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암호였던 물고기 그림





 가끔 시내에서 물고기 모양 그림을 뒤에 붙인 자동차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물고기 그림은 1세기 로마 카타콤바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되었다.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큰 박해를 받았다. 이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람들은 피신하여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바 등지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물고기를 그리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다른 신자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였던 것이다.

 물고기란 뜻의 그리스어 '익투스'(ΙΧθΥΣ)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의 의미를 가졌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예수(Ιησoυs), 그리스도(Χριστοs), 하느님(θεοs), 아들(Υιοs), 구세주(Σωτηρ)의 첫 머리 글자만을 따서 모아보면 물고기라는 그리스어 '익투스'(ΙΧθΥΣ)라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물고기란 단어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다. 박해가 한창일 때 초대교회 신자들은 의사소통과 신분확인을 위한 암호의 한 형태로서 땅이나 카타콤바 벽에 물고기 그림을 그렸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가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카타콤바는 공동묘지 역할과 함께 일종의 지하도시로서 내부로 들어오면 출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주 복잡했다. 따라서 카타콤바는 현지 지리에 익숙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자들은 또 카타콤바의 미로에서 물고기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자신들의 집회장소를 찾아왔다. 물고기 모양은 오늘날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것처럼 초대교회에서 믿음의 상징이 되었다. 카타콤바에서 발견된 물고기 형상 그림은 이전 로마 헬레니즘 미술에서 유래하였으나 이러한 신자들의 생각으로 의미가 새롭게 변화되었다.

 고대 바빌론에는 지혜의 신이 천지창조 일년 후에 물고기 모습으로 육지에 와서 인간에게 밭을 가는 지식을 가르치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쳤다는 전설이 있다. 인도 신화에서도 신이 물고기로 변신하여 인류의 시조를 홍수에서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물고기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물고기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된 것은 성서의 사건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구약성서는 인간을 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비유하고 있다.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기적의 물에 의해 다시 소생하는 물고기는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에제 47,9 참조).

 제자들은 주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다시 쳐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낚았으며(요한 6,1-13 참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에게 생선을 구워 주셨다(요한 21,1-13 참조). 또 세금을 바칠 때 예수님 일행이 돈이 없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은전를 찾아낸 이야기가 나온다(마태 17,24-27 참조).

 이러한 성서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또한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사람을 물고기에 비유하기도 했다(마태 4,19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로 만드신 숯불로 구운 물고기를 '수난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평화신문>
(사진설명)
서기 3~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터에서 초기 기독교를 상징하던 물고기 모양의 모자이크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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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이제부터 너는 베드로이다. 네 이름대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6,13-20 참조). 반석이란 뜻을 지닌 베드로라는 이름은 이처럼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대단히 중요했다. 이스라엘 사람들 이름은 각각 의미를 띠고 있어서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가 출생하면 무엇보다 먼저 그 자녀에게 이름 지어주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겼다. 때로는 부모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아무개 아버지', 어머니는'아무개 어머니'로 불리기도 했다. 또 아들은 그 이름 앞에 아버지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시몬 바르요나'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었다(마태 16,17 참조).

 구약시대에는 새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신약시대에는 할례의식을 행하면서 신생아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루가 1,59 참조). 신생아 이름은 주로 어머니가 선택했지만(창세 29,32 참조)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도 많았다(창세 16,15 참조).

 이스라엘 부모들은 대부분 신앙적 차원에서 하느님 이름과 연관지어 자녀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면 '나의 하느님은 야훼'라는 뜻의 엘리야,'야훼의 종'이란 뜻의 오바디야,'주님은 나의 심판자'란 의미의 다니엘 등이 그렇다. 자녀 이름을 짓는 데도 신앙 차원에서 생각한 것이 흥미롭다.

 천둥, 폭풍우란 의미의 '바락'처럼 출생 당시 주변 환경이 이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 동물 이름을 이용해서 이름을 짓기도 했다. 어미양인 라헬, 꿀벌인 드보라, 비둘기인 요나 등이 좋은 예이다. 만약 부모가 새로 태어난 아기 이름을 '드보라'라고 했다면 근면하고 분주한'꿀벌'처럼 잘 자라달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을 부를 때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출신 동네 이름을 덧붙였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1사무 16,1 참조)라고 불리웠다.'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였으며, 가롯 유다는 '가롯' 마을 출신 유다였다. 또 '세례자 요한'처럼 활동 내용을 이름에 추가하기도 했고, 혁명당원 시몬처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불리기도 했다.

 성서시대에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자기 이름을 바꿨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름이 그 사람 성격과 운명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성서에는 어떤 사건과 계기를 통해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는데 야곱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야곱이란 이름은 본래'발 뒤꿈치를 잡은 자'란 뜻이다. 그런데 야곱은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란 뜻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고 바꿨다(창세 32,23-32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자를 박해했던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오로로 이름을 고쳤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은 그 사람 인격을 드러낸다. 과연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특히 내가 가진 세례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겠다.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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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찮은 초목들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느님


죽음도 물리치신
부활의 증거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믿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
이슬 젖은 풀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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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

54.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갔다.


55.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57. 그러자 베드로는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하고 부인하였다.


58. 얼마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니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하였다.


59. 한시간쯤 지났을때에 또 다른 사람이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게

틀림없소"하고 주장하였다.


60.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61.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루카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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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四旬时期)란?

(사진설명)
재의 수요일 예식에서 머리에 재를 받는 신자

 △ 사순시기란 어떤 시기인가요.

 ▶ 교회 전례력에서 사순시기는 인류 구원의 가장 위대한 신비인 파스카(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신비를 잘 준비하도록 회개하고 기도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신자들은 세례성사를 통해 죄에 죽고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또 예비신자들은 이 세례성사를 준비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 생활은 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에 특별히 사순시기에 더욱 참회하고 기도에 전념하는 생활로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주님 부활을 잘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 사순시기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 재의 수요일에서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전까지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이 통상 40일이라고 해서 사순(四旬)시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40년, 모세의 40일 단식, 엘리야의 40일 단식, 그리고 예수님의 40일 광야 단식에서 보듯이 40일이란 때가 찰 때까지의 정화 기간을 나타냅니다.

 신자들은 처음에는 부활 대축일 직전 며칠 동안만 단식하고 금육하면서 부활 대축일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광야에서 40일간 유혹받으신 것을 따라 40일 동안 기도와 절제와 희생을 통해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 사순시기를 재의 수요일에 시작하는 이유는

 ▶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은 원래 큰 잘못(예를 들면 배교)을 지어 교회 공동체에서 쫓겨난 이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에 돌아오고자 할 때 참회복을 입거나 머리에 재를 쓰고 속죄를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참회 기간은 성 목요일에 공동체 앞에서 화해 예식을 할 때까지 계속됐다고 합니다.

 머리에 재를 쓰는 것은 참회와 속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재의 예식을 통해 머리에 재를 받고 회개와 속죄의 기간인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재를 받음으로써뿐 아니라 금식과 금육을 실천함으로써 참회와 속죄의 정신을 드러냅니다.

 △ 사순시기 특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 미사 전례에서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제의 제의 색깔이 참회와 속죄의 색인 자주색으로 바뀝니다. 미사 때에 알렐루야를 바치지 않으며, 대영광송도 대축일이 아니면 바치지 않습니다. 알렐루야나 대영광송은 모두 기쁨을 표시하는 노래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르간을 비롯한 악기들은 성가 반주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참회와 속죄 즉 재계(齋戒)의 의미가 그만큼 강조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신자들의 삶에서도 변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회개와 기도의 시기여서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히 십자가의 길 기도를 평소 때보다 많이 바치지요. 또 참회와 속죄 표시로 자발적 희생과 절제를 실천하기도 합니다.

 △ 성주간이란 무엇인가요

 ▶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시작하는 사순시기 마지막 한 주간을 성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성주간은 사순시기를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파스카 성삼일 중 성토요일까지를 포함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께서 백성들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부터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혀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마침내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혀 부활하기 직전까지 기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위대한 주간' 또는 '수난 주간', '구원의 주간'이라고도 부릅니다.

 ◇ 한 가지 더

 교회는 사순시기 참회가 "오로지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또한 외적이고 사회적인 참회가 되어야 한다"(전례헌장 110항)고 가르칩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우리 가족이, 우리 구역이 또는 우리 본당이 이런 외적이고 공동체적 참회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실천해 봅시다.

[평화신문,제909호(200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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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따라 성지따라 4] 참행복(산상수훈) 기념성당

"행복하여라, 이 땅을 밟는 사람들!"



(사진설명)
▲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장소에 세워진 성당. 이 성당은 8가지

참행복의 가르침과 당신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상징해 팔각형

에 돔을 얹은 모양으로 지어졌다.

▲ 한 순례자가 참행복선언기념성당 감실 뒤편에 마련된 십자가상 밑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 성당 뒤편 회랑에서 바라본 갈릴래아 호수 전경. 절기에 따라 새 옷으로 갈아입는 구릉이 변화무쌍한

갈릴래아 호수와 조화를 이뤄 순례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참 행 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1-12; 루카 6,20-2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톨스토이, 간디뿐 아니라 시공을 넘어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이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 우리말 성경에서 '진복팔단' '참행복'으로 소개되는 이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다.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는 참행복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오늘날 '쉐이크 알리'(영어로 는 Mount of Beatitudes)로 불리는 갈릴래아 호숫가 구릉에서 선포했다.

 카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약 2~3km 떨어진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구릉이지만, 성경에 '산'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예수 시대 사람들 눈에는 제법 높은 지대로 보였나 보다. 그래서 성경은 이곳에서 행한 예수의 가르침(마태 5-7장)을 '산상설교' '산상수훈'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은 것처럼 이 산에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받을 축복을 선언하셨다. 그 축복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비참한 현실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오기에 행복하다는 축복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뿐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실 때(마태 17,1)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부여할 때(마태 28,16)도 산 위에서 행하셨다. 성서학자들은 예수께서 참행복을 선포하신 장소에서 12사도를 뽑고, 마귀를 쫓아낼 권한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예수께서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던 장소에 예쁜 성당이 세워져 있다. 1937년 작은 형제회가 세운 '참행복기념성당'(The Church of the Beatitudes)이다. 예수께서 8개의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준 것을 기념해 팔각형 모양에 가운데 돔을 얹은 아담한 성당이다. 가운데 돔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는 예수님 말씀을 상징한다.

 성지를 들어서는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마치 하느님 나라에 들어선 듯한 평화로움에 저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이다. 세상의 속된 티끌까지 털어내려는 듯 온 몸을 감싸는 공기의 청량함, 행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대지의 고요함, 높고 낮음도 잘남도 못남도 없는 조경의 소박함이 새색시의 수줍은 입맞춤 마냥 천상에서 누릴 참행복의 달콤함을 살짝 맛보여준다. 바람이 전해주는 들꽃의 찬미와 이를 화답하는 새들의 절제된 합창이 순례자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다.

 "행복하여라, 이 땅을 밟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미 보았다."

 성지가 품고 있는 참행복감에 젖어 성당에 들어서면 한 가운데 제대와 감실이 있고, 성당 입구에는 그 날의 복음이 담긴 라틴말 그레고리오 악보가 펼쳐져 있다. 신자석은 팔각형 성당 벽면에 배치돼 있다. 제대는 돔과 통해 있고 제대 정중앙과 돔 가운데 종탑이 일직선으로 돼 있다. 돔을 바치는 8개 벽면 색유리화 창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참행복 내용이 라틴말로 새겨져 있다.

 성당 안에서는 '절대침묵'이다. 물론 사진 촬영도 금지돼 있다. 여행에 들뜬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묵상을 통해 2000여년 전이 곳에서 행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생히 들으라는 무언의 권고일 것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고 싶다면 감실 뒤편으로 가보라. 큰 십자가 밑에 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무릎틀이 있다. 기도를 마친 후 성당을 나와 회랑을 따라 돌면 갈릴래아 호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성당 왼편 정원을 따라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야외 성당이 나오고 좀 더 가면 조그마한 동굴이 나온다. 1933년에 발굴한 이 동굴에는 비잔틴 시대(4~7세기경)때 제작된 모자이크가 남아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동굴이 예수의 참행복 선포를 기념하는 경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알아두면 좋은 정보>

 1.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면 참행복기념성당 뒤편 회랑에서 촬영하라.

 2. 참행복기념성당을 멋지게 찍으려면 성당 양 측면보다 언덕 밑으로 내려와 성당과 언덕을 다함께 넣어

촬영하는 게 좋다. 특히 봄철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해 화려한 색감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

 3. 순례의 피로도 풀고 휴식의 여유를 갖고자 한다면 성당 주차장 앞 과일주스 가게를 추천한다.

계절별로 석류와 오렌지를 직접 갈아 만든 신선한 과일주스를 맛볼 수 있다.

[평화신문, 제912호(200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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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의 동식물 이야기] - 가시 면류관을 만든 가시나무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 장동호 작 '사형선고 받으심', 1994,
서울 명동성당.

 가시 면류관은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될 때 예수를 조롱하려고 로마 군인들이 왕관 대신 가시로 엮어 그에게 씌워준 관이다(마태 27,29). 본래 면류관은 왕이나 군주가 통치의 상징으로 쓰는 관이다.

 예수님이 수난을 당할 때 병사들은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 '유다인의 왕 만세'하고 외치면서 조롱했다(마르 15,17). 그 이후 이 가시관은 예수님이 유다인의 왕으로 불렸음을 상징하고 수난과 고통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예수님 가시관을 무슨 나무로 만들었을까? 물론 그동안 논란도 많았지만 어떤 나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예루살렘에는 적어도 12가지 이상의 가시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은 대추나무로 가시면류관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나무를 "그리스도의 가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나무는 사마리아와 남부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한 나무다. 이 나무는 현재도 지중해 연안, 즉 레바논, 팔레스티나, 시나이 등에 널리 분포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모리아산 동쪽 경사진 면과 골고다 계곡 등에서 흔히 자라고 있다.

 우리는 가시라 하면 일반적으로 장미과 식물의 날카로운 가시를 연상하기 쉽다. 그런데 이 대추나무는 가지가 길게 자라면 늘어지는 성질이 있다. 나무의 가시는 단단해 바늘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나 길이는 짧은 편이다. 이 나무 열매는 대추야자나 무화과처럼 훌륭하고 귀한 과일은 아니어도, 먹을 수 있는 과수였으므로 도처에 심어서 가꾸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대추나무는 가시가 있어도 머리에 맞게 둥굴게 엮는데도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 로마 병사들이 칼로 쉽게 잘라서 가시관을 틀어 엮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가시가 있는 나무는 수십 종류에 이르며 여러 가지 비유에 사용했다. 성경에서는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표현에서부터 위협과 위험의 가시나무 이미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가시나무는 항상 부정적으로 사용했다. 주로 형벌과, 무가치함과 비생산적인 것을 강조하려고 사용했다. "게으름뱅이의 길은 가시밭 같지만 올곧은 이들의 앞길은 잘 닦여 있다"(잠언 15,19).

 또한 가시나무는 가치가 없어 버리거나 태워버려야 한다고 비유한 대목도 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게 되면 쓸모가 없어서 오래지 않아 저주를 받고, 마침내는 불에 타 버리고 맙니다"(히브 6,8). 예수님 비유 중에는 가시밭에 떨어진 씨에 대한 언급도 있다(마르 4,18-19).

 사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 고난의 시작인 가시 면류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시관은 조롱과 모욕의 대명사인 동시에 인류 구원을 이루는 승리의 월계관이기도 하다.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마태 27,29).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요한 19,1-5).

 명동성당 사제관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큰 석상이 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 머리 부분에 철근과 큰 쇠 못으로 가시관을 만들어 놓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석상 밑 부분에 세 개의 굵은 쇠못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 큰 쇠못을 보면 우리 죄인들이 가시관도 모자라 예수님에게 못을 박고 있다는 통회가 절로 된다.

[평화신문 200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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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에 관한 묵상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가 주님과 나눈 많은 영적 대화 중에서 그가 나자렛으로 가기 위해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떠나려던 1897년 1월 23일 로마에서 묵상하던 내용을 여기 소개한다.



"우리 아버지"


나의 하느님, 우리가 당신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시니 당신께서는 얼마나 선하신 분입니까!

제가 누구이기에, 저의 창조주, 저의 왕, 저의 최고의 스승께서 제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신단 말입니까? 그렇게 허락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부르도록 명령까지 하신단 말입니까?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얼마나 선하신 분입니까!

이토록 자애로운 명령을 저는 제 일생의 매순간에 얼마나 잘 명심해야 하겠습니까! 이 명령은 또한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특히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까! 당신께서는 저의 하느님이시고 아버지이시니 저는 항상 당신께 얼마나 큰 희망을 품어야 마땅한 것입니까!

또한 당신께서는 제게 너무나도 선한 분이시니, 저로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없이 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당신께서는 나의 아버지,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시니, 저로서도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이든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상관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형제의 마음을 한없이 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황공한 마음, 감사, 신뢰, 변함없는 희망, 하느님께 대해서는 자녀의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형제애를 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제가 예수님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이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저의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저는 감사와 사랑과 순명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참으로 충직한 아들,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하면서 살고 또 그렇게 죽었으면 합니다. 아멘.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의로우신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 기타 다른 모든 호칭보다도 역시 이 호칭을 고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나의 하느님, 그것은 기도하는 순간부터 제 영혼을 이 초라한 지상에서 높이 들어올려서,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제 영혼이 항상 머물러 있어야 마땅한 곳, 즉 자신의 고향인 하늘나라에 옮겨다 놓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또한 기도의 첫마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를 희망과 평화 속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하여 신뢰와 더불어 희망과 아늑한 평온함을 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또한 우리 아버지, 우리의 하느님,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그분,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그분께서 무한한 행복으로 영원히 행복을 누리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기쁨에 잠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나의 주님, 우리는 이 말로 무엇을 간청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 우리는 우리 열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 우리 삶의 목적과 끝이 되는 모든 것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과 그들의 구원이 드러나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당신의 영광과 그들의 완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이 말이 포함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이 우리의 모든 기도와 생애 전체의 유일한, 동시에 이중적인 목적입니다. 나의 하느님, 이 기도를 당신께서 들어주시도록 우리는 얼마나 지극한 사랑과 열성으로 호소해야 마땅한 것이겠습니까!

오로지 이 말을 이루도록 지상에 오신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자주 이 말을 입에 올리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이 말을 통해서 아버지께 간청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것을 그분 자신은 얼마나 자주 하느님께 간청하셨겠습니까!

이 열망은 그분 성심의 가장 간절한 열망이었고 이 말의 실현이 그분의 생애의 모든 일의 목적이었듯이, 이 기도는 그분의 간청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기도가 또한 우리의 기도, 우리의 열망의 기초도 되었으면 하며, 주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간청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도의 대부분까지도 우리 주님을 본받아서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도 그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처럼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거룩하신 모범과 같이 우리는 이것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오로지 이것을 위해서만 삽시다. 우리의 호소와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이름을 빛내는 방향으로 집중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집중했으면 한다.

구세주의 모든 호소와 말씀과 행동이 모두 이 목적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랬으면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특히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또한 이러저러한 개인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공동이익에 기여하는 개별적인 대상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보잘것없는 우리 행동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오로지 개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뿐이지만, 그 행동을 하느님께 바치고, 공동이익을 위해 활용하자.

무한을 다루는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이에 관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과 영혼들의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요구를 위해 거의 대부분을 바치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이 간청을 통해서 내가 간청하는 것은 앞의 구절을 통해서 간청한 것과 똑같다. 즉,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과 영혼들의 구원을 간청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신다는 것은 실제로 무슨 뜻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우러러본다는 것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분을 전능하시고 가장 사랑을 받으시는 왕으로 모시고 순명할 마음이 있다는 것, 축복받으신 이 왕을 극진히 섬기기 위해 힘껏 달려간다는 것, 그분의 가장 사소한 요망마저도 가장 철저하게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영혼을 다한다는 것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왕을 마음을 다하여 섬기겠다는 비할 바 없는 이 열성이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과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의 첫 번째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목적으로도 삼으신 이 목적 안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호소하고 모든 행동을 통제할 의무를 얼마나 크게 지고 있는가! 이 간청은 우리의 고도와 생각과 소망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얼마나 큰가!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이고, 그분께서 일생 동안 바치신 기도와 아버지 하느님과 나누신 대화의 기초로 이것을 삼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간청은 앞의 두 가지 간청과 똑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성화라는 두 가지를 간청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간청한다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 되기를 간청한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의 거룩함이란 그것을 통해서 지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우리 주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시는 기도 속에서 그분께서는 내가 다른 모든 간청에 앞서서 아버지의 영광이 지상에서 드러나는 일과 사람들의 성화를 세 번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이 두 가지 목적을 얼마나 가슴 깊이 간직하셨는지, 더욱이 이것들을 지상에서 보내신 자신의 생애의 목적으로 삼으셨던 만큼, 얼마나 간절하신 심정으로 이것들을 자신의 호소와 기도의 기초로 삼으셨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혼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데 합당한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크게 기쁘시게 만드는 지를 아울러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분의 가장 간절한 소망과 필생의 사업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거스르거나, 특정 영혼의 성화를 지연시키는 모든 일이 그분의 성심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그분께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 아버지 하느님께 항상 간청하신 것, 그분의 눈물과 탄식, 자신의 모든 피를 흘리시면서 구하려고 하신 모든 것과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누구든 그가 저지른 가장 작은 죄를 보거나 그에 관해들을 때, 복되신 성녀 테레사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우리 주님의 정신으로 얼마나 충만해 있는지를 여기서 본다.

우리 주님 당신께서도 유사한 경우에 똑같이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찬미와 영예 그리고 사람들의 성화를 그토록 간절히 열망하시고 사랑하셨으며 적극적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보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니의 정신이 얼마나 빈약한지도 아울러 여기서 본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죄에 대해 성녀 테레사가 느낀 고통, 우리 주님께서 느끼신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생생하게 너무나 느끼지 못하면, 그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열망하는 사랑이 그만큼 빈약하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선행에 대해 극도의 기쁨과 소망을 품어야 마땅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죄에 대해 극도의 고통과 두려움을 사람들이 느끼도록 하려는 열망, 그리고 그들이 가장 작은 죄도 피하게 하려는 열망을 품어야 마당하다(바로 이러한 정신에서 우리 주님께서 성전의 장사꾼들을 내쫓으셨고, 성 요한 크리소스트모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이나 낯선 사람들을 고쳐주고 그들을 때리기까지 원했던 것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오, 나의 하느님, 우리는 이 말로 무엇을 간청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을 위해, 또한 하루에 불과한 현재의 생활을 위해, 다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 양식이란 초자연적인 양식,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유일한 것, 유일한 양식, 그것은 바로 은총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초자연적인 양식이 있는데, 이 양식은 은총과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양식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 생각이 미칠 수 있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이 양식은 너무나도 맛있고 가장 좋은 음식, 즉 지극히 거룩한 성체입니다.

그러나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은총과 성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양식을 간청할 때 저는 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즉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간청한다는 그것입니다.

주의 기도를 바칠 때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간청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서 또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간청할 따름 입니다.

저 자신을 잊어버릴 것, 저와 이웃을 생각할 것,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서, 또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만큼 자신을 생각할 것 등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일이다.

내가 주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주님께서 내가 실천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우리 주님의 자녀들이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께서 자기 피로 구속하신 우리 모두를 위해 간청하도록 배려할 것.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 주님의 생애와 우리들의 생애의 목적을 이루어주는 것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 다음,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을 그분께 간청하고 또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것을 그분께 간청한 다음, 그리고 그분 자신이신 성체를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그분께 피력한 다음, 이렇게 높은 경지에 올라간 다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기억하며 이런 열망과 이런 욕구와 이런 부족, 이런 목적을 지니고 있는 우리 영혼의 무한한 비참을 기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는 죄인들이니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저지른 모든 사람을 위하여 우리 영혼을 다하여 용서를 하느님께 간청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얼마나 지겨운 것인지,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얼마나 지겹게 여기시는지, 그것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모욕적인 것인지, 아버지 하느님께 저지른 죄 하나 하나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마음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지를 우리는 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시기를 원하셨던가! 그분이 치르신 대가는 얼마나 큰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감정에 동참하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의 용서와 회개의 은총을 간청한다.

우리 자신이 그분께 저지르는 죄에 대한 고통,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거스르는 것을 보는 고통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비명이 되어 우리 마음으로부터 솟아 나온다.

우리가 만일 용서를 베풀어주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진지하게 간청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우리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잘못은 우리가 하느님께 저지르는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준 것,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다는 것, 그러한 잘못을 대수롭지도 않게 여긴다는 것, 그것을 이미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그분께 저지른 엄청난 죄를 또한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용서는 은총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비는 것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나의 주님, 이 말을 통해서 제게 바라시는 것, 제가 무엇을 간청해야 좋을지 설명해 주시고, 다른 것들보다도 특히 이것을 당신께서 바라시는 이유도 설명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우리 생애의 매시간에, 매순간에 "도와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비명이다.

이것은 생애의 모든 순간에 간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모든 기도에 포함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기도 속에 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원수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매순간에 도움을 간청하지 않으면 내 목적을 이룰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않으면 짧은 기도마저도 바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내가 주의 기도를 바칠 때 이러한 간청을 하도록 하신 것은 이것이 매순간에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영혼은 모든 기도에 있어서 백 번이라도 도움을 간청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도와 주십시오"라는 이 비명을 항상 그분께 소리치는 것을 내가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악에서 구하소서"


오로지 죄만이 참으로 악한 것이고 당신을 거스르는 것이면 당신에게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서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또한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구해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들이 거룩하게 되고, 그들의 거룩함이 당신을 찬미하며,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가 바라는 유일한 것 즉 그들의 구원이 확보되게 해주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찬미를 받으시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우리를 악에서, 죄에서 구해주십시오.

이 간청은 앞의 세 가지 간청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간청하는 모든 것,우리 목적을 구성하는 모든 것, 교회의 목적, 우리 주님의 지상의 삶의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우리 목적의 달성에 필요한 것들을 간청하며, 간접적인 방법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한편 앞의 세 가지는 우리의 최종 목적, 즉 하느님이 영광을 직접 간청하는 것이다.


1897년 1월 23일, 로마에서 Charles de Foucauld


[착한이웃] 2007.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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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따라 성지따라 3] '생명의 땅' 갈릴래아 지방

예수님 발자취 생생한 주요 전도 무대



(사진설명)
▲ 갈릴래아 호수는 이스라엘 생명의 젖줄이다. 갈릴래아 호숫물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온 것으로 요르단 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 '예수님의 배'로 불리는 갈릴래아 호수 유람선상에서 국기 게양식을 행하고 있는 순례자들.

▲ 갈릴래아 호수 지류인 요르단 강.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장소로 추정되는 세례터에는 매일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세례 예식을 갖고 있다. <「성지 이스라엘」 중에서>

 나자렛에서 77번 도로로 북동쪽으로 약 30여km를 가면, '생명의 땅' 갈릴래아 지방이 나온다.

 1세기 유다계 로마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갈릴래아 지방의 경계를 서쪽으로 아코와 가르멜 산, 남쪽으로 사마리아와 베트셰안, 동쪽으로 요르단, 북쪽으로 비카 지역 일대라고 기록했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 인근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갈릴래아라는 지명은 호수가 하프 모양의 유다인 전통 악기 '키네레트'를 닮았다해서 구약시대 때부터 유다인들 사이에 "얌 키네레트"라 불리고 있는 데서 유래됐다.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마을은 예수 시대 때 204개나 됐다. 1세기 당시 가장 작은 마을도 1500여명의 주민이 있었다 하니 예수 시대 갈릴래아 지방에는 대략 30여만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주요 활동지로 성경을 통해 잘 알려진 카파르나움이나, 베싸이다, 겐네사렛, 티베리아스, 막달라, 타브가와 같은 어촌 마을과 산중에 있는 코라진과 쿠르시 등이 바로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던 마을이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갈릴래아 지방은 원래 가나안 사람들 땅이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뒤 즈불룬ㆍ아세르ㆍ납탈리 지파 유다인들이 가나안인들과 갈릴래아에서 어울려 살았다(판관 1,30-33). 이후 단 지파 유다인들도 갈릴래아에 정착했다.

 휴경지가 없을 만큼 비옥한 갈릴래아 지방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로마 등 열강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이유로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의 갈릴래아'(이사 8,13-9,1; 마태 4,15)라며 멸시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UN)은 갈릴래아 지방을 신생국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국가 땅으로 나눌 계획이었으나 1948년부터 2년에 걸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와의 전쟁 후 갈릴래아 지방 전역이 이스라엘로 넘어갔다.

 라틴말로 '갈릴래아', 영어로 '갈릴리', 히브리말로 '키네레트'로 불리는 갈릴래아 호수는 복음서에서도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마르코(1,16;3,7)와 마태오(4,18;14,25) 는 '갈릴래아 바다'라고 하고, 루카는 '겐네사렛 호수'(5,1), 요한은 '갈릴래아 바다'와 '티베리아스 바다'(6,1)를 혼용해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말을 그리스말로 옮기는 데서 파생한 혼선 탓이다. 히브리말은 바다와 호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지중해 해수면보다 약 212m 낮은 갈릴래아 호수는 사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길이(남북)21km, 폭(동서)12km, 둘레 52km, 넓이 170㎢, 깊이 49m. 저절로 '와~'하고 탄성을 터뜨릴만큼 장관이다.

 풍광도 수려하다. 3~4월이면 야생 양귀비가 나른한 봄 햇살을 받아 호숫가를 주홍색 꽃빛으로 물들이고, 한 여름에는 대추야자나무와 수초들이 아기 볼살같은 초록의 싱그러움을 뽐낸다. 가을에는 황금 갈대의 고고함과 겨울에는 북풍의 성난 파고를 잠재우는 아침 저녁 햇살의 넉넉함이 순례자들을 여유롭게 한다. 갈릴래아 호숫물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온 것으로 요르단 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갈릴래아 호수는 평화로운 주변 풍광과 달리 무척 변덕스럽다. 한낮에는 잔잔하다가도 일교차가 심한 날이나 기온이 내려가는 일몰 때는 풍랑이 거세진다. 호수 북동쪽에 자리잡은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펜현상을 일으켜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듯한 큰 파도를 만들어 낸다. 지난 1992년 3월에는 높이 3m의 파도가 갈릴래아 호수 서안 티베리아스를 덮쳐 큰 피해를 입힌 바 있다.

 예수께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에서 행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랬듯이 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해 갈릴래아 호숫가를 두루 다녔다. 예수께서는 그러던 중 배에서 풍랑을 가라앉히고(마태 8,23-27; 마르 4,35-41; 루카 8,22-25), 배에 올라 앉아 호숫가에 있는 군중들을 설교하기도 했다(마태 13,1). 또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물 위를 걷기도 했다(마태 14,22-23; 마르 6,45-52; 루카 6,16-21). 예수께서는 또 이 곳에서 12사도를 뽑으시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했다(마태 8,5-13; 루카 7,1-10; 요한 4,43-54).

 오늘날 갈릴래아 호수에는 '예수님 배'라 불리는 유람선이 성업 중에 있다. 지난 1986년 1월에 갈릴래아 호수 서안에서 예수 시대의 배 한 척을 발굴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이 배는 2000여년 전에 축조한 배로 밝혀졌다. 학자들은 삼목과 오크로 만들어진 이 배가 길이 8.3m, 폭 2.3m, 정원 13명 규모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탔던 성경 속의 배(요한 6,16-21)와 흡사하다고 밝혔다.

 상술에 밝은 유다인들이 이 배의 복원된 모습을 똑같이 만들어 '예수님의 배'라 부르며 순례자들을 호객하고 있다. '예수님의 배'에 승선하면 손님을 기분좋게 하면서 주머니를 열게하는 유다인 특유의 상술을 경험할 수 있다. 배가 선착장을 떠나면 선상 국기 게양식을 하며 국가를 틀어준다. 또 각 나라말로 안내 방송을 하고 간간히 흘러간 대중가요도 틀어준다. 유람이 끝나면 각 나라말로 인쇄된 '예수님 배 승선 확인증'도 발급해 준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기를 원한다면 갈릴래아 호수 동편에 자리잡은 엥게브(En Gev)리조트를 적극 권한다. 호수와 바로 붙어 있어 한적하면서도 갈릴래아 호수를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평화신문 제9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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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의 동식물 이야기] -신성한 상수리나무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상수리나무는 참나무 일종이다. 열매로 도토리가 열린다고 해 도토리나무라는 별명도 있다. 또 진짜나무라는 뜻으로 참나무라 부른다. 우리 조상들은재상(公)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소나무(松)가 아니면 모든 나무는 잡목(雜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참나무만은 진짜나무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나라 옛 선비들은 상수리나무에 절(節), 의(義), 도(道)가 있다고 해 품위 있는 나무로 받들었다. 또한 들판에 곡식이 풍년이 들면 도토리가 적게 달리고 흉년에 오히려 많은 열매가 달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상수리나무를 인(仁)까지 갖춘 나무라 했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상수리나무 열매를 꿀밤이라 한다. 그러나 실제는 맛이 떫어서 날로 먹을 수 없지만 묵을 쑤어 먹을 수 있는고마운 나무여서 꿀밤이라는 좋은 이름을 붙여준 것 같다. 참나무류 중에서도 상수리나무를 상목(橡木)이라 했다.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참나무는 신이 깃들어 있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다. 참나무는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신성한 나무로 여겨 많은 전설에 전해져 온다. 여러 종교에서 힘과 장엄함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참나무는 성서시대에 가장 많이 있는 나무였다. 시리아, 레바논, 하란, 팔레스타인의 산지에서 자라며 바위가 많은 구릉지를 2∼3m 높이 관목으로 뒤덮는다. 특히 드문드문 있을 때는 크게 자란다. 대체로 가지를 잘 쳐서 잎이 무성하고 옆으로 퍼져서 아름다운 나무 모양을 만든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상수리나무는 실제로 우리나라 참나무와 유럽 참나무와도 많은 차이점이 있다. 다만 도토리가 열매로 맺어지는 것만 같을 뿐인데, 그 도토리도 모양이나 크기가 다르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땅에 오는 장면에 처음 등장한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거쳐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 성소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창세 12,6).

 이스라엘에서 상수리나무는 특히 큰 나무로 자란다. 또한 이 나무의 도토리는 매우 커서 사람들의 양식이 되기도 했다. 또한 상수리나무가 신성한 나무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세 명의 천사를 통해 나타나실 때 극적으로 보여준다. 어느날 야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가능하면 쉬어가라고 간청했다(창세 18,1-4).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수리 나무 밑에 묘지로 쓸 정도로 이 나무를 영험한 나무로 생각했다. "베델 아래쪽 상수리나무 밑에는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묻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곳을 알론바긋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창세 35,8). 또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쌓기도 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예배와 제물, 종교의식 등에 관련되어 있어서 신성하게 생각했다.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있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거기에서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쳤다"(창세 13,18).

 또한 상수리나무는 성경에서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매달려 죽은 나무로도 중요하다(1사무 18,9-10). 상수리나무는 위용이 모두 건장하고 장수하며 그늘이 수려하다. "아모리인들은 그 키가 잣나무 같았고 힘이 상수리나무 같았으나, 나는 그 열매를 가지째 땄고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다"(아모 2,9).

 상수리나무는 성경에서 힘, 성실, 보호, 장수, 영광, 거짓 가르침에 대한 저항 등의 상징으로 인용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뽐내는 인간도 위대한 상수리나무를 통해 비천한 존재임을 다시금생각해본다.

(사진설명)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 세 천사를 대접하다 , 지거 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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