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 긴 여운
김 성 련
정성택(鄭成澤) 선생님, 아니 할아버지의 음성은 그 날 연길(延吉) 성당(聖堂)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당신의 이름과 올해 89세라는 나이와 옛날 동료들의 이름을 또렷이 열거했다. 교우들은 놀라움 반 감동 반 모두 박수로 그 분을 환영했다. 미사가 끝나고 옛날 연길 해성학교(海星學校 - 바다의 별, 즉 성모님을 상징함)를 나오셨다는 할머니 몇 분과 사제관에서 대화를 나누셨다. 당시 천주교에서 설립한 사립 해성학교는 연변(선생님의 표현대로 하면 僞滿 間島省) 땅에 모두 여섯 군데가 있었단다.
선생님은 1936년 스무 살의 청년으로 연길 해성학교 교원이 되었다. 1941년까지 6년을 봉직했는데 그 자리는 지금의 신흥(新興)소학교 맞은편 코스모 호텔 부근이었단다. 그 뒤로 팔도 해성학교에서 1년, 도문 백봉(白鳳)학교에서 1년, 다시 용정 명동(明東)학교에서 1년을 근무하던 해에 해방이 되어 고향 전북 고창으로 가셨다. 20대의 꽃다운 나이를 총각 선생님으로 10년 가까이 이 곳 북간도의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이제 구순(九旬)을 앞둔 나이에 당시의 동료나 제자를 볼 수 있을까 하여 노구를 이끌고 혼자서 연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성당의 할머니들은 직접 제자는 아니었지만 해성학교와 천주교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지난날을 눈앞의 일처럼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정정하신 듯하나 가까이서 뵈니 역시 극노인이셨다. 큰 소리를 쳐야 알아들으셨고, 못 매무새는 흘러내렸고, 호주머니는 메모에 명함에 중국돈에 한 덩어리가 되어 무엇을 찾을라치면 한 움큼을 내놓고 뒤적이셨다.
전날 용정 명동학교와 팔도는 다녀오셨고, 그 날은 도문 백봉학교를 찾아가신다기에 내가 모셔야 할 것 같았다. 의무감인 듯, 사명감인 듯 자연스레 하루를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우리 학교로 모시고 가서 현관의 고구려관과 교육목표, 백두산 사진을 보며 설명을 드렸더니 참 좋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하셨다. 교장실로 모시고 학교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해 드리고, 교실과 특별실을 보여 드렸다. 교실 전면의 태극기를 보시더니 중국 땅에서 이렇게 한국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하시며 훌륭하다고 칭찬을 몇 번이고 하셨다. 실내 체육관, 1학년 교실, 실험실 등을 돌아보면서 선생님은 사진을 계속 찍으셨다. 그 연세에 찾고 보고 사진으로 남기고자 하는 호기심과 열정이 대단하셨다.
도문 가는 고속도로는 한산하고 도로 양 옆으로 밀어붙인 눈만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펼쳐지는 구릉과 마을을 보시며 선생님은 ‘땅이 참 좋다’고 하셨다. 도문에 다다라서는 이내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훈춘 가는 방면으로 가다가 두만강과 부르하통하의 합수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차를 멈추었다. 두만강은 반은 녹아 봄을 맞아 흐르는 물살이 햇볕에 반짝였지만, 건너 조국 땅은 응달이라 눈 속에 조용히 묻혀 있다. 두만강과 조국 땅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드렸다.
도문 시내로 들어가 백봉학교의 후신이라는 도문제2소학교을 찾는다. 금새 폐문에 ‘二小’라고 쓴 학교를 찾을 수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정문에 가보니 간판이 제4소학교로 되어 있다. 선생님은 지나가는 어린이 두 명을 불러 세우고 대뜸 ‘이 학교 다니냐’고 묻는다. 대답은 ‘팅부뚱’(聽不懂), 한족 아이들이다. 내가 나서서 한어로 다시 묻는다. 자기들은 제3소학교를 다니고 이 학교가 이전에는 제2소학교였단다. 수위실에도 학교 안에도 사람은 없었다. 대충 둘러보고 나오다가 지나가는 초로의 부부에게 백봉학교를 다시 묻는다. 허씨라는 아저씨는 자기가 백봉학교 출신이라며 아주머니를 먼저 보내고 안내를 자처한다.
도문제2소학교는 조선족 소학교로 규모가 아주 컸다. 교문에서 두 분은 열심히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신다. 옛 교문 자리, 목조 교사가 서있던 곳, 운동장이 낮아 늘 질퍽거렸다는 말과 건너편에는 상업학교가 있어서 학생들이 가방에 주판을 꽂고 다녔다는 기억까지...... 도문제2소학교 현관 벽은 온통 금빛 상패들로 즐비하다. 내용들도 다양한데 20개를 넘는 듯하다. 실적 거양과 선전과 표창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학교는 8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학교이다. 남향으로 잘 앉았는데 왼쪽으로는 두만강 건너 함북 남양시의 뒷산이 우뚝하고, 앞으로는 멀리 일광산 줄기가 뻗어 있다. 한때 3,000 명이 넘는 도문 최대의 조선족 소학교였는데 지금은 600명 정도란다. 정년을 기다리는 나이 많은 잉여 교원도 여러 명 있다는 일직 여교사의 설명이다. 선생님은 여교사에게 집요하게 옛날 백봉학교 시절의 교원명부와 학생기록을 요구하셨고, 여교사는 일요일이라 열쇠가 잠겨 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잘도 빠져 나간다. 선생님의 기억에는 당시 일본인 교장 스즈끼 겐세이가 선명하다.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스즈끼 교장은 ‘교원은 돈을 벌고자 해서는 안 된다, 학생 교육으로 만족해야 한다, 돈을 벌고자 한다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훌륭한 교장이었고, 선생님은 평생 교직을 수행하며 늘 그 교훈을 되새기셨다고 한다. 스즈끼 교장은 일본 패망을 앞두고 사망하여 학생들의 도열 속에 일광산 공동묘지로 향했다는데, 선생님은 그 묘지를 찾아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허씨 아저씨의 말로는 해방이 되며 묘비는 안전히 훼손되고 그 후로 무덤이 긴 세월 방치되어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한다. 60년을 훌쩍 뛰어넘는 흔적을 찾고자 하는 90 노인에게 많은 것이 다 불가능으로 다가왔다.
허씨 아저씨는 아들을 한국에 묻은 분이셨다. 아들이 용접 기술이 좋아 리비아로 사우디로 돈 잘 벌고 다니다가 한국에 돌아와 병에 걸려 죽었는데 자기는 장례에 가지 않았단다. 지금은 며느리가 한국에 가 있고 아저씨는 남은 아이들의 보모 신세가 되었다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학교 현관에서 다시 사진을 여러 번 찍고 점심을 먹는다. 선생님은 식사하는 속도가 아주 느렸는데 그것이 당신 건강의 비결이라고 귀뜸하셨다.
식사 후에 중조통상구(中朝口岸)를 찾는다. 제 철이 아니라 사람이 없다. 선생님은 썰렁하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시며 의외로 두만강과 강 건너 조국 땅에 별 흥미가 없다. 옛날에는 국경이 아니라 아무 거리낌 없이 용정에서 개산툰으로 회령으로 도문으로 기차 여행을 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직은 겨울인데도 통상구 가게의 호객 행위는 변함이 없다. 사람 마음이 가까이 와서 끄는 가게를 가기 마련이다. 봉지 커피 두 잔이 10원이다. 선생님은 귀한 시간 내서 운전하고 안내까지 하는데 돈을 쓰면 안 된다고 하시며 호주머니에서 예의 그 한 덩어리를 꺼내서 느린 동작으로 5원짜리 두 개를 뽑아낸다. 공항에 내려서도 저렇게 돈을 보였으니, 한족 택시기사가 시내까지 와서 400원을 요구해서 깎아 200원을 주었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다시 조선족 기사를 만났는데 하루 일당이 2,000원이라 하여 일단 하루치 2,000원을 이미 주었던 터였다. 공항서 시내까지는 20원이면 족하고, 하루 택시는 300-350원이면 충분하다. 선생님은 안내자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안전에 문제가 있었다.
도문에서 용정으로 방향을 잡는다. 선생님은 뒷자리에 앉아서도‘간평, 마패, 고성, 선구, 광종’하고 길가의 표지판을 정확히 읽어낸다. 시력이 참 좋으시다. 개산툰은 들어가지 않고‘제동, 석문, 명신, 덕신’을 지난다.‘明信, 德信’그 지명이 너무나 정감 어린 우리 식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구릉과 파란 하늘과 밭과 밭에 나와 있는 소와 양떼를 보시며 선생님은‘땅이 참 좋다’는 말을 반복하신다. 주유소를 지나는데 잠깐 들어가자고 하신다. 주유원 청년이 하나 나오는데 말이 통할 리가 없다. 우리말로 하다 안 되니까 선생님은 영어로 나간다. 그러나 중국에서 영어는 더군다나 통할 리가 없다. 의외로 선생님이 궁금하신 것은 주유소의 운영권이었다. 내가 대신 묻는다. 중국의 주유소는 거의 다‘중국석유’인데 모두 국영이란다. 선생님께 중국 주유소는 정부 전매사업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럴 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이신다. 참으로 호기심이 많으시다. 선생님은 외국어를 독학으로 하셨는데 방법은 일기쓰기였단다. 젊은 시절은 일본어로, 해방 후에는 영어로 일기를 쓰며 정확한 표현을 찾아 고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셨다고 한다. 전북의 고창고보를 다녔는데 유명한 서정주 선생님과 같이 공부를 하셨단다.
용정학교는 가보셨다기에 남들이 잘 모르는 당시 영국 조차지(租借地)였던 영국데기를 찾는다. 선생님은 지명만 들어도 당시 기억이 척척 살아나는 듯했다. 영국데기는 썰렁했다. 폐허가 된 교회당, 철수한 부대 건물 등. 한 가지 선생님의 시선을 끈 것은 6중학교 마당가에 세운 은진(恩眞)중학교 옛터라는 작은 기념비였다. 은진중학교는 개신교에서 명동중학교의 후신으로 세워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을 포함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교이다. 선생님은‘여기가 은진증학 자리였어’하시며 여러번 되뇌이셨다.
용문교(龍門橋) 옆 법원 마당에 차를 세우고 용문교를 배경으로, 또 해란강(海蘭江) 현수교에 올라 사진을 찍는다. 선생님은 다리 위에서 선구자를 읊조리셨다. 비암산(琵岩山)과 일송정(一松亭)이 멀리 보였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산길은 눈으로 덮혀 그냥 연길로 향한다. 왼쪽은 끝없는 사과배 과수원, 오른쪽은 드넓은 서전(瑞甸)벌이다.
선생님은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인생은 짧게 왔다가는 것인데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터 대통령도 그런 말을 했다면서...... 분명 선생님은‘하고 싶은 것을 하시기 위해’89세의 노구를 이끌고 혼자서 비행기를 타셨던 것이다. 어찌 보면 무모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추억을 찾는 여행을 감히 도모하셨던 것이다. 아마 한 살이라도 더 먹으면 영영 못 오실 것 같다는 생각이 발길을 더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그 나이라면 나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선생님의 패기(?)에 새삼 존경심이 들었다.
숙소에 돌아오신 선생님은 옛 해성학교 시절 수제자를 보고 싶다며 즉석에서 제자들 이름을 열거하신다. 이승룡, 이희명, 송기욱, 여학생으로 박인순, 윤연옥, 허경덕, 윤해옥 등 조금도 어눌하지 않게 한자 한자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 기억력이 정말 놀랍다. 이름을 적은 뒤 사람을 통하여 다음날까지 추적해 보았지만 이미 70대가 넘어 현역에서 잊혀진 분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스승은 평생 저런 것인가? 스승의 그런 마음을 제자들은 잠시 생각이라도 하는가? 결국 선생님은 항공 일정에 맞추어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여행이 그 분께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당시의 인연을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중국화되어 버린 생소한 땅에 대한 기억,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는 현실, 이제는 살아 생전 다시 찾기 어려운 젊은 시절의 열정이 서린 이 땅을 선생님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실까 자못 궁금하다.
잘 가셨는지, 비행기 멀미는 안 하셨는지, 먼 길에 몸살은 안 나셨는지 궁금하여 저녁에 서울 댁으로 전화를 드렸다. ‘대단히 고마웠습니다, 천주교 다닌 보람 있습니다’하시는 간단 명료한 음성이 쩌렁쩌렁 전화선을 타고 울렸다. '천주교 다닌 보람'이라 함은 성당에서 우연히 나를 만나 안내를 잘 받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리라.
(2007.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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