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젬마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
“취재하다 혼쭐나고, 도둑으로 오해받기도 했어요”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가 6년 만에 신작을 펴냈다.
책이 출판되는 순간에서야 ‘나오는구나’라고 실감했을 만큼 지난했던 작업. 책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그 과정만으로도 자신의 삶이 한결 넓어지고 발전하리라 생각하며 걸어왔다는 그 길을 함께 돌아봤다.

책상에 놓여 있는 두 권의 책. 선명한 표지 색깔과 긴 생머리를 아멜리에 처럼 싹둑 자른 저자의 표지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와 책장을 넘기다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넘겨도 넘겨도 이어지던 작가의 말. ‘아, 이 사람, 글을 쓰면서 꽤나 고된 시간을 보냈겠구나.참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겠구나’라는 책에 대한 작가의 강한 애착이느껴졌다. 베스트셀러인 ‘그림 읽어주는 여자’와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배웠다’로 이름을 알린 후 6년이 지났다. 그리고 한번에 한 권도어렵다는, 산고의 고통에 맞먹는다고 표현하는 책을 쌍둥이로 낸 열정.장흥 아트센터 아틀리에에 새로운 작업공간을 마련했다는그녀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의 후광이 부담
“추려내고, 선택하고, 포커스를 어디에 맞출지 처음부터 고민이 많던 작업
이에요. 책을 편집하고, 나오는 그 순간에서야 진짜 나오나 보다, 이제야 나오는구나 새삼스러웠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매달린 일. 그렇게 그녀의 힘을 뺀 책은 ‘화가의 집을 찾아서’와 ‘그 산을 넘고 싶다’이다. 세 편으로 계획된 ‘한반도 미술 창고 뒤지기’ 시리즈의 첫 두 편으로 작가와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공간을 찾으면 그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작가의 발자취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위해 그녀는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을 구석구석 뒤졌다. 유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생가를 찾아가 흔적을 더듬고, 작품이 있는 지역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던 시간. 길치라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물어물어 찾아가도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던 일은 부지기수였다. 기념사업회며 동호회 등에 연락을 했다가 발로 뛰어다녀야지 전화만 한다고 호통을 들은 적도 있고, 각종 기관을 찾아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다가 도둑이냐고 의심받기도 했다. 만만치 않은 작업, 진을 다 빼놓을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주제를 잡으면서부터 알고 있었던 듯하다. 속으로는 초반부터 질리는 거 아냐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미리 겁을 내지 말자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며 걸어왔다. 책이 안 나와도 좋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찾고 느끼다 보면 책이라는 산물로 나오지 않더라도 작업과 인생관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한걸음씩 움직였다고. 세상과 많은 소통을 해준 첫 책 ‘그림 읽어주는 여자’가 워낙 주목을 많이 받아 더 부담스러웠다는 고백.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명성과 신뢰로 그동안 다른 책을 내자는 유혹도 많았다. 확실하게 거절하긴 했지만 때때로 일의 진척이 없을 때는 다른 책이라도 낼 걸 그랬나 아쉽기도 했고, 주변에서는 공백이 길지 않느냐는 염려도 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조금씩 일을 이어가면서도 끈을 놓지 않은 건, 꼭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어요. 이건 맞다는 생각, 꼭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서 더 매달릴 수 있었지요.”



전국 방방곡곡을 노트북 들고 다니며 취재
부담을 가지기보다 그냥 떠나는 마음으로, 여행 간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다가간 일. 훌쩍 떠났다가 돌아와서 기록하면 그때, 그 순간 얻은 감동이 희미해질까 봐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중간중간 글을 쓰고 스케치를 했다.
“이동하면서 기록도 하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스케치도 했는데 아쉬웠던 건 사진이에요. 사진은 전문가가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저 혼자 미리 가서 봤는데, 바로 그 순간에 느껴지는 소박하고 정다운 장면을 놓치게 될 때가 있었어요. 이런 바보 같은,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몇 번씩 후회했죠. 이제는 아예 사진 찍는 걸 배우기로 했어요.”
어림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길을 떠난 후에야 우리의 현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챙길 건 챙기고, 지킬 건 지켜야 하는데, 바깥의 것만 바라보고 애태우느라 정작 우리의 정신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본인 역시 언젠가 “한국인에겐 현대미술의 태양인 백남준이 있는데 왜 서양미술에 콤플렉스를 갖느냐”는 한 큐레이터의 언급에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우리 산천을 돌아다니는데, 우와~ 그 자체가 그림이었어요. 우리 것이 진정한 미(美)구나, 외부가 아닌, 우리 가까이 있는 걸 즐겨야 하는구나 깨달았죠. 너무 서구화되어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가득한 요즘, 과거의 것이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책을 보면서 사람들이 한 명씩 두 명씩 우리 것을 찾아 길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전문적인 식견이 아니어도 각자 자신의 시선으로 일상 속에서 우리 주변을, 자연을 돌아보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자기만의 사고를 확립하게 된다.


일하면서 노는 워커홀릭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미술작품을 만드는 작가이지만 글로도 정평이 난 터라 글과 그림을 비교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는 그녀. 하지만 이 예술가 에게 책은 글 자체가 아닌, 글이라는 매개체로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고 작품인 듯하다. 굳이 분리해서 봐야 한다면 정규코스를 밟아온 그림은 경쟁해야 하는 부분이고, 그렇다 보니 더 어렵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대신, 무모하게 덤벼든 글은 모르는 게 많다 보니 부담 없이 기회를 넓 힐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에게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 풀어놓아져도 ‘한젬마’라는 개인의 생각과 비전이 집약된 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작품 역시 비 오는 날 마시는 차 한잔, 친구와의 전화 통화 등의 에피소드 속 에 그녀가 언뜻언뜻 비쳤었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제 얘기를 뺄까도 생각 했어요. 하지만 그건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일상에서 일어나는이야기를 곁들인 건 의도적인 작업이었죠.” 젬마 스타일로 방향을 잡고 에너지를 집약했던 일. 원래 일을 끝내면 마음을접는 성향으로 고등학교 시절에도 시험을 보고 나면 친구들이 답을 맞춰보더라도 딱 덮어놓고 다음 시험 과목 공부를 했다던 그녀는 이번에도 책의 반응은 잘 살펴보지 않고 있다. 책이 출판된 후 기자회견 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한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고. “저에게 휴식은 집에 있는 거예요. 길눈도 어둡고 역마살과 거리도 멀어요.우편함에도 안 내려가고 하루 종일 집에 있어요. 그러면서도 되게 바빠요.책도 보고, 이것도 만지작거리고 종종걸음 치죠. 혼자 잘 노는 스타일이라 한번 안 움직이면 나가기가 너무 힘드네요. 제가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고 막 좋아하는 편이라 사람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요. 그런데 집에 있는 걸 즐기니까 사람들도 집으로 오라고 해요.” 쉬고 있지만 목 디스크가 있어서 치유하기 위해 요가를 하는 것 외엔 운동도 그다지 챙겨 하지 않는 편이다. 여행 역시 마찬가지. 쉬러 떠나도 새로운 것을 보면 일을 하게 되는 일 중독자 성향 때문에 오롯이 쉬려면 집에 있어야 한다고. “좋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저는 일하면서 놀아요. 그러다 보니 때때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남들이 다 너 같지 않다는 충고도 듣죠. 여행을 가도 내내 일이에요. 새로운 것을 보면 사진 찍고 스케치 하고요. 동행에게 민폐를 끼칠까 봐 그 순간의 아이디어만 담기 위해 걸어가면서 사진 찍어요.”
모든 시간과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기에 뭘 하든 배우는 건 있다. 하지만 이왕 배우는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채울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사람들이 문화에 대한 상식을 채우려는 지적 허영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근본을 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길 바라는 마음. 지금의 작업이 끝이 아닌, 새로운 물꼬를 트는 첫 삽이 되어 ‘어디를 찾아갔더니 지명이 바뀌었더라. 누구를 찾아갔더니 안 계시더라’라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개정해달라는 연락이 오길 기다린다고. 요즘 새로이 가족을 늘리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그녀는 이번 편에는 빠진 서울, 경기 지방을 위해 또다시 새로운 길을 떠날 계획이란다. 뭐든지 열심히 하고, 바지런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의욕을 북돋워주는, 그녀는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그런 활력소를 주는 사람이었다.

<여성조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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