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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따르라"
비엔나 유학시절에 유학생들 몇 명과 돈을 모아 렌트카를 타고 메주고리에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그곳 주요 프로그램이 고해성사였다. 서로 ?토막 독일어로 대화하는 가운데 고해사제가 내게 준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을 방문하는 이는 하나도 예외 없이 성모님이 초대해서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빈손으로 보내지 않겠노라'고."
이 메시지는 이후 예수님과 제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풍요로운 영감이 됐다. 독자들께서 한번 음미해 보시면 예수님과 관계가 한결 은혜롭게 느껴질 것이라 믿는다.
유다인 전통에서 '제자(그: mathetes)'는 엄격하게 '전문가인 스승'의 권위에 '순종'해야 했다. 예컨대, 율법을 중히 여겼던 바리사이인의 제자는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진 율법에 헌신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스승인 랍비의 해석과 지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제 관계는 율법에 대한 '학습 과정'에 한정돼 성립됐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스승을 따르는 데 바쳤다. 이들은 스승 세례자 요한을 따라 금식도 하고 기도도 했고(마르 2,18; 루가 11,1 참조), 스승이 투옥된 기간에도,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변치 않고 충성을 다했다(마태 11,2; 마르 6,29 참조). 바리사이인 제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배웠을 뿐 아니라 스승을 위해 기꺼이 투신했다.
예수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된다는 것과 거의 비슷하면서 새로운 차원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첫째, 예수님이 '먼저' 부르셨다. 랍비 세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해 그 학교에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대단히 비싸고 전인적 희생을 요구하는 부르심이었다. 이에 기꺼이 응한 이들만이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예수를 떠났다. 끝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격려 말씀을 주신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 15,16).
이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단점과 한계를 아시고도 부르셨다는 말씀이시다. 오로지 '속마음'(1사무 16,7) 하나 보시고 부르셨다는 말씀이시다. 소명(mission)도 당신께서 주시고 능력도 당신께서 주시고 책임도 당신께서 져주신다는 보증의 말씀인 것이다.
둘째, 제자들이 따를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다. "'나를' 따르라!" 대체 예수님 말고 누가 감히 이 엄청난 요구를 할 수 있을까? 유다 랍비는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정도였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 노선을 따를 것을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가르침뿐 아니라 당신 삶 전체를 따르는 전인적 추종을 요구하셨다.
이 요구에는 두 가지 비상한 것이 담겨 있다.
- 먼저, 완벽한 삶의 예형인 자신감이 담겨 있다.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 참조)이니 당신 자신을 따르면 자아성취, 인격완성에 완전을 기할 수 있다는 권고인 것이다.
- 다음으로, 그와 인격적 만남이 중요하다는 점이 함의돼 있다. 단지 '가르침'만을 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공동운명체로서의 유대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당신이 책임져 줄 것이니 그저 당신을 떠나지 말고 당신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당부인 것이다.
요컨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연관지을 때 올바로 이해된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요한 17,1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자고로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한다"고 했을 만큼 제자가 스승에게 드리는 예(禮)는 엄격했다. 하물며 하느님 아들이시요,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는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는가?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고 계신다. 미천한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듯이, 열성당원 시몬을 부르셨듯이, 세리 마태오를 부르셨듯이, 셈에 밝은 유다를 부르셨듯이, 박해자 사울을 부르셨듯이 어중이떠중이 같은 우리를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
능력이나 집안이나 학벌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부르신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26-29).
제자의 길은 분명하다
스승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다.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분 눈으로 그분이 바라보던 것들을 바라보며,
그분 마음으로 그분이 아파하던 것을 아파하며,
그분 손으로 그분이 행하던 것을 행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위해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분을 향한 사랑 안에서, 그분의 명령과 돌보심 안에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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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잣대에 맞춰
지난 호에서 예수님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 활동과 가르침은 그 양끝이 열려 있는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율법의 근본정신, 참된 행복의 길, 처세 원리 등을 소개했다. 이제 예수님 가르침의 궁극적 비전으로 들어가 보자.
예수님 가르침 알파와 오메가 역할을 하는 가르침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 어린이 마음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파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첫째,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다.
먼저, 하느님 나라는 평범한 밭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일상에 은폐돼 있다는 것이다. 몰라서 그렇지 생활 속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과감하게 투자하는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가치를 아는 만큼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있는 것 다 팔고 빚을 내서라도 투자한다. 세상 가치를 위해서 이럴 수 있다면 천상 가치를 위해서는 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마태 13,31-32).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올랐다. 하늘 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33).
가장 작은 일, 아주 미소한 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고 완성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천지개벽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작은 실천을 통해 번져 나가고 다가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 예수님은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를 통해서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애절한 심정을 전하신다. 하느님은 여러 자녀가 있어도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 멀리 있을 때 이미 아들을 알아보지만 아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비(慈悲)의 눈은 회심(回心)의 눈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아버지께서는 애타게 기다리신다. 그러니 아버지께 돌아가자. 다시 그분 품으로 귀의하자. 아버지 품, 곧 하느님 나라가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다. 돌아가면 호통을 치실 것 같지만 사실은 송아지를 잡아주신다. 그러니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자.' 이 점을 예수님은 강조하셨던 것이다.
동심을 회복하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 10,15).
예수님 말씀을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세상 저울로 저울질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계산하고 약은 체해서도 들어갈 수 없다. 이런 사람은 결국 제 꾀에 넘어간다. 자가당착에 빠진다.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이 명료하게 가르치시고 명하셨어도 그것을 제자들이 다 알아들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열두 사도는 객관적으로 교육 수준에서 봤을 때 예수님 가르침을 수용할 만한 지적 능력이나 지혜가 부족했을 듯싶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아직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17번이나 나온다. 쉽게 말해서 "아직도 모르느냐?"는 핀잔을 이토록 여러 번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진실로 요구한 것은 당신 말씀을 알아듣는 '지성'이 아니라, 낡은 비전을 버리고 '새로운 비전'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지성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아무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낡은 비전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사도들은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그 무엇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물질적 풍요, 즉 고기가 가득 찬 배, 여러 척의 배, 배부름과 부유함을 꿈꾸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들 삶 한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 그들의 세속적 욕망을 깨뜨리고 그들의 자기중심적이던 꿈을 부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삶의 목표를 제시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 그러나 실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던 것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는 지성이 아니라 바로 삶의 태도를 바꾸는 회개였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바꾸어 말하면 이는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물음인 셈이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느냐? 너의 무엇이 낡은 비전을 버리고 새 비전을 취하지 못하게 한단 말이냐?"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물으신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들었다. 이전의 습관, 타성, 아집을 버리지 않은 채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니 이해도 안 되고 수용도 안 됐다. 자신의 잣대를 버리지 못하니 예수님 잣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잣대에 우리를 맞춰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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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자아의 성장을 멈추게 해버린다. 사물이나 사람이나 어떤 사상에 대해서 고정관념을 갖게 되면 더 발전할 수가 없다.
고정관념은 대인관계를 권태롭게 만든다. 누군가에 대해서 고정관념을 갖게 되면 건강한 긴장과 기대감을 잃게 된다.
영성생활에서 고정관념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느님에 대해서 고정관념을 갖는 것은 우상숭배로까지 볼 수 있다. 우상을 하느님에게 틀 지우는 것을 의미한다(출애 20,4)고 알아들을 때, 틀이 없는 하느님을 틀 속에 가두는 것이 바로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을 운동가니 사상가니, 현자니 경륜가니 하는 틀 속에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또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노선에 집어넣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을 이데올로기의 시녀가 되게 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예수님 가르침을 알아듣는 데도 우리에게는 개방된 안목이 필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노선의 사상에 예수님을 꿰맞춰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 가르침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 가르침의 요지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관심사를 두루 아우르는 명쾌한 처방을 주셨다. 예수님 가르침의 스펙트럼은 무한대로 열려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율법의 근본정신, 참된 행복의 길, 삶의 지혜, 영생의 길 등 삶의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중요한 것으로 꼽을 수 있을 따름이다.
첫째,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예수님께도 바리사이에게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권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거나 무효를 선언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완성하고자 하셨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5,18).
'율법'뿐 아니라 모든 '예언서'의 골자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하신 이가 예수님이다(마태 22,36-40).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율법 교육의 혁신(革新)을 보게 된다. 본래 유다인은 613개 조항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이를테면 십계명의 세부 조항들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이 일일이 알기가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복잡하니까 사랑의 이중 계명(二重誡命), 나아가 오직 하나 '사랑'으로 압축해 주신다. 복잡하게 많이 알 것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골자를 확실히 잡고 그것에만 충실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하나로 다 통한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요체 교육(要諦敎育)이라 한다. 기억할 것은 613 → 10 → 2 → 1이다.
둘째, 예수님은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저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헤매고 있음을 보셨다. 행복의 파랑새를 피상적, 말초적, 세상적인 것에서 찾고 있는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보셨다. 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사실 뒤집어 놓고 보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역설(逆說)을 꿰뚫어보셨다. 그래서 여덟 가지 행복을 선언하셨다(마태 5,3-10).
그냥 건성으로 읽으면 이 행복 선언은 마치 말장난인 듯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알아들을 귀와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천하의 명언(名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 행복은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조건에 있지 않고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셋째, 삶의 지혜 곧 처세 원리를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지혜롭게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성공의 비결(秘訣)을 제시하신 것이다. 대표적으로 몇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마태 7,13): 이 말씀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영성적 권고인 동시에 세상을 성공적으로 사는 비결이기도 하다. '인생 역전'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궁극적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외길을 가는 사람들,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싸우는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生則死, 死則生)"고 호령했다. 실제로 그 말은 현실이 됐다. 그런 비장함으로 전쟁에 임했기에 임진왜란을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살려고 아등바등 세상 복락을 위해 이기적으로 처신하는 사람은 결국 신뢰와 신용을 잃는다. 궁지에 처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나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은 환란이 닥칠 때 주위의 손길이 도와준다. 영성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이 일으켜주신다.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메시지 중에 그 교훈의 가치가 황금처럼 귀해서 황금률(黃金律)이라고 불리는 구절이다. 공자께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스스로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慾勿施於人)."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을 이끌면서 "나는 노예가 되기 싫다. 그러므로 나는 노예를 부리기도 싫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부 예수님 말씀과 통하는 말이다.
남에게는 까다롭게 별것을 다 요구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기에 불만, 불화, 불의가 생긴다. 내가 남에게 요구하는 것을 내가 먼저 해주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결국 내가 기대하던 것들이 상대방에게서 되돌아온다. 나도 선을 행하고 상대방도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니 이것이야말로 상생(相生)의 생활 철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친 김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해줄 때에는 마음을 곱배기로 써서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 5,41).
-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4). 희생심과 봉사 정신이 있으면 반드시 주변의 인정을 받고 그에 합당한 자리를 얻게 된다. 우리 경험을 보건대 이것은 사실이다. 위만 바라보고 아랫사람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일시적으로는 통할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다. 특히 직위 중심에서 역할 중심으로 인사정책이 바뀌어 가고 있는 요즈음에는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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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한국국제학교. 1998년 중국내 한국학교로는 최초 개교.
중국 길림성 연길시 조양가 2728A에 자리한 초중고통합학교로서
한국의 7차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하여 국내연계교육을 시키고
그 외에 중국어와 영어를 중점적으로지도하여 당당한 국제인으로
길러 내고자 노력하고있습니다.
학교 현관. 태극기와 중국의 오성홍기가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업무용 승용차도 보임)
학교 정문. 연변과기대를 향하여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있습니다.
(외부 간판은 최초 중국정부 인가에 의해 연변외국인학교로 되어 있음)
신축동에서 바라본 본동교사. 뒤로 언덕위에가 과기대.
중고등학생들이 공부하는신축동. 사물놀이부가 연습하고 있습니다.
체육관이 좋습니다. 한중청소년탁구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나가는 연길성당입니다.문화혁명 이후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체육대회사회자. 한복은 조선족 검정옷은 한족 사회자임.
두 언어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구역별로 아주 씩씩하게 입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여학생들의 부채춤. 꽃을 그리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의 댄스. 중국식으로는 현대무도라고 소개하더라구요.
수녀님 뒷모습도 보이고....
중학생들의 퍼포먼스. 십자가는 승리한다.
경기는 아주 단순하지만 엄청 진지하게 열렬하게 경기에 임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신부님 말씀.아주 점잖은 연변사투리와 중국어로인사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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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절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창립 기념일이라 야간공원이 개방되었다.
연변중년남녀합창단. 이곳 분들 노래 좋아하고 명랑하고 활동적이다.
거리는 사람과 차가 넘쳐나고 북적대는 먼지속에 생명력으로 가득차다.
뀀성이라고 참으로 맛이 있다. 채시라가 광고모델로 쓰이고 있다. 무단복제???
부지런한 이곳 사람들. 새벽 4시면 이미 반짝시장이 선다. 온갖 물건이 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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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등교시간. 사물놀이반이 연습하고 그네뛰고 싸리꽃은 흐드러지고....
방천. 두만강 최하류 중국-러시아-북한의 접경지대로 지평선 너머가 동해바다이다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앳 사~아공. 사공은 없고 물은 도도히 흐르고.....
국경도시 훈춘에는 인력거가 아직 많이 남아 주요 교통수단으로 쓰인다.
도문시. 중조국경이다. 다리 옆에 붉은 색이 파란 색으로 바뀌는 곳이 국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