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둘을 모시고 경상도 고령(高靈)을 간다. 본관이 ‘고령 김씨’인데 시조 할아버지 산소를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부끄러움과 옛 조상들의 터전이 궁금해서이다.
우리 족보는 김알지(金閼智)로 시작한다. 시림(始林)에서 닭이 울어서 가보니 나무에 금빛 궤(櫃)가 걸려있고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자라며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성은 김(金)으로 하고 이름은 알지(閼智)로 하였다는 시조 설화이다. 그래서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였고 국호도 계림으로 썼다고 한다. ‘경주 김씨’의 시작이다.
족보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신라의 역대 왕들로 이어진다. 28세(世)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고려에 귀부(歸附)하였는데 그 다섯째 아드님이 석(錫)이신데 의성군으로 봉하여 ‘의성(義城) 김씨’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다시 11세(世) 인지(麟芝) 할아버지는 공민왕을 왕위찬탈의 음모로부터 구하는 큰 공을 세우자 임금은 할아버지를 고양(高陽-지금의 고령)부원군에 봉하고 남쪽에서 귀한 신하를 얻었다 하여 남득(南得)으로 사명(賜名)하니 드디어 우리 ‘고령 김씨’의 관조(貫祖)가 되신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21세 손(孫)이다. 할아버지는 목은(牧隱) 포은(圃隱) 등과 고려를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니 역부족으로 조선이 들어섰고 결국 멀리 유배되셨다. 시조 할아버지가 역적이 되셨으니 후손은 출사(出仕)가 어려웠다.
8세손 면(沔- 호 松菴) 할아버지에 이르러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았다. 송암 할아버지는 즉시 창의(倡義-의병을 일으킴)하여 낙동강 서쪽을 지켜 승전을 거듭하시니 나라에서 경상도 의병 도대장(都大將),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좌우에 곽재우, 정인홍 들을 부하 장수로 두어 싸웠다. 여러 전투에서 연전 연승하자 왜군은 김면을 몹시 두려워하여 조우하여 싸우기를 꺼렸다. 경상도 북부 지방을 제압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고 진격의 세를 꺾었다. 안타까운 것은 전쟁 중 여러 달 동안 의갑(衣甲)을 풀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미 나이가 많고 과로를 하게 되어 순사(殉死)하셨다. 돌아가시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다.
"다만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 (只知有國 不知有身)
할아버지는 많은 재산을 의병 활동에 기울이는 바람에 남은 가족들은 문전걸식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장에 머물며 의병 활동을 계속하여 결국 가족들을 채 한번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도암서원에 향사하고 윤선거가 행장을 쓰고 채제공이 신도비명을 썼다.
우리 고령 김씨는 번족하지 못하다. 조선초에 시조 할아버지가 유배를 갔고, 그런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누란위기에 처했을 때 온 몸을 바쳐 싸운 자랑스런 선조가 계셨다. 경상도 고령(高靈) 땅은 그런 옛 고향이다.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형님 둘을 모시고 고령의 산과 들을 누볐다. 몸과 마음을 촉촉히 적시며.....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도암서원. 경북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25
다만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
서원 정문 지심문
도암서원 본전
묵일당. 글씨가 좋다
여름 강당
사당과 서당
배롱나무가 아름답다
옛 도암서당
김면 장군 묘소
김면장군신도비. 정조가 세웠다
참배를 드리고 나서
임란창의 고령김씨 친족8의사 기념비
고령. 山高水靈한 옛 고향이다
대가야 지산동고분군
대가야박물관 앞에서
고령은 대가야 500년의 고장이다. 유네스코세계유산 지산동고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