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것들
허련순(연길시문학예술계련합회)
과연 이 글을 쓰는것이 옳은 일인지 원고가 끝날 때까지 고심을 했었다. 1985년에 고 김경련선생님의 단편소설《마음의 파도》를 비평한 글을 발표하고나서 지금까지 후회하고있다. 문학비평의 자리에 준비없이 섣불리 나선 치기였다고 부끄럽게 생각하고있는 부분이다. 그뒤 단 한번도 이와 비슷한 글을 써본적이 없다. 오늘 자신의 금기를 깨고 이 글에서 우리 문단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것인가에 대한 몇가지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할뿐이다.
위기인가, 기회인가
우리의 문학은 지금 위기인가? 작가라면 한번쯤 고민해 보았음직한 명제이다. 60넌대초에 벌써 세계적인 비평가들에 의하여 《소설의 죽음》이 선언되였고 그뒤 문학의 위기는 문단과 학계의 비상한 관심사로 부상해왔다. 미국 작가 앨빈커넌은 1990년에 《문학의 죽음》이란 저서를 발표하여 지난 30년동안 진행하여온 그러한 론의들을 종합하여 21세기 문화의 미래를 성찰하는 화제를 이끌어내였다. 그는 자기 저서에서 문학은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였다.《이제 인쇄 서적에 기초한 문학은 그 권위를 잃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그 존재 자체를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책을 읽는 능력이 사라지면서 시청각적 이미지,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화면이 가장 효률적이고 매력적인 오락과 지식의 원천으로써 인쇄 서적의 자리를 대신하고있다》라고 말한다.
커넌의 문학죽음의 론리로부터 우리 문단의 위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남의 불에 손을 쬐는것처럼 쉽고 득이 되는 일이 될것이다. 그는 문학위기의 본질을 고급독자들만 겨냥한 형이상학과 문학 권위의식에서 찾았다. 가족, 국가. 사회 등 모든 전통의 권위가 해체되여가는 시대적변화속에서 삶의 본질을 진실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문학적 《신념 위기》가 문학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위기에 대한 반발로 더욱 난해한 글을 써 권위를 붙잡으려고 한 작가들의 어리석음을 꼬집으면서 난해함은 문학의 위기를 몰아온 주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커넌이 보는 현대는 《창조와 표절의 구분이 점점 어려워지고, 광고와 이미지가 언어를 장악하고있는》시대이며《문학의 우월성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이 점차 사라져가고있는》시대이다.
우리의 문단이야기인듯 전혀 낯설지 않다. 시대가 변하고 문학개념이 변하고있는데 우리 문단은 별개인양 별로 변하지 않은 덤덤한 표정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독자를 외면한채, 더 이상 팔리지 않는 작품집과 문예지들의 암담한 현실을 애써 묵인한채, 자화자찬하면서 문학의 자리를 지키고있다. 점점 작가대오가 줄어들고 독자들이 멀어지고 문학령역이 축소되면서 문학출판의 부진, 문학시장의 위축, 창작열의 부진의 사회현상으로 이어지고있다. 《문학의 죽음》이라고 표현할수밖에 없는 암담한 시점에서 문학을 더욱 어렵고 힘들게 했던것은 문단의 정치론리와 권력론리에 의한 구태의연한 편가르기, 실리 챙기기, 상대 작가 죽이기와 같은 독선의 무단 행보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문학의 위기를 감지하고 문학의 활로와 비전을 제시하여주어야 할 비평가들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게 몸을 사리고 관전만 하고있는가 하면 참신한 변화와 상상력으로 부단히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켜야 할 작가들이 문화창작보다는 실리 챙기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있다는 지적도 받고있다. 문학은 더 이상 정치적인 론리와 권력의 론리에 놀아나서는 안된다. 더 이상 편가르기에 의한 피해자가 나와서도 안된다. 작가들 스스로가 문학을 욕되게 하는 일은 자기가 먹고 사는 우물에 침뱉기가 될것이다.
우리에게 시급한것은 작가들의 진지하고 깊은 성찰과 참신하고 새로운 문학정신의 정립,그리고 변화에 의한 창의적인 대응이다. 변화하고 새롭게 생성되여야 사는것이 문학의 속성인것을 보면 문학은 늘 위기일수밖에 없고 그 위기를 살아내면서 문학은 새롭게 태여나게 될것이다. 이것이 문학의 운명이다.
자기 목소리내기와 혼자소리치기
이쯤하여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해본다. 우리의 문학은 자기 목소리내기였을가 아니면 《혼자 소리치기》였을가? 물론 문학이란 작가의 자기 목소리내기 작업인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남한테 읽히기 위함을 전제로 하는 자기목소리내기여야 하지 자기만의 혼자 소리치기라면 문학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2006년 11월 10일부터 14까지 북경에서 있은 제7차 중국작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중국의 거장이라 이름하기에 손색이 없는 956명의 작가대표들과 함께 한 5일간은 나의 문학을 다시한번 반성해볼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대표라는 이름으로 할수 있는 기쁨과 감격은 오히려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외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천명에 가까운 작가들속에서 함께이면서도 혼자인듯 차가운 단절감과 괴리감을 뿌리칠수 없었던것은 그들과 우리들사이의 뛰여넘을수 없는 벽때문이였을것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이들한테 우리는 과연 무엇일가 하는 질문을 하였고 태여날려면 중국사람으로 태여나던지 아니면 조선족으로 태여날려면 차라리 한국에서 태여나던지 하고 태생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만난 956명 작가들속에서 우리를 작가로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것이 아니겠는가. 그중에 내 작품을 읽은 사람이 없을텐데 작품을 통하여 작가 허련순을 아는 사람이 있을수 있겠는가. 하긴 민족문학의 주필인 하문선생이 귀잡지에 나의 번역소설이 몇편 실렸던 관계로 인사를 건넸으니 한명은 있은 셈이다.
그때만큼 자신이 시시하게 느껴지고 문학이란 이름이 부끄러웠던적은 없었다. 이것이 나 한 개인의 부끄러움이나 슬픔은 아니였을것이다. 지방에서는 명절에도 입지 않던 한복을 떨쳐입고 복장쇼를 하듯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괜히 열을 올렸던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나 과시외에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싶었던 치렬함이였다고 말하면 유치일가. 그들에게 우리는 단지 민족복장으로 보여진 소수민족이였을뿐 작가는 아니였을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란 이름은 불러서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하여 불러지는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에 바탕을 둔 문학의 이름으로 문화적진실을 담론하고 소통했던 적이 전무한 낯선 아저씨와 아줌마들로만 보여졌을거라고 말하면 과장일가.
명함을 나누면서 무슨무슨 작품을 쓴 작가라고 소개를 할 때 뜻하지 않게 읽어본것 같다는 선의적인 인사를 받기도 했다. 잘못 기억한것이 아니면 입에 발린 인사치레였을것이다. 그 순간은 오히려 문장에서 잘못 찍한 사이표처럼 자신이 스스로 궁색하고 부끄러웠다. 나중에라도 작품을 읽을수 있으면 좋겠다는 선의적인 인사는 진정성이 결여되여 있어서 서글프고 허무했다. 작품을 보내면 자기들이 알아볼수나 있는가.
중국에서 한글로 작가의 삶을 영위한다는것은 처음부터 힘들고 비애스러운 작업이였을지 모른다. 조선족작가들은 비록 문학적 력량면에서는 타작가들한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중국어로 직접 창작하지 못한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중국문단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며 지어 평가받지 못해도 원망할수도 없는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가? 토론회에서 연변대표들은 모어로 창작하는 소수민족작가들의 애환을 호소하고 소수민족문학을 살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번역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회의 내내 우리는 물우에 뜬 기름처럼 우리만의 번역이야기에 집착하였다. 하지만 번역은 우리들만의 화제일뿐 결코 중국작가들의 관심사는 아니였다. 우리들이 운명처럼 매달리는 번역이 과연 조선족문학이 중국문학에 합류하는 주요 해결방책이 될수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할수 없는 일이다.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자금은 한정되여있기에 대다수의 작가들을 위한 혜택으로 돌아가지 못할것은 자명하다.
전혀 길이 없는것은 아니다. 중국어로 작품활동을 하시는 남영전시인, 김인순소설가, 그리고 사천성의 아라이(阿来)소설가 역시 소수민족작가이지만 중국 주류문학권에서 대표적작가로 인정을 받고있다. 외국작가들중에서 아베 고보나무라카미 하루키같은 일본작가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리유중의 하나도 바로 그들의 직접적인 영어구사력 때문이다. 영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중국어구사에만 능하더라도 번역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것이고 중국작가들이나 비평가들과 직접 교류할수 있을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처지나 대우도 달라졌을것이다. 하지만 언어문제는 한순간에 해결할수 있는것이 아니므로 현시점에서 모든 조선족작가들이 직접 중국어로 창작한다는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본고에서 론의하고싶었던것은 한글로 글을 써야 하나, 중국어로 글을 써야 하느냐가 아니다. 중요한것은 당면에 우리가 놓여진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작가들의 안일함이나 락관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는 확정된 진실의 위치를 잃은채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해오거나 그럴수밖에 없다는 자아변명으로 자신들을 꾸준히 위로해왔다. 결과 스스로 자신들을 작은 섬으로 가두었고 세계를 꿈꾸는 작가가 아니라 중국에서 살면서도 중국 중심에 설수 없는 변두리의 작가로 밀려나고말았다. 자아자찬하면서 우리들만의 울타리에서 서성거렸던 시간만큼 우리는 세계문학의 주류와 중국문학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버렸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세상과 동떨어진 우리의 문학은 결국 자기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명분하에 결국 혼자 소리지르는 결과에 이르고만것이다.
연변작가협회 50주년 기념행사 뒤끝에 있은 문학세미나에서 한국의 한 문학평론가가 중국문단에서의 조선족작가들의 위치와 평가에 대하여 질문한적이 있다. 우리 모두에게 치명적이면서도 부끄러운 질문이였다. 처음엔 조선족작가들이 한글로 작품활동을 한다고 중국에서 살면서도 모어를 잘보존하고있다고 경의로운 시선이였던 그들도 이제는 우리들의 약점을 보아버린것이다. 이제 더 이상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우리 문학을 그냥 조선족문학권안에다만 가두어둘것인지 아니면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문학비전을 제시할것인지 우리는 빨리 판단해야 한다.
우리 문학의 경계넘기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는 급속도로 달라지고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부득불 변해야 한다.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의 정보를 입수하고 생각하며 자기를 표현하고 살아가는 일상에서 컴퓨터는 경계없는 제국을 무한한 정보를 공유하게 한다. 현실은 우리를 세계의 일부로 강요하고 있다. 그 어느 국가나 지역에 고립되여서는 존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급히 풀어가야 할 또 하나의 어려운 숙제가 있다. 언젠가《연변문학》잡지에서 조직한 소설세미나의 발언요지를 그대로 잡지에 실은것을 본적이 있다. 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이나 한국문학을 따라갈것이 아니라 우리식대로 해야 하며 우리의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다는 주장의 내용이다.
세계적인 문학이란 무엇인가? 과연 연변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일가? 우리적인것을 주장하는것은 천만번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세계적인것을 알면서 자기적인것을 주장하는것과 타문학에 대해선 아예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내것만 주장하는것은 자칫 또 다른 아집과 자아도취의 울타리에 자기 가두기의 일환이 될것이다. 자기 목소리내기의 라면에 또 다른 원형인 혼자소리치기의 자아도착증이 도사리고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국적인것이나 세계적인것에 따라가기가 힘들어서 숨어버리는것이라면 이는 결국 자기만의 특수성 내세우기가 아니라 자기 죽이기에 해당된다는것을 고집하면서도 범세계적인 보편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문학에 접근할 수가 없다. 너무나 연변적이면 타문학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것이며 너무 보편적이여도 새로운 맛을 느끼지 못할터이니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는 이런 가상을 해본다.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작품을 쓰는 조선족작가들에게 한국문학에로의 접근은 오히려 중국문학의 접근보다 쉬운 길이 아니겠는가. 국내문학 접근보다 외국문학에로의 접근이 더 쉬울수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동일 민족언어를 바탕으로 문학을 하고있다는것이 우리로 하여금 욕심을 가지게 하는데 이미 우리 문단에서 적지않은 작가들이 한국문단 진출로 진로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고 김학철님의 장편소설《20세기의 신화》, 림원춘님의 장편소설《우산은 비에 운다》, 최홍일님의 장편소설《눈물젖은 두만강》1,2권, 장혜영님의 장편소설《살아남은 전설》1,2권, 허련순의 장편소설《바람꽃》,《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등 소설들이 한국에서 출판되였고 동아일보,조선일보, 한겨레, 문화일보, 연합뉴스,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국가급 신문사들에서 앞다투어 대서특필하기도 하였다.(한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있는 중국조선족 시인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본고에서는 소설가들만 포합시켰다.) 이는 우리 조선족문학의 세계화진출의 징표가 아니겠는가. 우리 문단은 이들의 변화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 부추켜주어야 한다. 조선족문학의 한국진출은 문학소통의 세가지 문제 즉 작가의 현실, 작품의 현실, 독자의 현실문제를 풀어가는데 고무적인 일이지 않을수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어려움이 첩첩하다. 한두권의 책을 낸다고 하여 한국문학권에 합류했다고 말하는것은 어페일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진정한 한국문학에로의 진출은 문학의 본질의 변화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동일한 모어의 구성원이지만 결국 조선어와 한국어의 다른 명칭의 언어권으로의 재편된 언어들의 어려운 만남으로서 그 차이를 극복하는것도 큰 작업이고 또 이 언어속에 내포해있는 다른 문화적인 내용과 자률성 극복도 큰 작업이 아닐수 없다. 무조건 따라가기는 결국 새것이 없기에 낡고 쓸모없는 페기물의 신세를 면치 못할것이다. 남들이 할수 없는, 우리만이 가지고있는 고유성을 찾아내는 일과 그것을 세계적인 보편성이 되게 하는 일, 이런 작업이야말로 우리를 세계문학에 서게 하는 자기 목소리의 문학이 되는 길이다.
모두어 말한다면 우리 문학의 위기극복은 자기 문학의 경계 뛰어넘기와 작가의 탄력적이고 전위적인 대응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이다. 인간과 문학의 자지 동일성찾기는 문학의 이름으로 시작한 영원한 게임이 될것이다.
누구를 위해 글을 쓰며 무엇을 위해 글을써야 하느냐는 질문은 새삼스러운것이 아니지만 문학 독자가 줄어들고있는 현실일수록 문학하기의 근본적인 목적의식을 검토하고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종래로 문학은 문명보다는 인간을, 사회발전보다는 삶의 가치에 무게를 실어왔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류형의 작품들이 계속 쏟아져나오더라도 인간을 위한 문학의 명제는 변하지 않을것이다.
문학이 스스로 자기의 중요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깊은 문학적인 성찰을 해야 하며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여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문학은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올것이다.
(맞춤법은 중국조선어규범을 따른 것임)
허련순(許蓮順)
약력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중국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서울 광운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연구생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변녀성문인협회 회장
중국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동북3성 금호상, 천지문학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흑룡강신문 신춘문예상,
도라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김학철문학상등 수상
주요 작품
1986년 소설 ‘안해의 고뇌’로 문단 데뷔
소설집 『사내 많은 녀인』, 『유혹』, 『바람을 몰고 온 녀인』,
『우주의 자궁』
장편소설 『잃어버린 밤』, 『바람꽃』, 『뻐구기는 울어도』.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장편TV드라마 『갈꽃(10회)』, 『떠나는 사람들(20회)』.
『녀자란 무엇입니까』.
장막화극 『과부골목』 외 다수
2007년도 제1회 김학철문학상 장편소설부분 대상
수상작 선정 이유서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는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디아스포라는 근대 식민주의체제와 현대 후식민지시대의 글로벌화라는 콘텍스트 속에서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전쟁, 시장경제의 세계화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반적인 사실주의적인 재현 속에 상징적인 기법도 적절하게 인입하고, 또 공간 집중화의 기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한국으로 향하는 밀항선에서 벌어지는 중국조선족출신의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오늘날의 실존적 상황을 《시대의 서기관》답게 리얼하게, 전형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작자의 깊은 사색을 보여주었다. 고향을 상실하여 방황하고 방랑하는 디아스포라들에게 있어서 아이덴티티란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인 것이다. 많은 본토박이 다수자들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수자들로서의 디아스포라의 일원인 허련순 씨가 그렇듯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는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이며,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 이후 인간 소외의 비극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는 특수한 공간으로서의 폐선에 가까운 밀항선, 그리고 잃었던 고향을 되찾으려고 목숨을 내걸고 밀항선을 탄 밀항자들은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서 어쩌면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의 전반 중국 조선족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밀항선에 탄중국조선족출신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비규환의 비극적상황은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실존 상황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중국조선족 밀항자들은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중편소설 《타망고(Tamango)》에서 나오는 노예무역선에 총칼에 의해 강압적으로 오른 흑인노예들과는 달리 밀입국알선을 전업으로 하는 브로커들에게 막대한 돈을 내고 밀항선에 자진하여 올랐다는 점이다. 밀항선에 오르도록 그네들의 등을 민 것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금전이라는 무형의 검은 손이였다. 고향 상실, 고향 찾기, 목숨을 내건 고향 찾기 실패의 실향의 비극은 중국조선족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 널려 사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들, 나아가서는 인류의 공통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협소한 공간을 뛰여 넘어 세계적인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어 아주 희망적이다.
이 작품이 새로운 세기를 맞아 《민족적 아이덴티티 찾기》--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되찾음으로써 중국조선족문학이 나아갈 진로를 제시하여주었음을 확신하면서 제1회 김학철 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된 허련순 씨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보낸다.
조성일 ‧ 김관웅 ‧ 김호웅 ‧ 리광일 ‧ 조일남 * 장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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