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 비둘기]- 초대교회부터 순결과 희망 나타내"




비둘기 하면 '평화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비둘기는 극한지역,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을 제외한 전 세계에 분포한다. 구조(區鳥), 시조(市鳥), 도조(道鳥) 등 전국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비둘기를 상징새로 삼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6월 환경부가 비둘기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하고,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아 비둘기를 포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비둘기 알 수거, 먹이 공급 차단 등으로 개체 수를 줄일 계획이라고 한다. 비둘기 배설물은 건축물, 철탑과 전선을 부식시키며, 떨어진 깃털과 함께 온갖 병원균의 원천,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이유에서다. 현재 서울 도심에 서식하는 집비둘기는 약 100만 마리로 추정되며, 대부분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행사용으로 들여온 것이 무서운 속도로 번식해 현재와 같이 늘어났다고 한다.

 인류가 있는 곳에 비둘기가 있었고, 수천 년 전부터 비둘기는 인간의 좋은 친구였다. 식탁에 닭고기가 오르기 전부터 비둘기는 중요한 식량이었다. 비둘기는 다른 애완 조류와는 달리 멀리서도 집을 찾아가는 귀소 본능이 있다. 비둘기를 전쟁에 전서구(傳書鳩)로 이용하게 되면서 전쟁 판도를 바꾸고 통신 혁명을 이뤘다. 고대문명은 비둘기를 숭배했다. 수메르인에게 비둘기는 신의 사자였다. 그리스 로마에서는 사랑, 생명,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중국에서도 비둘기는 장수, 신의, 질서, 효행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마르 1,9-10). 성경을 주제로 한 성화에도 비둘기가 자주 등장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희생제물을 위한 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을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바치라고 했다. "날짐승 가운데에서 주님을 위한 예물을 골라 번제물로 바치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가운데에서 예물을 골라 바쳐야 한다"(레위 1,14).

 비둘기는 예루살렘 성전 구내나 뜰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사람들과도 친숙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둘기와 비둘기 새끼는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제물이었다(레위 5,7).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에도 부모는 이 노점에서 비둘기를 사서 하느님께 바쳤을지 모르지만 후년에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서 이런 비둘기 장수를 쫓아냈다(요한 2,16).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이처럼 비둘기는 순박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또한 비둘기 울음소리는 슬프게 들리기에 불쌍한 인간의 슬픔을 비둘기 소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저는 제비처럼 두루미처럼 울고 비둘기처럼 탄식합니다. 위를 보느라 제 눈은 지쳤습니다. 주님, 곤경에 빠진 이 몸, 저를 돌보아 주소서"(이사 38,14). 비둘기는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순결과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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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0 예수께서 그들에게 " 사람들을 모두 앉혀라." 하고 분부하셨다. 마침 그 곳에는 풀이 많았는데 거기에 앉은 사람은 남자만 약 오천명이나 되었다.
11 그 때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 주셨다.
12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예수꼐서는 제자들에게 " 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다 모아 들여라." 하고 이르셨다.
13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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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275번지의'합덕성당'



















두 개의 첨탑은 파수꾼인가?

충청도 내포 지방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다. 합덕 본당은 바로 이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00년을 넘어서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합덕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오다 보면 길 오른편 비탈길 위에 서 있는 합덕 본당이 눈에 들어온다.
합덕 본당의 전신은 양촌 성당(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1890년에 설립, 초대 퀴를리에 신부가 부임, 1899년 현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준공된 것으로 제 7대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가 6.25 때 납치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현재 성당구내에 있는 페랭 신부의 묘소에는 그의 유해는 없이 유물만이 묻혀 있다.
페랭 신부 재임 시인 1926년 예산 본당, 1935년 서산 본당, 1938년 당진 본당이 각각 분리, 신설됐고 제 8대 박노열 신부 때 신합덕 본당이 분리됨에 따라 합덕 본당은 구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현재 다시합덕 본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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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151번지의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요,조선의 카타콤바이다. 이곳은손자선(손도마, 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인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신리성지는 조선의 카타콤바이다.

1. 손자선 도마 성인의 생가로 28세의 나이로 순교하기까지 사시던 곳이며, 성인의 유해가 안장된 곳.

2. 다블뤼 안 주교가 은거하며 선교활동을 주관하던 주교관이자 제5대 조선 교구청

3. 한글 교리서 저술 및 간행, 박해기 교회사 및 순교 사료 수집 전송처.

4. 위앵 민 루가 성인 신부조선 기착지이자 유일한 사목 활동지.

5. 성 다블뤼 안주교, 성 오매트르 오신부, 성 위앵 민신부 그리고 성 황석두 루가 순교를 위해 스스로 붙잡힌 곳.

6. 조선 천주교회의 초창기부터 박해시대 교우촌이자 수많은 순교자들의 출신지.

7. 32기의 머리 없이 발견된 순교자 묘, 14기의 손씨 가족 순교자묘,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3기 묘가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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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구 105번지의 위치한 '여사울 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이며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그러나 배교라는 칼날에 토막 쳐지는 이존창의 생애.
1791년 신해박해를 맞아 이존창은 그렇게 주님을 향해 ‘나는 당신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거기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 거기서 묻히는, 그것을 복된 삶으로 알던 농경사회에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이었으리라.

다블뤼 주교는 ‘내포 천주교회 신자들이 가장 슬퍼하고 창피스러워했던 배교는 그들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의 배교였다’고 쓰고 있다. 죽기보다는 여기서 우선 목숨을 건진 후 더욱 주님 가까이에 다가서고 더욱더 전교에 몸을 바치리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배교는 이존창 자신을 넘어서는 그토록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언덕 위의 십자고상, 드높게 느껴지는 십자고상 밑을 돌아내려와 성모상 앞을 지나자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언덕 앞쪽이 제대가 놓이고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잔디밭이라면 그 뒤편 언덕 밑에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가 잘 어울리는 언덕 아래 보도블록을 깐 길이 정성스럽다. 소나무 사이사이로 심어진 나무들을 보며 꽃이 한창이면 참 아름다울 성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멍청하긴. 꽃이 피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을까.

하얀 돌로 다듬어 세운 십자가의 길, 1처를 지난다. 이존창의 배교와 순교로 점철된 삶을 생각한다. 이존창이 걸어간 일생을 어찌 참다운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존창이 껴안아야 했을 고통, 스스로 저지른 배교의 나약함에 대한 처절한 질책, 그것은 차라리 죽음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그는 더욱더 선교에 몸과 마음을 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많은 작품은 배교자의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
서구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그의 명작 장편 <침묵>이 그렇고, 그리스도의 일본식 표현인 기리시단(切支丹)의 족적을 추적하거나 그 후손들의 삶을 찾아나선 많은 르포문학이 또한 그렇다.
배교자들의 처절한 고통, 배교로 목숨을 건진 자들이 그 목숨 안에서 겪어내야 하는 수없는 절망을 통해서 오히려 믿음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모진 고문 속에서 배교를 하고 풀려난다. 그리고 그는 오욕 속에서 고향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회한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더 깊이 믿음을 바쳐가며 전교에 힘을 기울인다. 이 정황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1791년 배교한 뒤에 진실로 뉘우쳐 다시 열심히 교회의 본분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볼 수 있었고, 얼마 동안 그의 곁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신부는 그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하고,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다. 그래서 루도비꼬는 끊임없이 순교를 준비할 생각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존창의 삶이 수놓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풀려난 이존창에게는 관가에 가서 사람을 때리는 일까지 맡겨졌다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적고 있다. 그로서는 얼마나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을까. ‘그는 천안으로 송환되어 매 때리는 형리의 일을 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흔히 있는 이 징벌은 양민(良民)의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군수는 루도비꼬에게 이런 천한 직분을 시키지 않고, 어떤 개인 집에 보석하여 두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그를 신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전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자기들의 자식에게 헌신적으로 글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을 과히 괴롭히지 않은 것 같다. 루도비꼬는 이 오랜 시련 중에도 꿋꿋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꾸준히 모든 사람이 알게 종교의 본분을 다하였고, 말과 모범으로 그 지방에 큰 이익을 주었다.’

고향조차도 허락을 받아야 갈 수 있었다. ‘하루는 여사울에 있는 자기 가족을 보러 갈 허락을 받아 거기 가서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때 그는 교우들이 무서움에 못 이겨 그들의 천주교 서적을 모두 동네 마당에 모아놓고 불살랐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고, 마음이 몹시 아파 한 권도 불태우지 않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떤 교우가 몰래 감추어 두었던 두 권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배교자의 발걸음일까. 어떻게 그를 배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는 최창현(요한)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권일신, 정약종, 이존창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795년에는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와 6년이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긴 연금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1801년 2월 9일, 신유박해의 피바람 속에서 끝내는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간다. 그리고 16일에 서울로 압송된다. 순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몸을 던져 박해로부터 천주교를 가로막고 나서고 있다. 자신은 10여 년 전에 천주교에 수년간 미혹되었으나, 이미 단념한 지 5년 되었으며, 이제 다른 살 길을 찾았는데 어찌 다시 사학하는 사람들과 상통하겠는가. 이미 충청도에는 천주교도가 없으므로 진실로 밀고할 자가 없다고.
그러나 끝내 이존창에게는 ‘호서 사학의 괴수 이존창을 충청도로 압송, 처형하여 민중을 타이르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1801년 4월 10일(음2월 26일) 공주 황새바위에서 목이 잘려 순교한다. 이때 그의 고난에 찬 아름다운 생애는 겨우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175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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