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아름다움을 잊고 사셨나요?
첫 번째 사진전 연 배우 박상원
  • 떠나는 걸음이 남기는 그림자, 고인 물에 비친 도시 풍경, 밴쿠버 하늘에 제멋대로 얽힌 전선줄, 비상하는 새의 날갯짓….

    박상원의 사진들은 말없이 말을 걸어왔다. 바쁜 사람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일상의 미적 순간을 포착해 내밀면서 ‘왜 당신은 이걸 놓쳤나요?’라고 채근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풍광은 누가 찍어도 아름답지만, 일상 속 아름다움은 관조와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숨어 있지 않은가.
  • ▲ 2007 Korea, Kyoungsang-Do, Hadong 180x120
  •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박상원의 첫 번째 사진전에서는 그가 수십 년 간 찍어 온 사진 중 최근 4년 동안의 작품을 선보였다. 남산, 삼청동, 청담동 등을 거닐며 포착한 일상의 순간들과 강원도, 제주도, 영종도의 아름다운 경관들, 이란, 네팔, 몽고 등 광활한 대지의 평화로움이 담긴 44점이 걸렸다.

    평일 낮에 방문한 갤러리에는 4050 아줌마 팬들이 주를 이루었다. 한껏 멋을 낸 주부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마음에 드는 사진 앞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박상원의 사인을 받고 떠났다. 박상원은 때마침 아내와 장모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장모의 환한 웃음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자~ 핫핫” 하며 재롱을 부리자, 장모는 와르르 웃어 버린다. 그는 낡아서 아랫단이 나달나달 해진 면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썩 잘 어울렸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흑백의 산 풍경 컷이 마음을 잡아끌었다. 경북 하동이라고 했다.
  • “2005년 드라마 '토지'를 촬영할 때였어요. 비 온 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촬영을 강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잠시 쉬고 있었죠. 그때 눈에 들어온 풍경이에요.”

    30여 년 전, 누나에게서 카메라를 선물받은 후 사진을 촬영해 왔다는 그에게 이제 카메라는 없어서는 안 될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그는 어딜 가나 습관처럼 카메라를 메고 다닌다. 그가 가진 카메라는 모두 40여 대. 카메라가 없으면 불안감에 덜덜 떨릴 정도라고 한다. 셔터 한 번 누르지 않고 돌아올 때가 많지만 ‘이거다!’ 싶은 미적 순간을 발견하고 셔터를 누를 때의 환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하와이 공항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다가 공항을 떠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남기는 그림자를 앵글에 담았고, 첫눈 내린 날 등교하는 아이를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눈길에 남긴 발자국을 담았다. 이렇게 찍은 사진을 대중들에게 선보이면서 느낀 게 있단다.

    “사람마다 반응이 다 달라요. 같은 사진을 보고 ‘아름답다’ ‘슬프다’ ‘여유 있다’ 등 평이 가지각색이에요. 여기에 걸린 44점의 사진을 찍은 순간은 다 합쳐 봐야 1초가 안 돼요. 60분의 1초라는 찰나를 포착하는 게 사진이잖아요? 1초도 안 되는 순간들에 대한 느낌과 감상이 이렇게 풍부한데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놓쳤을까 싶어요. 지금도 저기 보세요(문 밖의 마당을 가리켰다). 저 앙상한 철제의자 밑에 뒹구는 낙엽들이 얼마나 예뻐요? 여기 앉아 있다 보면 이 하얀 벽은 나무가 만드는 그림자를 담는 캔버스가 돼요. 스물네 시간 앉아서 그 풍경만 찍으면 얼마나 멋진 그림이 되겠어요?”
  • ▲ 2007 Korea, Seoul, Chungdam-Dong 2 165x110.
  • 순수함을 잃고 싶지 않아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아요

    이번 사진전의 테마는 ‘박상원의 모놀로그’다. 1996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23년째 배우 생활을 하면서 떨칠 수 없었던 허무와 고독을 그는 사진을 통해 해소했다. 대중이 인지하는 그는 '인간시장'의 장총찬, '모래시계'의 강우석 검사에 가깝다. 정의감 넘치면서도 훈훈한 인간미가 풍기는 영원한 청년의 이미지. 이미지가 좋은 배우로 안성기와 1, 2위를 다투면서 각종 CF 요청이 끊이지 않고, 뮤지컬 '킬리만자로의 표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도 출연해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그 모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한 것이었다. 이 배역에서 저 배역으로 끊임없이 가공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게 배우의 운명이라, 그는 ‘진짜 박상원’을 보여주고 싶었다. 카메라를 통해 대중들에게 내면의 독백을 건네면서 해방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 ▲ 2007 Korea, Youngjong Island 180x120.
  • “MRI와 CT 촬영을 하면 뼛속과 머릿속이 다 찍히잖아요. 이 사진들은 엑스레이 촬영으로 제 머리와 가슴을 담아낸 것들이에요. 사진을 찍는 순간에 느낀 생각과 느낌들이죠. 그런 사진들을 모아 걸어 놓으니 발가벗은 느낌이에요.”
  • ▲ 2007 Canada, Vancouver Downtown 2 180x120
  •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배우다. 정지된 사진에서도 드라마를 읽어 내고,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갤러리 문을 닫고 나서면서 연극의 끝을 느낀다.

    “갈매기가 날갯짓하는 사진을 보면 저 사진을 찍던 순간이 느껴져요. 방파제를 매몰차게 때리는 파도 소리, 확 풍기는 짠 소금 내. 저 새는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고, 다른 새가 들어와요. 어제 갤러리를 나서며 불을 끄고 문을 ‘덩~’하고 닫는데 연극이 끝난 뒤 같은 느낌이었어요.”
  • ▲ 2007 Korea, Seoul, Nam Mountain 1 180x120
  • 그는 오래전부터 ‘명사들의 맨 얼굴’을 찍어 왔다. 대기업 CEO, 스포츠 스타, 연예인, 정치인 등과 만나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밥 먹고, 술 마시며 그들의 사람 냄새를 카메라에 담은 것. 정장을 차려입고 마이크 앞에 서 있는 모습만 보이던 명사들이 된장찌개를 ‘후후’ 불며 떠먹는가 하면, 스포츠 스타가 폭탄주를 들이켜는 모습이 그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어느덧 쉰 문턱에 와 있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의 이미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철없다” “소년 같다”고 하는데, 그도 이런 말이 싫지 않단다.

    “철이 든다는 건 세상을 알아가면서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고, 세상의 순수함을 보는 눈은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저는 ‘철없다’는 말이 좋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주름살이 있었는데, 그때 그 시간에서 정지된 것처럼 착각할 때도 있어요. 철없는 순간이 계속되면 순수를 잃지 않을 것이고, 감수성을 간직한 채 예술가의 삶을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요?”
  • ▲ 2007 Canada, Vancouver Downtown 165x110
  • 그에게 어떻게 늙고 싶으냐고 묻자, 전시 도우미로 있는 서경대 연극영화과 그의 여자 제자가 옆에서 듣다가 ‘쿡’ 웃음을 터뜨린다. “교수님한테 늙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아서요. 벌써 나이가 그렇게 되셨어요? 몰랐어요. 어떤 화제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시거든요. 또래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라며 겸연쩍어 한다. 박상원은 “어떻게 늙고 싶으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답했다.
  • ▲ 2006 Canada, Rockies 165x110
  • “잘, 자알이요.”

    잘 늙고 있는 것 같으냐고 고쳐 물었다.

    “얼추, 살아온 삶에 후회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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