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진성당>

나의 신앙의 길 5. 15년 만의 고해성사

- 전 사베리아

마음을 온전히 열고 십자가 앞에 다시 나가던 날 나는 영성체를 함으로서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과 하나로 되고싶었다. 그러나 오래동한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던 나인지라 나에게는 고해성사가 더 시급한 일이였다.

세례를 받고 연길에서 딱 한번 고해성사를 해봤다. 처음에는 학생이라 학교의 눈치가 보여서 성당에 자주 못다녔고 후에는 직장의 눈치가 보여서 성당에 못나갔다. 어차피 성당에 자주 못나갈 바에야 고해성사를 받아선 뭘 하겠냐 하는 생각에 후에 부담 없이 성당에 나가게 될 때 고해성사 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는 사이 죄는 점점 커갔고 나중에는 아름차서 아예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한번 길게 고백하면 되겠지 하는 엽기적인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런데 그분과 하나로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보다 깨끗한 영혼으로 그분 앞에 나서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에 15년 만에 고해성사를 보기로 결심을 내렸다.

15년 전에 교리학습 때 보았던 ≪초대받은 당신≫과 ≪고해성사 길잡이≫, ≪천주교회와 고해성사≫ 등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한번 고해성사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나는 2, 3일간 지나온 15년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졌고 번호를 새겨가며 일일이 생각해낸 후 일요일 일찍 성당에 나갔다. 그때까지 가끔 나는 북경의 동교민항에 있는 한국인미사에 참가했었다. 우선 언어가 같아서 편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생각했던 모든 것을 첫째 둘째 하며 고백했는데 한국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이 용서받을 일이지만 관면혼배를 치르지 않았기에 조당에 걸려있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한국 신부님께서는 간단한 일이라면서 남편과 함께 성당에 가서 잠간 의식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종교라면 “종”자도 못 꺼내게 하는 성실한 당원인 남편더러 성당입구까지 오게 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고해성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지옥 같았다. 내가 중국의 조선족이고 또 15년 만에 찾아왔음을 감안하여 한국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위로해주면서 친절하게 해결책도 대주었건만 내 머리는 점점 공백상태로 되어버렸다. 한국 신부님은 마지막 까지 “예수님은 자매님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이렇게까지 이끌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미사에 참가하세요.”라고 거듭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미사시간에 “기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들 영성체를 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무슨 정신으로 미사에 참가했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름 못할 설음이 자꾸 치밀어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15년 만에 벼르고 별러서 큰 마음 먹고 겨우 고해실에 들어갔는데... 며칠이나 성찰하면서 단단히 준비했는데... 한국 신부님께서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붓 아버지한테서 구박받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는 나한테 세례를 준 엄신부님이 간절히 그리웠다. 엄신부님 앞에 가서 하소연하고 싶었다. 나는 또 친구수녀한테 전화를 걸어 서운함과 배신감을 전부 털어놓았다. 한창 나의 하소연을 듣던 친구는 다른 방법이 있을거라면서 중국 신부님을 찾아보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오다말고 그길로 남당(宣武門주교성당)을 찾아갔다. 남당은 일요일에 라틴어 미사, 중국어 미사 2차례, 영어 미사 2차례, 프랑스어 미사 등 미사가 6차례 있다보니 새벽부터 저녁까지 성당에 사람이 빌 새 없다. 마침 처음으로 성당에 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교우들이 있기에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혼인 관면을 받지 못한 경우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된다고 했다. 워낙 조당에 걸리면 고해성사가 이루어지지 않지만 중국과 어느 이슬람 국가 2개 나라는 국정에 근거하여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특별 사면을 받아 비신도와 결혼 시 관면혼배를 치르지 않더라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도 남편이 공산당 당원이라고 했다. 지어 한 교우의 남편은 공무원이란다. 물론 아직까지도 특별사면에 대한 서면적인 근거는 찾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 순간 내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사실 나의 남편은 불교철학에 심취되어 있는 사람이라 종교를 무턱대고 비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종교적 철학에 수긍할 뿐 그 어떤 규칙적인 신앙생활이나 형식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종교란 “종”자도 꺼내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저 내가 가끔 성당에 나가도록 허락한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며 한국에 갔을 때 명동성당관람을 순순히 따라줬고 또 나를 바티칸 관광까지 보내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더없이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니 아직 20년(남성은 여성들보다 직장생활 5년을 더 할 수 있다.) 직장생활이 남아있는 성실한 당원인 남편에게 성당에 가서 관면혼인 받자고 제기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더 할 데 없는 사치이다.

아무튼 나는 조당에 걸려있어도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어서 날듯이 기뻤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했던 모든 것을 중국어로 머릿속에 정리하였다. 하지만 기도문은 중국어로 미처 외우지 못한 상태라 고백의 기도와 통회의 기도는 그냥 우리 말로 하기로 했다.저 위에 계신 그 분은 다 알아들으시니까.

주말에는 고해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나는 평일 출근 전의 새벽시간을 선택하였다. 고해하러 가던 날 나는 5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성당이 지하철 입구 부근인지라 지하철이 훨씬 편하다. 새벽이라 지하철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문뜩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죄를 작게 하고 작은 죄를 없는 듯 덮어두려고 한다. 세속의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른 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도망가기에 급급한데 자신의 죄를 고백하겠다고 새벽부터 부대끼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도대체 뭐지? 이른바 신앙의 힘이라는 것인가?

15년만의 고해성사, 그것도 한국어와 중국어로 한국 신부님과 중국 신부님을 찾아 똑 같은 죄를 두 번이나 고백해야했던 길고긴 고해성사는 마침내 원만히 끝났다. 자신의 잘못한 일을 한번 고백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두 번이나 고백해야 했던 그때 내 마음은 참말이지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그때 마음 같아서는 다시는 티끌만한 죄도 짓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안되는 것이 인간이다.

고해성사를 끝내고 출근길에 오른 나는 지하철에서 내내 웃기만 하였다. 마음이 너무나 홀가분하여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오는 내가 참으로 여덟살짜리 아이처럼 너무 천진해 보였다. 신앙 앞에서 나는 정말 여덟살짜리 아이로 되어버린다. 평소 우리는 이미지 관리에 무척 신경을 쓴다. 후배들 앞에서, 선배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차림으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른다. 소위 품위와 체통을 지키느라고. 지어 술좌석에서는 젓가락 끝에도 정치가 있다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그분 앞에서 나는 마음 놓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아마 나는 그분이 나를 뼈 속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감출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고해성사의 깊은 의미를 읽고 고해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여러 성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은 후 나는 고해성사가 너무나 거룩해보였다.

그렇게 나는 조금이라도 더 깨끗한 영혼으로 그분께 다가가고 싶었다.(2011.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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