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에 고구려(高句丽)의 산성이 남아있다. 이름하여 비사성(卑沙城).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거의 모른다. 중국 이름은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산성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더욱 모른다. 성문 아래에서 조그만 기념품을 파는 한족 아저씨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산성은 전체가 우람한 바위산이었고, 발해만(渤海湾)을 굽어보는 비사성으로부터 안시성, 백암성, 신성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주요 방어체제였던 곳이다. 깎아지른 수백길 절벽위에 솟은 점장대(点将台) 또한 웅장함 그대로였다.


점장대에서 바라본 험준한 암봉의 정상부



성문위는 비사성(卑沙城)이고 오른쪽 설명은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이다


가파르게 비탈을 오르는 성벽



사방이 거의 절벽으로 솟는다



절벽 2



지휘소인 점장대를 배경으로



석마위에 올라가 호기를 부려본다



석고사(石鼓寺) 전경



석고사 남문에서

비사성은 한자로 卑沙城 외에 卑奢城 또는 필사성(畢奢城) 등으로도 쓴다. 중국에서는 대흑산(663.1m)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에서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으로 부른다. 고구려 때 축조된 성이지만,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랴오닝성
[遼寧省] 진저우[金州] 유이향[友誼鄕] 동쪽의 대흑산 주위에 석회암으로 쌓은 거대한 석성(石城)으로, 고구려가 수(隋)·당(唐)과 전쟁을 할 때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산성 역할을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만 서문(西門)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천혜의 요새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614년(
영양왕 25) 7월(음력) 마지막으로 고구려를 침공할 때 비사성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군은 하나뿐인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해 수나라군은 단 하나의 성도 빼앗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수나라는 결국 건국한 지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645년 4월,
당나라는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수로군으로 비사성을 공격한 뒤, 다음달 초 정예병으로 서문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고구려군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퇴로가 없어 살아남은 8,0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이끄는 막강한 당군이 안시성싸움에서 패하자 수군도 모두 철군하고 말았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대흑산 주위에 새로 성벽을 쌓았는데, 고증을 하지 않아 고구려의 축성법과는 전혀 다른 성벽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1~2m 높이의 고구려 때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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