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주성당>

나의 신앙의 길 3. 내 신앙에 불을 놓아

- 전 사베리아

나는 비록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세례받기전의 그 짧은 교리학습수준에 머무른 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업과 생활환경의 영향도 있지만 내 자신이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번의 계기로 하여 실날 같았던 내 신앙의 심지에 불이 달렸다.

몇 달 전에 나는 누구 장례식에 갔었다. 남의 경사에는 참석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례식에 부름 받으면 난 종래로 빠지지 않는다. 궂은 일을 당한 유가족에게 나의 작은 위로를 드림과 아울러 고인의 생전 업적을 되새기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보다 후회 없이 나중에 저 날을 맞이할가 사색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세 분 교수님을 내 차로 모시게 되었다. 서로들 무거운 기분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의논했고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다시한번 느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교수님이 “지옥과 천당”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아마 내 차안에 십자고상이 걸려있는걸 보시고 종교적인 해답을 원하셨나 보다.

그 교수님은 역사, 사회학을 전공하신 분인데 일찍 미국 하버드대학에 공부 겸 교환교수로 가신 적이 있다. 한번은 그 교수님이 미국의 한 학술회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학술회에 참가자중 어떤 분이 교수님더러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권하더란다. 그때 교수님께서 “예수가 전파되지 않은 저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착한 어린이와 예수를 믿으나 살인까지 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천당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느냐? 내가 설복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믿으러 가겠다”고 하셨단다. 그러자 전도를 하던 분은 말문이 막혔고 교수님은 “나는 차라리 그 착한 아이와 함께 지옥에 갈지언정 그 살인자와 함께 천당에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대답하셨단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해답을 드릴 수 없었다. 꼭 나의 해답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데 나는 대답 못드려 미안했고 대답할 수 없어서 나한테 화가 났다. 교수님이 분명 뭔가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았는데 나는 똑 부러지게 해답을 드릴수가 없었다. 나 자신도 확답을 몰랐으니까. 나는 그 교수님이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보다 내가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음이 못내 마음 아팠다. 그러면서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 나의 주님께 많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사실 “지옥과 천당”에 대한 물음은 종교의 시작이자 끝이며 인간의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싶은 문제이자 최초의 문제, 궁극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몇 천 년 논의된 이 문제는 어찌 보면 오늘에 와서 가장 유치한 문제이기도 하다. 중세기 이전이라면 혹시 지붕 우에 사닥다리를 놓고 천당에 올라가보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예부흥도 지났고 계몽기도 지났고, 근현대도 지나 당대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요 하는 이때, 우주 탐험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이때에도 우주 비행사에게 하늘에 올라가니 천당의 하느님의 옥좌가 보이더냐고 묻는다면 그 이상 유치한 물음은 없을 것이다. 우주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유물론의 시각에서 천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것도 편협한 생각이며 따라서 천당에 가느냐 못가느냐를 단순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이분법으로, 흑백의 논리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유치한 발상이 아닐가 싶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난발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내 주위에.

하지만 나 역시 보다 정확한 해답을 몰랐다. 소위 종교를 신앙한다는 사람이 이 조차 잘 알지 못하여 타인을 설복할 수 없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런 물음을 뭐라고 탓할 수 있겠는가.

그 사이 마음속 깊은 곳에 미약한 불씨로 감춰두었던 내 신앙의 심지에 구도의 불이 달렸다. 나는 전에 읽었던 교리책을 펼쳐들었다. 뭔가 연필로 줄도 긋고 적어넣기도 한듯 싶었는데 시험공부 대하듯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대했기에 암송은 한듯 싶으나 아무것도 마음에 남지 않았다. 나는 성경을 펼쳐들었다. 20년 전 선물 받은 성경인데 연길에서 북경으로, 북경에서도 몇 번 이사를 하면서 이사할 때마다 고이 모셔두었을 뿐 읽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몇 페이지 읽고는 덮어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두툼한 성경을 앞에 놓고 보니 어디서 “지옥과 천당”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였다. 단숨에 읽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바 하루 밤 베고 자면 머릿속에 입력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발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나는 신앙 앞에서 두서를 찾지 못하는 여덟살짜리 초등생이 되고 말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친구 수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수업중이여서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 연락번호를 뒤져서 보다 정확한 해답을 줄만한 사람을 찾았다. 마침 얼마전부터 알게 된 한 신부님의 연락번호가 있는지라 나는 그 교수님이 물었던 내용을 신부님한테 메일로 보냈다. 처음에 나는 주저심이 들었다. 믿는다는 사람이 아직도 그런 유치한 물음을 묻는다고 신부님께서 어이없어 하시지나 않으실가?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나절로도 너무 어이없는 일이라 자괴감만큼 주저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들 어떠하리 내가 알고싶은데. 그리고 나는 신앙 앞에서 지금 여덟살이 아닌가. 또한 공자의 말을 빌면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인데”. 나는 이렇게 자아위안 하면서 신부님께 메일을 보냈다. 해답을 기다리는 한편 나는 중국천주교공식사이트를 찾아냈고 거기서도 해답을 찾아보았다.

신부님한테서도 답장이 왔고 사이트에서도 해답을 찾았다.

그 교수님한테 전도한 사람은 기독교였나 보다. 종교개혁을 할 때 마르틴 루텐이 희랍문으로 된 일부 내용을 부정하면서 기독교에는 “연옥”이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믿으면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분법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예수님을 모르더라도 순수한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착하게 살면 천당에 갈수 있으나 예수님을 믿더라도 실천이 어긋나면 나중에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고 하니 교수님 물음에는 해답이 충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천당”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경지로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이며 불가 묘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에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똑 같이 아름다운 곳에 똑 같은 식탁 두 개 있고 똑같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헌데 숟가락이 팔의 길이만큼 길었다. 두 상에 갈라 앉은 사람들 중 한상에 앉은 사람들은 음식을 담아 제 입에 넣느라 분주한데 숟가락이 길어서 도저히 입에 닿지 않았다. 그리하여 음식은 음식대로 지저분하게 널리게 되었으나 한입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 상의 사람들은 숟가락이 닿는 곳의 상대방에게 음식을 떠먹여 줌으로서 서로들 즐겁게 식사를 했다. 이것이 바로 지옥과 천당의 차이란다.

나는 더 이상 피동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내 주위에는 종교를 이해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또한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하나의 지구촌에서 다문화 시대를 살면서 좀 더 대화적이고 화합으로 나가려면 상대방을 알고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가? 하지만 아직도 흑백의 논리로 타문화를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내 생활권에서. 나는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한테 위로의 한마디 전해줄 수 있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한테는 희망과 격려의 한마디 전해줄 수 있으며 천하를 얻을 것 같이 열망에 가득 찬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겸허를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석박사, 교수들한테는 다문화 차원에서 다른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 신앙을 학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신앙 앞에서 나는 지금 금방 문장을 배우기 시작한 여덟살이다. 내가 이 카페에 가입한 목적은 여러 사람들의 실천양상을 보면서 천주교에 대해 좀 더 피부 적으로 느끼고 신도로서의 올바른 삶을 배우며 이 카페에서나마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이다.

내 신앙에 불을 놓아 피보다 진한 꽃으로 피고 싶다.(20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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