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강인하고 아름다운 향백나무 - '수목의 왕' 위용을 떨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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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강인하고 아름다운 향백나무 - '수목의 왕' 위용을 떨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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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석류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느새
살짝 삐져나오는
이 붉은 그리움은
제 탓이 아니에요
푸름으로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가슴
이젠 부끄러워도 할 수 없네요
아직은
시고 떫은 채로
그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는
이 한 번의 사랑을
부디 아름답다고
말해주어요.
이해인 수녀의 시 '석류의 말'이다. 이 시처럼 석류는 낭만적 과실인 것 같다. 석류는 예로부터 생명의 과일, 여성의 과일로 불리운다. 무덥고 오랜 장마에도 유독 석류만은 싱싱하고 힘차게 아름다운 꽃을 잘 피운다.
석류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서북부에 자생하던 식물로 유럽으로 오래 전에 건너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과실이 됐다. 석류는 이집트에서도 흔하고 귀한 과일이었다. 이집트에서는 B.C. 2000년께 이미 재배했고 신성하게 생각했던 식물이다.
석류의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가을에 탐스럽게 잘 익은 열매에 있다. 새빨간 씨가 달고 신 즙이 있는 껍질에 싸여 빽빽하게 박혀 있다. 석류 씨는 구약의 솔로몬 시대부터 갈증을 해소하는 청량음료를 만드는 데 널리 쓰였다. 석류 열매는 촘촘히 박힌 보석 주머니 같다고해서 사금대(沙金袋)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달려있는 기간이 4~5개월이나 된다. 봄철 잎이 돋을 때는 붉은 빛을 띠고 여름에 꽃이 피어 가을에 붉게 익는다. 오늘날에도 과일즙으로는 술을 빚기도 하고, 씨는 말려서 과자를 만든다. 덜 익은 열매 껍질은 빨간색 염료로 쓰기도 한다.
모세는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각 지파에서 한명씩 뽑아서 정탐꾼을 보냈다(민수 13, 1-24). 에스콜 골짜기에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둘이서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가지고 돌아왔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내려 주신, 축복한 일곱가지 식물 중 하나가 석류다.
성경에서도 석류는 성스러운 식물로 등장한다. 제사장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에폿에 딸린 겉옷을 만들때 자락 둘레에는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로 석류들을 만들어 달고, 석류 사이사이에는 돌아가며 금방울을 달도록 했다. 그리고겉옷 자락을 돌아가며 금방울 하나에 석류 하나, 또 금방울 하나에 석류 하나씩을 달았다(탈출 28, 31-38). 그래서 아론이 예식을 거행할 때 이 옷을 입어 성소에 들어가는데 방울 소리가 울려 죽지 않으리라고 한 것을 보아도 이스라엘에서는 석류를 성스런 나무로 생각했다.
석류는 아름다운 여인의 볼에 비유되기도 하고(아가 4, 3), 석류의 많은 씨는 풍요를 상징하며(아가 4, 13), 달콤한 즙은 사랑의 꿀(아가 8, 2)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석류가 가장 많이 쓰인 곳은 건축 장식이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과 왕궁장식에 석류나무를 사용했다(2열왕 25, 17; 2역대 4, 13). 석류 열매의 풍작과 흉작은 하느님의 복과 재앙을 상징해 석류 열매에 비유했다(하까 2, 19).
석류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석류는 터키, 중국, 그리스 등지에서는 다산을 뜻하는 과일로 자손의 번영을 의미하기에 결혼축하 선물로 보내는 풍습이 있다. 터키에서는 결혼한 신부가 잘 익은 석류를 땅에 던져서 쏟아지는 씨의 수가 장차 낳을 자식의 숫자를 나타낸다고 믿는 풍속도 있다.
이처럼 옛날부터 석류는 축복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석류를 심으면 자손이 흥하고 부귀가 늘 함께한다고 해 양지바른 정원에 즐겨 심었다. 또 잘 익은 석류에서 씨앗이 튀어나오는 모양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류의 꽃말은'바보' 또는 '우둔함'이라 하니 이래저래 재미있는 나무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가난한 이들의 식량 쥐엄나무 열매 - 탕자의 허기진 배를 채운 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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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평화와 안정의 무화과 나무 - 시원한 그늘 주는 '안식처'
예수님은 어느 날 베싸이다 출신인 필립보를 만나 제자로 부르신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필립보는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간다. "나타나엘, 나는 우리가 기다리던 구세주를 만났네. 나자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이야."
"나자렛? 나자렛에서 뭐 신통한 게 나올 수 있겠어?"
예수님은 나타나엘이 가까이오자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다."
나타나엘은 놀라며 말했다."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필립보가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당신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깜작 놀라며 말했다."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 1,43-51).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방과 같이 사용하는 장소였다. 이스라엘 무화과 나무는 위보다 옆으로 퍼지는 나무로 가지가 많다. 우리나라 느티나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늘이 많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조용히 앉아 명상하고 기도하곤 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나무 아래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셨던 것이다.
꽃이 없다고 해 무화과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무화과 나무에도 꽃은 핀다. 무화과 나무 원산지는 서남아시아, 지중해 연안이다. 무화과는 주로 꺾꽂이로 번식된다. 쉽게 번식되지만 추위에 약해 재배지가 한정돼 있다.
옛날부터 무화과 나무는 이집트, 팔레스티나, 시리아 등지에서 널리 재배됐다. 특히 잎이 커서 큰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런 특징 때문에 무화과 나무는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더운 지방에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안식처는 또 없을 것이다.
열매를 먹어 보면 모래알 같은 것이 씹히는데, 이것이 진짜 열매다. 봄에 새잎이 퍼지면 녹색의 작은 열매가 생긴다. 그후 열매가 커져서 8~9월에는 연하고 껍질이 잘 벗겨지며 맛이 매우 단 과일이 된다. 늦가을까지 가지끝에 열매가 계속 달려서 덜 익은 상태로 겨울을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음해 봄에 다시 커지는 것도 있기에 먹을 만하다.
이런 무화과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 됐다. 무화과는 날것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건조시켜서 보존식량으로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무화과 열매는 소화를 촉진하고 변비에는 특효라고 해서 약으로도 요긴하게 쓰인다.
무화과 열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식량의 하나였다. 특히 다리의 힘을 증가시켜준다고 해서 운동경기를 하는 선수는 무화과 외에는 다른 것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무화과는 수출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그래도 밀수출이 끊이지 않자 밀고자 제도까지 만들어 단속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무화과가 산업과수의 하나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치부를 가리는 것으로 등장한다(창세기 3, 6-7). 무화과 나무는 성경시대에는 집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나무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리 유포돼 있었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를 맺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특성으로 포도나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느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이용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위험성을 경고하셨다 (루카 13,6-9). 이것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생활 중에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는 안전한 생활과 훌륭한 삶을 상징한다. 즉 사람이 무화과 나무 아래 산다는 것은 안정, 기쁨, 평화 그리고 번영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를 키우려면 수년간 시간과 힘든 노동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승리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 - 제대를 밝히는 올리브 기름
몇년전, 한 방송국에서 올림픽 특집으로 퀴즈를 냈다.
"우리나라 첫번째 금메달을 받은 선수의 머리에 씌워진 관은 무슨 나무로 만든 관일까요?"
방송국에서는 '월계수 나무'가 정답이라고 발표했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올림픽 우승자의 머리에 씌워 주는 관이 월계수가 아닌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든 것이라고 지적하는 전화가 쇄도했다.
고대 그리스는 올림픽 경기 우승자에게 올리브 나무관을 수여했다. 이에 관한 그리스 신화가 있다. 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여신 '아테네'가 싸웠다. 포세이돈은 평화와 다산의 상징인 군마를 만들었고, 아테네는 힘, 용기를 상징하는 올리브를 만들었다. 마침내 제우스는 여신 아테네에게 승리를 선언했다.
그래서 올리브는 평화, 승리, 자유, 질서, 희망의 상징이 됐다. 일반적으로 아테네의 경제력은 올리브 재배로 좌우했다. 그래서 외적이 공격해오면 우선 올리브 농장부터 짓밟았다고 한다. 이것도 올리브가 평화와 결부돼 있는 원인이 된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문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걸어놓는 풍속이 있다. 그러면 악마가 침범하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전의 개신교 성경은 "노아 홍수가 끝난 후 비둘기가 감람나무 이파리를 물고 왔다"고 기록했다(창세 8,11). 그러나 이것은 옳은 번역은 아니다. 한문 성경이 올리브를 감람으로 오역한 것을 그대로 감람나무로 국어로 번역해서 생긴 오류였다. 사실 올리브와 감람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고 식물학상으로 엄연히 다른 나무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감람나무를 '올리브 나무'로 고쳤다.
올리브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재배했다. 근래에는 1만년 전에도 올리브 나무가 지구에 있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중요 농산물인 동시에 교역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세는 올리브 재배자에게는 병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또 솔로몬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건축재를 구할 때에 올리브유로 그 대가를 지불했다.
올리브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로, 그 열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빵과 함께 즐겨 먹는다. 일반적으로 올리브는 생장이 느린 상록수로서 심은 지 10~15년 뒤에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일단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면 나무 수명은 무척 길다. 그래서 올리브는 수백 년씩 수확할 수 있는 경제성이 높은 나무다.
올리브 나무는 목재 성질이 굳어서 건축재보다 장식용 조각재로 많이 쓰인다. 올리브 나무는 무늬도 곱고 향기가 있어서 솔로몬이 성전 건축 때 지성소의 입구 문짝과 문설주, 그리고 언약궤를 지키는 그룹을 조각했다(1열왕 6,23-33). 올리브기름은 식용, 의료용, 화장품, 공업용 등 용도가 다양하게 쓰인다.
특히 올리브기름은 종교의식에 중요하게 사용했다. 모세가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성별할 때 사용한 것도 올리브기름이었다(탈출 40,13-19). 또한 제단에 불을 밝힐 때에도 올리브기름을 사용했다(출애 27,20). 이슬람교도가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그리스도교 지역으로의 올리브기름 반출을 막자, 그리스도교는 올리브 기름대신에 양초를 사용해 제단에 불을 밝히게 됐다.
올리브는 막대기로 나무를 두들겨서 떨어진 열매를 주워 수확했다. 그런데 올리브를 수확할 때에 한번 지나간 가지는 다시 손대지 말라고 율법에 규정했다(신명 24,20). 남은 것은 가난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라고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다음 해 감을 수확할 때까지 까치 몫으로 나무 꼭대기에 달린 감 몇개를 남겨 놓은 정겨운 모습이 떠오른다. 올리브가 사랑과 평화의 대명사로 불린 만한 대목이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평화와 축복의 상징인 포도 - 예수가 흘리신 피, 포도주로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의인이며, 흠 없는 사람이었던 노아가 술에서 깨어 노발대발하며 작은 아들 후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 즉, 셈과 함, 야벳이 있었다.
어느 날 함은 장막 안에서 아버지 노아가 술에 흠뻑 취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밖으로 나와 함은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 흉을 보았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 뒷걸음쳐 들어가 옷을 입혔다. 노아는 자신의 추태를 떠벌린 함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렸다(창세 9,18-27 참조).
노아는 성경에서 포도를 처음으로 재배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노아가 마셨던 술도 포도주로 기록돼 있다.
포도는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과일 중 하나이다. 포도는 유럽이 주산지이지만 원산지는 본래 아시아 서부, 카스피해 지역 코카사스 등지로 알려져 있다.
포도 재배와 포도주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그리스 북쪽에서 기원전 45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포도씨가 발견됐다. 또 기원전 2500년대 고대 이집트 왕조 벽화에서 포도주 제조기록도 발견됐다.
이처럼 인류가 포도를 재배해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포도가 귀한 약재로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고, 자양강장과 허기나 감기에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초기에 비로소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경에는 포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포도는 포도나무, 포도원, 포도주, 건포도, 포도즙 등 다양한 표현으로 등장하는 귀중한 식물이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를 평화와 축복 그리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구약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가나안)을 포도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포도는 가나안 땅에서 밀과 보리, 무화과와 석류, 올리브 나무와 대추야자와 함께 축복받은 7가지 식물 중 하나였다(신명 8,7-10 참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 한송이가 달린 가지를 막대 사이에 꿰어서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민수 13, 23 참조). 그만큼 포도가 크다는 것을 과장한 것인데, 당시 포도는 자두만한 크기로 열렸다고 하니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다. 사실 오늘날 팔레스티나 지역 포도송이는 대단히 크게 열린다.
또한 포도는 하느님 자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도를 수확할 때 남김없이 따지 않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줍지 못하도록 했다. 가지에 남은 포도와 땅에 떨어진 포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몸 붙여 사는 외국인 몫이 되도록 했다(레위 19,10 참조).
신약 성경에서 하느님은 '포도원의 주인'이라 하고, 예수님은 '포도원의 참 포도나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기도 했다(요한 15,1-3 참조).
예수님 시대에는 신 포도주에 물을 타서 노동자의 음료수로 만들어 먹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로마병사가 드린 신 포도주가 바로 당시 노동자들이 마시던 음료였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첫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A. D 280~337년)는 포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포도의 가장 큰 상징은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포도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행한 최후 만찬에서 포도주는 언약의 피로 상징됐다(마태 26, 26-28 참조).
오늘날에도 미사주는 포도주로 사용되고 있으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포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과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포도는 그리스도교의 문장처럼 성화나 교회 건축물, 제의 등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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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직전의 당당한 모습>
安重根이 入敎후 그의 신앙활동에 대하여 그는 옥중의 자서전 안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경문을 강습도 받고 道理를 토론도하기 여러 달을 지나, 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가고 달이가서 몇 해를 지났다.
그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홍신부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安重根의 장황한 교리해설 연설문은 천주교회의 기본교리인 1. 천주존재, 2. 상선벌악, 3. 영혼불멸, 4. 강생구속 등의 교리를 참으로 쉽고 일목요연하게 해설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이 편하게 알아듣기 쉽게 비유와 동양적 故事를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安重根은 비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의 열의와 전교 활동이 청계동 시절에만 보였던 일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獨立戰爭 時에도, 또한 殉國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하곤 하였다. 그는 독립전쟁 중, 함경북도 慶興부근과 新阿山 부근에서 전개되었던 제 2 차 전투에서 약 10명의 일본 군인들과 상인들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人道主義와 國際 公法에 따라 이들을 석방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노출됨으로써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장마비가 거침없이 퍼붓는 상황에서 일본군에 쫓겨 산속을 헤매면서 열 이틀 동안 단 두 끼의 밥을 얻어먹는 극도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동료들에게 "전일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하는 구원을 받을 것"을 권면하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가톨릭의 주요교리들을 설명한 다음, 그들의 동의에 따라 교회의 규칙대로 洗禮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水野吉 太郞에게도 신앙을 가질 것을 권함으로써 죽기 직전까지 전교 활동을 하였다.
安重根이 강한 信仰心을 갖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몇 가지의 단편적인 사례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례 받은 이후의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의 신앙적 특성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트크를 중심으로 연추,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의 망명생활과, 유격전 독립전쟁 중에도 매일 아침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정도로 기도생활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공판 과정에서 통역을 담당하였던 園木末喜가 1910년 3월 15일 統監府 總務長官 石塚英臧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처형을 앞둔 安義士가 洪 빌렘 신부에게 고백한 내용으로 1908년 겨울 한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 安義士는 이상한 체험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安도마는 전에 露領에서 義兵에 투신한 시기 당초의 奇夢이라 하여 말하기를, 安도마가 진남포 古家의 自室에 있었는데, 홀연히 찬연한 무지개가 九天에 걸렸는데, 그 빛나는 한가닥 빛이(閃閃한 一端)이 점차 교자에게 접근하면서 바야흐로 頭上을 晛射하려는 찰나에 다시 출현한 성모 마리아가 그 묘한 纖手를 펴서 안도마의 胸間을 위무하면서, 놀라지 말라,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분부와 함께 다시 황홀하게 失現하심으로 추모하는 고민에 뜻밖에 잠을 깨자 바로 이것이 南柯의 一夢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다 듣고 나(洪 빌렘 신부를 지칭함)는 마치 일종의 신비에 접촉한 자와 같이 황홀히 명상하기를 약간 길게 하다가 문득 그것은 신념이 그렇게 시키는 바 무엇인가의 前兆였을 것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安義士는 동지 11명을 소집하여 「斷指 同盟」을 했다.
安重根이 기도 생활에 어느 정도나 충실하였는가는 다시 이또오를 제거하기 전날과 의거 당일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은 25일 오후 한 시경 차로 다시 하얼빈으로 되돌아 왔다. 그날 밤 安重根과 류동하는 김성배의 집 객실에서 문을 걸고 창문 커텐을 친 다음 칼줄로 권총탄알 끝을 뽀족하게 갈고 '†'를 새겨 7발을 장탄해 놓았다.… 安重根은 장탄한 후 조용히 되뇌이었다. '하느님께서 부디 거사의 성공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 그어 례배를 하였다."
"서양 복장에 캡을 쓴 安重根은 문을 나설 때 '†'를 그으며 '하느님께서 부디 성공을 주십시오'하고 입속으로 되뇌이었다.
"이때 이등방문이 절망하였다는 말을 들은 安重根은 聖像이 있는 벽을 향해 '†'를 그으면서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하느님께 례배를 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문: "체포되었을 때 伊藤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그대는 伊藤을 죽였으므로 神에게 감사한다 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는가?"
답: "그렇다. 그 후 나는 大韓萬歲를 불렀다."
위의 예와 같이 의거를 전후하여 하느님께 기도했던 安重根의 행동들을 보면, 그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주살하는 목적을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행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의거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주님께 기도하였고, 저격용 총알에는 십자가까지 새겼으며, 저격이 성공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가슴에다 십자가 성호를 그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애국행위와 민족을 구원하는 임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인식은 재판 과정에서 행한 그의 진술과 그의 자서전에서도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의 신심은 殉國 직전에 임해서도, 그는 특별히 告白聖事를 받기위해 교도소 당국에다 자신의 세례신부였던 빌렘 신부를 초빙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가족들에게는 신앙심에 충만한 유언들을 남겼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고, 한편 "평소 장남 '분도'를 신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먼저 천국으로 가니 꼭 하느님께 바치어 신부가 되도록 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빌렘 신부에게는 세례성사를 준 것과 죽음의 준비를 잘 하도록 중국에까지 왕림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자신을 위한 기도와 신자들에 대한 문안을 부탁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빌렘 신부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당시의 신문기사에 잘 나타나고 있다.
"安 토마스는 갈바리아의 희생 공로를 그의 贖罪로 이끌어 오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사형 집행을 예수 수난일인 3월 25일에 해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請이 허락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어떤 숨은 이유에서가 아니라, 일본의 많은 知性人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迷信으로 인해 하르빈 사건과 같은 날짜인 26일, 그리고 같은 시간까지도 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正義라면, 날짜와 시간의 우연한 일치를 통해 복수하려는 태도는 피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순국 직전 두 아우와 빌렘 신부에게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 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겼으며,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는 '3분 간이나 기도를 하고 刑臺에 올라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고' 순국하였다. 처형을 당할 때, 그의 주머니에는 예수의 像本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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