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길성당 - 天主敎堂>


<중국 연길성당 미사>


<중국 연길성당 - 조선족 고등학생들의 부채춤>

나의 신앙의 길 4. 십자가앞에 무릎을 꿇어

- 전 사베리아

나는 세례를 받고 북경에 온 후 세례 받은 사실을 극력 숨겨왔다. 북경은 수도인 것만큼 무난하게 살려면 주류를 따르는 것이 편하니까. 때문에 내 가까이에 있는 한 두 명 친구를 제외하고는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다들 모른다. 나는 퇴직 한 후에 성당에 다니기로 하고 재직으로 있을 때는 극력 피하려고 했었다.

나는 그렇게 아닌 척 살았고 아닌 척 살다보니 때론 내가 정말 신앙을 가진 적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사실 나의 직장은 위그르족, 하사크족, 몽골족, 회족, 장족(티베트족) 등 여려 민족이 어울려있기에 종교 신앙에 대해 그리 각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위그르족이나 하사크족 장족 등은 그 민족 자체가 전부 종교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사 공산당에 가입한다 해도 민족전통습관의 각도에서 이슬람교나 라마교가 지켜야할 모든 풍습들을 지키고 있다. 사실 그들 속에는 당원이 많다.

민족정책이나 종교정책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우리직장은 종교신앙에 관대할 수 있다. 하지만 상기한 민족들은 민족공동체가 종교를 신앙하고 민족과 종교가 상호 떨어질 수 없는 개념으로 각인되고 있다. 예컨대 위그르족, 하사크족, 회족 하면 이슬람교민족이고 몽골족, 장족 하면 라마교민족이다. 허나 우리 민족은 다르다. 천주교가 우리 민족 군체가 대대손손 믿어온 종교가 아니기에 신앙과 민족이 별개의 문제이다. 이슬람교나 라마교가 상기한 민족들에게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종교이기에 전반 민족적인 정서를 고려하여 그들의 신앙에 관대할지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경우는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필경은 중앙 직속 사업단위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 사무실은 거의 전부가 당원이며 우리 직장에서 기독교나 천주교는 불가이해의 존재이다.

때문에 나는 극력 내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을 숨겨왔다. 무난히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하면 되니까.

하지만 2년 전 중앙직속사업단위 간부등기표를 다시 작성할 때 사실 나는 조직에 내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회보한 셈이다.

그 번 간부조사등기표에는 “종교를 신앙하느냐?”라는 물음이 있었고 “예, 아니요”로 대답함과 아울러 자신이 믿는 종교를 적어넣어야 했다. 나는 한창 망설였다. 남편도 싫어하고 주위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직장에서의 앞날도 생각하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예”라고 적으려니 고려되는 점이 한두가지 아니었고 그렇다고 죽어도 “아니요”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참말이지 나는 그 부분을 훌쩍 뛰어넘고 싶었다. 여짓껏 잘 속여왔는데... 고민고민 하다가 나는 “예”라고 적었고 믿는 종교가 “천주교”라고 적었다. 아무렴 종교신앙이 법적으로 자유인데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기겠는가. 그리고 누가 그 많은 사람들이 적어내는 당안(서류)을 일일이 펼쳐본단 말인가. 고의로 나를 흠집 내지 않는 한 누가 내 서류를 조사하겠는가.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위로하면서 서류를 조직에 바쳤다. 예상대로 누구도 남의 서류를 뒤지지 않는지라 지금까지 별 탈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나는 조직에 내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회보한 셈이다.

헌데 천주교를 믿는다고 적고나니 순간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내가 정말 신앙인답게 다른 사람들한테 모범을 보였을가? 혹 나의 부족함이 나의 종교를 욕보이지나 않았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잘했을걸...

나는 이렇게 내 신앙의 불씨를 가슴 깊은 곳에 숨기고 살았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어떤 일들이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망간다고 해서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실 2003년도쯤 나는 이상한 것을 체험했다. 한번은 내가 길을 걸어가는데 내 오른쪽 어깨위의 20센티쯤 높은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뒤에서 걸어오던 키 큰 사람이 나를 지나치려나 보다 하여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주었다. 헌데 뒤에 사람이 없었다. 순간 나는 섬직한 생각이 들었다. “귀신이 매달렸나.” 그런데 무섭지 않았다. 잠간 눈을 감고 모습을 새겨봤는데 놀랍게도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성모님의 반신상이었다. 성모님은 머리를 앞쪽으로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에야 나는 금방 길을 걸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모경을 외우고 있었다는 것도 생각해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착각인지, 환각인지, 상상인지 모른다. 내가 이것을 주위사람들과 이야기하면 그들은 십중팔구 내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고 할 것이다. 착각이라 해도 좋고 환각이라 해도 좋고 상상이라 해도 좋다. 그만큼 내 잠의식속에 이미 내 신앙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가?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갑자기 한 며칠씩 묵주기도를 부지런히 한 적도 있다. 그냥 그 어떤 충동을 받아서 기도하군 했었다. 하지만 그 며칠이 지나면 나는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살아가군 했었다. 이렇게 나는 번번이 성모님이 잡아주는 손에서 스스르 미끌어져 내려왔다.

헌데 올 4월에는 성모님 모습이 아니라 십자고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직장에서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고 그냥 한 며칠 십자가를 끌어안고 울고싶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멍하니 성당에 가서 앉아있고 싶었다. 나름 부족함이 없이 산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도대체 무엇때문이지?

나는 성당을 향했다. 성당에서 조용히 그분을 바라보며 앉아있고 싶어서였다. 헌데 성당안의 예수님은 천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웬일이지? 사순시기라고 한다. 사순시기가 뭐지?

도망가기에 바빠서 나는 이것조차 몰랐다. 교리학습 할 때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없다. 나는 예수님을 못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인터넷이며 책들을 뒤지면서 사순시기가 뭔가 찾아보았고 부활의 의미를 새겨보았다. 나는 ≪예수 수난기≫란 영화를 보았고 신약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그렇게 피하고 도망가고 한 나를 계속 기다리고 지켜주신 그 분 앞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이젠 피할 수도 없고 피하지도 않으련다. 아직 15년이나 있어야 정년퇴직하지만 나는 더 이상 퇴직할 날을 기다릴 수가 없다. 물론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있어 이 카페에서 실명조차 밝히지 못하지만 그래도 신앙의 길에서 더 이상 피하지는 않겠다.

올 4월 나는 참으로 거룩하게 보냈다. 나는 십자가 앞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시의 내 마음을 시로 적어보았다.

4월의 어느날

못견디게

당신이 그리웠던

4월의 어느날

당신의 무릎아래 꿇어앉아

이유없이 울고싶었던

4월의 어느날

모시빛 햇살 사이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를 감싸안은

평화의 하늘자락

그리고

내 마음 안에

눈물로 피어나는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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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주성당>

나의 신앙의 길 3. 내 신앙에 불을 놓아

- 전 사베리아

나는 비록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세례받기전의 그 짧은 교리학습수준에 머무른 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업과 생활환경의 영향도 있지만 내 자신이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번의 계기로 하여 실날 같았던 내 신앙의 심지에 불이 달렸다.

몇 달 전에 나는 누구 장례식에 갔었다. 남의 경사에는 참석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례식에 부름 받으면 난 종래로 빠지지 않는다. 궂은 일을 당한 유가족에게 나의 작은 위로를 드림과 아울러 고인의 생전 업적을 되새기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보다 후회 없이 나중에 저 날을 맞이할가 사색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세 분 교수님을 내 차로 모시게 되었다. 서로들 무거운 기분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의논했고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다시한번 느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교수님이 “지옥과 천당”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아마 내 차안에 십자고상이 걸려있는걸 보시고 종교적인 해답을 원하셨나 보다.

그 교수님은 역사, 사회학을 전공하신 분인데 일찍 미국 하버드대학에 공부 겸 교환교수로 가신 적이 있다. 한번은 그 교수님이 미국의 한 학술회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학술회에 참가자중 어떤 분이 교수님더러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권하더란다. 그때 교수님께서 “예수가 전파되지 않은 저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착한 어린이와 예수를 믿으나 살인까지 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천당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느냐? 내가 설복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믿으러 가겠다”고 하셨단다. 그러자 전도를 하던 분은 말문이 막혔고 교수님은 “나는 차라리 그 착한 아이와 함께 지옥에 갈지언정 그 살인자와 함께 천당에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대답하셨단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해답을 드릴 수 없었다. 꼭 나의 해답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데 나는 대답 못드려 미안했고 대답할 수 없어서 나한테 화가 났다. 교수님이 분명 뭔가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았는데 나는 똑 부러지게 해답을 드릴수가 없었다. 나 자신도 확답을 몰랐으니까. 나는 그 교수님이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보다 내가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음이 못내 마음 아팠다. 그러면서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 나의 주님께 많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사실 “지옥과 천당”에 대한 물음은 종교의 시작이자 끝이며 인간의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싶은 문제이자 최초의 문제, 궁극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몇 천 년 논의된 이 문제는 어찌 보면 오늘에 와서 가장 유치한 문제이기도 하다. 중세기 이전이라면 혹시 지붕 우에 사닥다리를 놓고 천당에 올라가보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예부흥도 지났고 계몽기도 지났고, 근현대도 지나 당대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요 하는 이때, 우주 탐험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이때에도 우주 비행사에게 하늘에 올라가니 천당의 하느님의 옥좌가 보이더냐고 묻는다면 그 이상 유치한 물음은 없을 것이다. 우주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유물론의 시각에서 천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것도 편협한 생각이며 따라서 천당에 가느냐 못가느냐를 단순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이분법으로, 흑백의 논리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유치한 발상이 아닐가 싶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난발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내 주위에.

하지만 나 역시 보다 정확한 해답을 몰랐다. 소위 종교를 신앙한다는 사람이 이 조차 잘 알지 못하여 타인을 설복할 수 없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런 물음을 뭐라고 탓할 수 있겠는가.

그 사이 마음속 깊은 곳에 미약한 불씨로 감춰두었던 내 신앙의 심지에 구도의 불이 달렸다. 나는 전에 읽었던 교리책을 펼쳐들었다. 뭔가 연필로 줄도 긋고 적어넣기도 한듯 싶었는데 시험공부 대하듯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대했기에 암송은 한듯 싶으나 아무것도 마음에 남지 않았다. 나는 성경을 펼쳐들었다. 20년 전 선물 받은 성경인데 연길에서 북경으로, 북경에서도 몇 번 이사를 하면서 이사할 때마다 고이 모셔두었을 뿐 읽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몇 페이지 읽고는 덮어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두툼한 성경을 앞에 놓고 보니 어디서 “지옥과 천당”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였다. 단숨에 읽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바 하루 밤 베고 자면 머릿속에 입력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발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나는 신앙 앞에서 두서를 찾지 못하는 여덟살짜리 초등생이 되고 말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친구 수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수업중이여서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 연락번호를 뒤져서 보다 정확한 해답을 줄만한 사람을 찾았다. 마침 얼마전부터 알게 된 한 신부님의 연락번호가 있는지라 나는 그 교수님이 물었던 내용을 신부님한테 메일로 보냈다. 처음에 나는 주저심이 들었다. 믿는다는 사람이 아직도 그런 유치한 물음을 묻는다고 신부님께서 어이없어 하시지나 않으실가?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나절로도 너무 어이없는 일이라 자괴감만큼 주저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들 어떠하리 내가 알고싶은데. 그리고 나는 신앙 앞에서 지금 여덟살이 아닌가. 또한 공자의 말을 빌면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인데”. 나는 이렇게 자아위안 하면서 신부님께 메일을 보냈다. 해답을 기다리는 한편 나는 중국천주교공식사이트를 찾아냈고 거기서도 해답을 찾아보았다.

신부님한테서도 답장이 왔고 사이트에서도 해답을 찾았다.

그 교수님한테 전도한 사람은 기독교였나 보다. 종교개혁을 할 때 마르틴 루텐이 희랍문으로 된 일부 내용을 부정하면서 기독교에는 “연옥”이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믿으면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분법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예수님을 모르더라도 순수한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착하게 살면 천당에 갈수 있으나 예수님을 믿더라도 실천이 어긋나면 나중에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고 하니 교수님 물음에는 해답이 충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천당”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경지로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이며 불가 묘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에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똑 같이 아름다운 곳에 똑 같은 식탁 두 개 있고 똑같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헌데 숟가락이 팔의 길이만큼 길었다. 두 상에 갈라 앉은 사람들 중 한상에 앉은 사람들은 음식을 담아 제 입에 넣느라 분주한데 숟가락이 길어서 도저히 입에 닿지 않았다. 그리하여 음식은 음식대로 지저분하게 널리게 되었으나 한입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 상의 사람들은 숟가락이 닿는 곳의 상대방에게 음식을 떠먹여 줌으로서 서로들 즐겁게 식사를 했다. 이것이 바로 지옥과 천당의 차이란다.

나는 더 이상 피동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내 주위에는 종교를 이해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또한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하나의 지구촌에서 다문화 시대를 살면서 좀 더 대화적이고 화합으로 나가려면 상대방을 알고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가? 하지만 아직도 흑백의 논리로 타문화를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내 생활권에서. 나는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한테 위로의 한마디 전해줄 수 있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한테는 희망과 격려의 한마디 전해줄 수 있으며 천하를 얻을 것 같이 열망에 가득 찬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겸허를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석박사, 교수들한테는 다문화 차원에서 다른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 신앙을 학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신앙 앞에서 나는 지금 금방 문장을 배우기 시작한 여덟살이다. 내가 이 카페에 가입한 목적은 여러 사람들의 실천양상을 보면서 천주교에 대해 좀 더 피부 적으로 느끼고 신도로서의 올바른 삶을 배우며 이 카페에서나마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이다.

내 신앙에 불을 놓아 피보다 진한 꽃으로 피고 싶다.(20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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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당>

<중국 요녕성 심양 남관성당>


나의 신앙의 길 2. 벗―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 전 사베리아

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이다. 화려한 문구로 씌여진 시는 아니지만 소박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으며 반문구로 감정이 절제되고 있다.

우리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볼 때 정말 저런 사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헛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우정”이라면 “의리”와 같은 단어가 동반하면서 흔히들 ≪수호전≫의 량산박 영웅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의리”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 “우정”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를 서로 사양”할수 있는 그런 벗을 가진다는 것은 천운이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일반적으로 “우정”이라면 남성들 사이에만 존재하고 여성들 사이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만큼 여자들의 “의리”는 갈대처럼 흔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다시 말하면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를 서로 사양”할 수 있는 “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그렇게 나를 자신보다 걱정해주는 친구,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나는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바로 권옥산(방지가 로마나)수녀님이다. 세속에 친구들이 많지만 신분이나 격에 어울려 대화가 통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지라 이익관계가 생기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며 관건적인 시각 구명대를 서로 양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하지만 권옥산 친구는 다르다. 우리는 함께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하나의 생활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주소조차 모르는 곳에 떨어져 있다해도 “친구”의 의미를 의심해본적 없으며 또한 기적처럼 만나게 되는 그런 끈끈한 운명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우정의 색깔이 바래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짙어만 간다. 늘 나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가 나는 고마울 뿐이다. 이러한 벗은 이 세상에 하나면 족하다.

먼저번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와 나는 1989년에 9월에 처음 만났다. 당시 신앙을 갈구했지만 종교라는 이 미지의 세계가 너무 낯설었던 나에게 그는 하얀 미소로 다가와 나의 눈을 뜨게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처음으로 성당에 갔었고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한번은 영성체를 할 때 내가 왜 나한테는 면병을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나도 봉헌을 했는데 왜 하느님은 공평하지 않게 나를 성체성사에 참여못하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그처럼 공백상태였다. 이러한 나에게 그 친구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었고 내 머리와 마음이 닫혀있을 때는 그냥 기도하면서 나를 지켜주었다.

1990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자신이 뜻을 둔 수녀의 길에 나섰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알지 못한 채 아주 총망히 헤여졌다. 나는 가끔 그 친구를 생각했지만 어디서 찾을지 방향이 없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호기심으로나마 교회나 성당 같은데 가끔씩 “구경”가는데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종교신앙 자유라는 정책을 떠나서 사람들한테 이해되지 않는 공간이라 저어되는 점이 한두가지 아니었다. 게다가 나를 이끌어주던 그 친구가 없으니 나는 끈 떨어진 연마냥 방향이 없었고 성당에 나갈 재미도 없었다. 참으로 어섯눈을 뜨기 시작할 때 이끌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 어떤 충동을 받아 미사에 참여하러 갔는데 그 친구가 성당에 있었다. 그 친구의 집이 팔도이고 또 졸업 후 어디로 갔을지도 모르던 상태라 성당에 만났을 때 우리 둘은 정말 놀랐고 기뻤다. 나는 그때에야 그 친구의 뜻이 수녀였음을 알았다.

그 친구는 수도생활을 준비하느라 연길성당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연길성당에는 노수녀님(지금 돌아가셨음) 한분 계셨고 조수녀님도 수련수녀로 있을 때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무슨 생각하고 성당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왜 그때 성당에 가서 너를 다시 만나게 되었지? 내가 왜 갔을가, 참”라고 내가 말하면 그 친구는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고. 하느님이 너를 이끌었던 것이야”라고 대답한다.

아무튼 그때의 재회로 하여 우리는 서로의 인생의 뜻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친구는 다시한번 신앙의 길에서의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교리를 역설하면서 나를 성당으로 자주 나오라고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인 나한테 나쁜 영향이 미칠가 두려워 그 친구는 조심스레 나한테 다가왔는데 교리가 필요 없이 그 친구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신앙교과서였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견증은 설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세례 받을 생각을 못했다. 그 후 그 친구가 연변을 떠나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자 성당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은 또다시 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가끔 편지를 보내와 안부를 물었다. 내가 석사공부를 할 때 그 친구는 어느 정도의 수련을 마치고 다시 연길성당으로 돌아왔다. 종신서원까지 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수녀였다. 그 친구가 있어서 나는 또다시 성당으로 나가게 되었고 마침내 석사과정을 마칠무렵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나와 그 친구는 늘 헤어져 있지만 늘 손잡고 있었다. 리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과정에 아주 드라마틱한 만남도 있었다.

1997년 석사를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 왔으며 여러 가지 핑계로 또 다시 신앙을 잊고 살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계속 연길성당에 있겠지 하면서 연락한번 못했다. 연길성당 전화번호도 모르니까. 그러다가 2003년 한국 부산으로 3개월간 연수가게 되었는데 부산일보에서 견학할 때 한 기자분의 연계로 내가 좋아하는 시인 이해인수녀님을 만나게 되었다. 약속한 시간 성베네딕도수녀원의 “해인글방”에서 나는 이해인수녀님을 만났다. 나와 이해인수녀님은 문학에 대해, 신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나의 친구가 연길성당에 수녀로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해인수녀님은 반색하면서 연길성당에 머문적이 있다고하셨다. 내가 “친구의 이름이 권옥산입니다”고 했더니 순간 이해인수녀님은 표정이 굳어져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권옥산수녀라구요?” 다시 물어보시기에 “예”하고 대답했더니 “지금 이 수녀원에 와있어요.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내가 굳어졌다. 나는 친구의 외형까지 그려가며 확인을 했다. 나와 이해인수녀님은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라 서로 마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참으로 우연이라도 그런 우연은 없을 것이다. 그건 하느님이 안배한 필연이었다. 그때 친구는 학교에서 수업중이라 수녀원에 없었다. 후에 이해인수녀님의 연계로 나와 친구는 부산에서 6년만에 극적인 상봉을 했고 나는 성베네딕도수녀원에 초대받아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녀원안의 성당에서 “대림의 밤” 기도모임에 참가하였다.

후에 들을라니 나와 친구의 드라마틱한 만남은 성베네딕도수녀원에서도 연길성당 수녀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이슈였다고 한다.

이렇게 나와 그 친구는 아무 연락 없이 살았어도, 지어 연락처도 모른 채 살았어도 약속 없이 만나게 되어있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늘 가까이에 있어야만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애지각에 떨어져있어도 언제나 서로를 마음에 새겨두고 진심으로축복해준다면 늘 옆에 있는 듯이 서로를 느끼게 되어있지 않을가.

내가 신앙에 게을리 할 때마다 그 친구는 알아채기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보내오는 엽서처럼 조용히 다가와 속삭인다. “잘 지내?”, “멋지게 인생을 가꿔”라는 축복과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뿐이다. “너 요즘 신앙에 게을리 하지 않니? 성당에는 나가?” 이런 재촉이 한마디 없다. 그러나 그러는 친구의 속삭임에 나는 정신이 버쩍 들군 한다.

다시다시 만날 때마다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늘 떨어져 있어도 늘 내 옆에 있는 듯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전에는 너무 보고싶어서 내가 한달음에 심양천주교신학원에 찾아가서 만나본적도 있다. 수녀는 함부로 공동체를 이탈할 수 없으니까. 올 때 기차표를 끊지 못해 비행기를 타고오면서까지 연길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신앙에 대한 나의 마음이 점점 열리자 친구는 나한테 본격적인 이론지도를 해주고있다.

견진성사를 받던 날 친구가 나한테 하는 첫마디가 “너 견진성사를 받아서 시름놨다.”였다. 그 사이 십여년간 나를 지켜보면서 빙빙 에돌아가는 내가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축하 한다”는 말보다 “시름놨다”는 말을 먼저 할가? 나는 그 사이 줄곧 내 손을 잡고 나의 옆을 지켜왔던 친구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때문에 사이좋은 친구들도 몇 년 만나지 않으면 그 사이가 멀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헤여져 있으나 마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마음이 더 깊어지는 이러한 믿음과 우정. 그저 감사할 뿐이다.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할 수 있는 친구, 나는 그 사람을 가져서 너무 행복하다. 친구야,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2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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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주교좌 남당성당>


나의 신앙의길 1. 무엇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

- 전 사베리아

얼마전에 북경에서 교육자로 계셨던 한분의 유작출판기념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은 원래 중국 어느 조선족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셨는데 퇴직후 성경을 읽으셨고 기독교 신자로 되어 돌아가셨으며 기독교장례식을 치뤘었다.

물론 종교는 달랐지만 그분의 작품속에는 정신수련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그날 출판기념식에는 북경의 출판사, 대학교, 사회과학원, 연변대학 동문회, 북경애심여성회 등 직장과 단체의 80여명이 참석하였다.

그날 어찌하다보니 우리 또래의 여자박사 3명이 나란히 한식탁에 앉게 되었는데 그중 한명이 불교를 믿고 한명이 기독교를 믿었으며 나는 천주교신자였다. 그날 모임에 참석한 여자 박사 3명이 100% 종교신앙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중국의 교육환경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종교신앙을 가진다는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그날 석사를 졸업하고 북경에 분배받아 온지 얼마 안되는 후배가 종교를 신앙하는 우리 세 여자 박사가 신기했던지 “선생님들은 어찌하여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까”고 물었다. 우리는 웃고 말았다. 신앙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신앙이 활발하여 어릴 때부터 가정의 영향으로 믿게 되는 그런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이곳에서 종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장님이 막대기를 짚고 한걸음 한걸음 더듬으면서 나가는 격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더듬어 나갔다. 때문에 나의 신앙의 길은 평탄지 않았고 또 지금도 늘 첫발작을 내디딘 기분이다.

나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로부터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중시절(고등학교) 나는 무한한 신비로 가득한 이 세상이 신기했고 우주의 섭리가 참으로 놀라왔다. 모든 것이 우연인듯 하면서 필연인 그 자체가 너무나도 두려웠고 그로하여 “절대적인 진리”, “영원함”, “절대자” 등에 대해 사색하게 되었다. 그때 일기책을 전부 위와 같은 단어로 도배했는데 내가 썼던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읽었을 때 그 뜻을 내가 알수 없다. 난해시라 해도 이렇게 난해할수 없고 추상파라 해도 이렇게 추상적일수가 없다.

고중시절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독교 교회당이 있었다. 나는 기독교가 뭔지 잘 몰랐고 천주교와의 차이는 더더욱 몰랐다. 다만 마루틴 루테르가 종교개혁을 한 신교라는 정도만 알고있었을뿐이다. 하지만 교회당 첩탑의 십자가만 보면 그냥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상한 거룩함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하여 나는 교회당 문을 떼고 들어섰으며 젊은 신도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가운데 몇 번 예배에 참가했었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거룩함은 보이지 않고 그냥 말끝마다 너도나도 뒤질세라 “아멘”을 높이 외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 상상속의 종교는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과 평화로움이 감돌고 환희와 고요함이 깃들며 사람들 사이의 친절함과 지켜야 할 예의법도가 있는 그런 존재였는데 나는 교회에서 축제의 분위기만 느꼈을 뿐 종교의 정숙함과 신성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몇 번 교회에 나간 것이 부모님들에게 전해져 나는 많이 혼났으며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몇 번의 예배에서 나는 어렴풋이 십자가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왜 오셨고 왜 돌아가셨는지 몰랐다.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연관된 단어는 “예수쟁이”(기독교 신도를 비하하여 부른것임)뿐이였고 기독교(천주교)는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를 불에 태워죽이는 무지의 조직이며 “십자군 동정”을 진행한 폭력적인 조직이라는 것 뿐이였다. 거기에 “정신적 아편”이고… 이것이 내가 받은 교육이다. 지금 같은 다문화 시대, 열린 시대에도 이곳에서는 종교신앙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인데 1980년대 말 종교는 우리에게 너무나 멀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을 겪어온 부모님(두분 모두 당원)들은 “종교”란 말만 들어도 두려워했으며 아예 입밖에 내지도 못하게 하였다.

퍽 후에야 안 일이지만 할아버지께서 천주교신자였다고 한다. 일본에 유학하셨고 연변에서 학교를 세우면서 교육자로 일생을 마쳤던 할아버지는 10년 내란 시기 운동때마다 불리워나갔지만 독실한 신자로서 민분이 없었기에 별로 투쟁을 맞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향으로 아버지 형제들은 성분이 나빠 입당할 수 없었다. 다행이 아버지는 성분이 괜찮은 어머니를 만났고 또 남들보다 더 노력하였기에 입당하였지만 아버지 형제들은 입당하려는 소망을 모두 이루지 못했다.

집안의 그런 아픔으로 하여 부모님이 더욱 나를 말렸는지 모른다.

1989년 9월부터 1990년 7월까지 나는 대학입학전의 마지막 일년을 연길성당의 수녀이며 지금 심양천주교신학원에서 공부중인 권옥산(방지가 로마나)수녀님과 한책상에서 보내게 되었다. 휴식시간 우리는 신앙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천주교를 믿는다고 했으며 기독교와의 다른 점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신앙을 갈구하던 나에게 권옥산 친구는 단비를 내려주었고 나는 마침내 그 친구를 따라 연길성당으로 “구경”가게 되였다. 이것이 내가 천주교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보았다.

1989년 10월 15일, 확건하기전의 연길성당안은 사람들로 꽉 찼으며 뭐라 신분을 알수 없는, 여러 가지 색상의 환한 복식을 한 남성들이 제단우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교님과 여러곳의 신부님들이 오셨던것 같다. 그날 중국 조선족의 첫 신부님이신 엄태준(아브라함. 현재 훈춘성당 주임 신부님임.)신부님의 사제서품식이 있었다. 내가 전에 본적도 상상한적도 없는 엄숙한 의식이였고 사제서품 받은 엄신부님은 눈부시게 환했다. 그날 엄신부님은 내 상상속의 예수님이였고, 성당이였고, 종교였으며 신앙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신성하고 화려했다. 그날부터 나는 엄신부님의 “팬”이 되었다. 당시 열아홉살인 우리 여자애들은 주윤발이나 류덕화를 좋아했는데 나는 영화배우보다 엄신부님이 더 멋있었고 존경스러웠으며 자랑스러웠고 또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팬”이란 단어를 알고있지만 그때는 한국과의 교제도 빈번하지 않았던 터라 “팬”이란 단어도 없었다. 그냥 다른 여자애들이 영화배우나 가수를 좋아했다면 나는 영화배우나 가수보다 엄신부님을 좋아했다고 소박하게 말하는것이 더 타당할것 같다. 엄신부님이 사제서품 받던 날부터 즉 엄신부님이 신부생애를 시작한 날부터 내가 “팬”으로 되었으니 엄신부님의 신부생애와 나의 “팬”으로의 력사가 시간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엄신부님은 지금도 내가 팬이라는 것을 모르신다. 1996년 성탄절, 나는 연길성당에서 엄신부님한테서 세례를 받았다.

사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은 도대체 무엇인가? 영원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상대적인 우리의 삶 속에 정말로 절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구도의 길이 신앙의 길에 나서게 하였으며 권옥산 수녀님의 도움과 엄신부님의 사제서품식에서 봤던 그런 정숙하고 신성함이 나로 하여금 천주교의 길에 들어서게 한것같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머리로 해석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것이라고 본다.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는 평화로움과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마지막 정토, 내 영적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그러한 영원함과 그에 대한 추구가 신앙이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 어떤 개념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면서 더듬어가는 내 마음의 길이였다.(2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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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이동경축






:::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

 

1. 김대건 신부님의 약력

2. 김대건 신부님

3.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

4. 아들이신 김신부님

5.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1. 김대건 신부님의 약력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순교자 집안의 후손인 김제준(아나시오)과 모친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남
1836년 여름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에서 나모방 불란서 신부에게 영세받음(세례명-안드레아)
1836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엽,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남
1844년 12월에 부제로 서품됨.
1845년 1월 중국을 거쳐 귀국. 4월 3일 목선으로 11명의 교우를 대동하여 상해로 출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
1845년 8월31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9월 28일에 제주도로 입국. 10월 12일에 강경나바위로 상륙
1846년 6월 5일에 입국 후 사목활동을 하다가 관가에 잡혀서 갖은 고초를 겪음
1846년 9월 16일 나라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받아 10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 그 장소에 매장되었었으나 경기도 안성 미리내로 비밀리 모셔졌음
1857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께서 가경자(可敬者) 칭호를 내리심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79위 한국 순교복자로 시복됨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으로 공포됨

 

2. 김대건 신부님

 

성지 미리내 복자 현양대회 광경

김대건 신부님은 짧은 일생을 진리의 증거자, 민족의 선각자로 주님의 사업에 몸바치다 순교로써 생을 마친 한국 최초의 사제입니다. 그분은 15세 어린 나이로 뛰어난 재주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앙심을 인정받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서품되어 귀국의 길에 오를 때부터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실 때까지가 일대기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기간의 활동은 한마디로 하느님께 대한 자기 봉헌이었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진심한 희생의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 교회의 최초의 사제로서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탁월한 웅변가로서 한국 교회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이 땅에 역사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은 모두 25통입니다.
이 25통의 서한은 김대건 신부님의 피눈물이 나는 활동기요, 하느님께 대한 봉헌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지 내용을 통해서 김대건 신부님의 활동과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특히 잘 알려져 있는 옥중 고별 서한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겹게 만드는 감격적인 서한입니다.

 

4. 아들이신 김 신부님

 

 

"저는 오늘 불란서 배가 조선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 배들이 다만 위협만 하고 그대로 떠나게 되면 교회에는 큰 박해를 가져와서 저도 죽기 전에 무서운 고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아! 천주님이시여, 모든 것을 선종의 길로 인도하소서. 저는 어머님인 우르술라를 주교님께서 보살펴 주시옵기 바라나이다. 10년 동안이나 같이 있지 못하다가 겨우 며칠 동안은 자식과 만나는 일이 허락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도 못 가서 그 자식은 다시 떨어져 갑니다. 원컨대 주교님은 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옵소서(페레올 주교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 신부님의 유해 머리 부분은 1901년 5월 21일에 서울 용산에 있던 신학교의 성당으로 모셔졌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옮겨짐에 따라 소신학교에 모셨다가 1960년 7월 5일에는 가톨릭대학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한국 천주교 성직자단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 안드레아 신부님을 대주보로 받들어 7월 5일을 김 신부님의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복자 노렌조(범주교)와 안드레아(김대건)와 모든 치명자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시복식 때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드린 기도문)."

 

 

김대건 신부님은 3개월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영광된 순교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 신부님이 감옥으로부터 끌려 나와 두 손을 뒤로 돌려 묶이고 새끼로 만든 들것 위에 올라 앉으니 포졸들은 그 들 것을 메고 무수한 군중이 둘러보는 가운데사형장으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판관이 일어서서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자 김 신부님은 군중을 향해 큰 소리로 마지막 설교를 힘차게 하셨습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것은 오직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그 천주를 위해 나는 죽어 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고자 생각 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이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포졸들은 김 신부님의 웃옷을 벗기고 관습을 따라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는 물을 뿜고 흰 회를 발랐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을 꿇어 앉히고 한 가닥의 밧줄로써 신부님의 머리칼을 동여매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신부님은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으시면서 태연하게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몸가짐이 이러하면 좋으냐? 쉽게 자르겠느냐? … 자 나의 목을 잘라라, 준비는 되어 있다." 이래서 12명의 회자수가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빙빙 돌다가 각각 한 칼씩 내리치니 여덟 번째의 칼날에 신부님의 머리는 앞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유흥렬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聖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상세 일대기

동방의 나라 조선에 구원의 빛이 동터 올 때까지는 진리를 갈망 하는 선각자들의 연구와 빛을 찾아 나서는 열성으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은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씨앗이 자라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고 수없는 난관이 있었다. 조선은 당시 양반과 상민의 계급사회였고 주자가례를 실천 철학으로 삼는 시대였으므로 천주교의 새로운 교리는 기존 사회 제도를 위협하는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창립 초기부터 이어지는 박해의 회오리 바람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전 국토를 혈제의 제단이 되게 했다. 그러나 천주를 향한 믿음의 불꽃은 신앙 고백을 통해 곳곳에서 찬란한 빛으로 드러났고, 하느님의 자비는 초기 순교자들의 피로써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섭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 가문에서 태어난 대건의 아명은 재복이었고 세례명은 안드레아였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데레사 성녀는 택현의 딸이요, 대건의 당고모였다. 일찌기 ’내포의 사도’이존창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증조부는 열심한 신앙생활로 신해박해(1791)때 처음 체포되면서 수없이 옥문을 드나들었고 기약 없는 옥 살이 끝에 해미에서 1816년 옥사함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가장인 김진후의 순교로 아들들은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다.

김대건의 조부 택현은 1827년 정해 교난의 박해를 계기로 낯선 타향인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해서 살게 되니 이곳은 비록 험령대산은 아니어도 첩첩산중이어서 그간의 박해를 피해 몰래 이주해 온 교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김 대건의 나이 7세 때였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골배마실로 이주해 온 소년 김대건은 이 때부터 조부 택현의 지도로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김대건의 부친 제준 이냐시오는 열심한 신앙으로 교회 일에 열심 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분이다. 그러나 소년 대건에게 깊은 신심을 키워 준 데에는 모친 고 우르술라의 힘이 컸다. 모범적인 신앙인 가정에서 자란 김대건이 첫 영성체를 한것은 1836년 6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서였다. 1836년1월에 입국한 모방 나 신부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마음을 쓰며 각 방면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결심도 대견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는 부모의 결단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7월에 소년 김대건은 서울로 올라와 최방제와 최양업을 만났으며, 마침내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세 소년도 함께 떠나게 되었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현석문,조신철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인 호송자와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 신학생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경리부 책임자인 리브와 신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이 점령한 이색적인 도시로서 그 당시 서양인의 극동 진출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대건과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은 얼마 후 마카오에서 청국인들에 의한 민란을 겪게 되어 외방전교회 회원들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신학생으로 면학이 계속되었으나 곧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가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고국산천 멀리 이역에서 동학도이자 동포를 잃은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그들은 슬픔과 낙담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일어난 민란으로 근교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면학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때가 1839년 4월이었다. 그해 11월에야 다시 마카오롤 돌아오게 된다. 이해는 조선에서는 기해박해가 벌어져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는 수난의 해였고, 신학생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도 이때 순교했다. 마카오로 귀환한 후 철학 공부에 정진해 1841년에는 철학 과정을 수료하고 신학 과정으로 진급했다. 그들이 전공한 것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철학과 신학이었으나 그것을 익히기 위해 그보다 하부 구조를 이루는 기초교양을 쌓는 서양 학문의 초.중등과정을 거쳐야 했다. 또한 면학 장소가 마카오,마닐라 등 국제 도시여서 학식과 견문이 넓어지고 문화와 교양을 갖춘 이른바 지식인으로 자란 신학생들은 쇄국 조선에서 벗어나 조선인 최초로 해박한 서구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두 신학생이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받고 있던 1840년, 프랑스의 루이 필립 황제는 세 척의 군함을 극동 해역으로 파견해 청국과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군함의 사령관인 세실은 마카오에 기착해 파리외방전교회 지부를 찾아와 유익한 자문을 구하면서 보조자를 청했다. 이리하여 김대건과 조선교구 소속의 메스트로신부는 에리곤호에 최양업과 만주교구의 브뤼니에르 신부는 파보리트호에 올랐다. 서품을 기다리던 두 조선 신학생은 이렇게 귀국길에 오르는 꿈에 부풀었다. 두 군함은 1842년 가을에 양자강 어구에 다다르게 되었으나 때마침 영국과 청국 사이에 남경조약이 맺어지고 전란이 끝나게 되자 신부들과 신학생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돌아가게 되 었다. 김대건의 조선 입국 시도는 이때부터 무수한 장벽과 고난의 길의 연속이었다. 조선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메스트로 신부와 김대건은 거지행세를 하고 입국의 길을 찾았으나 외국인의 입국이 무모한 계획이라 판단되어 김대건만을 보내기로 하고 1842년 12월 23일 두 명의 중국인 교우와 함께 변문으로 향한다. 변문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북경으로 가는 300명 가량의 동지사 일행과 만나게 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조선교회가 보낸 밀사 김 프란치스코였다. 이때 그는 품속에서 앵베르 범 주교가 잡히기 전날까지 기록한 순교행적과 모방,샤스탕 신부의 마지막 편지와 다시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조선 교우들의 탄원서를 대건에게 내어주었다. 7년만에 만난 고국의 교우와 헤어져 홀로 변문으로 들어가 다음날 의주를 향해 길을 떠난 김대건은 중국인 교우에게 김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문서를 메스트로 신부에게 보내주길 부탁하고 130리 길을 하루에 걸어 멀리 의주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수없이 겪고 관문을 통과해 조국땅을 달리던 김대건은 추위에 못이겨 주막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그의 얼굴과 중국신 등을 수상히 여겨 첩자나 도망치는 죄인으로 보고 고발하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체포될 것 같아 김대건은 다시 의주로 발길을 돌렸다. 굳센 김대건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지쳐서 눈 속에 쓰러져 잠들었다. 이때 어디선지 "일어나 걸어라"하는 소리가 들리고,그림자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보였다. 훗날 김대건은 이 일을 천주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3년 1월 6일에는 메스트로 이 신부가 있는 백가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43년 1월 백가점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그곳에 머무르면서 입국길을 트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했다. 훈춘을 거쳐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거기서 서울까지 무사히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이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서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정의 공부를 끝냈으나 만 25세가 되지 않아 신품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부제품을 받게 된 것이다. 1845년 1월 초 의주쪽으로 해서 몰래 김대건 혼자 입국하니, 참으로 10년 만에 대하는 고국산천이었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보고하고 주교를 맞아들여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서울 돌우물골에 작은 짐을 풀고 꼭 만나야 하는 교우들만 접촉하면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열병을 몹시 앓았다. 하느님의 보호로 건강이 회복되자 준비해 온 150냥으로 배 한척을 사서 성직자를 맞을 채비를 했다.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기해박해 때 남편이 순교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유리걸식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어머니를 찾아 뵈올 엄두도 못내니 김대건은 현석문 등 11명의 교우들과 그해 4월에 상해쪽을 향해 배를 띄웠다. 교우들 중에는 배를 타 본 일조차 없던 6명의 농부도 있었다.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 밤낮없이 시달리어 김대건은 끌고가던 종선과 두 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김대건 역시 심하게 배멀리미에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하고 안심을 시켰다. 이렇게 일행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산동 배가 가까이에서 그대로 지나가려는 것을 김대건이 옷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구조를 청해 상해까지 배를 끌고 가 주기로 결정받았다. 김대건 부제 일행이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교는 마카오에 있었다. 반가운 소식을 접한 고 주교는 다블 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로 와서 김대건을 반갑게 만났다. 조선 입국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고 주교는 서둘러 김대건 부제에게 서품식을 올릴 차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쯤 떨어져 있는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열 명도 안되는 조국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건은 페레올 고 주교 집전하에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달 24일 주일에는 만당 소신학교에서 안 다블뤼 신부가 복사 하는 가운데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의 수선탁덕 김대건 신부는 곧 교우들이 수리하고 있는 배로 돌아가서 조선으로 돌아갈 즐거움을 그들과 나누고 있었다. 그해 8월 31일에 고 주교와 안 신부가 남모르게 그 배로 찾아와 고 주교는 길이가 25척이고 폭이 9척이며 깊이가 7척밖에 안되던 그 작은 배에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김대건 신부,안 신부, 조선교우들은 그 밤으로 조선을 향해 바닷길을 떠나게 되었다. 라파엘호는 처음에는 다행히 요동 방면으로 가는 중국 교우의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게 되어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더 이상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물결이 치는 대로 배를 맡기고 있자난 풍파가 차차 가라 않게 되었다. 새로 키와 돛대를 마련해 동쪽으로 뱃머리를 향했다. 라파엘호는 호수천신의 인도를 받아 9월 28일에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되니,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을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리 나바위라는 조그만 교우촌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과 꿈에도 조선입국을 그리워하며 6년을 준비한 고 주교의 기쁨은 어떠했으랴! 이들은 곧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을 틈타 상륙하게 되었으니 1845년 10월 12일이었고, 상해를 떠난 지 42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바위에서 하룻밤을 지낸 김대건 신부는 다음날 서둘러 떠났다. 고 주교와 안 신부는 그곳에 남아서 우리말을 배우며 성무를 집 행하게 되었는데 나바위 교우들은 두 성직자를 맞아 날 듯이 기뻐했다. 천주의 은총으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미사 참례를 날마다 하게 되고 주교와 신부를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는 용기백배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언어와 활동에 제약이 없는 방인 성직자이기에 전국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영신을 위로하고 전교에 힘쓰며 성무에 충실했다. 다시없이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방인 성직자였기에 페레올 주교는 마침내 불고 25세의 청년 사제 김대건 신부를 조선교구 부감목으로 선임했다. 김대건 신부는 먼저 고 주교가 안전하게 있을 곳을 마련해 서울로 오게 하고 자신은 고향으로 내려가 교우들을 돌보고 꿈에도 잊을 수 없던 어머니를 찾았다. 10년 동안 외국을 다니다가 신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는 가슴이 메어지느 듯한 벅찬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리면서 순교하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목숨도 이미 천주께 바친 몸이며 한 어버이의 아들이기 전에 모든 교우의 아버지가 된 책임을 크게 느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아직 입국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메스트로 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본국에서 오는 연락을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다. 고 주교의 밀명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마포 나루를 떠났다. 1846년 4월, 교우 임성룡의 배를 타고 연평도 앞바다를 지나 등산곶에 이르렀다. 마침내 백령도 부근에서 그물을 치고 조기잡이하는 중국어선을 만나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눈치를 보았다.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준비해 간 편지와 지도를 요동반도와 마카오의 연락장소로 전해 주도록 부탁했다. 김대건 신부는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면서 배를 돌려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등산곶 일대를 감시하는 군교들이 중국어선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빌려 달라고 쫓아왔다. 당시의 국법으로 양반 소유물을 정부에서 징발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김대건 신부는 자기 배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여기서 시비가 벌어져 김대건 신부는 폭행을 당하고 옹진 감옥으로 연행돼 갔다. 1846년 음력 5월 12일 밤의 일이었다. 최양업 부제와 이 메스트로 신부 영입을 위해 위험으 무릅쓰고 연평도 조기잡이 배에 접근해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기뻐하던 김대건 신부는 체포됐다. 순위도의 부산진으로 연행된 김대건 신부는 옹진, 해주 감옥을 거쳐 마침내 서울로 압송되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교를 위해 해외로 파견된 샌학생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갖춘 깊은 학식과 해박한 세계 지식은 박해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박해자들의 요청으로 예쁘게 채색한 영어로 된 두 장의 세계 지도를 그려 올렸다.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여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은 학식과 견문은 놀라운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신분과 경력, 그리고 학식이 유별남에 놀란 정부당국은 40여 차례나 심문했고 국왕을 모신 어전회의를 열어 거듭 논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때 8월 9일 프랑스 함대가 홍주 앞바다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나 시부, 샤스탕 신부의 문제를 가지고 문책 소동을 벌이며 국교를 열 것을 요구해 왔다. 일찍이 청국에서의 아편전쟁 소식을 통하여 서구 식민주의 국가 의 침략행위를 알고 있던 조선정부는 당황해 하며 김대건을 활용할 방도를 강구하려 했다. 그를 프랑스 함대에 보내 전날 세 선교사를 죽이게 된 것에 대한 해명과 함께 앞으로의 화의를 제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건도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며 8월 10일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조정은 다시 강경한 쇄국정치를 주장하면서 김대건 새신부를 통외(通外)의 위험분자로 몰아서 마침내 최후의 단안을 내려 군문 효수형을 내린다.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수선탁덕 김 대건은 한강물 굽이쳐 흐르는 서울 성밖 새남터에서 휘광이가 내려치는 칼날 아래 참수치명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굽힐 줄 모르는 김대건 신부는 처형을 받기에 앞서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한 것이니 내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라고 믿음과 신념에 찬 말을 외치고 의연하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비록 서품을 받은 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성무집행을 했으나 그의 생은 참으로 굵직한 삶이었다. 동북 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그의 활동과 국위 구령과 개화를 위해 헌신한 참 삶의 실천은 종교적으로 한국인 성직자 특유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잃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젊은 조선인 신부를 잃은 것은 조선교회에 거의 갚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나는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오직 그의 천국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서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스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제 성직에 오른 분으로 그것도 오늘까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놀란 만한 웅변의 사람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접촉한 교우는 곧 존경과 사랑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러한 영광된 순교는 조선교회의 영원불멸할 명예이며 완전한 승리와 불멸의 약속의 보증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지 11년 후인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 칭호를 받게 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북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를 받들게 되고, 7월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김대건 사제 순교자를 그 첫 자리에 올렸다.

성 김대건신부님의 옥중서간 전문

(1846년 8월 29일 신자들에게 하직 인사 편지로 추정)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님자를 아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영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영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영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영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대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 오,육십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 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야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이십 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야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야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여

사랑을 친구하노라.

부감 김 안드레아

<추신>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이오, 막비주상주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바니 너희 감수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야 너희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러 말고 큰 사랑을 일워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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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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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결한 영혼

詩는 또다른 그의 祈禱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민들레의 영토 - 이해인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聖스러운 깃발

太初부터 나의 領土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眞珠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原色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이해인(본명: 이명숙, 1945.6.7. ~ )은수녀이자 시인.


1945년 6월 7일에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버지가 납북 되었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때는 부산성남초등학교에 다녔고,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창경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에 이해인의 언니가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수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58년에는 풍문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무렵에 시 〈들국화〉가 쓰여졌다. 이후 1961년에는 성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1964년에 올리베타노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세례명은 클라우디아이다. 입회한 이후부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가톨릭에서 발간하는 《소년》지에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 수도자로 살 것을 서원한 후,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경리과 보조 일을 하였다.

이후 필리핀에 있는 성 루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하였다. 귀국한 후 1976년에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을 발간하였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타 종교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으며, 〈시경에 나타난 福 사상 연구〉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1983년 가을에는 세 번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를 발간하였다.

1992년에 수녀회 총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비서직이 끝난 1997년에 '해인글방'을 열어두고 문서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가톨릭대학교의 교수로 지산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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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베들레헴의 별
   
Ave verum corpus
   
예수의 탄생
요한과 제자들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
오병이어 를 바친 아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지붕을 뚫고 내려진 병자를 고치심
탈리다쿰
돌아온 탕자
혈루증 여인
죄인들의 친구 예수님
많은 병자를 고치심
회당에서 가르치심
질문하는 율법학자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
따님이 죽었습니다
성전을 깨끗이 하심
예수를 찾아온 부자 청년
예수께 들려온 사람들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
나를 따르라
열두 제자를 택하심
밀밭 사이로 걸어 가는 예수님의 일행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마지막 만찬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
베드로의 부인
베드로의 눈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를 조롱하는 로마 군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다
골고다에 선 세 십자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
무덤에서 선 천사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디베랴 바닷가에 서신 부활하신 예수님
엠마오로 가는 길
승천하시는 예수님
오순절 성령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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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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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그 자리에 선 '야곱의 우물 성당'


성당 안에 있는 두레박과 감겨있는 줄


긴 세월에 닳고닳은 야곱의 우물

<요한복음 4,5-42>

그때에

5.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 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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