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직전의 당당한 모습>


安重根이 入敎후 그의 신앙활동에 대하여 그는 옥중의 자서전 안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경문을 강습도 받고 道理를 토론도하기 여러 달을 지나, 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가고 달이가서 몇 해를 지났다.


그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홍신부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安重根의 장황한 교리해설 연설문은 천주교회의 기본교리인 1. 천주존재, 2. 상선벌악, 3. 영혼불멸, 4. 강생구속 등의 교리를 참으로 쉽고 일목요연하게 해설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이 편하게 알아듣기 쉽게 비유와 동양적 故事를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安重根은 비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의 열의와 전교 활동이 청계동 시절에만 보였던 일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獨立戰爭 時에도, 또한 殉國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하곤 하였다. 그는 독립전쟁 중, 함경북도 慶興부근과 新阿山 부근에서 전개되었던 제 2 차 전투에서 약 10명의 일본 군인들과 상인들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人道主義와 國際 公法에 따라 이들을 석방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노출됨으로써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장마비가 거침없이 퍼붓는 상황에서 일본군에 쫓겨 산속을 헤매면서 열 이틀 동안 단 두 끼의 밥을 얻어먹는 극도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동료들에게 "전일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하는 구원을 받을 것"을 권면하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가톨릭의 주요교리들을 설명한 다음, 그들의 동의에 따라 교회의 규칙대로 洗禮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水野吉 太郞에게도 신앙을 가질 것을 권함으로써 죽기 직전까지 전교 활동을 하였다.


安重根이 강한 信仰心을 갖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몇 가지의 단편적인 사례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례 받은 이후의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의 신앙적 특성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트크를 중심으로 연추,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의 망명생활과, 유격전 독립전쟁 중에도 매일 아침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정도로 기도생활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공판 과정에서 통역을 담당하였던 園木末喜가 1910년 3월 15일 統監府 總務長官 石塚英臧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처형을 앞둔 安義士가 洪 빌렘 신부에게 고백한 내용으로 1908년 겨울 한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 安義士는 이상한 체험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安도마는 전에 露領에서 義兵에 투신한 시기 당초의 奇夢이라 하여 말하기를, 安도마가 진남포 古家의 自室에 있었는데, 홀연히 찬연한 무지개가 九天에 걸렸는데, 그 빛나는 한가닥 빛이(閃閃한 一端)이 점차 교자에게 접근하면서 바야흐로 頭上을 晛射하려는 찰나에 다시 출현한 성모 마리아가 그 묘한 纖手를 펴서 안도마의 胸間을 위무하면서, 놀라지 말라,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분부와 함께 다시 황홀하게 失現하심으로 추모하는 고민에 뜻밖에 잠을 깨자 바로 이것이 南柯의 一夢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다 듣고 나(洪 빌렘 신부를 지칭함)는 마치 일종의 신비에 접촉한 자와 같이 황홀히 명상하기를 약간 길게 하다가 문득 그것은 신념이 그렇게 시키는 바 무엇인가의 前兆였을 것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安義士는 동지 11명을 소집하여 「斷指 同盟」을 했다.


安重根이 기도 생활에 어느 정도나 충실하였는가는 다시 이또오를 제거하기 전날과 의거 당일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은 25일 오후 한 시경 차로 다시 하얼빈으로 되돌아 왔다. 그날 밤 安重根과 류동하는 김성배의 집 객실에서 문을 걸고 창문 커텐을 친 다음 칼줄로 권총탄알 끝을 뽀족하게 갈고 '†'를 새겨 7발을 장탄해 놓았다.… 安重根은 장탄한 후 조용히 되뇌이었다. '하느님께서 부디 거사의 성공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 그어 례배를 하였다."


"서양 복장에 캡을 쓴 安重根은 문을 나설 때 '†'를 그으며 '하느님께서 부디 성공을 주십시오'하고 입속으로 되뇌이었다.


"이때 이등방문이 절망하였다는 말을 들은 安重根은 聖像이 있는 벽을 향해 '†'를 그으면서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하느님께 례배를 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문: "체포되었을 때 伊藤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그대는 伊藤을 죽였으므로 神에게 감사한다 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는가?"

답: "그렇다. 그 후 나는 大韓萬歲를 불렀다."


위의 예와 같이 의거를 전후하여 하느님께 기도했던 安重根의 행동들을 보면, 그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주살하는 목적을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행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의거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주님께 기도하였고, 저격용 총알에는 십자가까지 새겼으며, 저격이 성공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가슴에다 십자가 성호를 그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애국행위와 민족을 구원하는 임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인식은 재판 과정에서 행한 그의 진술과 그의 자서전에서도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의 신심은 殉國 직전에 임해서도, 그는 특별히 告白聖事를 받기위해 교도소 당국에다 자신의 세례신부였던 빌렘 신부를 초빙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가족들에게는 신앙심에 충만한 유언들을 남겼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고, 한편 "평소 장남 '분도'를 신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먼저 천국으로 가니 꼭 하느님께 바치어 신부가 되도록 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빌렘 신부에게는 세례성사를 준 것과 죽음의 준비를 잘 하도록 중국에까지 왕림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자신을 위한 기도와 신자들에 대한 문안을 부탁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빌렘 신부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당시의 신문기사에 잘 나타나고 있다.


"安 토마스는 갈바리아의 희생 공로를 그의 贖罪로 이끌어 오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사형 집행을 예수 수난일인 3월 25일에 해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請이 허락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어떤 숨은 이유에서가 아니라, 일본의 많은 知性人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迷信으로 인해 하르빈 사건과 같은 날짜인 26일, 그리고 같은 시간까지도 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正義라면, 날짜와 시간의 우연한 일치를 통해 복수하려는 태도는 피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순국 직전 두 아우와 빌렘 신부에게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 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겼으며,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는 '3분 간이나 기도를 하고 刑臺에 올라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고' 순국하였다. 처형을 당할 때, 그의 주머니에는 예수의 像本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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