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동당 천주당>


<동당 성당의 야경, 성당은 북경 최고의 보행자 거리인 왕푸징에 있다>


나의 신앙의 길 7. 두 사람이 모이니 예수님이 계시더이다

- 전 사베리아

나는 평신도들과 거의 사귀지 않았다. 그만큼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는 얘기도 되고 그만큼 소문이 날가 두려웠다는 말도 된다. 나는 신앙 안에서 신부님 몇 분과 수녀님 몇 분만 알고 있을 정도로 꽁꽁 숨었다.

헌데 나는 오늘 북경 東堂에 가서 조선족 신도 한명을 만났다. 갓 30에 나는 젊은 여자애였는데 동북사범대학 영문학과 졸업생으로서 東堂영문미사의 영문성가대였다. 이 카페에 글을 실은 것이 내가 평신도들과 사귀기로 마음을 연 첫 행보라면 이 젊은 친구를 만난 것이 두 번째 행보이다.

오늘 이 두 번째 행보는 참으로 거룩한 행보였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그것을 체험했다.

사실 南堂 신부님의 제의가 아니더라도 나는 은근히 북경에 조선족 천주교 신도들이 없나 살피고 있었다.

북경에서의 조선족 신도들은 참으로 외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분명 우리말 미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집전하는 미사라 우리는 참가할 수 없다. 농담절반 말하면 우리말 미사 참가권을 박탈당한 셈이다. 한국어에 능통한 중국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라면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 및 한국어를 사랑하는 중국 학생들도 참가할 수 있겠지만 외국인종교활동등록을 내고 외국인이 집전하는 미사에는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혹 조선족이 한국인들의 미사에 참가하더라도 나가라고 하지는 않지만 법이 그렇게 된 이상 우리는 한국인들의 미사에 폐를 끼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중국인들은 이 법을 잘 모른다. 북경에 갓 온 조선족들이 성당을 찾아가면 그들은 하나같이 동교민항의 한국인미사를 소개해준다. 그래서 한국인미사 시간에 동교민항성당에 가면 중국인이라서 불편함이 한 두 가지 아니다. 우선 정상적인 교리학습을 받을 수 없고 세례를 받을 수 없으며 간혹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 해도 교적에 들어갈 수 없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북경한인천주교공동체의 수녀님들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으며 조선족들의 처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족들은 중국어미사에 참가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자식을 따라 북경에 온 늙은이들은 한어를 몰라 고해성사도 못 볼 지경이란다.

이래저래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동병상련이라고 끼리끼리 모이기를 원하기 마련다. 南堂신부님도 이를 아셨기에 나한테 북경시조선족신도들을 모아주려고 건의했나 보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북경에 모여온 교우들을 지역별로 민족별로 소모임을 만들어주려고 하셨나 보다. 북경에서 중국인들은 교적관리를 하지 않으며 교무금도 내지 않는다. 아무 성당이나 옮겨가면서 편리 할대로 미사에 참가할 수 있고 영문미사, 프랑스어미사 아무 미사나 참가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중국어 미사에도 외국인들이 많이 온다. 때문에 조선족들한테 한국인들의 한국어 미사시간을 소개해줬던 것이다. 이처럼 교적관리를 엄격히 하지 않기에 작은 소모임을 조직하여 상대적인 인원수를 장악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북경의 현실이고 북경에서의 조선족신도들의 실황이다. 신앙에는 국경이 없지만 신앙인에게는 나라가 있었다. 중국공민으로서의 우리는 우선 이 나라의 법을 지켜야 했으며 또 그러는 것이 한국인들의 미사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는 북경의 조선족천주교신도들은 흩어져서 신도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믿는 둥 마는 둥 한해한해 보내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조선족들의 활발한 활동에 비하면 북경에서 조선족 천주교신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내가 외로웠던 만큼 누군가도 외로울 것이라 생각되어 조선족 신도를 찾기 시작했다. 연길성당의 리.데오도라수녀님의 소개로 오늘 나는 베르니까를 만났는데 그도 나와 똑같은 외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도 북경에 조선족신도들의 모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우리 둘은 비록 나이 차이가 났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둘이 마주 앉아 하는 첫마디가 이구동성으로 “지금 여기에 예수님도 계십니다.”였다.

내가 “우리 작은 모임하나 조직하면 좋지 않을가?”라고 허두를 떼니 베르니까는 너무도 좋아서 어린애처럼 흥분했다. 나는 그를 만날 때까지도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베르니까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무척 기뻤다. 전에 내가 혼자 북경에 조선족천주교신자들의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모든 것이 막막함 뿐이었는데 베르니까와 앉아 이리저리 이야기 하고보니 하나하나 방향이 잡혔다.

우리는 우선 명칭을 뭐라고 부를가 토론했다. “북경시조선족천주교교우회”라는 명칭보다 좀 더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은 세련된 이름을 달자고 해서 우리는 잠시 “하비에르회”로 이름 짓기로 하였다. 선교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꼬 하비에르(사베리오)”가 북경 주교성당에서 동상을 세울 만큼 중요시 하는 성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도 점차 성인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의 모임을 넓혀가자는 의지이기도 했다. 또 내 주보성인이라 작은 욕심을 부린 것도 있고.

우리는 북경의 조선족천주교신자들을 모으기로 했으며 동시에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다. 우리 둘은 웃으면서 공산당소조의 모식을 따라배우는 것이 어떠냐고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 참으로 생각이 비슷해서 좋았다. 우리는 공산당소조의 활동모식을 따라배워 세 사람 모여지면 정기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20명이 모여지면 정식으로 출범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물론 南堂이 지도적 지위에 있는지라 정식으로 출범 할 때는 南堂에서 신부님의 지도와 보호 하에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마음이 정화 될 수 있도록 성경공부도 하고 신부님을 모셔 특강도 조직하기로 하였다. 물론 장소는 사람이 적을 때는 베르니까의 집에서 시작하기로 했고 가끔 야외에서 산보삼아 조직 할 수도 있으며 사람이 많게 되면 東堂, 南堂, 北堂 윤번으로 성당의 도움도 받기로 했다. 우리는 주일마다 각각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 나가지만 한, 두 달에 한번정도 만나기로 약속했다. 영어전공인 베르니까는 만날 때마다 영어성가를 배워주기로 했고.

그리고 우리는조용히 천천히 차분히밀고나가기로 했다. 성급하면 극우를 범하거나 극좌를 범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실을 다지면서 천천히 밀고나가기로 했다. 뿐만아니라 여러 모임들의 활동을 참고하면서 보다 주밀한 계획을 세우며 조직하기로 했다.

둘이 앉아 생각을 모으니 용기도 더 낫을 뿐만 아니라 방법도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회칙을 정하고 회비를 정하고 하는 것은 먼 후일의 일이지만 우리는 오늘 두 사람이 모였다는 것만으로 “거족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 같았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할가.

오늘 우리는 고작 둘이 만났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시작할 뿐이다. 모든 것이 생각뿐이고 엉성하다. 하지만 둘이 만난 자체가 오늘 의미가 컸으며 밀알이 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만남에 예수님이 시종 함께 하고 있었음을 절실히 느꼈다는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우리는 서로 우리를 필요로 할 때가 되어서 우리 둘이 모이게 된 것일지 모른다며 감사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나는 속으로 우리들이 일정한 정도로 모일 때까지만 내가 조직해주고 그 다음은 뒤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적극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그릇의 크기를 잘 안다.너무 부족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너무 제한되어있다. 나는 내가 좀 더 지혜롭게 현실을 헤쳐갈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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