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6만의 한글섬 탄생 눈 앞에... 한글세계화 첫걸음
한민족 외에 한글을 공식문자로 받아들인 첫 민족이 나오면서 과학적인 표음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으며, 한글세계화 프로젝트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8월 6일 훈민정음학회와 관련 학계 등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州) 부톤섬 바우바우시(市)는 지난 7월 21일부터 찌아찌아족(族) 밀집지역인 소라올리오 지구의 초등학생 40여명에게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를 나눠주고 주 4시간씩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어를 공용어나 제2외국어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문자가 없는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 토착어인 찌아찌아어(語)를 표기할 공식 문자로 한글을 도입한 것이다.
인구 6만여명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은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지만 문자가 없어 모어(母語) 교육을 못해 고유어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훈민정음학회 관계자들이 바우바우시를 찾아가 한글 채택을 건의함으로써 이뤄진 역사적인 쾌거였다.
작년 7월 바우바우시와 훈민정음학회 양측은 한글 보급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으며 학회가 이들을 위한 교과서를 제작, 보급함으로써 지난 7월 21일부터 한글교육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바하사 찌아찌아1'이란 제목의 교과서는 '부리'(쓰기)와 '뽀가우'(말하기), '바짜안'(읽기)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찌아찌아족의 한글 교육에 사용되고 있는 교재에는 찌아찌아족의 언어와 문화, 부톤섬의 역사와 사회, 지역 전통 설화 등의 내용과 함께 한국 전래동화인 '토끼전'도 들어 있다. 모든 텍스트는 우리가 쓰는 방식 그대로의 자음과 모음으로 표기돼 있는데, 한국에서는 사라진 ‘비읍 순경음(ㅸ)’을 쓰는 점이 눈에 띈다.
바우바우시는 9월 소라올리오 지구에 `한국센터' 건물을 착공하는 한편, 한글ㆍ한국어 교사를 양성해 한글 교육을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며, 아울러 지역 표지판에 로마자와 함께 한글을 병기하고 한글로 역사서와 민담집 등을 출간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시는 이와 더불어 인근 제6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140여명에게 매주 8시간씩 한국어 초급 교재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한글화 실험이 성공하게 된다면 이 섬은 세계 속의 '한글 섬'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이번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글채택은 한글학회 등이 오랫동안 추진해온 한글세계화 프로젝트의 첫 번째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자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민족문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한글이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에 진출한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에 한글의 세계화에도 가속이 붙을 전망이다.
한글 학계는 예전에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이나 태국, 네팔 오지의 소수민족에게 비공식적으로 한글을 전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작지만 값진 열매를 수확하면서 고무되어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전 세계와 공유하는 길인 동시에 '문맹 타파'라는 세종대왕의 창제 이념을 받들고 더욱 발전시키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한글 관련 학계의 공통적인 평가다. 세계적으로 문자를 갖지 못한 소수민족 언어가 대부분 사멸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례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전파할 경우 앞으로 세계 곳곳에 '한글마을'이 퍼져 나갈 가능성도 있다는 기대도 높여주고 있다.
찌아찌아족 한글 보급 사업을 추진한 훈민정음학회장 서울대 언어학과 김주원 교수는 "이번 사업으로 사라져가는 언어와 문화를 실제로 살려낸다면 인류 문화사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최종 목표는 지구상 최초의 한반도 밖 `한글마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라 5년 정도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처음부터 우호적으로 출발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 교수는 "소수민족의 언어는 제대로 된 교육 시스템이 없어 100년도 안 돼 대부분 사멸하고 만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우수한 글자인 한글이 다른 민족을 돕는 데 쓰일 수 있어 기쁘다"면서 한글은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 민족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자 없는 소수 민족어를 표기하기 위한 공식문자로서 한글의 진가는 이미 많은 외국인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 한국어와는 별개로 표음문자인 한글표기법만 배워서 자기 말을 읽고 쓰도록 하는데 있어서 한글은 영어나 다른 어떤 언어보다 기능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다.
지난 1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14회 세계한국어웅변대회에서 ‘사랑해요~, 한글’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해 외국인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인도네시아 내셔널대학의 눌리아 마기타(20·한국어학과 1)는 “우리 반 학생들도 일주일 만에, 뜻은 알지 못해도 한글을 읽고 썼다. 교수님은 한글이 표음문자라 배우기 쉽고, 한나절이면 배울 수 있다고 해 ‘아침글’이라 한다고 소개했다. 한글은 세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상에서 첫째가는 글”이라며 한글을 배웠을 때 놀라움을 설명했다.
특히 IT에 있어서 한글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음과 모음의 간단한 조합만으로 영어보다 쉽고 빠르게 통신할 수 있는 것이 IT시대 한글의 장점인 것이다. 고유 문자로는 휴대전화나 컴퓨터 자판 입력과 변환이 느려 알파벳을 응용하는 중국어나 일본어와는 달리 한글과 한국어는 21세기에 더욱 통용되는 첨단과학 언어여서 한국의 IT 강국 도약에 든든한 초석이 됐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한글의 해외 전파는 한국이 세계 속의 한국, 한국어가 세계어로 자리잡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04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 100년 내에 인류 언어의 90%는 새로운 통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소멸할 것이고, 세계는 11개의 지배적 언어로 종속될 것이라고 한 바 있는데, 한글이 11개의 지배적 언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한국어를 보급하는 것보다는 문자로서의 한글을 세계에 수출하는 것이 지름길일 것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실리도 함께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된다. 한글을 일단 문자로 사용한다면 우리나라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유례없는 새로운 방식의 국제협력을 통해 해당 지역과 깊은 유대가 형성되고 경제ㆍ사회ㆍ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가 늘면서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될 것이고 그 나라 말을 우리가 배우는 데도 어렵지 않으니 문자와로 서로 사맛게 되어 소통이 쉬워지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들 민족이 한글로 전통과 문화를 후세에 남긴다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선조의 본뜻과 같은 것이라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 이런 민족을 더 찾아 한글 보급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훈민정음학회도 이런 점을 감안해 애초 대상 민족을 선정할 때부터 한류 영향권에 있고 한국과의 경제교류를 원하는 지역에 주목했지만,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유역의 오로첸족(族)이나 태국 치앙마이의 라오족, 네팔 체팡족 등에게 한글을 전파하려 한 이전의 시도가 지역ㆍ중앙 정부나 현지 지도층의 협조 부족으로 실패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글화 실험을 계기로 앞으로 정부와 민간이 다각적인 협조 체제를 구축하되 한글관련 학회나 국제협력단 등 민간단체나 NGO가 중심이 되어 한글의 세계화를 꾸준히 전개해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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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민정음학회 이기남(李基南) 이사장
한글 보급하는 이기남 훈민정음학회 이사장
일제강점 때 교사 아버지 한글 가르치다 면직당해
건설업 승승장구하다가 어느날 문득 한글보급 작심
"세계 문자 박물관 세울 것"
1948년 6월 대구 중구 봉산동 대구초등학교 교정에 이 학교 6학년 50여명이 줄지어 섰다. 맨 앞줄 가운데 교장 선생님이 앉고, 그 옆에 교감과 담임 선생님이 앉았다. 담임교사는 눈매가 똘똘한 단발머리 소녀를 자기 옆에 앉혔다. 그 시절엔 6학년인데도 한글 읽기와 쓰기가 서툰 아이들이 많았다. 어려서 일본말만 배우다가 해방 후에야 한글을 익힌 탓이다. 소녀는 달랐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한글을 깨쳐 글을 술술 읽었다.
이 소녀가 훈민정음학회 이기남(李基南·75) 이사장이다. 이 이사장은 최근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族)이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할 문자로 한글을 채택하는 데 기여한 '숨은 공신'이다. 찌아찌아족 학생들을 위한 한글 교재 '바하사 찌아찌아1'을 펴낸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46) 교수는 "이번 일은 한글 세계화의 첫 성과"라며 "이 이사장의 재정적 도움이 없었다면 결실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이 한글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 원암(圓庵) 이규동(1905~1991) 선생 덕분이었다. 경북대 사범대 학장을 지낸 이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몰래 한글을 가르치다 면직(免職)당했다.
"아버지가 '비록 지금은 못 쓰지만 우리 말과 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신문지에 '가나다'를 함께 쓰면서 아버지에게 한글을 배웠지요. 해방이 왔을 때 열한 살이었는데, 우리 말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무척 들떴던 기억이 납니다."
이 이사장은 1958년 경북대 사범대 가정교육과를 졸업한 뒤, 모교 부속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60년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을 따라 상경한 그는 건설업으로 재산을 모은 뒤 1980년대 중반 컴퓨터로 관심을 돌렸다.
"지인이 갖고 있던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어요. 문서 작성 등의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는 이 기계가 널리 쓰일 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화면에 나오는 언어가 영어뿐이기에 한글도 쓸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전부터 애정을 가지고 있던 한글과 관련된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는 '신명시스템즈'라는 회사를 차리고, 매킨토시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한글 서체 'SM폰트'를 개발했다. 매킨토시는 출판·인쇄 분야에서 주로 쓰인다.
199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 이사장은 2002년 아버지의 호를 따서 '원암문화재단'을 설립했다. 한글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한글 세계화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을 개별적으로 후원했어요. 그분들을 만나러 네팔의 산간 동네, 인도네시아의 섬마을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성과를 얻지 못했지요. 열정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더군요. 언어학 전문가들과 힘을 합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고향 대구 지역의 학자들을 만나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한글을 보급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이미 한글과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회와 단체들이 있는데 굳이 또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겠냐"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 이사장은 2007년 서울대 언어학과 김주원(53) 교수를 찾아갔다. 김 교수가 호응했다. 김 교수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이 모였다. 그해 한글날(10월 9일) 훈민정음학회 창립식이 열렸다. 지난해에는 국제 학술대회도 열었다. 오는 10월에는 문자학을 다루는 국제 학술지 '스크립타(Scripta)' 창간호를 발간할 예정이다.
이 학회 총무이사를 맡은 서울대 이호영 교수는 "훈민정음학회는 '문자 없는 민족이 한글을 채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학회들과 구별된다"고 했다.
이 이사장이 '한글 전파'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문자가 있어야 언어와 문화가 소멸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한글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할 수 있게 되면 소수민족들이 자기네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을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며 "한글은 컴퓨터로 구현하기 편리한 데다 IT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 소수민족이 역사를 기록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에 알맞다"고 했다.
이 이사장의 다음 목표는 국내에 '세계 문자 박물관'을 세우는 것이다. 그는 "문자는 문화의 근간"이라며 "세계 문자의 기원을 밝힌 여러 자료를 집대성한 박물관을 만들면 전 세계 연구자들이 앞다퉈 한국을 찾지 않겠냐"고 했다.
"한국은 힘으로 다른 나라의 유물을 빼앗거나 막대한 돈으로 사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명확한 목적에 의해 창조된 문자를 가지고 있고요. 세계 문자 연구의 구심점이 될 박물관이 생긴다면, 한국이 최적지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