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억하는, 그리고 기억할 이연걸


당신이 기억하는 이연걸은 어떤 사람인가? 반짝이는 변발을 하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국 무협물의 배우? 혹은 11세였던 1974년부터 5년 연속 중국 전국무술대회 성인부 종합우승을 한 무술 천재이자 빠른 몸놀림으로 1초에 7,8회의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절대 고수? 그도 아니면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불교 신자? 미안하지만 이건 모두 옳은 답이 아니다. 이연걸의 영화와 현실은 이 모든 것을 합친 어떤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무인 곽원갑]을 통해 25년 무술 연기의 총망라를 시도한 이연걸은 무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 영화에 모두 쏟아 넣었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무술 정신을 모두 담은 [무인 곽원갑]을 마지막으로 이연걸은 더 이상 무술 액션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해 많은 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에 오직 맨몸으로 유려한 우슈의 아름다움을 전했던 무인 이연걸의 기억을 반추할 시간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소룡, 성룡, 견자단과 함께 중화 무술을 대표하는 그의 무술 인생을 총정리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글은 이연걸의 공식 웹사이트(www.jetli.com)에 실린 그의 에세이를 중심으로 이연걸이 말하는 이연걸과 그의 영화 속 캐릭터를 통해 바라본 이연걸의 이야기다.

천재 소년 이연걸

“사람들은 나를 ‘다재다능한 중국의 챔피언’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선 모두 나에게 ‘모든 것에 능한’이란 수식어를 붙여 주었고 난 정말 내가 모든 것에 능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내가 할 일은 아직 모르는 것을 배워 모든 것에 능한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 공식 웹사이트 SPIRIT 페이지


1963년 베이징 출생인 이연걸은 8세 때부터 무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하루 8시간씩 뼈를 깎는 노력으로 10년간 수련한 이연걸은 사실 무술이 그의 인생에 이렇게 큰 의미를 차지할 줄은 미처 몰랐다. 우연히 학교 운동서클에 가입하기 위해 줄을 선 곳이 무술반이었고 이후 무술 신동으로 각종 종목의 메달을 거머쥔 이연걸은 1979년 [소림사]로 영화 데뷔를 치르기 전까지 전세계를 돌며 무술 시연을 했다. 위의 회상처럼 이연걸은 당대 최고의 화제를 모은 무술 신동이었다. 10대 소년이 성인부 무술대회에서 장장 5년 동안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연걸은 무술을 통해 홀어머니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었고 당시 엄격한 공산주의 사회였던 중국에서 무술을 통해 유럽과 중동, 아시아 지역을 돌며 흥미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1976년 필리핀 투어에 대해 이연걸은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회상을 덧붙인다.

“예전 중국은 해외에서 중국으로 물건을 반입할 시 엄격한 가격 통제가 있었다. 필리핀 공연 당시 대통령의 공식 게스트인 우리의 지위는 많은 선물 공세로 이어졌다. 어느 옷 가게에 들렀을 때 주인은 우리에게 마음에 드는 옷을 한 벌씩 고르라는 호의를 베풀었다. 우리는 신나게 옷을 골랐다. 다음으로 들른 신발 공장에서는 가죽 부츠를 제공했다. 모두 너무나 신나 있는 상황에서 해외 물품 반입 가격 제한은 우리의 선물들을 무용지물로 만들 참이었다. 우리는 이것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새 옷을 입고 바닥에 뒹굴거나 새 가죽 부츠를 신고 축구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벽에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숙소로 돌아오니 코치가 '너희들의 시연이 너무 훌륭해 정부에서 선물들을 반입하도록 허가했다'고 말했다. 왜 좀 더 일찍, 하루만 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을까?” - 공식 홈페이지 LIFE 페이지


중화 영웅 이연걸

이연걸의 데뷔작 [소림사]는 천재 무술 소년 이연걸의 존재를 중화권 전역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이연걸은 이 영화를 찍을 당시를 “영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이연걸은 영화의 내용도 모른 채, 감독이 “이번엔 악당이 더 강해야 해” 혹은 “이번엔 네가 더 강한 신이야” 등의 대강의 컨셉만으로 합을 짜고 촬영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는 4계절을 꼬박 보낸 힘겨운 일정에도 불구, 하루 8시간씩 계속되는 무술 수련 대신 촬영 후 동료들과 축구나 농구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촬영장을 좋아했다. 이연걸의 풋풋한 미소를 감상할 수 있는 [소림사]는 잔인한 권력자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소림사로 흘러온 소년 소호의 복수담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다분히 이연걸의 개인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설정들이 눈에 띄는데, 소호가 불교에 귀의한 후 소림 무술을 연마하는 과정을 계절의 변화를 암시하는 다양한 배경을 통해 선보이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소림사] 이후 이연걸은 멜 깁슨의 상대 악역으로 등장한 [리셀 웨폰 4](1998)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주연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불세출의 액션 영웅으로 살았다. 그렇다. 이연걸만큼 영웅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배우도 드물 것이다. 실제 유려한 무술 실력을 바탕으로 영화 속 이연걸은 중국 민중의 한을 잔뜩 짊어지고 악에 맞서 싸웠다. 이연걸은 세 편의 [황비홍]시리즈(1991~1993)와 이소룡의 [정무문]을 리메이크한 [이연걸의 정무문](1994), 미국 로케이션을 시도한 [용행천하](1995), 직접 메가폰을 잡은 [중화영웅](1998) 등을 통해 영웅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연걸의 영화 속 캐릭터가 곽원갑을 비롯 황비홍, 방세옥처럼 존경받는 중화권 실존 인물들이 많다는 점은 그의 이미지 구축에 큰 몫을 했다. 이연걸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근작 [무인 곽원갑]과 관련한 재미있는 사실은 [정무문]의 진진이 실제로 독살 당한 사부 곽원갑의 원수를 갚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온 인물이란 점이다. 이연걸은 젊은 시절 혈기방장한 진진을 연기하고 40대에 접어들어선 곽원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연걸의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체구 서양인과의 결투다. [무인 곽원갑]에서 깨달음을 얻은 곽원갑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인의 자긍심을 위해 거대한 미국인과 결투를 벌인다. 길다란 서양인과 마주보고 선 곽원갑의 모습은 흡사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식한 물리력으로 주먹만 휘두르는 거인을 상대하는 곽원갑은 유연한 몸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이 같은 대결은 뤽 베송과의 인연으로 제작된 [키스 오브 드래곤](2001), [더 독](2005)과 같은 영화에서도 등장하지만 [중화영웅]이나 [용행천하]의 그에게선 의협심이 더욱 돋보인다. 해외에서 제작된 두 편의 영화에서 서양인과 싸우는 이연걸이 흥미로운 이종격투기를 관람할 때 느끼는 쾌감을 전한다면,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단단한 근육질의 몸으로 무장한 서구인을 굴복시키는 장면은(이는 극중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을 모티브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교권의 자존심을 건 대리 복수의 냄새가 강했다. 실제로도 불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던 이연걸은 [남북소림]([소림사] 3편, 1986) 이후 그가 직접 [중화영웅]을 감독한 이유를 “내 사회적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중국의 개방화 정책이 가속화되면서 외국인과 비교해 차별 받는 본토 중국인들의 처지를 시대적 배경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적 불평등과 분노에 대해 자각한 계기를 담은 이연걸의 혈기 어린 회고담을 살펴보자.

“[남북소림]은 정말이지 촬영하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홍콩에서 온 유명 감독이 연출을 맡자 처음 두 편처럼 배우들이 창작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홍콩 스탭은 한달 15,000위안을 받을 당시 나와 다른 배우들은 하루 3위안의 출연료를 받았다. 본토 스탭들이 평범한 점심을 먹을 당시 홍콩 스탭들은 케이터링 서비스로 조달된 특별식을 제공 받았다. 사건은 새벽 4시로 예정돼있던 촬영장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새벽 2시부터 현장에서 기다렸지만 감독은 오전 10시에 나타나 '광량이 틀렸으니 여명 장면을 미루자'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곧장 제작자에게 불공정한 처사를 설명하고 감독이 사과하지 않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따졌다. 그리고 보다시피 난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 사건은 나에게 권력과 계층에 대해 자각하게 해주었다” - 공식 웹사이트 WORK 페이지

복수를 초월한 불자 이연걸

이연걸은 뤽 베송과 함께 한 첫 영화 [키스 오브 드래곤]을 통해 불완전한 한 남자가 위기와 공포에 맞서 나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완벽한 영웅보다 평범하지만 점차 발전해가는 캐릭터에 끌린다는 이연걸은 [무인 곽원갑]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승자의 영광에 집착하던 젊은 곽원갑은 ‘최고수’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임을 깨닫고 무술의 참 정신을 깨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진다. 이러한 캐릭터의 변화는 이연걸의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흥미롭게 드러난다. [소림사]에서 오직 복수를 위해 소림 무술을 배우려는 소호에게 주지스님은 “어떤 경우에도 살생을 하지 않겠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이에 소호는 “살생은 안되지만 정의를 위해선 가능합니다”라고 주저없이 답한다. 독살당한 사부의 복수를 위해 무술을 연마하던 [정무문]의 진진은 “일본인들이 많은 곳이 어디냐. 가서 박살을 내자”라며 복수를 향한 망설임 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무인 곽원갑]에 이르러 그의 캐릭터는 포용의 정신을 피력한다. 곽원갑은 중국인의 기를 꺾기 위한 음모로 기획된 4:1의 불리한 결투에도 순순히 응하고, 온몸에 독이 펴져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상대와 겨룬다. 그리고 상대는 곽원갑의 정신에 탄복하고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변화는 자연인 이연걸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1997년 나는 영화에서 완전히 은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유는 단지 내가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난 8살 때부터 10년간 매일 8시간씩 수련을 했고, 이후엔 계속 영화를 만들었다. 기자들은 언제나 감언이설로 날 카메라 앞에 세워 포즈를 잡게 했지만 유명해지고 부유해져도 상처는 있는 법이다. 난 더 이상의 명예도 돈도 원하지 않았다”
- 공식 웹사이트 SPIRIT 페이지


모든 것을 이뤘다고 느낀 이연걸은 불교를 수양하며 정신적인 삶을 살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발길을 다시 영화로 돌린 것 또한 불교였다. 티벳 정신적 지도자와의 만남에서 이연걸은 자신이 가진 것을 통해 불교를 전하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겨나게 됐다.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만나는 스승마다 “불교와 연이 있다”는 말을 듣던 이연걸은 불교와의 인연을 [소림사]로부터 꼽는다. 당시 배역을 위해 불교 의식을 전수받던 이연걸은 절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스님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권유를 받기도 했으며 또한 이 무렵부터 그는 "철학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와호장룡]의 배역을 아내의 출산을 지키기 위해 포기한 이연걸은 영화의 기록적인 흥행 이후 한동안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연걸은 “영화는 내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다”라는 말로 세간의 호기심을 일축했다. 그의 팬들은 이처럼 무술에 대한 열정과 욕심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자연인 이연걸의 모습을 큰 매력으로 꼽는다. 한없이 해맑은 미소 속에 빛나는 고수의 카리스마는 이연걸의 전매특허다. 이연걸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팬들의 다양한 질문과 이연걸의 답변이 가득하다. 그 질문들은 스타 배우에 대한 시시콜콜한 개인사뿐 아니라 무술과 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부터 일상생활에서 수련하고 명상하는 법에 대한 조언까지 너무나 다양해 더욱 인상적이다. 팬들에게 그는 단순한 액션 스타가 아니라 삶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사부'와 같다. 와이어와 특수효과로 누구나 액션 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에 끊임없이 수련하는 무술인 이연걸의 존재는 컴퓨터와 마우스만으로 대체될 수 없는 단단한 그 무엇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할 이연걸의 모습이다.

영화와 네티즌의 만남 "시네티즌(www.cinetizen.co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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