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를 낸 거룩한 땅

공주에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찰사가 관할하는 감영(監營)과 토포사(討捕使, 鎭營將)가 관할하는 진영(鎭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전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왔으며, 신자들은 옥에서 교수형이나 장사로 순교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처음으로 참수형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보름 후 청주에서 체포되어 온 이종국이 참수되었고, 5월경에는 문윤진, 7월경에는 이국승 바오로가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후 공주에서는 1812년 장대원 마티아와 황 바오로가 참수된 기록이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공주에는 또다시 내포 지역을 비롯하여 인근의 전라도 북부와 충청북도, 경기도 일부에서까지 신자들이 체포되어 끌려왔다. 지금까지 기록상(1866∼1873) 당시 박해로 공주 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866년 109명, 1867년 56명, 1868년 12명, 1869년 이후 16명 등총 193명으로,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공주, 해미, 홍주) 순교자 334명의 57.8%를 차지하는 아주 높은 비율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몇 명이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미에서 체포된 이 가롤로나 연산에서 체포된 김윤지 등 여러 사람이 이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듯하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과 10여 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밖에 안 되었고, 최 연장자는 남상교(南尙敎, 1783~1866,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 계층도 다양하였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 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황새바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하느님을 안다는 고백보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김영수>▒

꿈이 있는 사람이
비밀 들여다보는 것입니까
하느님을 안다는 고백보다
황홀한 노래 있을까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랑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사랑
그 설렘 속에서 촛불 하나 당기면
나의 세상은 우주의 맨 끝자리에서부터
눈물 깊은 음향으로 무너지는 것입니까
비밀처럼 하늘의 물가로 떠났는지
황새들은 보이지 않고
나는 먼 종소리를 들으며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늘의 길 따르는 기도이기를
낙엽밭에 꿇어 숨결을 씻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고백보다
더 황홀한 노래 있을까요

■ 순교자

◆ 순교자 이국승 바오로 (1722∼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이국승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천주교 신앙에 대해 철저히 배우기 위해 경기도 양근 땅으로 권일신을 방문하여 교리를 배웠다. 1795년의 을묘박해 때 형벌을 받던 도중에 석방되었다. 잘못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하였다.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이를 피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옥에 도달하였을 때,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자 권면하였으며, 고광성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며칠 후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태어난 곳이며,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이존창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 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진산 사람 윤지충과 권상연의 신주 소각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1791년)때 공주 감영에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취조관으로부터 경기도,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운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진 고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멀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곧 후회하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열심히 전교하였다. 가족에게 환난이 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홍산으로 이주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를 보좌하여 사목을 돕다가 다시 잡혀 결국 1801년에 공주 감영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 248위 >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순교자들을공경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빌어 주소서.

■찾아가는 길

■순례지 정보

소재지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6-1
지리좌표[순교탑 앞] 북위 36°27′79.5″ 동경 127°07′19.0″
연락처황새바위 성지 (041) 854-6321 FAX (041) 854-6323
홈페이지황새바위 성지 http://www.hwangsae.or.kr
미사시간평일 : (월) 오전 9:00 (화-토) 오전 11:00
주일 : 오전 11:00 (순례 예약시 시간 변경 가능)
교통편[승용차] 금강교를 건너 공주 시내로 진입하면서 오른쪽으로 백제 무령왕릉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로 들어서 500m쯤 가면 다리 건너 왼쪽이 황새 바위이다.

'CATHOL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주의 천주교  (1) 2006.01.12
골고다의 길  (3) 2005.11.28
공세리 성당에 가 보셨나요?  (1) 2005.11.25
묵주 9일기도  (3) 2005.11.10
묵주기도  (1) 2005.11.10


발해개국 제일성인 돈화를 찾는다. 안도와 돈화의 경계인 할바령 고개



할바령. 견갑골이란 뜻의 만주어로 길림과 간도의 분수령이다.



발해 유적 강동 24개돌을 찾았으나 공사중.

8×3의 주춧돌(?) 같은데발해의 역참 건물터로 비정된다.


돈화 시내에 있는 발해의 평지성인 오동성 옛터. 채소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여섯 봉우리인 륙정산 고분군. 발해의 초기 왕족과 신하들의 무덤이 산재한 곳이다.



유네스코 문화재 지정을 겨냥하여 발굴하고 있는 1지구.

대조영, 대흠무 등의 왕릉일지도 모르나 모든 발해 유적은 현재 접근불허이다.


대조영이 처음로 건국했다는 동모산으로 비정되는 성산자산. 동네는 성산자촌이다.


해저무는 부촌 성산자촌. 땔감과 콩깍지 등으로 겨울맞이를 마쳤다.


륙정산 맞은편에 자리한 비구니 사찰 정각사. 동양 최대라고 하나 너무 급조되었다.

'CHIN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하얼빈1  (2) 2006.02.01
元旦의 天池  (0) 2006.01.12
장백폭포  (0) 2005.11.24
백두산 동쪽에는?  (3) 2005.11.13
겨울 백두산의 모습  (5) 2005.11.13

충청도 내포지역의 신앙 못자리
 가을 끝자락인 11월 말에 찾아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은 발아래 수북히 쌓인 낙엽과 활짝 핀들국화, 잎새 떨어진 나무에 탐스럽게 달린 감들이 고풍스런 성당 분위기와 어울려 또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대전교구 공세리성당(주임 오남한 신부)은 1년 사계절의 모습을 모두 절기에 맞게 잘 담아내는 '아름다운 장소'로 알려져 영화, TV 드라마, 사진 촬영 단골 장소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내년 2월 개봉하는 '태극기 휘날리며'도 얼마전 이곳에서 촬영했다. 순례객의 발길도 연중 끊이지 않고 있다.

 공세리성당을 찾았을 때 수령 500년 쯤 되는 아름드리 나무를 보호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조경공사가 마무리 중이었다. 대전교구 최초의 서양식 고딕 건축물(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제 144호)로 지난 99년부터 추진해온 성당 원형 복원작업을 끝내고 조경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산만과 삽교천 방조제를 낀 수려한 주변 경관을 배경으로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공세리성당은 부지가 도시성당에서는 꿈도 꿀수 없을 만큼 넓다. 9000평에 달하는 성당 터는 조선시대 공세창(貢稅倉)이 있던 곳으로, 한양으로 운송하려고 거둬들인 세곡을 임시 보관했던 장소다. 성당이 있는 언덕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이 지역은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이자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포구이기도 했다.

 성당으로 올라가기 전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양손을 벌려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의 한복입은 예수성심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제관과 예수마음 피정의 집이 있는 곳이다.

 때마침 피정의 집 한켠에서는 한 무리의 여성과 수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김장 담기에 분주하다. 피정의 집 이용자들이 내년에 먹을 김치다. "본당 어떤 단체가 김장 봉사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원한 신자들이란다. "집에도 김장을 다 했느냐"고 물으니 "성당 일이 먼저가 아니냐"며 벌겋게 버무린 배추를 맛보라고 떼어준다.

 자신의 일과 마을 일, 성당 일을 굳이 분리하지 않고 품앗이가 잘 이뤄지는 게 이 지역의 특징이라고 설명한 오남한 주임신부는 "이곳은 내포지역 신앙의 못자리이면서 지역민에겐 마음의 고향,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추석 명절에 성당 마당에서 마을 잔치가 열리는 것도 전통이다.

 오 신부와 같이 성당으로 향하던 중 몇몇 순례자와 마주쳤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순례하지 못해 아쉽다는 이들은 여유를 갖고 꼭 다시 찾아오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공세리성당 구내에는 오래된 고딕 성당 건물 뿐 아니라 박씨 3형제 순교자 묘, 십자가의 길, 성체조배실, 수령 300~500년 된 보호수들, 피정의 집 등이 있다. 역사적, 교회사적 중요성을 알고 차례차례 순례하다 보면 분위기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성당 건물은 1895년 설립된 이 본당의 초대 주임 파리외방전교회 에밀리오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를 불러들여 1922년 완공했다. 지금은 워낙 규모가 큰 성당들이 많아 소박해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크고 화려한 모습으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공세리성당은 지방 명물로 구경꾼을 끌어모으곤 했다.

 성당 안 정면 중앙 벽에는 성 베네딕도상이 자리하고 있다. 본당 수호성인이다. 드비즈 신부가 성당 부지로 이곳을 매입했을 때는 이미 공세창이 폐쇄돼 폐허화되면서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는 장소가 돼 버린 상태였다. 드비즈 신부는 그런 이곳을 베네딕도 성인께 봉헌하고 가톨릭 신앙의 전진기지로 바꿔놓았다.

 베네딕도 성인상 아래에 나무 십자가가 있고 왼쪽엔 성부자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엔 원래 성모자상이 있었으나 분실돼 비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전에 벽을 바라보고 미사를 집전하던 제대, 성체 난간틀과 양쪽 벽의 소제대, 성가대틀, 고해소 등은 옛 성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당을 복원하면서 유리창은 밝은 색상의 14처 유리화로 꾸몄다.

 공세리성당을 얘기할 때 이곳에서 35년간 사목하면서 본당의 기초를 다진 드비즈 신부를 빼놓을 수 없다. 가난한 지역민을 위해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드비즈 신부는 직접 한방 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했으며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요한)씨에게 고약 비법을 전수시켰다.

고향 프랑스에서 재정을 지원받아 성당을 지을 때 가난한 신자들에게 공사에 참여하도록 해 품삯을 지불했으며, 가난한 신자들이 죽은 후 육신이 묻힐 곳이 없음을 딱하게 여겨 성당 맞으편 산을 구입, 충청도에선 첫 공원 교회묘지를 조성하기도 했다. 지금도 노인 신자들은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묻히길 바라고 있다.

 성당 밖으로 나와 왼쪽으로 돌아 성당 뒤로 한바퀴 돌면서 이어지는 길은 14처 길이다. 낙엽이 쌓인 오솔길을 따라 기도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14처 길의 각 처는 실물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순례자들의 성금과 후원자들의 참여에 힘입어 건립됐다.
 낙엽이 덮어버린 박씨 3형제 순교자 묘소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신앙 후손들을 말없이 반기는 듯한 3형제 묘 앞에 하나씩 놓여있는 귤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순례자가 다녀갔을까.' 입가에 미소부터 번진다. 이곳에는 야외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제대도 마련돼 있다.

 공세리본당은 병인박해 때 박의서(사바스)·원서(마르코)·익서(세례명 미상) 3형제를 비롯한 순교자 28명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박씨 3형제 묘는 1988년 성당에서 서남쪽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에서 이곳으로 모셔왔다.

 아산 걸매리에 살았던 박씨 3형제 집안이 이 지역에 끼친 공헌은 역사적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크다고 밝힌 오남한 주임신부는 최근 이 지역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밀양 박씨의 '가장보고'(家狀寶庫) 내용에 대해 언급했다.

 이 '가장보고'에 따르면, 박씨 3형제의 할아버지 박만선공이 이조참판을 지내다 낙향한 뒤 가난한 민생들을 위해 아산만 방조제 공사를 시작했다. 이 방조제 공사는 1760년대부터 그 아들 박종학공 대에까지 50여년간 이어졌다. 사재를 털고 부족한 것은 한양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공사를 완공했다. 이 방조제 공사에는 '유랑민'을 대거 참여시키고 이들에게 품삯으로 토지를 대신 나눠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박씨 3형제가 태중 교우이니 아버지는 당연히 신자이고, 할아버지도 신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방조제 공사에 참여한 '유랑민'은 신유·신해박해를 피신해온 신자들입니다. 이 방조제 공사는 우리나라에서 민간 차원에선 최초로 이뤄진 것인데다 가톨리시즘을 반영하고 있어 의미가 크죠."

 오 신부는 이에 대한 역사적, 교회사적 연구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세리본당은 박씨 3형제 묘소 위쪽에 있는 옛 사제관을 유물전시관으로 만들기 위해 현재 이 지역 순교자 관련 자료를 수집 중에 있다.

 공세리 성당에는 조용히 앉아 묵상에 잠길 수 있는 공간도 갖추고 있다. 성당을 가운데 두고 묘소 맞은 편에 있는 성체조배실이다.

 성당으로 올라가기 직전 오른쪽으로 몇발자국 가다 보면 언덕 아래를 굴처럼 파서 만든 성체조배실을 만난다. 성체조배실 내부 양쪽 벽에는 이 지역 순교자 28위를 부조로 모셨고 천장에는 옹기장수를 주로 했던 초기 신자들을 상징해 사기 조각 같은 것을 붙였다. 성체를 모셔놓은 곳도 한복을 입은 모양으로 꾸며 토착화의 한 면을 엿보게 한다.

 아담하고 조용한 성체조배실은 기도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본당은 자연 냉난방이 이뤄지는 이곳에서 평일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공세리성당이 자랑하는 것 중에는 수령 300~500년 된 아름드리 보호수도 있다. 시 당국이 보호수로 지정한 나무만 해도 느티나무 등 7그루이다. 이 지역 역사를 말없이 대변하는 이 나무들은 한여름엔 울창한 모습으로 쉼터 역할을 한다. 성당 앞 성모상을 받치고 있는 석조 기둥도 조선시대 영조 때 말을 묶어두는 기둥으로 사용한 것이니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공세리성당에는 특히 봄, 가을철엔 월 1만여명의 순례객이 찾는다. 지난해엔 순례자들을 위해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수마음 피정의 집을 건립, 봉헌했다. 이 피정의 집은 내년 1월(24~25일)부터는 마인드맵을 이용한 가족단위 피정 프로그램도 연중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피정의 집 지하에 최근 음악 감상실과 홈 씨어터도 설치했다. 도시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에 뒤떨어진 이곳 농촌 학생들을 위해서다. 주차장은 인라인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겨울방학에는 영어 프로그램도 계획하고 있다.

 서해대교 개통 후 교통이 훨씬 편리해진 공세리성당 인근에는 삽교호와 아산 온천 및 현충사, 도고·온양 온천, 영인산 자연 휴양림, 외암 민속마을 등 관광지가 즐비하다.

 본당은 주5일 근무 시대를 맞아 이곳의 특성을 살려 역사·신앙·문화·관광을 아우르는 곳으로 꾸며 나갈 계획이다. 분기별 음악회와 전시회도 계획하고 있고, '아름다운 성당'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혼배 전담 성당으로도 가꾸어 나갈 구상을 하고 있다. 피로연장은 피정의 집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피정의 집 음식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지역 농민 살림에도 보탬이 된다. 농민들은 농약을 적게 사용하고 있어 이용자들도 믿을 수 있는 먹을 거리를 만날 수 있다.

 또한 피정의 집 이용자 중 단체(20명 이상)로 인근 아산 나트륨 온천을 이용할 때는 40%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계약도 맺어 놓았다.

 오남한 신부는 "이 지역 여건이 국제 휴양도시와 비슷한 면이 많다"며 이러한 면을 아우르는 문화 관광사목에 역점을 둘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신문 이연숙 기자 mirinae@pbc.co.kr

'CATHOL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고다의 길  (3) 2005.11.28
황새바위 성지  (3) 2005.11.28
묵주 9일기도  (3) 2005.11.10
묵주기도  (1) 2005.11.10
연변의 성당들  (5) 2005.11.10

폭포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CHINA' 카테고리의 다른 글

元旦의 天池  (0) 2006.01.12
발해를 찾아서  (1) 2005.11.27
백두산 동쪽에는?  (3) 2005.11.13
겨울 백두산의 모습  (5) 2005.11.13
발해 상경용천부  (0) 2005.10.09

연길 시내를 관통하는 부르하통하의 야경


시내 야경


이름높은 서시장. 없는게 없을 정도로 모든 물건이 싸고 풍부하다

겨울철 공원의 아침 풍경. 남녀노소 집단 제기차기를 즐겨한다

양꺼라는 중국춤. 단순한 음악과 동작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데 건강에 최고란다


결혼식장. 호텔에서 많이 하고 이벤트사의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운다


세계적인 스타 성룡이 연길에 왔다. 한국 노래도 제법 잘한다.

추수가 끝난 드넓은 밭에 소를 방목하여부산물까지 깨끗이 처리한다.

농가 마당에 있는 옥수수 창고의 모습. 값이 너무 싸져서 농민들은 걱정한다.

시 교외에 있는 소학교의 모습

외국어 중학. 여기서의 고급중학은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된다.


연길 시내의아파트촌. 현재 연길은 곳곳이 건축 붐이다.


뒷골목 동네. 건너의 아파트촌과 대조된다.

전통 주택의 부엌 겸 방. 열을 외부로 빼앗끼지 않으려는주택구조이다.

'YANBI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미있는 광고  (1) 2005.11.29
연변통신6  (4) 2005.11.29
두만강 1300리  (4) 2005.11.13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6) 2005.10.30
연변통신4  (4) 2005.10.19

중국지도부 권력구도 바뀐다

[중앙일보] 2005-11-24 05:24

[중앙일보 유광종] 중국 지도부의 권력 구도가 바뀌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진영에 쩡칭훙(曾慶紅) 국가 부주석이 가담하면서다. 쩡 부주석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핵심 측근이자 '상하이방(上海幇.출세 기반을 상하이에 둔 그룹)'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후 주석은 2002년 11월 공산당 총서기가 됐으나 권력 기반이 탄탄하지 못했다. 장 전 주석이 심어 놓은 상하이방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하이방은 최고지도부로 일컬어지는 정치국 상무위원(9명) 중 5명이나 됐다.

그러나 쩡 부주석이 후 주석 쪽에 가세해 명실상부한 권력 중심 이동이 이뤄진 것이다. 상하이방으로선 분열 시대를 맞은 셈이다.

◆ "후.쩡 협력시대 개막"=홍콩의 친중 시사지 '광각경(廣角鏡)' 11월호는 "후(胡)와 원(溫).쩡(曾) 세 사람을 축으로 하는 권력 핵심이 밀월관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쩡이 후 주석 편으로 돌아선 것을 빗대서다.

이런 조짐은 지난해 가을부터 나타났다. 당시 쩡은 장쩌민의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후 주석은 각종 회의에서 세 살 연상인 쩡에게 마무리 발언을 할 기회를 양보해 쩡을 배려했다. 그러자 쩡은 후의 1인자 위상을 해치지 않으려고 앞장섰다.

최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 탄생 90주년 기념식 행사를 놓고 당내에서 격론이 벌어졌을 때 쩡은 후의 입장을 지지했다고 한다.

◆ 후.원 제휴 관계는 굳건=후 주석과 원 총리는 취임 이후 줄곧 제휴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동갑내기(63세)인 데다 문화혁명 기간 중 특정 파벌에 가담하지 않은 '소요파(逍遙派)'였다는 점, 궁벽한 지방에서 근무하다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 정계에 발탁된 점 등이 공통 요소다. 명절 때 가난한 농촌을 찾아 농민들과 함께 물만두를 먹는 '친민(親民)' 성향도 비슷하다. 정책적으로는 ▶농촌 지원 ▶균부론(均富論) 등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다.

후.원.쩡과 황쥐(黃菊) 부총리를 필두로 한 '상하이방'잔존 세력 간의 마찰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상하이방은 대도시.해안 지역을 축으로 하는 고도 성장 노선을 주창하기 때문이다. 원 총리가 지난해 과열 경기 억제책을 주도했을 당시 그를 공격했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당 서기(상하이방)는 지난달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퇴임 압력을 가까스로 비켜갔다고 한다. 당 지도부 회의 때 예전보다 의견 충돌이 잦은 점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BOA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하중 주중대사  (1) 2005.12.02
결혼증 - 이혼증  (1) 2005.11.28
만리장성의 길이  (2) 2005.11.17
아! 한반도!!  (1) 2005.10.28
反韓넘어 조롱까지  (0) 2005.10.28



中, 만리장성 길이 새로 잰다 [연합뉴스 2005-11-17 10:03]

(서울=연합뉴스) 이상민 기자 = 중국은 지상 7천km 이상에 걸쳐 뻗어 있는 만리장성의 길이를 항공 기술을 이용해 새로 재기로 했다고 중국장성학회(中國長城學會) 장지(張驥) 부비서장이 16일 밝혔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장 부비서장은 항공 원격 감지 기술을 이용해 만리장성의 길이를 전반적으로 새로 재기로 한 계획이 마련돼 전문가들로부터 실행이 가능하다는 승인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번 계획에 따라 BC 3세기에 중국을 첫 통일한 진시왕 때 건설되었고 명나라(1368-1644년) 때 대대적으로 재건되고 개보수된 만리장성의 길이가 처음으로 정확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장 부비서장은 말했다.

현재 7천300km로 측정돼 있는 만리장성의 길이는 과거의 비교적 낙후된 측정 장비와 방법들로 인하여 대단히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장 부비서장은 말했다.

그는 이번 새로운 계획에 따라 만리장성의 정확한 길이를 파악하는 외에도, 만리장성의 전반적인 구도도 밝혀지게 되어 이 세계적 문화유산의 보존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BOA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증 - 이혼증  (1) 2005.11.28
중국지도부  (1) 2005.11.24
아! 한반도!!  (1) 2005.10.28
反韓넘어 조롱까지  (0) 2005.10.28
눈내린 백두산  (4) 2005.10.13


끝없는 길. 그 위로 솟는 백두의 위용



적봉 아래 늪지대에서 솟는 두만강의 발원


현대판 백두산 정계비


만주족의 발상지로 일컫는 천녀목욕지 1



그림같이 아름다운 천녀목욕지 2



김일성 낚시터의 낚시바위



김일성 낚시터 2 - 북한의 성지



토문강을 찾아 - 헤이스허 바닥에서 주운 흑석



토문강을 찾아 2 - 흙으로 된 문의 모습



가도가도 끝없는 자작나무의 바다

'CHIN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를 찾아서  (1) 2005.11.27
장백폭포  (0) 2005.11.24
겨울 백두산의 모습  (5) 2005.11.13
발해 상경용천부  (0) 2005.10.09
흑룡강성 경박호(鏡泊湖)  (1) 2005.10.09


장백폭포, 그리고 천지를 오르는 장성 전경



좌우로 에워싸는 기암괴석들



수채화 같은 경사면 1


경사면 2


에미럴드 빛으로얼어붙는 폭포


폭포로 내달리는 천지수와눈부신 백설



얼어붙은 달문 전경



거센 물결로 포효하는 하늘호수 1



하늘호수 2



천지쪽
에서 본 야생화로 뒤덮이던 언덕

'CHIN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백폭포  (0) 2005.11.24
백두산 동쪽에는?  (3) 2005.11.13
발해 상경용천부  (0) 2005.10.09
흑룡강성 경박호(鏡泊湖)  (1) 2005.10.09
아! 백두산 2  (2) 2005.09.24

 

두만강 1300리 길을 모두 답파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서린 길이고

수없는 사연이 깃들은 길이며

통일의 그 날 각광받을 길입니다.

 


두만강 1300리길은 모두 국경이다

 

 


강이 없는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지까지는경계석을 세웠다(1990년) - 뒷면은 '조선'

 

 


두만강은백두산 자락 적봉 아래에 있는 늪지에서 발원한다

 

 


두만강 최상류. 물은 맑고 차고 수량도 적지 않다

 

 


하늘 아래 첫 동네 대동 마을. 비로소 들이 열린다

 

 


대동 마을 앞의 두만강은 20미터 아래 협곡으로 흐른다

 

 



두만강은 홍기하(올기강)를 수용하여 물길을 넓힌다

 

 




화룡현 숭선진의 해관. 오른쪽이 북한이다

 

 


강 건너 고장난 북한트럭과 수리를 기다리는 주민들

 

 


국경의 북한 군인들. 곡식자루와 땔나무를 들었다

 

 


상화 마을.철책이 쳐있고 건너 북한의 산은 꼭대기까지 온통 개간한 밭이다

 

 



북녘땅의구호.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장군님 따라 천만리"

 

 



호곡령에서 내려다본 북한 무산시의 아침. 아시아 두번째 규모의 노천철광으로 유명하고

두만강은 철광의 돌가루로 여기부터 심하게 오염된다

 


무산시의 중심가를 클로즈업. 일요일이라 거리에 사람이오간다

 

 




화룡시의 끝 남평에서 바라본 강건너 북한. 산 높은 곳까지 경작지가 이어진다

 

 


숭선에서 삼합까지 두만강은 두 산맥 사이를 흐른다. 중국측 남강산맥의 기암절벽

 

 



언덕에서 내려다본 북한의 유선시

 

 


룡정시 삼합진. 북한의 회령과 마주한 곳이다.

회령-삼합-오랑캐령-용정은 간도이민의 주요 코스가 되었던 곳이다.

 


삼합 망강각에서 내려다본 회령시의 모습. 강가에는김정숙 빨래터가 보인다.

 

 


삼합에서 개산툰 가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두만강. 강건너는 북한 삼봉리 들판

 

 



용정시 개산툰에서 북한으로 가는 다리.종성이 가깝다

 

 


사람들이 거의 떠났다는 개산툰에서 보는 두만강물은 많이 흐리다

 

 


선구촌 쪽에서 바라본 북한의 구호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개산툰의 산성촌 강가. 간도(사이섬)라는 명칭이 처음 생겨난 두만강 모래섬 지역

 

 


지근 거리에서 흐르는 두만강. 강이 정말 국경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도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곳. 오른쪽 강건너가 북한의 남양이다.

 

 


도문-남양간 국경다리 '중조우의교'이다. 강건너 산중턱의 길은 온성으로 이어진다.

 

 


두만강 하류. 북한의 아오지, 경흥이 가까운 지역이다.

 

 


두만강 최하류 방천.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 그리고 멀리 수평선은 동해이다.

두만강은 이렇게 백두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해까지 1300리길을 달려 흐른다.

 

 

 

'YANBI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변통신6  (4) 2005.11.29
연변통신5  (1) 2005.11.24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6) 2005.10.30
연변통신4  (4) 2005.10.19
만천성(滿天星)  (3) 2005.10.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