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형산 ]
- 유불선 공존하는 중국 민간신앙의 성지
울창한 숲·웅장한 폭포·수많은 문화유적 안은 남악
- 형산은 중국 오악 중 산 좋고 물 맑아 수려하기가 제일이라 하여 남악독수(南岳獨秀)라 했다. 최고봉인 축융봉(1,290m)은 도교와 불교가 한 곳에 공존하고 있어 중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다. ‘도(道)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 ▲ 고대사 짚신.
- 청대의 시인 위원(魏源)은 형산을 그의 저서 <남악음(南岳吟)>에서 ‘항산(恒山)은 걷는 모습 같고, 태산(泰山)은 반석처럼 앉아 있는 것 같고, 화산(華山)은 거대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것 같고, 숭산(嵩山)은 누워 잠자는 것 같고, 오직 형산(衡山)만이 날아가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옛 제왕들은 기러기가 날아와 머무는 이곳 형산에서 사냥을 즐겼으며, 잡은 짐승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번 그림산행으로는 제왕들의 사냥터였으며, 유불선(儒佛仙)이 공존하고, 한편 서포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무대가 된 형산을 찾았다. 형산은 호남성 형산시에서 조금 떨어진 남악시에 위치해 있다, 호남성은 동정호수 남쪽에 있다 하여 호남성이라 했는데. 이 지역의 2대 명소가 바로 장가계와 형산이다. 장가계는 한국 사람이 즐겨 찾고, 형산은 중국 민간신앙의 성지로서 중국인이 많이 찾는다.
일출맞이를 하는 일관대(日觀臺)
아침 8시, 장수(樟樹=녹나무)가 고목이 되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길을 따라 심호흡하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형산 산문을 들어선다. “현재 도로를 보수공사 중이라 모든 차량을 통제하여 축융봉으로 오르는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수가 없다”는 검표소 직원의 말이다.
걸어서 축융봉까지는 4시간 넘게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공사 차량을 60위안에 흥정하여 축융봉으로 오르는 삭도(케이블카) 승차장까지 가파른 급경사를 공사장 인부들과 함께 올랐다.
- ▲ 수렴동의 봄소식.
- 다시 삭도(1인당 60위안)를 타고 남천문으로 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심한 폭설에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목이 부러져 하얀 뼈를 드러냈다. 아픈 상처의 흔적이 가슴을 여미게 한다. 얼마 전 장사(長沙)에 80년만의 폭설이 내렸다더니 피해가 대단하다.
삭도 정류장에서 축융봉까지는 왕복 1시간30분이면 된다 하여 걸어 오르기로 했다. 숲이 울창하고 전나무 숲길이 계속 이어지며 콘크리트 포장이 된 차도와 등산로가 자주 마주친다.
축융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壽嶽’(수악)이라 새겨진 화강암으로 된 좌판 위의 노점상들이 이른 아침부터 호객행위를 한다. 형산이 수악이기에 어느 곳을 가도 壽자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등산로에는 얼마 전에 내린 폭설로 인하여 꺾이고 넘어진 소나무와 고목들이 아직도 어지럽게 널려 있다.- 개운정(開雲亭)을 지나 고대사에 올랐다. 현판에 ‘高臺古寺’(고대고사)라 쓰여 있다. 시선이 고대사 빛바랜 창틀에 세워진 짚신에서 멈춘다. 스님이 출타했다가 방금 돌아와 젖은 짚신을 양지쪽 창틀에 걸어 놓았다.
- ▲ 묘와 형산.
- 일출맞이 장소인 상관일대(上觀日臺)의 등산로 표시를 따라 오르니 ‘禹王城’(우왕성)이라 새겨진 장정보다 큰 표지석이 나온다. 우왕이 백마를 잡아 천지신께 제사를 지내어 금간옥서(金簡玉書)를 얻어 치수에 성공한 후 ‘治水豊碑’(치수풍비)를 새겨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1,000년 전에 사라진 이 우왕의 비석이 최근 형산에서 발견되었다는 호남성 문화재 당국의 발표가 근래 이 지역의 화제다.
우왕성 표지석을 지나 황톳길을 좀더 오르니 남악측후소 앞마당 너럭바위에 ‘日觀臺’(일관대)라 새겨져 있다. 야외 공연장처럼 돌계단으로 관람석을 마련하여 놓은 것을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라 일출맞이를 하는지 짐작할 만하다.
축융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 입구의 표지석엔 커다랗게 축융봉이란 글씨와 안내문이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 널따란 돌계단길이 잘 정리되어 있다. 1급 보호구라는 표지석과 잘 어울린다.
빗자루로 계단길을 쓸고 있는 허리 굽은 노인은 두툼한 겨울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 남의 일에는 상관없이 자기 일에만 열심이다. 길옆에는 젖은 짚신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비화정(飛花亭)을 지나 축융봉으로 들어선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한낮에도 폭죽 소리가 요란하다. 축융이 불신이라서 향을 피우면 필히 폭죽을 터뜨려야 한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감사의 표시로 다시 이곳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1년 내내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춘절 기간에는 더욱 심하다고 한다.
- ▲ 축융봉과 축융전.
- 한낮에도 폭죽 소리 요란한 축융봉
축융봉이라 새겨진 폐방문을 들어서니 성제전에 축융대제(祝融大帝)가, 뒤편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축융전은 명대의 건물로서 유, 불, 도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을 찾은 중국인들은 유불도를 함께 공유하며 자기 신앙의 방식대로 세 곳을 돌며 소원을 비는 것에 익숙해 있다.
축융봉 서쪽 문을 나서니 망월대(望月臺)가 있다. 조망이 시원스럽다. 산세가 험준하지 않아 지리산 벽소령에서 달맞이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달 밝은 가을밤에 형산을 넘어온 기러기가 보름달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스케치를 한다.
이곳에 올라 동편을 보나 서편을 보나 어느 봉우리 하나 우뚝하여 모남이 없고, 어느 곳 하나 깎아지른 단애도 없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며, 크고 낮은 산릉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유불선이 하나가 되듯 산천 또한 그렇다. 장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느끼게 하는 산세를 갖추고 있다.
먼 산자락의 실낱같은 층층 다랑논은 도가의 욕심 없는 삶처럼 한결같이 평온하고 유순해 보인다. 그러나 속 깊은 도인처럼 큰 산의 계곡은 깊고 길기만 하다. 사방이 400km라고 하니 말이다.
삭도(케이블카) 정류장으로 다시 내려와 남천문 조사전으로 향한다. 조사전은 전통 도교사원이다. 도가와 도교는 분명 다르다. 도교는 노자의 도덕경을 기본으로 하여 장도릉(張道陵)이 세운 종교로서, 원시천존(元始天尊=玉皇上帝)을 모셔놓았다.
- ▲ 수렴동 가는 길의 촌가.
- 노자는 도가 어떤 의지나 목적을 가지고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스스로 존재하고 움직이도록 한다는 무위자연 사상을 제창했고,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 받아 발전시켰다. 장자는 사사로운 자아의식을 버리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를 것을 주장했다. 자연에 따름으로써 천지만물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노장사상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문학과 예술분야에 끼친 영향이 컸다.
우리는 조사전과 재신전을 둘러보고 장경전(藏經殿)으로 향했다. 콘크리트포장도로를 따라 힘들게 걷다가 12시30분이 되어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대불사가 내려다보이는 구멍가게에 앉아 컵라면을 하나씩 먹었다.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장경전으로 향한다. 멀리서 바라본 축융봉은 골이 깊고 우뚝하다. 한국의 야산 같지만 분명 그런 야산은 아니다. 아직도 곳곳에는 잔설이 하얀데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벌써 봄이 찾아왔다. 우리의 산천에서는 보지 못한, 산수유처럼 생긴 노란 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가까이 다가가 봄의 전령사에게 가만히 입맞춤을 한다.
- 장개석과 송미령이 머물렀다는 마경대
장경전이 점점 가까워지자 아름드리 고목들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게 솟아 있다. 장경전은 남악 4대 절경 중 하나로서 명태조 주원장이 하사한 대장경을 보관한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 ▲ 장경전 가는 길.
- 2시간을 걸어 장경전에 도착했다. 이구씨(거인산악회 등반대장)는 몹시 피곤한 듯 의자에 누워 잠깐의 춘몽에 빠진다. 나는 장경전 주위의 뛰어난 풍광에 푹 빠져 화심에 잠기는데, 늙은 요전수(搖錢樹·흔들면 돈이 떨어진다는 나무)와 연리지(連理枝·다른 뿌리에서 자라다가 가지가 붙은 두 나무) 같은 특이한 나무들이 어우러진 사이로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윤춘정(允春亭)에 반하여 살며시 스케치북을 꺼낸다.
스케치를 마치고 나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 대장도 잠깐의 춘몽에서 깨어나, 우리는 다시 천주봉으로 향했다. 천주봉 바로 아래 이정표에는 천주봉800m, 마경대 3,000m, 장경전 1,800m로 표시되어 있다. 장경전에서 벌써 1.8km를 걸어온 모양이다.
천주봉을 다녀온 뒤, 마경대로 하산하는 길이 지름길이라 하여 조금 내려가는데 폭설에 넘어진 나무들이 워낙 심하게 길을 막고 있어서 더 이상 내려가기가 불가능하다. 이구 대장이 위험하니 우회도로를 따라 내려가자고 한다. 우회도로는 8.5km나 되지만 할 수 없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차가 지나면 손을 들어보지만 반응이 없다. 이구 대장은 새 신발을 신고 온 게 잘못되어 발에 물집이 생겨 걷기가 몹시 불편한 모양이다.
장융산장을 지나 성제전 입구에서는 스님들이 넘어진 나무들을 치우다 말고 “절에 들렀다 가시라”며 인사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남태사 사리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우리는 그곳까지 가야 한다.
- ▲ 장경전에서 본 풍경.
- 명원산장(明苑山莊) 삼거리에서 이 대장은 걷는 게 힘들어 장개석과 송미령이 머물렀다는 마경대 탐방을 포기하고 하늘을 가린 울창한 전나무 숲길을 따라 금강사리탑이 있는 남태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전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한참 걷다보니 금강사리탑 이정표가 나온다. 남태사 금강사리탑은 중국 3대 진신사리탑 중 하나라고 한다. 탑의 8각형은 8방을 의미하고 9층은 가장 높음을 의미한다.
남태사에서 스케치를 마치고 오후 4시에 출발했다. 이곳에서 매표소 입구까지는 아직도 3시간30분은 걸어야 한다. 발의 통증 때문인지 이구 대장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빈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한참을 걷다가 봉고차를 만나 세우니 4명에 100위안을 달라 한다. 60위안에 흥정하여 매표소로 향했다.
다음날 유, 불, 도 사원이 함께 있는 남악대묘를 구경하고 ‘壽嶽衡山’(수악형산)이 새겨진 폐방에서 ‘중화만수대정’(万壽大鼎)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향로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만 가지의 서체로 만 자의 크고 작은 壽 자가 씌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수렴동으로 향했다. 수렴동 입구는 차(茶)나무로 된 가로수와 등산로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고, 벌써 홍매화와 백매화가 곱게 피었다. 용구호(龍口湖)에서 넘쳐흐르는 맑은 물은 폭포를 이루며 소리가 요란하다. 웅장한 협곡을 따라 오르니 암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옥빛으로 취민호(醉眠湖)를 물들이고, 화상(畵想)에 잠긴 화선(畵仙)의 마음을 유혹하는 듯 물소리를 호수 아래 감춘다.
- ▲ 남태사와 금강사리탑.
- 도선(道仙)처럼 발자국 소리도 죽여 가며 화강암 작은 산길을 따라 오르니 성진(양소유)이가 봄날 팔선녀와 몽환의 세계에 빠졌을 법한 너럭바위에 다다른다. 거기 비스듬히 걸터앉아 천하제일천을 스케치했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인 듯하다. 자기 바깥의 무엇엔가 깊이 몰두한다는 것은 유한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며, 그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그림을 아는 사람은 그림을 설명하고, 그림을 좋아 하는 사람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그림을 즐기는 사람은 거기에 그려진 대상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산수화를 즐기는 사람은 삶 속에서도 자연을 찾고, 꽃 그림을 즐기는 사람은 삶 속에서도 꽃을 즐겨 키운다. 그러한 사람은 삶 가운데서도 자연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천하제일천 폭포를 스케치하고 작은 등로를 따라 조금 더 오르니 복수호(福壽湖)에 이른다. 수렴동은 곳곳이 이렇게 작은 호수(?)와 폭포로 이루어져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물론 호수라 이름은 붙였지만 서호나 동명호에다 견줄 수야 있겠는가. 다만 중국인의 도가철학을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연못만한 곳도 호수로 느낄 수 있는 넉넉함이 그렇다.
복수호수 주변의 풍광이 무척 빼어나 복수휴간산장(福壽休閑山莊)에서 몇 날 묵으며 그림이나 그렸으면 좋겠다. 복수산장에서 산수맥주 한 잔을 마시고 호수에 비친 형산을 바라보려니, 김만중이 소설 구운몽의 무대를 삼은 그 깊은 뜻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 그림·글 곽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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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운정(開雲亭)을 지나 고대사에 올랐다. 현판에 ‘高臺古寺’(고대고사)라 쓰여 있다. 시선이 고대사 빛바랜 창틀에 세워진 짚신에서 멈춘다. 스님이 출타했다가 방금 돌아와 젖은 짚신을 양지쪽 창틀에 걸어 놓았다.