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독,그런 악독이 없어! 일본 사람들.."

["골방에 숨었다 잡힌 기억 생생" 위안부 할머니의 고백]


“열여섯에 갔던가. 봄에 갔을 것인디. 손바닥만한 영장이 나왔어. 큰 애기들 공출헌다고 영장이 왔어. 일본가야지 그러 안허믄 부모까지 다친다고. 안 잡혀 갈라고 숨어 댕겼어. 근디, 아버지가 아퍼서 장성가믄 존 약이 있다고 혀서 그놈 사러 갔다가 잡혀부렸어. 그냥 잡혀부렸어.” 되새김질 하고 싶지 않은 옛 기억을 끄집어내는 김봉이 할머니(80·가명·고창군)는 어느새 눈물을 훔치고 만다.

“잊고 싶어, 지우고 싶어 평생을 노력했건만...” 3.1절을 하루 앞둔 김 할머니는 “매년 이맘때만 되면 상처가 자꾸 덧나는 것 같다”며 이내 말끝을 흐린다.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시작한 건 열 여섯 살 되던 해(1942년)다. “형부도 징용에 갔제, 사둔도 징용에 갔제, 다 잡혀 갔는디, 나도 숨어 있다 잽혀버렸제 공장에 큰애기 공출헌다고 그렸어. 공출헌다고. 여자이기 때문에 당했제, 여자이기 때문에” 해방과 함께 3년만에 고국에 돌아왔지만, 선뜻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가지 못했다. 겨우 터를 잡은 곳이 광주였다.

“나 고상하고 살았당말 누가 혀.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제. 오늘날꺼정 누구헌테 나쁜 짓 안혔는디.” 할머니는 늘 속이 아프다. 맘이 아프고 위장이 아프다. “쪽발이 놈들이 대머리 판으로 머리를 쳐서 지금도 골이 아퍼 이제사 독이 올라오는 모양이여” 깊이 들이 마시는 담배 한 모금이 그나마 아픔을 조금 잊게 한다.

꿈 많고 어여뻤던 소녀가 깊은 상처를 안고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반평생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어 다행이다.

할머니는 혼자였다. 점점 심해지는 관절염에 두통, 위장장애, 시력 저하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노환이 찾아왔지만, 누구 한 사람 의지 할 곳이 없다. 좁은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에 의지해 세상을 읽고 있는 할머니는 며칠째 소리나지 않는 TV를 봐왔다. 리모컨이 잘못 작동해 소리가 꺼졌는데, 침침한 시력이 이를 가져내지 못했다.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한복을 꺼내입었더니 치마가 겁나게 길어져 있더라는 할머니. 점점 휘어가는 허리에, 거동마저 어려워지면서 스스로 생의 마감을 예감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이라고는 아픔을 함께 했던 위안부 피해자들의 영면 소식이다. 그럴때면 짓밟힌 삶, 사죄도 못받고 떠나게 될까 덜컥 겁이 난다.

“악독, 그런 악독이 없어. 일본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찔러 피 한 방울 안나오는디. 애들 잡아 신세 망쳐놨으니 사죄라도 해야허는 것 아니여” 민족 수난기에 태어나 온몸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할머니는 3.1절 금강산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다리라도 성해야 말이제.” 비록 할머니는 금강산을 밟지 못했지만, 그녀의 외침은 그날의 “만세”처럼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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