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살든 무슨 생각을 하든 음악이 있어 인간은 하나 될 수 있지요”

‘평화’를 지휘하는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조윤선이 묻다

 
10일 저녁 예술의전당.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등 세계의 분쟁 지역을 골라 음악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온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69)이 무대에 올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등 중동의 연주자들을 한데 묶어 ‘평화의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WEDO)와 함께다. 14일까지 서울에서 베토벤 교향곡 9곡을 모두 연주한 바렌보임은 15일엔 한국 공연의 하이라이트인 임진각 야외공연장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한다. 공연 첫날 자리를 가득 메운 객석엔 조윤선(한나라당) 의원도 있었다. 음악 애호가로『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를 쓰기도 한 조 의원은 바렌보임의 오랜 팬이다. 다음 날인 11일 조 의원과 만난 바렌보임은 남북의 인구·언어 차이 등에 관해 자세히 물으며 분단 상황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대담은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 약 1시간 30분간 진행됐다.

-10일 공연 참 좋았습니다. 지휘하면서 받은 느낌은 어떠셨나요.
“예술의전당 음향시설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 놀랐습니다. 외국인으로서 의례적인 칭찬이 아닙니다. 리허설을 하면서는 공간의 울림이 좀 과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런데 객석이 메워지자 공기의 흐름이 정리되면서 음색의 선명도와 울림에서 정확한 비율이 나오더군요. 음이 퍼지는 정도도 딱 맞아 오케스트라 소리가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되는 게 놀라웠습니다.”

-지난달 우면산 산사태로 예술의전당이 피해를 보면서 많은 이가 마에스트로의 공연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욱 반갑습니다. 관객인 저로서는 무대에 선 마에스트로의 몸짓과 풍성한 표현력을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습니다. 아마 청각장애가 있는 분들도 마에스트로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음악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입니다. 음악을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제 지휘 철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귀와 눈을 모두 동원해 예술을, 음악을 감상한다고 생각해요. 시각과 청각을 분리할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관객이 제 몸짓을 보며 음악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훌륭한 오케스트라인지 아닌지는 맨 뒷줄에 앉은 연주자 표정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WEDO는 정말 맨 뒤에 앉은 바이올리니스트까지 열정을 갖고 몰입해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더군요.
“저는 맨 뒷줄에 앉은 연주자들을 농담 삼아 제가 운전하는 차에 탄 승객들이라고 부릅니다(웃음).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군식구라는 의미가 아니지요. 함께 한 배를 탄 식구라는 겁니다.”

-WEDO는 1년에 두 달 정도만 연습을 하는데도 완벽한 하모니를 내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WEDO 멤버 중 40%에 달하는 단원들은 오케스트라 경험이 없는 연주자들이었습니다. 단기간에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죠. 그때 운 좋게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정부가 매년 여름 WEDO를 위한 연습공간과 금전적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덕분에 약 두 달간 우리는 한 공간에서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이렇게 연습을 함께 오래 하다 보면 생각도 같은 방식으로 하게 되죠. 이스라엘에서 온 단원이나 팔레스타인에서 온 단원이나 출신은 달라도 생각의 통일을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5~6년 만에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WEDO 단원들은 이스라엘과 아랍 여러 국가 출신이고, 대다수가 자신의 출신 지역 오케스트라에 소속돼 있습니다. 하지만 여름 동안엔 한 곳에 모여 같이 연주하고 교감합니다. 이들을 한데 묶는 건 WEDO에 대한 일종의 충성심입니다.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도 같은 방식으로 발굴합니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의 젊은 연주자가 있다고 하면 7월 초에 안달루시아로 초청을 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솔로이스트 연주자와 함께 8월 말까지 지켜봅니다. 재능이 있다 싶으면 장학금을 제의해 10월부터 베를린에서 같이 일을 시작하는 거죠. 이젠 차세대 오케스트라를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재능 있는 어린이가 많아요.”

-저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라말라에서 마에스트로가 펼친 공연을 DVD로 보며 많이 울었는데요. 특히 이스라엘 아이들이 국경을 넘어가기 전 팔레스타인 동료를 붙잡고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부각되다 보니 WEDO가 두 지역 출신 연주자들로만 구성돼 있다는 오해도 종종 사는 것 같아요.
“WEDO 프로젝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물론 레바논·시리아·터키 등 다양한 중동 지역 국가로 구성했어요.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비단 두 나라 간의 갈등으로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분쟁은 정치를 넘어 인간적 맥락으로 봐야 합니다. 같은 지역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두 민족 간의 문제이다 보니 양측이 함께 화해를 이루지 못하면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인 겁니다. 군사적 해답도, 정치적 해답도 어려워요. 함께 사이 좋게 살지 않으면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고, 이는 또 중동의 각 국가들에도 다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아랍 지역의 다양한 국가 출신으로 오케스트라를 꾸리기로 한 겁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으로만 출신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국제 문제라는 것은 복잡한 접근을 필요로 합니다.”

-혹시 남북한의 연주자들도 포함시켜 좀 더 넓은 아시아를 아우르시는 건 어떨까요.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왜 안 되겠습니까. 양측의 훌륭한 연주자들이 동등하게 하나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할 수 있다면 멋지겠군요.”

-많은 음악 거장이 남과 북의 연주자를 모으는 프로젝트를 꾸려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에스트로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중요한 건 정부 차원에서 먼저 나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정치인들의 개입이 없어야 합니다. 양측의 연주자들이 민간 차원에서 주도를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통해 양측이 교감과 소통을 해야 하는 겁니다. WEDO를 꾸려온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 정부와는 어떤 접촉도 일절 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대안적 접근을 할 수 있었다고 봐요. 남북 양측을 모으는 오케스트라도 비슷합니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양측 사람들의 순수한 의지가 있어야 해요. 이집트에서 일어난 혁명을 보세요.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짓겠다고 나선 이집트 국민 모두의 의지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처럼 실제적으로 변화를 이뤄내려면 사람들 하나하나의 의지가 모아져야 하는 거죠. 그리고 음악은 이런 점에서 굉장히 효과적이에요. 추상적이기 때문에 양측이 충돌할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지요. 연주자들은 음악을 통해 머리뿐 아니라 마음으로 교감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북한의 연주자들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신가요.
“한국의 연주자들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뛰어나고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줄리아드 음대 같은 곳에 한국 학생이 얼마나 많고 또 실력이 뛰어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제 아들이 하는 현악 사중주단의 첼리스트도 한국인입니다.”

-얼마 전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도 5명의 젊은 한국 청년들이 대거 수상을 해 화제가 됐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북한의 연주자들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저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남과 북의 연주자들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꾸린다고 할 때 중요한 건 철저히 ‘평등’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너희보다 더 잘산다’거나 ‘너희보다 우리가 힘든 일을 더 많이 겪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라도 있으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남과 북이 대등하지 않다는 건 전 세계적으로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음악의 세계에서만큼은 남과 북의 연주자들이 모든 정치적 맥락을 딛고 용기를 내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의 오케스트라 안에선 단원 모두가 동등합니다. WEDO 안에서도 아랍 출신 클라리넷 연주자는 이스라엘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보다 더 멋진 음을 내고 싶어하지만, 그건 그들이 서로 동등한 음악인으로서 바라보기에 가능한 겁니다. 서로 음악으로서만 경쟁을 하기에 우리가 함께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지요.”


-예술은 정말 여러 의미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의 탄생』저자인 로버트, 미셸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와 그렇지 않은 과학자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이냐”란 질문을 받고 “예술을 아는지 모르는지의 차이”라고 답한 게 기억나네요. 사실 예술은 과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다 중요할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들에게 예술과 관련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예술은 정치적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습니다. 저는 모든 정치인이 좌우를 떠나 예술에 대해선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치인들에겐 권력이 있죠. 하지만 권력은 혼자 오는 게 아닙니다. 책임과 함께 오죠. 정치인들에겐 권력을 예술을 위해, 인류를 위해 이용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예술 관련 정책을 펴면 안 됩니다. 순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들에게 이득이 안 되더라도 장기적 안목을 갖고 정책을 펴야 합니다. 예술 관련 정책은 더욱 그렇습니다. 단순한 복지뿐 아니라 삶의 질 전반을 높이려면 음악과 예술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교육을 강화하면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먼저 예술을 찾아나설 겁니다. 삶은 더 풍요로워지겠지요.”

-그런데도 한국의 문화 관련 예산이 전체 정부 재정에서 1%를 조금 넘긴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음악은 모든 인간의 삶에 미칠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일반 교육과정에 반드시 포함돼야 하지요. 프로 음악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전혀 접하지 않은 아이가 서른 세 살이 돼 갑자기 음악에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어렸을 때부터 천천히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음악, 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돈은 사실 문제가 안 된다고 봅니다. 음악 교사를 몇 명 더 고용하는 데 예산이 얼마나 더 들겠어요. 진짜 중요한 건 예술을 위한 정치인들의 의지죠.”

-지도자들의 의지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오페라 애호가로 유명하기도 하고요.
“맞습니다. 독일의 전 대통령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도 잘 알려진 음악 애호가였죠. 지도자들의 노력과 함께 어떤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건 일관된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복지와 관련된 논쟁이 의식주에만 제한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실은 예술을 즐기고 마음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복지 정책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지난 5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했던 공연이 생각나는군요. 공연을 마친 후 어떤 팔레스타인 시민단체 회원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세상은 가자 지구를 잊어버렸다. 식량지원이 계속되긴 하지만 먹을 것은 동물에게도 보낼 수 있는 거다. 하지만 당신의 음악 공연은 우리를 인간으로 느끼게 해줬다.’ 음악이 정치적 가치를 넘어 중요한 이유입니다.”

-작가 토마스 만은 이렇게 말했죠. “우리 할아버지 세대에는 경제를 했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정치를 했다. 이제 우리 세대에는 문화를 할 때다”라고 말이죠. 한국 정치에도 적용할 수 있는 면이 아닌가 합니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는 경제에, 이후의 김영삼 전 대통령,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에 집중했지요. 현재 이명박 대통령은 나라를 선진국으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중이고,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젊은 연주자들에겐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으신지요.
“음악은 인간의 삶에 파고들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 연주자들이 깊은 사고력을 길러야 하는 이유예요. 바깥 세상과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거지요. 음악이 상아탑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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