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강인하고 아름다운 향백나무 - '수목의 왕' 위용을 떨치다


 구약성경에 70번이나 등장하는 향백나무는 소나무과 상록수다. 높이가 보통 40m에 줄기 지름이 3m에 이르는 웅장한 침엽수다. 사자를 동물의 왕이라 부르듯이 구약시대 사람들은 향백나무를 수목의 왕으로 생각했다. 수명이 2000~3000년씩이나 되니 그렇게 불러도 손색이 없다.

 사철 푸른 향백나무는 어려서는 연두색, 성장하면 갈색, 다 자라면 암갈색이 된다. 자라는 모양도 피라밋형 또는 원뿔형으로 사시사철 청청한 자태는 실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튼튼하게 뿌리를 뻗는 강인한 수목'이라는 뜻의 고대 아랍어가 향백나무 어원이라고 한다. 짙은 향기와 나무진이 많아서 병충해가 없고 내구력이 뛰어나 귀중한 건축재로 쓰였다. 또 선박자재나 악기, 조각, 관재로도 많이 쓰였다.

 고대 이집트(Egypt) 사람들은 향백나무를 선박재로 썼고, 특히 뛰어난 내구력으로 미이라를 만들 때 관재로 사용했다. 이 나무에서 채취한 수액, 즉 기름을 시체에 발라서 부식을 방지했다고 한다. 이슬람 교도들은 향백나무를 성자의 화신이라 여겨 신성시한다.

 향백나무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도 내려온다. 한 천사가 무서운 폭풍을 만났는데 마침 나무 밑에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천사는 하느님께 "이 나무는 향기가 좋고 나무 그늘이 안전했으므로 장차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유익한 열매가 달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이 열매에서 난 향백나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만드는 재목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상은 언제나 향백나무로 만들게 됐다. 지금도 옛 고분에서 향백나무로 조각한 성상들이 원형대로 발견되고 있다.

 향백나무는 추운 곳에서 자라기에 재질이 굳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레바논과 인접한 여러 나라에서 궁전을 짓는 데 건축재로 많이 이용해향백나무라하면 궁전을 짓는 건축재였음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구약성경 열왕기, 역대기, 사무엘서 등은 건축재로서 다른 모든 재목보다도 향백나무를 귀중하게 여긴 것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다윗의 집을 짓고자 티로의 임금 히람이 향백나무와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집을 짓게 했다(2사무 5,11).

 또한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자 티로의 임금 히람과 상거래 계약을 맺고 원하는 대로 향백나무와 잣나무를 벌채해 가고 그 댓가로 곡물과 기름을 줬다고 한다(1열왕 5,15-32). 에즈라가 성전을 수리할 때에도 레바논 향백나무를 사용했다(에즈 3,7).

 솔로몬은 사랑의 아가에서 연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레바논 향백나무에 비유하며 노래했다(아가 5,15). 또한 시편 저자는 의인의 번영을 레바논 향백나무에 비유했다(시편 92,13).에제키엘은 앗시리아의 강대함을 레바논 향백나무의 아름다움에 비유했지만 교만으로 심판을 받았다(에제 31,1-18).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답고 힘이 강하더라도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면 하느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옛날 그토록 울창했던 광활한 레바논의 향백나무 대삼림이 지금은 간곳이 없다. 다만 레바논 산맥의 한 계곡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솔로몬왕 시대부터 3000년간, 오늘까지 문명이라는 이기심 때문에,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자연을 파괴한 인간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야생 동식물이 멸종되고 자연 생태계 균형이 붕괴됐다. 벌목과 함께 개척한 경사지는 홍수로 표토가 유실되고 모래먼지만 남은 사막으로 변화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잘 다스리도록 맡겨주셨다. 인간은 하느님을 협조해 자연과 피조물을 잘 가꾸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을뿐, 그것들의 주인이 아니다. 엿새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손수 만드신 모든 것들이 "참 좋았다" 하신 하느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충실한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기를 다시 한번 다짐해 보자.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사진설명)
▲ 레바논의 옛 조상인 페니키아인들이 향백나무를 배로 나르는 장면, 대영박물관 소장, 부조 작품.

▲ 구약시대엔 향백나무를 수목의 왕으로 여겼다. 사진은 레바논의 향백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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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석류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느새
살짝 삐져나오는
이 붉은 그리움은
제 탓이 아니에요

푸름으로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가슴

이젠 부끄러워도 할 수 없네요

아직은
시고 떫은 채로
그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는

이 한 번의 사랑을
부디 아름답다고
말해주어요.




 이해인 수녀의 시 '석류의 말'이다. 이 시처럼 석류는 낭만적 과실인 것 같다. 석류는 예로부터 생명의 과일, 여성의 과일로 불리운다. 무덥고 오랜 장마에도 유독 석류만은 싱싱하고 힘차게 아름다운 꽃을 잘 피운다.

 석류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서북부에 자생하던 식물로 유럽으로 오래 전에 건너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과실이 됐다. 석류는 이집트에서도 흔하고 귀한 과일이었다. 이집트에서는 B.C. 2000년께 이미 재배했고 신성하게 생각했던 식물이다.

 석류의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가을에 탐스럽게 잘 익은 열매에 있다. 새빨간 씨가 달고 신 즙이 있는 껍질에 싸여 빽빽하게 박혀 있다. 석류 씨는 구약의 솔로몬 시대부터 갈증을 해소하는 청량음료를 만드는 데 널리 쓰였다. 석류 열매는 촘촘히 박힌 보석 주머니 같다고해서 사금대(沙金袋)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달려있는 기간이 4~5개월이나 된다. 봄철 잎이 돋을 때는 붉은 빛을 띠고 여름에 꽃이 피어 가을에 붉게 익는다. 오늘날에도 과일즙으로는 술을 빚기도 하고, 씨는 말려서 과자를 만든다. 덜 익은 열매 껍질은 빨간색 염료로 쓰기도 한다.

 모세는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각 지파에서 한명씩 뽑아서 정탐꾼을 보냈다(민수 13, 1-24). 에스콜 골짜기에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둘이서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가지고 돌아왔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내려 주신, 축복한 일곱가지 식물 중 하나가 석류다.

 성경에서도 석류는 성스러운 식물로 등장한다. 제사장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에폿에 딸린 겉옷을 만들때 자락 둘레에는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로 석류들을 만들어 달고, 석류 사이사이에는 돌아가며 금방울을 달도록 했다. 그리고겉옷 자락을 돌아가며 금방울 하나에 석류 하나, 또 금방울 하나에 석류 하나씩을 달았다(탈출 28, 31-38). 그래서 아론이 예식을 거행할 때 이 옷을 입어 성소에 들어가는데 방울 소리가 울려 죽지 않으리라고 한 것을 보아도 이스라엘에서는 석류를 성스런 나무로 생각했다.

 석류는 아름다운 여인의 볼에 비유되기도 하고(아가 4, 3), 석류의 많은 씨는 풍요를 상징하며(아가 4, 13), 달콤한 즙은 사랑의 꿀(아가 8, 2)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석류가 가장 많이 쓰인 곳은 건축 장식이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과 왕궁장식에 석류나무를 사용했다(2열왕 25, 17; 2역대 4, 13). 석류 열매의 풍작과 흉작은 하느님의 복과 재앙을 상징해 석류 열매에 비유했다(하까 2, 19).

 석류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석류는 터키, 중국, 그리스 등지에서는 다산을 뜻하는 과일로 자손의 번영을 의미하기에 결혼축하 선물로 보내는 풍습이 있다. 터키에서는 결혼한 신부가 잘 익은 석류를 땅에 던져서 쏟아지는 씨의 수가 장차 낳을 자식의 숫자를 나타낸다고 믿는 풍속도 있다.

 이처럼 옛날부터 석류는 축복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석류를 심으면 자손이 흥하고 부귀가 늘 함께한다고 해 양지바른 정원에 즐겨 심었다. 또 잘 익은 석류에서 씨앗이 튀어나오는 모양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류의 꽃말은'바보' 또는 '우둔함'이라 하니 이래저래 재미있는 나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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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가난한 이들의 식량 쥐엄나무 열매 - 탕자의 허기진 배를 채운 식량



지중해 연안에서 자생하는 쥐엄나무는 이스라엘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성경에서 쥐엄나무가 언급되는 것은 단 한번, 공동번역성서의 루카복음 15장 '잃었던 아들' 비유에서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대목이다. 새로 번역한 성경은 이 쥐엄나무 열매를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고 표현했다(루카 15, 16).

 아버지 유산을 미리 챙겨 타지로 떠난 작은 아들은 가진 돈을 다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긴 유다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그 주검을 만지지도 않는 관습(레위 11,7-8)이 있었다. 따라서 돼지를 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먹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설명한다.

 쥐엄나무는 파종해서 결실해 수확할 수 있을 때까지 20년 이상이 걸린다. 이 나무는 해안평야와 주변의 산기슭 언덕, 그리고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산지 등에서 널리 자란다. 쥐엄나무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주엽나무와 콩꼬투리의 생김새가 비슷해 동일한 식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다른 식물이다.

 쥐엄나무 열매는 콩꼬투리처럼 납작하고, 처음에는 녹색이지만 익으면 갈색으로 변한다. 콩꼬투리 속에 동글납작한 완두콩처럼 생긴 씨가 들어있다. 쥐엄나무의 씨는 무게가 균일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무게를 다는 저울추로도 쓰였다고 한다. 콩꼬투리는 익어도 벌어지지 않고, 마르면 그대로 떨어진다. 말린 것은 가루로 빻아서 엿을 만들거나 알코올 원료로 쓰인다.

 쥐엄나무 열매는 소, 말, 돼지, 닭 등 가축들의 훌륭한 사료가 된다. 옛날에는 쥐엄나무 열매를 가난한 사람들 식량으로 사용했다. 아직도 가난한 원주민들은 쥐엄나무를 식량으로 사용한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마르 1, 6)는 이야기에 나오는 메뚜기가 사실은 이 쥐엄나무 열매라는 주장이 있다. 두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히브리어로 메뚜기는 '하가빔'(hagavim)이고 쥐엄나무는 '하로빔'(haruvim)이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쥐엄나무 열매를 '세례자 요한의 빵'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한편 유대 광야에는 사람이 식량으로 사용할 만큼 메뚜기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사람이 먹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적의 포위로 성안 사람들이 굶주릴 때 비상식량으로 많이 먹었다고 한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 시몬 바르요하이는 로마인들에게 붙잡히는 것을 두려워해 그의 아들과 갈릴래아 동굴에 숨어있는 동안 쥐엄나무 열매로 12년 동안 지냈다고 한다.

 쥐엄나무는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숲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 예루살렘 거리 가로수도 쥐엄나무가 많다. 쥐엄나무가 고대시대부터 이스라엘에서 흔한데도 구약성경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루카복음에서 아버지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은 세상의 쾌락에 빠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면서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것 같은 어려움이 영적으로는 오히려 유익할 때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 간절하게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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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평화와 안정의 무화과 나무 - 시원한 그늘 주는 '안식처'



 예수님은 어느 날 베싸이다 출신인 필립보를 만나 제자로 부르신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필립보는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간다. "나타나엘, 나는 우리가 기다리던 구세주를 만났네. 나자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이야."

 "나자렛? 나자렛에서 뭐 신통한 게 나올 수 있겠어?"

 예수님은 나타나엘이 가까이오자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다."

 나타나엘은 놀라며 말했다."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필립보가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당신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깜작 놀라며 말했다."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 1,43-51).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방과 같이 사용하는 장소였다. 이스라엘 무화과 나무는 위보다 옆으로 퍼지는 나무로 가지가 많다. 우리나라 느티나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늘이 많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조용히 앉아 명상하고 기도하곤 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나무 아래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셨던 것이다.

 꽃이 없다고 해 무화과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무화과 나무에도 꽃은 핀다. 무화과 나무 원산지는 서남아시아, 지중해 연안이다. 무화과는 주로 꺾꽂이로 번식된다. 쉽게 번식되지만 추위에 약해 재배지가 한정돼 있다.

 옛날부터 무화과 나무는 이집트, 팔레스티나, 시리아 등지에서 널리 재배됐다. 특히 잎이 커서 큰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런 특징 때문에 무화과 나무는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더운 지방에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안식처는 또 없을 것이다.

 열매를 먹어 보면 모래알 같은 것이 씹히는데, 이것이 진짜 열매다. 봄에 새잎이 퍼지면 녹색의 작은 열매가 생긴다. 그후 열매가 커져서 8~9월에는 연하고 껍질이 잘 벗겨지며 맛이 매우 단 과일이 된다. 늦가을까지 가지끝에 열매가 계속 달려서 덜 익은 상태로 겨울을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음해 봄에 다시 커지는 것도 있기에 먹을 만하다.

 이런 무화과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 됐다. 무화과는 날것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건조시켜서 보존식량으로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무화과 열매는 소화를 촉진하고 변비에는 특효라고 해서 약으로도 요긴하게 쓰인다.

 무화과 열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식량의 하나였다. 특히 다리의 힘을 증가시켜준다고 해서 운동경기를 하는 선수는 무화과 외에는 다른 것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무화과는 수출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그래도 밀수출이 끊이지 않자 밀고자 제도까지 만들어 단속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무화과가 산업과수의 하나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치부를 가리는 것으로 등장한다(창세기 3, 6-7). 무화과 나무는 성경시대에는 집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나무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리 유포돼 있었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를 맺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특성으로 포도나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느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이용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위험성을 경고하셨다 (루카 13,6-9). 이것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생활 중에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는 안전한 생활과 훌륭한 삶을 상징한다. 즉 사람이 무화과 나무 아래 산다는 것은 안정, 기쁨, 평화 그리고 번영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를 키우려면 수년간 시간과 힘든 노동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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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승리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 - 제대를 밝히는 올리브 기름



 몇년전, 한 방송국에서 올림픽 특집으로 퀴즈를 냈다.

 "우리나라 첫번째 금메달을 받은 선수의 머리에 씌워진 관은 무슨 나무로 만든 관일까요?"

 방송국에서는 '월계수 나무'가 정답이라고 발표했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올림픽 우승자의 머리에 씌워 주는 관이 월계수가 아닌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든 것이라고 지적하는 전화가 쇄도했다.

 고대 그리스는 올림픽 경기 우승자에게 올리브 나무관을 수여했다. 이에 관한 그리스 신화가 있다. 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여신 '아테네'가 싸웠다. 포세이돈은 평화와 다산의 상징인 군마를 만들었고, 아테네는 힘, 용기를 상징하는 올리브를 만들었다. 마침내 제우스는 여신 아테네에게 승리를 선언했다.

 그래서 올리브는 평화, 승리, 자유, 질서, 희망의 상징이 됐다. 일반적으로 아테네의 경제력은 올리브 재배로 좌우했다. 그래서 외적이 공격해오면 우선 올리브 농장부터 짓밟았다고 한다. 이것도 올리브가 평화와 결부돼 있는 원인이 된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문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걸어놓는 풍속이 있다. 그러면 악마가 침범하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전의 개신교 성경은 "노아 홍수가 끝난 후 비둘기가 감람나무 이파리를 물고 왔다"고 기록했다(창세 8,11). 그러나 이것은 옳은 번역은 아니다. 한문 성경이 올리브를 감람으로 오역한 것을 그대로 감람나무로 국어로 번역해서 생긴 오류였다. 사실 올리브와 감람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고 식물학상으로 엄연히 다른 나무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감람나무를 '올리브 나무'로 고쳤다.

 올리브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재배했다. 근래에는 1만년 전에도 올리브 나무가 지구에 있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중요 농산물인 동시에 교역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세는 올리브 재배자에게는 병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또 솔로몬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건축재를 구할 때에 올리브유로 그 대가를 지불했다.

 올리브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로, 그 열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빵과 함께 즐겨 먹는다. 일반적으로 올리브는 생장이 느린 상록수로서 심은 지 10~15년 뒤에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일단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면 나무 수명은 무척 길다. 그래서 올리브는 수백 년씩 수확할 수 있는 경제성이 높은 나무다.

 올리브 나무는 목재 성질이 굳어서 건축재보다 장식용 조각재로 많이 쓰인다. 올리브 나무는 무늬도 곱고 향기가 있어서 솔로몬이 성전 건축 때 지성소의 입구 문짝과 문설주, 그리고 언약궤를 지키는 그룹을 조각했다(1열왕 6,23-33). 올리브기름은 식용, 의료용, 화장품, 공업용 등 용도가 다양하게 쓰인다.

 특히 올리브기름은 종교의식에 중요하게 사용했다. 모세가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성별할 때 사용한 것도 올리브기름이었다(탈출 40,13-19). 또한 제단에 불을 밝힐 때에도 올리브기름을 사용했다(출애 27,20). 이슬람교도가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그리스도교 지역으로의 올리브기름 반출을 막자, 그리스도교는 올리브 기름대신에 양초를 사용해 제단에 불을 밝히게 됐다.

 올리브는 막대기로 나무를 두들겨서 떨어진 열매를 주워 수확했다. 그런데 올리브를 수확할 때에 한번 지나간 가지는 다시 손대지 말라고 율법에 규정했다(신명 24,20). 남은 것은 가난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라고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다음 해 감을 수확할 때까지 까치 몫으로 나무 꼭대기에 달린 감 몇개를 남겨 놓은 정겨운 모습이 떠오른다. 올리브가 사랑과 평화의 대명사로 불린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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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축복의 상징인 포도 - 예수가 흘리신 피, 포도주



 "저주를 받아라! 그리고 형제들의 종으로 살아라!"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의인이며, 흠 없는 사람이었던 노아가 술에서 깨어 노발대발하며 작은 아들 후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 즉, 셈과 함, 야벳이 있었다.

 어느 날 함은 장막 안에서 아버지 노아가 술에 흠뻑 취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밖으로 나와 함은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 흉을 보았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 뒷걸음쳐 들어가 옷을 입혔다. 노아는 자신의 추태를 떠벌린 함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렸다(창세 9,18-27 참조).

 노아는 성경에서 포도를 처음으로 재배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노아가 마셨던 술도 포도주로 기록돼 있다.

 포도는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과일 중 하나이다. 포도는 유럽이 주산지이지만 원산지는 본래 아시아 서부, 카스피해 지역 코카사스 등지로 알려져 있다.

 포도 재배와 포도주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그리스 북쪽에서 기원전 45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포도씨가 발견됐다. 또 기원전 2500년대 고대 이집트 왕조 벽화에서 포도주 제조기록도 발견됐다.

 이처럼 인류가 포도를 재배해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포도가 귀한 약재로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고, 자양강장과 허기나 감기에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초기에 비로소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경에는 포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포도는 포도나무, 포도원, 포도주, 건포도, 포도즙 등 다양한 표현으로 등장하는 귀중한 식물이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를 평화와 축복 그리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구약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가나안)을 포도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포도는 가나안 땅에서 밀과 보리, 무화과와 석류, 올리브 나무와 대추야자와 함께 축복받은 7가지 식물 중 하나였다(신명 8,7-10 참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 한송이가 달린 가지를 막대 사이에 꿰어서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민수 13, 23 참조). 그만큼 포도가 크다는 것을 과장한 것인데, 당시 포도는 자두만한 크기로 열렸다고 하니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다. 사실 오늘날 팔레스티나 지역 포도송이는 대단히 크게 열린다.

 또한 포도는 하느님 자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도를 수확할 때 남김없이 따지 않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줍지 못하도록 했다. 가지에 남은 포도와 땅에 떨어진 포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몸 붙여 사는 외국인 몫이 되도록 했다(레위 19,10 참조).

 신약 성경에서 하느님은 '포도원의 주인'이라 하고, 예수님은 '포도원의 참 포도나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기도 했다(요한 15,1-3 참조).

 예수님 시대에는 신 포도주에 물을 타서 노동자의 음료수로 만들어 먹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로마병사가 드린 신 포도주가 바로 당시 노동자들이 마시던 음료였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첫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A. D 280~337년)는 포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포도의 가장 큰 상징은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포도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행한 최후 만찬에서 포도주는 언약의 피로 상징됐다(마태 26, 26-28 참조).

 오늘날에도 미사주는 포도주로 사용되고 있으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포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과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포도는 그리스도교의 문장처럼 성화나 교회 건축물, 제의 등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순국 직전의 당당한 모습>


安重根이 入敎후 그의 신앙활동에 대하여 그는 옥중의 자서전 안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경문을 강습도 받고 道理를 토론도하기 여러 달을 지나, 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가고 달이가서 몇 해를 지났다.


그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홍신부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安重根의 장황한 교리해설 연설문은 천주교회의 기본교리인 1. 천주존재, 2. 상선벌악, 3. 영혼불멸, 4. 강생구속 등의 교리를 참으로 쉽고 일목요연하게 해설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이 편하게 알아듣기 쉽게 비유와 동양적 故事를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安重根은 비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의 열의와 전교 활동이 청계동 시절에만 보였던 일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獨立戰爭 時에도, 또한 殉國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하곤 하였다. 그는 독립전쟁 중, 함경북도 慶興부근과 新阿山 부근에서 전개되었던 제 2 차 전투에서 약 10명의 일본 군인들과 상인들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人道主義와 國際 公法에 따라 이들을 석방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노출됨으로써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장마비가 거침없이 퍼붓는 상황에서 일본군에 쫓겨 산속을 헤매면서 열 이틀 동안 단 두 끼의 밥을 얻어먹는 극도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동료들에게 "전일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하는 구원을 받을 것"을 권면하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가톨릭의 주요교리들을 설명한 다음, 그들의 동의에 따라 교회의 규칙대로 洗禮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水野吉 太郞에게도 신앙을 가질 것을 권함으로써 죽기 직전까지 전교 활동을 하였다.


安重根이 강한 信仰心을 갖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몇 가지의 단편적인 사례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례 받은 이후의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의 신앙적 특성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트크를 중심으로 연추,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의 망명생활과, 유격전 독립전쟁 중에도 매일 아침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정도로 기도생활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공판 과정에서 통역을 담당하였던 園木末喜가 1910년 3월 15일 統監府 總務長官 石塚英臧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처형을 앞둔 安義士가 洪 빌렘 신부에게 고백한 내용으로 1908년 겨울 한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 安義士는 이상한 체험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安도마는 전에 露領에서 義兵에 투신한 시기 당초의 奇夢이라 하여 말하기를, 安도마가 진남포 古家의 自室에 있었는데, 홀연히 찬연한 무지개가 九天에 걸렸는데, 그 빛나는 한가닥 빛이(閃閃한 一端)이 점차 교자에게 접근하면서 바야흐로 頭上을 晛射하려는 찰나에 다시 출현한 성모 마리아가 그 묘한 纖手를 펴서 안도마의 胸間을 위무하면서, 놀라지 말라,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분부와 함께 다시 황홀하게 失現하심으로 추모하는 고민에 뜻밖에 잠을 깨자 바로 이것이 南柯의 一夢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다 듣고 나(洪 빌렘 신부를 지칭함)는 마치 일종의 신비에 접촉한 자와 같이 황홀히 명상하기를 약간 길게 하다가 문득 그것은 신념이 그렇게 시키는 바 무엇인가의 前兆였을 것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安義士는 동지 11명을 소집하여 「斷指 同盟」을 했다.


安重根이 기도 생활에 어느 정도나 충실하였는가는 다시 이또오를 제거하기 전날과 의거 당일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은 25일 오후 한 시경 차로 다시 하얼빈으로 되돌아 왔다. 그날 밤 安重根과 류동하는 김성배의 집 객실에서 문을 걸고 창문 커텐을 친 다음 칼줄로 권총탄알 끝을 뽀족하게 갈고 '†'를 새겨 7발을 장탄해 놓았다.… 安重根은 장탄한 후 조용히 되뇌이었다. '하느님께서 부디 거사의 성공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 그어 례배를 하였다."


"서양 복장에 캡을 쓴 安重根은 문을 나설 때 '†'를 그으며 '하느님께서 부디 성공을 주십시오'하고 입속으로 되뇌이었다.


"이때 이등방문이 절망하였다는 말을 들은 安重根은 聖像이 있는 벽을 향해 '†'를 그으면서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하느님께 례배를 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문: "체포되었을 때 伊藤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그대는 伊藤을 죽였으므로 神에게 감사한다 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는가?"

답: "그렇다. 그 후 나는 大韓萬歲를 불렀다."


위의 예와 같이 의거를 전후하여 하느님께 기도했던 安重根의 행동들을 보면, 그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주살하는 목적을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행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의거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주님께 기도하였고, 저격용 총알에는 십자가까지 새겼으며, 저격이 성공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가슴에다 십자가 성호를 그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애국행위와 민족을 구원하는 임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인식은 재판 과정에서 행한 그의 진술과 그의 자서전에서도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의 신심은 殉國 직전에 임해서도, 그는 특별히 告白聖事를 받기위해 교도소 당국에다 자신의 세례신부였던 빌렘 신부를 초빙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가족들에게는 신앙심에 충만한 유언들을 남겼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고, 한편 "평소 장남 '분도'를 신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먼저 천국으로 가니 꼭 하느님께 바치어 신부가 되도록 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빌렘 신부에게는 세례성사를 준 것과 죽음의 준비를 잘 하도록 중국에까지 왕림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자신을 위한 기도와 신자들에 대한 문안을 부탁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빌렘 신부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당시의 신문기사에 잘 나타나고 있다.


"安 토마스는 갈바리아의 희생 공로를 그의 贖罪로 이끌어 오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사형 집행을 예수 수난일인 3월 25일에 해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請이 허락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어떤 숨은 이유에서가 아니라, 일본의 많은 知性人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迷信으로 인해 하르빈 사건과 같은 날짜인 26일, 그리고 같은 시간까지도 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正義라면, 날짜와 시간의 우연한 일치를 통해 복수하려는 태도는 피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순국 직전 두 아우와 빌렘 신부에게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 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겼으며,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는 '3분 간이나 기도를 하고 刑臺에 올라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고' 순국하였다. 처형을 당할 때, 그의 주머니에는 예수의 像本이 있었다고 한다.



당당히 축복을 청하자
 좀 과한 말이 될지 모르겠으나, 천주교 신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기복기도'가 아니라 '기복기도 노이로제'가 아닐까 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예를 들면 자녀들이 대입 수험을 앞두고 있을 때, 남편이 승진의 기로에 있을 때,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 등등의 경우에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 문제를 당당하게 기도제목으로 삼지 못하고 주변 눈치를 살피는 듯하다. 혹시 누가 '기복기도' 한다고 핀잔을 줄까봐서이다.

 필자는 사목자들이 신자들에게 "기복기도 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을 예사로 봐왔다. 그 취지인즉슨, 해야 할 윤리적-영성적 도리는 안 하면서 미신적으로 복만 빌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신자들은 그 말을 "세속적인 일을 위해서는 아예 기도하지 말라"는 말로 소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살다가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개신교 신자의 약 70%는 교회에 가서 기도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천주교 신자 가운데는 성당을 찾아와 기도 요청을 하는 사람이 30%도 채 안 된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기복기도(祈福祈禱)를 글자 그대로 풀면 '복을 구하는 기도'가 된다. 복을 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인가? 아니다. 성서는 온통 축복의 약속으로 채워져 있고, 축복을 청하는 기도로 가득하다.

 신자들이 기도를 잘 하도록 지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신자들이 '기복기도 노이로제'에 걸려 힘있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문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새해벽두에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빌어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

 이 축복의 내용을 음미해 보면 핵심적인 것은 액땜, 만사형통, 평강이다. 흔히 '기복기도'를 한다고 경고 받을 소지가 있는 기도 제목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 가운데 사람에 대한 4가지 청원을 우리는 추상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시 '주님의 기도'로 돌아가 그 가운데 사람에 대한 청원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양식'이란 우리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 매일 매일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기를 '아빠'에게 청하는 기도다. 이는 먹을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핵심은 바로 '오늘'에 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는 '내일', 혹은 더 먼 미래의 양식까지 한꺼번에 주실 수 있는 분께 '오늘' 필요한 것을 주시기를 청하라고 말씀하신 걸까? 그것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매일 그분께 의지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라는 뜻이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교훈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민수 11장). 배부르면 딴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그때그때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청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도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바라는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성서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야고 4,2-3).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기도는 우리가 자주 범하는 구체적인 죄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며 우리도 남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겠다는 결심을 아뢰는 기도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겠으니, 하느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기를 청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형제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22)고 말씀하시며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를 들어 말씀해 주신다. 이 무자비한 종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먼저 받은 사람들이다. 그 용서는 우리 죄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으신 무조건적 용서였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큰 용서의 빚을 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능력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문의 참 뜻은 이미 용서받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용서를 취하할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마태 18,35 참조).

 다음으로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온갖 유혹을 사람의 힘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기에 하느님의 '보호'와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유혹을 물리칠 능력을 주님께 청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다와 베드로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는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 나오려 하다가 결국 자살했고(마태 27,3-10 참조),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배반한 베드로는 똑같이 유혹에 빠졌지만, 주님께 의탁함으로써 유혹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마르 14,72 참조). 우리는 매일매일 이 기도를 바침으로써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악에서 구하소서"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는 유혹 근처(1m 근방)에도 가지 말게 해 달라는 것을 뜻하고, "악에서 구하소서"는 만일 유혹에 빠지게 되거든 그 악을 물리치고 빠져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악의 세력'과 싸움에서 속아 넘어가거나, 굴복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기도다. 이는 또한 궁극적으로 마지막 때에 있을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 이름이 점점 커져야
 2006년 2월8일자 「주간조선」은 "占占 커져가는 '운세산업' 연 2조원 시장"이라는 제하에 최근 불고 있는 점술문화 바람을 집중 조명했다. 추상적 언급보다 실제 현장의 스케치가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대로 발췌, 인용해 본다.
 
 <<인터넷 운수사이트 150여개 호황… 일부 대학에 관련학과 개설, 무속타운 형성도 잇따라… MBA(경영학 석사) 출신의 한 벤처기업 사장(39). 얼마 전 이 남자가 의외의 말을 들려줬다. "직원을 뽑거나 사업상 큰 결정을 할 때 무당을 찾아 굿을 합니다." 아니, 평소 온갖 차트와 숫자를 신봉하며 논리로 무장한 그가 아닌가. 혹시 저 매끈한 양복 안주머니에 액땜 부적이라도…? … 굿 한 번에 들어가는 비용은 100만원 상당….

 '점술 밸리'를 아시는지. '점술 밸리'란 최첨단 패션의 현장인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점집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려한 수입품 매장과 고급 레스토랑 사이로 점집과 사주카페 70여개가 모여 있어 붙은 이름이다. 전통 역학부터 구슬점, 타로카드, 대나무 뽑기 등 종목은 다양하다. 영하로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해 12월24일 오전 이곳의 점집 '운수 좋은 날'은 예약 손님들로 줄을 이었다.… 이 점집의 고객은 남녀 비율이 약 6대 4 정도로 남성이 많고 전문직이 대부분이다. 역술가 김씨는 "펀드 매니저와 부동산 중개업자들도 많이 찾는다"며 "질문 내용은 주로 주가 흐름과 부동산 투자 대상지"라고 말했다.

 첨단과학ㆍ인터넷 정보 시대가 활짝 열렸지만 '점(占)'은 사라지지 않고 '운명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젊은이들 구미에 맞춰 재미를 강조하고, 재테크ㆍ입시ㆍ이혼 등 전문(專門) 영역으로 세분화하는 형식이다. 덕분에 인터넷 '운세' 콘텐츠는 '게임' 다음으로 불티나게 팔린다. SK텔레콤의 지난해 운세 서비스도 매출이 전년보다 40% 증가했다. 현재 45만 역술ㆍ무속인이 관련된 전체 운명산업의 규모는 2조원(역술인협회 추산)이 넘는다. 영화산업 규모(2004년 2조3000억원)와 맞먹을 정도다.

 고객도 과거 주부나 공무원 등에서 전문직으로, 중년에서 대학생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운명산업의 형태도 쇼핑 플라자, 인터넷, 휴대폰 등으로 다양해졌다. 신세대 직장인 성혜지(25·대학교직원)씨 휴대전화엔 부적이 다운 받아져 있다. 노란색 바탕에 붉은 글씨인데, 일명 '애인 생기는 부적'이다. 그의 휴대폰 벨소리는 이달 그의 운세를 상승시켜 준다는 피리 소리. 모두 돈을 주고 인터넷에서 구입했다. 성씨는 "그리 비싸지도 않아 친구끼리 재미로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일반 기업도 점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이마트 등 대형 할인마트나 CGV 같은 영화관에는 점집이 1~2개씩은 입점해 있고, 백화점은 점 봐주는 이벤트를 수시로 열고 있다. 무속 타운 형성도 잇따라, 현재 서울 미아리와 이화여대 앞, 강남 압구정동에 이어 인사동에서도 '무속 종합 쇼핑몰'이 점집 분양 중에 있다.>>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왜 요즘 젊은이들이 성당을 찾지 않는지를 어느 정도 해명해 주는 기사가 아닐까.

 占占 커져가는 '운세산업'의 여파로 사람들 마음에서 하느님 자리는 점점 작아져 가고 있지나 않은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추세는 우리가 '주님의 기도' 초반부의 내용을 더욱 애절하게 바쳐야하는 까닭이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평소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을 다시 확인해 보자.

 원문 그대로의 의미로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며"이다. '빛나다'는 표현은 없다. '거룩하다'라는 단어는 본래 거룩한 그릇(제기), 거룩한 장소(성소)와 같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물건, 즉 하느님께 바쳐진 것, 하느님께 속한 것에 붙는 단어였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 곧 사제에게 '거룩'이라는 단어가 붙게 됐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이란 특별히 성별(聖別)돼 하느님께만 속한 것을 말한다. 곧 신적 고유성, 신적 불가침성을 드러내며 범접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무엇을 뜻할까? '이름'이란 하느님 '자신', 하느님의 '인격'을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컬어지는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의 뜻은 "우리가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신 분으로 알아보고 인정하고 공경할 수 있도록 하며, 그 거룩함이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침해 당하지 못하게 우리 안에 드러내며"의 의미이다. 말하자면 세상의 죄로 더럽혀지고 무시당한 아버지의 이름이 다시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언어, 사고, 행동 등을 통해서 그 이름을 더럽혔다. 문화 전반과 첨단 과학, 낙태, 유전자 조작 등 무례하게 하느님 영역을 침해하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했다. 하느님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땅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본래 거룩히 빛나던 이름을 죄인들이 영적 눈을 뜨고 회개해서 새삼스럽게 알아뵙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한국이나 영국, 일본과 같은 어떤 '나라(nation)'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통치권(kingdom of god)을 의미한다. 그 통치권은 어떤 힘에 의한 다스림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으로 통치되는 파라다이스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결국, 모든 이가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동안 악의 세력과 사람에게 내주었던 하느님의 통치권을 다시 회복해 온 세상이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14,17)으로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당신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려고 하셨던 그 뜻, 용서와 사랑이 바탕이 된 '인류 구원'을 말한다. 인류를 영원한 생명에 참여시키는 이 구원은 세상의 구원이면서 '나' 자신의 구원이다.

 '이루어지소서'는 아버지의 그 구원 의지가 이 땅에서 '완성되소서'라는 뜻으로 종말론적 성취를 뜻한다.

 이미 하늘에서 세우신 그 계획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통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빠' 부르면 기도 반은 성공
 마더 데레사 수녀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노하우'를 갖고 계셨다. 어떤 골칫거리가 앞에 놓여 있어도, 어떤 난관이 길을 막고 있어도 마더 데레사는 그것을 정면 돌파할 신통한 방법을 알고 계셨다. 우리는 국내에서도 상영됐던 '마더 데레사'에서 그 노하우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수녀님은 아기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 교육하면서 좋은 부모가 나타나면 입양을 시켰다. 그런데 프랑스의 한 부부가 어떤 아이를 입양하기로 서류 절차까지 끝내놓고 기다려도 아이가 오지 않아 경찰에서 수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아이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수녀님과 사랑의 선교회는 아이들을 팔아넘긴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까지 가게 된다. 위기 순간에 수녀님은 사랑의 선교회에서 함께 봉사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귀국한 영국인 자매에게 한 통의 전화를 한다. 전화 내용은 와서 함께 재판에서 싸워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유명한 변호사를 알아봐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 아이를 수소문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수녀님이 그 자매에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부탁한 전화 내용은 아주 짤막한 말이었다. "기도로 하느님을 감동시켜라!"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의외의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통했다. 기도보다 더 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느님보다 더 큰 '빽'이 어디 있겠는가!

 마더 데레사는 '기도' 하나로 세계를 움직였다. 만년에 그녀는 노구를 이끌고 고통의 현장을 방문하면서 연설을 통해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만나는 이마다 감동을 받았다. 겉모습으로는 연약한 여인이요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었지만 미국 클린턴 대통령도 그녀 연설을 듣고 인권 문제를 다시 고심할 만큼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도의 힘이었던 것이다.

 하루는 동료 수녀들과 아침 회의를 가졌다. 여러 수녀들이 건의를 하였다. "마더(=어머니)! 요즘 일거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어요. 돌봐야 할 사람들이 막사가 넘치도록 몰려와서 하루 종일 일만 해도 일손이 모자랍니다. 그러니 아침 기도 시간을 1시간에서 반 시간으로 줄이면 어떨까요?"

 마더 데레사가 대답했다. "그래요? 할 일은 많고 일손이 모자란다구요? 그러면 기도 시간을 조정해야 되겠군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 시간을 2시간으로 늘려야 하겠어요.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 '사람'의 계산법과 '믿음'의 계산법은 전혀 다르다. 마더 데레사의 처방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 묘안이었음을 훗날 동료 수녀들은 체험했다고 한다.

 마더 데레사는 말한다.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생명과 힘과 존재 자체를 부여하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분 존재가 흔들리면 모든 존재는 끝나고 무로 떨어집니다. 당신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 둘러싸여 있고, 그분 안에서 헤엄친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느님 사랑은 무한합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은 없습니다"(「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중에서).

 "각박한 세상 사느라고 바빠서 시간이 없어 기도를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생각이다. 바쁠수록 그 문제를 위해 더욱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가장 훌륭한 기도의 선생님은 단연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는 분이셨다. 큰 사건이 있기 전에 항상 기도하셨고 기도를 하신 후에는 그 능력이 넘쳐났다. 홀로 한적한 곳에서, 때로는 밤을 지새우시면서, 어느 때는 피땀까지 흘리시면서, 시시각각으로 기도하셨던 주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방법을 묻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마태 6,9-13).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유일한 기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에 실려 있는 어떤 기도문도 주님의 기도에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리라 생각할 수 없다"고 했으며,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말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방법이자 동시에 내용이며, 복음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기도의 정수이다.

 이 기도에는 기도가 갖춰야 할 형식(形式)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우리가 기도할 때에 1)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 2) 먼저 '하느님의 일(거룩함, 나라,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 3) 다음에 '사람의 일(양식, 화해, 성화 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골격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기도에는 기도가 갖춰야 할 내용(內容)이 잘 나타나 있다. 각 구절구절에 담긴 뜻을 헤아려 보자.

 성경 원문을 보면, '아버지'가 먼저 나오고, ‘하늘에 계신’이라는 관형어가 따라온다. 루카 복음에는 아예 '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식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의 첫 단어가 '아버지' 곧 '아빠'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abba)'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기도의 포인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즉, 기도할 때 하느님을 "전능하시고, 엄위로우시고, 온 우주를 주재하시고…, … 하신 아도나이 야훼 하느님" 하면서 너무 거창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면 하느님이 저 높이 멀리 계신 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신에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 계신 분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빠는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이유 가운데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아빠가 아이에게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응석을 부리거나, 떼를 쓰거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인 것처럼 하느님이 사람에게 그런 '아빠'라는 것이다.

 둘째, 기도하는 이는 철저하게 '어린이'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할 때는 "어린이처럼"(마태 18,3) 단순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마태 11,25 참조)에게 당신을 드러내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어린이가 되어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일단 정서적으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면, 이미 기도의 반은 배운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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