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구 105번지의 위치한 '여사울 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이며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그러나 배교라는 칼날에 토막 쳐지는 이존창의 생애.
1791년 신해박해를 맞아 이존창은 그렇게 주님을 향해 ‘나는 당신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거기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 거기서 묻히는, 그것을 복된 삶으로 알던 농경사회에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이었으리라.
다블뤼 주교는 ‘내포 천주교회 신자들이 가장 슬퍼하고 창피스러워했던 배교는 그들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의 배교였다’고 쓰고 있다. 죽기보다는 여기서 우선 목숨을 건진 후 더욱 주님 가까이에 다가서고 더욱더 전교에 몸을 바치리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배교는 이존창 자신을 넘어서는 그토록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언덕 위의 십자고상, 드높게 느껴지는 십자고상 밑을 돌아내려와 성모상 앞을 지나자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언덕 앞쪽이 제대가 놓이고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잔디밭이라면 그 뒤편 언덕 밑에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가 잘 어울리는 언덕 아래 보도블록을 깐 길이 정성스럽다. 소나무 사이사이로 심어진 나무들을 보며 꽃이 한창이면 참 아름다울 성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멍청하긴. 꽃이 피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을까.
하얀 돌로 다듬어 세운 십자가의 길, 1처를 지난다. 이존창의 배교와 순교로 점철된 삶을 생각한다. 이존창이 걸어간 일생을 어찌 참다운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존창이 껴안아야 했을 고통, 스스로 저지른 배교의 나약함에 대한 처절한 질책, 그것은 차라리 죽음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그는 더욱더 선교에 몸과 마음을 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많은 작품은 배교자의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
서구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그의 명작 장편 <침묵>이 그렇고, 그리스도의 일본식 표현인 기리시단(切支丹)의 족적을 추적하거나 그 후손들의 삶을 찾아나선 많은 르포문학이 또한 그렇다.
배교자들의 처절한 고통, 배교로 목숨을 건진 자들이 그 목숨 안에서 겪어내야 하는 수없는 절망을 통해서 오히려 믿음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모진 고문 속에서 배교를 하고 풀려난다. 그리고 그는 오욕 속에서 고향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회한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더 깊이 믿음을 바쳐가며 전교에 힘을 기울인다. 이 정황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1791년 배교한 뒤에 진실로 뉘우쳐 다시 열심히 교회의 본분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볼 수 있었고, 얼마 동안 그의 곁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신부는 그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하고,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다. 그래서 루도비꼬는 끊임없이 순교를 준비할 생각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존창의 삶이 수놓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풀려난 이존창에게는 관가에 가서 사람을 때리는 일까지 맡겨졌다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적고 있다. 그로서는 얼마나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을까. ‘그는 천안으로 송환되어 매 때리는 형리의 일을 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흔히 있는 이 징벌은 양민(良民)의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군수는 루도비꼬에게 이런 천한 직분을 시키지 않고, 어떤 개인 집에 보석하여 두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그를 신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전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자기들의 자식에게 헌신적으로 글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을 과히 괴롭히지 않은 것 같다. 루도비꼬는 이 오랜 시련 중에도 꿋꿋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꾸준히 모든 사람이 알게 종교의 본분을 다하였고, 말과 모범으로 그 지방에 큰 이익을 주었다.’
고향조차도 허락을 받아야 갈 수 있었다. ‘하루는 여사울에 있는 자기 가족을 보러 갈 허락을 받아 거기 가서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때 그는 교우들이 무서움에 못 이겨 그들의 천주교 서적을 모두 동네 마당에 모아놓고 불살랐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고, 마음이 몹시 아파 한 권도 불태우지 않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떤 교우가 몰래 감추어 두었던 두 권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배교자의 발걸음일까. 어떻게 그를 배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는 최창현(요한)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권일신, 정약종, 이존창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795년에는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와 6년이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긴 연금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1801년 2월 9일, 신유박해의 피바람 속에서 끝내는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간다. 그리고 16일에 서울로 압송된다. 순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몸을 던져 박해로부터 천주교를 가로막고 나서고 있다. 자신은 10여 년 전에 천주교에 수년간 미혹되었으나, 이미 단념한 지 5년 되었으며, 이제 다른 살 길을 찾았는데 어찌 다시 사학하는 사람들과 상통하겠는가. 이미 충청도에는 천주교도가 없으므로 진실로 밀고할 자가 없다고.
그러나 끝내 이존창에게는 ‘호서 사학의 괴수 이존창을 충청도로 압송, 처형하여 민중을 타이르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1801년 4월 10일(음2월 26일) 공주 황새바위에서 목이 잘려 순교한다. 이때 그의 고난에 찬 아름다운 생애는 겨우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1759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