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
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는 일,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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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산성(城子山城)과 짝을 이룬 평지성인 하룡고성(河龙古城)은 지금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 마을 촌로의 말에 의하면 집체시기(공산,문화혁명) 이전에는 한변의 길이 250m, 성벽높이 2m, 성벽위 넓이 5m 정도의 토성이 있어 어린 시절 뛰고 미끄럼타고 놀았는데, 혁명시기에 옛날 엄청난 지주의 성터라고 하며 다 허물어 집을 짓고도 남아 많은 돌을 가져다 버렸다고 한다.
성자산성에서 내려다본 평지고성이 있던 하룡 마을
하룡마을에서 올려다본 산성이 남아있는 성자산
하룡마을에서 어렵게 찾은 고성의 일부 성벽
길이 10m에 넓이 5m정도의 성벽 위
밖에서 본 성벽의 일부
토담으로 남은 성벽과 고구려의 유물인창고 부경
하룡 마을은 옛날을 잊고 평화롭고
마을 뒤의 논은 수량도 풍부한 옥답이다
연길 동쪽 부르하통화와 해란강이 합수하여 구비치는 곳에 고구려, 발해, 요, 금, 동하국을 거치며이 지역의 요새지로 지켜왔던 성자산성이 있는데 성 아래 마을 이름도 산성촌이다.
성자산 전경. 산줄기가 말발굽처럼 에워싸고 그 산을 강이 감돌아 흐르는 요새 지형이다
표지석 정면
표지석 뒷면
산성 정상부. 두툼한 성벽이 끝없이 이어진다
드물게 성벽이 잘 남아있는 곳
남아있는 성벽도 이렇게 무너지고 있다
성 정상부에서 바라본 연길 분지
성에서 바라본 마반산
성에서 내려다본 부르하통하와 하룡, 소하룡 마을
산자락이 모여 나가는 출구. 동네는 산성촌이고 도문행 열차가 지나간다
성안 구릉지. 왕궁터로 보고 있다
무수한 기왓장과
도기 파편들이 뒹굴고 있다
<순국 직전의 당당한 모습>
安重根이 入敎후 그의 신앙활동에 대하여 그는 옥중의 자서전 안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경문을 강습도 받고 道理를 토론도하기 여러 달을 지나, 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가고 달이가서 몇 해를 지났다.
그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홍신부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安重根의 장황한 교리해설 연설문은 천주교회의 기본교리인 1. 천주존재, 2. 상선벌악, 3. 영혼불멸, 4. 강생구속 등의 교리를 참으로 쉽고 일목요연하게 해설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이 편하게 알아듣기 쉽게 비유와 동양적 故事를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安重根은 비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의 열의와 전교 활동이 청계동 시절에만 보였던 일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獨立戰爭 時에도, 또한 殉國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하곤 하였다. 그는 독립전쟁 중, 함경북도 慶興부근과 新阿山 부근에서 전개되었던 제 2 차 전투에서 약 10명의 일본 군인들과 상인들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人道主義와 國際 公法에 따라 이들을 석방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노출됨으로써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장마비가 거침없이 퍼붓는 상황에서 일본군에 쫓겨 산속을 헤매면서 열 이틀 동안 단 두 끼의 밥을 얻어먹는 극도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동료들에게 "전일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하는 구원을 받을 것"을 권면하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가톨릭의 주요교리들을 설명한 다음, 그들의 동의에 따라 교회의 규칙대로 洗禮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水野吉 太郞에게도 신앙을 가질 것을 권함으로써 죽기 직전까지 전교 활동을 하였다.
安重根이 강한 信仰心을 갖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몇 가지의 단편적인 사례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례 받은 이후의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의 신앙적 특성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트크를 중심으로 연추,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의 망명생활과, 유격전 독립전쟁 중에도 매일 아침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정도로 기도생활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공판 과정에서 통역을 담당하였던 園木末喜가 1910년 3월 15일 統監府 總務長官 石塚英臧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처형을 앞둔 安義士가 洪 빌렘 신부에게 고백한 내용으로 1908년 겨울 한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 安義士는 이상한 체험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安도마는 전에 露領에서 義兵에 투신한 시기 당초의 奇夢이라 하여 말하기를, 安도마가 진남포 古家의 自室에 있었는데, 홀연히 찬연한 무지개가 九天에 걸렸는데, 그 빛나는 한가닥 빛이(閃閃한 一端)이 점차 교자에게 접근하면서 바야흐로 頭上을 晛射하려는 찰나에 다시 출현한 성모 마리아가 그 묘한 纖手를 펴서 안도마의 胸間을 위무하면서, 놀라지 말라,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분부와 함께 다시 황홀하게 失現하심으로 추모하는 고민에 뜻밖에 잠을 깨자 바로 이것이 南柯의 一夢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다 듣고 나(洪 빌렘 신부를 지칭함)는 마치 일종의 신비에 접촉한 자와 같이 황홀히 명상하기를 약간 길게 하다가 문득 그것은 신념이 그렇게 시키는 바 무엇인가의 前兆였을 것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安義士는 동지 11명을 소집하여 「斷指 同盟」을 했다.
安重根이 기도 생활에 어느 정도나 충실하였는가는 다시 이또오를 제거하기 전날과 의거 당일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은 25일 오후 한 시경 차로 다시 하얼빈으로 되돌아 왔다. 그날 밤 安重根과 류동하는 김성배의 집 객실에서 문을 걸고 창문 커텐을 친 다음 칼줄로 권총탄알 끝을 뽀족하게 갈고 '†'를 새겨 7발을 장탄해 놓았다.… 安重根은 장탄한 후 조용히 되뇌이었다. '하느님께서 부디 거사의 성공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 그어 례배를 하였다."
"서양 복장에 캡을 쓴 安重根은 문을 나설 때 '†'를 그으며 '하느님께서 부디 성공을 주십시오'하고 입속으로 되뇌이었다.
"이때 이등방문이 절망하였다는 말을 들은 安重根은 聖像이 있는 벽을 향해 '†'를 그으면서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하느님께 례배를 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문: "체포되었을 때 伊藤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그대는 伊藤을 죽였으므로 神에게 감사한다 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는가?"
답: "그렇다. 그 후 나는 大韓萬歲를 불렀다."
위의 예와 같이 의거를 전후하여 하느님께 기도했던 安重根의 행동들을 보면, 그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주살하는 목적을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행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의거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주님께 기도하였고, 저격용 총알에는 십자가까지 새겼으며, 저격이 성공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가슴에다 십자가 성호를 그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애국행위와 민족을 구원하는 임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인식은 재판 과정에서 행한 그의 진술과 그의 자서전에서도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安重根의 신심은 殉國 직전에 임해서도, 그는 특별히 告白聖事를 받기위해 교도소 당국에다 자신의 세례신부였던 빌렘 신부를 초빙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가족들에게는 신앙심에 충만한 유언들을 남겼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고, 한편 "평소 장남 '분도'를 신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먼저 천국으로 가니 꼭 하느님께 바치어 신부가 되도록 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빌렘 신부에게는 세례성사를 준 것과 죽음의 준비를 잘 하도록 중국에까지 왕림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자신을 위한 기도와 신자들에 대한 문안을 부탁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빌렘 신부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당시의 신문기사에 잘 나타나고 있다.
"安 토마스는 갈바리아의 희생 공로를 그의 贖罪로 이끌어 오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사형 집행을 예수 수난일인 3월 25일에 해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請이 허락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어떤 숨은 이유에서가 아니라, 일본의 많은 知性人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迷信으로 인해 하르빈 사건과 같은 날짜인 26일, 그리고 같은 시간까지도 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正義라면, 날짜와 시간의 우연한 일치를 통해 복수하려는 태도는 피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순국 직전 두 아우와 빌렘 신부에게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 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겼으며,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는 '3분 간이나 기도를 하고 刑臺에 올라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고' 순국하였다. 처형을 당할 때, 그의 주머니에는 예수의 像本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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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위대한 여정]
(1)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바람의 노래
![]() |
어릴 적,아버지의 서가에는 빛바랜 초록색 표지의 ‘조선총독부’ 다섯 권이 꽂혀 있었다. 지은이는 유주현. 막 독서에 흥미를 느끼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그 소설에 도전했지만,완독에는 실패했다. 덕분에 그 첫 장면은 수없이 읽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하얼빈 역,프록코트를 입은 이토 히로부미,그리고 일곱 발의 총성. 지금도 내게 그건 기나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지난 10월 11일,블라디보스톡에서 슬라비안카로 가는 카페리 객실에 앉아 끝내 읽지 못한 그 소설을 떠올렸다. 내가 안중근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첫 장면은 막 잘려나간 왼손 무명지 첫 마디에 대한 묘사가 될 것 같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손가락. 나는 연추(러시아명 얀치허) 하리(下里)를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뤼순에 이르기까지,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의 행로보다는 그 손가락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안중근이 김기룡,강기순,박봉석 등 결사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자른 것은 1909년 2월 7일의 일.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부른’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서하자”며 일제히 손을 끊었다.
안중근은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에게 신문을 받으며 단지동맹을 맺은 곳이 러시아와 중국의 경계인 연추 하리라고 했다. 옌치아,연추,카리,하리 등으로 알려진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지금의 크라스키노 부근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항구도시 슬라비안카에서 크라스키노까지는 50㎞ 남짓. 표지판도,가로등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먼지구름과 함께 1시간 남짓 달리다보면 차창 밖 밤하늘에 은하수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변경이다.
중국 훈춘과 국경을 접한 크라스키노는 소읍이다. 조금만 내려가면 두만강이 나오고 그 너머는 북한 회령 땅이다. 그 탓에 19세기 말부터 기근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들어와 땅을 개척했다. 하지만 둘러봐도 보이는 동양인이라고는 호텔에 머물며 자국에서는 금지된 카지노만 즐긴 뒤,곧바로 돌아가는 부유한 중국인들뿐이다.
안중근은 이 소읍의 어디쯤에서 결의를 했을까. 크라스키노에서 훈춘 방향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주카노프카 다리가 나오는데,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는 2002년 바로 이 다리 옆에 불꽃 모양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손가락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연추 하리를 찾으려면 10여㎞ 더 들어가야 한다. 주카노보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우리나라의 남양 알로에 농장이 있다. 농장장은 고려인이지만,그는 안중근은 물론 인근에 300여곳이나 번성했다던 고려인 마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뒤,거기가 한인들이 일군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고려인은 거의 남지 않게 된 셈이다. 강제이주 후 러시아인들이 버려진 한인 가옥의 벽돌과 주춧돌을 날라다 새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까닭에 주카노보 마을 주민들은 옛 한인들의 집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주카노보 마을에서 만난 알렉세이(35)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를 따라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억새밭을 헤치고 가면 거짓말처럼 우물,맷돌,벽돌,묫자리 등이 나왔다. 알렉세이는 내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길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양옆으로 자란 억새에 가려져 잘 보이지조차 않는 작은 길, 그 길이 끝나는 산 밑을 가리켰다. 아,연추 하리!
어릴 적,성묘하러 갈 때면 길 가운데 자라난 풀 때문에 자동차가 쉽게 다니지 못하던 그런 풍경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려 길을 걸어가노라면 금방 새 소리와 풀 냄새와 손등에 와 닿는 바람 때문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그런 길이었다. 모르긴 해도 안중근이 살았던 시절에는 양옆으로 논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맘 때쯤이면 한창 추수를 할 시기이니 그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풍성했을 것이고.
우리는 기슭을 향해 30분 남짓 서둘러 걸었고 거기에는 안중근이 무명지를 자른 동네가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담장으로 사용했음직한 돌무더기와 집터에만 자란다는 주황 꽈리가 홀로 피어 마을의 흔적을 전할 뿐.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12명 결행의 흔적은 모진 세월에 마모되고 말았다.
연추 하리에서는 나라를 잃고 유랑에 나선 조선인의 마음으로 산과 들을 바라봐야만 한다.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산을 뒤로 하고 양지 바른 곳에다가 집을 지었을 것이다. 연추 하리는 그렇게 지은 집들이 대여섯 채 서 있는 마을이었다.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안중근은 그런 집 어딘가에서 나라를 위한 마음을 보이겠노라며 손가락을 잘랐다. 손가락은 아마도 그 들판 어딘가에 묻혔을 테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연추 하리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는 일,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묻힌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억새밭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다. 바람이 불면 전면적으로 억새풀들이 몸을 누인다. 그게 바람이다. 바람은 인간의 길을 노래한다. 쉽게 변하든 그렇지 않든,인간은 걸어간 길을 통해 자신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 손가락을 잘랐다. 그 손가락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2) 세계를 뒤흔든 한 발의 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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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출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호객 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북적이는 하얼빈 역. 불과 100여 년 전에 철도를 따라 건설된 도시의 아침 풍경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이란 끝없이 투쟁하며 문명을 만들어낸다는 명제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지난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가 먼 대륙의 평원을 18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새벽녘 하얼빈 역.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플랫폼에 발을 디디는 순간,네 발 조금 뒤 세 발의 총성,그리고 ‘코레아 우라!’라는 고함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을 수행 중인 31세의 대한국인 안응칠(안중근)이 서 있다. 연추 하리 외딴 시골에 왼손 무명지를 두고 온 사내. 그는 의외로 침착하다.
얼른 철길을 건너 안중근이 던져버린 1900년 식 브라우닝 권총을 집어 든다. 주위에는 안중근이 쏜 총알의 탄피 일곱 개가 흩어져 있다. 서둘러 열어본 탄창에 남은 한 발의 총알. 이 총알의 얘기를 듣기 위해 연추 하리에서 하얼빈까지 기나긴 여행을 한 셈이다. 탄두에는 십자가 그어져 있다.
여러가지 의문이 솟구친다. 안중근은 그 한 발의 총알로 자살을 할 생각이었나. 탄두의 십자는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걸 말해주는가. 그리고 7연발 반자동 브라우닝 권총이 남긴 일곱 개의 탄피와 마지막 한 발. 그것은 미스터리일까,역사의 교훈일까.
브라우닝은 오전 7시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의 가슴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던 오전 9시까지 안중근은 가장 효과적인 저격 지점,오직 그 한 가지만에만 골몰했다.
특별열차가 도착하자,하얼빈에서 이토와 회담하기로 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귀빈칸으로 올라가 이토를 영접한다. 코끝으로 스치는 영하 5도의 바람. 조슈 하급 무사 출신의 이토는 밀려드는 바람에 북국의 풍토를 체감했으리라. 그에게 코코프체프는 의장대 사열을 부탁한다. 마침 이토 도착 하루 전 가와카미 하얼빈총영사가 러시아 군경에 일본인 환영객을 검색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니 결과적으로 가와카미는 안중근이 브라우닝을 들고 플랫폼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토가 기차에서 내리자,악대가 군악을 연주한다. 환영 음악과 함께 이토는 차례로 러시아 악대,러시아 군대,청나라 군대,외교사절단의 순서로 사열한다. 그 순간 귀빈 대합실 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던 안중근은 플랫폼으로 뛰쳐나온다. 공적을 향해 울리는 환영 함성이 그의 심장을 불타게 했다. 러시아 헌병대의 뒷부분에 도달한 순간,이토 일행이 다시 돌아섰다. 2열로 받들어총을 하고 있던 러시아 군인들,그 뒤로 보이는 백발의 이토. 안중근은 선두의 노인을 향해 네 발을 발사한 뒤 침착하게 주위 일본인들을 향해 다시 세 발을 쏜다.
이토의 몸에 박힌 총알은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 안중근은 이토의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오른쪽 팔꿈치 위쪽을 겨냥해서 쏘았다. 이렇게 쏴야만 심장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토는 모두 세 발의 총알을 맞았는데,모두 오른쪽 팔을 지나 폐와 복부에 박혔다. 총알이 폐부를 관통하지 않은 까닭은 안중근이 사용한 총알이 탄두에 덤덤탄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공업도시 덤덤의 무기공장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덤덤탄은 표적을 맞추기가 쉽지 않지만,일단 명중하면 관통하지 않고 인체에 박혀서 탄체 내의 납을 분출한다.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서 사용을 금지시킨 탄알이다. 고종의 밀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묵살당했고 안중근은 만국평화회의의 금지품으로 이토의 심장을 겨냥했다.
안중근은 모두 일곱 발의 총알을 쏜 뒤,총을 버리고 ‘코레아 우라!’를 외치다가 러시아 헌병장교에게 붙잡혔다. 브라우닝은 7연발 권총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이 한 발의 의미는 무엇일까? 안중근은 팔꿈치 위쪽을 쏴야한다는 사실도,덤덤탐이 목표물을 즉사시킬 수 있다는 것도,러시아인 대신 일본인만 골라서 저격할 침착함도 가진 명사수였다.
일본인 검찰관은 “자살하기 위해 한 발을 남겨둔 게 아니냐”고 다그쳤지만 안중근은 그 말을 부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시종 거사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그가 자살을 꿈꿨을 리는 없다. 총알을 장전하던 안중근은 무슨 수가 있어도 이토를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최대한 사격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7연발 권총에 최대한 장전하는 방법,그건 약실에 한 발을 넣어놓고 탄창에 일곱 발을 넣는 일이다. 네 발,세 발,그리고 나머지 한 발. 약실까지 가든 채운 여덟 발의 총알은 빈틈 없이 장전한 분노이거나,혹은 대륙을 떠돌던 망국의 한이었을 것이다.
일곱 발을 쏜 뒤 안중근은 멈췄다. 영塚?남은 전쟁을 위해 한발을 아껴뒀다. 안중근이 가장 먼저 탄창에 집어넣었을 마지막 한 발은 그 전쟁이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마지막 한 발은 수천 발의 총알이 될 것이며 안중근의 죽음은 수많은 안중근을 낳을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정당성은 여기에 있다. 마지막 한 발은 결코 한 발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개인이 아니었다. 그건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수천 발의 총알이었으며 안중근은 모든 독립운동가를 대표한 보통명사였다. 그리고 그 전쟁은 계속된다.
(3) 운명의 선로…기차는 운명을 향해 마주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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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 승무원만이 오갈 뿐,불이 꺼진 침대칸은 조용하다. 기차는 앞으로만 나아간다. 반성하지도,회고하지도 않는다.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의 일화에는 이런 게 있다. 뤼순감옥으로 호송되기 위해 기차에 올랐을 때,일본 헌병이 “너 같은 자에게도 가족이 있을 게 아니냐?”며 물었다. 안중근은 “내게는 아내도,자식도 없다”고 대답했다.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란 그런 것이다. 오직 앞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기차의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로를 따라온 기차는 우스리스크에서 철로를 바꿔 중국 쪽으로 향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도시인 수이펀허에서 하얼빈 사이를 운행하는 중국 기차의 꽁무니에 붙는다. 그리고 다시 기차는 무단쟝을 거쳐 하얼빈에 이른다. 거기서 다롄에서 출발해 선양,창춘을 거쳐 온 또 다른 선로와 만나게 되면 기차의 운명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 선로를 부설한 러시아는 이를 동청철도라고 불렀다. 하얼빈에서 갈라지는 동청철로의 한 갈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고,다른 갈래는 다롄에 이른다. 제정 러시아가 따뜻한 바다를 얼마나 갈구했는지 이 철길의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다.
1909년 10월 21일,그 두 개의 항구 도시에서 각자 기차에 올라탄 두 사람이 있다. 목적지는 같았으나,여행 목적은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생의 마지막 야망을 대륙에서 실현하려고 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생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몇 번의 우연을 거쳐 결국 그들은 10월 26일 아침,하얼빈에서 만나게 되지만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두 사람이 하얼빈에서 만나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나라를 잃고 먹고 살 길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한인들은 아무르만이 보이는 남쪽 바닷가에 정착했다. 대부분은 미역을 따서 훈춘에 내다파는 어민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세찬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움막집처럼 그들의 운명도 늘 흔들리고 있었다. 1909년 10월 19일,안중근은 연추 하리의 집을 떠나 배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렀다. 개척리에 있던 한인신문사인 대동공보사에 들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동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중근이 자신의 운명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깨닫게 된 순간이다. 이 때 안중근은 아내도,자식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만 달려가는 기차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역사는 안중근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 연추 하리와 마찬가지로 블라디보스토크에도 그의 자취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비장한 마음으로 안중근이 오갔을 거리에는 경기장과 해산물시장이 들어서 있다. 이 곳 사람들에게 한국인 얘기를 물으면 얼마 전 공연차 다녀간 서태지 얘기를 들려줄 뿐이다. 안중근은 없다. 다만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온몸을 날려버릴 듯 불어오는 바닷바람이다. 온몸이 뒤틀린 블라디보스토크의 나무들은 그 바람의 생김새를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안중근의 결심을 통해 당시 개척리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한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풍경의 반대편에 뤼순 203고지가 있다. 다롄에 접한 천혜의 군항 뤼순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으로 러일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일본군은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1만8000명의 목숨을 내놓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를 찾아가는 한국인 관광객은 드물지만,뤼순 203고지에는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듯 장사치들은 곧잘 일본어로 말을 건다. 그런 점에서 개척리와 203고지는 대척지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이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가는 차표를 얻기 위해 개척리에서 동분서주하던 10월 20일,이토 히로부미는 이 203고지에 올라 “오랜만에 듣는 203고지/1만 8천 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오늘 올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하늘을 바라보니 산머리에 흰 구름이 둘러져 있네”라는 시를 남겼다.
침울한 분위기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다롄은 활기가 넘친다. 고속 성장하는 중국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게 사라진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다롄에는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다롄의 중심가인 중산광장이 서면 이토의 감개무량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10월 19일 다롄에 도착한 이토는 환영객들 앞에서 “만주의 평화는 극동의 평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 날,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이 생각하던 평화와는 아주 달랐다. 안중근은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줄 때,극동에는 평화가 온다고 믿었다. 서로 상반된 그 두 개의 평화론은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기차 안,코 고는 소리,몸을 뒤척이는 소리, 한숨 소리 등만 간간히 들려올 뿐,객실 안은 쉬지 않고 선로를 달리는 기차 소리만 가득하다. 인기척에 문득 고개를 돌리니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에게는 아내도,자식도 없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내. 조국을 위해서 왼손 무명지를 잘라낸 사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사내. 그런 사내가 가만히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대륙의 밤을 바라본다.
같은 시간,대륙의 저편에서는 어떤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두 개의 기차가 하나의 선로를 따라간다. 그들의 평화,그들의 조국,그들의 야망이 서로 마주보고 달리고 있다. 하얼빈에서 그 두 기차는 서로 만날 것이다. 그 운명의 순간을 향해 기차는 반성도,회고도,후회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광야 위를 계속 달려갈 뿐이다.
(4) 장부가 세상에처함이여,그 뜻이 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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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에 도착한 10월 22일 밤부터 이토를 저격한 10월 26일 아침까지 안중근은 수많은 우연과 맞닥뜨리게 된다. 10월 22일,세관을 통과하느라 쑤이펀허에서 기차가 정차하자,안중근과 우덕순은 유동하를 끌어들였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일행은 마차를 타고 당시 하얼빈한인회 회장이던 김성백의 집으로 향했다. 김성백의 집은 도리구 삼림가에 있었다. 하얼빈 역과 쑹화강 부두가 있는 도리구는 수많은 골목들로 이뤄진 구역이다. 그 골목길의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다. 하얼빈 역에서 삼림가까지는 마차로 15분 남짓 걸리는 거리다. 당시에는 가로에 불빛이 없었으니 안중근 일행은 먹빛처럼 짙은 어둠 속을 달려 김성백의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당시 하얼빈의 인구는 4만 명. 그 중 한인의 수는 268명이었다. 이주 농민들이 정착한 만주의 다른 지역과 달리 하얼빈에는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노무자들이 많았다. 삼림가 김성백의 집은 그런 노무자들에게는 일거리도 구할 수 있고 숙식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음날인 23일은,안중근 드라마 중 가장 평온한 날이었다. 안중근 일행은 김성백의 집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진 하얼빈 공원으로 갔다. 지금 그 길로는 겨울을 대비해 하얼빈 시내의 난방수를 공급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얼빈 공원은 중국 공산당 혁명가 이조린의 이름을 따 현재 조린공원으로 불린다.
안중근은 23일 딱 하루 이 하얼빈 공원에 갔을 뿐이다. 그런데 안중근은 한국이 독립될 때까지 자신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날,안중근은 하얼빈 공원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조린공원을 찾은 지난 10월 15일,북방의 가을은 이미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낮이 짧아지기 시작해 벌써부터 한 뼘의 햇살도 아쉬웠다. 거기 어딘가에서 안중근은 따사로운 생의 한 때를 마지막으로 즐겼으리라. 안중근에게도 희로애락이 있었다. 연못을 비추고 되튀는 가을 볕처럼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감정들과 안중근은 작별하는 의식을 치렀다. 죽어서 하얼빈 공원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말은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를 완성한 뒤, 다시 희로애락이 있는 평범한 인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얼빈 공원에서 인간으로서 마지막 햇살을 즐긴 안중근은 공원 앞 사진관에서 우덕순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민족의 원수 이토를 저격하는 일뿐이었다. 애당초 안중근은 창춘 부근 관성자에서 이토를 저격할 생각이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관성자 이남의 동청철도가 일본의 손에 넘어간 까닭에 관성자 이남과 이북의 선로 폭이 서로 달랐다. 따라서 이토는 관성자에서 기차를 갈아타야만 했다. 하지만 여비를 구하지 못한 안중근 일행은 상하행선이 모두 정차하는 큰 정거장까지 가는 표를 끊었다. 그 표는 삼협하까지 가는 표였으나 중간에 차이자거우에서도 기차가 정차하는 것을 알게 된 안중근 일행은 거기서 하차했다.
차이자거우는 하얼빈에서 84㎞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주 작은 역이다. 막상 가보니 그 역이 너무나 작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된다. 이토의 특별열차가 멈출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중국 노인이 있어 불러 세웠더니 마침 1956년부터 철도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가 이 작은 역에서 무조건 정차한다고 하는데,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는 역 건물 맞은편의 너른 공터를 가리켰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그 공터에는 석탄이 잔뜩 쌓여 있었다고 했다. 차이자거우 역은 석탄을 공급하는 역이라 상하행선 기차가 반드시 멈췄다고 했다.
차이자거우 역은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중근,우덕순,조도선 세 명은 24일 그 역에 도착해 역 건물 지하의 여관에 묵었다. 여관이 있던 자리는 지금 보일러실로 쓰이고 있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낸 뒤,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두 번의 기회를 노리자고 했다. 자신은 하얼빈에서,우덕순은 차이자거우에서 각기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가 닿는 대로 이토를 저격하자는 뜻이었다. 이 말에 우덕순도 동의했고 25일 안중근은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눈물겨운 이별은 러시아 측 자료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친구들은 안중근과 작별을 고하였다. 그들의 작별은 감명을 주는 점이 있었으며,목격자들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안중근은 몇 번 공손한 인사로 답례했으며 이에 대해 그의 동반자들도 똑같이 답례했다.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고 눈에는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안중근은 4번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떠났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그들을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헌병들에 의해 여관방에 감금됐다가 거사가 일어난 직후 체포됐다. 차이자거우에 남아 있었다면,안중근도 마찬가지 신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은 용케도 그 모든 실패의 확률을 피해서 10월 26일 9시 30분,하얼빈 역 플랫폼까지 무사히 들어가 얼굴도 모르는 이토를 즉사시킬 수 있었다. 역사에 우연이란 없다. 오직 필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 공원에서 돌아온 날 저녁,안중근이 지은 ‘장부가’의 한 구절은 그가 이미 그 역사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영웅의 길에 우연은 없다.
(5) 위국헌신군인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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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뤼순은 여전히 지난 세기의 전쟁을 잊지 못하는 듯하다. 뤼순 관광가이드북에는 온통 전쟁과 식민의 기억뿐이다. 러시아 원동총독부,러시아 관동주 민정청,일본 관동군 사령부,일본 관동도독부 등의 건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 이 건물들을 관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군항이라는 이유로 뤼순은 외국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뤼순감옥은 뤼순항이 굽어보이는 시내 뒤쪽 언덕에 있다. 랴오둥반도를 조차한 제정 러시아가 1902년부터 짓기 시작한 건물이지만,결국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04년 러일전쟁 패전 뒤 일본에 넘겨줬다. 일본은 이 짓다만 건물을 1907년에 완공해 관동도독부 감옥서라고 이름 붙였다. 대지 22만 6000㎥,건평 1만1400㎥에 달하는 감옥으로 동북지방에서는 규모가 제일 컸다. 방사형으로 놓여진 감방을 가운데 선 간수가 모두 감시할 수 있는 형태로 지금도 그 원형이 유지돼 있다. 아래층이 보이는 복도를 밟고 지나가노라면 벽에 걸린 혁명가들의 사진과 약전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일제 점령기 동북지역 중국인 혁명가들이지만,신채호 같은 한국인들의 사진도 볼 수 있다.
동양의 아우슈비츠라고도 불리는 뤼순감옥의 악명이 시작된 것은 아무래도 안중근을 수감하면서부터일 것이다. 1909년 11월 3일,뤼순감옥에 압송되면서 안중근의 기차 여행은 끝이 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뤼순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14일이었다. 뤼순감옥 측은 안중근을 위해 기존의 감방이 아닌 새로운 감방을 만들었다. 그 감방은 뤼순감옥을 다 돌아보고 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뜰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온다.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면 침대와 창문 앞에 놓인 책상이 보인다. 1910년 3월,안중근은 늘 그 책상에 앉아서 옥중기를 썼다.
안중근이 쓴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안중근이 말하는 밝은 세계란 뤼순감옥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거사 직전 하얼빈 공원에서 봤을 가을볕,혹은 연추 하리 드넓은 평원에서 흔들리던 하얀 억새 물결 같은 것이리라. 그처럼 환하게,어떤 증오나 두려움도 없이 자기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었으리라. 다롄에 도착한 이토가 말한 평화안,즉 러시아와 일본이 사이좋게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해서 생기는 평화와는 전혀 달랐다.
뤼순감옥 길 앞에서 한국인은 입을 열 수도 없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가이드가 온몸으로 이를 제지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 뤼순까지,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안중근의,그리고 조선인들의 흔적을 감추려고만 든다. 여전히 국가는 서로 배타적이다. 국경만 넘어가면 평화가 달라진다. 그런데도 안중근은 감방 볕이 잘 드는 책상에 앉아 동양 3개국이 서로 도우며 살아갈 때,동양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글을 썼다. 어쩔 수 없이 안중근은 착한 사람이다. 20세기 초 나라를 잃고 만주와 연해주로 떠돌던 조선인들도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안중근이 무자비한 테러리스트일 수는 없다. 그건 안중근 공판에서도 알 수 있다. 안중근 공판은 1910년 2월 7일부터 열렸으나,일본 정부가 안중근에 대한 처리 방침을 정한 것은 그 전 해 12월이었다. 한일병합안을 기정사실화한 일본 정부로서는 안중근의 생존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2월 14일,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건 발생 111일만이었다. 한국병합을 위해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자체가 이미 안중근의 거사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문제라는 걸 일본 법정이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까. 그러나 옥중의 안중근에게 공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으나,‘동양평화론’을 다 쓸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 달라고 했다. 자신은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는 투였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거나,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던 책을 실컷 봤으면 좋겠다는 식의 얘기는 없었다. 그 담담함은 과연 어디서 비롯됐을까.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는 그 담담함에 감화 받아 오래 전부터 안중근에게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다. 1910년 3월 26일,마침내 안중근은 치바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비단 천에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고 쓰고 왼손을 찍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이 마땅히 할 일이다. 안중근의 담담함은 거기서 나왔다. 자신이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순간,안중근은 아무런 회한도,후회도 없이 그 길을 걸어갔다. 바로 그 날,모친이 보낸 하얀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은 짧았던,하지만 위대했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안중근의 책상으로는 언제나 밝은 빛이 드리워진다. 안중근은 그 빛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안중근이 사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랑한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암울한 시절에도 안중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마치 어두운 감방으로 드리워지는 한 줄기 빛처럼. 그 빛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역사는 그가 본 그 밝은 빛을 기억할 것이다. 영원히.
김연수(소설가)
안중근 의사 (1879~1910)
분류 : 위인/ 의사/ 독립운동가
생일 : 1879년 9월
2일 생
출생지 : 황해도 해주읍
학력 : 한학을 수학하고 승마·궁술을 익혀 문무를 겸비
자료출처
안중근 연구소 http://www.ahnjewngkeun.com/
안중근 의사 기념관 http://www.patriot.or.kr/
관련사이트: 안중근 숭모회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黃海道) 해주읍(海州邑) 광석동에서 출생
1895 - 천주교에 입교
1905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영하던 석탄상점을 처분
1907 - 남포에 돈의학교 설립,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1908 - 대한의군 참모중장
1909 -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과 함께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살해하고, 하얼빈 총영사 천상준언·궁내대신비서관
삼태이랑·만철이사 전중청태랑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됨.
1910 - 여순감옥에서 순국(사형).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을 남겼으며, 재감중에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해박한 사적감각으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함
수상경력 : 건국공로훈장중장 추서
일대기
조국을 건지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연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야말로 안중근의사다.
의사의 본관은 순흥이요 문성공 안유의 이십대손으로 1879년 9월2일에 황해도 해주읍에서 탄생하시니 조부는 진해 현감을 지낸 인수공으로 덕망이 높은 이였고, 부친은 성균진사 태훈공이었으며 모친은 백천조씨인데 의사는 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개가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이름을 안응칠이라 불렀다.
그 뒤 집을 신천군 두라면으로 옮겨 산수 풍경이 아름다운 천봉산 밑 청계동에서 살게 되니 의사의 여섯살적 일이었고 어려서 글을 배워 문사의 앞날도 기약되더니 일곱살부터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사의 기질을 엿볼수 가 있었다.
16세때 동학혁명을 빙자한 지방 무리들이 일어나자 부친이 모집한 장별들을 이끌고 나가 그들을 진압했었고 김홍섭공의 따님 아려양과 결혼한뒤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고 또 이어 도마라는 믿음의 이름을 얻은 동시에 홍석구 신부에게서 프랑스말과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
10년이 지나 27세때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고자 상해로 건너갔다가 돌아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안장한 뒤 이듬해에 집을 진남포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워 구구인재를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하다가 가슴에 끓는 피를 누를 길이 없어 29세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나가 대한의군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의 이름을 띠고서 무력에 의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었다.
30세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였고 회령에서는 일본수비군과도 격전하였다 31세에 노령 카리에서 결사동지 11명과 함께모여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했었다. 그러자 이등박문이 러시아 대장대신 꼬꼬프체프와 만나 동양정책을 협의하려고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의사는 이때야 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때라 하고 원흉을 없애려 하얼삔에 이르렀다. 마침내 역사적인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반 삼엄한 하을삔역 머리에 각국 대표의 환영과 군대의 호위속에 하차한 이등박문은 단신으로 달려든 의사의 벼락같은 사격 4탄에 즉사하였다. 의사는 총을 내던지고 대한국만세를 세번 외친 다음 유쾌히 웃으면서 노국 헌병의 손에 태연히 포박되었다가 곧 다시 일본관현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통쾌한 소식을 전파를 통하여 세계각국에 널리 퍼지자 우리와 중국인민들로서는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거니와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다섯달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특히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등을집필하는 한편 매양 법정에서 한국의 국토국권을 침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한 것등 이등박문의 열 다섯가지 큰 죄목을 들어 규탄함과 아울러 의거의 이유를 밝히는 태도야 말로 늠름할 따름 이었다.
일제의 재판은 마침내 2월14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에게도 각각 징역이 언도되었다. 의사는 2천만 동포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유언을 남긴뒤 새옷을 갈아 입고 여순감옥 현장에서 조용히 순국하시니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요 향년은 32세라 비록 육신의 일생은 짧았으나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혈육은 준생 현생 오누이와 손자 웅호를 끼쳤을 뿐이로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료 : 민족의 얼
안중근의사 사진첩(사단법인 안중근의사 숭모회) 중에서 발체
안중근 의사의 일본법정 최후진술
(재판장)
변호인으로부터 이미 상세한 변론이 있었지만, 피고들이 마지막으로 할말 이 있으면 진술하라
(안중근 의사)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이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 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 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십수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니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 했더니, 그 군인은 ‘본군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 것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 지기만을 기다릴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한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한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건은 한국의 형법대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한국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판장은 이것으로써 심리를 모두 마칠 것을 알리고, 판결은 오는 14일 오전 열시에 언도하니 출정하라는 뜻을 명하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안중근 외 3명 제6회 공판시말서, 피고 안응칠이라 하는 안중근 외3명, 위 살인피고사건에 대해 메이지 43년 2월14일 오전 열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재판장 마나베 주조출석,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입회하에 통역 촉탁 소노키 스에요시 통역으로 심판을 공개하다.
피고인은 모두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않고 출정하며, 변호인으로 미즈노 기치다로와 세이지가 출두했다. 재판장은 계속해서 재판할 뜻을 알리고 재판장은 이 판결에 대해 오 일 내에 항소할 수 있음과, 판결의 정본.등본.초본을 청구 할 수 있다는 뜻을 알리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15가지
모두 가슴아프고 시린 말입니다..
안중근의사는 진정한 한국인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난뒤 안중근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재판을 받으면서 까지도 나는 이토를 죽인것에 대해 잘못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요.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뺏은 죄요.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교육을 방해한 죄요.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퍼뜨린 죄요.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엔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아..장부가 비록 죽을 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은 구름과 같도다.
안중근 의사 저격시 마지막 1발의 총알을 남긴 이유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은 많이 알고들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권총 내에 남긴 한 발은 과연 자살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의연하게 체포를 당했다' 라는 말과 서로 맞지 않습니다.
자살을 하려 했다면 이토오를 쏜 후 바로 자기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이 부당한 것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이 때는 한일합방 직전)때문에 애써 그를 죽이고 자살해버리면 너무 허망하죠.
안중근 의사에게는 저격 이후에도 재판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릴 무거운 의무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살하려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왜 실탄 한 발은 남겼는가..
그것은 그 자신이 자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안중근 의사 자신이 일부러 체포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죠.
실제로 안중근 의사는 이토오 저격 후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않았고 이후 재판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유지해서 일본인 재판관들이 많이 당황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체포 당시 그는 이후 죽음보다 더한 고문과 괴로운 수형생활쯤은 분명 각오하고 있었을 겁니다.
安重根 義士 글모음
*일본군과의 전투중 의병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쓴 글.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謀難處身
남아유지출양외 사불입모란처신
望順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맹순동포경유혈 막작세문무의신
사나이 뜻을품고 나라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安重根의사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25일 취조관 중의 한사람인 境(사카이)경시는東洋平和論』의 미완을 애석히 여겨 그에게 결론만이라도 써주기를 요청하자 쓴 글.
東洋大勢思香玄
동양대세사모현
有志男兒開安眠
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
화국미성유강개
政略不改眞可燐
정략불개진가련
동양 대세 생각하니 아득고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들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 지고,
침략 정책 안 고침은 참으로 가엾도다
*장부가(丈夫歌)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처세혜 기지대의
時造英雄兮 英雄時趙
시조영웅혜 영웅시조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웅시천하혜 하일성업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동풍점한혜 장사의열
念慨一去兮 必成目的
념개일거혜 필성목적
鼠竊伊藤兮 豈肯比命
서절이등혜 기긍비명
豈度至比兮 事勢固然
기도지비혜 사세고연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동포혜 속성대업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만세혜 대한독립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세만세혜 대한동포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1908년 두만강 전투때
우리들의 소원을 단 한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두번
세번 열번 백번이라도 해보고 올해 안되면 내년에
해보고 십년 백년이 걸려도 좋다.
우리대에 안되면 아들대 또 손자대까지 가서라도
대한독립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
*이등도살가(우덕순 의사)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저 일평생에 원했지만
천신만고 거듭하여 가시성을 더듬었다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몇 만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로국 청국 방황하고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앙천하고 기도하며
우리 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없이 뺐으려니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궁흉 극약 네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지금 네 명(命)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너를 오늘 만나보니 너 뿐일 줄 아지 마라
너희민족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놈 두놈
보는 대로 내손으로 죽이리라
*어머니께 보낸 옥중 편지 중에서
불소자는 감히 어머님께 한 말씀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소자의 막심한 불효와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훗날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배려를 거두옵고 마음 편안히 지내옵소서.
*아내에게 보낸 옥중 편지 중에서
우리들은 이 이슬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었으나
다시 헤어지게 되었소.
부디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영원의 낙을 바랄 뿐이오.
*동포에게 고함
余가
韓國獨立을 恢復하고 東洋平和를 維持하기 위하야
三年間 海外에서 風餐露宿하다가
竟히 其目的을 到達치 못하고 此地에서 死하노니
惟我二千萬兄弟姉妹는 各自奮發하야
學問을 勉勵하고 實業을 振興하야 我의 遺志를 繼하야
自由獨立을 恢復하면 死者無憾이라.
역: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야
삼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야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뜻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두 동생에게 남긴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 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당당히 축복을 청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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