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당>
<중국 요녕성 심양 남관성당>
나의 신앙의 길 2. 벗―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 전 사베리아
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이다. 화려한 문구로 씌여진 시는 아니지만 소박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으며 반문구로 감정이 절제되고 있다.
우리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볼 때 정말 저런 사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헛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우정”이라면 “의리”와 같은 단어가 동반하면서 흔히들 ≪수호전≫의 량산박 영웅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의리”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 “우정”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를 서로 사양”할수 있는 그런 벗을 가진다는 것은 천운이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일반적으로 “우정”이라면 남성들 사이에만 존재하고 여성들 사이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만큼 여자들의 “의리”는 갈대처럼 흔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다시 말하면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를 서로 사양”할 수 있는 “그 사람”을 나는 가졌다. 그렇게 나를 자신보다 걱정해주는 친구,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나는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바로 권옥산(방지가 로마나)수녀님이다. 세속에 친구들이 많지만 신분이나 격에 어울려 대화가 통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지라 이익관계가 생기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며 관건적인 시각 구명대를 서로 양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하지만 권옥산 친구는 다르다. 우리는 함께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하나의 생활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주소조차 모르는 곳에 떨어져 있다해도 “친구”의 의미를 의심해본적 없으며 또한 기적처럼 만나게 되는 그런 끈끈한 운명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우정의 색깔이 바래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짙어만 간다. 늘 나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가 나는 고마울 뿐이다. 이러한 벗은 이 세상에 하나면 족하다.
먼저번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와 나는 1989년에 9월에 처음 만났다. 당시 신앙을 갈구했지만 종교라는 이 미지의 세계가 너무 낯설었던 나에게 그는 하얀 미소로 다가와 나의 눈을 뜨게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처음으로 성당에 갔었고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한번은 영성체를 할 때 내가 왜 나한테는 면병을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나도 봉헌을 했는데 왜 하느님은 공평하지 않게 나를 성체성사에 참여못하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그처럼 공백상태였다. 이러한 나에게 그 친구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었고 내 머리와 마음이 닫혀있을 때는 그냥 기도하면서 나를 지켜주었다.
1990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자신이 뜻을 둔 수녀의 길에 나섰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알지 못한 채 아주 총망히 헤여졌다. 나는 가끔 그 친구를 생각했지만 어디서 찾을지 방향이 없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호기심으로나마 교회나 성당 같은데 가끔씩 “구경”가는데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종교신앙 자유라는 정책을 떠나서 사람들한테 이해되지 않는 공간이라 저어되는 점이 한두가지 아니었다. 게다가 나를 이끌어주던 그 친구가 없으니 나는 끈 떨어진 연마냥 방향이 없었고 성당에 나갈 재미도 없었다. 참으로 어섯눈을 뜨기 시작할 때 이끌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 어떤 충동을 받아 미사에 참여하러 갔는데 그 친구가 성당에 있었다. 그 친구의 집이 팔도이고 또 졸업 후 어디로 갔을지도 모르던 상태라 성당에 만났을 때 우리 둘은 정말 놀랐고 기뻤다. 나는 그때에야 그 친구의 뜻이 수녀였음을 알았다.
그 친구는 수도생활을 준비하느라 연길성당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연길성당에는 노수녀님(지금 돌아가셨음) 한분 계셨고 조수녀님도 수련수녀로 있을 때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무슨 생각하고 성당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왜 그때 성당에 가서 너를 다시 만나게 되었지? 내가 왜 갔을가, 참”라고 내가 말하면 그 친구는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고. 하느님이 너를 이끌었던 것이야”라고 대답한다.
아무튼 그때의 재회로 하여 우리는 서로의 인생의 뜻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친구는 다시한번 신앙의 길에서의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교리를 역설하면서 나를 성당으로 자주 나오라고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인 나한테 나쁜 영향이 미칠가 두려워 그 친구는 조심스레 나한테 다가왔는데 교리가 필요 없이 그 친구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신앙교과서였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견증은 설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세례 받을 생각을 못했다. 그 후 그 친구가 연변을 떠나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자 성당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은 또다시 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가끔 편지를 보내와 안부를 물었다. 내가 석사공부를 할 때 그 친구는 어느 정도의 수련을 마치고 다시 연길성당으로 돌아왔다. 종신서원까지 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수녀였다. 그 친구가 있어서 나는 또다시 성당으로 나가게 되었고 마침내 석사과정을 마칠무렵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나와 그 친구는 늘 헤어져 있지만 늘 손잡고 있었다. 리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과정에 아주 드라마틱한 만남도 있었다.
1997년 석사를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 왔으며 여러 가지 핑계로 또 다시 신앙을 잊고 살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계속 연길성당에 있겠지 하면서 연락한번 못했다. 연길성당 전화번호도 모르니까. 그러다가 2003년 한국 부산으로 3개월간 연수가게 되었는데 부산일보에서 견학할 때 한 기자분의 연계로 내가 좋아하는 시인 이해인수녀님을 만나게 되었다. 약속한 시간 성베네딕도수녀원의 “해인글방”에서 나는 이해인수녀님을 만났다. 나와 이해인수녀님은 문학에 대해, 신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나의 친구가 연길성당에 수녀로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해인수녀님은 반색하면서 연길성당에 머문적이 있다고하셨다. 내가 “친구의 이름이 권옥산입니다”고 했더니 순간 이해인수녀님은 표정이 굳어져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권옥산수녀라구요?” 다시 물어보시기에 “예”하고 대답했더니 “지금 이 수녀원에 와있어요.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내가 굳어졌다. 나는 친구의 외형까지 그려가며 확인을 했다. 나와 이해인수녀님은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라 서로 마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참으로 우연이라도 그런 우연은 없을 것이다. 그건 하느님이 안배한 필연이었다. 그때 친구는 학교에서 수업중이라 수녀원에 없었다. 후에 이해인수녀님의 연계로 나와 친구는 부산에서 6년만에 극적인 상봉을 했고 나는 성베네딕도수녀원에 초대받아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녀원안의 성당에서 “대림의 밤” 기도모임에 참가하였다.
후에 들을라니 나와 친구의 드라마틱한 만남은 성베네딕도수녀원에서도 연길성당 수녀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이슈였다고 한다.
이렇게 나와 그 친구는 아무 연락 없이 살았어도, 지어 연락처도 모른 채 살았어도 약속 없이 만나게 되어있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늘 가까이에 있어야만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애지각에 떨어져있어도 언제나 서로를 마음에 새겨두고 진심으로축복해준다면 늘 옆에 있는 듯이 서로를 느끼게 되어있지 않을가.
내가 신앙에 게을리 할 때마다 그 친구는 알아채기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보내오는 엽서처럼 조용히 다가와 속삭인다. “잘 지내?”, “멋지게 인생을 가꿔”라는 축복과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뿐이다. “너 요즘 신앙에 게을리 하지 않니? 성당에는 나가?” 이런 재촉이 한마디 없다. 그러나 그러는 친구의 속삭임에 나는 정신이 버쩍 들군 한다.
다시다시 만날 때마다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늘 떨어져 있어도 늘 내 옆에 있는 듯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전에는 너무 보고싶어서 내가 한달음에 심양천주교신학원에 찾아가서 만나본적도 있다. 수녀는 함부로 공동체를 이탈할 수 없으니까. 올 때 기차표를 끊지 못해 비행기를 타고오면서까지 연길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신앙에 대한 나의 마음이 점점 열리자 친구는 나한테 본격적인 이론지도를 해주고있다.
견진성사를 받던 날 친구가 나한테 하는 첫마디가 “너 견진성사를 받아서 시름놨다.”였다. 그 사이 십여년간 나를 지켜보면서 빙빙 에돌아가는 내가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축하 한다”는 말보다 “시름놨다”는 말을 먼저 할가? 나는 그 사이 줄곧 내 손을 잡고 나의 옆을 지켜왔던 친구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때문에 사이좋은 친구들도 몇 년 만나지 않으면 그 사이가 멀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헤여져 있으나 마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마음이 더 깊어지는 이러한 믿음과 우정. 그저 감사할 뿐이다.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할 수 있는 친구, 나는 그 사람을 가져서 너무 행복하다. 친구야,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2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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