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청년시절 일본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서 평생을 다하여 구도의 길을 걸었던 시인 구상 세례자 요한(1920~2004)은 '진정한 답은 하나'라고 고백했다. 그의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는 제목의 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읽게 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짧은 시에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 실려 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고백한다. 시인이 알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限界)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시인은 인간이 처한 현실로서 인정한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 갈증, 고뇌, 고통, 불안, 허망 등을 인간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바로 인간 현실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수긍한다.

 사실, 시인은 종교학을 전공하던 시절부터 한평생 진지한 구도자로서 인간의 자력구원 가능성을 탐색해 왔다. 만년에 가서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스로는 저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도 '벗어날 수'도 '피할 수'도 없음을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이 피할 수 없는 한계가 바로 원죄(原罪)의 소산이라고 가르친다. 이 점을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자력구원 한계에 대한 '앎'을 넘어서 이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시인은 굳게 믿었다. 바로 저 피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믿었다. 시인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절대자 하느님에게서 오는 '신령한 손길'밖에 없음을 통감하고 이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고백했던 믿음을 우리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 은총이라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믿을 일이다. 요즘 시중에 상품화되어 나도는 온갖 영적 불량품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을 찾을 일이다. 사람이 되시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심을 입증하셨던 그분만을 따를 일이다.

그것이 고통이 되었든, 불안이 되었든, 내면의 영적 갈애가 되었든, 우리는 생애에서 절대자 하느님을 애절하게 찾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홀연 신앙의 문턱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하다.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한 것이다.

 한 선배의 고백은 우리를 신앙이 가져다주는 은총의 세계로 친절히 안내해 준다. 일찍이 청년 시절 동경으로 유학 가서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모태 신앙(母胎信仰)과 동양 유수의 종교(儒佛仙)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을 겪어 내고나서, 스스로는 천상 가톨릭 신자임을 선언하고 살았던 구상 시인(1919-2004년)은 만년에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구상,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누구든지 신앙의 은총에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이 이제까지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보이게 된다. 이 세상의 하찮은 들꽃 하나도 거룩함이 깃든 하느님 피조물로 보이게 되고, 지난날 슬픔과 고통 투성이로 보였던 삶의 편린(片鱗)들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축복과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껏 몸부림치며 고독하게 살아온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지 않게 도움의 손길로 부추겨 왔던 하느님 동반(同伴)에 눈물로써 감사할 줄도 알게 된다.

 당신께서 신앙의 눈을 떠서 당신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림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거룩하게 대하고, 아름답게 누리시기를 바란다.

 당신은 이제 신앙의 첫 발을 내디디려 한다. 신앙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며 결단이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당신 발걸음에 이해인 수녀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시(詩)로 격려의 말을 전한다.

 "내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정든 것과의 아낌없는 결별이며 당신과의 새로운 해후입니다. 유예 없는 결단이며 지체 없는 출발입니다. 또한 낯선 것과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처럼 모험을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행위.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고백을 세 번 거듭한 시몬 베드로처럼 당신께 대한 사랑을 매사에 확인하는 기쁨의 응답입니다.

 '사랑은 나의 인력(引力), 당겨지는 대로 그리로 나는 쏠린다'고 외운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과도 같이 당신 아닌 그 아무것도 나의 배고픔을 채워 줄 순 없습니다. 당신의 좁은 길을 넓은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 하오니 지금껏 나를 이끄시고 보살피신 그 크신 사랑으로 나를 새롭게 하여 주소서. 내가 당신을 잘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 건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당신 은총으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이해인, '사계절의 기도')

 당신이 과거 정든 것과 아낌없이 결별하시기 바란다. 낡은 가치관, 악습, 고집들을 가차없이 버리기 바란다. 그래야 하느님과 새로운 해후가 이루어진다.

 과거가 당신을 잡아당기더라도 주저하지도 머뭇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단호하게 출발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험의 길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낯선 것'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 당신이 챙길 것은 오로지 하나, 사랑뿐이다. 사랑을 품고 사랑이 부르는 대로 가라. 거기 하느님이 계신다.

 그렇다고 대충 떠나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다. 좁고 험한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 이렇듯이 생명에 이르는 길은 모든 것을 원하고 몰두를 요하는 길이다. 헐렁한 마음으로는 얼마 못 가서 포기하기 십상인 길이다.

 하지만 길이 험하다 해서 신앙을 짐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신앙이 당신 짐을 덜어줄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길은 순탄치 않지만 예수님께서 짐꾼으로서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이다. 우리 짐이 무겁지 않도록 부축해 주실 것이다. 아니 그 짐이 더 이상 짐이 안 되게 하는 비결을 일러주실 것이다. 이윽고 당신은 신앙이 결코 짐이 아니고 오히려 인생의 고달픈 짐을 대신 져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주저하지 마라. 당신이 신앙을 통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몰라서 그렇지 그 가치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을 몽땅 팔아 그것을 사려들 것이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우리는 세상 잇속에는 얼마나 눈이 밝은가! 어느 지역 땅이 얼마나 오를지, 어느 아파트가 얼마나 투자가치가 있는지 얼마나 잘들 아는가!

 아무리 잘난 체하고, 아무리 으스대도 이런 사람들은 '밭에 묻혀 있는' 하늘나라 '보물'을 볼 줄 아는 사람에 비하면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지혜는 잠시의 가치에 집착하지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지혜는 영원히 녹슬지 않을 보화(마태 6,20)를 붙들기 때문이다.

내가 미소지을 때
당신은 나를 통해 미소 짓는다.
내가 눈물을 흘릴 때
내 속에서 당신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잠에서 눈을 뜰 때
당신은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내가 길을 걸을 때
당신은 나와 함께 있다.
당신은 나처럼 미소짓고 눈물 흘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길을 걷는다.
나는 얼마나 당신과 비슷한가.

하지만 내가 꿈을 꿀 때에도
당신은 깨어 있다.
내가 넘어질 때
당신은 똑바로 서 있다.
내가 죽을 때 당신은 나의 생명.

옛날에 하나님을 미신이라고 여기던 한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들은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 후로 증명을 해보이는 사람이 한명도 없자 더욱 기세등등해진 그 남자는 더욱 하나님을 깎아 내리며 욕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어떤 똑똑한 랍비가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랍비도 그 남자가 하나님을 깎아 내린다는 소문에 괘씸해 하던 찰나 그 남자가 물어왔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랍비는 당연히 "아 그럼요.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계십니다." 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역시 그 랍비에게 그렇다면 하나님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했다.
랍비는 이 말에 "저기... 혹시 하늘을 볼 수 있으신가요?" 라고 말했고 남자는 “당연하죠”라는 말과 함께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랍비는 "그렇다면 하늘 위에 있는 저 태양을 보실 수 있으신가요?" 라고 말했다. 남자는 태양을 잠깐 보다 고개를 떨구고 눈을 비비며 말했다."아니 어떤 사람이 태양을 볼 수 있다고 하십니까?"라고 말을 하자 랍비는 "어허! 당신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조차 못 보는데 어찌 하나님을 그리 쉽게 보려고 하십니까!"라고 말을 했다. 남자는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의 잘못 뉘우쳤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시어 돌아가시기까지의 과정 중 14장면을 선정하여 그 고통을 묵상하고 그 뜻을 따라 바로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천주교에서의 상징입니다.
본 십자가의 길 사진은 천안 성거산 성지의 14처 조각인데 디자인이 단순한 가운데 장면마다의 특징을 잘 살렸다고 봅니다. 십자가의 길은 천주교 성지이면 거의 조성되어 있습니다. 14처의 사진을 차례대로 보시며 그 의미를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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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마태 27,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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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요한 19,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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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처 예수님께서 첫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 4 처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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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을 묵상합시다.(마태 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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