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주교좌 남당성당>
나의 신앙의길 1. 무엇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
- 전 사베리아
얼마전에 북경에서 교육자로 계셨던 한분의 유작출판기념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은 원래 중국 어느 조선족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셨는데 퇴직후 성경을 읽으셨고 기독교 신자로 되어 돌아가셨으며 기독교장례식을 치뤘었다.
물론 종교는 달랐지만 그분의 작품속에는 정신수련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그날 출판기념식에는 북경의 출판사, 대학교, 사회과학원, 연변대학 동문회, 북경애심여성회 등 직장과 단체의 80여명이 참석하였다.
그날 어찌하다보니 우리 또래의 여자박사 3명이 나란히 한식탁에 앉게 되었는데 그중 한명이 불교를 믿고 한명이 기독교를 믿었으며 나는 천주교신자였다. 그날 모임에 참석한 여자 박사 3명이 100% 종교신앙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중국의 교육환경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종교신앙을 가진다는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그날 석사를 졸업하고 북경에 분배받아 온지 얼마 안되는 후배가 종교를 신앙하는 우리 세 여자 박사가 신기했던지 “선생님들은 어찌하여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까”고 물었다. 우리는 웃고 말았다. 신앙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신앙이 활발하여 어릴 때부터 가정의 영향으로 믿게 되는 그런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이곳에서 종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장님이 막대기를 짚고 한걸음 한걸음 더듬으면서 나가는 격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더듬어 나갔다. 때문에 나의 신앙의 길은 평탄지 않았고 또 지금도 늘 첫발작을 내디딘 기분이다.
나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로부터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중시절(고등학교) 나는 무한한 신비로 가득한 이 세상이 신기했고 우주의 섭리가 참으로 놀라왔다. 모든 것이 우연인듯 하면서 필연인 그 자체가 너무나도 두려웠고 그로하여 “절대적인 진리”, “영원함”, “절대자” 등에 대해 사색하게 되었다. 그때 일기책을 전부 위와 같은 단어로 도배했는데 내가 썼던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읽었을 때 그 뜻을 내가 알수 없다. 난해시라 해도 이렇게 난해할수 없고 추상파라 해도 이렇게 추상적일수가 없다.
고중시절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독교 교회당이 있었다. 나는 기독교가 뭔지 잘 몰랐고 천주교와의 차이는 더더욱 몰랐다. 다만 마루틴 루테르가 종교개혁을 한 신교라는 정도만 알고있었을뿐이다. 하지만 교회당 첩탑의 십자가만 보면 그냥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상한 거룩함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하여 나는 교회당 문을 떼고 들어섰으며 젊은 신도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가운데 몇 번 예배에 참가했었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거룩함은 보이지 않고 그냥 말끝마다 너도나도 뒤질세라 “아멘”을 높이 외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 상상속의 종교는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과 평화로움이 감돌고 환희와 고요함이 깃들며 사람들 사이의 친절함과 지켜야 할 예의법도가 있는 그런 존재였는데 나는 교회에서 축제의 분위기만 느꼈을 뿐 종교의 정숙함과 신성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몇 번 교회에 나간 것이 부모님들에게 전해져 나는 많이 혼났으며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몇 번의 예배에서 나는 어렴풋이 십자가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왜 오셨고 왜 돌아가셨는지 몰랐다.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연관된 단어는 “예수쟁이”(기독교 신도를 비하하여 부른것임)뿐이였고 기독교(천주교)는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를 불에 태워죽이는 무지의 조직이며 “십자군 동정”을 진행한 폭력적인 조직이라는 것 뿐이였다. 거기에 “정신적 아편”이고… 이것이 내가 받은 교육이다. 지금 같은 다문화 시대, 열린 시대에도 이곳에서는 종교신앙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인데 1980년대 말 종교는 우리에게 너무나 멀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을 겪어온 부모님(두분 모두 당원)들은 “종교”란 말만 들어도 두려워했으며 아예 입밖에 내지도 못하게 하였다.
퍽 후에야 안 일이지만 할아버지께서 천주교신자였다고 한다. 일본에 유학하셨고 연변에서 학교를 세우면서 교육자로 일생을 마쳤던 할아버지는 10년 내란 시기 운동때마다 불리워나갔지만 독실한 신자로서 민분이 없었기에 별로 투쟁을 맞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향으로 아버지 형제들은 성분이 나빠 입당할 수 없었다. 다행이 아버지는 성분이 괜찮은 어머니를 만났고 또 남들보다 더 노력하였기에 입당하였지만 아버지 형제들은 입당하려는 소망을 모두 이루지 못했다.
집안의 그런 아픔으로 하여 부모님이 더욱 나를 말렸는지 모른다.
1989년 9월부터 1990년 7월까지 나는 대학입학전의 마지막 일년을 연길성당의 수녀이며 지금 심양천주교신학원에서 공부중인 권옥산(방지가 로마나)수녀님과 한책상에서 보내게 되었다. 휴식시간 우리는 신앙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천주교를 믿는다고 했으며 기독교와의 다른 점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신앙을 갈구하던 나에게 권옥산 친구는 단비를 내려주었고 나는 마침내 그 친구를 따라 연길성당으로 “구경”가게 되였다. 이것이 내가 천주교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보았다.
1989년 10월 15일, 확건하기전의 연길성당안은 사람들로 꽉 찼으며 뭐라 신분을 알수 없는, 여러 가지 색상의 환한 복식을 한 남성들이 제단우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교님과 여러곳의 신부님들이 오셨던것 같다. 그날 중국 조선족의 첫 신부님이신 엄태준(아브라함. 현재 훈춘성당 주임 신부님임.)신부님의 사제서품식이 있었다. 내가 전에 본적도 상상한적도 없는 엄숙한 의식이였고 사제서품 받은 엄신부님은 눈부시게 환했다. 그날 엄신부님은 내 상상속의 예수님이였고, 성당이였고, 종교였으며 신앙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신성하고 화려했다. 그날부터 나는 엄신부님의 “팬”이 되었다. 당시 열아홉살인 우리 여자애들은 주윤발이나 류덕화를 좋아했는데 나는 영화배우보다 엄신부님이 더 멋있었고 존경스러웠으며 자랑스러웠고 또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팬”이란 단어를 알고있지만 그때는 한국과의 교제도 빈번하지 않았던 터라 “팬”이란 단어도 없었다. 그냥 다른 여자애들이 영화배우나 가수를 좋아했다면 나는 영화배우나 가수보다 엄신부님을 좋아했다고 소박하게 말하는것이 더 타당할것 같다. 엄신부님이 사제서품 받던 날부터 즉 엄신부님이 신부생애를 시작한 날부터 내가 “팬”으로 되었으니 엄신부님의 신부생애와 나의 “팬”으로의 력사가 시간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엄신부님은 지금도 내가 팬이라는 것을 모르신다. 1996년 성탄절, 나는 연길성당에서 엄신부님한테서 세례를 받았다.
사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은 도대체 무엇인가? 영원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상대적인 우리의 삶 속에 정말로 절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구도의 길이 신앙의 길에 나서게 하였으며 권옥산 수녀님의 도움과 엄신부님의 사제서품식에서 봤던 그런 정숙하고 신성함이 나로 하여금 천주교의 길에 들어서게 한것같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머리로 해석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것이라고 본다.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는 평화로움과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마지막 정토, 내 영적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그러한 영원함과 그에 대한 추구가 신앙이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 어떤 개념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면서 더듬어가는 내 마음의 길이였다.(2011.6. )
'CATHOL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신앙고백 3 (0) | 2011.07.14 |
---|---|
어느 신앙고백 2 (0) | 2011.07.14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4) | 2011.07.03 |
하늘에서 내려온 빵 (0) | 2011.06.26 |
민들레 영토 (3) | 2011.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