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오지 수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가 남긴 마지막 선물…
위대한 사랑의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한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종족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 다해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의 인생이 이제 온 세상을 울린다!


[ INTRO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 About Movie ]

남부 수단의 절망의 황무지, 톤즈를 아시나요?
아프리카 오지 톤즈의 희망 故 이태석 신부를 만나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인 수단은 1956년 독립 직후부터 집권층인 소수의 아랍계와 피지배층인 다수의 원주민 사이의 끝없는 내전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져 있는 상태다. 80년대 남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후 이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은 더 격화되었다. 특히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부 수단은 절망의 황무지라 불리 울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어린 소년들은 소년병이란 명목하에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으며, 느닷없이 시작되는 전쟁의 불안감과 더욱 심해지는 폭력성으로 인해 국민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한 악성 말라리아와 콜레라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강한 햇빛과 습기 많은 우기를 가진 자연환경과 질 낮은 위생 상태, 기본적인 먹거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게 퍼진 전염병은 전쟁 만큼이나 톤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오지 여행가이자 국제 구호전문가인 한비야씨도 근래에 가본 곳 중 남부 수단의 상태가 가장 최악이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톤즈. 그 지옥 같은 곳에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남부 수단을 자원해 부임한 이태석 신부. 그는 인제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까지 마친 의사였으나,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고, 신부가 되자마자 톤즈로 향했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그는 희망이라 기억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지난 1월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톤즈는 지금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이태석 신부와 그가 남긴 사랑과 나눔의 의미를 찾아 우리는 다시 톤즈를 찾았다.


잠들지 않는 톤즈의 병원, 그 곳의 유일한 의사 이태석 신부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그의 투혼이 살려낸 소중한 생명들!

의사로서의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이태석 신부의 몸과 마음은 아프리카의 가장 척박한 땅, 톤즈로 향했다. ‘내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라고 그는 이야기 했지만 실로 그가 톤즈에서 일궈낸 성과는 대단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운 이태석 신부는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땅 톤즈로 향하게 된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독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닌 톤즈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님의 거대한 사랑 안에서 실감하며, 내전과 전염병으로 병든 톤즈에 병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병원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톤즈 사람들은 며칠 밤을 새며 걸어와 치료를 받았고, 그런 환자들을 돌려 보낼 수 없었던 신부님은 잠을 줄여가면서 환자를 맞았다.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치료를 하는 신부님의 투혼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병원은 나날이 많은 환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가 직접 환자를 찾아가 접종을 해주었다. 백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없는 톤즈의 건물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하여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환자들의 아픔을 좀 더 잘 듣기 위해 그들의 말인 딩카어도 열심히 배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꾸려가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진료는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계속되었다. 병과 싸울 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노력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학교를 꿈꾸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난이 대물림 되고 있는 톤즈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기 위해 그는 예수님의 사랑이 깃든 학교를 만들기로 한다. 병원과 마찬가지로 톤즈 사람들과 함께 만든 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한 교정에 있는 톤즈의 유일한 학교로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직접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케냐에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을 선발해 데려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톤즈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12년 과정)는 남부 수단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통 다른 학교들은 오전에 간단한 수업을 하고 선생님이 없을 경우 수업을 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오후 12시면 모든 과정이 끝나는데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는 항상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의 수업은 3시까지 알찬 수업으로 짜여져 있어 많은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학교가 되었다. 수업의 열기 또한 대단하여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의 경우 한 교실에서 120명의 학생이 비좁게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학교 근처에는 기숙사도 만들어서 집이 먼 아이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꿈이 담긴 학교에서 드디어 자신들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
한센인의 아픔을 함께 하다!

이태석 신부의 형인 이태영 신부는 그가 의사의 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다미안 신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당에서 상영해준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하와이 근처 ‘몰로카’ 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8세에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이태석 신부는 어린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고 톤즈의 한센인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몸을 어루만졌다. 톤즈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한센인 마을은 그가 찾기 전까지 초가집에 지하수조차 없던 곳이었다. 그는 그 곳에 벽돌 집을 짓고 지하수를 끌어올린 펌프 시설을 만들었다. 그는 톤즈에서 단 하나뿐인 앰뷸런스를 타고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차 소리가 나면 나무막대기를 집고 걷는 손과 다리가 성하지 않은 어른과 아이들이 몰려 나온다. 이태석 신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직접 고름을 짜내고 붕대를 감아주며 발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위해 직접 만든 신발을 신겼다. 처음으로 한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느낀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사랑 그 자체였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지금, 그들은 그의 사진을 보자마자 너나 할것 없이 사진에 입을 맞추며 애통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들을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준 그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은 안타까운 절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를 ‘영원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브라스 밴드가 만들어낸 희망의 기적!

톤즈에서 내전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그 곳의 아침은 군대의 구호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마음이 음악으로 치유될 수 있길 바랬던 이태석 신부는 그가 오래도록 꿈꾸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바로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악기를 자신이 먼저 스스로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악보를 만들고 한국 살레시오에서 보내준 단복을 입혔다. 총 대신 악기를 든 톤즈의 아이들은 곧 남부 수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는 정부 행사에도 초청 받았다. 남부 수단 대통령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연주를 선보인 브라스 밴드는 정부 공무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아이들은 지금도 새벽이면 모여서 연습을 한다. 이태석 신부가 만들어준 악보를 보고 선배들이 후배를 가르치며 밴드를 꾸려 가고 있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브라스 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 Director’s note ]

울지마 톤즈가 만들어 지기까지,
이태석 신부가 남긴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올해 1월 우연히 이태석 신부의 선종 소식을 접하고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신부의 길을 택한 그의 삶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아프리카 톤즈를 찾아간 이유 또한 궁금했다. <울지마 톤즈>는 그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마흔 여섯의 길지 않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알아가는 여정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신부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 어렵게 키운 아들이 의대에 진학했을 때의 기쁨과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겪었던 갈등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태석 신부의 누나와 형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낸 어머니는 의지했던 아들의 선택을 쉽사리 지지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며 먼저 떠나보낸 아들 이야기에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 만나게 된 이태석 신부의 지인들 또한 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취재를 끝낸 순간 모두 이태석 신부에게 깊게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톤즈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부족간의 전쟁이 시작된 남부 수단의 치안 상황으로 인해 바로 떠날 수 없었다. 우선 수단 어린이 장학회를 통해 건네 받은 40여개의 6mm 테잎을 전달 받아 현지에서 촬영할 내용들을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깊은 슬픔에 빠진 톤즈와의 만남
수단에 도착해서는 아강그리아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던 한만준, 이승준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두 분 모두 이태석 신부의 영향으로 아프리카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만나 취재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은 찰나, 톤즈로 가는 길목에서 총격전이 시작되어 길목이 차단되었다. 결국 수단 남쪽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이용해 비행기를 2번이나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4시간 가량 달려 겨우 톤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기도 없고, 공동 펌프가 만들어내는 식수를 사용하는 톤즈의 사정은 굉장히 열악해 보였으나 그래도 지금은 많이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신부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돈보스코에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신부님이 없는 병원을 여전히 찾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의사도 없는 병원을 왜 찾는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산을 도와 직접 아이를 받아준 신부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며 몇 시간 동안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2010년의 톤즈는 온통 깊은 슬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 Beautiful people ]

사랑이라 불리운 사람,
이태석 신부를 기억하다.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갔고, 그는 집안일을 도우며 어머니를 기다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집 근처의 성당은 어린 그에게는 좋은 놀이터였다. 그에게 사제의 꿈을 가지게 한 ‘다미안 신부’의 영화를 본 곳도 성당이었다. 또한 성당에서 그는 또 다른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풍금을 독학으로 배웠고, 작곡도 했다. 중 3때는 이미 성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음악과 신앙에 대한 믿음은 가난한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반듯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실한 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의대에 합격했다. 군의관 시절, 그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기로 다짐하게 되고, 이미 형제 중 한 명이 사제, 또 한 명은 수녀가 된 상황에서 자신 또한 사제가 되겠노라 어머니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그의 굳건한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허락하게 되고, 그는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살레시오회 수도 사제이자 의사로서 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온통 톤즈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흔 여덟의 불꽃 같았던 삶은 2010년 1월14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가며 끝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 이태석 신부 인터뷰 中

















Yo-Yo Ma, Cello / Ennio Morricone, 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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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도다


요한복음 1, 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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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대전교구 천안성정동 성당


즐거운 성탄예술제


어른에서 아이들까지


우승팀인 성정동 구역 발표


어른들의 귀여운 공연


청중중의 한 아이


청년부 발표


성탄전야 미사


지휘자의 열성


성정동 성가대


미사는 끝나고


신자들은 오랜동안 성탄구유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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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5 <이스라엘의 귀향과 행복>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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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구 105번지의 위치한 '여사울 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이며 사도 이존창루도비꼬에 의해

충청도에서최초로 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제 1 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


제 2 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


제 3 처 예수님께서 첫 번째 넘어지심


제 4 처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만나심


제 5 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


제 6 처 베로니카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


제 7 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


제 8 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제 9 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제 10 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을 당하심


제 11 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


제 12 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제 13 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제 14 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충청도의 사도 이 존창(곤자가의 루도비꼬, 1756-1801)

이 단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존창은 충청도 여사울(지금의 충남 예산군 신앙면 신종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서울에 올라왔다가 김 범우 집에서 권 일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계명 그리고 신심생활을 배우고 곤자가의 루도비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권 일신에게 충청도 선교의 사명을 받고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친척을 입교시켰고, 이웃들을 영세시켰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가 있어 입교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그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양반층에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신앙의 말을 듣기 위해 먼곳에서도 사람들이 단체를 형성하여 이 존창의 집에 모여 들었고, 영세한 후에 돌아갔다. 이 단원은 선교활동과 함께 가성직 교계의 교회 시대에 충청도를 담당한 신부로서 신자들의 고백도 들었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1791년에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이 존창은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감옥에서 국왕에게 자신이 못된 종교에 떨어졌다고 후회한다는 배교서를 작성하여 올리고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기의 잘못을 통회하고 다시 신심생활을 시작하였다. 며칠 후에 그는 새로운 선교활동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홍산(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으로 이사갔다. 이 존창은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 영세시켜 이곳은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주 문모 신부가 귀국한 후에 이 존창은 신부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주 신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하였다.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오." 이 존창은 주 신부의 훈계를 항상 명심하고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1795년 말에 이 존창은 공주 감영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그의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 와 가석방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치욕적인 형벌로 죄수에게 곤장을 치는 형리의 일을 맡고 감시 속에서 매달 1일과 15일에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충청도의 사도는 신자의 본분을 공공연하게 완수하였다. 다른 교우들의 배교 소식을 들으면 과거의 자기와 같이 생각되어 마음 아파하였다.

1801년의 신유대박해가 일어나자 이 존창은 다시 2월 9일에 공주 감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최 창현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충청도 도민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공주 감영에서 처형하도록 지시하였다. 충청도의 사도는 그가 열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한 고향에서 1801년 2월 28일(음력)에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50여 세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러 갔을 때에 여섯 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굳게 붙었고 목에 실날 같은 흉터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이 존창은 한국교회 초기에 복음 전파에 공헌이 많았던 교회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들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집안이 바로

이 충청도의 사도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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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G.CONTI 18세기

루카 복음서제10장

25 :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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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성지

성 김대건 신부나고 자라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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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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