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건립하기 시작해 1615년 교황 파울루스 5세 때 완성되었다. 삼랑식(三廊式) 라틴 십자형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도 베드로의 성골함을 덮고 있는 주제단 바로 위의 십자형 교차부에 돔이 올려져 있다. 교황의 교회로 쓰이는 이 대건축물은 중요한 순례지이다.








대성당 정면







성당 오른편의 사도 바울로 상







성당 왼편에 있는 성 베드로 상















대성당 내부







사도 성 베드로의 성좌







발다키노(천개) - 성 베드로 무덤 위에 설치된 청동 조형물로 베르니니의 작품







중앙 돔















성 베드로 청동상







삐에타(성모 마리아가 처형당한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 - 미켈란젤로가 24살때 만든 조각품























성당 내 작은 돔 천정화







































성 론지노































성녀 베로니카







성녀 헬레나







































































성 베드로 대광장은 그 폭이 246미터, 광장의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여 미터나 된다.







성 베드로 광장은 베르니니가 1656년에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을 포함하여 세운 것이다.







3천 5백년전 람세스2세의 이 오벨리스크는 A.D. 37~41년에 로마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던 것을 로마 원형경기장으로 가져왔고, A.D. 1586년에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으로 성聖베드로 광장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된 기둥이 각각 네 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으며,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는 그 높이가 16미터이다.















회랑 위에 140개의 대리석상이 세워져 있다.








대리석상은 주로 그 당시까지의 성인, 그리고 교황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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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 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 상이 있는 박물관 입구







솔방울 광장( Court of the Pine )























환경파괴로 오염되고 멸망해가는 지구를 상징하는 지구본























































벨베데레 뜰(Cortil del Belvedere)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큐피드(Aphrodite and Cupid)






그리스 조각가 Leochares의 작품 아폴로(Apolo)







메두사의 목을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Perseus)































헤르메스(Hermes)















BC 2세기경 로도스 섬 출신인 3명의 조각가 아게산드로스·폴리도로스·아테노도로스가 만든 라오콘(Laocoon)







티그리스 강을 지배하는 물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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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 ②















Sala delle Muse의 천정화







































그리스 로마 신화속에 등장하는 '술의 신'







토르소(Torso)기원전 1C에 그리스의 아폴로니우스가 조각한 것인데 미켈란젤로가 깔라 욕장에서 발굴했다고 한다.























































Sala Rotonda(The Round Room)의 천정







Sala Rotonda(The Round Room)







Sala Rotonda(The Round Room) 중앙에 있는 네로 황제의 욕조





























































그리스 십자가형 전시실(Sala a Croce Greca)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의 관























다산을 상징하는 풍요의 여신 (Arte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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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바티칸박물관 (Musei Vaticani) ③
















































































































지도 전시실







지도 전시실의 천정벽화(무아노)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전경-박물관 입구에 있는 안내판의 자료 사진<촬영금지구역>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의 벽화 '최후의 심판'(미켈란젤로)-안내판의 자료 사진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의 벽화 '천지창조'(미켈란젤로)-안내판의 자료 사진







교황님이 출입하시는 문과 계단







































교황청의 근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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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피사 두오모 성당

<사랑정랼그리움카페 >












두오모는 피사의 사탑보다 1세기 정도 앞선 1068년에 짓기 시작했다. 부셰토 Buschetto와 라이날도 Rainaldo의 합작품이며 피사 로마네스크 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조반니 피사노의 설교단앞에는 갈릴레이가 진자의 원리를 발견한 계기가 된 '갈릴레이의 램프'가 있다.















입구인 "피사노의 문"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조각의 대표작이다.
















































































세례당은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용된 건축물로 내부는 음향이 메아리치도록 설계되었다.







































피사의 사탑 [斜塔, Torre Pendente di Pisa]피사의 성당 복합체 가운데 3번째이며 마지막인 구조물로 1174년에 착공된 이 종탑은 56m 높이로 설계되어 흰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기단이 가라앉아 수직면에서 5.2m 기울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책임 기술자였던 본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4세기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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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제 마지막인가 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온 백성에게 전하지 못하고 교우들보다 먼저 떠남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내 나이 25살. 짧지도 길지도 않은 4반세기 나의 인생은 모두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하심으로 순교자 집안에 태어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고, 조선인 첫 사제가 되어 이제 순교자 반열에 들어 하느님 나라를 눈 앞에 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영청 군사가 내려친 일곱번째 칼날이 희미해진 마지막 저의 정신을 깨웁니다. 아직 저의 마지막 고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하늘을 향해 꿇었던 무릎도 이젠 세상 사람들을 향해 꿇을 것입니다. 임종을 앞두면 누구나 선해지는가 봅니다. 저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니 말입니다. 제 정신이 또렷한 지금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저와 조선교회를 박해해온 모든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사실 저는 사제로서 사목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직후 상하이를 떠나 1845년 11월 서울에 도착한 다음 올해 5월까지 6개월간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서울 소공동 돌우물골에 은신하며 교우들을 사목했습니다. 그러던 중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성직자 영입을 위한 해로 개척 지시를 받고 돈 400냥을 지불하고 임성룡의 배를 구입했습니다.

 이후 저는 무쇠막과 서빙고, 수원 샘골, 용인을 거쳐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은이에서 1846년 부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날이 어머니와 함께 했던 마지막 미사요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어머니와 교우들은 궁핍한 살림에도 예수님 부활과 사제품을 받고 귀향한 저를 축하하려고 조촐한 잔치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날 막걸리를 제게 권하던어머니의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부활 8부를 지내고 바로 서해안 해로 개척을 위해 마포나루를 출발해 강화, 연평도, 장연 터진목을 거쳐 황해도 작은 섬마을인 순위도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곳까지 항해하면서 상하이에 머물고 계신 메스트르 신부님께 보낼 해도를 그려 중국인 선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순위도 등산나루에서 우리 배를 징발하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날이 1846년 6월5일이었습니다. 포졸들은 내 짐보따리에서 예수성심상과 성모자상, 언문으로 된 기도서를 발견하고는 저희 일행을 곧장 해주 감영으로 압송했습니다. 황해 감사는 저의 체포 사실을 곧바로 의금부에 보고했고, 의금부는 다시 국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저는 체포된 이후 교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중국인이라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제가 중국인 선원들에게 전달했던 해도와 편지가 발각, 압수돼 정체가 탄로나고 말았습니다.

 국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제가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사제가 되어 귀국한 사실에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저는 왕명에 따라 의금부로 다시 압송됐고, 40여차례 문초를 받았습니다. 이 와중에 저와 가까이 했던 이의창(베난시오)ㆍ이재용(이재의 토마스)ㆍ이기원(이신규 마티아)ㆍ현석문(가롤로) 등이 체포됐습니다.

 때마침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 인근까지 와서 기해박해때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님과 모방ㆍ샤스탕 신부님 처형을 책임지고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조정은 이 일을 저와 연계시켜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몰아붙여 군문효수형을 선고했습니다.

 사형선고 다음날인 오늘(1846년 9월16일) 저는 지금 형장인 새남터에 있습니다. 박해자들이 예수님께 갖은 모욕을 다했듯이 군사들은 제 속바지까지 벗기고 두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횟가루를 뿌리고 갖은 희롱을 했습니다.

 저는 군중들에게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진실로 저는 우리 민족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천주교 신앙을 고백하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제가 기쁘게 죽을 수 있는 것도 이전의 순교자들처럼 저의 희생이 조선교회의 초석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25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이 태어나려 합니다.

 "교우 여러분, 부디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돕고 큰 사랑을 이뤄 이 환난을 이겨내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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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천주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에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페레올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페레올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시며, 최초의 서양학문 유학자이시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사목하셨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25통의 옥중서한을 통해 탁월한 학문의 지혜와 신자들을 배려하는 목자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신부님은 한국인으로서 전통 관습을 가장 잘 이해한 목자이셨다. 또한 관헌들의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타협을 모르는 불 같은 신앙으로 모든 후배 사제의 신앙적 귀감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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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넓은 하마탕 들녘

오랜동안 방치되고 있는 하마탕성당

성당 한 벽에 선명한 분도회의 다섯촛대 상징

지금도 시간이 정확한 해시계


왕청 천주교회

하마탕을 아시나요

김 성 련


연변 왕청(汪淸) 땅, 가야하 따라 북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하마탕(蛤蚂塘) 동네. 입구는 좁은 것이 갈수록 넓어지고 맑은 내와 푸른 초장(草場), 밭고랑은 한없이 이어져 구릉을 넘는데 고랑고랑 파릇파릇 작은 잎 떨치고 자라는 옥수수와 콩.


여기는 하마탕 ‘개구리 연못’이라는 이름으로 넓은 들에 비해 마을은 오히려 작고, 골목에 들어도 마주치는 사람 적은 곳. 분도회 성당(聖堂)은 이전 육백여명 신자로 붐볐는데 대륙이 혁명에 혁명을 거치면서 따뜻한 사랑도 고상한 믿음도 무너져 풍비박산(風飛搏散). 성당은 소외양간이 되었으나 소가 살찌지 않았고, 기름방앗간으로 바꾸었으나 기름이 나지 않아, 종국에는 동네 가운데 어색하게 서서 세월 따라 낡아갔다.


왕청 땅 하마탕 동네, 코 큰독일 신부(神父) 목자(牧者)되어 일군 성소(聖所)가 지금은 앞뒤로 염소 돼지집 거느리고 한쪽 어깨는 부서져 내리는데, 이마에는 아직도 다섯 촛대 선명하게 새긴 채 푸른 하늘을 받치고 오늘도 서 있다.

2008.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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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ms.zerois.net/

천안 성거산(聖居山) 교우촌과 순교자 묘지 약술안내(略述 案內)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도 보기 드문 해발 579미터로 차령산맥 줄기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천연(天然)성지이다. 특히 봄, 가을에는 들꽃과 단풍으로 여름과 겨울에는 울창한 숲과 환상적인 눈(雪) 경치로 장관을 이루어 찾아온 순례자들은 감탄을 하곤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는 3가지로 약술(略述)하여 소개 할 수 있다.

성거산 성지는 박해시기에 마을에서 살 수 없었던 신자들의 이주 현상이 일어나면서 형성된 교우촌과 이 교우촌에서 사목 및 활동하셨던 선교사들 그리고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신 순교자들을 소개 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의 이주기(移住期)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과 1830년대에 형성된 서들골(일명 서덜골) 교우촌은 박해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신처요 은신처였다. 특히 소학골은 한 때 칼래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서들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의 큰 아버님인 최영렬씨가 1827년 고향 청양 다락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여 살았고, 1839년의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님의 둘째 동생인 최선정(안드레아)가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이곳에서 잠시 성장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부터 계속 생겨난 교우촌들은 점점 통 폐합 되었다가 1920년에 와서는 7개의 교우촌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1845년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박해시기인 1851년부터 1861년 10월까지 이 곳 교우촌에 순방하고 관련을 맺었던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를 보면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 페롱신부, 권스타니슬라오 신부, 프티니 콜라 신부 등이 사목방문을 하였고, 1861-1866년 10월까지 이어서 조안노 신부, 페롱신부, 칼래 신부 등이 사목방문 및 활동을 하였다. 특히 칼래 신부님은 1864-1866년 10월까지 소학골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또한 병인박해의 목천 순교사를 보면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이 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포졸들이 덮쳐 이 곳 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잡혀 모두 23명이나 순교하게 되었다. 소학골 교우촌 9명, 서들골 교우촌 4명, 복구정 교우촌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 모두 23명이나 된다. 이들은 서울 좌포도청(11명), 공주감영(6명), 청주(2명), 죽산(3명), 미상(未詳 1명)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병인년 10월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 한 배문호(베드로)와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나자로). 고요셉과 최씨 며느리 등 5명의 시신만이 성거산 성지 제1줄 무덤에 묻혀 있다. 이 이외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현재 이 곳 성지에 이전(移轉)한 여섯분들의 증언과 순교자들 후손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 곳에 묻혀 계신다고 한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증거한 장한 순교자님들은 그 동안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들꽃들과 벌, 나비,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성지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 묘소는 침묵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제는 신앙인의 순례의 선교지가 되고 있다. 달이 바뀔 때마다 주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화는 마치 우리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과 신앙 때문에 흘린 피를 상징하듯이 오는 순례자들을 반기고 있다.

1) 성거산 자락의 교우촌들(1800년부터 1920년까지 무려 7개의 교우촌 형성)

① 소학골 교우촌(현 천안시 목천읍 납안리 )

성거산 자락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동쪽자락에 위치해 있고, 목천읍 석천리의 산방이와 먹방이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거산 교우촌의 이름이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1839년 기해박해 직후였다.

그러나 소학골은 1800년 초 신유박해 이후 신자들이 하나 둘 이주해와 정착하였다. 처음부터 정주형 교우촌이자 신자 공동체 형으로 정착하였다. 이 공동체는 전교 자유기까지 변함없이 신앙공동체 유지되어 왔다.

② 서덕골(서들골) 교우촌: (현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의 서덕동)

성거산 남서쪽 자락에 위치한 서들골은 1830년 초부터 알려져 왔다.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최양업(토마)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1827년 무렵 고향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이 목천 서들골의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의 첫째 아우인 최의정(야고보)가 겨우 13살로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모친 이성례(마리아)가 모두 순교하면서 어린 동생들의 양육을 담당할 수 없게 되자 모두 친척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성거산 교우촌은 오랫동안 교회사에 서 그 이름을 감추게 되는데 그 이유는 소학골이나 서들골 두 마을 모두 외딴 산간 지대에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보다 비밀 공동체가 철저하게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 먹방이 교우촌(1884년, 두세신부) 공소 신자수가 128명; 현 목천면 석천리)
    ◈ 매일골 교우촌(1895년, 퀴를리에 신부; 현 목천면 송출리)
    ◈ 사리목 교우촌(1901년, 드비즈)
    ◈ 석천리 교우촌(1913년, 공베드로 신부); 112명(현 목천면 석천리)수
    ◈ 도촌 교우촌(1919년, 공베드로 신부); 110명(현 북면 납안리)
    ◈ 납안리 교우촌(1920년, 공베드로 신부) 5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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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



제1처

예수님.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비난이나 저주,욕설이나 사형선고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세상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아오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채워 주십시오.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님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제2처
예수님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어떤 십자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질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십자가는 결코 주시지 않는다는 것과, 지쳐있을 때 마다 편히 쉬게 해주시는 당신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3처

예수님 첫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시련없이 살아온 사람은 미성숙하며 굴욕에서만 살아온 사람은 비굴해지기 쉬습니다. 시련과 굴욕을 성숙과 겸손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4처

예수님, 어머니와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우리가 어머니께서 받은 사랑의 일부만이라도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곧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가까이 있는 이웃부터 관심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며.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5처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거짓 사랑보다는 차라리 미움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사랑으로 자신과 이웃을 속이는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행동이 따르는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증거하게 해주십시오.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6처

베로니카, 예수님의 얼굴을 씻어드림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여! 사람은 자기자신의 모습과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밝은 것만을 마음속에 품게하시어 당신의 모습을 닮게 해 주시고,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잠시묵상)

(어머님께 청하오니......)



제7처

예수님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여!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태도로 대하게 하소서. 때와 장소에 따라 능숙하게 변신하는 변절자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 만나는 사람모두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시어 그들 모두 정성껏 대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8처

예수님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악인을 선인으로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남을 책망하는 것은 쉽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신에게는 엄하게 하되, 타인에게는 늘 관대하여, 언제나 위로의 말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9처

예수님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시련 중에 있을 때 더욱더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매달리는 우리입니다. 세상일이 너무 순조롭게 뜻대로 이루어져 당신을 외면하고 살기 보다, 차라리 꾸짖음과 매로인한 시련을 통해 당신께 가까이 가지를 원합니다. 방심하지 않도록 늘 꾸짖어 주십시오.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0처

악당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우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쓰고 남는 것을 주는 것이 참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지라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것, 그것만이 참된 사랑입니다. 받는 데에만 익숙해진 습관과 핑계를 없애 주십시오.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1처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여! 이기심과 위선을 못박게 하소서.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는 천박한 성향을 못 박아주소서. 무관심과 오만을 못박게 하소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과 치기를 못 박게 하소서. 태만과 무절제와 적당주의를 못박게 하소서. 이 못박히는 고통으로 인하여 비로소 온갖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이상향에 다다를 수 있음을 믿나이다. (잠시 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2처

예수님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남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간관계를 파괴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잠시 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이 내리워짐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안에 계시는 당신 때문이오니,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무르시어 모두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잠시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4처

예수님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사욕을 품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보고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고린토13,4-7) 우리모두가 사랑을 알게 하시고 사랑하는 자 되게 하시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도록 해주십시오. (잠시 묵상)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15처 .

예수님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님,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큰 사랑을 주소서. 사랑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시고,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시며, 사랑으로 부활하게 하시어 영원히 주님과 하나되게 해주소서. (잠시 묵상)

(주의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친다.)


(위 기도문은 김춘경 수녀님이 지은 『십자가의 길. 인간회복의 길』에서 발췌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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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성지서 나를 되돌아본다

천주교 대전교구설정 60주년 기념 문화피정

▲성거산 성지 성모광장

천주교 대전교구설정 60주년을 기념해 성거산 성지에서 특별한 일일 문화피정(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일)이 열린다.

26일 오전 11시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 성지 성모광장에서는 대전교구장 유흥식(라자로)주교 집전으로 천주교 신자 1200여명이 참석하는 미사와 야생화 전시회, 교우촌 사진전이 열린다.

이날 문화피정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성거산 성지가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1801년부터 1920년까지 무려 120년 동안이나 이어져 내려온 교우촌이며 13년에 걸쳐 교우촌을 복원하고 야생화를 심어 무명순교자들을 기려온 한 신부의 땀과 눈물로 이뤄진 곳이라는 점 때문이다.

성거산 성지는 박해시기에 마을에서 살 수 없었던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도 지역의 신자들이 이주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성거산 성지 교우촌은 모두 7개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이주기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과 1830년대에 형성된 서들골(일명 서덜골) 교우촌은 박해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중요한 피신처요 은신처였으며 1920년까지 유지되다 사라졌다.

7개의 성거산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때부터 발각이 되기 시작해 계속 포졸들이 덮쳐 교우촌에 거주하던 신자 23명이 서울 좌포도청, 공주감영, 청주 죽산 등에서 순교했다.

성거산 성지는 제1줄무덤과 제2줄무덤에 지금까지 73명의 순교자 유해가 발굴돼 묻혀 있으며 순교자 후손들의 증언과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 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지난 1995년부터 역사적 고증작업을 통해 성지를 복원하기 시작한 정지풍(아킬레오)신부(61)는 1998년 천주교 대전교구장으로터 성지승인을 받아 13년째 교우촌을 복원하고 있으며 일생을 박해당시의 교우촌 움막집 복원, 무명순교자 시신발굴에 바치고 있다.

아킬레오 신부는 침묵의 역사속에 숨겨져 있는 무명 순교자들을 위해 21만4500㎡(6만5000여평)의 성거산 성지 일대에 야생화를 심고 있으며 이곳은 이제 120년이나 유지됐던 교우촌, 야생화 동산으로 유명해지면서 연간 4만명 이상이 찾는 신앙인들의 순례지, 피정지가 되고 있다.<천안=김정모 기자>

▲정지풍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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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àMichelangelo (1475-1564)Pietàc. 1550Marble, height: 226 cmMuseo dell'Opera del Duomo, FlorenceMichelangelo (1475-1564)Palestrina PietàMarbleGalleria dell'Accademia, FlorenceMichelangelo (1475-1564)PietàMarble, 149968 1/2 x 76 3/4 inches (174 x 195 cm)Basilica di San Pietro, VaticanMichelangelo (1475-1564)Pietà Rondanini, (unfinished)1552-64Marble, height: 195 cmCastello Sforzesco, MilanUNKNOWN MASTER, FrenchPietà1500-20MarbleParish church, Bayel (Aube)Baccio Bandinelli (1493-1560)PietàMarble, 1554-1559SS. Annunziata, FlorenceUNKNOWN MASTER, HungarianPietàc. 1500Wood, height: 89 cmHungarian National Gallery, BudapestUNKNOWN MASTER, SpanishPietàc. 1550Painted woodMuseum of Fine Arts, BudapestGregorio Fernandez (1576-1636)PietáPolychrome woodPrivate collectionNicolas Coustou (1658-1733)PietàMarble, 1712-172890 1/2 x 110 1/8 inches (230 x 280 cm)Private collectionQUELLINUS, Artus IPietà1660sPolychromed wood, height 147 cmO.-L. Vrouwekathedraal, AntwerpAntonio Montauti (1685-1740)PietàMarble, 1734Public collectionGeorg Raphael Donner (1693-1741)PietàLead, 1740-174186 1/2 x 110 1/8 inches (220 x 280 cm)Private collectionGÜNTHER, Franz IgnazPietà1758Painted woodSt Rupert Parish Church, Kircheiselfing
Pietà(피에타)
이탈리아어로 경건한 마음, 경건한 동정(同情)이라는 뜻으로 “신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 명사가 쓰인다.
고유명사로서는 그리스도교 미술에 자주 표현되는 주제로, 보통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안은 구도를
특히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죽은 예수를 마리아가 등 뒤에서 받치기도 하고(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등), 예수의 시체를 지상에 눕혀
놓은 것도 있으며(피옴보의 비테르보의 피에타 등), 시신을 둘러싸고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서 막달라 마리아, 아리마타야의
요셉, 니코데모, 사도들, 성자 등이 그 죽음을 애도하는 것(조토의 스크로베니성당의 벽화 등)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모두
‘피에타’라고 한다.

이런 주제의 내용은 성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 주제의 출현은 성스러운 금요일에 죽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지고 그
시신을 매장하기 직전에 먼저 성모 마리아(앞에 기술한 대로 많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가 예수의 시신에 매달려서 통곡했을
것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심정의 시각화로 생각된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안은 구도는 13세기 독일의 종교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4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그뛰어난 예술적인 표현이나 번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 예술가들에 의해 많이 다루어졌다.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3부작(로마 산 피에트로대성당, 피렌체대성당, 밀라노의 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성의 론다니니피에타)》을 비롯하여
조반니 벨리니(밀라노 브레라미술관), 바르톨로메오(피렌체 피티미술관), 로렌초로트(브레라미술관) 등의 걸작이 속출했다.
루브르미술관의 15세기 패널화《아비뇽의 피에타》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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