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주교좌 성당 남당성당, 초대 주교가 마테오 리치 신부>

<성당 내부와 제대>


나의 신앙의 길 6.후회 없는 견진성사

- 전 사베리아

유아세례를 제외하고 세례 받은 사람이 잇달아 견진성사를 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나는 그 견진성사를 받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이젠 옛말, 요즘은 5년이면 강산이 한번씩 변한다. 그렇다고 볼 때 이 사이 강산이 세 번은 변했음 즉하다.

나는 퇴직한 다음 견진성사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올해 6월 12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나는 견진성사를 받고 말았다.

사실 세례받기 전에 나는 입당신청서를 쓴 적이 있다. 당시 학생당원을 많이 발전시키는 조류가 일었고 학생들 속에서 입당신청서를 쓰는 붐이 일었다. 당규약을 학습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또 모범당원인 부모님들을 봤을 때 나는 공산당조직이 참으로 내가 선호할만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실망시킨 것은 당시 사회상의 부패현상보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신청서를 쓴다는 주위 친구들의 입당동기였다. 졸업분배 때 당원이라면 좋은 일자리에 추천받게 되고 따라서 인생의 통로가 활짝 열리게 된다.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자”는 구호는 선서할 때 맹세뿐이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입당 신청서를 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당동기로 그들이 입당한다고 하면 나중에 그들이 40, 50대가 되어 사회의 중견으로 나설 때 이 사회에 이기주의가 극대화 되지 않겠는가. 학생 때의 어린 생각이긴 하나 나는 이런 고민에 빠졌으며 그들과 한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하긴 당시 대학원생들의 학회에서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오는 거센 억압에도”하면서 ≪동지가≫를 부르던 나였으니까. 비록 나는 파격적인 열성분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 한자락에 정의의 길을 가고싶다는 소박한 소망만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세례를 받은 후 냉담자로 남았다가 다시 십자가 앞에 불리워 나가면서 나는 견진성사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는 그간 신약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언급했지만 나는 종교적 분위기에 깊이 들어간 사람이 아닌지라 더듬으면서 내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부족한 머리로 이리저리 더듬으면서 걷고 있는 나의 생각에 미흡한 점과 맹점들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내가 익숙히 알고 있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한번 예수님을 정리해 봤다. 어느 심리학자가 “예수는 인류 최초의 심리학자”라고 했고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한다. 나는 “예수님은 인류 최초의 무산계급 운동가”라고 부르고 싶다. 당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랑과 평화로 희망을 주면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세웠던 그 응집력. 그로 하여 집권층은 자신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마침내 사형에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만일 그때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투쟁의 길로 이끌어갔더라면 그 결과가 어찌되었을가? 당시 집권층은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예수님은 인류구원의 방법과 수단이 무장투쟁이 아니었기에 고스란히 자신을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예수님의 정신이 로마에서 전파되던 초창기 주로 무산계급과 노예들 속에서 전파되었다. 당시 지하종교, 사이비 종교로 지목받던 천주교가 어찌하여 수난의 250년을 겪으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세례를 받았을가? 단지 죽기보다 못한 최하층 삶이 지겨워서였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사랑과 위로를 갈구했고 평화를 갈구했을 것이며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보았을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수난의 년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마침내 합법화 되고 국교로 된다. 후에 게르만인들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망한 다음에는 당시 야만인으로 불리웠던 게르만인들을 이끌고 문명에로 나가면서 더욱 널리 전파되기도 하였다. 구라파 문명사에 굵은 한획을 긋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후 동로마제국도 망하고 휘황했던 로마제국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예수님의 정신은 오늘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예수님의 정신은 그토록 잔인하게 250년이나 박해했던 그 제국에서 꽃을 피웠으며 제국이 망했어도 예수님의 정신은 오늘까지 살아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역설은 없을 것이다.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무산계급의 운동”에 비할 때 예수님의 “무산계급 운동”의 방법과 수단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용서”를 바탕으로 하는 구원이었다. “용서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사랑보다 더 큰 승리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역사상의 거의 모든 조대가무력으로 바뀐다. 하지만조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인류의 영원불변의 추구가 사랑과 평화의 에덴동산이 아닐가. 그것이 또한 “계급과 국경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 교황이 우주비행사들과 대화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교황은 우주비행사들의 탐구정신과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한 다음 그들에게 우주에서 본 지구는 어떤 모습인가고 물었다.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에서 봤을 때 지구는 국경이 없는 인류가 사는 하나의 천체였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지구의 본 모습으로서 최초의 모습이고 최후의 모습일지 모른다.

사랑과 평화로 영원에로 닿는 그곳이 내 마음의 마지막 정토이고 혼탁한 이 세상에 아무리 부대껴도 힘들지 않는 동력이기도 하다. 나는 천당에 가고자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고 지옥이 두려워 믿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는 그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그분이 계시는 곳으로 가고싶을 뿐이다. 내 마음에 이것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마침내 나는 견진성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자각했다.

견진성사를 받던 날 나는 단정하게 차례입고 성당에 갔다. 이곳에서는 미사포를 쓰지 않는다. 미사포를 쓰게 된 이유와 쓰지 않게 된 이유가 있었고 또한 미사포 자체에 별 의미가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굳이 15년 만에 미사포까지 썼다. 쉽지 않게 결심한 견진성사였던 만큼 그날만은 순수해 보이고 싶었고 에돌았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날만은 정숙해보이고 싶었으며 성당에 나가는 내 모습 중 그날만은 제일 예쁜 모습으로 그분께 가고싶었다.

그날 북경교구의 여러 성당과 기도소들에서 190여명이 견진성사를 받게 되었는데 대부, 대모들까지 합하면 380여명, 거기에 축하하러 온 친구와 가족들까지 합하면 모두 500여명이 북경 남당에 모였다.

견진성사 의식이 끝나자 모두들 축하의 꽃다발을 전한다 사진을 찍는다 하면서 성당 마당은 명절의 분위기에 싸였다.

헌데 나만은 혼자였다. 대모도 성당에서 찾아줬던지라 의식이 끝나자 함께 온 일행한테로 가버렸다.나는 혼자 쓸쓸히 대문을 나서려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웃고 떠들며 성당 마당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견진성사가 저렇게 축하받을 일인가? 나는 어떻게 되어서인지 세례 받을 때에도 부모님이 출국한 틈을 탔어야 했었고 견진성사도 남편이 출국한 기회를 탔어야 했다. 지하공작도 아니고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결혼 전에 세례 받은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지면서 파혼의 변두리에 까지 갔었는데 이제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면 또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다. 그러면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일종 말 못할 회의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이 길을 꼭 가야하는가.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외로운 이 길을 꼭 가야한단 말인가.

그러다 나는 “내가 왜 혼자야. 그분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실터인데.”라고 자아위안 하면서 성당대문을 나섰다. 다행히 그날 저녁 친구수녀의 축하전화가 있어서 더없이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과 함께 그분의 뜻을 깨달아가면서 영원에로 향하는 이 길을 걷게 되어 더없이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말이지 후회 없는 견진성사다. (2011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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