 찬스가 된다. 발달한 모국이 있다는것이 바람직한 지혜다.
그런데 조선족의 그 가벼운 변덕증, 지구력이 모자란 근성이 조선족과 한국기업인간의 불신과 갈등을 낳고있지 않은가.
한국기업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한피줄이라는 혈연적 동포의 감정에서 우리는 사실 조선족들에게 큰 기대와 신임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통역뿐만 아닌 관리직에도 적당히 맡겼는데 우리들의 기대와는 어긋났습니다. 조선족은 내가 이 기업에 속하는 인간이라는 직업의식이 전혀 없고, 림시로 여기 와서 해준다는식이죠. 특히 한 곳에서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배겨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뛰려고 합니다. 인품좋고 꾸준히 일만하면 주어진 기회를 살려서 얼마든지 자기를 발전시킬수 있는데도 눈앞 일시적 리익만 보고 장래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조선족들은 무조건 일획천금의 꿈에 젖어, 고소득임금만을 따지려 든다. 한족들은 상관없이 꾸준히 최하층에서 고용공으로 일하면서 묵묵히 기술을 익히고, 또 신임을 얻어 조선족을 밀어내고 관리직자리를 차지하는 케이스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시대에 밀려나는 민족이 되였을가?
날라리의 표변증과 끈질기고 유연한 지구성, 이것이 조선족과 한족기질의 대조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6> 격정증

일본의 식자들은 우리 민족을 《격정(激情)의 민족》, 《기분에 충실한 민족》이라고 한다. 어떤 저명한 문화인류는 조선민족의 감정을 스트레트하게 발산한다는 의미에서 《동양의 이딸리아인》이라고 한적이 있다. 리어령박사도 이 점에 대해 그럴만한 근거가 없지 않다고 긍정적 의견을 말씀한 기억이 난다.
조선족의 격정이 얼마만한 정도냐 하면 나는 늘 잊혀지지 않는 일을 떠올리게 된다. 벌써 30년전의 일이다. 조선족의 마을에서 자기집에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 있었다. 방화리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어떤 집안일로 다투다가 화가 나니까 제 집에 불을 질렀던것이다.
이렇게 일시적 화가 치밀어 우욱! 하고 자기가 사는 집에까지 불을 지르는 민족이 우리 민족밖에 더 있을가?
우리 조선족은 일상에서도 자질구레하게 부부싸움, 가족싸움이 있었다면 늘 그뒤에 화김에 자기집의 TV나 라디오를 부스거나 옛날에는 장독을 깨고 유리창을 깨는 일들이 빈발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이같은 우욱하는 성격은 여전하다.

이래서 우리는 주변의 한족들에게서도 《너희 조선족은 너무 감정용사(感情用事)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들어야 하는 형편이다.
조선족의 운동경기나 축구시합때도 사소한 동작이나 트러불로 선수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우욱! 하여 집단싸움으로 에스컬레트해가고 지어 식칼이요, 낫이요, 곡괭이자루같은것을 들고 나와 《동족상잔》의 혈투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너무 엄중한 《격정》부터 시작했다면 우리 일상의 가벼운 격정현상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아이고》라는 감탄사의 민족이다. 특히 로인네들은 아이고하면서 앉고 아이고하면서 일어선다. 우리의 대화속에 아이고는 감초같이 빈발한다.
대학시절에 한족동창이 나보고 《조선족들이 늘 아이고를 련발하는데 그 아이고란 대체 무슨 뜻이지?》하고 물은적이 있었다.
기뻐도 아이고 슬퍼도 아이고다. 아이고는 조선민족이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감탄사며 감정표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아무 꺼림없이 감정을 발산시켰고 로출시켜왔다. 우리의 녀성들이 아이고 못살아! 아이고 죽겠다! 미치겠네! 하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이나 한족들은 왜 저리들 부산을 피우고 야단이냐고 리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족은 감정에 충실하고 기분으로 살고있다. 기분이란 그때 그때의 감정, 정서를 말한다. 기분 좋아서 한잔, 기분 없어서 한잔,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는 기분이 좋으면 그날 받은 월급을 털어서 친구들 술 사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고 기분이 좋으면 처음 만난 동족도 무조건 믿고들면서, 팬티까지 못벗어주는것이 한스러워 한다. 그렇게 기분에 맡기다가 배신당하면 눈물, 코물에 신물이 난다. 아이고 이 죽일놈아, 개새끼야! 땅이 꺼지도록 통곡해도 늦었다.
요즘 출입국관리국에 가면 한국이나 여타 외국으로 가려고 수속 밟는 조선족동포들의 모습을 자주 볼수 있다.
물론 중국의 관리국 직원들의 서비스나 태도가 렬악한 탓도 없지는 않으나 조선족은 조금이라도 참지 못하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그네들과 한바탕 싸우고 그네들의 비위를 건드린다. 결국 수속이 더 늦어지고 그네들은 《니 잘났다. 한번 해보자》하는 배씸으로 더욱 핑게대고 질질 끈다. 손해 보는것은 사소한 일로 감정으로 목숨거는 이쪽이다. 이쪽이 피대를 세운다고 그네들이 뭐 무서워할가?
조선족은 이런 일에까지 공연히 그 우욱! 하는 격정때문에 손해본다.
나는 늘 감정이란 표달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절약하듯 절약하여 억제하는것도 인간의 기본적인 지혜이며 처세술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성미는 좋지만 그것이 무한정으로 극으로 치닫게 되면 컨트럴이란 비상구를 찾지 못하고 자멸을 초래하기십상이다. 좀더 랭철하고 랭정한 억제의 테크닉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 세상에서 격정으로 해결할 일은 술상밖에 없다. 먹고 마시고 노는데는 격정이 꼭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에서 통하지는 않는다. 그 시골에서 우욱하여 제 집에 방화를 하는 촌놈의 감정은 결국 자기훼손과 자기파멸의 악과를 갖다줄뿐 아무 의미도 없잖은가.
더는 격정적으로 쉽게 드놀지 말자고 웨치는데 우리는 격정을 발휘해야 될것이 아닐가?

<7> 요행증

비교문화를 연구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은 《발견》하나를 하게 되였다. 그것은 이민이나 두가지 문화를 소유한 마이노리티, 또는 경계를 살아가는 민족에겐 다이애스포러같은 복합적문화를 살면서 그것을 독특한 창의력으로 전환시키는 특성이 있는가하면, 동전잎의 뒤면과 같이 반면에는 어떤것이 꼭 의존해서 기생해서 살려는 의존증이 많이 있다는것이다.

그런가운데서 클로즈업돼 튀여나오는것이 바로 요행을 바라는 기형적인 심리기질이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의존이나 요행심리는 다소 있지만 조선족같은 소수민족에게는 이런 심성이 강하다는것이다.
나는 조선족문화를 패턴적으로 《박쥐형》문화라고 일갈했는데 그것은 정면적으로 보면 엄청난 우세와 파워를 갖고있지만 마이너스적으로 보면 바로 여기, 저기로 의존하는 퍼라사이트(기생)적인 안일한 사고방식, 요행심리가 없지 않아 있다.
내가 아는 조선족가운데 이런 전형적인 요행을 바라온 사람이 있다.
그는 학교때부터 늘 요런저런 좋은 말로 선생의 신임과 사랑을 얻어 학생간부로 되였으며, 결혼때도 대학에서 오래동안 사귄 녀자가 별리익이 없으니까 어느 유명한 조선족 딸을 노리고 그 딸과 결혼을 했다. 원래의 사랑을 맹세한 련인은 헌신짝 차버리듯 버렸다.
그뒤 그는 유명 장인 덕을 많이 본다. 직장도 좋은 직장에 앉을수 있게 되였으며 인맥도 많이 쌓게 되였다. 그리고 또 외국류학연수를 하는 단맛을 일거에 맛보게 된다. 1989년 《6. 4》학생데모때 그는 이 기회를 타서 입당까지 하게 된다. 소위 화선입당(火線入黨), 전쟁시대 싸움터에서 급급히 입당하는것과 같은 특수입당으로, 자기 몸에 지위의 옷 한벌을 입힌다.
그런데 그 유명 장인이 그만 교통사고로 불의의 사망을 당하자, 조강지처를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버렸다. 이어서 어느 우연히 만난 외국의 대학교수에게 갖은 아양과 수다를 다 떨어서 신임을 절취한뒤 아주 쉽게 류학길에 나섰다는데 아무래도 수단도 좋고 운도 좋은 모양이다. 최근에 리혼하고 어떤 한족녀자한테 달라붙는다고 한다. 그 녀자의 아버지가 중국 북경의 거물이란다. 이 절호의 출세기회를 그가 놓칠 사람인가? 그러나, 데이트하는데 그가 너무 째째하고 돈씀씀이가 옹색하여 《이런 남자는 째째해서 체통값도 못한다》고 하면서 녀자한테 개 엉덩이 채우듯 채웠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의 개인적 프라이버시에 대해선 조금도 시비할 생각은 없다. 누구와 결혼하든, 언제 입당하든,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싶은것은 늘 이런식으로 여기저기 달라붙으며 퍼라사이트같이 행동하는 그 요행을 바라는 의존증이 문제시된다는것이다.
그의 인생은 퍼라사이트같은 일종의 투기주의의 인생이다. 우리의 현실속에 이같은 투기주의, 요행을 바라는 경박한 사고방식이 범람한다.
하나하나, 한계단한계단씩 축적하는 인생의 실무태도가 결여하다. 사소한 일거리는 개똥으로 알고, 그러면서도 일색으로 큰것만, 투기성적인 튀는 기회만을 노린다.
폭발하거나 튀는 기회를 요행 잡았다 해도 착실한 프로세스와 사고가 없이 그 기회가 얼마만큼의 실적으로 될지는 미지수다.
조선족의 장사패턴을 보아도, 한꺼번에 일확천금의 튀는것만 잡으려고 쫓다보니 그 내부구조가 썩게 되여 마지막엔 스스로 자멸하게 되고만다. 무엇을 해도 한탕으로 끝장을 보려고, 한탕으로 승부를 보려고 요행을 노린다.
조선족이 돈을 벌고 부유해지려는 욕망은 아주 좋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실천방법이다.
한국인이나, 외국인을 알게 됐다면 무조건 조선족은 할아버지나 국가수상이나 대접하듯 환대를 해주며, 지어는 아첨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한국인이 이뻐서가 아니라, 어떤 요행의 의존심리가 작간을 하기때문이다. 이렇게 잘 해주면 외국에 나가 볼 기회, 돈벌 구멍이 생긴다는 옅은 타산이 있기때문이다.
우리의 지식인들도 외국이나 한국에서 온 손님을 보면, 별치도 않은 인물인데도 증조부가 생환한듯이 야단이며 환대를 하며 전전긍긍한다. 물론 나는 환대를 조소하는것이 아니다. 그속에 숨어있는 외국신드럼을 성취해보려는 똑같은 요행을 꼬집는것이다.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조선족의 요행심리에 대해서도 한국기업인의 지적을 심심찮게 당해야 하는 우리는 아무래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립장이다.

<8> 대충증

한국인은 《괜찮아요》를 련발하고, 조선족은 《일 없어요》를 련발한다. 한국인은 《일 없어요》라는 말을 비아냥거리는 소재로 삼지만 뭐 사실은 50보 100보다.
나는 《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에서 모국인 한국인의 괜찮아요식의 터프한 서비스의식, 무책임한 기획성의 부재 등에 대해 비판을 가했는데, 이번에 또 같은 비판을 내가 태여난 조선족동포들에게 들이대야 하니 가슴아프다.
그런데 조선족의 일없어요는 괜찮아요보다 한층 더 터프하고, 조잡하고, 무계획이고, 무리성적이여서 더 유감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독일인이나 일본인처럼 1미리메터라도 정밀성을 따지는 사고방식, 세밀성이 결여되여있다.
한국인의 얼굴과 뇌에 대한 연구분야의 세계적권위로 알려지고있는 서울교육대학의 조용진교수는 한국인이 론리보다 감성적인데 뛰여난 리유를 밝혔다.
지극히 상식적인 리론이지만, 인간의 뇌는 우뇌, 좌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좌뇌는 리성, 언어등과 같이 론리적 사고를 하고, 우뇌는 감성, 직관을 관리하는 부분이다. 한국인은 좌뇌보다 우뇌가 발달되여 랭철한 론거보다는 뜨거운 감정, 직관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좌뇌의 사고인 《따지는것》을 싫어하며 누가 조금이라도 따지고들면 《사람은 기계도 아닌데 뭐 그렇게 따지기야? 그냥 대충대충하면 될거 아냐》한다.
모든것이 대충대충이다. 조선족의 농촌에서 길을 물으면 《한 2, 3십리 가면 된다.》, 《여기서 두 서너동네 지나면 있다》는식의 대답이 되돌려온다. 제일 정확성이 필요한 시간도 우리는 《담배 한대 피울시간》, 《밥 한끼 먹을 짬》, 하고 표현하기를 즐기며 지어는 내가 어렸을 때 《토끼 씹 한번 하는 시간》이란 말도 들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시간개념을 모르겠다. 토끼교접하는 광경을 보지 못한 사람은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닌가!
백년전인 1894년에 미국인 선교사 H. 스미스는 중국인의 의식구조를 규명한 명작 《중국인의 기질》에서 중국인의 대충대충의 성격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를테면 제일 정확성을 요구하는 시간개념에서도 하루 이틀 심지어 며칠로 이야기하고 물건을 살 떄도 《한 두어서너근》달라고 한다. 장소를 말할 때는 《어디어디 일대》라고 하고, 거리를 가리킬 때는 《한 8, 9리》라고 한다. 나이를 말할 때는 《7, 80살》이라고 하니 70살에서 80살까지는 무려 10년이나 차이가 난다. 심지어는 자기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표기하지 않는 중국인의 정확성부재에 대해 30년 중국생활을 체험한 스미스도 혀를 둘렀을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에 나오는 중국인을 전부 조선족이라고 해도 통하는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 아닌가.
나는 중국을 차부둬(差不多)의 천국이라고 꼬집군 했는데, 일없다와 중국의 차부둬가 만난 우리는 한층 더 《차부둬, 일 없어》에 《괜찮아》가 다 복합된 셈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쓰고있는 조선어도 깊게 사고하고 추상적인 사고를 할수있는 개념이 단어조차도 아주 빈약하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표현은 아주 발달돼있다. 이를테면 《붉다》를 일본어, 중국어로는 서너개 정도로 끝나지만 우리는 《붉으스레하다》, 《빨갛다》, 《빨강색》, 《붉은색》, 《벌겋다》, 《벌거무리하다》, 《불그스름하다》, 《뻘거무레하다》… 외국어로는 전혀 번역이 불가능하게 섬세하고 발달돼있다.
서양이 론리적인데 반해 우리는 감성적이다. 인도나 중국에는 철학사상이 발달됐고 일본도 철학은 빈약하나 론리성을 따지는 사고력이 발달됐으며 모국인 한국도 우리보다는 덜 터프하다.

우리 조선족에겐 감성적 글을 쓰는 작가가 수백명이나 되며 정서적 문학은 나름대로 발달됐다. 하지만 육중한 론리를 바탕으로 하는 철학, 론리학, 인류학, 공학 등에서는 아직도 학자가 엄청나게 결여하다.
이런 결정적인 약점이 조선족의 유명학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장본인의 하나가 될것이다.
감성에서는 우리 민족이 전국의 챔피언일지도 모른다. 노래 잘하고 춤 잘추고 놀기를 잘하는 이미지를 떵떵 소리치며 심어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부터는 거기에다 사색 잘하고 론리적이라는 이미지를 세워야 할 때다.
대충대충 농촌에서 돼지우리 짓듯하는 감잡기로 세상에서 통하려 하니 웃기는 일이다. 대충대충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

<9> 자만증

1992년 한중수교후, 처음으로 무리로 한국인 관광객이 중국으로 벌떼같이 모여들 때, 한족들은 《한궈렌 유우첸》(한국인은 부자다)하고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여 그 덕분으로 한국과 피줄이 닿은 조선족도 《영예한국인》으로 어깨가 으쓱 올라갔고 길거리에서도 활보하게 되였다.
그러나 1년도 채 안되여 93년부터 중국인은 한국인을 싫어하게 된다. 너무 돈 있다고 거들먹거리고 뽐내는 그런 꼴이 보기 좋을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몇년 지난 오늘, 한족들은 조선족을 싫어한다. 물론 그속에선 선망과 질시가 뒤섞인 행동이긴 하지만 한족들이 조선족을 싫어하는것은 조선족 자신이 자초한 결과다.
한국인과 못지않게 오만하고 돈 있다고 자랑하기때문에 그것이 달갑게 보일리 없다. 옛날에 일제가 패전해갈무렵에 중국인들은 조선족을 《두번째 왜놈》(二鬼子)이라고 욕을 했는데 지금은 《작은 한국놈》이라고 욕하는것까지 꺼리지 않는다고 한다.
《저것들이 돈이 있으면 얼마 있고, 잘 났으면 얼마 잘났냐? 언제까지 저렇게 방약무인인가 지키고 보자.》
우리가 대국인으로 불렀던 한족들이 느긋이 팔짱을 끼고 조선족의 꼭두각시놀음을 지켜보는것은 뻔하다.
나는 일본에서 오래동안 생활하면서 여러 나라를 다녀보았으며 세계 각 지역에 사는 해외동포들도 많이 사귀여왔다.
나는 그러다가 한번씩 귀국하여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게 되는데 번마다 조선족들은 너무 자신들을 과대평가하고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놀라움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중국내에서도
조선족을 자신들이 생각하는만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전국 제일의 문화수준이 높은 민족하는 식으로 수십년을 자랑했지만, 실제 주위의 평가는 정말 낮다. 그리고 해외동포사회에서의 조선족에 대한 평가도 솔직히 고백하여 조선족이 스스로 아주 높은것으로 착각하는 수평치 이하라는것이 결론이다.
내가 보아도 재일 동포사회나 재미 동포사회에 비해도 그 갭은 100년은 잡아야 할것이다.
이 말에 펄펄 뛸것은 없다. 대신 따라 잡겠다고 뛰겠다는 결의를 내리면 더 이상 바랄것은 없겠다.
조선족작가중에 한국에서 책 한권 냈다고 마치 자기가 조선족문단의 최고작가인양 착각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과대망상증, 말기환자같은 사람이 조선족에 너무 득실거리는건 아닐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떄, 자기가 영화배우같이 이쁜 미인이라고 착각하고 스스로 그렇게 떠들고 다니던 녀학생이 있었다. 실제평가하여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반의 전체적 평가도 겨우 2류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기가 마치 미모의 신데렐라라도 된듯 매일 《랄라라》를 부르며 안하무인이였다
.

아마 누가 한번 쳐다보면 《아마 내 아릿다운 모습에 반해서 저럴거야, 아무렴 내가 이쁘지》하고 착각했을것이다. 그녀의 눈에 그렇게 씌여져있었다.
그녀가 언제까지 그 허무한 착각에서 헤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주위의 적당한 평가를 외면한채 자아만족에 도취되여있는 조선족은 꼭 그 《신데렐라증후군》같다.
물론 나는 조선족으로서의 자존심, 민족 자부심을 꼬집는것은 아니다. 바로 이 에너지로 조선족은 중국의 그 많은 민족속에서도 어디에 넘어가거나 아주 동화되지 않고 자기를 지키고 살아왔던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그 자존심과 오기마저도 하나의 아집과 극단적인 자만으로 쏠릴수는 없잖은가.
나는 높이 서서 멀리 봐야 한다고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해왔는데 우리는 자기의 자세를 높여 시각을 달리해서 자기 스스로를 바라볼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남보다 무엇을 잘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못하냐, 어디가 못났냐를 찾는것이 지혜로운 시점이며, 이런 발상이 우리의 미래를 바꿀수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조선족은 7살의 미숙아라고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고심도 우리의 싸구려 자만증에서 깨여나 더 성숙된 민족으로 크자는 절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10> 자포증

극단적으로 자만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자포자기하는것이 조선족이다. 자아만족과 자포자기는 이렇게 조선족의 기질의 동전잎의 정반량면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 민족의 이같은 못난 모습을 두고 《잘 될 땐 신나고, 안될 땐 신물난다.》고 꼬집은적이 있다. IMF의 국난이 터진뒤 세계의 선진국이요, 부자의 나라요 하면서 떠들다가 눈물 코물 줴짜는 모국 한국인의 쩔쩔 매는 그런 꼴불견을 조소한것이다.
당시 서울에서 만난 중국인 기자의 말을 되새겨보자.
《한국인은 일이 잘 될 땐 극도로 자고자대하고, 일이 안될 땐 극도로 자포자기하지요. 한국인에게는 극단적인 성격말고는 중국인같은 중용적인 이원론원리가 없어요. 언제나 극도로 기뻐하거나 또는 극도로 슬퍼하는 그런 극단지향의 성격의 소유자인듯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당시 나는 우리 조선족을 가리키는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해오른 기억이 난다.
내 조선족친구중에 이런 남자가 있다. L라는 동년배 친구인데 그는 농사짓다가 한국바람에 말려들어 한국에서 5년이나 체류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
이날까지 담배도 늘 얻어피우던 적빈상태에서 일약 졸부가 된 그는 중국땅에 떨어지자부터 웃음주머니가 터졌단다. 그는 부자가 됐다고 기고만장하여 사흘이 멀다하게 술집출입이였다.
그의 별명이 《이거 알아》였다. 왜냐면 술집에서 언제나 아가씨들한테 《너 이거 알아》하면서 자랑을 늘어놓는 입버릇이 있었기때문이란다. 《그래도 우리 조선족이 최고야! 되놈들은 평생 개구리 뒤다리 따르다가 언제 목돈 구경한대? 우리가 돈 많고 돈 잘쓰는 부자란 말이야...》
실제로 L은 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가자 그 한국에서 개천대 받으면서 번 돈도 거덜이 났고 아예 빈털털이로 전락되고말았다.

그래도 오기로 술집에서 외상으로 먹다가 그것도 안통하니까 현금으로 꾸어갖고 마셨다고 한다.
매일같이 자아만족에 빠져 흥부타령이더니 가난뱅이로 일락천장이 되자, 이상하게도 극단적으로 자포자기에 떨어졌다.
결국 L은 어느날 밤중 집에서 혁띠로 그 젊은 생을 마쳤던것이다.
L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주 심각하고 의의있다. 그는 죽음으로써 자포자기로써 우리에게 자멸의 교훈을 알려주고 간것이다.
우리는 절대적 우세, 자만할만한것이 있으면서, 자아도취에 빠져 흥청망청하다가 밑천까지 거덜낸다. 그리고 장래, 래일에 대해선 별로 사고하지 않으려 한다. 잘될 때는 늘 잘 안될 때가 오면 어쩌겠냐를 함께 사고하는 그런 시야나 장래성에 대한 성찰이 우리는 결여돼있다.
그러다가 진짜, 화가 닥치면 자기가 초래시킨 렬악한 결과에 부딪치면 죽겠다고 야단이며 죽은 뱀같이 늘어진다.
래일을 생각하지 않는 민족에게 래일은 오지 않는다. 온다 해도 그것은 처참한 래일일수도 있다.♠

체질개조의 련습

나의 하루생활은 장남 데츠야(哲也)를 보육원에 데려다주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나의 주부(主夫)일과의 첫번째 의무다.
매일 아침 6시경이면 나는 2살짜리 데츠야와 함께 눈을 뜬다. 간혹 간밤에 마신 맥주에 숙취했다가도 데츠야의 아침 등원(登園)이란 의무감이 내가 이불을 차고 일어날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데츠야를 데려다준 다음 집에서 두번째 일과는 세탁기에 전날밤 담그어놓은 기저귀를 넣고 돌리는 일이다. 세탁을 하는동안 나는 그날 집필하는 글을 구상하기도 하고 국제전화를 하기도 한다. 일본시간으로 9시경이니까 한국이든 중국이든 다 출근한 시간이다.
하루 집필 또는 강연이 끝나면 5시 반경에 또 데츠야를 데려오려고 보육원으로 향한다.
나를 보는 순간 《파파―》하고 두손을 벌리며 달려오는 데츠야의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수가 없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료리를 한 두가지 볶는 일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 …
이것은 내가 일본 녀성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쓴 《나의 주부(主夫)생활》이란 에세이의 한 대목이다.
아마 어떤 조선족남자들이 보면 《조선족남자 망신》시키는 대목일것이다. 불알 찬 사내가 빨래요, 료리요 하면서 계집애하는 일을 다 하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올것만 같다. 남자대장부, 남자는 자질구레한 가사를 안한다는 보수적인 《남자지존》의 관념에 물젖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의 가사로동을 즐기는 주부의 모습은 야유와 불가사의의 타깃으로 될것이 뻔하다.
그러나 그들은 장부(丈夫)로부터 남자주부로 자리를 바꿔보는, 고정관념을 타개하는 즐거움은 절대 모를것이다.
내가 나의 주부행각을 이야기하는것은 이렇게 자신의 전통적 보수관념, 고정된 체질을 개조하는 련습을 일상에서부터 해보고싶은 심정과 그 실천의 리행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조선족은 그 누구보다도 개혁을 떠들지만 실제로 누구보다도 보수적이고 전통관념을 깨지 못하는 고질이 있다. 남존녀비사상은 한국보다도 조선족남자들이 더 강하고 한족들보다도 수십배 강하다. 조선족남성이 가사일을 하는 통계를 보아도 한족에 비해 월등 적고 라태하며 반면 녀성을 때리거나 괄시하는 일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요즘 도시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남성의 가사로동상황은 한족과 비하면 여전히 후진적이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아마 이 절대적 가사천시관념, 남존녀비사상은 체질적으로 고질화돼버린것 같다.

그리고 이 마이너스적 체질을 개조하지 않으려는것이 조선족의 더 무서운 고질이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족은 늘 쌀밥에 김치나 중국식 볶음채에 체질화되여 우유에 빵 같은 음식전환은 아주 적응하기 어렵다. 언제나 고정적인 이밥에 김치, 볶음채 아니면 안된다는 관념체질에 사로잡혀 이것을 부수고 딴 음식을 일상화시키지 못한다.
례를 들어 나의 남동생도 수년간 일본에 살면서 아침에도 밥에다 김치타령이다. 이것을 떠나면 막 죽을것같이 여긴다. 우유에 빵 먹으면 못살것 같고 실제로 배탈이 난다.
그렇지만 나는 억지로라도 이 체질을 개조하라고 동생에게 강요했다. 차츰 우유빵으로 체질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침식사에 쌀밥을 보기 드물다. 2살짜리 철야도 처음부터 우유에다 빵이다. 그가 처음 제일 잘하는 발음도 《빵》이였다. 우리 집의 체질개조는 아주 성공한셈이다.
내가 거듭 우유빵 얘기를 하는것은 쌀밥 김치로부터 우유빵이란 체질전환의 발상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시대는 개혁의 시대, 개방시대라고 하지만 지구촌 스케일로 진행되고있는것이 이것을 토대로 한 기성관념을 부수는 《파괴의 시대》, 《붕괴의 시대》라고 해야 할것이다.
일본에서는 최근 들어 《학교의 붕괴》라는 류행어가 교육계, 사회 전체적으로 받들리고있다.
일본의 학교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지식을 가르치고 이것을 학생들이 외우게 하고 잘 외우는 학생을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하여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것이 교육의 목표였다.
그러나 미국은 지식의 일방적 전수보다는 학생들 스스로가 주체성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창의력을 키우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었다. 일본에서는 《암기식 우등생》의 치명적 약점을 갱신하기 위해 창조적 능력을 갖춘 인재양성으로의 《학교의 붕괴》가 진행되고있는것이다.
사실 일본도, 한국도, 중국도, 조선족도 교육은 거의 동양식의 암기위주, 《뛰여난 기억력과 온순한 양》패턴의 인재교육이였다. 그 치명적인 약점은 강인한 비판정신과 창조적인 발상력이 결여된것이다. 앞으로 동양교육의 과제가 여기에 있다.
늘 안일한 기성체제와 전통적 관념에 따라 행동하기는 누구나가 순응하면 되는것이지만, 결국 안일한 사고방식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답습하고 정지되며 엄청난 경쟁사회에서는 자멸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일본의 경제계에는 기업을 살리는 엄청난 발상의 괴짜들이 많다. 현재 일본의 맥주업에서 키린, 삿포로 등 거대한 전통적인 라이벌을 제끼고 오래동안 맥주산업의 왕자로 군림한 아사히맥주의 리사장 히구치고타로( 口廣太郞)씨의 《아사히슈퍼드라이》를 대 히트시킨 에피소드는 아주 유명하다.

원래 히구치로 말하면 맥주업은 아마츄어다. 그는 원래 스미토모은행(住友銀行)에 있다가 아사히맥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아사히맥주회사는 언제 도산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최악의 상태에 처해있었다고 한다.
히구치는 보통 흔한 조치로서는 회사를 구해내기 힘들다고 단정하고 발상을 바꿔 행동하기로 했다. 우선 히구치가 한 행동은 라이벌회사를 방문하여 아사히의 결함, 약점을 지적해달라고 간청했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서는 웃기는 얘기다. 치렬한 경생사회에서 라이벌회사를 찾아가봤자 상대방이 솔직히 의견을 지적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때문이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좋은 의견을 들을수 있었다.
기린의 회장이 이렇게 지적해주었다. 《당신들은 원료를 언제나 같은 곳에서만 사온다. 그것도 고가로 질 나쁜것을 말이다. 뮨헨의 원료만 고집하니까 제품이 안된다.》
삿포로의 회장은 《맥주는 산것인데 아사히처럼 팔리지 않는다고 그대로 방치해두면 그 오래 묵은 맥주를 누가 사 마시겠는가》고 갈파했다.
히구치는 이 두 라이벌 회장으로부터 좋은 어드바이스를 얻어 아사히의 재건에 활용했다.
그래서 기린회장의 지적대로 원료의 갱신부터 착수하였다. 대량적인 정보와 코네를 갖고있는 상사를 찾아가서 상담했다.
상사의 정보로부터 지금까지 아사히가 고집해오던 뮨헨의 원료가 제일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부수게 되였다. 사실은 캐나다의 밀원료가 제일 우질 품종이며 미국의 대부분 맥주회사들이 그것을 원료로 쓰고있다는것까지 파악했다.
그래서 그대로 원료를 캐나다산으로 철저히 바꾸었으며 또한 상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정보를 얻음으로써 중국으로도 진출하여 정상에 설수 있었다.
아사히를 재건하는 수단으로서 히구치는 또 하나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다. 회사내부의 사람들을 분발시키는데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낸 그는 《큰 회사에서 경영하고있는 파칭코를 찾으라》고 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유명한 한큐(阪急)계렬의 파칭코가 나타났다. 그것도 당시 큰 리익을 올리고 있는 파칭코였다.
히구치는 회사 간부들을 모여놓고 《어디어디에 창고가 있으니까 좀 차금을 해서 아예 11층짜리 파칭코를 짓고 그 옆에 12층짜리 주차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는 진짜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찬성자가 다수라면 해볼만도 하다고 생각하고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체 간부가 반대했다. 전통있는 아사히맥주회사의 백년의 력사에 흑칠한다고 야단이였다. 기실 이거야말로 그가 노린것이였다. 흔치 않은 발상으로 결사적으로 우리의 아사히를 살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의를 전체 간부들에게 심어주었다.
히구치가 삿포로회사 회장의 조언대로 묵은 맥주를 버린 결단도 비상식적이였다. 프로의 눈에서 보면 엄청난 손해였다. 그러나 히구치는 묵은 맛없는 맥주를 끝까지 시장에 두는것을 금후 신제품 판매에 마이너스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히구치의 성공비결은 기존의 상식적인 발상을 깨버리고 새로운 비상식적인 발상으로 전환시키고 그것을 과감히 실천한데 있다. 우리들은 사고방식 자체를 해체해보는 발상의 전환이 있지 않으면 어디까지나 기존의 틀속에서 허우적거릴뿐이다. 우리는 발상을 바꾸는 련습, 체질개조의 련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개혁이요, 개방이요 하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말이다. 말만큼 쉬운건 없다.

그런 말 수천번 하기보다는 우리가 해야 할것은 일상 신변의 사소한 발상, 습관으로부터 해체하고 갱신하는 련습을 몸에 배게끔 해야 한다. 남자들이라면 가사로동도 당당히 할수 있는 주부부터 시작하는것이 좋지 않을가.


약자심리가 우리를 망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조선족마을에서 우리끼리 싸움을 벌일 때 꼭 한족마을에 없는 싸움의 패턴을 익숙히 보아왔다.
우리 조선족은 때리고 패는 싸움직전에 꼭 빠치지 않고 거치는 하나의 프로세스가 있다. 무엇이냐면 서로가 먼저 손을 대는것이 아니라 자라목같이 상대에게 얼굴을 내밀고 《자 때려, 때려봐…》하면서 맞기부터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족인들은 《왕바두즈(개새끼)》, 《투자이즈(토끼새끼)》하면서 손과 발이 씽 나간다. 그것은 정면적인 적극공격의 패턴이다. 이것과는 달리 우리는 정면의 적극적 공격이 아니라 상대가 때리기를 원하다가 상대가 하나 치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듯이 《오, 잘했다. 네가 먼저 쳤지.》하면서 자신이 우선 피해자라는 립장을 구경군들에게, 상대에게 밝힌 뒤 정면공세로 돌입한다.
싸움이란 이기기 위해서, 정면으로 당당하게 대방을 격파하기 위해 벌이는 필사적인 격투인데도 우리는 먼저 맞고서 공격한다는 사고자체가 우습강스럽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이 피해자이길 바란다. 피해자라는 약자심리로 상대방에게 내가 먼저 맞았다고 공격하는 정당한 리유로 만들어서 그리고 주위 구경군들에게는 피해자라는 약자심리로 동정을 얻어 자신이 최종승리를 얻으려고 시도하는것이 우리의 체질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약자면 무조건 동조하고 동정하는 그런 식의 의식이 발달돼있으며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응석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이상한 론리까지 생겼다. 또 그만큼 정의의 유무를 불문하고 약자는 무조건 응원해주고 강자는 무조건 규탄하고 질타하는 비론리적인 버릇이 만연하고있다.
생각하면 우리 조선반도에 살고있는 동포들도 이런 약자심리가 강한데 아마 우리가 중국땅에 이주해 살면서 그 특수한 유전을 약소민족이라는 라벨을 붙인 중국땅에서 더 발전할 토양을 얻은것 같다.
우리의 민간설화에도, 문학작품에도 약자를 동정하고 강자를 규탄하는 이를테면 상민들이 량반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식의 약자심리 모티브가 무수히도 많이 등장하지 않는가.
우리 조선족은 강대한 한족문화권에서 살면서 계란에 바위부딪칠수 없는 한계에서, 힘으로 강자에게 대적할수 없고 론리로서 정면대결을 할수 없었기에 언제나 자신이 약자요, 약소민족이라는 심성이 유니크하게 클로즈업되여 하나의 체질로 굳어버렸다.

그것은 어린 아기의 응석과도 같은것이다. 무조건 응석부리고 안되면 상투적인 울음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겨우 2돌지난 나의 장남 철야도 요즘 한창 응석으로 떼질 쓰는것을 알아가지고 늘 나와 《부자싸움》을 벌인다. 내가 글 쓰느라고 자기를 무시했다고 철야는 내 옆에 와서 늘 집적거린다. 내가 무시라도 하거나 조금이라도 시끄럽단 안색이라도 내면 애는 떼질로 반항하다가 그것이 안되면 최종무기인 울음으로 두 다리를 펴고 야단이다.
철야의 울음만큼 효과적인게 우리 집에는 없다. 안해가 울음소리를 듣고 하던 일을 중단시키고 《응, 누가 우리 텟쨩을 울렸어!》하면서 안아주면 응석을 받아준 엄마로 인해 화가 삭고 《마마, 스키》하면서 방실방실 웃는다. 이 놈도 벌써 울음이 무기라는것을 잘 알고있다.
나는 우리가 마치 애들과도 같이 울음으로 약자심리를 표현하고 약자라는것을 호소하고있다고 본다.
근년래 한국인과의 국제적 마찰, 트러블속에서 남김없이 발로된것이 바로 이 약자심리다.
한국은 우리 200만 동포에게 있어서 부유의 나라, 선진의 나라, 그리고 선망과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고국이라는 특수한 정으로 매인 《코리언드림》에 우리는 목숨을 걸지 않을수 없었다.
한국에만 가면 일획천금을 할수 있다는 부유의 첩경에 들어섰다는 장미빛 꿈으로 우리는 알량한 일부 한국인 사기군들에게 당하지 않으면 안될 비운에 처했다.
사기협잡의 사냥물이 된 조선족들은 금전과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으며 분노해야 했다.
이리하여 조선족사회에서 《한국 때리기》캠페인이 공전의 운동으로도 에스컬레이터해갔다.
1996년 10월, 연길시의 주택공사 구락부에서 열린 한국사기군 성토집회가 클라이막스에 달했다.
《우리는 죽음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한국 사기군 연변에 오지 마라!》
《한국 사기군을 잡아내자!》
《한국정부여, 보상하라!》
수백명의 조선족 피해자들이 일제히 웨치며 울분에 젖어있었다.
연변의 한 기자는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하고있다.
《… 때국 찌든 옷을 입은 농촌녀인, 머리발 희슥한 로인네, 30대 미만의 젊은 부인…너나가 창자를 쥐여짜듯한 울분의 소리로 웨치다싶이 한국 사기군의 만행을 탄핵했다. 그와 함께 <사기군을 징벌하라!>는 구호소리도 점점 높아갔다. 그동안 상상할수 없는 고통속에 응어리졌던 피해자들의 설분이 인내라는 두터운 지층을 뚫고 용암처럼 뿜겨나오고있었다.》
이 한국 사기군 규탄대회가 상식적으로 설명하듯, 조선족의 한국비판성토 캠페인은 성세호대하게 하나의 사회적운동으로 되고있었다.

한국인을 지어 《한국놈》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나는 조선족사회에서 이렇게 습관적으로 부르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한국인을 일본놈보다 더 악독하다고까지 우리는 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럴수록 우리는 하나의 우리도 자각할수 없는 치명적인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어간다는것을 나는 지적하고싶다.
바로 다름아닌 그 약자심리다. 우리는 피해자라는것, 약자라는것, 의례 한국인과 전체 한국사회 그리고 국제적인 동정을 받아야 한다는 약자심리가 갈수록 엄청나게 불어나기만 했다.
우리가 사기당한것은 마치 《한국사기군때문에 연변교포들 망한다.》라는 프랑카드에 집약적으로 반영되듯, 망하도록 피해를 받은것은 전적으로 한국탓이라는것이다.
물론 나는 한국 사기군을 규탄하는 우리 동포를 비난하거나 질타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 나 역시 《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를 집필하여 파격적으로 한국을 비판한 조선족 문인이다. 특히 조선족에게 막심한 피해를 안겨준 한국인의 추악한 모습에 대해 나는 독설로 무자비하게 비난해 국제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체험을 갖고있다. 뿐만 아니라 친구와 친척들을 도와 서울에 가서 소위 《빽》을 써서 못난 한국 사기군을 혼내준 개인적인 《영광사》도 없지 않다.
누구보다도 나는 한국의 사기군을 규탄한 조선족의 일원으로서 상대방을 규탄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도 반성해야 한다고 웨치고싶다.
우리는 지금껏 한국 사기군에게 맞았다는 피해자의 립장, 약자심리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의 추한 모습을 돌이켜보지 못했다.
적당히 《고국이고 큰 동포사회니까 우리같이 작은 조선족 동포사회를 무조건 봐주어야 한다.》는 약자심리가 우리의 자기반성을 망각시켰다.
어린애의 응석이나 울음과도 같다. 어린이의 그것은 귀엽고 천진무구하지만, 우리의 그것은 너무 못났고 유치하고 강억지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는 한국에게 있어서 귀여운 어린이도 아니며, 한국 역시 우리에게 있어서 응석을, 눈물을 받아줄 《부모》는 아니다. 국제사회의 문제이며, 국제적인 의식수준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당했다고만 울고불고 눈물코물 쥐여짜는데 왜 당했냐고는 반성을 통 안한다.
어린애같은 약자의 응석받이로, 봐주겠지 하며 그런 촌개구리의식으로 국제로 나설 때는 당연히 모르는자가, 어리석은자가 당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한국과 우리의 한세기동안에 만들어진 문화의 이질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하며, 국제적의식으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
우린 한 피줄이니까 응석부려도 괜찮다는, 그런 약자심리는 연길의 한국인 규탄대회에 나왔던 조선족 아줌마의 옷자락에 묻은 때국같이 우습강스럽고 넌센스하다.
우리의 의식을 국제적수준까지는
안가더라도 그런 시점에서 볼수 있는 시야만큼은 우리가 가져야 한다.

언제나 당하고도 피해자라는 약자심리, 구질구질 눈물만 줴짜는 그런 꾀죄죄한 몰골을 우리 스스로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든,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약자역밖에 맡지 못하며, 멸시당하기만 한다.
이제 우리는 울보의 이미지를 갱신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망친다
.


추악한 조선족


우리 조선족은 점점 못나가고있다. 추악해가고있는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내가 이렇게 못났다고 하면, 7층에서 떨어진 메주 신세를 겨우 면한 내 얼굴때문에 《뭐야, 별 볼품없이 생긴 자식이 무슨 잔소리야》하면서 핀잔 맞을법도 하지만, 못났다는 《추》자는 꼭 외견상의 모습만을 말하는것은 아니다.
우리 조선족은 외모에서도 별로 잘난 축은 아니다. 얼굴이 보통 둥글넙적하고 관골이 유난히 튀여나온 몽골로이드의 특징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형질인류학적으로 우리 몽골반점이 립증해주듯, 일본인과 한국인, 몽골인은 그 종족 특질적으로 루트를 같이하고있는데 보통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으며 키도 별로 크지 않은것이 특징이다. 우린 한족과 비해서도 작고, 실제로 일본인과 한국인에 비해서도 키가 작다. 한족들은 우리 동포녀성의 작고 똥똥한 모습을 보고 못났다는것을 비유할 때 곧잘 《조선족녀성같이 작달막하고 가로 퍼졌다.》고 해오지 않았는가! 문학작품에도 이런 묘사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우린 옷을 잘 입고 센스가 한족들보다 좋은것은 자타가 다 시인하는 사실이다. 뭐 별로 외모에서 비관할건 없다. 작으면 작고 크면 큰대로, 잘 났으면 잘난대로 못났으면 못난대로 자기 개성대로, 나름대로 잘 살면 되지 않을가? 하물며 우리는 점점 경제생활의 향상과 삶의 질의 근대화로 인해 더 잘나고 키도 커가고있으니까말이다. 이제 국제급 패션모델도 우리 속에서 조만간에 나올수도 있다.
내가 여기서 못났다는것은 외관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 도덕의 내면세계를 말한다.
우리는 개혁, 개방전까지 고분고분 조용히 본분을 지키며 얌전한 민족으로 살아왔다. 왕왕 전쟁이나 공황이나 천재(天災)같은 격변기, 유사시에 숨어있는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추악이 로출되는 법이다.
고국인 한국과의 40년만의 만남, 한국 신드롬은 우리를 경제적으로 돈벌이의 큰 찬스를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한국 돈벌이를 유일한 경제적 부의 창조로 삼았던 우리는 배금주의의 과욕을 만나 많은 추악을 일거에 방출했다.

그러나 우리는 국제감각이 없고, 무지했으며 유치했기에 과욕이란 황홀한 마취제까지 가세하여 일부 추악한 한국인의 사기를 당해야 하는 불운에 울어야 했다.
우리는 한국 돈벌이를 위해 사랑도, 량심도, 가정도, 도덕도 서슴없이 버리는 추악한 얼굴의 조선족으로 변질되였다.
우리는 사기를 친 한국동포만 성토하고 비난하지만, 왠지 우리 자신은 잘 반성하지 않는다. 사기를 치게끔 기회를 준건 바로 배금주의, 과욕에 빠진 추악한 우리 자신들이 아닌가.
한국사기군의 추악한 사기를 도와준 파트너가 바로 우리 조선족 자신들이다. 어떤 추악한 조선족은 한국에 갔다가 근사한 서울말을 숙달히 구사할수 있는 장점을 리용하여 한국인인척 하면서 중국의 동포들을 초청해준다며 거액의 돈을 말아간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의 추태는 이뿐만 아니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한국인을 사기치는 추태극을 스스로 연출해낸다. 내가 아는 서울의 K사장은 연변의 한 《성실하고 무던한》조선족에게 속아 평생 기업으로 축적한 거대한 자금을 말리우고, 가정까지 파탄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국동포 VS 조선족동포의 사기전쟁이 20세기말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에스컬레이터시켰다. 《민족의 참극》이라고 한다. 실제로 동족사기 해결책으로 한, 중간을 열심히 오가는 조선족 동포유지 C씨를 서울에서 만나본적이 있다.
《제가 지금 이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해결하고자 노력하고있습니다만은 문제는 우리 조선족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왕왕 약소하다고 수자적으로 적은 <해외교포>라고 한국에 대해 응석을 부리고있습니다. 분명히 우리의 심리에 너무 욕심이 많은것과 생각도 역시 너무 가볍고 쉽게 돈 벌려고 해요. 그래서 한국동포의 돈지갑을 호시탐탐하고 동족이라는 올가미를 리용하여 그들의 목을 조이고 귀신도 모르게 사기를 치는거 있지 않습니까. 우린 <한국놈>을 너무 부르짖어요!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더럽고 경박한 몰골을 반성할 때가 됐어요.》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매스컴도 역시 너무 《한국놈 때리기》에 부채질을 한건 아닐가! 이렇게 200만 조선족이 《한국 떄리기》에 일제히 쏠리여 잊은건 바로 자기 자신에게도 있는 추악한 구석들이다.
《추악한 한국인》이 아니라 오늘은 《추악한 조선족》을 때려야 할 시점에 있지 않을가!
우리에게는 이런 저런 눈으로 보이는 추악한 모습외에도 잘 보이지 않는 유연성을 띤 추악한 모습들이 너무도 많다.
잠간 한국동포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동포의 눈에 비친 우리의 추한 모습들, 어떤것이 있나 보기로 하자.
서울과 심양을 한달에 두세번꼴로 동분서주한다는 30대의 B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족은 머리가 좋지만, 너무 경박하고 인내성이 없어요. 한국인도 <빨리빨리>에서 나타나듯 성격이 급하지만 조선족은 우리 뺨칠만큼 급해요. 그리고 근면성이 모자란것 같아요. 한국인보다 더 술을 즐기고 노는데는 천재들이예요. 술집에 돈 뿌리는것 보고 놀랬다니까요. 중국에서 살기때문에 끈기있고 인내성있고 듬직한 사고방식을 갖고있는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더라고요…》

청도시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H사장은 이렇게 술회한다.
《조선족은 한 곳에서 열심히 성취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적어요. 취직을 해서 일을 하면서도 어딘가 기회가 있으면 딴데로 자리뜰 생각을 해요. 그리고 어디다 몸을 두었다면 자신이 거기의 사람이라는 주인의식이랄가요. 그런 의식이 결여해요. 일을 배웠다간 자기가 나가서 독립하려는 타산이 강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제집 사랑하듯 아끼는 사람이 별로 안보여요. 한족은 안그래요. 더 성실하고 끈기있고 충성해요. 우리 한국 기업계에서는 조선족은 통역감이고 중임은 한족에게 맡겨야 된다는 얘기까지 하고있어요.》
안산시에서 무역업을 하고있는 부산출신의 S씨의 말이다.
《왠지 조선족은 회사에서도 공사구별을 안해요. 회사전화로 그냥 개인얘기를 하는가하면, 몰래 국제전화까지 한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잘해요. 뿐만아니라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를 잘하고 못된것은 전부 다른 사람 탓해요. 자기 반성이란 전혀 안보여요.》
이번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족의 추한 모습을 보기로 하자. 일본 동경에 조선족 모임 《천지클럽》이 있는데 주로 조선족의 학자, 기업인, 류학생 엘리트가 모여서 만든 단체이다. 동 클럽에서 발간하는 《천지인문》이란 간행물이 있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현재 일본에서도 조선족의 불법체류가 급증하고있으며 조선족의 이미지가 대폭 추락되고있는 실정이다. 예전에는 조선족의 이미지가 좋았지만, 지금은 일본의 출입국관리국에서도 조선족학생이라고 하면 복건성 중국인과 같이 여긴다. 일본어학교에서도 조선족학생은 기피하는 경향까지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 조선족의 추악상, 이런 추악으로 우리의 얼굴에 똥칠하는 수자는 그래도 다수가 아니다. 그렇지만 많지도 않은 200만이 이런 추악한 이미지를 들쓴다. 그러나 우리 200만가운데서 나왔으니 아무래도 《200만의 추악》이 아닐가?
요즘은 이런 《추악》의 손이 남반부 한국인에게뿐만 아니라 북반부의 조선동포에까지 뻗치는 추태극이 시도때도 없이 빈발하고있다.
한국동포에게는 사기치고, 조선동포에게는 팔아먹는 인신매매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북편남(欺北騙南)》이란 새로운 4자 성구가 만들어질 정도다. 정확히 말해서 《매북편남(賣北騙南)》이다. 북쪽은 팔고 남쪽은 사기다.
최근 몇년간 식량난으로 먹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동북으로 월경해온 동포들이(脫北者라고 불리운다.) 날로 증가되고있다. 우리가 이 천하 가련한 동포들을 포용하고 따뜻이 동포애로 사랑하는 미담과 함께, 돈벌이에 눈이 벌개져 이 불쌍한 동포를 중국에 팔아먹는 조선족이 다 있다는 현실을 외면할수 있겠는가?
이건 롱담이 아니다. 우리는 추악해도 혈육을 몇푼으로 팔아먹는 추악의 극치에 달했다.
한국의 신문, 잡지에도 요즘은 심심찮게 《탈북자가 인신매매당하는 참상》이 거론된다. 일본의 TV다큐멘터리나 잡지에도 《동포를 팔아먹는 조선족》의 추악상이 클로즈업되여 등장한다.

국제망신은 우리 조선족이 맡아놓고 한다. 왼팔에는 한국, 오른팔에는 조선, 고국의 동포를 다 팔아먹는건 조선족밖에 있을가? 그러고 보면 우린 약소민족이 아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고상하고 인도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고국에서도 못해낸 사상공전의 추악의 기록의 영광을 따내고있다.
아아, 조선족동포여, 그대들에게 최고의 경례를 드립니다! 목이 메여 말이 안나간다…
최근에 나는 한국에 본부를 둔 사단법인 굿 프레인드(좋은 친구)가 발행하는 《북조선 <식량난민>의 실태 및 인권보고서》(1991년 6월 간행)일문판을 우연히 입수하여 읽게 되였다. 이 굿 프레인즈는 조선사람의 인권을 지키려는데 뜻을 둔 민간그룹이다.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동북 3성의 탈북난민의 수가 최저 14만명, 최고 20만으로 추정된다. 류동성이 크기에 그 정확한 수자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조사대상중 년령이 20대와 30대가 60%이상을 차지했는데 녀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사결과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였다. 《많은 탈북녀성이 생존을 위해 불법결혼을 하거나 인신매매를 당해 강제적 결혼생활을 하고있다.》
실제로 조선족들은 이미 이런 실정을 다 잘 알고있으며 《충격적》이 아닌 심상한 화제로 되고있을뿐이다.
그러나, 간과할수 없는 심상하지 않는것은 이 인신매매에 우리 조선족이 대부분 주역이라는 사실이다.
탈북녀성의 5할이상이 조선족과 한족의 인신매매조직 또는 개인에게 팔리는데 대체로 이러한 3가지 케이스(패턴)이라고 한다.
1) 조선에 있을 때부터 현지 인신매매조직에 의해 중국에 넘겨진다.
2) 홀로 강 건너 중국으로 왔는데 중국측 대안에서 기다리고있던 인신매매조직에 발견되여 팔린다. 조선족을 위시로 한 전문 녀성을 파는 조직이 다수 있으며, 그들은 《중국은 위험하니까 우리가 돌봐준다》는 사탕발린 말로 그녀들을 유혹하여 데리고 간다.
3) 중국 내륙도시에 왔을 때, 역전이나 시장에서 붙잡혀 팔리는 케이스, 인신매매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두 눈을 씻고, 조선녀성을 사냥한다고 한다.
녀성이 팔리는 가격 역시 3랭크: 5천원, 4천원, 3천원. 대부분 녀성들은 중국농촌, 그것도 산골에서 결혼하지 못한 로총각이나 안해를 여읜 늙은 홀아비가 위주라고 한다.
팔려온 조선녀성들의 육성을 들어보자.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의 23세 녀성은 이렇게 하소연한다.
《저는 흑룡강성의 해림시에서 일자리를 찾을 때 30살의 조선족청년에게 잡혔습니다. 그는 경찰관이라고 자칭하면서 저를 부근 농촌에 데리고 갔어요.
그는 한족에게 잡히면 한족남자에게 팔리니까 이 마을 조선족남자와 결혼하라고 권하면서 조선족청년과 대면시켰습니다. 저는 불법입국자니까 할수없이 따를수밖에 없었습니다…》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의 26세 녀성도 말한다.

… 할수 없이 그 남자를 따라 왔습니다만 그의 생활은 참을수 없을만큼 더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잠을 못자게 굴었지요… 하반신이 너무 아파서 울었지만 전혀 생각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도 안통하지 하여 방법이 없었습니다.
몇달후에 임신됐단걸 알자 감시가 좀 느슨해졌어요. 그래서 소매점에 물건 사러 갔던김에 그 길로 도망쳐 할빈에서 연길로 나왔습니다.》
2000년 6월 심양에서 나는 현지친구의 소개로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황해도 출신의 녀대생을 만날수 있었다. 24세의 그녀는 평양의 한 예술학교를 졸업한 살갗이 백옥같이 흰 미인이였다.
처음 만나는 순간 나는 아가씨가 너무 아까웠다. 한창 예술의 세계에서 청춘을 꽃피울 나이에 외국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미모에 미끈한 체격이여서 현지 인신매매조직에서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중국에 가면 잘 먹고 돈도 벌수 있다는 꿈에 젖어 그녀는 조직에 의해 팔려왔다.
조선족 인신매매조직에 의해 련 며칠 간음당하고 《세례》를 받은후 흑룡강성의 오지에 팔려갔다. 그곳은 기차를 타려면 수백리 나와야 하는 심심산골의 한족마을, 5000원으로 팔려 40세 한족 홀아비의 안해로 되였다.
아이 하나를 낳을 때까지 감시가 심했다고 한다. 귀여운 딸애때문에 눌러앉아 살다가 남편이 또 도박쟁이로서 많은 빚을 졌다. 그녀는 참을래야 참을수 없어 야밤에 도망쳐 나와 할빈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심양에 온지 한달밖에 안되였단다.
그러나 그 불쌍한 딸아이때문에 남편한테 전화를 하고 또 번 돈도 부친다고 한다. 같이는 못살겠으니 돈이나마 부쳐주는것으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인터뷰도중에 그녀의 휴대폰이 두번 울렸다. 그 《남편》한테서 걸려온 전화다. 돈 보내라고 재촉이였다.
그녀가 겪은 중국체험을 중편쯤은 쉽게 엮을수 있었다. 편폭상관계로 더 기술하지 않기로 하겠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끝내고 난 뒤 동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중국에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싶어요. 그러나 같은 동포로서 피줄로서 동포를 팔아먹는 조선족은 저주해요. 이런 일이 언제 가면 없어질가요?》
인터뷰를 끝내고 나는 그녀의 말이 련 며칠 귀전에서 쟁쟁 울렸다. 나는 민족의 비애란 무엇인가 알게 된것 같다.
이 글을 쓰고있는 오늘은 2000년 8월 18일이다. 요 며칠 세계 동포들이 눈물에 젖어있다. 15일 남북리산가족 200명이 부둥켜안고 반세기만의 재회. TV의 가슴 메이는 눈물의 장면을 보면서 어찌 눈물이 마를수 있었던가.
남북분단의 종연의 막이 눈물속에서 서서히 닫기기 시작했다.
우리 조선족은 실제로 한국, 조선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향유하고있다. 그리고 남북동포들이 우리 중국 땅에서 만날수 있는 공간을 갖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너무 이 자유의 공간을 도외시하고 돈벌이에 미쳐 우리의 황금같은 위치마저도 잊어버린건 아닐가?
한다는 짓이 한국은 기만하고 조선은 팔아먹는 그런 추태극이였을가?
남쪽은 욕하고 북쪽은 업신여기는 그런 추악하고 못난 일은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아, 추악한 조선족이여!

《조선족 늑대》의 EQ

EQ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EQ라는 개념을 최초로 내놓은 사람은 1971년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며 런던대학 교수인 데니스 가볼이다.
EQ라는것은 륜리지수(倫理指數=Ethical Quotient)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IQ(知能指數=Intelligence Quotient)를 상대로 한 도덕적 수준의 개념을 이야기한것이다.
《성숙사회》란 저서에서 가볼은 EQ지수에 따른 사회를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EQ가 130을 넘는 사람들은 자아희생정신이 강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며, 110-130은 리기적인 일을 삼가하고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행동을 안한다. 100-110은 책임성을 다하며 90-100이면 불의의 리기적인 행동도 한다. 80-90은 타인의 감시가 있을 때는 괜찮으나 없을 때는 나쁜짓도 한다. 70-80은 잔인하거나 범죄적 행위로 나가고 불법을 잘한다. 70이하면 상습적인 범죄자로 전락된다.
EQ+IQ에 공평의 사회가 《성숙사회》라고 한다. 지수가 높을수록 사회는 성숙되고 선진성을 띤다고 가볼은 역설하고있다.
이 EQ가 우리 조선족은 얼마나 될가? IQ는 높은 점수를 따낼지도 모르지만 EQ는 나는 90도 못 미치는 80이 아닐가고 의심하고있다.
조선족이 이날까지 륜리도덕성수준이 높다고 자화자찬한것만큼 EQ가 높은것 같지 않다. 조선족동포사회내부에서의 사기와 절도, 강탈행위, 그리고 양으로 음으로 빈발하는 범죄행위, 술집 호스티스녀자를 먼저 차지하겠다고 칼부림까지 벌리는 배경에는 EQ가 대체
몇점이나 될가?
특히 우리가 당했다고 약자심리, 피해자의 립장에서 《한국놈》, 《한국놈은 죽일놈》이라고 침방울 튕기며 싸잡아 욕하던 우리가 오히려 한국인에게 그런 욕을 먹어야 되는 현실이 온것이다. 우리가 규탄하는 한국인의 추악한 사기군행각 못잖게 우리가 지금 한국동포를 사기치고 피해를 주고있다.
최근에 청도에서 상징적인 조선족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늑대의 주인공은 조선족 강씨라고 한다. 지금 청도시내에는 한국기업이 1600여개가 되는데 동북3성의 조선족들은 한국에 나가는 열병 앓듯이 청도에 뛰여들어 한국기업에서 일하면서 부자의 꿈을 꾸고있다. 수만명의 조선족이 청도에서 이미 조선족사회를 형성하여 생활하고있다
.

황금꿈을 안고 청도에 온 강씨는 한달을 헤맸지만 일자지를 구하지 못했다. 《아무런 재능이 없는》그는 우리 말을 하나 안다는 밑천으로 한국회사의 취직을 요망했지만 그것 역시 차례지지 않았다.
집에서 가지고 온 생활비도 바닥이 나고 동창생 숙소에서 동거생활도 했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때는 매일 하루에 한끼만 먹는 극빈의 생활이 이루어졌고, 앞길이 캄캄했다.
불쌍히 여긴 강씨의 동창생이 아는 사람을 통해 어렵사리 한국기업을 소개했다. 마음씨 착한 한국의 리사장은 강씨를 동정하여 자기회사에 배치하여 취직을 시켜주었다.
뿐만아니라 리사장은 강씨에 대한 기대로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세면도구까지 챙겨서 준 사장의 뜨거운 동포애에 강씨는 늘 리사장에게 《저는 리사장님의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겁니다.》고 눈물을 머금고 허리를 굽신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강씨의 이런 맹세는 결국 《혀바닥에 참기름을 바르며 굴렸던 하나의 엄부렁한 광고였다》는것이다.
바로 그 강씨가 회사의 기계와 원자재를 싹쓸이로 절도하여 뺑소니를 친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 강×가 도둑이라니?》
리사장은 강씨가 처음엔 도둑혐의자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배려해주고 같이 먹고자면서 일해온 동포가 어찌 이럴수 있단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철같은 사실이였다.
오늘 《조선족 늑대》가 한국의 《동곽선생》을 잡아먹는 활극을 벌인것이다. 강씨는 결국 법에 의해 체포되였고 감옥으로 직행했다고 한다.
늑대사건은 이것으로 막을 내린것이 아니다. 이 일로 하여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도 한국기업계에서는 강씨 《늑대사건》에서 교훈을 섭취하여 조선족들의 신뢰성을 점검하고 검토하는 소리없는 캠페인이 벌어졌으며 한 회사에서는 한꺼번에 60여명의 조선족직원을 짤랐다고 한다.
《믿지 못할것이 조선족》이라는 원성이 여기저기 한국인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온다.
지금 조선족 신문지를 펼쳐보면 매일과 같이 한국인을 사기치거나 여러가지 수단으로 피해를 준 반갑지도 않은 기사들이 실리고있다.
2000년 초에 중. 한 량국의 매스컴을 떠들썩한 한국인 랍치사건같은 충격사건을 들먹거릴 필요없이 조선족의 한국인 피해사건은 여기저기서 빈발하고있다.
우리가 보고들을수 있는것은 실제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에 있는 내 친구중에 연변녀자에게 결혼사기로 한화 7천만원을 털린 듬직한 30대 남자가 있다.
그 요상한 조선족 《금여우》를 찾아 헤맸지만 아직도 《금여우》의 그림자도 볼수 없다고 친구는 술회한다. 이제 그 《금여우》에 대한 복수심도 증오도 색이 바래서 없어졌다고 한다. 다만 한번 만나서 시원히 욕사발을 퍼붓고싶은 심정뿐이란다.

내가 보건대 우리 조선족의 EQ점수는 잠시 불문하고라도, 우리의 사고에 치명적인 위험성이 잠복돼있다. 그것은 한국인이나 외국인을 대할 때 사업을 할 경우 우선 같이 협력하여 맞들어서 사업을 발전시켜 부의 가치를 공유할 현대적 사고와 발상은 제로에 가깝다. 대신 일시적으로 상대를 유혹하여 일획천금의 기회를 만들고 돈을 빼먹으려는 경박하고 유치한 생각이 앞선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 좀 돈을 빼먹는것은 마땅하다고 여기는 일그러진 가치관을 갖고있다.
이런 우습강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외국사업을 대하니까 당연히 여기저기서 문제가 생기고 펑크가 안날리 없잖은가!
좀더 겸허하게 배우고, 근대적 의식을 키워야 경박하고 웃기는 사고가 없어질것이다.
한국 동포들께서 《조선족 늑대, 금여우》라는 독설까지 들어야 하는 우리 자신들의 못난 모습들을 돌이켜보자. 철저한 이미지갱신, 체질갱신을 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


한국이 있다는것

88 서울 올림픽을 분수령으로, 조선족 동포사회에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전까지만 해도 광대한 한족(漢族)앞에서 조선민족이라고 주눅이 들던 조선족들이 한국이 알려지자부터는 그 흑싸리 껍데기같이 깡마른 주눅은 사라지고 당당히 《조선족》이라고 긍지를 느끼며 떵떵하게 내노라 소리치게 되였다는것이다.
한 조선족은 이렇게 자신의 심경변화를 술회하고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한국과 교류가 없을 때는 못살고 초라한 우리의 약소민족이라는 콤플렉스에 빠져서 굳이 조선족이라는 내막을 직장 동료들에게 공개하기도 꺼렸어요. 될수록 공적인 장소에서는 조선어를 안쓰고 조선사람이란 티도 내기 싫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한국이 올림픽을 진행하고 세계에 우수한 민족이라고 소리칠만큼 발달됐으니, 우리도 그 덕분으로 가슴 내밀고 당당할수 있게 되였지요. 지금은 조선족이라는것을 애써 표현해요. 다들 부러워하거든요! 한국이 있기때문에…》
김치장사로 허리를 굽힌 동포할머니의 말을 들어보자.
《한족사람들은요, 옛날에는 우리가 못산다고, 소수민족이라고 꼬리빵즈(고구려 사람을 야유한 욕)라고 욕을 잘했어요. 내가 김치장사에 처음 나섰을 떄가 80년대 초기였는데 그때만해도 김치는 맛있다고 잘들 사먹으면서도 한족사람들은 깔보려고 했는데 한국이 있은부터는 오히려 날 부러워해요. 조선김치도 이젠 한궈(한국)김치라고 그네들 자신들이 부르거든요. 한국 경상도가 내 고향인데 고향을 떠나 이렇게 대국땅에서 살면서 고국이 잘 사니까 우리도 의지가 되네요…》
조선족 대학생(20대) H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선족은 한국이란 고국이 있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장족이나 위글족, 만족들은 이렇게 민족적으로 밀어주는, 정신적으로도 의지가 되는 고국, 나라가 없어요. 몽골족이 자신들 등뒤에 몽골이란 나라가 있지만 힘이 없어서 어디 의지가 됩니까. 우리 대학에 11개 소수민족 학생이 모였는데 우리 조선족을 다 선망해요. 사실 저도 심양에서 살면서 어렸을 때 우리 말을 못배웠는데 한국과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 말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앞으로는 한국과 문화교류하는데서 자신의 이중문화적 가치를 살려보려고 해요…》

작년에 한국서 5년째 불법체류로 일하다가 잡혀서 강제송환돼온 조선족 아저씨 A는 이렇게 얘기한다.
《한국에 찬스 있으면 또 갈 예정이예요. 돈벌이가 아니라 그 문화적인 생활방식이 좋았어요. 이번엔 일보다도 우리보다 앞선 소중한것들을 배우고싶어요. 그리고 보란듯 한족인들앞에서 보여주고싶지요! 핫하하…》
더 이상 조선족의 이야기들을 라렬할것 없이 민간들속에서는 아주 허심탄회하게 내심의 말을 고백하고있다.
이런 질박한 고백들은 적어도 우리 조선족의 소위 나으리님들이나 허위적인 지식인들의 호언장담이나 공허한 민족자랑보다는 수백배 진솔하고 량심적이다.
우리는 《조선족사회 우리가 지킨다》, 《한국의 퇴페적 외국바람에 오염시켜서는 안된다》는 페쇄적인 사고로부터 한국사기군을 잡는데로부터 《한국 때리기》를 강조한 탓으로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한국놈은 나쁜놈이다》는 유치하고 렬악한 그리고 옹졸한 마음으로 한국을 대해왔다.
한국하면 무조건 미워하고 무조건 폄하해야 하고 싸잡아 욕해야 진짜 조선족이라는 일그러진 생각까지 만연하기도 했다.
모 지방에서는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서울말을 하기 시작하면 《야, 니가 한국 서울놈이냐? 코맹맹소리를 해가면서 한국놈 행세하려 드냐?》고 핀잔주기가 십상이란다.
한국 사기군은 때려야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일변도》로 기울어지면 우리의 시각이 일그러질 념려가 크다. 우리가 《한국놈》을 부르짖으면서 망각해버리고있는것은 정면으로 공정히 한국을 대하는, 한국인을 평가하는 태도가 아닐가?
한국이 조선족사회에 대한 공헌, 경제적인 공헌과 지적인 공헌 이것들을 우리가 망각하고 《한국놈》을 부르짖는것은 우매한 행위다.
우리가 한국이란 고국이 있다는것은 행운이 아닐수 없다.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우리 동포들은 한국의 혜택과 지원을 떠나 오늘날의 경제적 부유가 있을수 있을가?
연변자치구만 보아도 학자들의 집계에 따르면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10여만이나 한국에 갔는데 그중 90%가 약장사와 막로동에 뛰여들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한사람이 평균 3천딸라를 벌었다면 3억딸라를 수입한셈이 된다고 한다. 또한 한국으로 인해 연변의 30여만 조선족이 잘 살게 되였다고 한다. 이 수자는 연변조선족 총인구의 33%를 차지하고있으니 1/3을 한국이 살린셈이 아닌가.
조선족연구가로 알려진 연변사회과학원 원장 김종국씨는 《세기교체의 시각에서 본 중국조선족》이란 책에서 이렇게 밝히고있다.
《한국나들이가 시작되기전에 연변의 한족이 조선족보다 생활수준이 높았다. 한국 나들이가 시작된후 조선족이 한족보다 잘 살게 되였다. 입는것은 물론 먹는것, 노는것도 조선족이 한족보다 낫다. 지금 연길시의 외화저금액이 6천여만불에 달하는데 조선족 인구로 따지면 매인당 300불에 달하여 길림성내에 가장 부유한 지방으로 되는데 한국나들이 덕이 크다. 이전에는 조선족이 한족을 부러워했는데 지금에는 한족이 조선족을 부러워한다.》

뿐만아니라, 특히 력사적인 민족적인 동질성의 요소로 연변은 한국기업이 선호하는 진출지로 되여 한국기업이 지금까지 근 500여의 중소기업이 진출했으며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연변땅을 밟는다. 연변에 주재하는 한국인만 해도 2천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연변에 한국이나 한국계 해외인사들이 신설한 대학까지 있으며 민족문화와 예술레벨 향상과 계승에 한국의 공헌은 거대하다. 연변에는 많은 전통예술과 풍속습관이 소실돼가는 위기속에서 한국과의 교류가 이 위기를 막아주었다. 한국의 전통 음식점이 여기저기 우후죽순같이 일어서는 동시에 민족전통예술에는 연변에서 없어졌던 판소리를 한국의 힘으로 복귀시켰다. 언어, 음악, 복장, 미술, 문학, 연예 등 각 문화분야에 한국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 터프한 연변 함경도 방언의 아나운서도 지금은 세련되고 부드러운 서울식 표준어로 방송을 하고있는것을 TV를 통해 보면 실감이 난다.
연변이 어느 정도로 한국에 의존해왔다는것은 IMF이후 한국의 위축으로 연변도 한파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잘 리해할수 있다.
연변에 오는 한국 관광객이 대폭 줄어 연변의 수입도 푹 준다고 한다.
또한 연변의 로무수출이 한국을 통해 년간 11억원 인민페를 획득하는데 이는 연변자치주의 년간 재정수입과 맞먹는다는것이다. 현재 IMF한파로 90% 로무자들이 연변으로 송금 못하고있다고 한다.
1997년 연변수출총액이 1억 9500만 딸라인데 절대부분이 대한국 무역이라고 한다. 그해 10월부터 IMF로 인해 대한국 무역이 거의 해체상태에 들어섰다고 한다.
내가 1995년에 연길을 방문했을 때 거리에 활기가 띠고 경기가 아주 좋다는것이 바로 알렸는데 2000년 5월에 다시 연길을 갔을 때는 서울과 같이 불경기로 활기가 없었다.
연변의 한 문인친구가 기가 죽은 소리로 술회한다.
《한국의 경기가 좋았을 때는 연길도 한국인 덕분에 호황이였는데 IMF가 터지고나니 연길도 죽었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한국이 얼마나 큰 존재인가를 알리는 질박한 메세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들어오는 《복》, 절호의 찬스, 더불어 사는 지혜를 잊고있다. 우리의 이같은 초라한 형색은 나로 하여금 금년 여름 한 식당에서의 조우를 떠올리게 한다. 식당은 제법 고색찬연한 중국의 정취가 있게 디자인되였고 품위도 있어보였다.
그런데 모양을 내려고 종업원 녀자에게 전통복장을 입혔지만 도저히 맵시가 나지 않았으며 나이는 백프로로 아가씨가 분명한데 몸매는 아줌마로 보였다. 그건 그렇다치고 서서 《어서 오세요》, 《환영광림》을 웨치고는 손으로 코구멍을 후비는것이였다.
《뭘 먹을래요?》코구멍을 후비던 종웝원이 주문을 받았지만 메뉴판이 없었다.
《뭐가 있는지 알아야 주문시키죠.》했더니 그제서야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더니 역시 느린 걸음으로 돌아와 메뉴판을 갖다 던진다.

웃을줄은 모르고 친절의 봉사란 개념조차 모르고있는것이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먹고싶으면 먹고, 말고싶으면 말라는것이였다. 니가 니 발로 걸어온거지 우리가 니 귀엽다고 청한것도 아니니까, 이런 정도였다.
들어와서부터 먹고 나갈 때까지 식당이 이런 썰렁한 기분이였다. 나는 두번 다시 이 식당에 오지 않을거야 하고 속으로 맹세하다싶이 대충 먹고 이 집을 나왔다. 들어오는 손님을 박대하니 무슨 손님을 끌겠는가 말이다.
지금 《한국놈》을 부르짖는 우리 동포들의 형색이 이 식당의 코구멍 후비는 모습과 뭐 다른데 없다.
입으로는 개방하지만 내실은 아직 페쇄적인 《우리만》의 울타리 의식에서 리탈되지 못하고있다.
우리는 너무 편협하고 감정적이다. 너무 한곬으로 감정이 쏠려 그 외의 보다 넓고, 보다 좋은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립장에서 상대를 판단하려고 한다. 상대방의 여건과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은채, 내 감정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다보면 손해보는것은 사실 우리측이다.
우리가 지금 한국을 보는 시각은 《옛날 일본놈보다 더 나쁜 한국놈》하는 식의 표현에서 집약적으로 반영되듯, 감정적으로 편견으로, 좁은 곬으로 치닫는건 아닐가.
이제 우리는 랭정해져야 한다. 특히 《한국놈》을 부르짖기에 랭정해져야 한다. 보다 랭철히, 객관적으로 한국의 공헌을 인정하고 아낄줄 알아야 한다.
한국이란 이 훌륭한 피줄은 국제화시대에 있어서, 옛날같은 싸구려 이데올로기 사회의 페쇠성이 부서진 오늘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생명의 피줄의 한 줄기찬 부분이다.
이렇게 좋은 귀중한 생명선을 우리는 격앙된 감정, 일시적인 트러블로 잘라버리는 시행착오를 범할수 없다. 결국 제일 손해보는것은 우리 쪽이 더 클것이다.

팬티를 입은 원숭이

지금도 중국에서는 공원이나 주택가의 로타리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일만한 곳에서 개인 서커스의 원숭이 재주를 피우는 광경을 어렵잖게 구경할수가 있다.
재주군 원숭이한테 팬티를 입히고 사람 흉내를 내여 벼라별 동작으로 재주를 피우게 한다. 그것이 우습다고 구경군들은 담장같이 둘러싸여 웃고 손벽치고 야단이다.
흥미로운 작은 《발견》이다. 팬티입은 원숭이는 엄청난 눈치의 천재라는것이다. 항상 두눈이 팽글팽글 돌고 두 귀를 세우고 주인과 주위의 구경군의 눈치를 살피면서 연기를 해간다.
세상만물가운데서 원숭이만큼 눈치의 《센스》가 고도로 발달된 족속은 없을것이라고 나는 늘 혀를 찼다.
어쩐지 아이러니컬하게 나는 팬티입은 원숭이의 모습에서 우리 조선족의 모습을 보는듯했다. 조선민족만큼 눈치빠른 민족이 더 있을가?
일찍 한국의 20세기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리어령교수는 《눈치민족》의 우리 민족에 대해 갈파했다.

《우리는 눈치가 발달한 민족이다. <눈치만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을수 있다>는 속담도 있다. 론리나 분석력보다는 <눈치>를 더 소중히 여기는것이 우리의 한 사고방식이다.
눈치는 언제나 약자가 강자의 마음을 살피는 기미며 원리원칙과 론리가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에서는 없어서 아니될 지혜다.
(중략)
천민에서 상감에 이르기까지 눈치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론리보다는 직관이, 리성보다는 기미를 파악하는 감성이 더 발달하게 된것이다. 바늘끝처럼 눈치보는 그 감각만이 예민해져간것이다.》

이어서 리어령교수는 임진왜란의 처참한 전화를 면치 못한 근본적리유는 일본인들의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비해 조선은 눈치를 보는 감성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눈치를 보느냐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냐 하는 조선사람들의 눈치싸움이 자신파멸을 초래한 비극이였다는것이다.
리어령교수의 지적은 조선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에게 너무나 알맞은 지적을 했다고 느껴진다.
중국땅에 이주하여 살면서 거대한 주체민족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 조선족의 운명이자 지혜였다. 그러나 지혜도 지나치면 잔꾀로부터 하나의 주체성을 상실한 껍데기로 변하기 십상이다.
정치생활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눈치밥은 조선족의 전매특허라고 할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지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우고 중앙의, 주위 한족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여념없는 생활을 해왔다. 한족 눈치에 또 조선족 눈치를 보면서 늘 직선으로 매진하는것이 아니라, 주춤하는 주눅, 겁쟁이, 카멜레온 이 같은것이 우리 정치인 나리님과 민족 엘리트들의 특징적 이미지라고 하면 과장일가?
언제나 우의 눈치, 주위 눈치에 스스로 옥죄인것은 자신의 민족이다. 김학철선생은 에세이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중앙에서 내준 구멍이 성에 내려오면 한결 좁아지고, 또 주(연변자치주)에 내려오면 더 한층 좁아진다. 그런데 주에서 다시 현에로 내려가면 더욱 좁아져서 아예 형편이 없게 된다.》
조선족의 특유의 눈치밥덕에 자승자박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주덕해는 일찍 갈파했다.
김학철선생은 연변의 진통적인 《자유공간을 좁히고 지어 박탈하는》조선족의 눈치병에 대해서 이렇게 찌르고있다.
《중앙에서는 할수 있는 말, 발표할수 있는 글들을 왜 우리 연변에서는 질겁을 하며 쉬쉬해야 하는가?
담보가 작아서 속이 떨려서인가? 아니면 가장 순수한 마르크시즘의 정통파로 자처를 해서인가?

이도 저도 다 아닐것이다. 까놓고 말하면 자칫하다가 목이 달아날테니까 미리미리 예방을 하느라고 여념들이 없는것이다. 별게 아니라 바로 이때문일것이다. 이게 바로 정곡을 찌른 분석일것이다.》
숨통을 찌른 지적이다. 웃나리님들의 비위에 거슬려 목 잘릴가봐 조선족의 일부 나리님은 눈치의 천재들이란다.
우리의 서민들보다도 오히려 먹물 좀 먹었다는, 민족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정치인, 문화인들이 더 눈치병에 걸렸다.
조선족은 그야말로 눈치에 묻혀 산다는 표현이 실감나는 시대다. 민족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학에서 이 눈치병이 너무 엄중히 존재한다.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는 그래도 좀 알고있는 조선족문학에 대해서 얘기해보겠다.
10여년전 나는 《중국조선족 당대문학 비평》이란 졸문에서 조선족문학의 위기에 모방만 답습하는 아동화성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것을 눈치병으로 표현하는것이 더 적절할것이다.
조선족문학은 조선반도에서 창조한 조선문학(한국문학)의 지류라고 할수 있겠지만 그것이 중국이란 이질문화권안에 정착되였을 때는 이미 순수 조선문학이 아닌 중국이란 특성을 다분히 띤 조선족문학이 돼버렸다.
특히 현대, 당대문학은 그 루트의 뉴대가 끊기자, 첫걸음부터 아주 자각적으로 중국눈치를 보지 않으면 아니될 상황에 빠진것이다.
언어는 민족문화 우대정책으로 조선어를 사용했지만 중국문학에 의뢰하고 기생을 해야 했다. 눈치에 따라 움직이니까 안일했고 쾌감을 느꼈으며 정치상에서도 안전한 보장이 있게 되였다. 따라서 이런 눈치병으로 인한 모방을 통해 중국문학과 동보적 태세를 취하려고 했다.
문학의 흐름 그 자체에서 조선족문학이 얼마나 중국의 눈치를 따른 우등생이였다는것을 보아낼수 있다.
중국 건국후로부터 스타트를 뗀 정치운동, 여러가지 캠페인, 이를테면 반우파투쟁-대약진운동-인민공사-민족정풍-반우경-수정주의비판-문화대혁명-림표와 공자비판운동-4인방타도-개혁개방…
이바람에 따라 우리의 눈치가 움직였고 문학이 따라왔던것이다. 요즘에는 또 무슨 눈치를 보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우리 조선족은 눈치로 산 집단이다. 눈치란 정서와 듬직한 분석, 랭철한 과학적 태도가 결여된 악지혜에 불과하다.
눈치가 조선족의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면 물론 두말할나위없이 좋다.
그러나 눈치가 지나쳐 자기 스스로를 제한하는 생생한 활력과 주체성을 죽이는것은 너무 렬악하고 우매한 자살행위다.
팬티를 입은 원숭이가 빠른 눈치와 민첩한 동작으로 구경군을 웃긴다면 그것은 재미난 오락이 되겠지만 우리 민족이 팬티입은 원숭이같이 눈치놀음에 빠진다면 그건 자멸을 의미한다.
우리는 리성있는 인간일진대 팬티입은 원숭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조선족 지식인 비판

졸저 《중국조선족 대개조론》을 구상집필하면서 나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반성하고 비판해야 할 상대는 우리의 광범위한 조선족대중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지식인 자신들이란것을 절감했다.
대중의 《렬악한》 모습을 힐난하고 어느 무엇을 향해서 비판의 화살을 던지기보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우선 힐난당하고 비판받아야 하는 타깃은 바로 다름아닌 자기 자신들의 렬악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식인들은 자기 자신은 어떤 보이지 않는 높은 《성역(聖域)》의 제단에 높이 모셔놓고 방치하면서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에 대해서만 분노하고 비난하는데서 모종의 우월감과 안일감으로 자위(自慰)하면서 흥분을 느끼고 그것이 또한 모종의 타성으로, 고질로 굳어버렸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성역》에 처음으로 도전하는 선구적인 투석(投石)이 될것이다. 원컨대 이 선구적인 작은 비판의 글이 시대의 변혁, 열린 세상의 개척 그리고 가야 할것은 가고 와야 할것은 오고마는, 파괴와 건설의 모습을 공감하는 문화미사일이 됐으면 한다.
나는 하나의 《발견》을 했다. 그것은 중국 조선족의 지식인은 지금껏 아웃사이더(외부측)로부터의 비판, 진단, 지적을 한번도 받은적이 없기에 그 순수한 비판에 대해서마저도 단지 어떤 《성역》에 대한 도발적인, 싸움건다는 식으로 편협하게 리해하고 그래서 무조건 반발하고 펄펄 뛴다. 결국은 내가 거듭 비판했던 그 《촌닭싸움》의 레벨에서 그 자대로 재고 그 사이즈로만 보일뿐이다.

이 글이 우리의 지식인 비판인만큼 우선 《지식인》이란 정의를 알아보는것이 타당하다. 사전을 펼쳐보면 《지식인》은 《높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해석돼있는데 추상화시켜서 말하자면 공적인 장소에서의 발언을 그 사람의 중요한 일로 되는 사람들을 《지식인》이라 할수 있다. 좀더 구체화시키면 학자, 언론인, 평론가, 비평가, 작가, 시인, 저널리스터, 편집 등 언어라는 표현의 가장 중대한 매체를 구사하여 공적인 장소(책, 출판, 잡지, 신문, TV, 강연 등)에서 발언하는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우선 나는 본문에서 말하는 《지식인》에 대해서 이렇게 인식하고있다는 점 언급해두고싶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지식인 자신에 대한 진단과 비판을 감행해보겠다. 이에 앞서 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단과 비판에 바로미터를 설정하기 위해 모국인 한국의 충격적인 지식인 비판의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1999년, 세기말의 최후의 한해, 그 유명한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담스에 의해 인류멸망의 예언은 실추됐지만 한국에는 전 한국을 진감하는 젊은 지성이 혜성같이 나타났다. 김경일(金經一)이다. 그가 투하시킨 메가톤급 미사일의 이름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다. 《해박한 지식과 번득이는 관찰력으로 종횡무진의 직설적인 문체구사로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해온 유교문화 그 권위와 위선에 대해 600년만의 자유선언을 발포한 젊은 지성이 노린 지표는 전 한국인사회와 다름아닌 지식인자신의 통렬한 자기비판 그것이였다.
한국의 문화적페쇄성, 우월의식, 자격지심을 무자비한 메스를 들이대면서 김경일은 소리높이 갈파한다.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수 있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한통속이 되여 민족주의속에 마련된 기득권과 권위의 달콤한 꿀을 나눠먹고있다.
정치인들, 당연히 그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전자가 외곡되여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한입에서 두가지 말을 아무런 혀물림없이 내뱉을수 있는 요괴인간들이다.
기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청장국처럼 냄새가 풀풀 나는 현장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없이 채팅하듯 기사를 뱉어내는 고급룸펜들이다. 권력의 해바라기들이 되여있는 편집데스크의 심중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만들어낸 원고들을 기사랍시고 만들어낸다.
학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가면이 없으면 한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빙충들이다. 그들이 론문에 써대고 강의실에서 뱉어내는 말들은 아무 곳에도 써먹을수 없는 그들만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끼리끼리 만나서 자리를 나누고 적당히 등록금과 세금을 연구비나 학술보조비따위로 나누어먹으며 히히덕거리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서로를 물고 뜯고 비방하는 저렬한 인간들이다.》
완전히 동감이다. 독설이 섬득이는 표현이지만 이런 모습들이 바로 한국지식인의 모습의 진실한 구석구석들이다.
그렇다면 모국의 지식인에 비해 우리의 지식인은 어떤 모습들일가?
우리보다 앞서 달리는 모국의 지식인에 비하여 우리가 과연 그들보다 낫다고 떵떵 소리칠수 있는 모습들이 얼마나 될가?
우리의 렬악한 모습을 진단, 비판함에 있어서 나는 독설이 섬득이는 직설보다도 아래 몇개 아이템에서 분석하고 살펴보기로 하겠다.

지식인층은 거대한 《닭장》

어렸을적 늘 보면서 자라던 농촌의 닭장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키우는 병아리들은 조그마한 닭우리라고도 불리는 닭장속에 넣어 모이를 뿌려서 먹게끔 한다. 병아리적에는 별로 싸움을 안하지만 반나마 닭으로 컸을무렵에는 제법 모이다툼으로 싸움을 자주 벌인다. 뿌려진 모이를 두고 한 목표물에 경쟁이 생겼을 경우, 먼저 먹은 놈이 먹지 못한 놈에게 한번 물린다. 그러면 이쪽놈도 가만 있지 못한다. 니가 먼저 쫏는데 내가 왜 가만 있겠냐 라고 말하는것 같다. 이렇게 너 한번 후닥닥 솟구쳐 상대방을 공격하면 이쪽이 뒤질세라 더 크게 공격한다. 이런 촌닭싸움이 재미있다고 동네애들은 모인다. 자, 보시오. 누가 잘했나 하면서 두 닭은 더욱 신이 나서 싸움에 목숨건다. 어린 닭보다 늙은 닭일수록 싸움은 더 잦고 치렬하다. 우리 애들에게 있어서 개교접하는것과 닭싸움구경은 무료로 볼수 있는 오락의 소일거리기도 했다. 나중에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되고 만신창이가 돼서야 아무런 결과도 의미도 없는줄 알았는지 그제야 휴전하고 구석으로 비실비실 사라져버린다. 이런 구린내나는 닭장.
나는 이런 닭장에서 왠지 우리 지식인의 모습을 보는것만 같다. 우리 지식인층, 특히 제일 큰 그룹을 구성하고있는 문단이 하나의 거대한 《닭장》으로 보이는것은 왜서일가? 물론 《닭장》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문학적비유다. 이런 형상적인 비유의 레토릭마저도 허용하지 못하는 문단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는 전제하에서 나는 이 레토릭을 감히 구사하고있다.
나는 이 《개조론》에서도 우리 지식인, 문단에서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는 근대경쟁원리수준이하의 《촌닭싸움》의 페해에 대해 준렬하게 비판해왔다. 이런 저렬한 싸움이 우리 지식인의 단결을 저애하고 활성화를 저애하며 고차원으로 향한 열린 길을 막는 최대의 악질적인 요인이 된다고 본다.
이 《촌닭싸움》이란 비유는 나의 오리지널티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사실은 암전료해(暗轉瞭解)의 상식으로 되였으며 많은 지식인당사자들에 의해 자주 거론돼온것이다. 비평계의 준재인 평론가 김성호씨는 이제 더 이상 꿀발린 말로 발라맞추지 않고 《촌닭싸움》에 대해서 준혹하게 비판을 가하고있다.
《세계적차원에서 보면 중국은 두말할것없이 시골이다. 이 〈시골〉에서 수도 북경이거나 남방의 상해, 광주, 심수 등지에 비하면 동북은 역시 시골이요 동북에서 연변은 더더욱 시골이다. 산업화를 거쳐 완성되여가는 근대화방면은 물론, 의식면에서 더 한심하게 연변은 뒤떨어졌다. 남들은 경제건설에 눈코뜰새 없는데 연변은 제정때부터인지 아니면 〈계급투쟁〉의 근거지여서인지 지금도 서로 물고 뜯고 하기에만 여념이 없고 이 영향이 우리 문단에 크게 끼쳐있다.》(《장백산》 2001년 1호)
김성호씨가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내가 《촌닭싸움》이라고 레토릭으로 일갈한것에 마치 생동한 증거라도 제공하려는듯 요즈음 우리 문단의 《촌닭싸움》은 더 에스컬레이트돼가고있다. 예전에는 그래도 체면따위로 배후에서, 안방에서 소곤소곤거리고 술좌석에서 호언, 비어를 떠들어대던 수평면이하에서 행해지던것이 지금은 수준이 껑충 뛰여올라 수평면우에서 문단기관지에까지 등장하는 수준이다. 일본이나 한국같으면 3류주간지에나 취미거리로나 게재될 수준급이하의 《평론》글이 조선족문단의 잡지에 당당히 나타나니 왜 웃음통이 안터지겠는가!

당연히 나는 문단의 정상적인 론쟁, 민주주의적인 그리고 학문적인 지식인버틀(싸움)은 벌어져야 좋다고 본다. 이런 버틀을 통해 문단, 지식층의 활성화를 구축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기때문이다. 이런 《싸움》이라면 너무 없어서 탈이다.
그러나 저렴한 인신공격, 프라이버시공개, 인격에 대한 모독따위로 헐뜯는 저질의 개인적인 싸움으로 변질돼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우리 문단에 필요이상의 혼란과 반목을 야기하기 십상이다.
나는 지금 어느 개인에 대해서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의 《촌닭싸움》수준을 높은 차원으로 높이자는 지론을 세우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의 《싸움》의 레벨을 껑충 높여 문단, 지식계에 활성화의 기발을 만들어 공동한 발전을 기하자는 소박한 념원뿐이다.
한족들은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지식인들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대해, 생사존망의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사고하고 념려하는데 여념이 없는데 우리는 왜 그 《촌닭싸움》에 가치를 두고 시시껍적한 감정으로 싸움을 해야 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지식인의 문화적시간은 적어도 한족보다 20년은 뒤떨어졌다고 본다. 이미 완성으로 끝나버린 화제거리를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붙잡고 대서특필하는가 하면 또는 시시콜콜한 개인적감정을 공개하면서 《촌닭싸움》을 연출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수십년전의 생사람을 잡아 물고뜯는 《설치류》의 인신공격, 명예훼손의 악질, 고질이 우리 지식층에서 여전히 란무하는 모습을 보고 실소하지 않을수 없다…

지식인의 정신병리학과 우리 자신의 제한성

왜 우리 지식인층은 하나의 거대한 《닭장》일가?
왜 우리 지식인은 이 닭장안에서 늘 싸움을 벌이는것일가?
왜 우리 지식인은 교격하고 자기중심이며 권위에 고집하는가?
나는 이런 지식인의 병페와 약점을 정신병리학이란 차원에서 분석규명하고나서 우리 조선족지식인 자신의 제한성을 탐색해보기로 하겠다.
여기에 정신병리학을 활용하여 지식인의 생태를 다룬 일본의 지성이 있다. 니시베 스스무라는 이 저명한 지성은 현재 동경대학 교수를 사직하고 일본의 비평계에서 활약하는 문명비평가로서 최근의 저서에서 분석한 지식인의 사이코파솔로지(정신병리학)는 우리의 분석에 하나의 바로미터를 제공해주고있다.
니시베는 정신병리학에서 보면 지식인은 흔히 사회적《불적응증》이란 성격을 갖고있다고 한다. 지식인은 왜 지식인인가? 왜 직업으로서의 학자, 평론가, 저널리스트, 작가, 시인을 택하게 되는가? 특히 이들은 실사회와 직접적인 관여를 하는것에 대해 포비어(공포증)가 그들로 하여금 대학이나 연구소나 가정이나 특정의 단체속에 페장하게 된다는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실사회란 세속의 리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회를 가리킨다.
《사회》라는 복잡한 《위험》을 탈출하여 정신적불안과 인간관계의 갈등 등에서 도망하여 학자나 평론가, 작가로 되는것이다. 아무튼 사회나 인문에 관한 표현에 관심있는자가 지식인으로 되기마련이지만 실사회에 대해서는 불적응을 일관하면서 사회와는 다른 지식인사회속에서만 안전을 느낀다. 이런 지식인이 년장자가 되여 표현자로서는 이미 고갈되였지만 하나의 권위, 어떤 대변자로서 굳어지면서 표현자가 아니라 어떤 권위나 대표자로서만 행세하려 한다.

지식인은 원래부터 사회적불적응자인 결함을 안고있기때문에 프로이트파의 정신분석학이 지적하다싶이 셀프·디펜스메카니즘(자기방위기능)이 사회 일반인보다 월등 빈번하고 농밀하게 발동한다는것이다. 이제 그 자기방위 메카니즘의 내용에 대해서 보기로 하자.
(1) 타협의 자기방위, (2) 합리화 흑은 핑게의 자기방위, (3) 격벽(隔璧)만들기의 자기방위, (4) 억압의 자기방위, (5) 섭취의 자기방위, (6) 퇴행(退行)의 자기방위, (7) 투사(投射)의 자기방위, (8) 반역(反逆)의 자기방위, (9) 전이(轉移)의 자기방위, (10) 승화(昇華)의 자기방위 등.
심리학, 정신분석학적인 이런 개념의 라렬은 우리에게 생소하기때문에 구구한 해석을 피하고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현실사회의 불적응증으로부터 무어진 지식인의 무리는 지식층이라는 상아탑안에 앉아서 자기방위시스템으로 외부와 벽을 쌓고 내부에서 충돌하고 분쟁하며 일종의 자기 정서적만족과 충실감에 매몰된다. 지식인들은 사회를 상실하면서 그것을 최대의 고급적인텔리로 자기긍정하면서 우리끼리의 뭔가에 열중하며 목숨건다.
다음으로 지식인의 편집병(偏執病)에 대해서 언급한다. 자각적인 자기방위에서 나아가 더욱 적극적인 또는 공격적인 심리현상으로서 파라노이어 즉 편집병으로 전화돼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편집병이란 각자의 정신적집착에 거의 맹목적으로 의의를 색출하고 그밖의 모든것을 무의미로 판단하며 협애한 지적관심에만 편중한다는것이다.
근접적거리에서 관찰하면 학자도, 평론가도, 작가도 시인도, 저널리스트도 의연히 기고만장하여 자기가 가장 고상해보이고 자기밖에 없다는 근시안적인 사고를 갖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편집병의 지식인들은 지식인세계에 있어서 본래 있어야 할 상호비판이라는 모습이 없으며 따라서 지식인 사이에 있어야 할 커뮤니케이션의 룰, 매너, 에티켓을 극도로 상실해있으며 있는것은 하품(下品)의 과잉한 프라이버시 공격, 인신모독 등 자기 변호적인 극단적으로 편협한 공격전(攻擊戰)일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호비판이라는 풍요한 지식의 프로세스가 탈락돼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마치 조선족문단의 실정을 갈파한것 같아서 얼굴이 뜨거워났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지식인의 소아병을 꼽았다. 물론 저자가 꼬집은 소아병의 내용은 우리 지식인의 현실과 거리가 멀었지만 이 《소아병》이란 명명에서 나는 우리 지식인내부의 유치하고 7세 소아의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 싸움자체가 소아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더 한번 확인하는것만 같았다.
이런것들이 정신병리학적으로 본 지식인의 진단서라면 이제부터 나는 우리 지식인 자신이 구유한 제한성, 약점을 우리 자신의 풍토와 민족성격에서 캐보기로 하겠다.
한국의 지성들이 늘 지적하다싶이 조선반도(조선민족)는 지정학적으로도 세계의 변방에 놓인 주변국으로서 지금까지 림해왔다. 한번도 세계사의 주도적포지션에 있어본적 없이 살아온 나라(민족)이다. 이 말은 우리 조선족에게도 그대로 적응이 되는 말이다. 우리는 중국속에 살면서 변방오지에서 생활하면서 역시 《약소민족》이라는 타령을, 후렴구같이 외우면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있다. 특히 땅이 좁고 강도 짧다. 이 비좁은 땅을 리탈하여 내지로 오는 사람이 빈번하게 된것은 불과 10년정도다.
환언하자면 어떤 인류학자들이 제기한 《소우주분지(小宇宙盆地)》의 주민들이다. 이런 지리적인 소우주분지가 우리의 정신적인 소우주분지를 산출시켰다. 여기서는 더 커질래야 커질수 없는 모종의 제한성이 가로막고있다. 이런 좁은 분지에서 자기들만의 《정신적축제》를 벌이면서 역시 후렴구같이 반복하면서 산다. 이런 분지속에 또 하나의 작은 분지가 곧 지식인층이다. 이것은 지리적, 지정학적의 제한성이라 하고싶다.

다음으로는 정치적, 투쟁적 유전자속에서 살펴보면 흔히 심심치 않게 지적당해야 하는 《계급투쟁》의 전통적인 근거지, 제정때부터 전통으로 유전돼오는 발달된 투쟁의 촉각이 《서로 물고 뜯고 하기에만 여념없는》 구린내 나는 닭장을 만든 장본인의 하나다. 한마디로 《정치적 헐뜯기》의 유전자다.
그리고 우리 조선족의 민족성의 약점에서 보면 이질적인것을 못참는 배타성, 정서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하여 화를 잘 내고 인내성이 약한것, 내홍과 파벌투쟁, 후안무치하고 음험한 성격, 자기가 한 말에 책임성을 느끼지 않는것, 허영심이 특별히 강한것, 감투지향주의, 극단적인 권위의식, 자기만 내세우는 자기중심주의, 전 근대적인 촌사람의 평균주의의식… 이런 약점들속에서 우리 지식인의 제한성을 그대로 느낄수 있다.
이상의 세가지 큰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히여 하나의 거대한 장벽을 우리 지식인앞에 쌓아놓았으니 결과적으로 우리에겐 이런 담벽에 둘러싸인 닭장속에서 지적인 거인, 대형거물들을 배출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편협과 스스로 권위라고, 제일인자라고 자칭하는자들이 득실거리기마련이다.
일부의 지시인들이 눈은 세계의 열린 세상을 보면서 하는 짓거리는 《촌닭의 싸움》, 수준이하의 저렬한 헐뜯기 버틀이니, 동심일체로 단결해야 할 시점에 우리의 개개인의 감정이나 니가 리드하냐 내가 리드하냐, 니가 권위냐 내가 권위냐 하는 닭싸움에 목숨걸고있으니 후배들이 보기가 적면(赤面)해지지 않는가?! 이제 이런 싸움을 스톱하든지 싸움의 차원을 높이는것이 문단의 과제다.

우상, 이제 없다

이 소제목은 우리 지식인그룹, 문단에 하나의 큰 《파괴》를 위해 설정한것이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적으면서 《지식인의 종말》이란 1980년대의 표현을 새삼스럽게 떠올린다. 포스터모던이라 불린 1980년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지식인의 무덤》이란 저서를 써서 센세이숀을 일으킨적이 있다. 지식인이란 개념이 과연 효력을 상실했냐에 대해서는 별도로 치고 리오타르도 그 동반자였던 1968년 파리의 5월혁명이래 고전적의미에서의 지식인이 그 기능을 실조시켜온것은 사실이다.
20세기후반,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지식인은 《앙가주망》(사회참여)사상의 기치를 세운 기수이며 최고의 《지적거인》 장 폴 사르트르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슬로건을 들고 나타난 사르트르는 세계지식인계의 헤게모니(지도권)를 쥐고있었다. 그런데 그 5월혁명때 사르트르의 우상이 깨진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연설하던 사르트르에게 학생주최자가 《사르트르, 이제 말을 그만둬라!》는 쪽지를 넘겼다. 사르트르는 그 메모를 보고 목연해진다. 이미 자신이 학생을 리드하는 지도자의 시대는 지났다고 실감한 순간이였다.

이 학생운동에 에셀 푸코의 모습이 보였다. 《언어와 물질》이란 저서로써 사르트르를 《인간의 종말》을 선언했다고 비판하면서 사르트르의 시대가 푸코적인 지식인의 리드시대를 새롭게 열었다.
이와 류사한 상황이 한국문단에도 나타난다. 20세기 한국지성의 거물로, 세계적인 지성으로 각인된 문화비평가 리어령의 화려한 등장이다. 1956년 약관 24세의 젊은 리어령은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들고 전후 한국문단에 지키고있던 《우상들의 파괴》를 선언했다. 리어령은 소설의 대가 김동리를 《미몽(迷夢)의 우상》으로, 모더니즘의 기수라던 조향에 대해서는 《사기사의 우상》으로, 그리고 리무영에 대해서는 《우매의 우상》이라고 혹평한다. 잇따라 당시 한국문단을 리드하고있던 서정주, 렴상섭, 황순원 등 거물들에 대해서도 《현대의 신라인》이라고 통털어 준렬히 비판한다.
리병주는 한국의 문학평론은 리어령의 등장으로 비로소 진짜문학으로 격상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기성문단의 안일성과 공허한 대가의식을 공격한 리어령은 고루한 기성들의 문학은 《대지가 아니라 허공에 뿌리를 뻗고 살아가는 슬픈 풍란문학》이였다고 일갈한다.
반항정신과 비판정신이 강한 리어령은 그후에도 한국인을 울린 《저 흙속에 바람속에》라는 에세이로 한국인론을 개척했으며 일본에서는 또 세계적인 명작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펴내 국제적 지성으로 일약 명성을 떨친다.
세계지식계의 흐름이나 문단사를 보아도 그리고 중국대륙의 그것을 보아도 하나 또 하나의 《파괴》, 하나 또 하나의 《혁명》으로 련속되는 격동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우리 조선족의 지식인계, 문단을 둘러보아도, 두눈 씻고 보아도 우리에겐 이같은 《우상의 파괴》,《혁명》이라 할수 있는것들을 찾아볼수 없다.
조그마한 개혁, 개방을, 문학의 혁신을 주장하여 하다못해 한족문학비평가들의 비평리론을 무기로 차용하는 용기있는 평론가에 대해서도 비렬한 욕말로 몰아세우는것이 우리 문단의 현실이다.
마치 우리 문단은 조금 나이가 들었다면 50대초반에서부터 각자가 다 자신을 모종의 대가로, 권위로, 제일인자로 자처하려는 풍조가 있는듯하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은 비판이나 반론마저도 허용되지 못하고 《욕》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우리 문단의 싸움이 《닭싸움》으로 될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이런 싸구려 우상, 권위, 나 최고야 하는 풍조가 너무 강하기때문이 아닐가 한다.
바뀐 세상에는 바뀐 모습을 보여야 하고 바뀐 파워를 보여야 하는데 그 부분이 빠졌다. 고루한 사고와 모습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도 발언력도 없다.
우리 지식인 모두가 나이를 불문하고 효력이 지난 량약과 같은 우상, 권위 의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양상을 창출하는 신형의 지식인이 되기를 권고한다.
이제 더 이상 유형무형의 《우상》이나 《권위》가 우리 지식인의 생생한 활력을 억압하는 시대가 아니길 바란다.
이제 우상은 없다!

개방적지향이 우리를 살린다

우리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하나의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다. 그리고 그 《성역》속에 있는 일부 지식인은 이 《성역》속에서도 가장 《성역》을 신성시하는 수호자들인것 같다.
연변조선족, 이 주제가 비판의 타깃으로 되기엔 아직 어렵다.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성역》안의 일부 지식인들은 《내분비기관은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안면의 근육 또한 무명의 긴장에 팽팽해지며 시신경까지도 경련을 일으키며 전체적인 흥분상태에 몰입된다. 한번도 《성역》이 객관화돼 랭정한 비판을 당한적 없었다.
이제 그 《성역》을 한번 뒤집어보자. 그 속안에는 《민족》과 《민족주의》이란 낱말로 가득 차있다. 연변이란 조선족의 《대명사》이고 최후의 《보루》이다. 더우기 약소민족이라는 《조선족》, 이런 약하디 약한 자기민족을 비판하는것은 《약소》라는 콤플렉스, 자비심 또는 상처자국에 때아닌 소금가루를 뿌리는것이 된다.
따라서 비판은 터브가 되며 이 터브를 깨는 비판자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엄청난 감투를 쓸 위험성을 무릅써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이 《성역》은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나는 《약소민족》운운하는 민족적자비감과 울분에서 약소와 허탈, 콤플렉스와 자신들의 무능과 수치심을 읽는다. 이런것은 덮어감추기 위해 미리 펄펄 뛴다. 다 뛰는데 혼자 침묵하면 《민족심》이 없는자로 손가락질 당한다. 그래서 덩달아 펄펄 뛰는 사람도 적지 않을것이다. 펄펄 뛰면서 졸속히 나타나는것들은 흔히 인신공격, 프라이버시 침해, 중상과 모독 그리고 최후에는 정치적으로 사람잡는 상투적인 악질독가스, 수학공식처럼 다 빤히 보인다. 이것처럼 일목료연한 드라마의 슈제트는 없을것 같다.
우리의 문호 김학철선생이 갈파하다싶이 《깔끔하게 사람잡이를 하는데 맛을 들여가지고》,《동족을 물어먹기 위해 당기관과 행정기관에 거짓신고도 서슴지 않는 버릇》,《〈이리복인(以理服人)〉을 밤낮 입에 달고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뭇매질로 때려잡는》 버릇이 여전히 뿌리깊은 독근(毒根)으로 살아있는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있지 않는가.
나시시즘(Narcissism)이란 말이 있다. 환상적 자기만족이나 자기도취라는 말이다. 같은 계렬의 말로 셀프러브(자기만족, 자기사랑)라는 낱말이 있다. 우리의 일부 지식인은 마치 이런 나시시즘이나 셀프러브의 절대적 비대증에 빠져있다고 본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이질적인 지적, 비판은 물론, 눈곱만큼의 이의(異議)마저도 대승적으로 용납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공포의 공격쯤으로 여기고 《민족》이란 성스러운 방패를 들고 상대를 《역적》으로, 민족의 최대의 《원쑤》,《반역자》로 매도하기 십상이다.
이런 추악한 고질이 력대로 끊이지 않는 원인을 규명하려면 여러가지 우에서 든 측면에서 캘수 있으나 나는 잠시 이 글에서는 우리 민족의 생업적인 특징에서 어프로치해보고자 한다.

세계민족을 해양민족과 농경민족으로 분류하는 민족학적인 설법이 있다. 같은 동양인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농업민족에 속한다고 한다. 특히 우리 조선민족은 벼농사가 농업의 절대적 주종으로 돼왔으며 땅은 절대적으로 우리 민족의 에너지로 돼왔다. 문제는 우리 조선민족의 정신적 단점이 이 농경과 직결된다는것이다. 인간의 자세로 말하자면 허리를 굽혀 코앞에만 보이는 땅에만 전부 정신을 고도로 집중시켜버린다. 외측, 우선 먼 딴세계의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돌릴 새가 없었다. 농민에게 있어서 도시, 외민족과 외국에 대해서는 동경의 대상은 될수 있어도 그런 세계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 지나지 않았다.
좀 비약적인 실례가 되겠지만 이를테면 자치주내에서 큰 뻐스교통사고가 돌발했다고 하자. 우리는 무엇보다도 조선족승객이 사고로 수난했냐 안했냐에 대해서 이상할만큼 신경을 쓴다. 만약 행운스럽게 조선족이 아니고 다른 민족의 사고라면 《야, 다행히》하면서 관심은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이런 사례들을 국제적인 무대에 올린다면 자국, 자민족 중심이란 비난을 받기 십상인데 굳이 국제무대로까지 인상할것 없이 인류적인 사고가 전혀 결락된 《내 민족중심》의 발로가 아닌가. 이것은 바로 벼농사중심의 농경민족적인 민족성을 가장 적라라하게 구현했던것이다.
우리의 이같은 우리 중심의 농경민족성의 피안에 서있는것이 해양민족성이다. 그것은 《결사적으로 내부보다도 외부를 향한 행동이며 늘 이민족, 이국인과 접촉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앙천의 자세로 표현되는 민족의 마음》이라고 할수 있다. 그 내실에는 우리 민족과는 정반대인 모험, 변혁, 도전, 적극적인 외부세계로 향하는 《개방》의 성격이라 할수 있다.
우리 조선족의 민족성격은 해양민족과는 반대의 극에 있는 위구, 보수, 답습 등을 토대로 한 《보수》의 성격이 주종을 이룬다. 특기해야 할 사정은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중국에 사는 조선족의 선조는 절대다수가 순농민이며 또 최근까지도 우리의 절대적 생활반경은 땅을 향해 오감을 집중해야 하는 벼농사의 농군의 그것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가 《감농군의 후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 지식인자체가 농경민족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살면서 그것이 무의식중에 체질화된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끼리만 집중된 지역에서는 지식인의 농경성격이 여타 이민족과의 실질적인 접촉이 없어도 전혀 생활에 부자유가 없으며 또한 그것을 특별히 필수하지 않은 전제하에서 그것들이 더욱 비대화로 발전하여 클로즈업되기 십상이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중세의 베네치아, 근대의 영국 등 제해양민족에게 보여지는 《바다야말로, 내가 일하고 사는 고향이며 영원히 잠들수 있는 무덤》이라는 사고가 없다. 즉 내가 나가서 내가 사는 곳이 어떤 이경(異境)이라 할지라도 내 고향이라는 개방적인 사고와는 무연하다. 이미 한세기여동안 중국에서 정착해오면서 고정불변의 내 《고향》을 만들고 고수하기에 여념이 없어진것이다. 따라서 고질로 된 고향을 떠나면 죽을것만 같은 사고로 점철돼있으며 고향리별의식은 없으며 끝까지 《성역화》시킨다.
이런 지식인의 의식은 일원적(一元的)이며 절대적이데올로기로 충만돼있으며 원패턴(한가지 류형)의 사고에 포로돼 내부로부터든 외부로부터든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언론이나 행동은 모두 이단시(異端視)되고 타도의 타깃으로 되기마련이다.

거기에다 《정치적투쟁》의 유전자까지 투기적인 정열이 가미되다나니 우리 지식인이 《정의》의 간판을 걸고 《성역》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무슨 일인들 못해내랴. 불보듯 뻔하지 않은가!
나라나 민족을 막론하고 지식인중에는 어디에나 보수적인것과 개방적인것으로 이분되는 일은 흔하다. 일본에도 보수적인 우익지식인의 목소리가 크며 한국에도 보수적인 지식인의 세력은 상당하다. 그러나 비교를 통해 보면 우리 조선족지식인의 보수성은 더욱 렬악하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촌놈》의 레벨을 벗으려면 아직 멀었다. 이 표현 말고 딴 표현을 아무리 찾아도 더 적중한것을 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이고 아이러니컬한것은 우리 지식인의 보수성은 이미 고향을 리탈하고 땅을 떠나 모험의 길로 나아가는 많은 농민의 당찬 모습에 비하면 너무 왜소하고 영양실조처럼 보인다. 그러고도 《우리야말로 우리 시대의 인솔자》인양 행세를 하려 드니 진짜 촌놈으로 추락된것을 실감한다.
21세기의 첫시작부터 우리 지식계, 문단에서 새로운 《의식혁명(意識革命)》의 물고를 터쳤다. 우리 민족의 전례없는 《의식혁명》의 홍류다. 내가 소리높이 웨치고싶은 말은 누구보다도 먼저 반성하고 개방해야 할 사람은 많은 대중이나 농민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지식인 자신들이라는것이다.
열린 개방의 길만이 우리 지식인,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조선족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공개장

조선족 20대층 그리고 10대층 제군(諸君):
이 《조선족 대개조론》에서 나는 우리의 어른들, 학부모님들을 타깃해서 메시지를 발신해왔는데 이번에는 《5월의 푸른 잎》으로 비유되는 20대, 10대들에 향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싶습니다.
왜냐면 결국 21세기의 조선족의 운명을 멘 제군들이라서 할말이 각별히 많은것 같군요.
미리 얘기하지만 나는 제군들에게 학교 교장선생님이나 담임선생님과 같이 훈화(訓話)나 지꿎은 설교는 하고싶지 않습니다. 그런 교육은 학교에서 날마다 받고있으니까 나같은 아마추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니까요.
내가 할수 있는 얘기라면 교과서에 없는, 수업시간에 들을수 없는 그런것들일것입니다. 수미하고 어마어마한 하드적인 설교가 아닌, 21세기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민족의 정체성, 아이덴티티와 살아가는 지혜 등 소프트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일찍 내가 자랄 때는 20세기 중국의 위인 모택동의 말 《세계는 젊은이들의것이며 미래는 젊은이 당신들의것입니다. 당신들은 마치 아침 8, 9시의 끓는 태양같이 희망에 끓는 존재입니다.》라는 의미의 말이 신성한 최고명언같이 뇌리속에 각인돼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하루빨리 성인이 되지 못하는것이 자못 안타까웠습니다.
아마 지금 제군들의 미래에 대한 심경은 이와 마찬가지일것이지요. 하루빨리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 자신의 재질과 기성능력을 200%로 발휘하고싶은 심정이 아닐가 합니다. 이래서 젊음은 좋습니다. 무서운것 없고 세상이 다 내것같이 보이는 활력과 패기…

21세기는 어떤 시대일가요?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서슴없이 21세기는 크게 보아 경계선을 뛰여넘는 월경(越境)의 시대라고 대답하고싶습니다. 글로벌화란 낱말이 잘 나타내듯이 자유주의냐 공산주의냐 라는 이데올로기가 대결하는것이 아니라 이런것의 대결은 끝나고 지나간 력사가 되였으며 문화라는것이 쉽게 국경을 넘어서 여기저기 침투되고 교류되며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인간이 더 자유로와질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곧 소멸되고 민족이 소실되는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가 하나로 열린 스페스로 향하는 균질성지향인데 반해서 세계적인 코스모폴리탄(국제인)이 되는 전제적 조건은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문화의식하에서 자신의 정체성 즉 아이덴티티, 귀속감을 확인하지 않으면 뿌리없는 무근초가 되여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물론 시점을 달리해서 우리 모두 개인이다,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한 성원이다는 립장에서 멀리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민족어가 《박물관언어》로 돼버리고 머나먼 미래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민족이 사라졌다 해서 정체성을 잃는것은 아니라고 할수 있어요. 왜냐면 우리가 잃는것은 민족이란 정체성일뿐이지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갖고있을것이며 력사속에서 《아, 그때 조선족이란 민족이 있었구나》고 지식으로서만 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머나먼 미래(그것이 500년이 될지 천년이 될지 정확한 예측이 안됩니다)의 상태입니다. 정체성이란 이렇게 그때그때의 상황이라는 한계성이 있다는 뜻이지요.
쉽게 얘기하면 지금 우리가 21세기의 해야 할 일은 글로벌화의 밀물속에서 중국대륙이란 이 마죠리티(주체민족, 대민족)에 포위된 마이노리티로서의 우리가 《우리》라고 할수 있는 조선족이란 이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민족에 대한 명확한 의식,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런 민족의식, 책임감을 갖고 세계인이 되여야 강대한 세계인으로서 행세할수 있는 법이라고 봐요. 남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에 대해 사고하고 알려하는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의 급선무입니다. 교류가 빈번하고 다른 민족의 힘이 강할수록 우리는 과연 자신이 누군가를 사색하고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뭐 거창하게
애국심이나 애족심이란 차원을 넘어선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양복입고 청바지 입고 햄버거를 먹고 마이클잭슨의 노래를 듣고 할리우드의 액션영화를 보면서 조선족이라고 주장할수 있는것은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그것을 뒤받침해주는 민족의식, 정서, 민족의 공동체의식 이런것을 떠날수 없지요.
현재 나는 점점 해체되고있는 우리의 모습을 무자각적인 양떼라고 일갈하고싶어요. 흩어지고있는 양떼같은 우리가 《민족의식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우매한 양떼가 된 책임감을 제군들이 무겁게 느끼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닿았습니다.
매일 부모가 주는 돈으로 콜라나 사먹고 껌이나 씹으며 TV게임에 열중하면서도 이런 책임감을 제군들이 잊어서는 안된다고 정면으로 경종을 울리고싶습니다.
나는 일본에서 산지 10년이 됐습니다.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이 내 강연을 듣고 자주 질문해요. 《김선생은 어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구요. 물론 나는 롱담으로 《국제인》,《동양인》하고 대답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조선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선족에 대한 한피줄 한마음이라는 뉴대감에서 오는 책임감을 강렬히 느껴요. 이번에 이 《조선족개조론》을 저술한것 역시 우리의 병든 체질을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였으면 하는 소원에서랍니다.
제군들이 활약할 21세기의 가까운 래일은 더욱 세계가 열리고 자유로운 환경이 주어질거지요. 그럴수록 열린 세계를 향한 제군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알고 민족적 책임감, 사명감을 갖고 뛰였으면 하는것이 내 자신이 우선 제군들에게 어드바이스하고싶은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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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젊은 제군!
20세기는 하드의 세계 즉 물질의 세계였어요.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로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소유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하드가 아니라 소프트의 세기, 물건을 만드는것보다 그 물건속에 무엇을 넣을가 하는 발상, 아이디어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발상을 실행하는 행동력, 이런것에 가치를 둔 시대가 됩니다.
그래서 15세기말부터 세계적으로 행해진 《대항해시대》가 펼쳐질겁니다. 력사에서 배워서 알겠지만 그 유명한 콜럼부스가 스타트를 뗀 세계일주의 항해는 《목숨을 건 벤처》였어요. 즉 모험이였지요. 지금은 《정신적대항해시대》라고 일컬어지고있으며 물리적인 항해가 아니라 정신적 즉 아이디어를 찾아 행해지는 벤처의 시대입니다.
돈, 물건, 정보, 문화는 앉아서는 굴러오지 않습니다. 글로벌화의 질풍노도에 실려 좋든싫든 누구나가 세계에 눈주어 바라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항해사같이 배를 몰고 용감하게 대안으로 달려가야 해요.
콜럼부스가 500년전 용감히 세계를 일주하여 신대륙발견과 함께 막대한 부적가치를 이룩한것과 같이 미국의 빌 게이츠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선구적행동으로 과감히 실천했기때문에 세계적인 영웅으로, 거부로 된것입니다.
사실 세상이란 천진한 학생시절에 꿈꾸던 장미빛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험악한 세계, 경쟁의 세계란것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방법, 기술이 필요해요. 다른 말로 하면 지혜, 무기가 필요하다는거지요. 그러니까 무어나 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의뢰하는 의존심으로 《패러사이트》로 살아가서는 앞으로의 험한 세상에서 도태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교육이란 만인합치의 매니얼이나 교육과정이란게 없어요. 자기 자신이 열심히 학교서나 어른들을 통해서 삶의 렛슨(훈련)을 해야 됩니다.
청춘은 아름답다고 시인들은 소리높이 구가하지만 나는 청춘은 특히 20대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30대에서 개화(開花)하고 40대에 결실하는 준비의 시대 《월동의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는 기본적인 지식교양을 마스터하여 후날 꽃피고 열매맺게 하기 위한 준비단계이며 10대는 땅속에 씨앗을 묻는 시절이라고 봅니다. 10대는 온상안에서 천진하게 보낼수도 있으나 20대는 성인으로서 대성공하는 예비의 프로세스입니다. 20대를 놓치면 지금같은 시대에 찬스를, 성공의 렬차에 못탈 가능성이 많아요.
이런 맥락에서 청춘은 아름답다기보다 추하다고 봐요. 육체적으로는 20세쯤 육체미가 형성되지만 정신은 아직 미숙한 상태, 자기감정의 컨트롤이 안되니깐요. 또한 이런 순수한 추의 프로세스를 거쳐 성숙으로 성장되는거 아닙니까.
조선족 젊은이 제군! 이제 내가 말씀드리고싶은것은 이 모험의 벤처시대에 우리 젊은이들이 갖추어야 할것은 바로 정신적인 터프, 조상들이 없었던 배짱, 쉽게 말해서 용기와 모험정신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너무 겁이 많고 자기 목소리를 못내고 변방에서 살아왔습니다. 요 10년래 한국과 만나서야 겨우 《해외》와 교류가 있게 되였고 자기의 추한 모습을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군들은 조상들의 이런 겁쟁이 배짱없는 유전자를 DNA에서 없애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머리로 사고하고 자기 주장을 시원히 내뱉고 개성을 표현하는 조선족이 돼야 합니다.
특히 체면이나 눈치따위를 따지지 않고 과감히 수치를 당할수 있는만큼의 용기를 갖추어야 해요. 젊은 날의 수치, 부끄러움, 체면은 후날 인생의 약이 되고 플러스가 돼요. 너무 편안하고 과대보호의 보온병속에서 살면 안돼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수치를 사는 용기, 야심과 야망을 얘기할수 있는 용기, 귀구멍 따가운 욕을 먹을수 있는 용기, 이의(異議)를 제안할수 있는 용기, 자기보다 우수한것을 인정하는 용기, 핑게를 안대는 용기, 철퇴할수 있는 용기, 버릴수 있는 용기, 고향을 떠날수 있는 용기, 홀로 서고 고독할수 있는 용기》, 이런것들이 21세기 주역인 제군들이 갖추어야 할 용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너무 안일하게보다는 심지어는 입원도 오래동안 해보고 감옥체험도 해보고 해야 이런 엄청난 마이너스의 과혹한 역경에서 용기가 늘고 인생의 지혜가 배증할수 있어요. 단지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것은 뭐 꼭 강도질이나 불량을 해서 감옥가란 얘기는 아니예요. 그런 과혹한 인생체험을 이겨내는 정신적터프가 돼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한 가족차원에서 얘기한다면 내가 장래 우리 가족을 개변시킨다는 포부쯤은 품고있어야 해요. 아버지가 농민이라고 해서 나도 농민이 되겠다는 선조를 답습하는 의식에 빠지면 그것으로 끝나고말아요. 내가 어렸을 때 9살적에 나는 《내가 우리 강릉 김씨가문을 개변시킨다》고 늘 말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이 말이 기특하다고 나를 보면 외우군해요.
이런 《변혁의식》,《혁명의식》으로서 세계를 내다보고 세계를 향해 풀이 있는 곳이면 양떼같이 어디든지 찾아 달려가는 그런 《선구자》가 돼야 합니다. 조선족안에서만 겨루는게 아니라 그런 좁은 차원을 넘어서 한족과 이민족과 그리고 세계를 나가 세계적 열린 차원에서 경쟁하고 모험하는 용기를 키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젊은 조선족 제군! 내가 또 얘기하고싶은것은 우리가 왕성한 지적호기심을 갖추어야 한다는것이지요. 지적호기심이란 뭐냐 하면 사물에 대해 알려고 하는 욕심,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 배우고 공부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나는 매일 독서와 자료읽기, 수집정리 그리고 집필이예요. 대학에서 강의하거나 외출하여 강연을 하는 외에는 모두 공부로 시간을 보냅니다. 하루도 뭔가 읽지 않고 적지 않으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여요. 놀면 그때뿐이지 놀고싶고 뭔가 레저를 즐기고싶은 욕망보다도 알고싶고 공부하고싶고 책을 보고싶은 욕구가 월등 커요. 책 한권 쓰는데 책 100권 500권은 보는 비례가 됩니다. 우리 집 두살짜리 아들애도 늘 나를 보고 한다는 짓이 책에 그리고 락서하는 짓거리뿐이예요. 이 애한테서 나는 어릴적의 내 모습을 보는것 같아요.
알려고 하는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 다음으로 인간의 프리미티브한 가장 원초적인 욕구의 하나입니다.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 진화되는 과정을 보면 자기외의 세계를 알려고 서번너(열대초원)에서 나와 직립이 되고 마침내 인간으로 변용한것이 아닙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은 사실 배우는 학습의 과정이라고 할수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지적욕구, 호기심이란 그 인간의 본질적부분을 만들어내는 제일 근본적인 드러이브요인이예요. 지적인 욕구를 늘 새로운 사물에 돌린다는것은 그 인간이 영원히 내면적 충실과 성장을 완수해간다는것이 돼요.
그러니까 학교라는 배움의 천국에서 기초지식과 교양을 우선 잘 닦아야 됩니다. 지나가면 후회하니까요. 어떤 부모들은 흔히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한다》고 핀잔 절반 칭찬 절반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공부하는것, 공부할줄 아는것이 사실은 더 중요한 능력이예요. 자기절로 공부하는 능력, 이런 기본테크닉을 키워야 됩니다.
영국의 교육자 죤 메이스필드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어요. 《이 땅우에서 대학만큼 아름다운 곳은 그리 흔치 않다. 왜냐면 그곳은 무지를 증오하는 인간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모이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널리 보급하려고 노력하기때문이다.》
그런데 슬픈 사정은 우리 대학생들이 이 대학에서 지성훈련을 받는것보다는 취직을 위한 스텝핑스톤(발판)으로만 취급하기때문이예요. 이점은 일본대학생이 제일 심해요. 내가 현재 대학에서 한국어표현을 중심으로 중, 일, 한 비교문화론을 강의하고있는데 일본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애가 많지 않아요. 앞으로 학자로 되려고 꿈꾸는 학생들외엔 별로 공부보다 노는데 열중이예요. 그래도 우리는 이들과 비하면 공부를 참 열심히 하는 편이예요. 그러나 한족대학생과 비교하면 우리 대학생들은 꾸준히 공부하는 량이나 질이나 떨어져요. 독서에서도 량이나 질에서 다 떨어지는것이 현실이예요.

그래서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치료방법은 지적욕구, 호기심을 왕성히 개발하여 기르는겁니다. 공부라는건 역시 그것이 좋아서 해야지 재미를 못붙이면 아무리 하라고 독촉해도 안돼요. 그러니까 스스로 하겠다는 그런 욕구의 충동을, 그런 돌파구를 스스로 찾는것도 능력이예요. 그리고 공부가 죽을지언정 싫다면 많은 흥미속에서 이거다! 는것만 골라서 책을 읽으면 그것도 큰 공부가 됩니다. 요는 자기 적성에 맞는 공부테크닉과 내용을 택하는 지혜가 필요해요.
공부 못한다고 해서, 성적이 최우등이 아니라고 해서 렬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백점 만점 맞는 학생이 실제로 뛰여난 능력이라고 할수 없기때문이지요. 암기력으로 뛰여난 학생이 사회에 나와서 적응능력이 약한 탓으로 오히려 공부성적이 낮은 사람에게 떨어지는 경우는 너무나 많아요.
실제로 빌 게이츠도 대학공부에 흥취가 없어서 도중에서 퇴학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벤처기업을 창업하여 일약 세계적인 거물이 된것이 아닙니까.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어렸을 때 저능아라고 불렸으며 대학에서도 수업은 잘 안나가고 시험때면 급우의 노트를 베껴서 시험을 때우군했답니다. 이런 강의보다 그는 뭔가 조용히 생각하고 고안해내는 그런 지적인 호기심을 갖고있었습니다. 양상은 틀리지만 바로 이런 지적호기심이 아인슈타인을 최고의 과학자로 만들었어요.
왕성한 호기심, 탐구심만 있다면 성적과는 무관하게 나중에는 꼭 어딘가에서 즉 어떤 분야에서 성공할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얘깁니다.
조선족 젊은 제군! 다음으로 내가 말씀드리고싶은것은 자기의 개성과 독창성이 있는 창조력을 갖춘 반골정신이 있는 젊은이가 돼야 한다는것입니다. 전반 동양문화나 대륙문화가 그러듯이 우리는 《다같이 나란히》하는 식의 균질성의식에서 유별나게 가치를 느끼고 그것을 강조해온 풍토에서 자라난 양떼였습니다. 특히 20세기는 전체주의와 편차교육에 물젖어 획일적 사고, 동일한 행동양식, 소위 정상이라는 틀에 매인 《상식》속에서 싱싱한 개성과 독창성과 괴짜를 억누르며 살아온 세기였어요.
21세기, 새로운 시대는 력사학자들의 표현을 빌면 《레루없는 렬차》의 시대, 그런 렬차가 달리는 시대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창조력, 진짜 아이디어, 독특한 개성을 갖춘 인간이 리더가 되는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 점수주의, 평균주의, 서렬주의, 너좋고나좋은주의, 이런 틀과 맞지 않는 아웃사이더 즉 괴짜, 반골정신을 소유한, 반상식의 인재가 대접받는 시대가 옵니다.
J. S 밀은 《자유론》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은 괴짜노릇을 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데 있다》고 했으며 《천재란 자유가 없는 공간에서 생기기 어렵다》고 갈파했습니다.
서양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괴짜란 한마디로 창조적인 반골정신의 인재, 천재들인데 그 공통성을 이렇게 귀납했어요. 잠간 봅시다.
① 틀에 박힌 생활을 싫어하는것, ②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것, ③ 《괴상》한 취미에 도취되는것, ④ 어릴적부터 자기는 남과 다르다고 여기는것, ⑤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한것, ⑥ 세상사람과 별로 경쟁하기 좋아하지 않는것, ⑦ 생활습관이 비정상적인것, ⑧ 철자쓰기가 엉망인것, 대학생이 소학생수준으로 보이는것.
꼭 이런 여덟가지를 다 따라배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결국 뭔가 독특한 발상, 생각, 뭔가 독창적인 능력, 남과 다른 이상한 그것, 반상식(反常識)적인, 이 시대에 감히 NO! 라고 말할수 있는 인재입니다. 21세기 대항해시대에서 모험하려면 우리가 결여된 이런 반골정신을 갖추고 자기 독특한 아이디어로 경쟁에서 승전할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창출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영웅, 위인, 유명인들은 거의가 남다른 독창성의 인재, 반골적인 천재가 많습니다. 21세기는 이런것들을 키우고 활용하는 인재들이 우리 젊은이들속에서 수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합니다.

조선족 젊은 제군! 마지막으로 한가지 하고싶은 얘기는 우리는 영어의 주인이 돼야 합니다. 영어를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룰수 있는 영어의 세대가 되는것입니다.
영어는 단순히 외국어가 아닙니다. 이미 《외국어》라는 의미를 넘어서 모든 나라를 초월하고 지구촌에 덮힌 세계어로 되였습니다. 영어를 외면하고 《까짓 모르면 어때, 무슨 상관이여!》하다가 결국 당하는건 이런 소리를 아무 걱정없이 내뱉는 당사자들입니다.
지난 세기, 우리 조선족은 너무 편의주의와 졸속주의라는 좁은 곬으로 흘러 영어는 우리와 상관없는 뚱딴지취급을 하고 박대해왔어요.
나는 언어문화의 측면에서 지금 우리 세대를 3가지 언어세대로 보고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2세, 이들은 로어의 세대였어요. 사회주의 형제의 나라 쏘련을 《형님》으로 모시고 배운다는 풍조속에서 우리 2세 할아버지들이 따라서 택한 외국어가 로어였어요. 결국 로어는 《쏘련수정주의》의 《변질》로 별 힘이 없어지게 되였고 소수파가 돼버렸습니다. 우리의 2세가 기껏 알고있는 외국세상은 쏘련이란 사회주의나라뿐이였지요. 결국 2세의 문화는 사회주의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데올로기의 절대적리념의 문화 그것이였어요. 아주 좁은 스페스의 문화시공이였습니다.
다음으로 3세, 이들은 70년대말 80년대초 개혁개방의 노도를 타고 동양 최고선진국인 일본어가 공부의 타깃으로 되였습니다. 조선족 1, 2세의 일본어적토대가 좋았고 특히 대학시험에서 우리 조선어의 문법과 가까운 일본어는 조선족수험생에게 큰 《핵무기》가 됐어요. 그래서 조선족 200만이 일거에 일본어붐이 일고 교육과정에도 외국어의 단골메뉴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일본어만 알고 영어를 모르니까 대학을 나와도 열린 세계가 일본에만 한정돼 류학도 일본이 다수였습니다. 결국 외국류학은 더 넓고 선진적인 미국과 서양의 넓은 공간을 등지고 일본문화쪽으로만 집중된것이였지요. 3세는 그래도 로어세대를 초월한 일본선진국문화를 배울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 또한 한계가 컸지요.
그다음으로는 바로 4세, 4, 5세 즉 제군들이 일본어보다도 영어를 접하게 되였고 영어를 만나 2, 3세보다 더 행운입니다. 그러나 아직 당당하게 영어세대라고 하기엔 좀 시기상조입니다. 아직도 일어를 못버리는 젊은이가 많으니 과감히 일본어를 버려야 합니다. 물론 교육과정에도 큰 문제지만 교육과정개혁에 앞서 제군들 스스로가 영어의 시대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글로벌화 영어가 판치는 세계입니다. 특히 IT산업혁명의 반발과 함께 영어문화가 세계를 제패하고있지요. 자연과학, 생명과학, 의료, 통신, 디자인, 영화, 매스컴… 21세기문화의 핵심이 된 령역의 모든 단어들은 99.9%가 외래어며 그것은 또한 영어입니다.
이제 조선어, 한어 그리고 일어를 뺨치게 잘한다해도 21세기 IT혁명시대에는 영어를 모르면 거의 문맹으로 된것이나 다름없어요.
영어는 이제 단순히 언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의 힘으로 변신하고있습니다. 영어를 모른다는것은 세계문화를 모른다는것과 같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보, 지식, 문화, 돈, 부적가치가 영어문화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어를 잘 마스터하는가 안하는가는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로 되며 돈, 지식, 가치, 문화와 직결됩니다.
《영어 몰라도 돼!》하는 어른들의 말에 속지 마세요. 어른들은 영어의 중요성을, 영어가 하나의 세계적문화란 그런 인식이 없어요.
이제 제군들은 한어, 조선어, 일어, 영어 4개국어를 할줄 아는 인재로 많이 배출돼야 하며 또 그런 시기에 처했습니다. 우리 약소민족은 그만큼 외국어를 장악하는것이 강대한 무기를 획득하는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제군들의 영어세대는 우리의 1, 2, 3세를 초월한, 세계를 향한 세계를 내 나라로 삼는 인재와 파워가 바야흐로 산출되리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말했던 모택동의 《세계는 젊은이들것이다》는 말은 아마 우리 민족을 두고 예견한것 같습니다.
조선족 젊은 제군!
21세기 우리 민족의 운명은 제군들의 두 어깨에 놓여져있습니다. 20세기의 조상들을 초월한 민족의 프라이드와 용기와 지혜, 능력으로 새로운 21세기의 열린 조선족을 창조하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조선족 젊은 제군! 21세기를 향해 Fighting!!

21세기 조선족문화력 창출방략

이번에는 우리 조선족문화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겠다. 내가 조선족문화인의 한사람인만큼 문화에 관해서 할 말이 많다.
과연 우리에게 문화는 있는가? 환언하여 문화에 대한 의식은 얼마만큼 있는가? 우리의 문화력 즉 외부와 경쟁하여 겨룰수 있는 문화의 힘, 소프트파워가 얼마나 갖추어졌는가? 또한 그에 대한 인식, 개발, 연구와 발전 플랜은 과연 있기나 한가?
이런 문화문제는 요즈음 내가 제일 고민하고 사색하는 문제의 하나다.
나는 오늘의 이 시대를 《문화의 시대》라고 부르고싶다.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선 현재, 《문화》가 그 어느때보다 중대하게 급부상된 시대다. 그 배경에는 세기말 10년안에 쏘련의 붕괴와 함께 20세기를 지배해온 동서랭전체제의 종식이란 세계사에 새로운 한페지를 연 특기할 사정이 있다. 그것은 이 지구를 지배해오던 이데올로기라는 절대적 문명의 기둥이 무너졌다는것을 의미한다.
쏘베트를 대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대결해왔다.
이 량대진영의 체계는 제각기 하나의 동일한 이데올로기시스템으로 세계를 두가지 이질된 량극으로 갈라놓았다. 쏘련과 같이 여러 국가들, 민족이나 종교가 서로 달라도 사회주의란 하나의 큰 이데올로기로 흡수시켜 동질의 덩어리로 묶어버렸다. 이와 상대로 서구의 자본주의나라들에서는 자유주의 즉 서구적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통합했던것이다.
그렇지만 동서랭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이데올로기의 그림자에 가리워 해빛을 못보던 각 민족과 지역에 뿌리박은 각양각색의 《문화》가 강렬하게 의식하면서 대두했다.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고있는것이 바로 문화라는 패러다임이다. 쏘련이 붕괴되기전까지는 몰랐는데 그 거대한 보편적 공동체가 일거에 무너지자 그사이 무시했거나 무감각이였던 문화의 차이가 백일하에 로출되였다. 각 지역과 민족 사이에 종교, 언어, 생활양식, 사고방식, 가치관, 습관 등이 너무 다르단 점을 새삼스레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하나로 묶여졌던 나라가 문화에 의해 해체되거나 또는 통합되는 움직임이 하나의 현저한 세계적흐름으로 되고있다. 이를테면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족이나 문화, 언어가 다른데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라는 두 나라로 갈라져버렸다.
이것은 문화라는 팩터가 정치, 경제적 팩터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는 점을 립증해준다. 21세기는 이같이 정치, 경제적 이데올로기라는 지배시대가 문화시대로 탈바꿈하는 격동의 시기가 아닐가 한다.

문화의 힘이 결정적작용을 하며 결국 정치도 경제도 군사도 문화밑에서 움직이는 하인(下人)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력, 정치력이 강대하지만 그것만으로 세계를 제패하는것이 아니라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흔들고있다. 문화력, 그것도 생활문화, 대중문화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있지 않는가. 우리가 미국이 좋거나 싫거나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는 그 매력이 있기때문이다. 이를테면 맥드날드, T셔츠, 청바지 또는 할리우드영화, 포퓰러송(대중가요), 이런것이 없다면 미국의 세계적영향력이 이렇게 강대했을가 의문이다.
한편 쏘련이 같은 초대국으로서 미국에게 패한 큰 리유는 바로 세계에 절대적매력을 발산하는 보편적 생활문화, 대중문화를 갖고있지 못했기때문이라고 세계석학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일본도 애니메이션과 게임소프트가 지닌 마력을 캐치해내 세계문화대국의 자리를 노리고있다. 이미 20여년전부터 대중음악이나 하이 컬처 등 종합적문화의 세계적영향력을 과시하면서 문화력의 파워를 자랑하고있다.
한국이 일본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일본문화 개방정책의 물고를 터친 리유가 일본문화의 마력을 당할수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감안해야 한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를 쉽게 초월하여 들어오니까말이다.
중국대륙에도 근년래 일본의 팝송이나 드라마가 젊은층의 인기를 박득하고있으며 거리의 카세트점에 가보면 《安室奈美惠》,《宇多田???》,《浜崎
あゆみ》의 이름이 쉽게 보인다. 인터넷에도 대륙의 어느 사이드에도 일본의 아이덜 팬의 페지가 무수히 많다. 대만에서는 《哈日族》이란 일본애호매니어족이 줄지어섰다.
이뿐이 아니다. 요즈음 중국대륙에서는 《한류(韓流)열풍》이 일고있다. 서태지, 조용필, H. O. T와 베이비복스 등 한국 대중가요의 붐이 일고 TV드라마 중국안방을 독점하는 인기를 확보하여 한국 대중문화의 때아닌 한류가 중국의 상공을 뒤덮는 상태다.
《애국심과는 상관없어요. 한국 대중문화가 좋으니까 받아들여야죠.》
중국의 젊은층들의 말이다. 이렇게 문화의 파워란 공기와 바람과 같이 모든 절대적리념을 넘어서는 법이다.
내가 이렇게 구구히 문화력의 이야기를 하는것은 결국 우리 조선족의 문화력, 문화의식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과연 우리 문화는 21세기에 대체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어떻게 문화력을 키워 경쟁에서 살아남을수 있을가? 그것을 위해 구경 어떤 문화방안을 세워야 할가?
그래서 나는 결국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야 한다는 경제우선책보다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여야 할것은 문화적인 개조를 하여 문화의 힘을 기르는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생활양식, 사고양식이나 가치관을 근간으로 이룬 민족의 문화력이 없으면 경제력도, 아무것도 뜻대로 성취할수 없기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중국속의 우수한 《문화민족》이라는 말을 부정하고싶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문화의식에 대해 대체 얼마나 갖고있을가 회의스럽기만 하다. 의무교육의 높은 수준을 자랑하면서도 그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득실거린다. 파렴치한 배금주의와 자기밖에 모르는 리기주의, 극단적인 자대자만과 극단적인 자포자기, 렬등감, 사기와 협잡이 판치고 헐뜯고 동족 때려잡기 등 저질적인 행태가 너무 눈에 뜨인다.
우리는 이런 렬악한 행태를 질타하지만 이런 모습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닌가.

이런 모습은 우리가 수준높은 문화의식이 결여하기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문화를 잊어버린, 《3등문화민족》은 아닐가고 한탄까지 해보게 된다. 21세기 문화력을 기르기 위해 우선 지급히 선행해야 할 급무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통합을 이루는것이다. 통합을 위해서는 우리가 생사를 같이 하는 공동체에 같이 귀속돼있다는것을 느끼게끔 해주는것이다. 애국심운운에 앞서 애족심이여야 한다.
우리는 100년동안 한번도 공동체의 일체감을 이룩한적 없이 흩어진 모래의 상태로 살아왔다. 그러니까 결국 여전히 우리는 몸에 배인 고추장같이 매운 개인적 리기주의와 돈을 추구하는것밖에 없는 민족이 된것이다.
잘 살아서만 강대해지는것은 아니다. 경제적 부유만 추구하다보니까 돈에 혈안이 되여 정신과 가치관은 추락돼버렸다. 문화의 통합이 기초가 되는 우리 민족의 새로운 민족문화 즉 행동양식과 가치관 등을 창출해내야 한다.
몇년전 쿄토의 국제종교문화학술심포지움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나와 같은 방에 든 미국서 온 젊은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유태인이였다. 그는 늘 그러듯이 식사때마다 기도를 하고 가방에는 학술서적과 성경이 같이 들어있었다. 옆에서 무심코 그의 지성에 찬 행동을 보면서 나는 유태인이 부러웠다. 세계 각 지역에 리산돼 살면서도 그들은 동일한 종교라는 질긴 뉴대가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고있으며 유태인의 문화의 맥을 이어나가면서 세계의 탁월한 지적거인들을 배출하고있다.
그때 쇼크를 받은것이 우리 조선족은 200만밖에 안되는데도 하나로 단합시킬 종교같은 공동체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새롭게 종교를 만들어낸다는것 자체는 거의 불가능하다. 있는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문화력밖에 없다. 우리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마죠리티나 여타 민족에게 압도적으로 이길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종적으로 문화력으로 승부거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21세기의 방향이다.
자기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고 동일문화적 공동체의식이 빈약하다. 《한민족》,《한피줄》이란 말을 잘 쓰면서도 정작 필요한 단합의 공동체의식은 결여한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은 우선 공동체의식의 일체감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민족의 이미지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일본에 온다음부터 이날까지 일본인의 콩크리트같이 단합하는 집단주의와 공동체의식을 외측에서 바라보면서 이런 구상을 무르익혔다. 기실 이런 이미지, 상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문화가 축적되면 그속에서 괴여오르고 창출되는것이 당연하지만 절박한 경우에는 그것을 창출하게끔의 기반구축이 또 필요하다.
조선족,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가? 김치, 한복, 조선어, 단군, 백두산, 천지 등이 련상되지만 우리 민족, 우리 문화의 대표적심벌이라 할만한것이 없다. 오히려 우리 모국인 조선반도의 이미지로서 세계인들에게 각인된듯하다.
장족, 하면 못살지만 티베트의 불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몽골족하면 초원과 몽골포 그리고 영웅 칭키스칸의 이미지가 선명히 부상된다. 일본하면 후지산, 가부키, 신쟈, 사무라이, 토요타, 소니, 애니메이션 도라이몽 캘릭터, 천황 등이 련속 떠오르지만 우리 조선족은 이런것이 별로 잡히지 않는것이 안타깝다.
나는 늘 생각한다. 전국소수민족스포츠대회에 출전할 때 우리 조선족대표팀이 높이 들고 나갈 기발 즉 민족심벌의 기발(족기·族旗)은 무슨 디자인으로 돼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朝鮮族》이라 새긴 패말뿐이고 기발은 없는게 아닌가고 념려스럽다.
국가에는 국기가 있듯 민족에게는 족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민족기를 멋있게 디자인하여 국기게양식때 같이 족기를 게양하는것이 어떨가 한다. 그것은 애국심과 더불어 애족심을 환기시키는 행위로써 내가 보건대 중국의 애국심교육의 일환으로서 트러불은 없을것 같다. 문자도 중국어와 조선어가 나란히 같이 간판이 걸리는데 소수민족의 자유와 우대를 표방하는 대륙에서 이것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하느냐 안하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회사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로고를 디자인하는데 일화로 돈이 수억엔 든다. 조선족이 익숙한 한국의 엘지(LG)나 현대, 삼성, 대우도 엄청난 거액으로 회사 로고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이미지를 다자인화하는 작업을 벌여 간결하고 명쾌하게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곧 《아 조선족!》하고 알게끔 하는 센스있는 시각의 미(美)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이미지가 고안되면 조선족 매성원이 한민족문화공동체속에서 살고있다는 자긍감, 조선족으로서의 자부감이 절로 느끼게끔 해야 한다. 옛날 문화대혁명시절 우리가 모택동의 초상배지를 모택동귀속의 일체감과 충성심을 느끼게 했던 기억은 그리 멀지 않다. 미국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운집해온 여러 민족을 그 성조기아래서 가슴에 손을 얹고 유치원 애들때부터 《나는 아메리카국기에 충성을 맹세한다》고 다지게끔 한다.
어떤 사람은 혹여 민족의 이미지 찾는 일이 무슨 중대한 의미가 있느냐고 비난할수 있지만 이것은 민족의 공동체의식의 구심점이라는데 중대한 의미가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고 문화경쟁에서 우리 이미지를 세워 경쟁력을 길러내는데 불가결의 의미를 갖고있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화적이미지 형성이 중요하다. 미국, 독일, 일본 등은 이미 강력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상품을 팔고있다.》고 강조했다. 문화이미지가 한 국가나 민족의 힘이란것을 각인하는 대목이 있다. 유명한 담배회사 필립모리는 매년 뉴욕에서 《넥스트웨이브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이런 신이 나온다.
전투기 폭격과 땅크의 포연속에서 페허가 된 거리. 한 10대 소녀가 페허에서 나와 무너진 성당앞에서 피아노로 쇼팽의 《리별곡》을 연주한다. 그 선률에 병사들은 총을 내리고 소녀에게 다가가서는 손을 잡고 감격한다.
《소리가 사랑을 만듭니다. 그리고 소리가 인간을 바꿉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내전이 치렬한 흑해연안 아르메니아의 한마을을 찍은 피아노광고다.
소녀와 병사는 페허속에서도 평화에 대한 갈망을, 인간의 정신세계의 풍요를 연출해낸다. 이런 문화이미지는 피아노와 담배를 생산한 기업의 홍보뿐만아니라 국가의 존재에 아이덴티티까지 세계 곳곳에 알린다.
소니가 제품을 최초로 미국으로 수출할 때 일본전통의 가부키공연행사가 선행되면서 일본문화를 알리는것을 먼저 하고 상품을 많이 팔았다는 전략은 세인이 잘 알고있는 에피소드다.
세계 각국에서 치렬하게 열리는 문화이미지 구축전을 《총성없는 전쟁》이라 불리며 상품수출에 앞서 나라문화를 알리는 싸움으로서 그동안 경제가 부유를 창조했지만 21세기부터는 문화가 부유를 창조하는 시대로 전환했다. 이런 문화시대인만큼 우리 조선족도 《문화책략》을 숙의하여 문화로서 살아남을 작전을 해야겠다.
사실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우리의 문화예술의 우수한 문화경쟁력으로 중국의 전국적무대에 두각을 피언한 과거의 영광스러운 력사가 있었다. 무용과 같은 종목에서 우리는 《가무민족》이란 영광의 칭호를 획득한 경험이 있으며 예술적으로 센스가 뛰여난 민족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개변시킬것인가를 조금만 숙려해보면 우리의 자신속에 답안이 숨어있다는것을 찾아낼수 있다. 물론 여기엔 문화의식이 필수조건으로 없어서는 안된다.
나는 우리 민족의 이런 예술의 뛰여난 센스를 살리고 깊이 캐치하기만 하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돌파구가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요즈음 글로벌화(세계화)의 흐름속에서 우리 조선족도 그냥 따라서 《아, 세계화다. 우리도 세계로 나아가자!》 구호식으로 웨치기만 할뿐 그에 대한 세계화대책방안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안하고 제로상태에 가깝다. 심지어는 세계화라는 개념포착마저도 막연하여 그에 대해 관심은 전무에 가깝고 그렇다고 조선족의 정체성, 특수성에 대한 사색도 태만하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다》는 구호를 우리는 잘 부른다. 이 구호가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가 자체에 대한 숙고도 없이 서뿔리 캐치프레이즈로 세계화의 격류와 부딪친 긴장감을 해소하려는것 같이 보인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론리에 대해 나는 이렇게 본다. 이 말에는 세계적인것이 되기 위해서 그냥 민족적인것이면 문제없다는 뜻 그리고 민족적인것을 잘 발굴하여 승화하면 세계시장에서 먹힐수 있다는 뜻이 내포돼있는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즉 민족적인것중에 어느것을 택할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세계적인 속성에 맞추겠는가 하는것이다. 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문화전략은 이런것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민족성을 그냥 들고 나가서는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거꾸로 우리가 세계적이라고 세계시장에서 먹히울 속성을 우리것에게 캐치한다. 다시 말해 세계적 보편성을 민족적인데서 찾아내는 전략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속에 내재돼있는 세계적 보편성을 발굴하는것이 무엇보다 성공할수 있는 고명한 책략인것이다.
홍콩영화의 성공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홍콩은 문화적 풍토가 척박한 곳이여서 그들은 세계적으로 내놓을 영화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세계적으로 좋아하는 액션을 홍콩 중국인들은 중국의 무술에서 찾아 결합시켰다. 미국적인 액션과 중국적인 무술의 접목이 곧 홍콩영화였다. 이리하여 홍콩영화는 이미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액션영화로 되였으며 성룡, 주윤발은 국제적스타로 각인되였다. 홍콩에 있는 민족적인것중 무술에서 세계적인 액션의 보편성을 찾아내 일약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최근 한국영화 《쉬리》,《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세계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것도 역시 액션과 한국분단의 민족특수성을 결합시킨 성공의 좋은 사례다.
우리 조선족은 사실 《변방에 놓여있는 변두리인》이라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도 반복 언급했지만 이중문화라는 유연성구조를 갖고있으며 또한 한국과 일본과도 거리적으로 접근하여 쉽게 접촉할수 있는 지정학적인 장점을 갖고있다. 특히 한국이라는 모국문화가 우리의 옆에 지키고있다. 이런 객관적인 유리한 조건과 환경은 중국내의 다른 소수민족이나 한족에게도 없는 좋은 힘이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중국이란 문화를 거치지 않고서도 세계무대로 나아갈수 있는 팩터가 충분히 주어져있는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우리가 이런 종합적인 문화의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우리 조선족의 특수성속에서 세계적 보편속성 또는 그에 가까운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그것을 특화시키는 작업을 하면 우리 문화의 경쟁력의 물고를 틀수 있다. 그런데 아직 문화의식의 미숙으로 인해 그리고 세계감각의 불감증으로 우리가 이런 작업을 벌이지 못하고있는것이 아쉽다.
21세기의 당면 우리는 문화발전방략의 주안점을 ① 민족통합력의 구축, ② 민족상징이미지의 창출, ③ 세계화방안으로 포지티브한 개발에 두었으면 한다. 이것만 스무드하게 성공시킨다면 21세기 중반과 후반에 가서 우리 조선족은 세계의 강대한 마이노리티로 중국의 《유태인》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은 없는것이 아니다

맺음말

사족(蛇足)이 될줄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의 집필을 끝낸 후 몇마디 부언하고싶은 말이 있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글 집필과정에 저는 필을 꺾고 도중하차할 생각을 한것이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제가 뭐 강철로 부어 만든 영용무쌍한 투사는 아니니까요. 앞서 한국문화비판서를 서울서 간행했을 때, 어떤 한국독자로부터 저에 대해 아주 타프한 외모의 괴물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는 얘기를 들어 킬킬 웃은적이 있습니다.
아마 날카로운 저의 문체를 보고 그런 무서운 이미지가 떠올랐나 봅니다. 닭알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꼭 그것을 낳은 암탉까지도 이상하게 생긴건 아니니깐요. 뭐 이렇게 제가 독자에게 말씀드렸어요.
저는 결국 그런 《괴물》도, 《투사》일수도 없지요. 단지 일개 범용한 문인으로 산다면 족하니까요. 제가 감히 위구심을 떨치고 이 《대개조론》을 완성할수 있었던 리유는 바로 우리의 참혹한 현실 그 자체에 있습니다. 이 글속에서 언급한 우리의 썩고있는 체질에 대해 진단하고, 반성하여 치유의 대안을 모색하자는 가슴아픈 절박한 심경이 저의 글을 끝까지 완성시켰습니다. 이제 독자 제현들이 저의 글줄속에서 이런 절박한 메시지를 읽게 되였으면 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인물이 없듯이, 완벽한 문장도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완벽한 인물이 아닌만큼 제 글 자체에도 많은 결함과 부족점, 또는 래디컬한 견해나 사상이 있을수 있다고 봅니다. 혹시 저의 글에서 본의 아니게 불쾌를 사게 된분이 계신다면, 바다같은 아량으로 너그럽게 량해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뭐 어느 개인에 대해서 증오심을 품고 개인감정으로 이 글을 쓴것은 절대 아니니까요. 칼날같이 예리한 문체여서, 오해나 곡해하실분들이 꼭 계실것을 제가 미리 짐작하고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머리말에서 말씀드리다싶이, 《욕먹을 준비》는 돼있는 상태입니다. 거창하게 말씀드리는것 같지만, 민족체질갱신을 위한 계기를 마련할수 있다면 저는 더 없는 보람을 느끼겠습니다.
21세기, 우리 민족의 공전의 의식혁명, 체질개조가 행해지는것이 우리의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더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설 입장티켓마저 상실한 차세기의 실격자들입니다.
두고봐야 알겠지만, 《장백산》이 치켜든 의식혁명의 기발이 전 조선족사회에 포지티브한 영향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개혁의 과정은 절대로 순풍만범(順風滿帆)하지는 않을겁니다. 《앞날은 광명이요, 갈길은 험난이다》는 20세기 위인 모택동의 참언(讖言)과 같이.
바라건대, 저의 이 미숙한 졸문이 전 조선족의 전례없는 의식혁명을 필지(必至)하는 하나의 작은 돌파구가 됐으면 할뿐입니다.
끝으로 이 책 집필에 있어서 많은 해외 및 조선족의 참고문헌의 힘을 입었다는 점 밝히면서 저자분들께 고마운 마음 전하며, 지면의 관계로 그 리스트를 일일이 밝히지 못하는 점 량해 바랍니다.
아울러 인터뷰에 응해주시거나, 자료를 제공해 주시거나, 물심량면으로 여러모로 도와주신 모든 조선족분들께 뜨거운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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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활약하는 조선족출신 문인, 학자 김문학(심양 출신, 44세)의 저서 50권(종) 출간기념식이 일전 일본 히로시마의 한 호텔에서 개최, 일본, 중국, 한국 3개국과 대만에서 온 학자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출간기념식에서 3개국과 대만지역의 평론가들은 김문학의 《벌거숭이 삼국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섬나라 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 등 저서들은 동북아지역의 비교문화연구에서 중요한 성과작들로 자리매김했다고 높이 평가, 일부 저서들은 아시아 여러 나라 대학들의 비교문화교재로 사용되고있다.

1991년에 도일한 김문학씨는 동제대학, 히로시마대학에서 대학본과와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한후 여러 대학의 객원교수로 근무하는 한편 집필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있다. 최근에 일본에서 있은 《전후 가장 환영받는 외국인 명인》 인터넷조사에서 그는 18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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